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이건, 이건 조작이야! 이럴 리 없어. 조작된 거라고!”
루미아나 대공주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작이라고 외쳤다.
재판관석에 앉은 카시어스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대부분의 증거는 조작된 게 맞았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물질적인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필적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신 루미아나 대공주가 끼고 다니는 반지로 된 인장을 빼돌리는 것이 까다로웠다.
벌랜파드 후작을 회유하는 것은 손쉬웠다. 그는 남부 내란 잔당의 수장인 소른 백작과 결탁한 인물이었다. 빅토리아에게 총구를 겨누었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 그의 죄는 확정적이었다. 카시어스는 그에게 루미아나 대공주를 공범으로 끌어들인다면 가족의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거래했다. 그의 등장으로 루미아나 대공주를 엮는 것이 더욱 쉬워졌다.
그렇게 증거와 증언이 조작된 것을 아는 소수의 사람 외에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미아나 대공주의 인장이 찍힌 종이에는 악행을 명령하는 글이 그녀의 필적으로 적혀 있었다. 린델을 비롯한 열 명이 넘는 증인들 역시 루미아나 대공주를 배후로 지목했다. 가장 결정적인 증인은 쥴란 공작이었다. 그는 아내인 루미아나 대공주의 범죄 사실을 알아내고는 증거를 모아 황제에게 고발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부인을 고발하고도 아들을 단속하지 못했다며 죄를 빌었다.
하지만 루미아나 대공주는 끝까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이 조작되었다고, 거짓말이라고 소리쳤다.
“너무하십니다! 하나 남은 형제를 거짓 증거로 사지에 보내실 겁니까? 일곱 신께 맹세코 저기 있는 저것들은 제가 적은 게 아닙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 어찌 그걸 모르십니까?!”
마지막 변론을 하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카시어스는 물론이고 루미아나 공주 본인을 포함한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애석한 일이다. 고귀한 핏줄은 이은 황친이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끝까지 부인을 하다니. 다시 묻겠다. 쥴란 공작 부인. 죄를 인정하는가?”
“몇 번이나 말하겠습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카시어스는 결백하다고 외치는 루미아나 대공주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죄를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아마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를 대변하듯 루미아나 대공주의 눈빛은 누군가를 찔러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루미아나 대공주가 아니라 증인석에 앉아 있는 린델에게 향해 있었다.
루미아나 대공주의 처우를 두고 린델과 이견이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는 대화를 끊었다. 카시어스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목을 자를 생각이었다. 자비 따위는 개나 주라는 것이 자신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린델은 여론을 의식해야 한다고 했다.
‘황제께서 하나 남은 형제마저 죽인다면 여론이 나빠질 겁니다. 멀리 유배를 보내세요.’
‘어림도 없는 소리. 누님은 여러 사람들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어. 그녀가 목숨을 부지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기하려고 할 거야. 그리고 그건 나와 빅토리아에게 해악이 되는 일이지. 그걸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여론이 나쁩니다. 폐하께서는 폭군으로 불려서는 안 됩니다.’
폭군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린델은 단호했고, 그래서 카시어스는 조금 기뻤다. 필라무트 제전에서의 일방적인 살육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황제가 철혈을 넘어 폭군이라는 이야기가 슬슬 퍼지고 있다는 것을 카시어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너를 납치하고 죽이려고 했던, 그것도 모자라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그녀를 살려두라고? 그녀는 네 스승을 죽였어.’
‘그래도 그게 옳습니다.’
‘아니, 네가 틀렸다. 나는 그녀의 목을 자를 것이다.’
‘폐하.’
린델의 부름에도 루미아나 대공주를 살려둘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 카시어스는 그대로 뒤를 돌아 백장미 궁을 빠져나왔다.
그게 어젯밤의 일이었다. 사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싸울 만한 일이 아니었다. 린델을 잘 설득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당한 것만큼 돌려주지 못하는 녀석이 답답했다. 린델은 루미아나 대공주가 잉그란을 죽인 배후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카시어스는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이 옳았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증인석에 앉아 있는 린델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린델의 옷차림은 그의 결의를 나타내듯 장식이 없는 검은색 예복이었다. 어찌 보면 장례식 복장에 더 가까웠다.
사흘 전, 로벅에서 잉그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사건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카시어스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덩달아 린델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도 린델은 아무 불평을 하지 않았다. 카시어스가 언젠가 같이 가겠노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인내심 강하고 마음이 곧은 녀석이었다. 단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유연해지고 때가 타야 했다. 담금질은 자신의 몫이었다.
“판결을 내리겠다.”
황제의 냉엄한 선언에 법정 안의 사람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쥴란 공작 부인, 루미아나 에스터 아레트스마. 그대는 황제를 시해하려는 역당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반역죄를 지었다. 인륜을 어기며 남편과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 테누안의 왕자를 위협해 나라 간의 친교에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무고한 사제를 죽여 신전의 권위를 훼손했다. 쥴란 공작 부인이 쌓은 악행은 죽음으로서도 갚지 못할 것이나, 짐의 하나 남은 형제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쥴란 공작 부인이 가진 황친으로서의 이름과 권리를 박탈하고 베트에륀으로 유배를 보낸다. 여생 동안 반성하고 참회하며 살기를 바란다.”
