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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118/137)

-118화-

자룬타오드 평원에서의 전투는 대승으로 끝났지만, 훌륭한 승리에도 사상자는 속출하는 법이었다. 많고 많은 부상자 중에, 마법사를 만나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중상자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근위기사와 고급 장교가 우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죽음에서 생명을 건져내는 치유 마법은 기적이나 다름없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마법사에게 한계가 있었다.

거대한 마력을 타고난 기사와 달리 마법사는 체외의 마력을 몸속에서 순환시켰다. 원리대로라면 무한정 마법을 쓸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주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마법사 개인의 기력과 마력을 필요로 했고, 때문에 마법사가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횟수는 정해져 있었다.

거기다 치유 마법은 상급 마법이었다. 린델을 포함해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섯 명의 마법사가 하루에 살릴 수 있는 인원은 100명이 겨우 넘었다. 수많은 부상자를 생각한다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그렇기에 전투 첫날은 신분이 높은 이들만이 마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충분히 쉰다면, 내일도 모레도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당장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린델은 사람을 살리고도 무력함에 화가 났다. 카시어스는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할 거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았다.

전쟁의 참상은 끔찍했다. 손쓸 수 없는 상처에 신음하는 병사들이 넘쳐났다. 다친 사람을 보는 것은 괜찮았다. 늑대에 당한 마을 사람을 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이 벌판에 널려 있는 광경은 충격이었다. 피와 화약이 뒤섞인 냄새는 익숙해질 것이 아니었다.

잉그란에게 카시어스와 함께할 거니까 괜찮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재주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다행일 뿐이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숙소에 돌아가서 쉬십시오.”

린델은 눈을 떠서 브라크를 바라보았다. 성실하고 노련한 군의관인 브라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옛날에, 그러니까 고요정 시대에 대천사의 숨결이라는 마법이 있었대요.”

“들어본 적 있습니다. 광역 치유 마법이죠.”

“알고 계시군요.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간절해져요.”

마법 문명이 꽃을 피웠던 고요정 시대가 끝나고 고왕국 시대가 도래하면서 마법사는 사냥을 당했고 많은 마법들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과거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것뿐이라고 마탑주가 한숨처럼 말했었다.

린델은 과거의 영광에는 관심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대천사의 숨결이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대천사의 숨결이 있으면 천공의 비명도 있을 겁니다.”

“?”

“대척점에 있는 것들은 서로 공존하는 법이니까요.”

대천사의 숨결이 광역 치유 마법이라면 천공의 비명은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는 광역 공격 마법이었다. 보통은 브라크의 말대로 대척점에 있는 것들은 서로 운명을 함께했다. 하지만 린델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대천사의 숨결만 있으면 돼요. 천공의 비명 따위는 쓸모도 없는 걸요.”

그딴 것은 쓸모없다며 콧김을 내쉬는 린델을 보며 브라크는 웃음을 삼켰다. 전쟁터에서 광역 공격 마법이 쓸모없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대천사의 숨결만 있으면 된다는 린델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았다.

근위기사단의 군의관으로 황궁을 드나들던 브라크는 오래전부터 린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고아가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도, 왕자라는 신분을 찾은 것도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소문 속의 린델은 철혈의 황제를 녹인 천하에 둘도 없는 요부였다. 남창, 요물, 근본도 없는 놈. 부러움과 시샘이 그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에 잔뜩 담겼다. 하지만 린델이 테누안의 왕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황제가 공개 청혼을 하자 여론이 바뀌었다. 다들 황제의 말도 안 되는 욕심에 혀를 찼다.

일국의 왕자를 후궁으로 삼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왕족이나 귀족 사내의 출세는 여인과 달랐다. 황제가 그를 아껴 연애를 하고 부와 권력을 안길 수는 있었다. 총애한다고 공공연히 자랑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후궁으로 삼는 것은, 상대의 커리어를 박살 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개 청혼이 거절당하자 기어코 린델과 테누안의 연을 끊게 하고는 씨디프 공작의 양자로 입적하도록 만들었다. 다들 린델이 후궁이 될 거라고 말했다. 사내로서 출세는 끝났다고 동정하면서도 부러워했다.

브라크가 그동안 지켜본 린델은 요부도 아니었고, 황제의 청혼에 시달리는 불쌍한 왕자님도 아니었다.

그저 성실하고, 아주 드물게 마음씨 착한 마법사였다.

근위기사단에서 오랫동안 군의관으로 복무한 브라크는 여러 명의 마법사를 보좌해 왔었다.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최고의 인재였다. 그들은 황제 직속으로 수많은 혜택을 받았고 그만큼 권위적으로 굴었다. 고위 귀족들을 먼저 치료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린델은 달랐다. 모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까워했다.

첫날에는 한계까지 마력을 쥐어짜며 마법을 쓰다가 혼절하고 말았다. 고귀한 왕자님다운 연민과 헌신이었다. 하지만 린델이 쓰러지자 황제가 예민하게 굴었다.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린델을 확인한 황제는 브라크에게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네 목을 조심해야 할 거라고 차갑게 경고했다.

