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탕. 타타탕. 탕. 탕탕.
백여 발이 넘는 총성이 세상을 찢어놓았다. 환호의 절정에 끼어든 사나운 총성에 사람들은 제각각 반응했다.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을 치고, 머리를 감싸며 몸을 숙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사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반역, 암살, 폭동, 역모, 내란. 8년 전, 닐르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던 시가전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어울리는 폭력적인 소란은 이어지지 않았다. 자욱한 화약 연기가 단숨에 흩어졌다. 경기장에 자리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제 옆에, 혹은 앞에, 건너편에, 맞은편에, 저 멀리에 소총을 쥐고 뻣뻣하게 서 있는 사내들뿐이었다.
총을 쏜 것은 그들이 확실한데, 어째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것인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마법이 아닐까 생각했을 때였다.
“적에게 죽음을!”
근위 기사단장인 시베르 백작이 커다랗게 외쳤다. 그러자 경기장 제일 꼭대기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2인 1조가 된 근위기사들은 소총을 쥐고 그대로 서 있는 역적들의 뒤에 자리 잡았다.
근위기사의 단검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역적의 목을 베고는, 목 뒤에서 검을 찔러 넣었다. 깊게 베인 목에서 피가 흐르는 만큼 여기저기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근위기사들의 행동은 단호했다. 그들은 숨이 끊어진 역적들을 끌어 관객석에서 경기장으로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붉은 피가 객석의 의자와 계단에 칠을 한 것처럼 길게 이어졌다.
1층 경기장에 시체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피가 흘러 경기장 바닥에 번져나갔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숨도 쉬지 못하고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카시어스는 이를 악물었다. 역함정은 성공했다. 소총마다 심어둔 마비 마법이 잘 먹혔다. 어떤 혼란도 없이 역당들을 일거에 잡아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카시어스는 초조함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조금 전, 그의 등 뒤에서 총성이 있었다. 빅토리아가 린델을 다급히 불렀다. 카시어스의 나이 많은 조카인 벌랜파드 후작도 거론되었다. 짧은 비명과 외침, 혼란 끝에 부산스러워졌다. 벌랜파드 후작이 빅토리아를 노렸고, 린델이 총에 맞았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린델의 심장 소리도, 숨결도 느낄 수 있었다. 린델이 괜찮다고 더듬더듬 말하는 것도 들렸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뭐가 괜찮은 거냐고 소리쳤다. 지혈을 해야 한다고, 세투아를 부르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빌어먹을.
카시어스는 속으로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심장이 얼어붙다 못해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린델이 다쳤는데도 그에게 달려가기는커녕, 뒤돌아볼 수도 없었다. 인내심을 긁어모아도 제어되지 않는 힘이 튀어나왔다. 여섯 개의 반지 중 하나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곧 맑은 소리를 내고 깨져 버렸다. 뒤이어 반지 하나가 더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카시어스는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력을 진정시켰다. 당장에 손에 쥔 해바라기를 내던지고는 린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황제였다. 제국을 지키겠노라고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위해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 전에 미치지도 않아야 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여기서 이성을 잃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복부에 박힌 총알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한 세투아는 치료를 위해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다급한 발소리가 재빠르게 멀어졌다. 카시어스는 린델의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아직 숨소리도, 심장 소리도 멀쩡히 들려왔다. 그의 존재도 선명했다. 그러나 린델의 생사는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제발.
신이 아니라 린델을 향해 애원한 카시어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기장에 백여 구가 넘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대부분 정리되고 이제 소총을 든 역적은 단 두 명뿐이었다. 그들은 각각 다섯 명의 근위기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카시어스는 그중에 한 명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총구를 들이댄 데스탄은 꼼짝도 못 하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데스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데스탄에게서 시선을 거둔 카시어스는 그대로 시베르 백작을 보고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시베르 백작이 한 번 더 외쳤다.
“신성한 제전을 어지럽힌 자가 여기 있다! 소른 백작, 그레이드. 쥴란 공작의 둘째 아들, 데스탄!”
소른 백작과 데스탄의 이름이 불리자 여기저기서 탄식과 헛숨이 튀어나왔다. 소른 백작은 남부 내전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과 함께 데스탄이 나란히 거론되자 귀빈석이 술렁거렸다.
근위기사들이 소른 백작과 데스탄이 쓰고 있는 후드를 벗겨 얼굴이 드러나게 했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황제를 조준한 소총을 든 채 굳어 있는 모습은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자비도 없었다. 앞선 역적들과 똑같이 목이 잘리고 검이 찔러 넣어졌다. 축 늘어진 시체는 객석에서 끌려 나와 경기장에 던져졌다. 비참한 최후였다.
모든 것이 끝난 살육의 현장은 전쟁의 참상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훌쩍이고, 토하고, 기절을 할 정도의 끔찍한 광경이었다.
카시어스는 공포로 얼룩진 시선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포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8년 전과 2년 전에 일어난 내전에서 귀족들은 저마다의 손익을 계산했을 뿐, 직접 전투에 참가하거나 참상을 목도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황제의 관을 넘보는 배신자에게는 비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둥. 둥. 둥.
짧게 북이 울렸다.
카시어스는 화로에 해바라기를 던져 넣었다.
“용맹한 전사를 가호하시는 필라무트 신이시여. 당신께 더운 피를 바칩니다.”
카시어스는 제전의 끝을 알리는 문구를 외쳤다. 붉은 피와 차가운 침묵이 흐르는 경기장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성호를 그으며 신을 찾았다.
