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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5/137)

-125화-

도적이 쏜 총에 어깨가 박살 났던 린델을 끌어안았을 때는 희열에 떨었다. 데스탄이 고용한 놈들에게 크게 다치고도 웃는 녀석을 보고는 속이 쓰렸다. 그리고 제전에서 린델이 총에 맞고 쓰러졌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던 순간은 끔찍했다. 아직은 살아 있다고 스스로를 진정시켰지만 자신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에 비하자면 청혼을 거절당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린델은 무척이나 헌신적인 성격이었다. 카시어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며 기어코 치유 마법을 마스터하고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환자를 치료하며 피투성이가 되어도 개의치 않아 했다.

친가족과 인연을 끊게 하고, 씨디프 공작의 양자가 되게 해도 싫다고 하기는커녕 그게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입으로 맹세한 대로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굴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몰랐다.

다정하고도 진솔한 애인이었다.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며 웃는 린델의 모습은 사랑스럽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렇게 감동을 주고는 후궁으로도 괜찮다는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것이 린델다웠다.

하늘 탑, 노래하는 폭포, 에메랄드로 만든 궁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글로, 그림으로 전해지는 동대륙의 아름다운 풍광을 함께 눈으로 담을 미래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평소에는 외면하고 있던 문제가 어제의 사건으로 불쑥 튀어나와 카시어스를 흔들어댔다.

다정한 애교도, 어설픈 유혹도, 따스한 온기도, 함께할 미래도 사라져 버린다. 린델이 없는 미래를 생각하면 무서워졌다.

그건 린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영원히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상실의 아픔이 가져올 결과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런…….”

한숨과 함께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부정적인 생각에 여섯 개의 반지가 요동치는 마력을 억눌렀다. 감각은 예리해지는데 몸뚱어리는 무겁고도 차가워진다.

카시어스는 본능적으로 린델을 찾았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틀루엔의 도시 전경이 보였다. 부상병을 돌보는 구호소는 이곳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저택이었다. 거리가 상당한 탓에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곳에 린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에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디비티에였다. 따스한 몸을 끌어안고 체향을 맡으면 세상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충동을 억눌렀다.

들끓는 욕망에 굴복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한계를 정해두지 않으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알 수 없었다. 린델을 안전한 곳에 가두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아니라 호화로운 보석이 박힌 목줄도 생각했었다. 그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미움을 받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내면이 속삭였다.

선택의 저울 앞에서 카시어스는 매번 갈등했다. 위험한 상상은 끔찍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미치겠군.”

이럴 때면 세무흴만이 아니라 자신도 미친 것 같았다. 이름 없는 신이 아니라 한 인간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카시어스의 숭배는 약탈이 아니었다. 린델에게 빛나는 삶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카시어스는 쓴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손끝으로 탁자 위를 두드렸다.

톡톡톡.

무의식적인 행동은 초조함 때문이었다. 불안도, 걱정도 여전했다.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마음의 발작은 고질병이 되었다.

초조함, 불안, 걱정, 절망, 막막함, 괴로움. 마치 성배에 담긴 독약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의 찬양론자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카시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린델이 보고 싶었다.

린델이 일과를 마친 것은 정오가 훌쩍 지난 오후였다. 마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할 때쯤, 린델은 입고 있는 옷을 한 번 점검했다.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차에서 내렸다.

황제가 머물고 있는 저택의 별채 중 하나가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여섯 명의 마법사를 위해 주어졌다. 고급 전력이 머무는 곳인 만큼 경비도 삼엄했다.

입구에 서 있는 근위기사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린델을 들여보냈다. 린델은 복도를 재빠르게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중간에서 만난 시종이 오셨냐고 인사를 하는 것에도 대충 대답하며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 위에 놓인 거울 앞에 선 린델은 크라바트를 살짝 끌어 내렸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은 목과 턱 사이에 위치한 흔적을 비추었다. 살짝 자주색으로 변한 그것은 아무리 봐도 키스 마크였다.

“하아.”

린델은 한숨을 쉬며 크라바트를 놓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범인은 뻔했다.

