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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131/137)

-131화-

“됐다.”

짧게 일축한 카시어스가 한 번 더 손짓했다. 그제야 뒤센트 자작은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카시어스는 탁자 위에 놓인 전술 계획서를 손끝으로 살짝 두드렸다. 세무흴이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아니라면 린델을 데려간 놈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린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검은 덩어리는 이지를 가진 어떤 존재였다. 몬스터가 아니라면 요정일 수도 있었다. 고요정 시대의 긍지 높은 숲의 종족이 아닌, 짓궂은 장난을 치는 페어리(Fairy)는 골치 아픈 상대였다. 구전으로든 이야기책으로든 아이를 납치하는 요정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다. 린델이 스물한 살의 청년이라는 것은 요정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요정의 세계로 납치당한 아이의 결말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곳에 남아 인간이 아니게 되거나, 아니면 시간이 훌쩍 흐른 다음에야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어느 것이든 다시는 린델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사별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니지.

카시어스는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생각을 붙잡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은 평생 동안 린델을 찾아 대륙을 떠돌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총에 맞아, 혹은 칼에 찔려 죽은 린델의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듯 악몽의 어딘가를 헤맬 것이다.

“쯧.”

소름 끼치는 상상에 가볍게 혀를 찬 카시어스는 머리 한쪽이 지끈거리는 것을 무시했다.

사람을 이렇게도 잃어버릴 수 있었다.

죽음이 아니라, 살아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난 필라무트 제전에서 린델이 총에 맞고 쓰러졌음에도 제국의 황제였기에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수만 명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결정권자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함에 폭력적인 충동이 치밀었다. 그나마 자신이 모든 것을 때려 부순다고 해도 린델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차가운 현실이 카시어스의 이성을 지탱했다. 아직은 미칠 때가 아니었다. 끝이라고 확정될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카시어스는 시종에게 근위기사단장을 불러 오라고 명령했다. 전투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 * *

시아무크의 황제인 세무흴의 등장에 린델은 뒤로 한 발자국 더 물러났다. 그의 눈에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아무크와 할엔라드의 복식은 비슷한 편이었다.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예복을 입은 세무흴의 뒤로 시종으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이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세무흴은 체격이 컸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하게 각진 얼굴은 굳센 기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시어스만큼 대단한 존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대신 번들거리는 눈빛이 불길했다.

석상 앞에 선 세무흴은 옆에 선 시종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두 나라의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 린델은 그들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세무흴이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세무흴은 황성 지하에 묻혀 있던 석상을 파냈지. 정확히는 그가 세무흴을 유인했어. 마신과 계약한 그는 정신 조작을 할 수 있게 되었거든. 그는 세무흴을 이용해 봉인을 풀 거야. 이미 거의 풀렸어.”

“?!!”

석상과 세무흴을 바라보고 있던 린델은 다급히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년은 석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미쳐 있어. 그를 죽여야 해.”

그제야 린델은 청년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앞선 긴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청년의 말대로 그는 재앙이 될 것이다.

린델은 청년을 계속 바라보았다.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마주해 왔다. 깨끗한 미소는 조금 슬퍼 보였다.

“이런 이야기를 알아요. 그는 미쳤지만, 당신은 그의 선한 마음일 거예요. 그가, 당신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막고 싶은 거겠죠.”

“똑똑하군. 겁도 없고.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하지만 그는 너무 강해요. 어떻게 그를 막을 수 있죠?”

불타던 도시를 배경으로 그는 영웅 네 명을 상대해서 거의 호각으로 싸웠다. 마지막에 가서야 수세에 몰리긴 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너의 헤루스에게 그 끔찍한 반지를 모두 벗어던지라고 해. 괜찮을 거야. 너는 그의 디비티에니까.”

청년이 최종 결론이라고 했던 것이 다시 언급되었다. 린델이 카시어스의 힘을 느낀 것은 차원의 틈을 막을 때였다. 다섯 개의 반지를 뺀 카시어스의 마력은 무시무시했다.

자신이 디비티에이니 반지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카시어스가 사내를 상대했던 영웅들보다 강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 순간에 버럭거리는 외침이 들렸다. 석상 쪽을 바라보자 무어라 커다랗게 소리친 세무흴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의 뺨을 쳤다. 얼마나 힘이 셌던지, 단 한 번에 시종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세무흴 주위에 있던 다른 시종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주인의 패악질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몇 번 더 커다랗게 소리친 세무흴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시종들은 다급히 뒤를 따랐고, 자리에 주저앉은 시종도 천천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청년이 가볍게 혀를 찼다.

“정신 조작 때문에 폭력적인 성향이 더 심해졌어.”

“그가 전쟁을 부추겼나요?”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끝 모를 자신감과 망상을 심어줬지. 봉인을 풀려면 피를 바쳐야 하니까.”

