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37)

-108화-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젠장.”

레온이라는 남자가 칼을 뽑아 들고는 린델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쓰러진 남자보다 조금 작았지만 단단한 체형에 굳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검사의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귀족처럼 보였다.

린델은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잡았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레온이 휘두른 칼이 린델의 오른팔에 닿았지만 마법 갑옷에 의해 자신의 힘만큼 튕겨져 나갔다. 검을 놓친 레온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틈이 생겼다. 린델은 그 순간을 이용해 레온의 배를 베었다.

방패와 갑옷을 마스터하고 난 후부터 제라르와 몇 번이고 반복 연습했던 것이다. 상대의 허점을 만들어 역습하는 방법은 고수도 한 번에 꺼꾸러뜨릴 수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검이 깊게 베어 들어갔다.

레온은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허리를 붙잡은 자세가 휘청거렸다.

“마법이라니!”

레온이 사납게 외쳤지만 린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납치범들의 대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오가 되기 전에 황궁을 나서야 한다고 했었다. 분명 필라무트 제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우선은 그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상황을 차갑게 판단했지만 흥분이 차올라 머리가 멍해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서 쿵쿵 울렸다.

린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간격을 좁혀갔다. 그 순간에 오른쪽 어깨에 뭔가가 닿았다가 튕겨 나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던 남자가 단검을 던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대치하고 있던 레온이 단숨에 덮쳐들었다. 검이 통하지 않으니 힘으로 잡아 누를 모양새였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것보다 상대가 덤벼들 때는 품을 파고드는 게 좋다는 것이 떠올랐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약간 늦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 린델이 거리를 좁혀 몸으로 부딪힌 덕분에 레온이 제 힘에 튕겨져 나갔다.

린델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걷어차고는 주저앉은 레온의 목을 단숨에 그었다.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목을 붙잡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숨 쉴 틈도 없이 린델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진을 그리던 남자가 단검을 앞으로 내밀고는 벽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잉그란을 죽였다고 시시덕거리던 남자도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숨을 들썩이는 모양새로 미루어 아직 살아 있었지만 곧 죽을 터였다.

지금 이 상황은 현실감이 없었지만 그래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린델은 마지막 남은 남자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저리 가!”

키가 작고 왜소한 몸집의 중년 남자가 단검을 내밀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격한 움직임 끝에 크게 숨을 들썩인 린델은 마법 갑옷이 얼마나 버틸지 가늠했다. 갑옷의 단점은 언제 파쇄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중으로 마법을 걸 수도 없었다. 엉망이라고 생각하며 린델은 유일하게 살아 있는 남자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검을 겨누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살려주십시오.”

“뭐?”

“아는 거, 아는 거 다 말할 테니까. 사, 살, 살려주십시오. 제발.”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에서 남자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린델은 남자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했다. 단숨에 두 사람을 죽였다. 검도 튕겨냈다. 얼굴에는 피도 묻어 있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살려주겠어. 일곱 신께 맹세해.”

“정말,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말해. 누가 사주했지?”

“루미아나 대공주님입니다! 레온이 그녀에게서, 그녀에게서 명령을 받았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다 알았죠. 맞습니다! 다 알고말고요. 레온이 지 약혼녀를 죽였거든요. 그걸, 그걸 대공주가 알고는 레온을 협박하고 써먹었었습니다!”

남자는 고래고래 악을 쓰듯 소리쳤다.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럼, 저 남자가 잉그란 사제님을, 내 스승님을 죽였나?”

“예. 예. 맞습니다! 딜로드가, 딜로드 저 새끼가 죽였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망을 봤으니까. 아, 씹. 어쨌든 저 새끼가 죽인 거 맞습니다. 제가 죽인 거 아닙니다. 제가 죽인 거 아니라고요!”

“그것도 루미아나 대공주가 사주한 것이고?”

“아마, 아마 그럴 겁니다! 레온이 명령받는 건 그년뿐이니까요. 아, 씹,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린델이 저도 모르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살의에 휩싸인 린델은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 그가 죽어도 잉그란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분노가 들끓었다.

데스탄이 아니었다. 루미아나 대공주였다. 지금 당장 눈앞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원통할 정도였다.

