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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137)

-132화-

카시어스는 물론이고 그의 측근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전투를 앞둔 이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완전 무장을 한 채였다. 지난 전투에서는 린델 역시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의 시선이 린델을 향했다. 다들 놀라고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폐하?”

린델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카시어스를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굳어 있던 카시어스가 린델 쪽으로 걸어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카시어스가 멀지 않은 거리를 단번에 좁히더니 그대로 린델을 와락 끌어안았다.

“세상에!”

비명처럼 짧게 외친 카시어스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카시어스에게 파묻히다시피 안긴 린델은 마주 껴안지 못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폐하? 어떻게 된 일이죠?”

린델은 자신이 평원의 언덕 위에 서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린델의 어깨를 붙잡고는 눈을 맞춰 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도대체 어디에 갔던 거냐?”

“어디를 갔다니요? 제가 기절을 한 게 아닌가요?”

“넌 사라졌어. 그것도 엿새나. 그리고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고.”

“엿새나요?”

“그래.”

엿새라는 소리에 린델은 깜짝 놀랐다. 청년이 시간을 조절하지 못했다고, 시간이 없다고 한 것이 기억났다. 청년과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실 시간은 엿새나 지났단다.

“몰랐어요.”

“도대체 너는…….”

긴장감 없는 린델의 반응에 카시어스는 할 말을 잃었다. 엿새였다. 엿새 동안 린델을 찾지 못해 애가 타다 못해 미칠 것 같았다. 아직 시신을 발견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얼마나 진정시켰는지 모른다. 그런데 린델은 홀연히 사라졌을 때처럼, 아무 징조 없이 나타났다.

세무흴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카시어스는 갑작스럽게 느껴진 린델의 기척에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혹시나 싶어 오른쪽을 돌아보자 린델이 등을 지고는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은 사라지기 직전 그대로였다.

젯타스시여.

카시어스는 신을 찾았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도 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린델은 자신이 엿새나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못 한 것 같았다. 요정의 장난이라면 고약했다.

“무사하게 돌아왔으니 됐어. 괜찮아.”

아주 침착하게 괜찮다고 하는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안도하지 못했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카시어스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곧 봉인이 풀릴 거예요.”

“봉인?”

“세무흴 황제가 황궁 지하에서 석상을 발견했어요. 그냥 석상이 아니고, 고요정 시대의 마법사가 스스로에게 석화 마법을 걸어 봉인을 한 거였어요. 그의 이름은 티나사엣인데,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미쳤어요. 봉인이 풀리면 그는 재앙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다닐 거예요. 티나사엣은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이거든요. 운석 소환을 쓸 줄 알아요. 이걸 어떻게 알았냐면, 절 데려간 사람이 티나사엣이었거든요. 아, 미친 티나사엣이 아니라 선한 마음을 가진 티나사엣이요. 그가 설명해 줬어요. 알아요. 제가 흥분한 거,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모두 사실이에요. 지금 정신을 잃을 수 없으니까 그냥 들어주세요.”

린델은 횡설수설하는 자신을 한 대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어째서 티나사엣이 처음부터 천천히 인과 관계를 설명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불행히도 지금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카시어스는 흥분한 린델을 기절시킨 전적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린델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다행히 카시어스는 린델의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지 않았다. 석상이라는 단어가 린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석상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복잡한데, 그 석상이 미친 마법사고, 그리고 세무흴을 미치게 만들었어요. 그가 전쟁을 끝내지 않은 것도 석상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예요. 곧 봉인이 풀릴 거라고, 그리고 폐하께서 반지 여섯 개를 모두 벗어야 한다고 했어요.”

“네가 요정에게 잡혀간 게 아니었군.”

카시어스가 혀를 가볍게 차고 있는데 근위기사단장인 시베르 백작이 다가왔다. 시베르 백작 역시 와병 중이라는 린델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충직한 성격이었고 전투를 앞둔 황제에게 상황을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폐하. 세무흴의 깃발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확인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시베르 백작의 말에 카시어스는 맞은편 언덕을 보았다. 그곳에는 확실히 시아무크의 황제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콧수염을 기른 세무흴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시베르 백작이 가리킨 곳은 맞은편 언덕이 아니라 시아무크의 진영이었다. 백마 여덟 마리가 이끄는 노출된 마차에 사람 크기의 석상이 실린 채 시아무크 진영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또한 스무 명이 넘어 보이는 기사가 마차를 호위하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시아무크 군인들은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평원이라는 지형적 상황 때문에, 맞은편에 자리 잡은 할엔라드 진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짜 미쳤군.”

카시어스는 미친 짓을 하는 세무흴을 욕했다.

“저 석상이에요.”

린델이 손끝으로 석상을 가리켰다. 거리 때문에 석상은 개미보다 작게 보였다. 카시어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했다. 린델의 설명 때문만이 아니라 석상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시커먼 악의였다.