다시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카시어스는 서른세 번의 북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섰다.
황친들의 절을 받고 관람대에 선 카시어스는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피를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빅토리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카시어스가 짐작한 대로 빅토리아를 대신해 린델이 총에 맞았다. 그리고 범인은 벌랜파드 후작이었다.
카시어스는 벌랜파드 후작을 보았다. 그는 근위기사들의 손에 억류되어 의자에 앉아 떨고 있었다. 격렬하게 저항한 듯 옷차림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벌랜파드 후작은 카시어스의 나이 많은 조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서른세 번째의 북소리에 맞춰 빅토리아를 노렸다. 그렇다는 것은 역당들과 사전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다는 뜻이다. 만약에 역당들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혼란 속에 빅토리아를 시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묻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8년 전, 카시어스를 적극 지지하며 목숨을 부지했던 그가 무슨 이유로 변심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런 놈에게 농락당할 뻔한 사실이 화가 날 뿐이었다.
“폐, 폐하. 자비를.”
고개를 숙인 채 자비를 바라는 벌랜파드 후작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당치도 않은 일을 벌인 주제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의 쓸모야 한 가지뿐이었다.
카시어스는 벌랜파드 후작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벌랜파드 후작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가 단숨에 빼내었다. 린델이 살아 있기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똑같이 총을 쏘지 않은 것은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숨죽여 황제의 처분을 지켜보고 있던 황친들을 다들 할 말을 잃었다. 황제는 소리치지도 화내지도 않았지만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벌랜파드 후작을 살려라. 탑에 가두고, 자해하지 못하도록 해. 빅토리아.”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검집에 넣은 카시어스는 빅토리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탑이란 죄를 지은 고귀한 귀족들을 가두는 감옥을 통칭했다. 벌랜파드 후작에게 자비를 베풀 뜻이 없음을 밝힌 카시어스는 린델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린델의 심장 소리는 아까부터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아픔을 참는 신음이 흘렀다. 살을 갈라내고 총알을 뽑아내고 있었다.
카시어스는 날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린델은 귀족들을 위해 준비된 휴게실 천막에 있었다. 활짝 열린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세투아와 마주 보고 있는 린델이 보였다. 치료는 끝난 듯했으나 린델의 몰골은 엉망이라는 말로 부족했다.
풀어 헤쳐진 상의와 셔츠는 피범벅이었다. 린델이 앉아 있는 긴 의자 주변으로는 피가 잔뜩 묻은 수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왼쪽 눈가는 주먹으로 얻어맞아 부어오른 상태였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었다. 그런데 멀쩡한 게 아니었다. 초췌한 얼굴을 보자니 억장이 무너지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벌랜파드 후작의 얼굴을 후려치러 가고 싶을 정도였다.
“린델.”
이름을 부르자 린델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멍한 눈을 한 번 깜빡거리더니 곧이어 환하게 웃었다.
카시어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달려가 린델을 안아 올렸다. 몸을 굳힌 린델이 다급하게 목에 팔을 감아왔다.
“폐하?”
“너는, 너는 도대체. 내 속을 얼마나 태울 거냐?”
잘했다고, 용감했노라고 치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원망에 가까운 한탄이었다.
빅토리아와 벌랜파드 후작은 나란히 서 있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총의 위력도 커졌다. 게다가 벌랜파드 후작이 소지한 권총은 최신형이었다. 총알이 주요 장기에 박혔다면 세투아가 손 쓸 새도 없이 즉사에 이를 수 있었다.
린델이 총에 맞은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신의 품에 굴러 떨어졌을 때는 환희를 느꼈다. 박살이 난 어깨를 확인하고도 그저 살리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품에 안고 있는데도 안타까워 덜덜 떨렸다. 그의 존재에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마력이 안정되는 것과 별개로 억눌러왔던 두려움 역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린델을 잃을 수도 있었다.
허무하게, 의무에 발이 묶여, 어떤 인사도 없이.
불길하고도 무서운 가정은 품 안에서 번지는 따뜻한 온기로도 희석되지 않았다.
“그냥, 반사적으로 그랬어요. 그가 총을 들고 있는 걸 봤는데. 그러니까…… 피한다고 했는데 피하지 못했어요. 괜찮아요. 세투아 님이 다 낫게 해주셨어요. 이제 멀쩡해요. 정말 치유 마법은 대단한 것 같아요. 얼른 배워야겠어요.”
린델은 흥분하거나 열이 나면 말이 많아지곤 했다. 그냥 반사적으로 그랬다고 속삭이는 린델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위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라고 했던 녀석이었다.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을 녀석에게 잔소리가 통할 리 없었다.
“잘했다고 하지 않아.”
“손을 잡아드릴까요?”
린델이 속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카시어스는 웃지도 못했다. 안아 올린 몸은 언제나처럼 가벼웠지만 왠지 여윈 것처럼 느껴졌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한 손으로 떠받치고는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들게 했다. 애처롭게 부어오른 왼쪽 눈가를 살짝 손끝으로 쓸었다.
“얼굴이 엉망이야.”
“세투아 님이 치료를 하려는데, 폐하께서. 음, 절 부르셨어요.”
“벌랜파드 후작이 이랬느냐?”
“아니요. 이건…… 이건 다른 사정이 있어요.”
“다른 사정?”
카시어스는 그제야 빅토리아가 린델을 보고는 늦은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