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린델이 루미아나 대공주를 배웅하게 된 것은, 재판이 있고 닷새가 지난 다음이었다. 일찍부터 준비를 마친 린델에게 카시어스의 선물이 도착했다.
아름답게 금으로 상감한 커다란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둔 것은 시종장이었다.
“오래 전에 주문한 것인데, 이제야 완성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시어, 제게 이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오늘 꼭 패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린델리프 왕자님.”
린델은 상자를 열었다. 붉은 벨벳이 깔린 상자 안에는 금과 은으로 된 덩굴 장식이 아름다운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귀부인들이 아름답고 희귀한 보석을 좋아하는 것처럼, 신사들은 혈통 좋은 말을 탐했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무구(武具)였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과 총은 병기가 아니라 예술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권총의 섬세한 장식에 감탄하던 린델은 상자 안쪽에 꽂힌 봉투를 발견했다. 카시어스가 보낸 서신 같았다.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읽은 린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질 좋은 종이에는 황제 앞에서도 권총을 이용한 어떤 행위도 다 용인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면장에 가까운 권리증서는, 굳이 해석하자면 황제를 향해 총을 쏘아도 죄를 추궁받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전에서 총을 소지할 수 있는 자가 극소수인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특혜였다.
“이건?”
“폐하께서 오늘 이 총을 사용하신다 하여도 불문에 부치겠다 하셨습니다.”
린델이 권리증서를 들고 당황하자, 시종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 말은 루미아나 대공주를 쏴 죽여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린델은 권리증서와 아름다운 권총과 빙그레 웃고 있는 시종장을 한 번씩 쳐다보다가 쓰게 웃었다. 카시어스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았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린델은 문득 침실 서랍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것을 떠올렸다. 카시어스를 위해 주문한 선물이 손에 들어온 것은 어제였다. 그리고 공사가 다망하신 황제 폐하를 어제는 만나지 못했다.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애쉰 부인을 불렀다.
“애쉰 부인. 폐하에게 드릴 선물을 가져다주세요. 어제 도착한 거요.”
“지금 폐하께 드리시려고요?”
“이걸 받았으니 화답을 드려야죠.”
린델의 옆에 서 있던 애쉰 부인은 직접 건네드리는 게 더 좋을 거라는 말을 애써 삼켰다. 모든 것은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애쉰 부인의 눈짓에 시종이 린델의 침실에서 자개로 장식된 상자를 들고 돌아와 시종장에게 내밀었다.
절차에 따라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시종장이 린델에게 뭐라고 물으려는 순간에 애쉰 부인이 선수를 쳤다.
“왕자님의 선물에 폐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시종장은 애쉰 부인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애쉰 부인의 모습을 보자면 린델은 이 선물의 의미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이것이 선물이냐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최근 바쁘기 짝이 없는 황제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총애하는 애인의 깜짝 선물은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시종장은 눈치껏 애쉰 부인의 말에 맞장구쳤다.
“예. 폐하께서 좋아하실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귀부인에게나 선물할 빗과 손거울이 무례한 게 아닐까 걱정하던 린델은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제 일을 마친 시종장은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상자를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린델 역시 황제가 준 권총을 패용하고 백장미 궁을 나섰다.
오늘은 린델에게 동행이 있었다. 바로 빅토리아 황태녀였다. 린델은 고귀한 숙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황태녀의 궁을 찾았다.
빅토리아는 남장을 하고는 린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보라색 예복에 검은색 망토를 두른 빅토리아의 미모는 남장으로 가려질 게 아니었다.
린델은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빅토리아는 훌륭한 화자였고, 린델은 그녀와 함께하면서 한 번도 지루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님께 들었어요. 씨디프 공작의 양자가 되기로 했다면서요?”
“폐하께서 그리하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얽힌 게 많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린델은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카시어스는 원래 린델이 씨디프 공작의 양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테누안의 왕자인 린델이 할엔라드에 기반을 가지려면 씨디프 공작을 뒷배로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던 때문이다. 린델도 같은 생각이었다. 타국의 왕자라는 입장은 여러모로 까다로웠다.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에 양자 입적은 무리였다. 테누안 왕실과의 조율도 필요했고, 공작가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는다는 서약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시어스와 양자 입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틀 전이었다. 이렇게 빨리 빅토리아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확실히 황태후와 그녀의 사이는 가까운 모양이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씨디프 공작의 양자가 되면 나의 당숙이 되는 건 알죠?”
