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눈을 꼭 감은 린델은 고통이 없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졌다. 귀가 멀 것 같은 엄청난 소리도, 땅의 흔들림도, 무엇인가 타는 냄새도 모두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영원할 것 같은 순간이 지나고 천천히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푸르러야 할 평원에는 그을음이 가득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할엔라드와 시아무크의 병사들을 감싸고 있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체였다.
절대 방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린델이 손에 들고 있는 스크롤과 황금실 같은 걸로 연결되어 있었다. 십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뻗어 나오는 빛줄기 때문에 린델 자체가 번쩍거렸다.
누가 봐도 벼락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한 것은 린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시각적 효과였다. 공포와 두려움에 주저앉고, 넘어지고, 엎드린 병사들의 시선이 린델을 향했다.
“어…….”
린델은 티나사엣이 너도 영웅이 되는 게 좋겠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너무 요란해서 아연해질 정도였다.
“린델리프 경. 경이 한 거예요?”
옆으로 다가온 빅토리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녀도 반짝거리는 황금색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제가 아니라, 이 스크롤이요. 설명하기가 복잡한데―”
복잡하다고 하려던 린델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카시어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기 때문이다. 또다시 그의 검이 막혔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았다. 카시어스에게서 푸른색 기운이 더 진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붉은 화염이 카시어스를 덮쳤다. 마치 성벽과도 같은 거대한 불꽃이 카시어스와 시아무크의 병사들을 집어 삼켰다. 황금색의 절대 방어 마법이 병사들을 지켜주었다. 대신에 린델이 들고 있던 스크롤의 반짝임이, 마치 컵 속의 물이 줄어드는 것과 같이 사라졌다. 마법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린델은 간절히 카시어스를 응원했다.
그리고 그건 자룬타오드 평원에 선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병사들조차 악몽 같은 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카시어스는 화염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사내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검은색의 보호막을 뚫었다. 사내의 오른팔이 한 번에 잘리는 것이 린델의 눈에도 들어왔다. 마신과 계약했다는 사내의 피는 붉었다.
한 번 기세를 잡은 카시어스는 그대로 사내를 몰아붙였다. 검은 보호막은 카시어스의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카시어스의 검이 사내의 목을 베었다.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린델이 들고 있던 스크롤이 산산조각 나듯 흩어지면서, 병사들을 감싸고 있던 황금색 보호막도 사라졌다.
그사이 카시어스는 바닥에 떨어진 사내의 머리에 검을 찔러 넣어 높이 들어 올렸다. 카시어스의 푸른 마력이 불꽃처럼 사내의 머리에 옮겨 붙었다. 피를 흘리는 머리가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누군가가 환호를 질렀다. 비명에 가까운 함성과 감탄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카시어스는 병사들의 환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단을 불러 말에 올라탔다. 그가 향한 곳은 시아무크의 황제기가 있는 언덕 쪽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빅토리아였다.
“전군에게 정렬 신호를 보내. 포병대 전체에게 포격을 명한다. 조준은 필요 없다. 적진을 향해 쏘라고 해. 어서!!”
황제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군 명령권은 빅토리아에게 있었다. 그녀의 명령에 깃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시아무크 제국이 화평을 제안한 것은 자룬타오드 평원의 두 번째 전투가 끝나고 6일이 지난 후였다.
때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장소는 할엔라드 군이 점령한 파드녹의 가장 큰 저택의 연회장이었다. 연회장에는 할엔라드의 장군들이 대부분 자리했다.
“짐이 점령한 틀루엔과 파드녹은 물론이고 에시고르, 기쉐롤트를 복속시키겠다. 그리고 시아무크가 지불할 전쟁 배상금은 황금 3만 톤이다. 새로운 시아무크의 황제에게 짐의 말을 전하라.”
할엔라드의 황제, 카시어스는 백기를 들고 찾아온 시아무크의 사신을 향해 승자의 오만한 권리를 휘둘렀다.
전쟁 배상금이 황금 3만 톤이라는 말에 시아무크의 사신은 물론이고, 할엔라드의 장군들과 대신들 역시 놀란 얼굴을 하고 황제를 바라볼 정도였다. 황제의 말을 받아 적던 서기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리국이 점령지를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배상금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금 3만 톤은 시아무크의 재정 상황을 단번에 악화시킬 만한 금액이었다.
“할엔, 할엔라드의 황제께 아뢰옵니다. 전쟁 배상금으로 황금 3만 톤은 전례가 없었사옵니다.”
시아무크의 사신이 더듬거리며 항의했다. 너무하다고 하려던 것을 겨우 참아냈다.
자룬타오드 평원의 전투에서 시아무크는 두 번 모두 패배했다. 특히 두 번째는 치명적이었다.
세무흴 황제는 죽고 황제기를 빼앗겼다. 황제의 시신은 수습조차 하지 못했다. 기습적인 포격으로 병사들은 제대로 싸우지 못한 채 전장을 이탈했다. 할엔라드 군에게 쫓기고 쫓겨 파드녹을 내어주고 에시고르까지 밀려났다.