황제는 소문대로 유난스러웠다. 그래서 피곤한 얼굴을 하며 웃는 린델을 쉬게 하는 것이 브라크의 임무였다.

“마탑의 비밀 서재를 뒤지면 대천사의 숨결에 대한 주문이 적힌 고문서를 찾으실지도 모르죠. 그래도 지금은 손을 씻고 시원한 걸 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브라크의 부드러운 권유에 린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치유 마법을 쓰려면 직접 상처를 확인하고 만져야 했다. 젖은 천으로 닦아내도 피가 깨끗하게 닦이지 않았다. 굳은 피 때문에 손을 움직이는 감각이 이상했다.

“네. 뭐라도 마셔야겠어요.”

지난 세 시간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린델 경. 린델 경. 계십니까?”

제라르의 목소리에 린델은 긴장했다. 천으로 된 입구 가리개를 밀치며 나타난 사람은 역시나 제라르였다. 그의 근위기사복은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제라르 경?”

“경. 지금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으십니까?”

제라르의 다급한 질문에 린델은 덩달아 긴장했다. 제라르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근위기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빅토리아 황태녀의 호위로 배치되었다.

린델은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예. 쓸 수 있습니다. 혹시 전하께서 다치신 겁니까?”

“아니요. 스웨인 남작입니다. 총탄으로 등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준비하십시오.”

최악은 아니었지만 최악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린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기습이었습니다.”

브라크가 제라르의 왼쪽 팔뚝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제라르는 린델에게 스웨인 남작이 중상을 입은 정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빅토리아 황태녀는 황제 친위군의 다섯 개 연대를 지휘했다. 평원에서 패퇴하는 시아무크 군을 추격한 후, 본대로 귀환하던 빅토리아 황태녀를 노린 기습이 있었다. 언덕을 끼고 숨어 있던 저격병들의 총탄에서 빅토리아 황태녀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수호기사인 스웨인 남작이 온몸을 던져 보호한 덕분이었다.

다만, 스웨인 남작은 엉망이 되었다. 갈비뼈가 두 개나 박살 나고 내장이 다쳤다. 그래도 다행히 심장과 폐는 무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터였다.

이송도, 치료도 신속했다. 대기하고 있던 군의관이 총알을 꺼내자마자 린델을 비롯한 세 명의 마법사가 치유 마법으로 상처를 낫게 했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스웨인 남작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끝까지 이야기를 듣던 린델은 한숨을 삼켰다.

“용케 무사했군요.”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은 스웨인 남작이었다. 그 외에 빅토리아 황태녀의 호위기사들은 대부분 경상만 입었다. 기습을 한 적군이 재빠르게 도망쳤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러게요. 잠시만요.”

린델은 제라르의 정강이를 살피는 브라크를 저지했다. 총탄이 스친 정강이는 살이 찢겨 있었다.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걸을 때 불편할 게 뻔했다. 상처를 보기 위해 쪼그려 앉은 린델은 찢어진 부분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읊었다.

“생명의 기적. 치·유.”

“그러지 마십시오.”

“린델 경.”

제라르와 브라크가 제각각 놀라서 한마디 했지만 주문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제라르의 정강이는 말끔하게 나았다.

“다 됐어요.”

“그러다가 다시 쓰러지십니다.”

잔소리는 브라크의 몫이었다. 린델은 그가 건네주는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웃었다.

“아직 괜찮아요.”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여섯 명의 마법사 중에 린델이 가장 젊었다. 그리고 왕족 출신으로 마력도 평균 이상이었다. 첫날에 마력 고갈로 쓰러졌을 때, 린델은 28번의 치유 마법을 썼다. 한계를 알게 된 이후로 더 이상 무리하는 일은 없었다. 아직 몇 번의 여유가 있으니 제라르를 위해서 마법을 쓰는 것은 별것 아니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요. 아무래도 다리는 걸으실 때 불편할 것 같아서요. 아, 이쪽 턱을 다친 것 같은데. 이런, 긁혔네요. 심각해 보이지는 않지만, 약부터 발라요.”

신중하게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린델과 애매하게 굳었다가 활짝 웃는 제라르를 보며 브라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심 없는 다정함은 무서운 법이었다.

브라크는 유능한 군의관이었고, 또한 눈치도 빨랐다. 제라르를 향한 린델의 호의는 친인을 위한 것이었다. 브라크가 지켜본 린델은 그의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을 아끼고 챙기려고 했다. 그러나 제라르가 품은 마음은 아무래도 연심처럼 보였다.

궁정 연애에 불륜은 기본이라지만 상대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린델이 무던하게 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제라르도 특이했다. 가망 없는 짝사랑을 하면서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연고는 있죠? 아니, 그냥 이걸 가져가요. 효능이 좋으니까 듬뿍 발라요. 잘생긴 얼굴에 흉이 남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니까요.”

“감사합니다.”

충분히 친구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대화였지만 내면의 사정을 아는 브라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화끈하고 질척한 궁정 연애가 아니라 풋풋한 소꿉장난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모르는 척했다.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지 않아야 한다는 오랜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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