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린델은 대답 대신 봄의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카시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돌발 행동에 잠시 굳었던 카시어스는 린델을 가볍게 마주 안았다.
“정말 얼마나 마신 거야? 응?”
“그냥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먼저 움직이네요. 자세가 나빠서 그런데 폐하께서 일어나시는 건. 어, 그것보다는 무례를 범해도 될까요?”
귓가에 울리는 달달한 목소리는 린델의 것이 맞는데, 내용이 이상했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무슨 무례를 저지를지 아주 궁금했다.
“무얼 하려고?”
“감히 무엄하게도, 폐하의 다리 위에 앉으려고요.”
“……애인 사이에 무엄할 것도 없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카시어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곧 웃으면서 린델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힘을 주었다. 린델은 정말로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순순히 다리 위에 앉았다.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꾸물꾸물거리면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카시어스는 술의 위대함과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껏 술주정을 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대부분은 과격해졌다.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을 하거나, 했던 말을 또 하거나, 혹은 우는 사람도 있었다.
사근사근하게 애교가 많아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린델이 그럴 줄은 몰랐다. 귀여워서 좋은 것과 별개로 이 녀석을 어쩌나 싶었다.
“이제 술 마시지 마.”
“그건 불합리한 명령이세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덥석덥석 안기는 꼴을 어떻게 보라고.”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질투하시면 안 되시죠.”
빈틈없는 말대꾸에 카시어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원래 말을 잘하던 녀석이 술에 취하더니 거침없이 굴었다.
“제가 이렇게 할 사람은 당신밖에, 폐하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애인 말고 딴 사람한테 이러면 이상한 걸요.”
“너 정말 취했어.”
“맞아요. 취했어요. 그래도 기분은 좋아요. 언제 이렇게 해보겠어요?”
린델은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카시어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 없이 웃고 있다는 것이 맞닿은 몸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정도야 어떨까 싶었다. 수습은 나중에 하면 그만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드디어 시아무크는 항복했고 닐르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준비하던 것도 결실을 보았고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술에 취해 이렇게 카시어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누군가가 봤다면 굉장한 소문이 나돌 것이다. 상관없었다. 이미 소문은 많고도 많았다. 게다가 카시어스의 말대로 애인 사이니까 뭐든 할 수 있었다. 그저 걱정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무겁지는 않으세요? 다리가 아프다거나, 저리신가요?”
린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온전히 체중을 싣고 있었기 때문에 카시어스가 불편할 수 있었다.
“네가 얼마나 가벼운데.”
“제가 가볍진 않죠. 폐하께서 힘이 엄청 세시다는 것을 깜빡 잊었네요. 저도 폐하를 한 팔에 안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나를?”
“예. 그런데 폐하는 안아 드는 것은 고사하고, 꽉 끌어안는 것도 힘들어요. 저도 폐하처럼 컸으면……. 음, 그러니까 폐하처럼 훌륭하고 멋진 체격이 아주 부러워요.”
반쯤은 아부였고 나머지는 진심이었다. 자신도 카시어스를 한 팔에 안아 들고 좀 부둥부둥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그게 웃긴지 카시어스가 한 번 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이렇게 속마음을 다 말하면 쓰나. 예전에도 이렇게까지 취한 적이 있느냐?”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술에 안 취하시는 것 같아요. 전에 엄청 마셨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술에 강하신가 봐요.”
“마력 때문일 거야. 다행이지. 내가 이렇게 너처럼 제정신이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말이다.”
카시어스가 린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린델은 어설프게 따라 웃다가 카시어스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행복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순간에 티나사엣의 말이 불길한 예언처럼 떠올랐다.
“헤루스는 디비티에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해.”
린델은 티나사엣을 만나서 보고 들었던 것을 대부분 카시어스에게 전했다. 다만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이 몇 있었다. 바로 티나사엣이 미친 이유였다.
티나사엣이 디비티에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면, 카시어스는 코웃음을 칠지도 몰랐다. 카시어스는 이번 일이 신의 안배든 뭐든 민폐라고 하면서 운명에 감동하지 않았다. 신들께서 심술궂은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숨긴 것은 어떤 예감 때문이었다. 카시어스가 티나사엣의 말에 동의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가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자체를 알지 못했으면 했다.