“백장미 궁의 시종들은 어떻게 되었지?”

의식적으로 검을 고쳐 잡은 린델은 질문을 이었다. 남자는 백장미 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은 시간에 맞춰 지하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라는 명령만 받았다고만 했다. 레온과 딜로드가 린델을 이곳으로 데려와 마법진 위에 손목을 긋고 자살하는 것으로 꾸미려고 했는데, 남자가 마법진을 그리다가 몇 번이고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두서없는 남자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린델은 혀를 찼다. 루미아나 대공주의 치밀함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제전에서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낸다고 해도, 황궁으로 돌아온 카시어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흑마법을 시도하는 중에 죽은 애인의 시체였다.

아니, 루미아나 대공주의 계산대로라면 무고한 피가 잔뜩 흐른 후에 겨우 상황을 수습한 황제를 흑마법으로 몰락시키려는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마법진이 제때 그려졌다면, 자신이 깨어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는 건 다 말했습니다. 이제, 이제 보내주세요.”

남자가 지하실 입구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려면 증인이 필요했다.

“경비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

“뭐? 살려준다고 했잖습니까?!”

“어차피 도망가도 붙잡혀. 자수해서 사실대로 말해.”

“이, 이 새끼가 날 속였어!”

비명을 내지른 남자가 어떤 전조도 없이 단검을 던졌다. 린델은 방심하지 않고 있었지만 단검을 쳐내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갑옷이 단검을 막아냈다.

그렇게 린델이 놀라서 멈칫하는 사이에 남자가 지하실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재빠른 몸놀림에 혀를 찬 린델이 그를 따라가려고 막 몸을 돌리는데 또다시 뭔가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튕겨나가는 대신에 왼쪽 허벅지에 꽂혔다.

화끈한 고통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멈춰 서고 말았다. 남자도 자신이 한 일에 놀라 제자리에 섰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뿐이었다. 곧 정신을 차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몇 걸음 간신히 뒤따르던 린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멈춰 섰다. 남자는 셋뿐이라고 했지만 혹시나 같은 일당들이 위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마법 갑옷을 재빨리 다시 걸었다. 검을 단단히 쥔 채 잔뜩 긴장하고 있으려니 발소리만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린델은 한참 동안 아무 기척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실 내부는 엉망이었다.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남자 둘이 피 웅덩이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피로 그려진 마법진과 촛불이, 어질러진 종이들이 이 상황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린델은 눈을 감았다 떴다. 피 냄새와 죽음의 냄새가 그제야 맡아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도 어지러웠지만 누군가 보기 전에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증인을 놓쳤으니 마법진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자신이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뭐든 조심하는 게 좋았다. 아직 피가 완전히 굳지 않았다. 양동이에 있는 피를 바닥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아니면 한쪽에 있는 천으로 닦는 방법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법을 써서 태워도 되고, 물로 씻어도 된다.

열이 오른 머리로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렸지만 몸은 동상이라도 걸린 듯 뻣뻣해져 움직여주지 않았다.

한겨울, 신전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가 난간 끝에 겨우 매달렸던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발이 붕 뜨고 맥이 탁 풀렸다. 귀에서는 심장 뛰는 소리가 쾅쾅 울렸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아. 아.”

일부러 소리를 내고 가슴 위를 주먹으로 두드리고 나서야 죽었다 살아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도 현실이 되었다.

꽉 쥐고 있는 검의 손잡이에서 상대를 찌르고 벨 때의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울고 싶었다. 소리를 치고 싶었다. 쪼그려 앉고 싶었다. 카시어스가, 잉그란이 보고 싶었다.

린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숨을 골랐다. 충성도, 영광도 마냥 빛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황궁에서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될 줄은 몰랐다.

카시어스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황궁이라고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곳만큼 배신과 음모가 횡횡한 곳이 또 없었다.

운명이란 제멋대로란다.

잉그란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떠올리며 린델은 희미하게 웃었다. 운명은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는 신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두 발로 서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내일을 기약하고 복수를 꿈꿀 수 있었다.

복수라는 달콤한 단어에 뜨거운 피가 손끝까지 번져나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데스탄의, 루미아나 대공주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뜨거워진 눈을 깜빡인 린델은 뺨을 두드렸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