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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24/137)

-124화-

황제는 무능한 자를 싫어하는 만큼, 기준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리고 대륙 제일의 부호답게 씀씀이도 화끈했다. 6만 명이 만족할 수 있는 술이 얼마큼인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점령하고 있는 틀루엔의 모든 술을 사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할엔라드의 국경 도시에서 맥주를 수급했다고 했다.

황제가 장담을 했으니 술이 모자라지 않을 게 확실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맥주 다섯 잔이면, 모두들 폐하와 사랑에 빠질 겁니다.”

넉살 좋은 장군이 한마디 더하자 한 번 더 웃음이 터졌다. 그것으로 회의가 끝났다. 모두가 지휘실을 나서는 와중에, 빅토리아와 마탑주인 예이크가 카시어스의 손짓에 남게 되었다. 반대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은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셋이 남은 것을 확인하자 빅토리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야. 알아낸 바에 의하면 시아무크의 수뇌부 역시 혼란한 상황이라고 하더군. 세무흴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소문이 있어,”

“우상 숭배요?”

빅토리아가 말도 안 된다는 의미로 되물었다. 카시어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서는 신전에서 모시는 일곱 신 외에도 수많은 신을 믿고 있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곰의 석상을 세운 곳도 있었다. 하지만 우상 숭배는 달랐다. 이름 없는 신. 즉, 악마나 마신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였다. 그건 흑마술로 정의되기도 했다. 우상 숭배가 사실이라면 세무흴은 대륙의 공적이 되어 그대로 주살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카시어스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세무흴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상을, 그것도 완성되지 않는 석상을 극비리에 수도에서 가져왔다고 하더군. 마법사들이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다지. 그것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세무흴이 이것만 있으면 전쟁에서 이긴다는 말을 측근에게 한 모양이다. 그게 사실이면 시신을 수습할 정신 자체가 없을 수도 있어.”

카시어스가 설명한 것은 시아무크 황제의 근거리에서 보고 들어야 알 수 있는 고급 정보였다. 그러나 빅토리아도 예이크도 카시어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예이크를 보며 물었다.

“언젠가 세투아와 흑마법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었지. 흑마법은 그 명성에 비해 효과가 별 볼 일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평원의 전투에서 죽은 장병들이 제물이라면 달라질 게 있을까?”

어려서부터 세투아와 알고 지낸 카시어스는 마법 기초 이론이 탄탄했다. 신학과 역사에도 소양이 깊었다. 고요정 시대가 끝나고 마법은 천천히 몰락했다. 그리고 신이 직접 지상에 위업을 휘두르는 일은 사라졌다. 그로 인해 절대적인 힘을 가진 한 명의 영웅이 군대를 대적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집단이 무력을 상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마법도, 축복도 아직 남아 있었다. 세무흴이 엄청난 수의 제물을 바친다면 무엇인가 변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법 이론의 전문가는 마탑주인 예이크이었다. 그는 처세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마탑주가 될 만큼 마법에도 뛰어났다.

카시어스에게서 질문을 받은 예이크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폐하. 제물을 바칠수록 거대한 힘을 얻게 된다면, 세상은 흑마법사가 지배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적국의 황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작 사람 한 명 병들게 하는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

어둠이 짙으려면 빛이 강해야 했다. 하지만 신과 마법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결국 세무흴은 미쳤을 뿐이라는 건가?”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카시어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흑마법에 빠진 황제란다. 웃기지도 않았다.

“전쟁을 끝내려면 그를 죽여야겠군.”

너무나도 간단한 결론에 빅토리아와 예이크가 놀란 눈으로 카시어스를 보았다. 특히 빅토리아는 카시어스의 의도를 단번에 읽었다.

“설마, 암살을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시겠죠?”

“왜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직접 움직이실 겁니까?”

“그게 빨라. 번거롭지도 않고. 그는 적이 많아. 놈의 목을 비틀어버리면 누가 했는지 모를 테지.”

“그야 그렇지요.”

빅토리아는 카시어스의 의견에 긍정했다. 카시어스의 능력이라면 소리 소문 없이 세무흴을 암살하고도 남았다. 황제가 사사로이 움직이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지만 지금껏 카시어스는 스스로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리고 카시어스만큼이나 빅토리아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빅토리아.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카시어스는 빅토리아를 향해 물었다. 막다른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는 것이 황제의 역할이었다. 빅토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능력이 된다면 암살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은 황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음 전투에서, 그를 쫓아 죽이겠습니다.”

