-101화-
“앉으라니까.”
“제가 후궁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
너무나도 간단하게 아니라고 대답해 버린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잠시 멍해졌다. 가을이 깊어졌지만 해는 아직 높이 떠 있었다. 호수의 방은 채광이 좋았다. 환한 햇살을 뒤로하고 선 카시어스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사님처럼 아름다운 그는 기분이 너무 좋아 보였다. 린델의 머릿속에는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놀리신 거예요?”
“그것도 아닌데.”
그것도 아니라는 카시어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린델은 초조한 기분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우선 앉아.”
“폐하.”
“카시어스라고 해.”
“황궁이니까, 폐하라고 칭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이젠 앉아.”
카시어스가 앉으라고 재촉했지만 린델은 고개를 저으며 서 있었다. 그러자 카시어스는 더 권하는 대신에, 린델과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왜 후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그야 폐하께서 그걸…… 그거라고 하셨잖아요.”
린델은 청혼이라는 단어를 차마 꺼내지 말하지 못하고 돌려 말했다.
“청혼이라고 왜 말을 못 해.”
“진짜 놀리시는 거죠?”
“널 후궁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
“쓸모는 따로 있다고도 하셨어요.”
“그 마음은 변치 않았어. 그래도 청혼은 할 거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린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후궁으로 삼지는 않을 건데, 청혼을 할 거라니.
뜻 모를 이야기라는 듯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똑똑하고 현명한 녀석인데 이럴 때만 눈치가 없었다. 후궁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함께하자고 속삭인다면 린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꽃이야 당장에 구할 수 있지만, 반지가 문제였다. 세공사에게 주문한 반지는 아직이었다. 린델이 제라르에게 다정히 구는 바람에 앞뒤 재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반지도 없이 청혼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언질을 주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반지를 주문했어.”
“?”
“무슨 뜻인지 천천히 생각해 봐.”
“감도 잡히지 않아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그것보다 필라무트 제전에서 사냥이 있을 예정인데, 참석하겠느냐?”
뜬금없는 카시어스의 제안에 린델은 눈을 크게 떴다. 사냥이라고 했다. 조금 전에 제라르가 언급한 필라무트의 제전에서 남부 반란 잔당의 습격이 있을 거라는 소리였다. 머릿속에서 청혼이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냥이라시면……. 제가 참석해도 되는 건가요?”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감당할 수 있다면.”
“물론입니다.”
“경고해 두지만, 무투장에 비할 바 없이 끔찍할 거야.”
린델이 필라무트 제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닐르의 외곽에 있는 가설 경기장에서 대규모 검투 대회가 열린다는 것 정도였다. 그곳에서 내란 세력의 잔당들을 처리한다면 분명 피가 흐를 것이다.
린델은 전쟁과 살육의 무서움을 책 속의 글로만 알고 있었다. 무투장의 그것과 비할 바가 없다는 것도 머리로만 이해했다. 카시어스의 말대로 사냥의 결과는 끔찍할 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몸이니, 끔찍하다고 피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폐하께서 계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당신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린델의 표정에는 각오와 믿음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귀에 단 말을 듣는군. 데스탄이 그 자리에 있을 거야. 주모자를 잡아내려면 그 멍청한 놈이 반역의 잔당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내버려 둬야 해. 가능하면 네 손으로 되갚아 주도록 할 테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는 없어. 복수를 하라고 종용하고는 중간에 가로채 버렸어. 사과하지는 않겠다. 다만 네게 양해를 구하마.”
데스탄의 이름이 언급되는 바람에 린델은 흠칫 놀랐다. 방 안에는 자신과 카시어스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데스탄의 이름에 반역이란 단어가 더해지자 누가 들을까 봐 덜컥 겁났다. 동시에 데스탄에게 복수를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막상 닥치면 망설일지 모른다. 그래도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데스탄의 심장에 칼을 꽂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린델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대의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은 압니다. 그저 그가……. 그의 죽음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린델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카시어스를 보았다. 대의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녀석이 기적적으로 도망친다면, 네가 잡을 기회를 주마.”
“그가 내부 동조자인가요?”
린델은 카시어스가 내부 동조자가 있다고 했던 걸 기억해 내고는 물었다.
“설마, 멍청하기 짝이 없는 그놈은 그저 광대에 불과해. 실질적인 주모자는 내 하나뿐인 누님이지.”
“?!”
“그녀 본인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 따위는 없는데, 사람들의 불온한 야망을 충동질해서 파국으로 이끄는 데 재주가 있어. 아주 고약한 취미야.”
미간을 살짝 찡그린 카시어스가 루미아나 대공주를 향해 냉혹하게 빈정거렸다. 사람 보는 눈이 매서운 데다 호불호가 명확한 카시어스가 할 수 있는 최악의 평이었다.
