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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37)

-119화-

브라크의 생각처럼 린델은 그저 오랜만에 제라르를 만나게 되어서 기쁜 상태였다. 제라르가 근위기사단에 입단하고 전쟁이 터지면서 자주 볼 수가 없었다. 우연찮게 지나치면서 안부를 묻거나, 혹은 아주 가끔씩 만나 식사를 같이한 것이 전부였다.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 함께하실래요? 오늘이 안 되면 내일이라도 말이죠.”

“오늘이 좋습니다.”

“전장이 넓으니 이렇게 만나기도 힘드네요.”

그렇게 저녁 약속을 잡고 있는데 근위기사가 린델을 찾아왔다. 황태녀 전하가 다쳤으니 치료가 필요하다는 호출이었다. 제국의 후계자인 황태녀의 신상 보호는 최우선 사항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린델은 다급히 움직였다. 린델의 보좌관인 브라크도, 그리고 황태녀의 호위기사인 제라르도 그 뒤를 따랐다. 빅토리아 황태녀는 스웨인 남작의 병실에 있었다.

린델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도중이었다. 빅토리아가 침대에 앉은 스웨인 남작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굳어 선 린델의 귀에 빅토리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나 대신 죽으면, 고마워할 것 같아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빅토리아에게 안긴 스웨인 남작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리고 그건 린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는 린델은 물론이고 이곳에 자리한 사람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과 카시어스의 결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스웨인 남작이 차기 황제의 국서가 될 거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누구보다 고귀한 신분의 아가씨였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당신은 내 소중한 사람이에요.”

스웨인 남작을 끌어안은 팔을 푼 빅토리아가 느닷없이 고백했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였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당신을 잃을 수 없어요. 그러니 결혼해요, 우리.”

아름다운 목소리가 커다랗고 또렷하게 울렸다.

***

린델이 카시어스의 부름을 받은 것은 늦은 밤이었다. 할엔라드는 시아무크 제국의 요새 도시인 틀루엔을 점령했다. 약탈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황제는 요새 사령관의 저택과 주변의 건물들을 징발하여 숙소로 썼다.

시종의 안내로 린델이 찾은 곳은 저택의 서재였다. 그곳은 이제 본대의 작전 지휘실로 쓰였다.

지휘실 가운데는 커다란 지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린델이 안으로 들어서자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카시어스가 돌아보았다.

린델은 제국의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하나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일어나라.”

자리에서 일어난 린델은 카시어스의 손짓에 따라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카시어스의 시선을 따라 지도를 바라보았다.

요새 도시인 틀루엔과 자룬타오드 평원 인근이 상세하게 그려진 커다란 지도였다. 지도 위에는 할엔라드와 시아무크의 군대가 각각 정교한 목각 인형으로 놓여 있었다. 시아무크의 황제를 상징하는 녹색 용은 파드녹이라는 도시에 있었다. 이곳에서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기지도 못할 전쟁은 하는 게 아니야.”

“이길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러니까 멍청이지.”

린델은 적국의 황제를 멍청이라고 한 카시어스의 말에 공감했다. 전쟁이란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결과물이라고 배웠다. 영토 확장, 민심 고조, 정권 탈취, 그리고 권력 과시. 하지만 전쟁은 지독하게 현실적이기도 했다. 카시어스는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라며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전쟁의 핵심은 병사도, 무기도 아니었다. 바로 보급이었다. 6만 명이 넘는 병사가 의욕을 가지고 제대로 싸우려면 잘 먹고 편히 쉬어야 했다. 그게 다 돈이었다.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전쟁이 훌륭하게 끝나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자국의 영토에서 싸우지 않는 것과 확실한 승리였다.

세무흴은 지금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선전포고를 하고 침략한 주제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데다, 패퇴를 하고 있음에도 항복할 생각이 없는 그는 멍청이라고 불려도 모자랐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항복하게 만들어야지.”

“방법이 있으십니까?”

“어떻게 할까?”

카시어스가 되묻는 바람에 린델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카시어스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쳤다. 기분이 별로인 듯 아까부터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게 정석이겠죠.”

“그것보다는 죽이는 게 더 쉽고 간단해.”

이를 드러내며 죽여버린다고 말하는 카시어스는 진심인 것 같았다. 린델은 그러지 말라고 하지 못했다. 확실히 사로잡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더 쉽고 간단했다.