다음 날, 할엔라드에서는 세무흴 황제의 시신을 정중히 돌려주었다. 그리고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5일 안에 정하라고 했다. 에시고르에는 3만 명의 병사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지만 사기가 완전히 꺾여버렸다.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군들까지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정할 세무흴 황제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혼란은 가중되었다. 그리핀이 하루에 몇 번이고 수도를 왕복했다. 그러나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가 너무 어린 탓에 그를 둘러싼 어른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았다. 결국 지지난 밤, 극비리에 수도로 귀환한 차랄랑포스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황위에 올랐다.
피비린내 나는 황좌에 오른 차랄랑포스 대공은 제일 먼저 할엔라드와의 화평을 명했다. 어떤 조건이든 다 받아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황금 3만 톤은 너무 엄청났다.
시아무크의 사신이 전례를 들먹였지만 황제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짐은 이대로 군을 이끌고 포아덴으로 진격할 수도 있다. 그대는 바틀로뮤른의 지하 보고를 본 적이 있나? 그곳을 열면 황금 3만 톤만 있을까?”
“그, 그건…….”
“짐이 그럴 수 있다. 그러길 바라는가?”
황제의 목소리는 멋졌지만 위협은 사나웠다. 시아무크의 사신은 물론이고 그와 동행한 이들 역시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포아덴은 시아무크 제국의 수도였고, 바틀로뮤른은 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시아무크 황궁의 다른 이름이었다. 눈앞에 있는 할엔라드의 황제라면 포아덴을 점령하고 바틀로뮤른의 지하에 있는 보물 창고를 털어버리고도 남았다.
화평을 위해 적진에 찾아든 시아무크의 사신들은 지난 전투에서 할엔라드의 황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봤었다.
영웅과 악마의 싸움은 무시무시하다는 말로 모자랐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그쪽만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권좌에 앉은 붉은 머리의 사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남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륙 최강국의 황제이자, 혼자 힘으로 군대를 상대할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이기도 했다.
영웅의 의지로 시아무크는 물론이고 대륙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다. 멸망하기보다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는 게 나았다.
“주군께 전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라.”
황제의 명령에 절을 하려던 시아무크의 사신은 주춤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발의 청년이 수선화를 들고 나타났다.
시아무크 측 사람들은 청년이 소문의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테누안이 잃어버린 막내 왕자의 이야기는 시아무크 제국에서도 유명했다. 그리고 지난 전투에서 그는 할엔라드 황제 못지않은 영웅이 되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룬타오드 평원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황제 한 명뿐이었을 것이다.
“사신은 수선화를 받으라.”
시아무크의 사신은 황제가 명하는 대로 수선화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수선화는 복수와 정의의 여신인 돌라낭의 상징으로, 고결한 자존심, 신념, 특별한 맹세를 의미했다.
“여신의 꽃을 그대의 주군에게 전하라.”
수선화를 보내는 의미가 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라는 충고일 수도 있고, 혹은 복수를 맹세해 보라는 도발일 수도 있었다. 해석은 받아 든 사람의 몫이었다. 수선화를 받아 든 시아무크의 사신은 깊게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 * *
황제가 집무실로 쓰는 방 안에는 다양한 크기의 궤짝들이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뚜껑이 열린 궤짝 안에는 서류가 잔뜩 담긴 상태였다. 모두 황제의 일거리였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에 들어선 빅토리아는 오늘 오전에 비해 궤짝이 몇 개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전쟁 배상금이 황금 3만 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가장 재빠르게 움직인 이들은 각 부대의 장군들이었다. 없는 공적은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무훈과 피해를 누락되지 않게 알려야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황제를 둘러싼 궤짝은 과한 충성과 욕심의 결과물이었다.
“저것을 가져가거라.”
일거리에 둘러싸여 있는 황제가 가장 크고 무거워 보이는 궤짝을 가리켰다. 빅토리아는 전쟁 중에도 황제가 시키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궤짝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하나 더 주랴?”
“더 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빅토리아가 황제가 된다면 높은 강도의 일을 해치워야 했다. 빅토리아는 하나 더 받겠냐는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후계자의 당돌한 반응에 황제가 웃었다.
“그것으로 충분할 게다. 장군들의 상주문만을 따로 추려냈다. 이제부터 그건 네 일이다.”
“폐하.”
“미리 말하지만 짐은 그것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결정은 네 몫이다.”
황제의 명령에 빅토리아는 감동했다. 제국의 후계자로 제왕학을 배우고 각종 실무를 익혀왔다. 행정 업무의 상당량은 빅토리아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특히 외교가 그랬다. 그러나 군권만큼은 어쩔 수 없이 오롯이 황제의 몫이었다. 지금껏 부수적인 업무만을 처리했던 빅토리아가 장군들의 상주문을 처리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였다.
시아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지난 전투에서 보여준 황제의 무위는 무시무시했다. 황권은 정점을 찍다 못해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 와중에 군권을 이양하겠다는 황제의 의지 표명은 보통의 군주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 제가 하겠습니다.”
빅토리아는 감사하다거나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일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게 그녀의 각오였다.
황제가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궤짝을 들고 나섰다. 빅토리아는 인사를 하고 나서는 대신에 방금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폐하. 엔데커 경이 폐하를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들어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