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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37)

-112화-

“이쪽으로.”

린델은 카시어스가 부르는 대로 침실 한가운데 섰다. 커다란 발코니 창으로 햇살이 넘쳐나서 주위가 환했다. 린델은 앞에 선 카시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

“봄꽃을 시샘하는 북풍이여, 이 속삭임을 전해주오. 오늘 만나, 내일 헤어져, 영원히 이별하더라도. 나의 마음은 당신의 것이라고.”

카시어스가 뜬금없이 연시를 읊었다. 언젠가 잉그란이 린델에게 말했던 연시의 일부였다.

“연시네요.”

“그날, 네가 말했었지.”

린델은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 떠올리고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당장 내일 카시어스와 만날 수 없다면, 욕심을 내서 그의 구애에 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주 어설프게 고백했던 기억이 있었다.

카시어스가 그때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면, 후회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신가요?”

“네게 청혼할 거야, 린델.”

이틀 전에 이어 다시 청혼이라는 단어를 들은 린델은 당황하는 대신에 의아해했다.

“후궁으로 삼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죠.”

“맞아. 정식으로 결혼할 테니까. 대신전에서 식을 올릴 거야.”

린델은 자신이 들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인상을 썼다. 대신전에서 식을 올린다는 것은 결혼식을 말했다.

“결혼식이요?”

“그래.”

“저는 남자인 걸요.”

린델은 대신전에서 올리는 결혼식의 의미보다, 남자인 자신이 황제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진지했다.

“법전의 내용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외우고 있는 유능한 법관조차 인지를 못 하고 있는 건데, 대법전에서는 결혼이란 두 사람이 신들 앞에서 평생을 함께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 너무 당연한 것이라서 성별을 적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루엘른 2세가 그의 배우자와 결혼을 할 수 있었지.”

카시어스의 구체적인 설명에 린델은 제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루엘른 2세가 두 번째로 황후로 맞이한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린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카시어스가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자마자 소리가 되어 나왔다.

“말도 안 됩니다.”

“된다니까.”

“그분은, 클라우스 황후께서는 영웅이셨습니다. 환란에서 수만 명의 백성을 구한 영웅이요. 게다가 그분께서 황후가 되신 것은 와병 중인 황제를 대신해 군을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잠시만. 설마, 제가…… 제가.”

그제야 린델은 카시어스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는 황제였다. 황제와 결혼을 하면 황후가 된다. 지금껏 그와 관련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을 대입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충격에 어지럽던 머리가 텅텅 비어버렸다.

세상에. 황후라니.

린델은 아득함을 느끼며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그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카시어스는 진심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뭘?”

“폐하. 그러시면 안 돼요.”

린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카시어스를 말렸다. 카시어스와 나란히 서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지, 황후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심장이 덜덜 떨리다 못해 멈출 것 같았다.

“그렇게 겁먹으면, 내가 너를 괴롭히는 것 같잖아.”

“괴롭히는 거 맞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 없어요. 제 쓸모는 따로 있다면서요. 전쟁에 참전할 건데. 아니, 그것보다 폐하의 명예에 누가 될 겁니다.”

겨우 충격에서 벗어난 린델은 조금 더 단호하게 대답했다. 놀란 얼굴을 하고도 비장하게 안 된다고 하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린델다워서 좋았다. 명예에 누가 된다며 진지하게 걱정하는 모습에 기쁘기까지 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고 난 후에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씨디프 공작의 양자가 된 후, 황궁과 마탑에서 자리를 잡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단번에 어그러졌다.

테누안의 왕자인 린델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보호를 받는 피후견인도, 그리고 충성을 맹세한 마법사도 아니었다.

하나씩 다시 준비하기로 했다. 마상 시합장에서 제라르의 옷을 벗기려던 녀석에게 조금씩 암시를 주면서,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여기게끔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깨달았다. 어쩌면 그럴 기회조차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신이 내리는 운명이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운 법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린델을 만났던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는 것도 가능했다.

“당장에 황후가 되라는 건 아니야. 약혼부터 해. 그게 순서니까.”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왜냐고 물어봐.”

“말 돌리지 마세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당연히 궁금하죠. 진짜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린델은 무례와 정중함의 경계선에서 따지듯이 물었다. 자신은 심각한데 카시어스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왠지 얄밉기까지 했다. 그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내가 네 것이 되고 싶어서 그래.”

“?”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네게 아무런 권리가 없어, 린델. 신의와 애정이 있지만, 그것뿐이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마. 때로는 영원의 맹세보다 한 장의 서류가 더 무거운 법이지. 붙잡혀 준다고 했잖아. 움켜쥐어.”