린델은 그제야 세무흴이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이유를 깨달았다. 피를 바쳐 마신과 계약한 봉인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요?”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야.”

청년의 단호한 말투는 어딘가 카시어스를 닮아 있었다. 해야 하는 일이 맞았다. 린델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았을 텐데요. 제가 아니라.”

결국 전면에 나설 사람은 카시어스였다. 당사자에게 알리는 것이 혼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냐고 의견을 구하자 청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의 헤루스는 나를 보자마자 죽이려고 했어.”

“설마요.”

“네 눈에는 내가 어린아이로 보였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날 검은 고양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의 헤루스에게는 이상한 생물로 보였겠지. 말도 통하지 않았을 테고. 게다가 네 헤루스는 너무 강해. 붙잡아두지 못했을 거야. 정말 운이 좋았어. 하필이면 네가 그의 디비티에라니.”

청년은 스스로 설명하고 납득해 버렸다. 답답해진 린델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던 청년이 다시 웃었다.

“행운은 신의 영역이지.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날을 준비해 왔을 거야.”

“신들께서 준비해 왔다고요?”

“그는 살아 있는 재앙이 될 테니까. 이제 영웅은 없어. 그러니 특별한 안배를 해야지. 아주 정교한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야.”

청년의 설명은 제멋대로였고 린델은 반 정도만 이해했다. 이게 운명이란다. 재앙이 될 사내를 막기 위해 카시어스가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제 저를 돌려보내 주세요. 폐하께 당신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지금 네 헤루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거야.”

“네?”

“시간 조절을 못 했거든.”

이번에 린델은 청년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청년은 훌륭한 화자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대부분의 헤루스는 디비티에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해.”

“?”

“네가 없으면 맹렬한 봄도, 영광스러운 여름도, 찬란한 가을도, 향기로운 겨울도 돌아오지 않아. 시린 바람이 부는 동토를 맨발로 헤매게 돼. 영원히.”

그건 청년의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동토를 헤매다 미쳐 버렸다. 그리고 그건 카시어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영원히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건 무섭고도 슬픈 일이었다.

“그런 건…… 싫어요.”

“그래. 싫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어. 디비티에를 잃고 그처럼 미친 헤루스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너의 헤루스보다 먼저 죽지 마.”

“그건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닌 걸요.”

“똑같은 말을 데이지나도 했었지. 빌어먹을 운명이야.”

슬픈 얼굴로 웃은 청년이 석상과 린델을 한 번씩 바라보다가 뭔가 더 필요하다고 중얼거렸다.

“손을 내밀어 봐. 이렇게.”

린델은 청년이 하라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황금빛의 실이 린델의 손바닥 위에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네모반듯한 금색 종이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글씨가 적혀 있는 딱딱한 재질의 어떤 것이 린델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절대 방어 스크롤이야.”

“스크롤이요?”

“몰라? 종이에 마법을 담은 거.”

“알긴 아는데,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 같아서요.”

린델도 스크롤 마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린델이 마법사임을 밝혀냈던 종이 반딧불 역시 스크롤 마법의 일종이었다. 레드크리스탈 가루로 잉크를 만들어 특별한 종이 위에 발광 마법의 마법진을 그려 넣는 방법이었다. 마법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그것도 실수 없이 그려야 했기 때문에 마법사이면서도 아주 정교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는 이들만 가능한 마법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실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절대 방어란다. 엄청난 마법이 종이 한 장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걸 손에 쥐고 절대 방어라고 외치면 돼. 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 거야. 꽤 많이 모였군. 그래도 10만 명 정도는 한동안 괜찮을 거야. 너의 헤루스만이 아니라, 너도 영웅이 되는 게 좋겠지. 안 그래?”

10만 명이라는 말에 린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종이 한 장으로 그 많은 사람에게 절대 방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데 놀랐다가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린델은 손 안에서 반짝이는 종이를 확인하고는 청년을 보았다.

“하지만 이건 꿈인 걸요. 깨고 나면 이게 없어지지 않을까요?”

“이게 꿈이라고?”

“그럼 아닌가요?”

“기절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시간이 없군. 돌아가면 정신이 없을 거야. 잊지 마. 곧 봉인이 풀려. 너의 헤루스에게 잘 설명해. 이건 잘 챙기고.”

청년이 스크롤을 린델의 손에서 빼내 옷깃 안으로 집어넣으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면서 또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청년이 사라졌다. 푸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초원 위에 며칠 전에 보았던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할엔라드와 시아무크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여전히 엄청난 위용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린델을 놀라게 한 것은 쌀쌀한 바람과 바람에 실린 냄새였다. 풀과 흙, 그리고 쇠와 화약 냄새가 났다. 이곳이 꿈 속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런데 장소가 이상했다. 한밤의 분수대가 아니라, 한낮의 평원에 서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린델?”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등 뒤에서 카시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린델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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