린델은 루미아나 대공주를 떠올렸다. 궁정 사교계에 군림하는 사람은 황태후였지만, 황궁 밖의 파티와 살롱은 루미아나 대공주가 쥐고 있다고 했다. 린델은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루미아나 대공주와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카시어스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에 경계하면서, 그저 화려하고 우아한 귀부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주모자란다.
쥴란 공작 부인이 아니라 루미아나 대공주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황친이었다. 거기다 쥴란 공작은 중앙 귀족의 거두였다. 그녀의 배신이 가져올 파장을 어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반란을 제대로 진압해 낸다면 황제인 카시어스의 힘이 커진다. 그건 오랜 역사가 증명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린델은 잠시 숨을 삼켰다.
“데스탄이 대공주님을 잡을 화살이군요.”
“흥, 화살은 무슨.”
“역모에 가담하면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니까요.”
“짐의 하나뿐인 누이께서는 냉혹한 뱀같이 아주 용의주도한 분이시지.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된 물증 하나 찾지 못했거든. 그녀가 내란의 잔당과 파슨 공작을 연결시켰어. 그리고 파슨 공작은 용병을 끌어들였고. 백여 명이 넘는 역당들이 관객들 사이에 섞여들 거야. 그네들은 역모가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고, 데스탄 역시 내 목을 칠 꿈을 꾸고 거기에 발을 들였어. 아무 쓸모없는 멍청이가 드디어 제 할 일은 찾은 거지.”
카시어스의 설명은 간단하고 운율까지 더해져 흥겹기까지 했다. 그러나 린델은 더 이상 데스탄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폐하. 무고한 이들이 휩쓸린다면 폐하의 명성에 큰 상처를 입을 겁니다.”
제전의 경기장이 무투 대회장과 규모가 비슷하다면 관객석에 자리하는 것은 대부분 닐르의 사람들일 터였다. 총과 칼이 난무할 상황에서 무고한 백성들이 죽고 다친다면 황제를 향해 비난이 쏟아질 게 뻔했다. 다급한 마음에 물어보자 카시어스가 긴장감 없이 웃었다.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이라고 불리는 것을 잊은 모양이지?”
“폐하께서 폭군이라고 불리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압니다.”
“이런, 폭군이라니. 확실히 너는 황제의 고문관이 어울리겠어. 이렇게 핵심을 찔러대니까. 걱정하지 마라. 제전에서는 반역도들만이 피를 흘릴 거야.”
파슨 공작이 알려준 계획을 듣자마자 카시어스는 속으로 욕을 했었다. 하지만 역함정을 파는 데 크게 고심하지는 않았다. 그저 보안 때문에 일의 진척이 느렸던 것이 제일 문제였다. 그래도 이제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비밀인데.”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냐. 간단하게 놈들의 무기를 무력화시켰어. 폭발 소리가 몇 번 있을 테지만, 안전할 거야. 할엔라드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나머지는 제전에서 직접 확인하도록 해.”
카시어스는 세부적인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자기 자랑을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린델이 긴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다행히 린델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카시어스에게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카시어스는 그 손을 기꺼이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 차이 때문에 카시어스가 앉아 있어도 시선의 높낮이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호수의 방은 채광이 좋았다. 린델은 햇살을 등지고 섰지만 얼굴은 밝게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못해 심각해 보였다.
“린델?”
“폐하께서는 늘 방법을 찾아내시죠.”
“그렇지.”
“잉그란 사제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겠습니다, 폐하.”
뜻밖의 말에 린델의 손을 매만지던 카시어스는 움직임을 멈췄다. 린델이 다음 말을 이었다.
“꼭 장례식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가까운 시일 내에 로벅에 가겠습니다. 예, 꼭 갈 겁니다. 폐하께서 계획하신 일이 끝나면요. 제 신변이 걱정되신다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세요.”
린델은 5일 동안 내내 생각한 것을 단숨에 말했다. 카시어스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주 어색한 일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잉그란에게는 꼭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데스탄이 이번 일로 사라져 버린다면 운신하는 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카시어스라면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의지와 믿음이 넘치는, 그리고 절박하기까지 한 린델의 하늘색 눈동자를 보며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린델은 화내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제 부탁을 거절한다면 물어뜯겠노라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얌전하고 순종적인 녀석이, 이럴 때만큼은 고집스럽기 짝이 없었다.
방법이야 늘 있었다. 간단했다. 그저 자신이 린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겁쟁이가 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새장에 가둬놓으면 뛰쳐나가고도 남을 녀석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마음 상하게 하는 것도 싫었다. 믿음과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