붙잡혀 준다고 한 카시어스는 팔을 뻗어 린델의 손을 잡았다. 린델은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손을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카시어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혼인 증명서가 가진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카시어스는 선례를 들었지만 그건 정말 특수한 경우였다. 아무리 자신이 테누안의 왕자라는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클라우스 황후와 자신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애인뿐이라면 언젠가 카시어스가 했던 말대로 역사서에 한 줄로 거론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카시어스는 위대한 황제였다. 내전을 진압하고 제국을 안정시켰다. 앞으로 있을 시아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분명 승리할 것이다. 빛나고 영광스러워야 할 그의 이름에 자신은 오욕이 될 뿐이다.

“바란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일이 나중에 어떤 기록으로 남을지 생각하셔야죠. 폐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거라고요. 저 때문에요. 제가 그런 오욕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절절히 설득했는데도 불구하고 카시어스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명예보다는 내 행복이 더 중요하지.”

“명예도 중요합니다.”

“나는 너와 미래를 꿈꾸고 있어. 그래. 너와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 말이야.”

미래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린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래를 함께하자고 하는 것은 분명한 청혼이었다.

“썩 괜찮은 배우자가 될 자신이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 카시어스가 린델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믿음이 어린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어스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다정한 몸짓에 린델은 울고 싶어졌다.

그는 분명 좋은 배우자가 될 것이다. 신의 있고, 성실하며, 다정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흔들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제가 뭐요.”

“울 것처럼 보여.”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린델은 괜히 울컥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안 울어요.”

“꼭 황후가 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퇴위하고 떠날 테니까. 그러나 약혼만큼은 해야겠어. 린델. 나는 평생을 네 애인으로만 있지 않을 거야. 도망치지 마. 정면으로 부딪혀.”

카시어스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도 단호했다. 강렬한 눈빛은 언제나처럼 린델을 몰아붙였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감정만으로 황제의 배우자가 될 수는 없었다. 약혼뿐이라고는 하지만 그 의미는 황후나 다름없었다. 황후는 지독하게 정치적인 자리였다. 테누안의 왕자라고 해도 제국 내에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마탑 출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논란 속에 물어뜯길 것이다. 그런데도 정면으로 부딪히란다.

린델은 혼란함을 가누지 못하고 카시어스를 보았다. 그는 사람을 고민의 구렁텅이로 몰아붙이는 데 능숙했다. 지금껏 그런 그에게 휘둘려왔다. 난감하고, 어쩔 줄 몰랐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네 것이 되고 싶다는, 미래를 함께하자는 고백에 흔들렸다.

지금껏 그와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었다. 그저 그의 옆에 있기만을 바랐다. 충성과 영광을 바치고, 나란히 서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그다음이 있단다. 붙잡으란다.

당연한 것처럼 명령을 내리고 따르라는 카시어스가 미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렇게 몰아붙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기뻤다.

잉그란을 잃었다. 가족을 찾았다. 미칠 것 같은 슬픔과 얼떨떨한 행복에서,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언제나 카시어스를 생각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붙잡고 싶었다. 움켜쥐고 싶었다.

카시어스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들어 아까부터 붙잡고 있던 린델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주었다. 사파이어가 박힌 아름다운 반지는 린델의 손에 잘 어울렸다.

“나는 네게 매혹되었어. 네가 아니면 안 돼. 그러니 이 순간부터 신이 숨결을 거두어갈 마지막까지 함께할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린델리프 이브라드히.”

린델은 고전적인 청혼을 하는 카시어스를 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는 거절을 당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린델은 반지와 카시어스를 한 번 더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도망치지 않겠노라 맹세하면서 린델은 카시어스에서 손을 빼낸 다음, 반지도 뽑아 들었다. 환하게 웃던 카시어스가 얼굴을 설핏 굳혔다.

“도망치지 않겠다면서, 반지는 왜 빼는 거야?”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주십시오.”

완벽주의자인 린델은 스스로에게 합격점을 주지 못했다. 많은 것이 부족했다. 신분이야 괜찮다지만, 카시어스에게 어울리는 공적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을 하려면 나름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냉큼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었다.

린델다운 거절의 말에 카시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어울리니까 한다고 해.”

“그렇지 않은 거 아시잖아요.”

“모르겠는걸. 반지는 왜 자꾸 돌려주려고 하는 거야. 뭘 하려거든 약혼부터 하고 해.”

“시간을 주세요.”

린델은 다시 한 번 간청했다. 이번에는 카시어스가 린델과 반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문한 반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린델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던 반지 중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 반지 때문이라고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카시어스는 여기서 더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린델은 심각한 결정을 내렸을 때처럼 비장하기만 했다. 고집쟁이의 마음을 돌리기란 어려웠다.

차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던 카시어스는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마음은 주되 몸은 주지 않겠다고 한 녀석은,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 하고는 기다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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