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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134/137)

-134화-

“노래?”

“예. 영웅에게 바치는 찬가라고 합니다. 린델리프 경을 위한 노래도 있다더군요.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루이스 말에 의하면 아주 훌륭했다고 해요. 엔데커 경은 뛰어난 시인이니까요.”

근위기사인 엔데커 경은 기사이면서도 풍류를 아는 시인이었다. 목소리가 무척 좋았고, 노래도 수준급으로 부르는 데다, 바드 실력 또한 뛰어났다. 그가 절절한 애가를 부르면 귀부인과 아가씨들은 모두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 그가 영웅을 찬양하기 위해 노래를 지었다고 소문이 나고 있었다. 노골적인 아부였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자룬타오드 평원에서 있었던 일은 신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동하고 전율했다.

황제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악마를 죽였다. 그리고 린델은 6만의 할엔라드 군과 3만의 시아무크 군을 모두 지켰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평원에 있었던 9만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선대가 너무 뛰어나면 후계자가 고단한 법이었다. 양위 과정에서 있을 혼란을 생각하면 빅토리아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황제를 위한 찬양의 노래는 한 곡이 아니라 100곡을 불러도 상관없었다.

“승전 연회에서 엔데커 경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할지도 몰라요.”

“이런. 짐의 얼굴에 금칠을 하려고 하다니.”

“그만하라고 할까요?”

“그건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대신에 네가 먼저 들어보도록 해라, 빅토리아. 황제 모욕죄는 재판으로 끝나지 않으니 말이다. 아까운 인재를 잃을 수야 없지.”

“확실히 엔데커 경은 전적이 있으니까요.”

황제의 살벌한 말은 농담이면서 진담이기도 했다. 찬가는 노골적인 아부였기 때문에 보통 멋진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로 몰락하는 것이 정치판이었다. 특히 엔데커 경은 전적이 있었다. 모 공작 부인에게 노래를 바쳤다가 그녀의 부정을 암시하는 내용을 교묘하게 섞는 바람에 재판 직전까지 갔었다. 그는 그게 풍류라고 믿고 있지만 상대가 황제라면 또 달라졌다. 황제의 말대로 재판이 아니라 모욕죄로 목이 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엔데커 경을 잃을 수야 없지요.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다고 인사한 빅토리아는 그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여전히 일거리에 둘러싸인 카시어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찬가라니.”

영웅의 찬가는 낯간지러운 내용으로 가득했다. 살아서 칭송받는 거야 자신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린델이 찬가를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졌다. 이번만큼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지 못할 터였다.

카시어스는 오른손에 반짝이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날은 변수와 기적의 연속이었다. 카시어스 자신도 벼락과 불길 속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온전한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제야 실감했다.

그래도 자신의 힘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린델의 절대 방어 마법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미친 마법사의 선한 마음이 준비한 선물이라는 린델의 설명은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린델이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붙였다. 유치한 변명거리였지만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났으니 어느 누구도 반론을 하지 못했다.

린델은 이 모든 것이 신의 안배라고, 운명이었다고 미친 마법사의 말을 전하며 감격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운명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정말 운명이라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이 조금 못마땅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번 전쟁에서 카시어스가 얻은 것은 많았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군신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군의 충성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린델의 명성이었다.

린델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며 기다려달라고 했었다. 이제는 살아 있는 영웅이 되었으니 청혼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특히 카시어스가 조급하게 굴다가 린델에게 원성을 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날 밤에 린델이 화를 냈던 이유는 여러 사건 사고의 결과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였다. 카시어스가 린델의 한계를 넘어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내 것이라고 과시하면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안겨주려고 했다.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한 린델이 뭐든 묵묵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흥이 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린델이 더 이상은 무리라고 신호를 보냈을 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린델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일부러 내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능력에 걸맞지 않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좋아하지 않았다.

린델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했었다. 순종적이라고, 유능하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 해낼 수는 없다. 거기다가 싫으면 싫다고 하라고 해놓고도 거절하는 것을 무시해 버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자 린델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웃어주었다. 그러면서 그때는 굉장히 속상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며 사과까지 했다. 린델은 정말로 관대한 애인이었다.

“쯧.”

진땀 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카시어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명예를 쌓고 반석 위에 올라 그와 나란히 서겠다는 린델의 바람을 이루어주려고 조급하게 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카시어스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린델의 기척을 찾았다. 린델은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별채 쪽에 있었다. 회의라도 하는 듯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잔뜩이었다. 만찬까지는 한참 남았다. 린델과 차를 마실 시간 정도는 충분했다. 빅토리아에게 일감을 가득 안긴 덕분이었다.