“예. 그렇게 됩니다.”
빅토리아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할머니의, 남동생의, 양자이니 당숙이 맞았다.
“그럼 우리는 친족이 되는 거예요.”
친족이 된다면서 빅토리아가 활짝 웃었다. 린델에게 혈연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친족의 개념은 희미했다. 그래도 새로운 관계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맡겨만 둬요. 씨디프 공작가의 사람들에 대해 정통하니까요. 맛보기로 씨디프 공작의 약점을 알려줄까요?”
“약점이요?”
“오. 놀라지 말아요.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니까. 공작은 피망을 싫어해요. 귀여운 약점이죠?”
제국에서 손꼽히는 공작답지 않은 귀여운 약점인 것은 맞았다. 린델은 빅토리아의 짓궂은 폭로에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함이 넘쳐나는 마차는 비극의 여인을 향해 굴러갔다.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황량한 응접실에 루미아나 대공주가 앉아 있었다. 꼼꼼히 빗어 넘긴 머리칼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드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백한 얼굴은 어딘가 초췌해 보였으나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광기가 비쳤다.
린델은 루미아나 대공주의 모습에서 몰락한 귀부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사교계를 양분하던 루미아나 대공주는 언제나 화려했다. 커다란 보석으로 꾸미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쳤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를 빛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올이 거친 검은 드레스에 짧은 진주 목걸이라는 최소한의 치장만 했을 뿐이었다
선황제의 하나뿐인 딸이자, 황제의 하나 남은 형제라는 화려한 배경은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어제 쥴란 공작의 이혼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그녀는 쥴란 공작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유배를 떠나야 하는 죄인의 신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고모할머니.”
“더러운 남첩을 사자로 보내다니, 황제께서 드디어 미치셨나 보군요.”
빅토리아의 인사에 루미아나 공주는 우아한 악의로 대꾸했다. 린델을 언급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빅토리아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무시해 버렸다.
“폐하께서 보내시는 작별 선물입니다.”
빅토리아의 손짓에 린델은 들고 있던 보석상자를 루미아나 대공주 옆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직접 상자는 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상자를 열자 커다란 루비가 자리한 반지가 반짝거렸다.
저도 모르게 상자를 힐끗거린 루미아나 대공주는 루비 반지를 확인하고는 굳어버렸다. 그녀도 황실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직계였다. 유배를 떠나는 대역 죄인에게 황제가 하사하는 작별 선물이 제대로 된 것일 리 없었다. 그래도 불에 타는 고통을 선사한다는 극독인 열화의 루비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게 무슨 짓이냐?”
루미아나 대공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빅토리아에게 향했다. 빅토리아는 싱긋 웃었다.
“폐하의 뜻입니다.”
“내 동생님께서는 치졸하구나. 형제를 아껴 목숨만큼은 구명해 줄 것처럼 굴더니, 뒤로는 이런 것이나 보내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과 더러운 남첩을 시켜서. 정말 변변찮은 놈이야!”
사나운 감정을 쏟아낸 루미아나 대공주는 반지가 든 상자를 손으로 내쳤다. 상자는 린델을 향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빗겨났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발치에 굴러온 상자와 반지를 챙겨 린델의 손에 들려주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님, 반성하십니까?”
린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더러운 놈이랑 말을 섞지 않는다. 빅토리아, 저놈을 데리고 꺼져라.”
루미아나 대공주는 정말로 린델이 더러운 것처럼 굴었다. 린델은 쓴웃음도 짓지 못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귀부인의 전형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도 표독한 자존심만큼은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현재 가진 것들 중에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황금 한 덩이면 충직한 시녀가 배신하기에 충분합니다. 시녀는 매일같이 미량의 독을 차에 담아내는 것도 못 알아차리는 주인을 지켜보며 속으로 조롱하겠지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어조로 린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루미아나 대공주는 물론이고, 그녀의 하나뿐인 시녀까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마차가 숲을 지나칠 때마다 도적이 나타날 겁니다. 복면을 쓴 암살자는 매일 밤이 되면 당신의 발가락을 하나씩 잘라갈 테지요.”
카시어스가 린델의 로벅 행을 반대하면서 말했던 만약의 사태였다. 그리고 그건 모두 성서의 이야기에서 한 토막씩 보았던 내용이기도 했다. 인간은 그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였다.