어젯밤 늦게 린델의 침대를 찾은 카시어스는 잠만 자고 떠났다. 린델은 잠결에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카시어스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종종 있어왔던 일이라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전언도 없었기에 평소대로 구호소에서 병자를 돌봤다.

붉은 흔적을 알아본 것은 치유 마법으로 부러진 팔과 다리를 회복한 청년 장교였다. 나뭇가지에라도 긁힌 거냐고 물어보던 그는 곧 붉은 얼굴로 벌레에 물린 것처럼 보인다며, 어색하게 웃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린델은 옆에 선 브라크를 보았다. 그는 난처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린델은 브라크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린델보다 키가 훌쩍 컸고, 각도상 흔적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궁정 사교계에서는 사랑받은 흔적을 은근히 내보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귀부인들은 보란 듯이 가슴 위에 비단으로 된 패치를 붙이고 다녔다. 상대가 황제라면 여기저기 자랑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린델은 그게 싫었다. 침대 위에서 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천한 요부 소리는 이제 줄어들었다. 대신에 사람들의 욕망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황제가 총애하는 애인이란 스릴 넘치는 불륜 상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언행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시어스에게도 보이는 곳에 키스 마크를 남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그게 뭐 어떠냐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부러움을 사라고도 하면서 한 번씩 애매한 곳에 흔적을 남기곤 했다. 지난번에는 귀 뒤와 뒷목 사이로 머리카락으로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 위치였다. 오늘도 크라바트 너머로 살짝 드러났을 정도였다.

“어쩌나.”

린델은 다시 한 번 거울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크라바트로 완전히 가릴 수 없는 위치였다. 화장을 한다고 해도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겨우 키스 마크를 지우겠다고 치유 마법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린델은 자신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시종을 바라보았다. 린델의 개인 시종인 켈스는 벨룬드 공작 저택에서부터 린델의 시중을 든 장년의 사내였다. 유능하고 손재주도 좋은 그는 오늘 아침 린델의 옷시중을 들었다. 크라바트를 묶어준 켈스가 목의 흔적을 못 알아챘을 리 없었다.

“이거 알았죠?”

린델은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눈빛을 보내자, 켈스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명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린델은 켈스를 탓하지 않았다. 황제가 명령을 내렸으니 일개 시종인 켈스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켈스가 적당히 눈치를 줬을 텐데, 자신이 못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모든 원흉은 카시어스였다. 작정하고 저지른 일에다가 세심하기까지 했다.

린델이 의식적으로 목을 한 번 쓸었다. 카시어스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괜찮았다. 만약에 그가 독약을 내밀며 마시라고 한다면 잠시 주저할지는 몰라도 결국 그의 뜻을 따를 것이다. 생은 물론이고 죽음조차 모두 그에게 바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사랑받은 흔적은 집착이었다. 소유욕의 증거이기도 했다. 집착도 소유욕도 좋았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은 싫었다.

린델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문제만큼은 카시어스에게 제대로 따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켈스가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 린델에게 건넸다. 린델은 지체 없이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질 좋은 종이에 약혼식의 피로연 도중에 빠져나와 녹색의 방으로 찾아오라고 카시어스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녹색의 방이란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요새 사령관의 개인 응접실이었다. 그곳은 이제 할엔라드 황제의 개인 휴식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거라고, 그렇게 된다면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마지막 문장은 유치한 협박이었다.

황제는 개인의 예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의전 서열을 따져 식의 주인공이 밀려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빅토리아 황태녀의 약혼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카시어스가 피로연을 찾겠다는 소리는 농담에 가까웠다.

평소라면 그냥 웃어 넘겼을 텐데, 마음이 삐죽해진 지금은 두고 보자는 의욕이 넘쳤다.

“씻을 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약혼식에 늦지 않게 참석하시려면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합니다.”

황태녀의 약혼식이 저녁에 있었다. 린델은 빅토리아 황태녀의 친족 자격으로 약혼식의 증인이 되어 참석하기로 했다. 증인들은 약혼식의 주인공들과 함께 움직였다. 켈스의 말대로 지금부터 준비해야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린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준비하죠.”

카시어스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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