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애를 태우는 재주를 타고난 것 같았다.
린델이 시간을 달라고 하는 이유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린델의 최선일 것이다. 그는 매번 같은 말을 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말이다,
노력하고 변하겠다는 것은 오롯한 애정이다. 청혼은 거절했으면서 고백을 해버리는 녀석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시어스는 도망가지도 않고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린델을 향해 웃었다.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언젠가는 응하겠다는 의미잖아.”
“그렇……죠.”
따지자면 언젠가는 청혼을 수락하겠다는 의미가 맞았기 때문에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차겠다?”
“그렇게 되네요.”
“차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익숙해질 게 아니야.”
카시어스가 차였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린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자기 욕심만 부린 것 같아 미안해졌다.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비끼는데 카시어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차였군. 다들 좋아할 거야. 감히 황제를 찬 너에게 찬사를 보내겠지.”
“제가 폐하를 찬 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여긴 아무도 없는 걸요.”
“내가 있잖아.”
“?”
린델은 고개를 들어 카시어스를 보았다. 그는 아주 심술궂게 웃고 있었다.
“청혼을 했는데 차였으니, 속이 타다 못해 미칠 것 같다고 말하고 다닐 거야.”
“폐하.”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앓아누울지도 몰라.”
자기 입으로 차인 사실을 말하고 다니다 못해 앓아누워 버린다고 공언한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기가 막혔다. 몇 시간 전에 역도들을 남김없이 죽여버린 황제께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시면 더 좋아라 할 겁니다.”
“그렇겠지. 반지는 선물이야. 가져.”
“받을 수 없습니다.”
“고지식하기는.”
가볍게 혀를 찬 카시어스는 세 번까지 권하지는 않았다. 린델에게서 반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탁자에 놓인 장미를 한 송이 가져왔다. 노란색이 아니라 황금색에 가까운 장미는 아직 봉오리였다. 카시어스가 봉오리 끝에 숨결을 불어 넣자 꽃잎이 천천히 벌어져 곧 만개했다.
린델은 그것이 자신이 테누안의 왕자임을 증명했던 숨결의 장미와 같은 것임을 알아보았다.
“미리 주는 훈장이지.”
카시어스는 정말로 장미가 훈장이라도 된 것처럼 코트 깃에 달아주었다.
“이건…….”
“신뢰와 헌신의 증거. 그리고 네가 내 것이라는 뜻이기도 해.”
란델은 숨결의 장미가 가지는 의미를 떠올리고는 난감해졌다. 숨결의 장미는 대대로 일국의 지배자를 위한 상징이었다.
할엔라드의 경우 황궁의 근위시종들이 가슴에 금장미로 된 브로치를 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했다. 카시어스의 말대로 신뢰와 헌신의 증거인 숨결의 장미는 신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때때로 황제의 청혼에도 쓰이곤 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슴에 달린 장미는 이중의 의미였다.
이미 황제의 청혼을 한 번 거절한 린델에게는 부담스러운 선물이었다.
“장미를 떼어내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어.”
웃으면서 협박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막 장미를 잡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알고 있다. 아름다운 사파이어 반지도, 황금의 장미도 모두 카시어스의 마음이었다. 확인받고 싶어서,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이 귀엽다.
“제게 무거운 것을 주시는군요.”
“네 사람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라는 말에 린델은 웃지 못했다. 이제는 자신 한 몸을 건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더 많이 가진 만큼 지킬 것도 많아졌다.
“손을 잡아주세요.”
린델이 오른손을 내밀자 카시어스가 웃으면서 잡아주었다. 린델은 자신의 손을 감싼 커다란 손을 꽉 쥐었다.
“당신께 충성과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네게 더없는 부와 명예를 주겠다.”
“먼 곳으로 가더라도, 반드시 당신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단단한 반석이 되어 기다리지 않겠다. 네가 어디를 가든 나도 갈 것이다.”
한참 열심히 고백하고 있는데 카시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딴지를 걸었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혼자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아.”
