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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37)

-107화-

장소는 황궁이었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납치하는 것이 더 귀찮고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품을 들여 납치한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있었다. 그래도 린델은 누가 자신을 납치했는지, 왜 살려두었는지 궁금했지만 길게 따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린델은 덜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지하실 안쪽에서는 남자 셋이 모여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셋 중에 한 명이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누워 있는 탓에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역한 피 냄새가 나는 것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자신의 발아래 쪽으로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저 위에도 납치범들의 동료들이 있을까 의심하고 있는데, 계단의 지지대에 새겨진 독수리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상징인 독수리는 이곳이 황궁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제국의 황궁인 라드라비그는 드넓었다. 외곽에는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건물이 몇몇 존재했다. 설마 반역도들이 황궁을 습격하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납치한 놈들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닥에 뭔가를 그리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린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했다. 우선은 손발이 자유로워야 했다. 다행히 손발을 묶은 것은 강철 수갑이 아니라 밧줄이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맹렬히 머리를 굴린 린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중에 밧줄을 풀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냈다.

불꽃이었다. 원소 마법 중에 불꽃은 화재 위험성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야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방어 마법 다음으로 가장 실용적인 것이었다. 불꽃이라면 밧줄을 태우기 충분했다.

린델은 정신을 집중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기는 하지만, 마법을 발동시키는 데는 소리 내어 주문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마력을 약속된 문양으로 배열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손끝에서 만들어진 작은 불꽃이 밧줄을 끊어낼 때까지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밧줄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지하실 내부를 밝히는 횃불과 촛불의 그을음과 역겨운 피 냄새 때문에 납치범들의 이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불꽃의 열기에 피부가 화끈거리는 것이 곤란했다. 밧줄이 너무 손목에 꽉 묶여 있는 것이 문제였다. 마력으로 만들어낸 불꽃을 제어할 수는 있었지만 직접적인 영향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린델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밧줄을 끊어야 했다.

“어,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남자 셋 중에 누군가 코를 킁킁거리며 한마디 하는 바람에 린델은 바짝 긴장했다.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피 냄새밖에 안 나거든.”

“횃불이랑 촛불이 타고 있잖아.”

“그래도 뭔가……. 응? 깼잖아.”

주위를 둘러보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린델은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남자 셋이 모두 린델을 보았다. 타는 냄새가 났다고 말했던 남자가 린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키는 컸지만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에 옷차림은 황궁의 일반 경비병의 복색이었다. 정말 경비병인지, 아니면 옷을 훔쳐 입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경비병 복장이라면 납치범들이 황궁을 당당히 돌아다닐 수 있을 만했다.

“깼어?”

입에 재갈이 물린 린델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직 밧줄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그 때 마침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린델의 눈에 들어왔다. 검을 보자마자 단숨에 계획이 세워졌다. 손이 자유롭게 된다면, 저 검을 빼앗아 남자에게 찔러 넣고, 그다음에 발목의 밧줄을 잘라 계단으로 도망친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확실히 예쁘장한 얼굴이긴 해. 이 정도면 고양이 거리에 내다 놓으면 잘 팔리겠는 걸. 레온, 진짜 한 번만 데리고 놀면 안 될까요?”

“?!”

린델은 남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 늦게 알아들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을 범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황제를 사로잡은 엉덩이가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하단 말입니다. 금방 끝낼게요. 네? 레온?”

남자의 말투는 아주 나긋나긋했지만 행동은 폭력적이었다. 그는 린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엄청난 고통에 린델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불꽃이 꺼져 버렸다.

“그만둬. 그랬다간 계획이 어그러진다고 몇 번이나 말해. 상처가 나면 안 돼.”

“잠깐 맛만 보면 돼요. 게다가 흑마법을 쓰다 걸리면, 죽든 살든 상관없이 바로 화형이잖습니까. 부검 같은 건 하지도 않을 건데. 뭐가 걱정이에요?”

린델은 남자가 언급한 단어에 숨이 막혔다. 흑마법, 화형, 부검. 자신을 그냥 납치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흑마법이란다. 린델은 바닥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야가 높아진 덕분에 바닥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왔다. 붉은 피로 된 커다란 마법진이었다. 주위에는 동물들의 사체도 몇 있었다. 촛불도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것이 그럴듯해 보였다.

젯타스시여.

린델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신을 찾았다. 납치범들이 무슨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지 금방 이해되었다.