맨발로, 영원히, 동토를 헤맨다고 했다.
티나사엣은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굴었다. 그는 디비티에를 잃고 미쳤으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이별은 예정된 것이다. 언제 어떤 식으로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싫었다. 아무리 슬퍼도 결국 삶을 살아가야 했다. 카시어스가 그러기를 바랐다.
“괜찮아질 거예요.”
언젠가 카시어스가 해주었던 위로의 말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말을 하고도 아차 싶은데, 카시어스가 커다란 손으로 린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뭐가?”
“뭐……든요?”
린델은 어설프게 둘러댔다. 그러나 자신이 듣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그걸 카시어스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도대체 뭘 숨기는 것이냐? 응? 축하할 일인데, 괜찮아질 거라고?”
다행히도 카시어스의 오해는 딴 곳을 향했다. 린델은 웃으면서 상체에 힘을 주고 바로 앉았다. 카시어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것 아니에요.”
“그럼 말을 해줘야지. 나는 비밀을 좋아하지 않아.”
린델은 자신의 애인님께서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비밀이라고 입을 다물어도, 함께 술을 마신 예이크나 세투아를 불러 무슨 일인지 알아낼 것이다. 이왕이면 자신이 직접 말을 하는 게 좋았다. 린델은 호주머니에서 작은 레드 크리스탈 하나를 꺼내 들어 카시어스에게 보였다.
“레드 크리스탈이에요.”
“그래서?”
할엔라드 제국에서는 레드 크리스탈을 광산에서 캐는 게 아니라, 황궁 지하 동굴에 있는 샘에서 건져낸다. 풍요의 샘이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에 레드 크리스탈 조각을 하나 넣으면 마치 얼음 덩어리가 커지는 것처럼 결정이 증식한다.
제국의 넘치는 부의 원천 중 하나인 레드 크리스탈은 마도구의 기본 재료였다. 밤을 밝히는 선스톤과 마력을 억제하는 반지, 그리고 종이 반딧불은 모두 레드 크리스탈이 없으면 만들지 못했다.
“잘 보세요.”
린델은 레드 크리스탈을 쥔 채로 집중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속 연구해 오던 것이었다. 셀 수 없는 실패 끝에 성공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술에 취한 덕분인지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카시어스 앞에서 멋지게 자랑해야 했다.
“불꽃의 축복.”
주문은 그저 집중을 위해 필요할 뿐이었다. 마법이 성공했다는 것은 손끝에서 느낄 수 있었다. 뜨겁다고밖에 할 수 없는 열기에 린델은 손수건을 꺼내어 레드 크리스탈을 감쌌다.
“성공했어요.”
“불꽃의 축복?”
“받으세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고요.”
카시어스는 린델이 내민 레드 크리스탈을 받아 들다가 깜짝 놀랐다. 아까보다 색이 진해진 것 같지만 겉으로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손수건 너머로 뜨거운 열기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레드 크리스탈에 열이 나게 만들었어요. 불에 타지는 않아요. 불꽃이 아니라 그냥 열뿐이니까요. 남부는 따뜻하지만 북부의 겨울은 춥거든요. 벽난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탕파도 금방 식어버리고요. 이걸로 겨울에 사람들이 따뜻하게 잘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상용화를 하려면 마법진을 도식화시켜야 하는데, 머릿속에 있는 것을 옮겨 그리는 것이 어려워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어요. 제 그림 실력이 형편없거든요.”
도식화가 어렵다면서 중얼거리는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불꽃의 축복이란 새로운 마법이거나, 혹은 과거에 사장된 것을 다시 발견한 것일 터였다. 그것을 레드 크리스탈에 고정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카시어스도 잘 알았다. 린델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보통의 재주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열이 나는 돌이란 얼핏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겨울이 긴 북쪽은 사정이 달랐다. 북쪽의 다섯 왕국은 이것을 무척이나 탐낼 것이다.
세투아가 린델은 천재라며 몇 번이나 말했다. 린델이 치유 마법을 마스터했을 때는 지금껏 이런 일을 없다며 찬탄했었다. 확실히 재주는 비범했다. 그러나 린델은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칭찬의 말을 골랐다.
