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리고 린델은 카시어스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면서 잠시 망설였다. 예상하지도 못한 납치와 필사의 탈출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미아나 대공주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알려야 했다.
그것 말고도 카시어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다. 황궁이라고 다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잉그란의 살해범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배후는 데스탄이 아니라 루미아나 대공주였다.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어떤 방법으로 역도들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는지도 궁금했다.
적어도 지하실에 있었던 특별한 상황에 대해 알리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물리라고 하려 했다. 그런데 몸 상태가 순식간에 나빠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어지러움에 린델은 인상을 썼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기절을 할 만도 했지만 타이밍이 나빴다. 평생을 기절 같은 건 모르고 살았는데, 올해만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가 없었다.
“자세한 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궁금하신 건 쉐렌 백작님께서 다 알고 계실 거예요.”
“린델?”
“기절할 것 같아요.”
힘없이 말한 린델은 몸을 늘어뜨리며 카시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뭐? 기절?”
“괜찮아요.”
린델은 화들짝 놀라는 카시어스를 향해 괜찮다고 속삭였다. 겨우 기절하는 것뿐이었다. 괜찮지 않을 건 하나도 없었다.
“눈 뜰 때, 옆에 있어주세요.”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부끄러운 부탁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렸을 때, 카시어스가 옆에 있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눈을 감았다.
“루미아나 대공주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폐현을 하겠다고 소동을 피워서, 부득이하게 기절을 시켰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아. 용서는 무슨. 어디 한 군데 상하더라도 살아서 도망치지 못하게만 해. 누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분이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대신들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 목이 잘 붙어 있는데 뭐가 걱정이라고 모였을까.”
“초유의 사태이니까요. 다들 전전긍긍합니다.”
“그대도 그런가?”
“당연히 그렇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 불안을 잠재워 주십시오.”
“좀 더 불안에 떠는 것도 좋겠지. 지금까지 편히 지내왔잖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이런 소란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폐하.”
린델은 카시어스를 간절히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재상인 시아크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루미아나 대공주를 기절시켜야 했다는 이는 근위 기사단장인 시베르 백작이었다.
재상은 심각한데 황제는 너무 유쾌했다. 왠지 재상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눈을 깜빡거렸다. 자애의 여신, 하르멜라께서 백합을 들고 내려다보고 계셨다.
잠에서 깨어나던 멍한 머리가 주어진 정보를 재빠르게 조합했다. 이곳이 황제의 침실이라는 것과 재상과 근위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린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커다란 침대 아래쪽은 정면의 햇살을 가리기 위해 커다란 황금 독수리가 직조된 붉은색 천개가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왼쪽과 오른쪽은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침대 왼쪽 발치에는 등을 지고 앉은 카이어스가, 그 너머에는 나란히 선 재상과 근위 기사단장이 보였다. 예상대로 카시어스가 침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난감함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린델은 대기하고 있던 근위 기사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근엄하던 기사단장이 흠칫 놀라더니 곧 인자하게 웃으며 천천히 시선을 피해버렸다. 진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난감하고 민망한 순간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 지금이 최고였다.
“곧 찾아갈 테니, 조용히 눈치 보고 있으라고 해.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한 카시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깼으면 불러야지.”
활짝 웃으며 다정하게 타박한 카시어스가 린델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재상과 근위 기사단장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카시어스가 뺨에 입맞춤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둔 린델은 어떤 항의를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황제의 침실은 공적인 공간이었고, 얼마든지 업무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제 폐하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왜 울상이야? 아직 아파? 얼굴은 괜찮아졌는데. 허벅지 상처도 다 나았어.”
꿀이 묻어날 것 같은 다정함이었지만 린델은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시면 안 돼요.”
“뭘?”
“백장미 궁에 데려다주셨어야죠.”
“옆에 있어달라고 했잖아.”
“이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다들 뭐라 생각하겠어요.”
눈 떴을 때 옆에 있어달라고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제는 제법 뻔뻔해져서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뭐라 생각하기는. 내가 너를 끔찍이 아낀다고 하겠지.”
“제게 조심해야 한다고 하신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럼 정정하지. 눈에 안 보이는 게 싫어서 그랬어. 크게 다친 데다 정신을 잃었으니,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
“그게…….”
린델은 뭐라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로는 카시어스를 이길 수가 없었다. 다친 데다 쓰러진 것도 맞아서 더더욱 그랬다. 그렇긴 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려니 카시어스가 시종을 불렀다.
근위시종에게서 물수건을 받아 든 카시어스가 린델의 손과 얼굴을 닦아주었다. 린델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사양했지만 카시어스는 강경했다. 결국 린델은 근위시종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황제의 시중을 받게 되었다.
피 묻은 셔츠와 바지도 모두 갈아입혀진 상태였고, 몸도 깨끗해졌다. 그 와중에 다시 손과 얼굴을 닦고 셔츠를 갈아입었다. 단추를 잠가주는 것도 역시나 카시어스였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의 시중을 받게 되니, 황공합니다.”