카시어스가 웃으면서 손을 꽉 잡아왔다. 어디를 가든 함께할 것이라는 남자 때문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이 올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린델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도, 평생을 함께하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운명은 제멋대로였다.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고치 않은 죽음이 다가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끝이 올 때까지는 그를 사랑할 것이다.
카시어스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그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니 말이다.
마음을 담은 고백이었지만 그다지 멋지지는 못했다. 그걸 대변하듯 카시어스가 애매하게 웃었다.
“너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카시어스가 린델을 와락 끌어안았다. 린델 역시 천천히 카시어스의 등에 팔을 둘렀다. 커다란 남자는 자신의 팔에 다 안기지 않았다. 조금 더 커져서 그를 꽉 끌어안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다 뭉개질 거예요.”
너무 꽉 끌어안겨서 코트 깃에 꽂힌 장미가 뭉개졌을 것 같았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짜, 진짜 너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시어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한탄했다. 같은 말을 들은 것이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그것이 고백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내가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백은 다시 들어도 가슴이 간지럽다.
“끌어안고 계시네요.”
린델은 언젠가 했던 말을 덤덤하게 돌려주었다.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카시어스는 린델의 고백에 답하며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이 올 때까지 사랑하겠단다.
이 순간에도 현실적이기만 한 애인 때문에 속이 탔다. 귀에 단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녀석이 영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지막이 오지 않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카시어스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린델에게 황후라는 무거운 족쇄를 달아주겠노라 다짐하며 좀 더 깊이 품에 안았다.
린델 역시 카시어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행복을 꿈꾸는 연인을 황금빛 햇살이 감싸 안았다.
End.
에필로그
황궁 한쪽에 자리한 특별 법정 내부의 분위기는 몹시도 흉흉했다. 정확히는 황궁 전체가 살얼음 위를 걷는 듯 날이 서 있었다. 이를 대변하듯 재판의 주인공인 루미아나 대공주를 향한 시선은 날카롭고도 따가웠다.
루미아나 대공주의 혐의는 반역 공모였다.
열흘 전, 필라무트 제전에서 반역도들이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 제국민에게 반역이나 내전은 익숙한 단어였다. 8년 전에 닐르에서 일어난 시가전도, 그리고 2년 전에 있었던 남부 내전도 모두 일상생활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열흘 전에 제전에서 일어난 참사는 그 궤를 달리했다. 백여 명이 넘는 이들이 황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황제는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필라무트 제전의 경기장은 문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전쟁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끔찍한 처형이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 황제의 과감함과 잔인함을 숨죽여 떠들어댔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이 깊은 이들은 황제의 다음 행보에 조심스럽게 관심을 보였다.
반역 첩보를 입수한 황제는 조용히 사태를 수습하는 대신에, 함정을 만들어 역당들을 일망타진했다. 피 묻은 칼을 손에 쥔 황제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변란 후,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저택에 억류되었다. 그리고 역당의 수장이라고 알려진 벌랜파드 후작에 대한 재판이 사흘 후에 있었다.
벌랜파드 후작은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남부 내전의 잔당들과 손잡고 네세리님의 용병을 고용해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고 자백했다. 몰래 총을 소지해 황제를 직접 노렸다는 것도 숨김없이 말하면서 남은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 거기까지는 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벌랜파드 후작이 공모자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후작이 언급한 공모자들은 모두 이름 있는 귀족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루미아나 대공주였다.
사실 그녀는 참사 첫날부터 자택에서 근신 중이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인 데스탄이 현장에서 황제에게 총구를 겨눈 역당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발뺌할 수도 없는 것이 데스탄의 얼굴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았다. 루미아나 대공주도,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쥴란 공작도 방종한 둘째 아들의 단독 행동이라고 항변하며 자비를 구했다. 그들의 주장을 황제가 받아들인다면 그저 근신만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벌랜파드 후작이 루미아나 대공주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폭로해 버렸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단숨에 역모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하나 남은 형제의 배신에 황제는 대단히 분노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관련자가 누구든 용서치 않을 거라는 발언을 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시작부터 심각한 사건이 점점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귀족 사회는 혈연으로 연결된 집단이었다. 먼 친인척의 범죄로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특히 루미아나 대공주는 우아한 귀부인이라는 신분과 달리 사람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기를 좋아했다. 그녀와 사적으로 공적으로 얽힌 이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특별 법정의 방청석은 빈틈없이 가득 찼다.
