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episode. 01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바다 위에 하얀 돛을 활짝 펼친 범선들이 가득했다. 커다란 만을 따라 자리한 선착장에 정박한 배는 커다란 상자를 끊임없이 싣고 내렸다.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테누안의 왕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린델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왕궁과 항구는 거리가 제법 멀어서 커다란 범선은 사과처럼, 그리고 오가는 사람은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느껴졌다.
린델은 테누안에 대해 배운 것을 다시 떠올렸다.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테누안은 주변 여러 왕국과 견주어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다만 천혜의 항구인 수도 라우그실리안은 제국의 수도로 이어지는 콴 강의 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남해와 큰 바다를 건너 대륙을 오가는 선박들의 기항으로, 그리고 제국의 수도를 향한 운하의 첫 도시로 무역과 해운이 크게 발달했다.
글로만 보아왔던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할엔라드 제국의 수도의 도심 한가운데를 구경할 때와 비슷했다. 황궁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특히 린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보는 것은 로벅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기억을 잃고 난 후에 보았던 바다는 파란색이 짙어 검은색에 가까웠는데, 이곳은 사파이어와 에메랄드가 섞인 듯 아주 예뻤다.
무엇보다 라우그실리안은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춥지 않다는 게 린델의 마음에 들었다. 햇살은 화창했고 바람은 살랑거렸다. 겨울이면 눈에 갇혀 사는 게 당연한 로벅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1년 내내 눈 한 번 보기 힘들다는 닐르와 비교한다고 해도 초가을 날씨나 다름없었다.
이곳의 햇살을 로벅으로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다.
우르르릉.
린델은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너머에서 회색 구름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조금 후에 그리핀을 타고 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비가 오면 낭패였다.
“비가 오면 큰일인데.”
“지나가는 구름이야.”
어느새 리세나가 옆에 다가와 있었다. 린델은 이제 자신의 누이가 아니게 된, 테누안의 국왕을 바라보았다.
정말 비가 오지 않느냐고 눈빛으로 물어보자 리세나가 활짝 웃었다.
“이쪽으로 바람이 안 불어오잖아. 저래 보여도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 서쪽으로 흘러갈 거야.”
“어떻게 아세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는걸. 모를 수가 없지. 비가 오기 전에는 바람의 냄새부터 달라지거든.”
친절히 설명을 덧붙인 리세나는 한결같이 다정한 손위 누이처럼 굴었다. 호의일 수밖에 없는 미소에 린델 역시 같이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리세나와 제국에서 헤어진 지 겨우 3개월이 지났다. 그사이에 그녀가 테누안의 국왕이 되었다.
그녀가 국왕이 되기까지, 모든 사건이 짜 맞춰진 것처럼 일어났다. 특히 린델의 큰형인 루터 왕세자의 몰락은 급작스러웠다.
테누안의 사절단이 할엔라드에서 공식 일정을 마치고 수도로 귀환한 그날, 국왕은 자신이 매일 먹던 약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붙잡힌 의사는 루터 왕세자가 배후라고 자백했다. 국왕은 자신의 병환이 독 때문이라는 사실에 분노하며 당장에 루터 왕세자를 붙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터 왕세자는 저항했다.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수도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끌어들였다. 루터 왕세자는 왕성 정문을 돌파했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국왕이었다. 국왕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군대를 대기시켜 놓았던 것이다. 루터 왕세자는 전투 도중에 사망했다. 그리고 쇼크로 쓰러진 국왕은 엿새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행방불명되었던 셋째 왕자가 제국에서 살아 있다는 소식이 테누안에 전해지면서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린델이 재빨리 왕자로서의 이름과 권리를 포기한다고 알리면서 리세나가 순조롭게 즉위하게 되었다.
그렇게 리세나가 국왕이 된 과정은 특별하면서도 흔한, 아주 운이 좋은 공주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다음에 그녀가 보인 행보는 단순히 운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리세나는 숙부인 델부트 대공을 섭정으로 삼고, 그의 아들과 결혼해 공동 국왕이 되었다.
그 둘이 한편이었던 거겠지.
테누안의 정황을 알려주던 카시어스가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리고 린델은 방관자가 되라는 리세나의 조언이 얼마나 큰 모험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혹은 바보 같은 멍청이였다면 그녀의 계획은 언제든지 어그러질 수 있었다.
복수를 꿈꾸던 리세나의 위험한 도박은 성공했다. 그리고 부외자가 되기로 선택한 린델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린델이 테누안을 찾은 것은, 왕자로서 이름과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공식 문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린델이 문서에 서명을 하면서 이제 리세나와는 아무 관계가 아니게 되었다.
법률상으로는 그랬지만 리세나는 여전히 린델을 어린 동생처럼 대했다. 덕분에 린델도 리세나 앞에서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향기로운 차를 준비해 두었단다. 테이블로 가자.”
리세나가 린델을 이끌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선룸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는 멋진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린델은 리세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멀찍이 떨어져 시립한 시종들을 제외하면 단둘뿐인 티타임은, 린델이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리세나가 준비한 자리였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그분께서 청혼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정말이니?”