훌륭한 후계자를 두었다고 생각하며 카시어스는 린델을 호출했다. 날씨가 쌀쌀하니 온실에서 차를 마시는 게 좋을 듯싶었다.

무심한 얼굴로 시아무크의 사신을 상대했던 카시어스는 린델을 앞에 두고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린델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건 온실이 따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희미하게 포도주 냄새를 풍기는 것을 보니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위대한 불꽃의 지배자이시며, 열한 개의 강과 일곱 산맥의 군주이시며,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빛나는 영광이 무궁하기를.”

“일어나라. 술을 마셨느냐?”

“예.”

린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자세는 반듯했지만 생긋생긋 웃는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카시어스가 아는 린델은 술에 강한 편이었다. 포도주 한 병을 마시고도 멀쩡했다. 신전에서 일할 때, 매일같이 포도주를 물에 타서 마신 덕분이랬다. 그런 린델이 취했다면 어지간히도 마셨다는 의미였다.

카시어스는 린델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린델의 움직임에는 취한 기색이 없었다. 다만 가까워지자 포도주 냄새가 확실하게 맡아졌다.

“얼마나 마신 거야?”

“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좀 많이 마신 것 같긴 해요.”

“누구와 마셨어?”

“예이크 님이랑, 세투아 님이랑, 포클레스 님이랑, 아르테킬 님이랑 이렇게요. 축하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화내지 말라는 린델의 말에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들은 모두 린델과 함께 별채를 쓰는 마법사 전부였다. 축하할 일이 있다면 술을 마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화가 난 것 같아?”

“그럼요. 폐하께서는 화가 나면 이렇게 눈이 가늘어지신다고요.”

린델이 카시어스의 표정을 따라한답시고 눈에 힘을 주고 가느다랗게 떴다. 카시어스는 웃지도 못했다. 린델은 취한 게 맞았다. 녀석을 재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시종들이 나타나 다과를 준비했다.

하얀 테이블 보 위에 향기로운 차와 말린 배를 넣은 쿠키가 놓였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카시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린델이 냉큼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서로의 일상이 바빠 이렇게 느긋하게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은 드문 편이었다.

린델은 좋은 청자이면서도 훌륭한 화자였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조곤조곤 말하면서 불평도 하고 웃기도 했다. 린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듣는 일은 퍽 즐거웠기에 카시어스는 이 시간을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오늘의 린델은 서두도 꺼내지 않고 쿠키를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벌써 세 개째였다. 눈이 마주치자 허술하게 웃는 모습이 평소와 달라 신선하기는 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축하해야 할 일이 무엇이더냐?”

“음. 정확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아직 시험 단계거든요.”

“내가 화났다는 걸 알면서, 비밀로 하려고?”

“애인 사이에도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랬어요.”

“도대체 누가― 아니다. 너 취했어.”

“취한 건 잘 모르겠는데, 기분이 평소보다 좋긴 하네요. 화가 나셨다면 위로해 드릴까요?”

쿠키를 모두 먹고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은 린델은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 카시어스의 말대로 술에 취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정신은 또렷하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괜찮았다. 다만 이상하게도 과감해졌다.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것들이 그냥 소리가 되어 나왔다.

카시어스가 화가 났다면 풀어주면 그만이었다. 그건 자신 있었다. 린델은 대기하고 있던 근위시종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근위시종들이 조용히 온실을 나섰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카시어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위로를 해주려고?”

“폐하께서 바라시는 거요?”

“다음에 찾아오는 시아무크의 사신에게 한 번 더 수선화를 전할 수 있겠느냐?”

“그럼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린델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사신에게 수선화를 건네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구한 사람이라고 확인시켜 줘야 한다는 카시어스의 의견에 린델도 동의했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잘 수습해야 했다.

“승전 연회에서 나와 춤을 추는 건?”

“어, 음. 왈츠라면 괜찮아요. 그게 제일 쉽거든요.”

“약속만 하고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각서 쓰면 되죠. 지금 쓸까요?”

배시시 웃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따라 웃지 못했다. 뭐든 다 들어주겠노라 한 녀석에게 욕심껏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너는 이제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다.”

“괜찮아요. 다 기억할 거예요.”

린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시어스의 앞에 섰다.

“린델?”

전에 없던 돌발 행동에 놀란 카시어스가 린델의 이름을 불렀다. 린델은 대답 대신 환하게 웃으며 카시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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