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타당한 이유로 설득하려는데, 얼굴을 굳힌 카시어스가 발바닥의 압점을 꾹 눌렀다. 제법 아팠기 때문에 린델은 인상을 썼다.
“아파요.”
“아프라고 눌렀어.”
“앗, 또. 진짜 그러시기예요?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같은 곳을 한 번 더 누르는 바람에 린델은 카시어스를 발로 찰 뻔했다.
“많은 게 달라, 린델.”
“후궁도 법적으로 보장하는 관계예요.”
“황후의 지위, 의전, 칭호. 그리고 그에 따른 대우가 달라지지. 제전에서 황제랑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은 황후뿐이야.”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 왜 자꾸 이러나 모르겠군.”
카시어스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번에는 반대쪽 다리를 무릎에 올리며 집중하는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입매를 당겼다. 이미 끝난 이야기는 맞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씨디프 공작의 양자가 되어 제국민이 되었다. 치유 마법을 마스터 하고 전쟁터에서 사람을 살리고 있다. 명예도, 공적도 쌓았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많은 것이 부족했다. 카시어스를 붙잡고 싶은데, 자신의 손은 작고 그는 너무 컸다. 현실적인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카시어스에게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무룩한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웬일로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고 했더니 후궁이 되겠단다. 욕심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였다. 네가 황후가 되면 은퇴 후에 있을 여러 가지 논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알려주면 린델은 기꺼이 따를 터였다. 하지만 그건 주객전도였다.
그를 사랑해서 최고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겁고도 영광된 족쇄는 사랑에 빠진 악당의 선물이었다.
“부담스러우면 결혼식은 간소하게 하면 돼. 가까운 친지만 초대해서 말이야.”
“그게 핵심이 아니거든요.”
“결혼을 하면 공개석상에서는 경어를 쓰게 됩니다. 예.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존중해야지요. 린델리프 님. 어떠신가요?”
린델리프 님이라고 하며 화사하게 웃는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의 심장이 뛰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카시어스에게서 경어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특별하고도 이상했다.
린델은 손을 들어 실룩거리려는 입을 살짝 가렸다.
“어……. 음. 결혼은 한다니까요.”
“당연하지. 네가 내 짝이라는 것을 반대하면, 신이라도 두 동강 낼 거야.”
“폐하. 그건 신성모독입니다.”
“카시어스.”
“카시어스. 얼른 취소하세요. 신들께서 노하십니다.”
린델은 다급하게 경고했다. 최악의 상황이 되면 신을 원망하며 욕할 수 있다.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불꽃의 지배자인 황제는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더 이상 신의 위업은 지상에 강림하지 않았다. 사제의 축복은 미약했다. 그래도 신을 두 동강 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은 신성모독이었다.
한때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던 린델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신의 가호를 받았지만, 그만큼 신의 노여움을 사면 말로가 비참해졌다. 그건 역사가 증명했다.
“투정 좀 했다고 신벌을 받을 리 없어. 그랬다가는 예전에 벼락을 맞았겠지. 빌어먹을 신이라고 얼마나 욕했는데.”
“그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너를 주신 건 아주 감사하고 있어. 아니었다면 평생을 욕했을 거야. 자, 다 됐다.”
수건으로 발과 종아리에 묻은 오일을 깨끗하게 닦아낸 카시어스가 린델의 바짓단을 정리하고 그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자 카시어스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는 린델의 한쪽 손을 잡았다.
“린델리프.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오니, 부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린델은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시어스가 나태한 천사님처럼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애인은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잘생겼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냥꾼이기도 했다.
잘난 얼굴에 넘어가기에는 그의 청이 너무 컸다.
“대답 안 할 거예요.”
“도대체 몇 번이나 차려고?”
“전쟁 끝날 때까지 청혼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툴툴거린 카시어스가 린델의 손바닥에 입맞춤을 했다.
“얼른 전쟁을 끝내야겠어.”
“부디 뜻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청혼을 위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각오는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린델은 마음을 다해 지지한다고 말했다. 빨리 끝내는 게 맞았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애매하게 웃었다.