그러나 린델이 신경 쓰이는 것은 세무흴의 생사 여부가 아니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마구 내고 있는 카시어스가 걱정이었다. 전투는 크게 이겼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쁜 걸 보면 어지간히도 세무흴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를 죽일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린델은 카시어스의 방법을 지지했다.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카시어스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국의 황제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린델은 그가 그렇게 해야겠다며 웃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의 질문이 카시어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자리에 있었다지?”

“네?”

“빅토리아가 결혼 허가서를 받으러 왔더군. 감상은 어때?”

린델은 카시어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가 세무흴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도 눈치챘다.

황태녀가 그녀의 수호기사에게 청혼을 하고는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 그 자리에서 있었던 사람은 한 손으로 셀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비밀로 할 일도 아니었기에, 청혼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에 더해 황제가 결혼 허가서를 써주었고, 약식으로나마 약혼식이 있을 거라고 알려지자 군영은 축제 분위기였다.

오늘은 시아무크 군을 패퇴시켰지만, 그래도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이 전쟁터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곳에서 황태녀의 청혼과 약혼식과 같은 이벤트를 병사들은 좋아했다. 어쩌면 약혼식에서 다량의 술이 제공되기 때문에 열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감상을 묻는 카시어스의 표정은 여전히 부루퉁했다.

“약혼식이 이틀 후라고 들었습니다. 너무 급하지 않을까요?”

“말 돌리지 말고.”

카시어스가 회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던 린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린델은 청혼의 순간을, 빅토리아가 했던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날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을 내게 줘요. 마음대로 죽어버릴 거면.”

협박에 가까운 청혼이었다. 린델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얼어붙은 채 숨을 삼켰다.

한 박자 늦게 스웨인 남작이 덤덤히 되물었다. 그의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목소리만큼은 침착했다.

“청혼을 하신 겁니까?”

“아니요. 명령이에요. 애셔 제라드 판텔라온. 나와 결혼해요.”

명령이라지만 청혼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스웨인 남작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를 바라보다가, 병실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빅토리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예.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헷갈리지 않게 허락한다고 해요.”

“벅찬 마음으로 허락합니다.”

“행복하게 해줄게요.”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한 빅토리아가 다시 스웨인 남작을 껴안았다. 지켜보는 사람이 모두 긴장한 청혼이었다. 일련의 과정은 살벌했지만 마지막에는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스웨인 남작의 손을 꽉 붙잡은 빅토리아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린델은 빅토리아를 축복하며 카시어스를 생각했다. 빅토리아는 청혼에 성공했는데, 왜 자신은 차여야 하냐며 무어라 한마디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을 하지 않고 뚱해 있었다.

“황태녀 전하께서 폐하를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령이라는 빅토리아의 청혼 방식은 카시어스의 그것과 비슷했다. 솔직하게 감상을 이야기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시어스가 한쪽 눈썹을 확 구겼다.

“네가 제일 나빠.”

“다들 가련한 왕자님라고 하는 걸요.”

“짐은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이고?”

“한없이 다정하신 분이시죠.”

린델도 자신에 대한 소문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공개 청혼을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동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카시어스 덕분이었다. 너를 가련한 왕자님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한 카시어스는 여론을 조작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린델은 황제를 사로잡은 요부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왕자님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다, 다정한 당신 덕분이라고 웃어 보였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지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린델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카시어스의 옆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애인께서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카시어스는 좋은 애인이었다. 제멋대로 강요할 때가 많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정중하고 다정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면 멋진 화술로 설득부터 했다. 달콤한 제안과 협박을 닮은 회유도 거리낌 없었다. 답이 나오지 않을 때면 대화를 그만두고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말을 하지 않고 삐딱하게 구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지 않았다. 마을의 꼬맹이들 중에 엄마한테 혼나면 신전 예배당의 제단 밑에 숨는 녀석이 있었다. 다리를 팔로 감싸 안고 동그랗게 쪼그려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잉그란 사제님이 무슨 일이냐고 한참이나 달래고 나서야 제단 밑에서 기어 나왔다. 물론 그것도 나이를 조금 더 먹으니까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의 카시어스가 딱 그 모습이었다. 슬프고 화나는 일이 있으니 달래달라고 소리 없이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어린 종손녀의 결혼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나 보다.

이를 어쩌나.

다 큰 멋진 애인을 어린애처럼 끌어안고 부둥거리며 달랠 수는 없었다.

린델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휘실에는 근위시종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눈짓을 하자 그들은 조용히 지휘실을 나섰다. 공개 연애 중이지만 전쟁터였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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