“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던 린델은 조심스러운 리세나의 질문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어스는 주문한 반지를 받자마자 다시 한 번 청혼했다. 이번에는 목격자도 있었지만 린델은 응하지 않았다. 그 전부터 황제가 청혼을 했다가 차였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돌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냥 사실이 되고 말았다.
궁정 사람들은 황제의 은밀한 사생활을 좋아했다. 황제가 청혼을 했다가 차였다는 것에, 그리고 그날 하루 동안 정무를 멀리하고 서재에 틀어박혔다는 사실에 열을 올렸다. 연회나 무도회, 살롱은 물론이고 저잣거리에도 황제가 차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나갔다.
덕분에 린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매일같이 값비싼 선물이 도착했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후궁이 되는 거야?”
“그게……. 사정이 좀 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우습지만, 일국의 군주란 그다지 좋은 결혼 상대가 아니야.”
살벌한 리세나의 평가에 린델은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고 있자 리세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분께서 공개 청혼을 하셨는데, 끝까지 거절할 건 아니지? 적당히 애를 태우는 것도 좋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존심 문제가 되는 법이야. 하물며 그분께서는 지고의 자리에 계시지 않니. 조심하는 게 좋아.”
“조금 상황이 복잡해서 그래요.”
황제의 청혼 소식에 다들 린델이 후궁이 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건 리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린델은 조심하라고 조언하는 리세나에게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말을 돌렸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그분의 뜻이 확고하시니 시간문제겠지. 지참금은 충분하게 마련할게. 어디에도 뒤지지 않게 말이야.”
“전하?”
“네가 더 이상 테누안의 왕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 동생인 것만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챙겨주는 게 맞아. 씨디프 공작가에서도 준비하겠지만 상관없어. 수중에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있어. 그러니까 이것부터 먼저 받아. 선물이야.”
리세나 공주가 준비된 상자를 내밀었다. 린델은 상자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돌돌 말린 양피지가 두 장 들어 있었다. 양피지의 내용을 끝까지 확인한 린델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리세나를 바라봐야 했다.
“이건?”
“형제의 우애라고 생각해.”
“전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것이 필요한 순간은 오지 않을 겁니다.”
린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양피지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리세나가 준 것은 테누안의 헬텐부크에서 살고 있는 케일런 준남작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였다. 린델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더라도, 우선은 받도록 해.”
“이미 있습니다, 전하.”
카시어스 역시 리세나와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위조이지만 위조가 아닌 신분증명서와 은행 계좌를 준비해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특이한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리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분께서 널 쫓을 수도 있잖니.”
리세나의 어떤 가정에 린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카시어스가 자신을 쫓는다고?
그 말은 자신이 카시어스에게서 도망친다는 소리였다. 린델은 차마 그럴 리 없다고 하지 못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카시어스에게서 도망치기보다는 순순히 붙잡혀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다.
“그냥 붙잡히겠습니다.”
“붙잡힐 때는 붙잡히더라도 이런 건 몇 개를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 얼른 챙겨 넣으라니까. 그분께는 말씀드리지 마. 비상금이라고 생각해.”
증명서를 손에 쥐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 린델을 보며 리세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황제의 약혼녀는 자신이었고, 린델의 왕위 계승권이 더 높았다. 그런데 운명이 뒤바뀌었다.
린델이 황제를 등에 업고 테누안의 왕이 되겠다고 나섰으면 리세나는 이길 방법이 없었다. 사실 각오도 했다. 하지만 린델은 자신이 했던 말을 지켰다. 왕자의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는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기억 속의 동생은 눈물이 많고 고집이 셌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마음이 곧았다.
사실 지참금도, 신분증명서도 완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대륙 최강국이라고 일컬어지는 할엔라드 제국이었다. 황제의 총비가 될 동생에게 호의를 베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동생이 기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분명했다. 더 이상 왕자가 아니더라도 고국에서 외면당했다가는 평판이 나빠지기 마련이었다. 귀족 사회란 체면과 명예가 전부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를 대비한 두 장의 문서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황제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니 린델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순진해서야 린델이 황제의 총비가 된다고 해도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일국의 군주란 때론 남자도, 여자도, 인간도 아니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군주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같은 것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민하지 마. 애인이 아니라 부부 사이라도 비밀은 있어야 하는 법이야. 모든 걸 다 밝히면 매력이 없어져. 그건 날 믿어, 린델리프.”
“전하.”
“얼굴이 빨개졌어. 큰일인걸?”
리세나가 놀리는 바람에 린델은 난처하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놀리는 사람은 카시어스 말고는 애쉰 부인밖에 없었다. 다행히 리세나는 더 이상 집요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네 뜻대로 해. 그래도 아름다운 미로에서 살아가려면 나만의 것을 준비해 둬야 하는 법이야.”
아름다운 미로란 황궁을 말했다. 권력을 좇아 미로를 헤매며 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마지막까지 당부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리세나가 직접 서류를 접어 린델의 재킷 안에 집어 넣어주었다. 그것으로 짧은 티타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