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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9/137)

-129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한 수작이었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기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린델에게 친구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제라르뿐인 것도 있었지만, 여기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인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린델은 제라르를 남겨둔 채 후원으로 향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린델이 후원에서 만난 어떤 존재였다. 그건 아무래도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이라고 하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선명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그것이 몬스터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의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었다.

“헉.”

카시어스가 검을 쥐자 일로드가 발작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흉흉한 기세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일로드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후원으로 난 창을 향해 걸어갔다.

“오스카. 안으로 들어와 손님을 지켜라!”

복도를 향해 커다랗게 외친 카시어스는 그대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피로연을 위해 저택 건물은 물론이고 정원 곳곳을 선스톤으로 환하게 밝혀놓았다. 경비병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시어스는 단숨에 린델을 찾았다. 후원 계단과 가까운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린델은 카시어스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분수대 주변은 선스톤으로 밝힌 등이 가득했다. 그래서 린델의 어깨에 검은 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게 잘 보였다.

고양이처럼 보이는 그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카시어스는 거의 날다시피 린델을 향해 뛰어갔다. 귀여운 동물의 모습으로 유순한 척하며 사람의 품에 안기는 몬스터는 그만큼 지능이 있다는 소리였다. 저 작은 발끝에서 얼마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올지는 오로지 신만이 아셨다. 반쯤 거리가 줄어든 순간에 린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그것이 카시어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커먼 덩어리의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칼을 집어 던지기에는 린델이 위험했다. 그렇다고 마력으로 붙잡을 정도로 섬세한 컨트롤에는 자신이 없었다.

“린델. 그걸, 고양이를 놔!”

불길함을 느낀 카시어스는 크게 외쳤다. 그제야 린델이 몸을 돌렸다. 카시어스를 확인한 린델의 하늘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내려놓으라고!”

다급해진 카시어스가 한 번 더 외칠 때였다. 동시에 린델이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순간에 린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시어스는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눈으로는 린델이 사라진 걸 확인했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본 재주는 단순히 모습을 감추게 하는 환영 마법이 아니라 순간 이동 마법이었다. 순간 이동 마법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드는 것이 먼저였다. 이제는 사료조차 없이 이름만 남은 마법을 누군가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린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린델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실험도 했다. 제국의 절반쯤 되는 거리에서도 린델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런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린델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당황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자마자 단단하던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끔찍한 악몽이 현실이 되어 카시어스를 덮쳤다.

“린델?”

절박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

린델은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히 카시어스가 자신을 불렀는데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선스톤으로 반짝거리던 분수대는 온데간데없고 밤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린델이 서 있는 곳은 산중의 목초지였다. 나무는 없지만 풀과 꽃이 가득했다.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 덕분에 발치에 핀 들꽃이 잘 보였다.

린델은 낯선 곳에 홀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두려움도,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게 신기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린델은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카시어스와 싸웠다. 아니, 싸웠다기보다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화를 냈다. 화가 났고, 싫다는 말을 마음껏 했었다. 물론 그래도 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카시어스의 손을 피했다. 그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을 때는 조금 통쾌했고 또 슬펐다.

속상한 게 누군데.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제멋대로라고 말하지 못한 걸 후회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아무리 사랑해도 이렇게 싸울 수 있구나 싶었다. 중간에 제라르를 만났지만 혼자이고 싶었다. 아무리 친구라도 카시어스의 흉을 볼 수는 없었기에 인사만 하고는 후원으로 향했다. 피로연 때문인지 후원에는 경비병 몇 명 빼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기분을 가다듬으며 분수대로 걸어가던 린델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분수대 옆의 석상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린 사내아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동그란 머리가 검은 것이 보였다.

황제가 징발한 저택에서 일하던 시종과 시녀, 하인들은 모두 내보낸 지 오래였다. 황제의 숙소가 된 이곳에 어린아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의아한 기분에 린델은 아이를 불렀다. 이름이 뭐냐고,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집은 어디냐고 물었다. 고개를 든 아이는 초록색 눈을 순진하게 깜빡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린델의 왼쪽 다리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키는 겨우 린델의 허벅지밖에 오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봐도 여섯 살 전후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아이의 옷차림은 아주 훌륭했다. 어쩌면 어른들과 함께 빅토리아 황태녀의 약혼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몰랐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는 린델의 오랜 기억을 자극했다. 잉그란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곤경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싶었다.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리에 매달린 아이를 들어 올렸다. 작은 몸집이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아이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마냥 린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이름이 뭐냐고 다시 물어볼 때였다.