“저것을 부숴버려야 한다는 거지?”

“아니요. 그는, 티나사엣은 마신과 계약을 했고, 그래서 석상을 부술 수는 없어요. 봉인이 풀린 후에 죽여야 해요.”

“까다로워.”

“제 말을 믿어주시는 거예요?”

“네가 사라지는 걸 직접 눈으로 봤어. 믿지 않을 수가 없지.”

눈앞에서 사라진 린델이 엿새나 지나고서야 홀연히 나타났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린델이 장난기 넘치는 요정에게 사기를 당한 거라도 괜찮았다. 저딴 석상 따위는 부숴버리고 미쳐 버린 세무흴을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카시어스는 여섯 개의 반지를 모두 벗어 린델에게 주었다. 그리고 반지를 받아 든 린델의 손을 꽉 쥐었다. 카시어스가 기억하는 한, 자신의 손가락에는 언제나 반지가 하나 이상씩 자리했다.

반지 없이 손가락이 깨끗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엄청난 힘이 넘쳐났다. 그런데도 린델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었다.

카시어스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린델을 보았다.

“여기서 기다려. 다시 사라져 버리면…….”

“돌아오겠습니다. 지금처럼.”

린델이 카시어스의 마음에 꼭 드는 대답을 했다. 아무리 약속을 하고 맹세를 해도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수두룩했다. 그저 괜찮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꼭 이야기해 줘야 해. 엿새나 기다렸어.”

“어, 그건……. 그럴게요. 무사히 돌아오세요. 아, 그는 절대 방어 마법을 쓸 수 있어요. 조심하셔야 해요.”

“무사히 돌아올게. 맹세해.”

카시어스는 잡고 있던 린델의 손등에 입맞춤을 한 다음에 뒤돌아섰다. 기다리고 있던 시베르 백작을 불렀다. 근위기사들은 이미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카시어스는 냉혹한 승자가 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언덕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할엔라드의 근위기사 500명이 시아무크 군의 좌익을 향해 돌진했다. 거칠 것 없는 호쾌한 질주였다. 평원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전열을 정비하고 있던 양국 군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할엔라드의 황제기가 펄럭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가장 앞선 사람이 할엔라드의 황제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보았다.

아직 개전 전이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나팔을 불기도 전에 공격을 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깃발 신호로 대기하라고 명령받았던 할엔라드 군의 동요는 적었다. 반면에 시아무크 군의 좌익은 허둥대며 검과 총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할엔라드의 근위기사단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카시어스를 비롯한 근위기사단은 여덟 마리의 말이 이끄는 석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대로 베어 넘기며 맹렬히 내달렸다.

언덕 위에 서서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린델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직 석상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봉인이 풀리고 석상이 사내로 돌아오는 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명했다. 그는 눈짓 한 번으로 불을 만들어냈다. 벼락을 내리꽂았다. 평원이 한순간에 불바다가 될 것이다.

“아.”

린델은 불현듯 청년이 품 안에 넣어주었던 스크롤을 기억해 냈다. 절대 방어가 있었다. 린델이 카시어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급히 옷깃 안쪽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에 이변이 일어났다. 새하얀 석상이 돌연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린델이 기억하는 검은 로브가 맞았다.

사내, 혹은 청년. 미친 마법사 티나사엣이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그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심상치 않은 마력에 석상을 호위하던 기사들조차 주춤거리며 물러날 정도였다.

그의 봉인이 풀리자마자 근위기사단이 할엔라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카시어스는 말을 박차고 뛰어올라 사내에게 쇄도했다.

단숨에 몇십 미터나 되는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카시어스의 검은 사내에게 닿지 않았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사내를 둘러싸고 있었다. 절대 방어 마법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 같았다. 린델이 숨을 들이쉬는 짧은 순간에 카시어스가 뒤로 훌쩍 물러났고 동시에 그곳에만 벼락이 내리쳤다.

“세상에.”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굉음 속에 누군가의 신음과 한탄이 들려왔다. 린델도 같은 심정이었다. 방관자가 되어 과거의 일을 지켜볼 때는 숨이 막혔지만 지금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카시어스는 무사했다. 그를 둘러싸고 푸른 마력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석상을 이끌고 있던 여덟 마리의 말도, 호위하던 기사도, 주변의 병사들도 검게 그을려 쓰러진 상태였다.

“어떻게!”

“젯타스시여!”

“퇴각해야 합니다!”

할엔라드의 수뇌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외쳤다. 린델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내는 자유자재로 대규모 공격 마법을 구사했다. 그것도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린델은 품 안에 있는 스크롤을 꼭 쥐고 중얼거렸다.

“절대 방어.”

시동어와 함께 세상은 다시 굉음과 빛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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