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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26/137)

-126화-

“폐하께서 아주 많이 낙담하신 것 같아요.”

린델은 빅토리아가 치장하는 것을 참관하고 있었다. 궁정에서 아름다운 귀부인의 치장은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고, 친분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미혼의 숙녀인 빅토리아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린델은 그저 가까운 친족으로 빅토리아의 초대에 응한 것뿐이었다. 린델이 입실을 했을 때, 빅토리아는 화장을 이미 끝내고 옷도 대부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남은 것은 마무리 장신구 정도였다.

빅토리아는 드레스가 아닌 기사 예복을 차려입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남장을 즐겨하는 덕분인지 어색함은 없었다. 거기다 새하얀 예복은 빅토리아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전쟁터까지 따라온 시녀가 빅토리아의 가슴에 금술로 된 견장과 훈장, 휘장을 달았다. 빅토리아의 모습은 점점 화려해지고 있었다.

시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빅토리아는 거울을 보는 대신에 린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제오늘 군사 회의가 아주 살벌했답니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아주 많이 낙담했고 그래서 회의가 살벌했다는 단순한 인과 관계 사이의 행간을 읽었다. 궁정 언어야 은유와 비유가 난무했지만, 빅토리아의 설명은 비교적 직접적이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은 간단했다. 린델이 황제의 청혼을 차버린 것이 원인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카시어스를 자극한 것은 빅토리아의 약혼식이었다.

린델은 이틀 전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카시어스를 떠올렸다. 분명히 그때의 카시어스는 낙담한 것 같긴 했다. 그래서 어설픈 유혹까지 하며 기분을 풀어주었다. 꽤나 힘들긴 했지만 다행히 잠들 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낙심한 상태란다. 오늘 자신의 목에 흔적을 남긴 이유가 그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어린애도 아니시면서 왜 그러세요.

또다시 카시어스를 달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술이 났다. 린델은 인상을 찡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를 근심케 하는 것이 어디 한둘입니까?”

“맞아요. 많이 있죠. 그래도 그중 하나나 둘 정도가 여기에 있어요.”

린델이 적당히 말을 돌렸지만 빅토리아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빅토리아가 빙긋 웃었기에 린델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냉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난처한 미소에 빅토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는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사생활까지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연애사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궁정 귀족이라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황제가 주는 총애를 탐욕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거절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

제국의 2인자인 빅토리아의 상황 역시 황제와 비슷했다. 빅토리아가 스웨인 남작에게 청혼을 한 것은 반쯤 이성이 나간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보고서야 그가 수호기사라는 것을, 주인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적지근한 연애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결심은 금방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를 잃어버릴 거라면 그냥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간의 상식으로 청혼은 사내가 여인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빅토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청혼을 누가 먼저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있었다.

어제 오후, 병상에서 일어나려는 그를 말리다가 그때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감히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빅토리아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빅토리아의 마음에 차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 그것 때문이었냐고 실망하는 척했더니,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경우만 봐도 권력자의 사랑이란 불합리하게 굴러갔다. 황제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린델은 황제 폐하의 공개 청혼을 거절했다.

린델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조용하고 성실하다고 말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앞장서서 돕는 것을 보면 헌신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빅토리아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앞에 섰던 린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협박은 단순했지만 진심이었기에 위협적이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앙갚음을 하겠노라 하던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황제께서 마냥 유순한 사람을 좋아하실 리는 없었다. 린델의 성격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었다.

연애사야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게 순리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빅토리아는 조금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폐하의 성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가까운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요.”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전하.”

“린델리프 경께서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잖아요.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명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결혼 서약서는 아주 완벽한 거죠. 안 그래요?”

빅토리아의 설득 아닌 설득에 린델은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달콤한 고백보다는 공증받은 서류가 확실하단다. 그건 언젠가 카시어스가 했던 말이었다. 빅토리아가 누구를 보고 배운 것인지 극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카시어스에게 배웠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동지가 생겼군요. 사랑의 완성을 결혼이라고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증명일 뿐이죠. 안 그래요?”

“네.”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린델은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자로서 말하는 거지만 망설일 필요 없어요. 폐하를 확실하게 붙잡아요. 린델리프 경. 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것보다 이것들 중에 어떤 게 좋을까요?”

빅토리아의 말에 시녀들이 린델 앞에 장신구가 놓인 벨벳 쿠션을 들어 보였다. 셋 다 머리빗 모양의 장신구였다. 각각 사파이어, 루비, 다이아몬드로 거의 예술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린델은 장신구를 천천히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빅토리아를 보았다. 빅토리아의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리던 평소와 달리 길게 땋아 내린 모습이었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에는 다이아몬드가 어울렸다.