‘린델. 그걸, 고양이를 놔!’

카시어스의 외침을 듣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내려놓으라고!’

그를 부르려고 했다. 그 순간에 주위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고 카시어스도 사라져 버렸다. 품에 안았던 아이도 없어졌다.

“설마, 기절이라도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밖에 없었다. 인지 못 한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대로 쓰러졌을 수도 있었다.

“그건 아니야.”

뜻밖의 목소리에 린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에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자신의 오른쪽에 서 있었다. 린델은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쪼그려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긴 속눈썹을 팔락거리며 순한 눈을 깜빡거렸다.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난 아니니, 아이 취급하지 마라.”

“난 기절을 한 게 아니고, 너는 아이가 아니라고?”

“그래.”

아이는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린델은 자신이 기절해서 꿈을 꾸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꿈 치고는 조금 이상하고 생생했지만, 꿈이란 원래 그런 법이었다. 린델은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아이로 보이니까 어쩔 수 없어.”

“태평한 성격이로군.”

작은 입술로 어른스럽게 말한 아이는 또다시 사라졌다. 역시나 꿈이었다. 린델은 아프지도 않은 다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역시나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화톳불과 함께 두 명의 남녀가 있었다.

긴 갈색 머리를 풀어 내린 여인은 뜻을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제자리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옛날 양식의 하얀색 튜닉 드레스가, 긴 갈색 머리칼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불꽃에 너울거렸다. 보석이 달린 팔찌가 찰랑거렸다. 가느다란 팔의 움직임이, 허밍이, 미소가 아름다웠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넋을 놓고 여인을 바라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혼을 빼앗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쁘다.”

여인이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도는 모습에 린델은 조그맣게 감탄했다.

“그녀의 이름은 데이지나.”

린델은 다시 옆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었다. 린델의 가슴에 닿을 정도의 소년이었다. 그는 린델을 보지 않고 화톳불의 두 사람을, 정확히는 여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는 애수에 젖어 있었다.

“나의 디비티에지.”

뜻밖의 단어에 린델은 황급히 남녀를 확인하고는 다시 소년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린델보다 키가 훌쩍 큰 청년이 되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청년의 모습은 화톳불 앞에 앉아 있는 사내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큰 키, 검은 머리,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까지 똑같았다.

이건 그냥 평범한 꿈이 아니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린델은 이게 어떤 계시라고 생각했다. 혹은 예지일 수도 있었다.

“데이지나는 저 시점에서 오래 살지 못했어.”

“그게…….”

“디비티에를 잃은 그는 홀로 남았지.”

스스로를 그라고 지칭하는 것도, 마치 과거처럼 말하는 것도, 그러면서 행복하고도 울 것 같은 얼굴인 것도 다 이상했다.

디비티에가 죽고 그는 홀로 남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어떻게 되나요?”

“미쳐. 보통은 미치지.”

보통은 미친단다. 린델은 카시어스를 떠올렸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였어. 가장 어린 나이에 9서클의 마법사가 되었지. 세상에 그와 대적할 자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어. 기사와 마찬가지로 마법사가 미쳐서 폭주를 하게 되면 살아 있는 재앙이 되어버려. 저주와 독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메테오를 시전할 수 있었으니까.”

린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떴다. 메테오라면 인위적으로 유성을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소환 마법이면서도 최악의 물리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메테오 한 번이면 닐르와 같은 도시는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메테오를 시전할 수 있는 미친 마법사라면 재앙이 맞았다.

“네 개의 나라와 열두 개의 자유 도시를 박살 냈지.”

살벌한 고백에 린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옆에서 사실을 건조하게 말하는 청년과 화톳불 앞에 앉아 여인을 숭배하듯 바라보고 있는 사내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하시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너도 그의 디비티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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