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린델은 제일 먼저 허벅지에 꽂힌 비수를 뽑아내고 손수건으로 상처를 단단히 묶었다. 그다음 이곳이 어딘지부터 확인했다. 위층은 반쯤 허물어진 낡은 별장처럼 보였다. 주위는 나무로 가득 둘러싸여 있었다. 린델은 황궁의 북서쪽에 끝에 작은 숲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대충 위치를 파악한 린델은 재빨리 뒤처리를 시작했다. 시신을 옮길 엄두는 내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부터 지워버렸다. 일부는 닦아내고, 나머지는 양동이에 담긴 피를 부어버렸다. 마법 책자와 종이, 촛불은 마법 불꽃으로 태웠다. 동물의 사체는 건물에서 먼 수풀에 집어 던졌다.
어느 정도 수습을 끝내고 나서야 린델은 나뭇잎과 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황궁은 화재에 민감했다. 연기가 나무 사이로 높이 치솟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지기와 경비병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그들은 린델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까부터 찾고 있었다고도 했다.
린델은 적당한 바위에 앉아 나이 든 숲지기에게 허벅지의 상처를 응급처치 받았다. 그 와중에 이드나카가 나타났다. 그는 울기 직전의 얼굴로 린델 앞에 섰다.
“무사하셨군요.”
“네. 백장미 궁의 사람들은 다 무사한가요? 애쉰 부인은요?”
린델은 이드나카를 보자마자 애쉰 부인의 안부부터 물었다. 먼저 도착한 경비병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들은 아는 게 없다고 했다.
다행히 이드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대부분 무사합니다. 그리고 시녀 한 명이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녀가 배신자겠군요.”
“예. 죄송하다는 짧은 유서를 남겼더군요. 배후나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린델리프 왕자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납치범은요?”
“납치범은 모두 셋인데……. 잠시만요.”
린델은 주위를 물렸다.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간의 일을 이야기했다.
“납치범은 모두 셋이고, 둘은 죽었어요. 한 명은 도망쳤고요. 죽은 둘은 저기 지하실에 있는데, 그들은 마법사인 저를 이용해서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울 계획이었어요.”
“터무니없는 누명……이라면.”
“아주 악의적인 추문이 될 만한 것이요. 대충 뒷정리를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잘 부탁해요. 그냥 납치당했다가 운 좋게 탈출했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누구의 어떤 추문이라고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이드나카는 린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마법사인 린델을 이용해서 만들 누명과 추문이란 하나밖에 없었다.
이드나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황궁 안에서, 황제의 애인이, 흑마법을 사용했다고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좀 더 거대한 음모였다.
이드나카가 필라무트의 제전에 참석할 린델을 모시러 백장미 궁에 도착했을 때는 납치에 대한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응접실까지 안내한 시녀가 린델이 조금 전에 뱅쇼를 엎지르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 늦을 거라고 했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장미 궁은 원래 시종이 적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늦으면 얼마를 더 기다리면 된다는 언질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움직였다. 궁을 뒤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 쓰러진 시종들이 발견되었다. 흔들어도 깨지 않는 시종들을 보며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엇보다 아무리 백장미 궁을 뒤져도 린델이 보이지 않았다. 이드나카를 응접실로 안내했던 시녀가 저장 창고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것이 확인되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정황상 린델은 납치된 것이었다. 그것도 황궁 한가운데서 말이다.
당장에 사람을 풀어 린델을 찾았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백장미 궁은 정문과 후문에서 오가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주위를 샅샅이 뒤지라고 명령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 책임자가 담쟁이덩굴로 가려진 쪽문에서 출입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알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드나카는 당장에 전령을 보내 황제에게 린델의 납치 사실을 알렸다. 시종장과 경비대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직접 린델을 찾아 움직였다.
쪽문에서 시작된 말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박석을 깔아놓은 황궁의 대로로 접어들면서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그때 이드나카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애인을 아끼다 못 해 세상을 다 줄 것처럼 굴었다. 테누안의 왕자라는 신분이 밝혀지고 나서도 귀빈 대접이라는 이유로 백장미 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궁정 사교계를 휩쓴 소문대로 린델이 후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 린델이 납치 후에 실종된다면, 혹은 시신이라도 발견된다면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쫓겨나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목이 잘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린델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린델은 살아 있었지만, 그는 거대한 음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흑마법이라면 황제가 퇴위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조심스럽고도 빠른 처리가 필요했다.
“잘 처리하겠습니다.”
“도망친 나머지 한 명은 키가 저보다 살짝 작고, 40대에, 수염은 없고, 머리는 짙은 갈색, 눈동자가 갈색인 것 같았고, 특색 없는 일꾼 복장을 하고 있었어요. 지하실에서 죽은 레온이라는 남자가 황궁에 출입하는 귀족 같았는데, 그의 주변 사람을 뒤지면 되겠죠. 배후가 누군지는 들었으니 다른 자백은 필요 없어요. 그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먼저예요.”