엄준하게 죄를 나열하던 황제가 마지막에 자비를 베풀었다. 파격적인 선처에 특별 법정 안이 술렁거렸다. 반역죄는 죽음으로 갚는 법이었다. 황친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말대로 하나 남은 형제를 위한 마음이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황제가 루미아나 대공주를 정말로 아껴서가 아니라 여론을 의식해 배려했다는 것을 닳고 닳은 귀족들은 한 번에 이해했다.
전략적인 자비에 루미아나 대공주는 황제가 자신을 끝까지 농락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론을 의식한 게 아니었다. 베트에륀은 황제령이긴 했지만, 제국의 북동쪽 끝에 있는 오지였다.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남은 생을 사는 것은 죽음보다 끔찍했다.
“반역죄는 죽음뿐입니다. 폐하, 죽이십시오! 저는 결백하게 죽겠습니다!”
“대법전의 규약에 따라 오늘 법정의 기록은 책자로 엮어 배포한다. 이것으로 폐정하겠다.”
황제는 루미아나 대공주를 무시하며 단호하게 폐정을 선언했다.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루미아나 대공주는 경비병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황제 역시 근위기사와 시종들과 함께 안쪽 문을 통해 퇴정했다.
특별 법정에서 황제의 사실인 튤립의 방까지는 금방이었다.
“린델을 불러라.”
카시어스의 명령에 시종장의 눈짓을 받은 근위시종이 사라졌다. 카시어스가 사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린델이 나타났다.
“기다리지 말고 거기 앉아.”
의자에 앉아서 황제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일종의 특혜였다. 린델은 거절하는 대신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카시어스가 옷을 갈아입고 근위시종을 모두 내보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마지막에 시종장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카시어스가 입을 열었다.
“웃지를 않는군. 네 뜻대로 쥴란 공작 부인을 살렸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얼굴이 왜 그래?”
카시어스의 지적에 린델은 얼굴을 굳혔다. 기분이 복잡했다. 최고의 복수를 했는데도 마냥 기쁘지 않았다.
루미나아 대공주의 혐의가 다섯 가지로 늘어난 것은 카시어스의 의지였다. 린델의 납치 사건과 잉그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 루미아나 대공주의 죄악을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통쾌하기는커녕 서글프기까지 했다. 루미아나 대공주에게 복수를 한다고 해서 잉그란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루미아나 대공주의 목을 자를 거라고 단언한 카시어스가 마음을 바꾸었다. 그것이 기쁜 것인지 아닌지도 애매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회한에 휩싸였지만, 린델은 애써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그냥…… 기분이 복잡해서요.”
“더 복잡해질 거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너는 이것으로 만족하느냐?”
“예.”
린델의 복수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죄를 모두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생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네 복수는 너무 얌전해. 난 쥴란 공작 부인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폐하?”
어젯밤과 다름없는 말에 린델은 카시어스를 불렀다. 그는 이미 유배를 명했다.
“그녀는 반성하지도, 참회하지도 않을 거야. 억울함에 몸을 뒤틀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겠지. 린델리프. 짐의 사자가 되어 쥴란 공작 부인을 배웅하면서, 짐의 선물을 그녀에게 전해라.”
“선물이라고 하시면…….”
“영원한 잠을 선사할 매혹적인 꿈이지.”
성서를 통달한 린델은 아주 고전적인 비유를 금방 이해했다. 영원한 잠을 선사할 매혹적인 꿈은 바로 독이었다.
루미아나 대공주의 유배가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겠느냐?”
“예. 하겠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해.”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린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황제의 사자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해내야 했다. 그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시어스가 인상을 썼다.
“이쪽으로.”
카시어스의 부름을 받은 린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자 카시어스는 린델의 가슴 위를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그녀를 만나면 여기에 시커먼 것이 묻을 거야.”
“잘 털어내겠습니다.”
가슴에 시커먼 것이 달라붙는 감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카시어스가 데스탄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잉그란의 복수를 맹세할 때도, 루미아나 대공주가 배후라는 것을 들었을 때도 가슴에는 시커먼 것이 꽉 들어찼다. 지금도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겨내야 할 것이었다.
“쉽게 안 될 텐데.”
“세상에 쉬운 일은 없으니까요.”
“말은 잘하지. 네게 좋은 것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예.”
카시어스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생명을, 지혜와 경험을 배우고 얻었다. 세상은 아름답게 반짝이지만은 않았다. 비정함도, 잔혹함도, 부조리도 함께했다. 그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겠다는 카시어스의 경고를 린델은 직시했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으니 더욱 그랬다.
린델은 그러겠노라 했다. 하지만 카시어스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이래서야. 어제부터 내가 악당이 된 것 같아.”
“도망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폐하께서 무엇을 걱정하고, 준비시키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더 현명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음, 루미아나 대공주님을―”
“그녀는 더 이상 대공주가 아니야.”
카시어스가 가볍게 으르렁거리며 호칭을 정정했다.
“그러니까 쥴란 공작 부인을 제대로 대면하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황제 폐하의 위세를 등에 업었으니, 그녀가 분개해하는 것을 볼 수 있겠죠. 네. 유치하지만 그것이 보고 싶습니다.”
린델의 복수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죄악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영원히 기록으로 남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이 내 소중한 사람을 해쳤으니 결코 용서치 않겠다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린델이 욕망을 고백하자 그제야 카시어스가 웃었다.
“아주 소박한 바람이군. 뜻대로 해보아라.”
뜻대로 하라는 황제 폐하의 허락이 떨어졌다. 린델은 그리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