결코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 속에 루미아나 대공주는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화려한 차림을 한 그녀는 자신의 혐의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루미아나 대공주는 낭패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제전에서 황제 시해가 실패하거나, 린델에게 흑마법사라는 의혹을 심지 못할 경우를 대비했었다. 만약을 위해 자신에게 의혹이 쏟아질 만한 것들을 모두 차단했다. 그러나 데스탄이 역당들 무리와 함께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벌랜파드 후작이 자신을 공모자라고 지목한 것에는 당황했다.
반역과 관련된 큰 그림을 그리기는 했다. 하지만 벌랜파드 후작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었다. 그녀가 충동질한 것은 동부의 파슨 공작뿐이다. 계획대로라면 그가 이번에 죽은 소른 백작과 함께 반역의 수장으로 지목되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루미아나 대공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벌랜파드 후작이 자신을 지목한 것이 황제의 계책이라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모든 것이 불리했다. 그나마 다행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증언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 없었다. 특히 그것이 반역죄라면 말이다.
그렇게 저마다의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에 재판 시간이 다가왔다. 법정의 정문이 닫히고 호명관이 황제의 등장을 알렸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십시오.”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안쪽 문이 열리면서 근위기사와 근위시종들이 벽을 둘러쌌다. 삼엄한 경비 속에 황제가 재판관의 자리에 섰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명령에 모든 사람이 예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착석하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짐의 하나 남은 형제인 쥴란 공작 부인의 혐의는 무겁고도 무도한 것이다. 시시비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 어느 누구도 억울함이 없도록 하겠다. 재판을 시작하라.”
황제가 공정한 판결을 약속하면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무청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루미아나 대공주의 혐의를 읊었다.
“쥴란 공작 부인은 필라무트 제전에서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던 벌랜파드 후작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반란을 공모했습니다. 그 외, 쥴란 공작 부인의 혐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쥴란 공작의 암살 미수, 첫째 아들인 니콜라스의 암살 미수와 살해, 테누안의 린델리프 왕자의 납치와 살해 미수, 마지막으로는 로벅의 사제인 잉그란의 살해입니다.”
법무청 장관이 루미아나 대공주의 혐의를 밝히자 법정 안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미아나 대공주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계획된 덫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섯 가지 혐의에는 사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벌랜파드 후작에게 자금을 지원한 적이 없었다. 첫째 아들인 니콜라스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편인 쥴란 공작의 암살을 의뢰한 적은 있었다. 황제의 남첩과 그의 스승이라는 사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 빌어먹을 남첩을 건드린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이전에 데스탄을 북관으로 보낸 것처럼 말이다.
겨우 남첩에 눈이 멀어 이딴 일을 벌이고 있는 황제가 미친 것 같았다.
“쥴란 공작 부인. 혐의를 인정하는가?”
“저는 결백합니다. 모든 혐의를 부인합니다.”
황제의 추궁에 자리에서 일어난 루미아나 대공주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용의주도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조금도 남겨두지 않았다. 파슨 공작이 아니라면 반역과 연결될 만한 것은 없었다. 5년 전에 남편을 죽이라고 의뢰했던 암살자 길드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황제의 남첩을 납치했던 루카브 남작은 죽었다고 들었다. 그가 부리는 놈들 중에 누가 잡혔든 자신에 대해 알 리 없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증거도, 증인도 없다고 확신했다. 황제가 무엇을 주장하든 반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루미아나 대공주는 황제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 리 없었다.
“결백하다면, 쥴란 공작 부인은 다음을 해명하라.”
황제가 엄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특별 법정에서 황제는 판결을 내리는 판관이자, 죄인을 심문하는 위관이었다.
그리고 황제 개인으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혈이기도 했다. 그의 복수는 철저하고도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