린델은 도망친 납치범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의지를 가지고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명령을 내리는 것도 모두 카시어스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린델은 망설이지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도 배제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배후를 잡으려면 그가 필요할 겁니다.”
“아마, 필요 없을 거예요. 그녀의 악행은 수두룩하니까…….”
린델은 문득 잉그란을 떠올렸다. 그를 죽이라고 명령한 자가 루미아나 대공주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잉그란의 죽음은 그녀가 저지른 수많은 죄업 중에 하나지만, 린델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린델리프 왕자님?”
“배후를 밝히는 것도 좋겠죠. 납치범을 잡으면 입에 재갈을 물려서 아무 말도 못 하게 해주세요. 그의 처우는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예. 황궁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실 겁니다.”
결국 린델은 타협했다. 도망친 납치범을 죽이라고 강하게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떤 가능성에 걸어보고 싶었다.
전해야 할 말을 다 전한 린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전에 참석하고 싶은데, 지금 출발해도 늦었겠죠?”
“필라무트 제전에 참석하시려고요? 지금 당장은 치료를 받고 쉬셔야 합니다.”
“늦더라도 가고 싶어서요.”
“천천히 가셔도 되니까, 우선은 치료부터 받으세요.”
이드나카는 당장에 제전에 가려는 린델을 말렸다. 굳이 지적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린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도 옷도 헝클어졌고, 피가 튄 얼굴의 왼쪽 눈가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멍이 될 모양새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왼쪽 허벅지에 감긴 붕대에서는 붉은 피가 비쳤다. 손목이 있는 부분은 검게 그을렸다.
심한 고초를 당한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절대 이대로 황제 앞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린델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대로 제전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드나카가 경비대장과 시종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백장미 궁으로 갔다.
애쉰 부인이 씩씩하게 린델을 반겨주었다. 그녀는 린델이 다친 것을 보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린델이 필라무트 제전에 가겠다고 하자 적극 말렸다. 린델의 다리에 난 상처는 꽤 깊었다. 세투아는 황제와 제전에 동행했기 때문에 당장에 상처를 말끔히 낫게 할 수가 없었다. 약을 바르고 쉬어야 한다는 애쉰 부인의 조언에도 린델은 고집을 부렸다.
씻고, 팔목과 다리를 붕대로 치료하고, 옷을 갈아입자 때마침 황제가 보낸 근위기사와 시종이 도착했다. 그들은 황제의 다급함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그리핀을 타고 왔다. 황제의 부름에도 애쉰 부인은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린델이 이겼다.
린델은 이드나카와 함께 그리핀에 올랐다. 황궁에서 필라무트 제전이 열리는 경기장까지는 마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리핀으로는 금방이었다. 경기장에 도착하자 시작을 알리는 북이 이미 울리고 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린델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랐다. 비수가 박혔던 왼쪽 허벅지가 욱신거리고 식은땀이 났지만 린델은 버텨냈다.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계단을 오르자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람대에 설 수 있었다.
카시어스는 화로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황제 폐하를 향해 달려갈 수 없었던 린델은 구석진 곳에 섰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부르는 바람에 그녀 옆에 자리하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린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썼다.
“늦은 이유가 있었군요.”
“네.”
“폐하께서 속상해하시겠어요.”
“송구합니다.”
린델은 그제야 카시어스와 마주한 순간을 상상했다. 출발하기 직전에 거울로 확인한 얼굴은 왼쪽 눈가가 부어올라 있는 상태였다. 카시어스가 보면 분명 화를 내고 걱정해 줄 것이다. 미안하면서도 따뜻한 물에라도 잠긴 듯 기분이 좋아졌다.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멋진 거였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웃으려는 것을 참고 있는데 빅토리아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계실 거예요.”
“?!”
“지금부터 걱정하시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 뒤돌아보실 수 없으니 더 애가 타실지도요.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요. 여차하면 제가 지켜드릴게요.”
빅토아가 개구쟁이처럼 싱긋 웃었다. 그럼에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지켜드린다는 말은 꽤나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북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함성이 치솟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북을 친 횟수를 외치기 시작했다.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에 린델은 객석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손에 소총이 쥐어져 있는 것도 보았다. 카시어스에게 미리 언질받지 않았더라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른하나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이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바로 옆에서 빅토리아가 속삭였다. 린델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는 미소로 그렇지 않냐며 소리 없이 말한 빅토리아는 다시 경기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린델은 그러지 못했다. 빅토리아를 기준으로 린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특별 관람대에 초대된 손님은 모두 황족과 황친들이었다. 빅토리아의 옆에 서 있을 정도면 아주 가깝다는 의미였다.
둥.
린델은 남자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의 옷자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총구는 분명히 빅토리아를 향해 있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린델은 빅토리아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잡아 당겼다.
둥.
서른세 번째 북소리와 함께 함성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