“정말, 네가 제일 악당이야.”
“애인을 악당이라고 하실 거예요?”
“그래. 넌 악당이야.”
카시어스가 양손으로 린델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건을 한쪽으로 밀쳐 두고는 불을 끈 다음, 린델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린델을 끌어안았다. 린델이 숨이 막힌다고 한마디 하고 나서야 끌어안은 힘이 조금 줄어들었다.
시아무크에게 최후의 통첩을 하겠다고 한 것은 카시어스였다. 린델은 빅토리아의 약혼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아무리 약식이라도 약혼식이 너무 급한 게 아니냐고 카시어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빅토리아가 빠를수록 좋다며 당장 내일 하겠다고 나섰단다.
성격이 급한 녀석이라고 한마디 하는 카시어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린델은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긴 하루의 끝은 평안했다.
할엔라드의 황제, 카시어스가 주최하는 군사회의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무능을 용서하지 않는 황제의 성격 탓이었다.
상석에 황제가 서고, 그의 옆에는 황태녀가, 탁자를 둘러싸고 각 부대의 장군들이 자리를 잡았다.
자룬타오드 평원 전투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후였다. 6만 명의 부대는 앞으로 며칠 동안 재정비를 하면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간단한 보고와 지시사항이 이어지는 와중에 장군들은 저마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황제의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빅토리아는 쓴웃음을 삼켰다.
자신은 물론이고, 회의에 참석한 이들 중 대다수는 황제의 기분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별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큰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심술궂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를 둘러싼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황제의 강력한 마력은 현세대에서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잘 갈무리하고 있던 마력이 어제오늘은 무거운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제의 기분이 그만큼 가라앉아 있다는 뜻이었다.
공개 청혼을 하고도 차인 황제가 상심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청혼에 성공해 약혼식을 한다니 속이 뒤틀릴 만도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이라고 불리고 있는 황제 폐하도 사람인 것이다.
아니, 지금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웅크리고 있는 사자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심기 불편한 사자였다. 백전노장의 장군들이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다행히 회의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마지막 안건이 제일 중요했다.
“시신조차 거둘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놈들은 제대로 된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륜 있는 장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리고 지휘실에 모인 할엔라드의 군 수뇌부 역시 다들 동조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적국의 황제인 세무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여러 전선으로 흩어져 있던 각국의 병력이 한곳에 집결하여 전투를 치렀다. 한나절 동안의 전투는 할엔라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자룬타오드 평원 전투에서 할엔라드가 잃은 군인은 100명이 조금 넘었다. 반면에 시아무크는 3만 명에 가까운 전투원들이 사망했다. 자룬타오드 평원에 시아무크 군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에 동원된 시아무크 군의 전체 전력은 7만여 명이었다. 전술적으로 전력의 절반을 잃으면 궤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관례대로라면 시아무크가 먼저 화평을 제의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평원에 흩어진 시신을 수습한다고 사자라도 보냈어야 하는 게 옳았다. 정복 전쟁이 아닌 이상에야 시신 수습은 최소한의 배려였다.
하지만 시아무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를 숭상하는 것은 시아무크의 오랜 전통이자 자랑이었다. 그런데도 전장에서 죽은 군인들을 방치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시아무크가 시신을 방치한다면 우리 쪽에서 대책이 필요합니다, 폐하.”
가장 어려운 건의는 빅토리아의 몫이었다. 아직 초봄이긴 했지만 대규모 시신의 부패는 전염병의 시초였다. 시아무크에서 시신을 거두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집단 화장을 해야 했다. 결단은 빠를수록 좋았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 닿았다. 지금껏 조용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내일 사신을 보내겠다. 접촉을 하면 반응이 있겠지. 그들의 전의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궁지에 몰린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마라.”
황제의 명령에 다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전투가 끝나고 난 직후이니 가장 해이해질 시기였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당연했다.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오늘 오후에 빅토리아의 약혼식이 있다. 6만 명이 만족할 수 있는 양의 술을 조달한 짐의 노고를 잊지 말고 모두에게 알려라.”
심각한 회의 끝에 카시어스가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모두들 와르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