살아 있다면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을 맛볼 거라는 협박에 드디어 루미아나 대공주가 린델을 노려보았다. 린델은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탁자 위에 다시 보석상자를 올려두었다.
“당신에게 안식을 가져다줄 선물입니다.”
“감히 네가!!”
루미아나 대공주의 위협에도 린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당신은 내 소중한 사람을 죽였어. 난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 네까짓 게 날 용서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신이 상상하는 모든 괴로움을 줄 수 있지.”
“더러운 남창 주제에.”
“할 수 있어.”
린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잉그란을 로벅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다고, 카시어스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쫓기지 않았어야 했다고 몇 번이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후회를 뒤덮는 분노가 루미아나 대공주를 향했다. 그녀가 잉그란을 죽였다. 그러니 할 수 있었다.
냉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서늘한 표정의 린델을 보며 루미아나 대공주는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끔찍한 협박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진 황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졌다. 자신이 이런 놈에게 협박을 듣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날, 황제는 헤아리기 힘든 총알구멍 속에 죽어야 했다. 눈앞의 남첩은 흑마법사라는 오명 속에 불에 타 재가 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계집애는 모든 것을 잃고 좌절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그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자신만이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빛나는 지위도 빼앗기고, 이런 비참한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 루미아나 대공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혼자 죽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소매 속에 숨겨둔 비수를 꺼내 들었다. 원래는 머리에 꽂는 금비녀였으나 끝이 부러지면서 충분히 비수가 되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린델을 바라보면서 빅토리아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녀의 원한은 언제나 빅토리아를 향해 있었다. 황녀로 태어나 황제가 되겠다고 한 빅토리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던진 루미아나 대공주가 간과한 게 두 가지 있었다. 자신의 몸놀림이 그다지 민첩하지 못하다는 것과 기사 훈련까지 받은 빅토리아가 연약한 숙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빅토리아는 비수를 피하지도 않고 루미아나 대공주의 손목을 내리쳤다. 동시에 빅토리아의 수호기사가 루미아나 대공주의 어깨를 밀쳤다. 그 반동으로 루미아나 대공주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빅토리아는 비수를 멀찍이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고모할머니가 절 싫어하시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너!”
“더 이상 볼 일이 없겠지요. 작별 인사를 하겠습니다. 무사히 베트에륀에 도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돌아가요. 린델리프 왕자님.”
일방적으로 인사를 한 빅토리아가 그대로 뒤돌아섰다. 린델과 기사들 역시 재빠르게 빅토리아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응접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문이 닫혔다.
“시시한 악당이었어요.”
“예.”
분기를 감추지 못하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빅토리아가 한마디 했다. 린델은 그녀의 말에 응했다. 시시하고 사악한 악당이 끝까지 참회하지 않고 죄를 빌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녀를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다.
“저런 악당에게 마음 쓰지 말아요. 낭비예요.”
“으아아악!!”
빅토리아가 말을 끝내자마자 뒤늦게 닫힌 문 너머에서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린델도 빅토리아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죄인을 배웅한 린델과 빅토리아는 황제를 폐현하고 보고를 마쳤다. 빅토리아가 먼저 자리를 떴고, 린델은 남았다.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봐.”
“바쁘신 거 아니에요?”
린델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회의 중에 빠져나온 카시어스는 곧 돌아가야 했다.
“네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충분해. 손을 먼저 잡아줘. 어제 못 만났으니까.”
카시어스가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기에 린델은 순순히 잡아주었다. 사실 안에는 근위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손을 잡는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일상이 되었다.
“기분은 어떻지?”
언제나 그렇듯이 카시어스가 기분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녀가 반성하지 않는 악당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폐하의 위세를 빌어 잔뜩 협박한 것도 통쾌했고…….”
“통쾌했고?”
“그냥…… 좀 그랬어요.”
정확히는 울컥했다. 제멋대로인 운명에, 가슴 아픈 그리움에, 가눌 길 없는 분노에 눈물이 날 뻔했다. 아직도 슬픔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마음을 추슬렀다. 혼자 우는 것은 상관없지만, 남들이 있는 곳에서는 싫었다.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아까부터 카시어스가 너무 기분이 좋아 보였다. 특별히 환하게 미소 짓거나 하지는 않는데, 반쯤 접힌 눈이 웃고 있었다. 입술 끝도 실룩거렸다.
커다란 테라스 창으로 가득 넘쳐 들어오는 햇살 속에 서 있는 카시어스는 행복하신 천사님 같았다.