“밤하늘을 닮은 전하의 머리에는 다이아몬드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린델이 다이아몬드를 권하자 다른 머리 장식은 금방 치워졌다. 빅토리아의 치장은 마무리 단계였다. 시녀 두 명이 망토를 고정하면서 견장의 금술을 다시 정리했다. 오른쪽 옆머리에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꽂고, 허리에는 검을 찼다.

“어때요?”

마지막에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빅토리아는 린델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오늘 누구보다 빛나야 하는 의무를 달성하고도 남을 정도로 멋졌다. 린델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멋지십니다.”

“린델리프 경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군요. 그럼 됐어요. 이제 가죠.”

아름답다는 말을 듣지 못했지만 빅토리아는 만족했다. 기사복을 입은 빅토리아는 신사의 에스코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린델은 그녀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스웨인 남작과 약혼식의 증인이 될 친족들이 모이기로 한 장소는 저택의 남쪽에 위치한 응접실이었다. 활짝 열린 응접실 문이 보일 때쯤에 빅토리아가 린델에게 속삭였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 도중에 살짝 빠져나가도록 해요. 황제 폐하께서 홀로 쓸쓸하실 테니까, 꼭 찾아뵈어요. 이건 부탁이에요.”

빅토리아의 부탁에 린델은 웃었다. 빅토리아의 꿍꿍이는 너무 직접적이었다. 그래도 이런 것까지 빅토리아가 카시어스를 닮은 게 신기했다.

“이미 폐하와 약속이 있습니다.”

“잘됐네요.”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린델은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를 위로하기보다는 싸울지도 모를 거라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잘됐다고 환하게 웃은 빅토리아는 그대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린델은 적당한 곳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빅토리아가 다가가자 스웨인 남작의 얼굴에 미소가 생겨났다. 그 역시 근위기사 예복을 입고 있었다. 나란히 서자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친족들이 축복의 말을 건넸다. 전쟁터에서 급하게 준비한 약혼식이기에 이곳에는 마땅히 참석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황태후나 씨디프 공작, 그리고 빅토리아의 외숙부인 블랑쉔 후작도 없었다. 그래도 혈연으로 얽힌 귀족들인 만큼 근위기사와 장군 몇이 친족들로 나섰다.

린델은 인사를 하는 친족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하는 빅토리아를 보며 카시어스를 떠올렸다. 빅토리아는 그의 후계자였다. 후계자의 약혼식에 그가 황제라는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불행한 일이었다.

매번 생각하는 일이지만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의 자리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막중하고도 무거운 책임이 카시어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카시어스가 이처럼 귀찮고 고달픈 직업은 또 없다고 투덜거린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란디스 메시스가 끝나고 뒷수습을 하면서 다음 해 예산을 책정할 때였다. 서류 더미에 둘러싸인 남자를 위해 린델도 손을 보태야 했을 정도였다.

린델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카시어스를 상대하기 위해 끌어 올렸던 의욕이 꺾였다. 그래도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같은 일이 또 반복된다면 진짜 화를 낼 거라고 경고는 해야 했다.

카시어스의 성격이라면 한번 화를 내보라고 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그의 성격을 보자면 그럴 확률이 아주 높았다.

말로는 못 이긴다니까.

린델은 카시어스의 말문을 막히게 할 날을 꿈꿨다.

약혼식이 열리는 홀은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독수리가 그려진 휘장으로 장식했다. 황제가 인정한 황실의 행사라는 의미였다. 바닥에는 아름다운 양탄자가 깔렸다. 색색의 장미가 단상을 장식했고, 천장에는 선스톤이 빛나는 샹들리에가 홀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시종들이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게 꾸민 홀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했다. 모두 할엔라드 군의 장군과 고위 장교들이었다.

제국의 2인자인 황태녀의 약혼식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앞으로의 전황과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되자 빅토리아 황태녀와 스웨인 남작이 나란히 등장했다. 예식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빅토리아 황태녀였다. 드레스 대신에 기사 예복을 입은 그녀는 어느 때보다 빛났다.

약혼식은 결혼에 비하면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사제도 서약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단상에 선 두 사람이 증인과 하객 앞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것이 전부였다.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빅토리아 황태녀와 스웨인 남작이 마지막 말을 동시에 외치는 것으로 예식이 끝났다.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향해 환호와 축복의 말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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