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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137)

-106화-

필라무트의 제전이 열릴 가설 경기장 뒤쪽에는 제전에 참석하는 이들과 귀족, 황족, 황제를 위한 천막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의 천막은 황궁의 화려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은 카시어스는 손가락 끝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신의 행동이 대기하고 있는 시종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초조함이 가시질 않았다.

귀빈을 초대한다는 명목으로 린델을 자신의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준비했다. 가장 높고 좋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도록 할 생각이었다.

제전은 이제 곧이었다. 그런데 아직 린델이 도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카시어스에게 디비티에인 린델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특히 린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온전히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린델이 있는 곳이 황궁 쪽인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가까워지지를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린델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시종을 보냈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운 나쁘게 마차 바퀴가 고장 난 것이기를 바라지만 느낌이 나빴다.

분명 어제는 웃으면서 헤어졌다. 허리를 잡고 끙끙거리는 린델의 뺨에 입맞춤을 하자, 오늘 밤에는 찾아오지 말라며 한소리 들었다. 보드라운 미소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마차 바퀴가 빠진 게 아니라 전복된 것일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제멋대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을 억지로 멈췄다. 마음 같아서는 제전이고 뭐고 린델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내전의 잔당들은 물론이고 분란을 조장하는 누이까지 한꺼번에 치워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예상되지 않았다. 의무도, 책임도 방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가장 무거운 족쇄는 자신의 발에 달려 있었다.

“폐하. 이제 곧 정오이옵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번도 늦은 적 없는 황제의 애인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제전에 늦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릴 뿐이었다.

“린델을 찾아라. 짐의 앞에 데려와.”

“명 받들겠습니다.”

카시어스는 시종장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나섰다. 그의 앞뒤로 근위시종이 따라붙었다.

단 하루를 위해 지어진 가설 경기장은 덩치가 컸다. 3층 높이의 거대한 경기장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웅성거림이 울렸다.

카시어스는 준비된 계단을 올랐다. 황제와 황족을 위해 준비된 특별 관람대에 이르자 호명관이 황제의 등장을 알렸다. 동시에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렸다. 경기장에 모인 관객들이, 특별 관람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들은 카시어스가 손을 들고 나팔 소리가 한 번 더 울린 후에야 제자리에 섰다.

카시어스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가설 경기장은 넓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1층 높이의 벽이 관객석과 무대를 구분했고, 관객석은 2층부터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 특별 관람대와 귀빈석은 직사각형의 짧은 쪽에 자리했다. 그리고 반대편은 전통에 따라 아무것도 없이 뚫려 있었다.

특별 관람대 양쪽으로 길게 쭉 뻗은 일반 관객석은 작년과 다름없이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찬 상태였다. 혼란도, 무질서도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분 후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터였다.

“폐하. 받으시옵소서.”

대사제가 다가와 필라무트 신의 상징인 해바라기를 내밀었다. 제전은 정오를 알리는 커다랗게 북이 울리고, 황제가 해바라기를 화로에 바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카시어스는 해바라기를 받아 들고는 천천히 화로 쪽으로 움직였다. 화로는 특별 관람대 앞쪽 한 단 아래에 따로 만든 제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등 뒤만 빼면 앞과 옆이 모두 노출되어 있었다. 그곳에 오로지 황제만이 섰다.

저격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만약을 위해 마법으로 벽을 만들어놓았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총알 몇 방이면 부서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법 갑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도들의 계획은 무모하고 단순했지만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계획 자체를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귀빈석에 자리한 타국의 귀빈과 귀족들의 목숨도 위험할 뻔했다. 제전은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도 제전에는 불참한 루미아나 대공주를 떠올린 카시어스는 속으로 욕했다. 속은 뒤틀렸지만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암늑대는 현명했다. 그녀의 어리석은 아들과 달리 말이다.

카시어스는 스치듯 데스탄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귀빈석도, 참가자들의 자리도 아닌, 일반 관객석에 서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이쪽을 힐끗힐끗거리는 모습이 웃겼다.

촌극도 이제 곧 끝이었다. 그저 린델이 곁에 없는 것이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둥.

해바라기를 든 카시어스가 화로 앞에 서자 곧이어 북이 울렸다. 그 순간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카시어스는 경기장 저편을 바라보았다. 객석이 없이 뚫린 곳 너머로 닐르의 시가지와 라드라비그가 보였다. 아직 저곳에 린델이 있었다.

넌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해.

카시어스는 당장에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북은 이미 울리기 시작했다. 서른세 번의 북이 울리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참아야 했다.

둥. 둥. 둥. 둥.

수십 개의 북이 커다랗게 울리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환호 속에 데스탄은 북소리를 세면서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금관을 머리에 쓴 황제는 여전히 휘황찬란했다.