“폐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오, 그래. 있었지.”
최근 카시어스는 무척이나 바빴다. 린델이 카시어스를 알고 지낸 반년 동안에 이렇게나 일이 넘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만큼 카시어스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린델을 향해 네가 없었다면 다 때려치웠을 거라고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기분 좋아질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떤 일인데요?”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았거든.”
카시어스가 받은 선물이라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린델은 모르는 척 물었다.
“마음에 드셨어요?”
“무척이나.”
“다행이에요. 귀부인이 쓸 법한 물건이라, 혹시나 싫어하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싫어할 리가 없지. 빗을 선물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어, 음. 글쎄요?”
린델은 환하게 웃는 카시어스를 보며 일부러 모른다고 했다. 상아와 은으로 된 아름다운 빗을 보면서 카시어스의 머리를 빗는 상상을 했다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나중에 타이밍을 보고 한 번 빗어보게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시종장. 사내가 어떨 때 빗을 선물하지?”
“청혼을 할 때입니다, 폐하.”
스스로 생각해도 간지러운 소망에 손가락이 저절로 꼼지락거리고 있던 린델은 시종장의 대답에 굳어버렸다.
청혼이라고?
린델은 놀란 눈으로 시종장을 찾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까 전에 의뭉스럽게 굴었던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다른 근위시종들도 보았다. 그들도 맞다고 했다.
너무나 당황한 린델은 카시어스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카시어스가 조금 더 다가왔다.
“내 청혼은 거절해 놓고, 이렇게 청혼하는 법이 어디 있어?”
이번에는 시종장을 비롯한 근위시종들이 놀랄 차례였다. 황제가 청혼을 한 것도 놀라웠고, 거절당한 것도 놀라웠다. 린델이 빗을 선물한 거야 별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황제의 청혼은 달랐다. 황제가 원하고 있으니 린델이 후궁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린델은 근위시종들이 유심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빗을 선물하는 것이 정말 청혼의 의미인지 의심하면서 카시어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 의미로 선물을 드린 게 아니에요.”
“그럼?”
“그냥…….”
“그냥? 뭐?”
이 상황에서 머리를 빗겨드리려고 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린델은 머리를 굴려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그냥 빗이 예뻐서요.”
“그냥 빗이 예뻐서 선물하고 싶었다고?”
“예.”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린델에게는 다시없을 구명줄이었다. 린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카시어스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귀까지 빨개진 녀석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여기서 더 밀어붙였다가는 미움을 받을지도 몰랐다.
“안타깝군. 청혼이면 좋을 텐데.”
“죄송하지만, 아니에요.”
“그럼 빗을 선물한 김에, 머리를 빗겨주지 않겠어? 응?”
그제야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이 오른 얼굴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분노가 더해졌다. 차마 근위시종들을 둘러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놀리신 거예요?”
“빗겨주기 싫어? 싫으면 싫다고 해.”
정말 말로는 카시어스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싫어요.”
“청혼의 의미도 아니고, 머리를 빗겨주지도 않을 거라고?”
“예.”
“너무한걸?”
너무하다는 말과 달리 카시어스는 너무 즐거워 보였다.
너무한 게 누군데.
린델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부루퉁하게 있자니 맞잡은 손을 놓은 카시어스의 커다란 손이 뺨을 살짝 꼬집고 머리를 슬쩍 쓸어 넘기고는 떨어져 나갔다. 스스럼없는 애정 표현이었다.
“이제 기분은 괜찮아졌어?”
“……네.”
린델은 뺨을 문지르면서 진심을 말해야 했다. 카시어스에게 말려들면 늘 이랬다. 어느새 루미아나 대공주도, 그리움도, 슬픔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위로치고는 이상했지만 울적한 기분이 나아졌다.
“기왕에 선물받았으니, 머리는 내가 빗겨주지.”
“?!!”
“이건 거절 못 해. 짐은 황제잖아. 황명이야.”
별것 아닌 농담에 린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럴 때만 꼭 황제라고 강조해 버리면 할 말이 없었다.
린델은 이 순간이 좋았다. 평범한, 때로는 평범하지 않은 카시어스와 함께하고 있었다. 속상해하고, 난감함에 한숨을 삼키다가, 별것 아닌 농담에 웃는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매 때마다 현실이 되고 있었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너스레에 맞장구를 쳤다. 햇살 속에 린델 역시 기쁨을 담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