“자랑하고 다니도록 해.”
“제가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다들 부러워해 줄 겁니다.”
린델은 덤덤히 말했다. 황제의 시중을 받았다는 소문은 이 자리에 있는 근위시종들이 알아서 퍼트려줄 터였다. 그래도 황제 암살을 시도한 반역 사건이 일어난 직후니까 그다지 이슈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사이에 소매 단추까지 모두 잠근 카시어스가 셔츠를 바로잡아주었다.
“데스탄이 죽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린델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로 들었다. 복부에 총알이 박힌 채로 이동을 하면서도 착잡한 기분을 가눌 수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친 납치범도 잡았고.”
“?!!”
“황궁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숨어 있던 것을 경비병이 찾아냈지.”
납치범을 잡았다고 말한 카시어스가 시종에게서 받은 베스트를 들어 보였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내민 베스트에 팔을 꿰었다.
“그를 어떻게 하겠느냐?”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그가 배후를 말할 겁니다. 제 스승님을 죽이라고 한 자가 누구인지도요.”
“이미 말했다.”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금으로 된 단추를 잠그는 손은 멈춤이 없었다.
“네. 이번에 알았는데, 황궁이라고 안전하지는 않더라고요.”
“아픈 곳을 짚었어. 그래, 내 잘못이지.”
“아무리 폐하시라도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널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 무섭지는 않더냐?”
셔츠, 베스트, 그리고 다음은 크라바트였다. 크라바트를 린델의 목에 건 카시어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린델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시어스의 황금색 눈을 바라보며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여기서 죽으면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긴장하고 떨었다. 죽음을 각오했을 때는 모든 것이 또렷하면서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주 무서웠죠.”
복잡한 심정을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시어스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었어요. 사실 현실감도 없었고요. 그래도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무서웠죠.”
“용감했어.”
“제라르 경 덕분이에요. 위기 상황에 대비해 혹독하게 연습시켜 주셨거든요. 아, 폐하께서 검을 배우라고 명하신 게 먼저네요.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예요.”
“웃을 일이 아니야, 린델.”
“이렇게 폐하와 마주하고 있으니 좋은 걸요. 웃어도 돼요.”
웃어도 된다. 살아 있으니까 말이다.
“너무 태평해.”
“운이 좋았어요.”
타박을 해도 운이 좋다고 웃어버리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따라 웃지 못했다. 린델의 납치범은 고문을 당하기도 전에 온갖 것을 다 털어놓았다. 린델의 납치 정황도, 흑마법을 이용한 계획도, 잉그란의 살해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배후가 루미아나 대공주라는 것까지 말이다.
카시어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첩자를 심어 정보를 모으고, 반역도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역함정을 팠고, 공들여 세운 계획이 새어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그러나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기에 발밑에 드리워진 그늘을 모두 보지 못했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황궁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상대가 린델이면 아무래도 용납이 되질 않았다.
카시어스는 냉정하게 분노했지만 그것을 린델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루미아나 대공주에게 남은 운명은 비참한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화를 낼 게 아니라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신이 그를 데려가기 전까지,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재단할 것이다.
“훈장을 주겠다.”
“훈장이요?”
“황제 암살을 막아냈으니 치하를 받아야지.”
“저는 황태녀 마마를 구하려고 한 걸요. 그리고 전 제국민이 아닌데 훈장을 받을 수 있나요?”
“물론이지.”
린델의 신분이 밝혀지고 난 후에, 카시어스는 법학자들을 닦달했다. 대법전에서 관련된 조항을 모두 찾아냈다. 문제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황태녀 마마를 구하려고 한 거였어요.”
“황제를 구했다고 하는 게 나아.”
“그래도…….”
“그래도 돼.”
대놓고 사기를 치겠다고 선언한 카시어스는 린델의 목에 크라바트를 매어주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의 옷을 입히면서 계속 질문을 던져 납치 당시의 정황을 알아냈다. 손을 묶은 밧줄을 불꽃 마법으로 끊어냈다는 소리에는 혀를 찼다. 그리고 역당들을 마비 마법으로 굳어버리게 만들었다고도 알려주었다. 아주 정교한 작업이라 늙은 마법사들이 과로로 쓰러졌다는 이야기에 린델은 웃지도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크라바트를 매고, 바지를 갈아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고, 코트를 입고, 망토도 걸쳤다. 목걸이와 반지까지도 카시어스가 직접 골라 걸어주고 꿰어주었다. 머리는 묶지 않았지만, 허리에 예장용 레이피어까지 차게 되었다.
백장미 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린델은 완벽한 예복 차림에 의문을 가졌다. 예장용 레이피어까지 패용할 정도라면 공식적인 자리에 설 거라는 소리였다.
“어디에 가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딱히 가야 할 곳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럼요?”
카시어스는 대답 대신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시종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침실에는 단둘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