“정론이구나. 저들이 이번에도 화평을 제의하지 않는다면 짐의 손으로 끝내겠다. 곧 네 생일이잖느냐. 전쟁 중에 양위를 할 수는 없으니 서두를 수밖에.”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

“9년이나 준비해 왔으니 금방 끝날 것이다.”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카시어스도, 빅토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생일이 지나자마자 양위를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전쟁을 끝내고, 뒷수습을 하면서 양위를 공표하고, 반대파들을 억누르며, 즉위식까지 준비하려면 반년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너덜너덜해질 터였지만 빅토리아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은퇴를 해야 결혼을 하실 수 있으신 건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빅토리아는 넌지시 물었다. 빅토리아는 린델이 황제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웨인 남작도 비슷한 성격이었다. 만약 황제께서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면 청혼에 응하겠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결혼부터 먼저 해야지.”

빅토리아의 짐작을 정정해 준 카시어스는 활짝 웃어 보였다. 미남자로 유명한 카시어스의 미소는 화사하기만 했지만 빅토리아는 압박감을 느꼈다. 행복에 퐁당 빠져 무서운 맹수께서 공개 청혼을 하고 차였다는 사실을 잠깐 망각하고 말았다. 이럴 때는 잽싸게 잘못을 인정하는 게 옳았다.

“부디 뜻을 이루십시오, 폐하.”

“물론이다.”

“식을 준비하려니 바쁩니다. 이제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물러가도 좋다.”

빅토리아는 절을 한 후에 물러났다. 이제 예이크만 남았다. 카시어스는 그에게 확인할 게 있었다.

“예이크. 짐이 명한 것은 다 준비되었느냐?”

“예. 발표만 남았습니다.”

예이크가 고개를 조아렸다. 카시어스가 예이크에게 명한 것은 린델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 중에서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는 린델을 포함해 단 여섯 명뿐이었다. 린델이 마법을 배운 지 1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재능은 천재적인 것이었다.

마탑은 치유 마법을 마스터한 마법사에게 공식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에 맞춰 연회도 열렸다.

그러나 린델은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치유 마법을 마스터하는 바람에 누려야 할 권리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원래라면 전쟁이 끝나고 수도로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었지만 카시어스는 좀 더 서두르기로 했다. 승전 후에 린델의 공훈을 따지려면 그의 지위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칭호는?”

“몇 가지 준비한 것이 있긴 하오나, 폐하께서 직접 정하시면 특별한 의미가 될 것이옵니다.”

예이크는 세투아와 다른 의미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특히 아부를 잘했다. 카시어스는 아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마법사의 칭호는 보통 웅장하고 진중한 편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의 운명을 나타냈다.

“이그니스가 좋겠군.”

카시어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그니스(Ignis).

불꽃과 벼락을 의미하는 고요정어는 린델의 사나운 운명을 빗댄 것이었다.

“그리 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사는 겹치는 것이 좋지. 내일, 아니, 모레 발표하도록 해라. 연회는 짐이 준비하겠다. 마탑의 마법사들과 가까운 친인들만 초대하도록 하지.”

“황공하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고 예이크는 뒷걸음질을 치며 지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혼자가 된 카시어스는 시종을 부르지 않고 잠깐의 정적을 음미했다.

장군들이 눈치를 볼 만큼 기분이 엉망인 것은 사실이었다. 초조함을 느끼고 불안함을 가누지 못하자 마력이 제멋대로 튀었다.

카시어스를 흔들어놓은 것은 빅토리아의 약혼이 아니라, 린델의 부상 소식이었다.

어제, 구호소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린델은 쇼크로 발광하던 환자에게 얻어맞아 왼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린델 본인이 치유 마법으로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뼈를 붙인데다, 발광한 환자의 처벌을 바라지 않아서 조용히 넘어갔다.

중환자를 치료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조금 드문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보고를 받은 카시어스는 별일 아니라고 넘어갈 수 없었다. 린델이 느꼈을 고통과 혼란이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어떤 불길한 가능성이 카시어스를 괴롭혔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린델의 옆에 사람을 몇이나 붙여놓았다. 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운이 나빴다면 린델이 죽었을 수도 있다.

최악의 가능성이었다.

카시어스는 의식적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음은 예측할 수 없었다.

특히 린델은 운이 나쁜 편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목숨이 위험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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