데스탄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황제의 모습을 닐르의 시민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고고하게 서 있는 황제는 표적이 되기 딱 좋았다.

제전의 시작을 알리는 북은 모두 서른세 번이 울렸다. 서른세 번의 북이 울리고 황제가 해바라기를 화로에 던지는 순간이 절정이었다. 그 순간에 좌석 아래에 붙여놓은 소총을 집어 들고, 황제를 저격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고 여겨졌다. 아무리 괴물 같은 황제라고 하더라도 백여 발이 넘는 총알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을 상상하자 짜릿함이 번졌다. 동시에 원한이 새삼스럽게 치솟았다.

데스탄은 장갑을 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총기 폭발로 날아간 손가락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씹…….”

황제를 향한 욕설이 절로 나왔다. 그깟 남첩에게 장난을 좀 쳤다고 보복을 하다니, 옹졸한 놈이었다. 북관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손가락을 잃어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멍청한 형도 저주했다. 자기가 총기 관리를 하지 못해서 다친 주제에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피해망상에 휩싸여 복수를 한다고 날뛴 놈은 죽어나자빠져야 했다. 싸가지 없이 콧대 높은 황태녀도, 독사 같은 황태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빌어먹을 남첩은 꼭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데스탄은 이를 갈면서 린델을 찾았다. 특별 관람대와 귀빈석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상 시합을 구경 나온 걸 보면 근신은 풀렸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제전에는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빌어먹을 새끼가 테누안의 왕자랬다. 황제의 비열한 술수라고 하고 싶었지만, 남첩이 테누안의 공주와 쌍둥이처럼 닮긴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타국의 귀빈이라고 하더라도 환란 중에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법이었다.

거사를 성공한 후, 이대로 황궁으로 달려가서 놈의 목을 잘라버릴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테누안으로 귀환하는 길에 습격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황제만 이 자리에서 쓰러지면 된다. 그럼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반란군의 리더인 소른 백작은 최고의 자리를 약속해 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을 철없는 어린애로 취급하는 어머니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 아버지도 모두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비틀어진 욕망과 복수심에 데스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혼란 속에 휩쓸릴 무고한 백성들의 존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귀빈석에 자리하고 있는 타국의 왕족들이 죽기라도 한다면 제국의 외교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앞으로 있을 시아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위험한 다리를 건넜다. 폭군을 끌어내리고 난 다음에 있을 영광만을 생각했다.

데스탄은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소리의 숫자를 셌다. 헷갈릴 일은 없었다. 환호하는 관객들이 어느 순간부터 환호와 함께 숫자를 같이 세기 때문이었다.

스물다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데스탄은 허리를 숙여 좌석 밑에 숨겨놓은 소총을 손에 쥐었다. 가설 경기장을 지을 때 반란군의 일당들이 대거 일꾼으로 잠입하고 장인을 회유했기에 의자 디자인을 바꾸면서 소총을 숨기는 일이 순조로웠다고 들었다. 지금도 의자 밑에 소총이 숨겨져 있는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른. 소총을 좌석 밑에서 꺼내 들었다. 주위에는 데스탄처럼 자리에 주저앉은 이들이 여럿 보였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

서른하나. 소총을 쥐고 자리에 섰다. 아직 소총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개량을 거듭해도 소총은 단발밖에 쏘지 못했지만, 과거에 비해 사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불발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황제가 자랑하는 무기가 그의 목숨을 거둬갈 것이다.

서른둘. 소총을 들어 올려 황제를 조준했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이미 늦었다.

둥.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한 서른세 번째 북이 울렸다. 데스탄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대충 그리고, 얼른 마무리해.”

“에이, 그래도 그럴듯하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고. 우리가 오기 전에 끝내놔야 할 것 아냐.”

“그럼 네가 그려봐. 이게 쉬운지.”

“조용히 해. 들키면 끝장이야.”

“빨리해. 빨리.”

“재촉하지 말라니까.”

린델은 세 명의 남자의 대화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차가운 냉기가 오른쪽 뺨에 스미어 드는 것이 신경 쓰였다. 팔과 다리도 불편했다. 어깨도 단단한 것에 닿아 아팠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의아해하던 린델은 기억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시녀가 건네준 뱅쇼를 마시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린델은 소리 없이 발작하며 눈을 떴다. 한꺼번에 많은 정보가 린델의 머릿속을 스쳤다. 구겨지듯 누워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손목이 등 뒤에서 묶여 있었다. 발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그나마 눈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곳이 지하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방은 창문이 없는 돌벽이었고, 축축한 어둠을 횃불이 밝히고 있었다. 냉기와 습기, 쾌쾌한 먼지와 거미줄, 이끼 냄새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장소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납치를 당했다고 깨닫는 것과 동시에, 납치범이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가 의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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