고왕국 시대를 거치며 많은 마법사들이 사냥당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마법이 사라졌고, 특히 흑마법은 악마의 것으로 규정되어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리고 제국에서 흑마법사로 고발당하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화형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살아 있든, 죽은 시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화형이 아니었다. 흑마법은 황제를 퇴위시키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 되기도 했다. 역대 황제 중에 흑마법으로 퇴위한 황제가 둘 있었다. 모두 악마를 불러내어 불로불사를 거래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조작일 수도 있었다.

린델은 범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납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제가 아끼는 애인이 흑마술을 하다가 들키면 그건 그냥 스캔들이 아니었다.

즉, 자신이 카시어스를 몰락시킬 말이 될 거라는 소리였다.

린델은 반사적으로 루미아나 대공주를 떠올렸지만 확신하지 않았다. 카시어스에게는 적이 많았다. 린델은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집중해 불꽃을 만들어냈다. 절대로 카시어스의 짐이 될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이곳에 불이라도 질러야 했다.

“지금쯤이면 다들 사라진 걸 알아차렸을 거라고. 시간이 없어. 정오가 되기 전에 황궁을 나가지 못하면 끝장이야.”

레온이라는 자가 계속 남자를 제지했다. 그러자 남자가 콧김을 내뿜었다.

“에잇. 그럼 얼른 끝내든가요. 죽기 전에 한 번 제대로 쑤셔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어쭈, 노려보면 어쩌려고. 응? 잘난 마법을 써보든가. 응? 응? 재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겠지? 마법사들은 이렇게 병신 되기 쉽다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응?”

남자는 린델의 머리카락을 잡은 채 그대로 흔들었다. 린델은 고통을 참았다. 빗줄이 너무 굵은 것이, 타들어 가는 속도가 느린 것이 답답하고 억울할 지경이었다.

“독종이네. 소리도 안 내지르고. 이런 게 황제의 취향인가 봐. 응? 그런 거야?”

“그만 좀 해라.”

“뭐 어때요. 이 정도야 장난인데. 이런 게 왕자라니. 인생 참 불공평하다니까? 그렇지? 응? 왕자면 뭐 해. 이렇게 죽는데. 크크크. 그래도 가는 길은 외롭지 않을 거야. 널 길러준 놈이 저세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 나도 천국 가기는 글렀어. 사제를 죽였으니 말이야.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지겠지. 아아. 정말 인생은 불공평해.”

되묻는 걸 좋아하는 남자는 말이 많았다. 눈을 내리깔고 폭력과 폭언을 견디던 린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미끈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충격은 뒤늦게 찾아왔다. 이 남자가 말한 사제란 분명 잉그란이었다.

“이런 게 재미있다니까. 눈이 커졌네. 원수가 눈앞에 있으니 어때? 날 죽이고 싶어? 죽여봐. 죽이고 싶으면.”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한 손으로는 린델의 머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쥐어 얼굴을 후려쳤다. 눈앞에서 불꽃이 튈 만큼 아팠지만 린델은 소리 내지 않았다. 밧줄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린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조금만 더를 외쳤다.

“독종이야, 진짜.”

“아, 시끄러. 그만해. 딜로드.”

“이렇게라도 놀아야, 어? 어…….”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린델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딴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허리에 있는 검을 뽑아내 복부에 찔러 넣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끝까지 밀었다.

남자의 검은 예장용인 스몰 소드가 아니라 길이가 약간 짧은 세이버였다. 실전용 검은 무척이나 날카로워서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이, 새끼……가!”

남자는 린델의 머리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그래도 린델은 검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빼냈다.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남자는 피를 흘리는 배를 부여잡고 물러났다. 린델은 얼굴에 튄 핏방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목을 묶은 밧줄을 재빠르게 잘라내고는 자리에 섰다.

린델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제라르는 단순한 기술만을 연습시키지 않았다. 실전에서는 능숙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과 별개로 상황에 맞춰 어떻게 움직일지 냉정하게, 재빠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반복된 연습이 판단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겹도록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린델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한 대로 움직였다. 남자의 검을 빼앗아, 배를 찌르고, 밧줄을 잘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은 쿵쿵거렸고, 손도 다리도 떨렸지만 그 과정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지체 없이 마법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는 뒤로 물러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배를 부여잡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남자의 허리를 크게 베었다. 찌르는 것보다 베는 것이 더 치명적이었다. 한 번 더 비명을 지른 남자는 배를 움켜잡은 채 물러서다가 주저앉듯 뒤로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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