“부자가 되겠군.”
“세투아 님께서도 같은 말을 하셨어요. 그러면서 이런 건 축하해야 한다면서 술을 마셨죠. 그래도 황금 3만 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황금 3만 톤이라니. 이 온실에 가득 채우고도 남지 않을까요?”
“반도 못 채울 거야. 황금은 무겁거든. 그것보다 도식화에 성공하기 전에 얼른 계약해야겠군.”
“예이크 님이 그러시는데, 황제 폐하랑 계약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무리 애인이라도 계약은 계약이라고요.”
레드 크리스탈이 황제의 소유인만큼, 그와 관련된 마법 물품이나 마도구도 모두 황제에게 지분이 있었다. 하지만 린델은 당장에 계약을 하자는 카시어스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카시어스의 손에서 레드 크리스탈을 손수건째 받아서는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카시어스의 품에 기댔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여전히 린델이 취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카시어스는 문득 어린 시절의 린델이 잉그란에게 이런 식으로 위로를 받거나 예쁨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사랑받고 자란 흔적은 카시어스에 대한 믿음의 증거였다. 카시어스는 웃으면서 린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한 번 더 취하게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래도 제대로 도식화를 해낼지 모르겠어요.”
대화의 주제가 제멋대로 튀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다음 말을 지었다.
“못 할 것 같으냐?”
“아니요. 할 수 있어요. 정확히는 해야 하는 거죠. 이건 좋은 일이거든요.”
추운 건 싫다고 중얼거린 린델이 로벅의 겨울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린델의 고향은 겨울에는 눈이 가득한 곳이었다. 눈 치우기의 달인이라는 린델의 자랑이 이어졌다. 카시어스 역시 북관에서 눈과 관련되어 고생했던 일화를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시종장이 카시어스를 찾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episode. 03
린델이 빅토리아의 초대를 받은 것은 여름이 끝나가는 오후였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하얀 햇빛 가리개가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 아래에는 색색의 아름다운 달콤한 간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단 걸 먹지 않으면 버티질 못하겠어요.”
빅토리아는 단 걸 먹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간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는 차만 마셔댔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피로의 흔적이 드리워진 것을 보며 린델은 안쓰러워졌다.
카시어스가 양위를 천명한 것은 빅토리아의 생일날이었다. 각계각층에서 반대가 거셌지만 카시어스의 의지는 강경했다. 감히 신들께 한 맹세를 어길 수 없다며 그가 밀어붙였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주장이 다수였다. 지난봄과 여름 내내 양위 문제로 정치판이 시끄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시어스와 빅토리아는 착실히 양위를 준비했다.
가장 바쁜 사람은 누가 뭐래도 빅토리아였다. 그녀가 물려받는 것은 그저 그런 가문이 아니라, 대륙의 최강국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고는 하지만 당장에 닥쳐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새로운 황명과 직인, 인장과 같은 자잘한 것부터 즉위식 준비까지 해야 했다. 거기다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그란디스 메시스가 있기 때문에 빅토리아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결혼식 준비는 끝났겠죠? 별문제가 없다고 말해 줘요. 백작의 결혼식에는 아무 생각 없이 몸만 가고 싶어요.”
린델은 빅토리아가 말하는 백작이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이 약간 낯설었다. 지난겨울에 있었던 전쟁의 공훈록에서 제일 위쪽에 이름을 올린 린델은 백작이 되었다.
서머롯트 백작.
가계가 끊겨 황제에게 작위가 반납되었던 서머롯트 백작 가문은, 먼 과거에 딸을 테누안 왕에게 시집보낸 적이 있었다. 그 피가 린델에게 이어진 것이 인연이 되었다.
작위를 받은 것이 겨우 한 달 전이었다. 아직 백작이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린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목록에 있는 건 다 끝냈습니다. 나머지는 신께 맡겨야죠.”
“재작년에 결혼을 했던 모 후작부인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에는 다 내팽개치고 싶어진다고 하더군요. 두 번은 못 하겠다고도 했고요.”
“네. 한 번이면 족합니다.”
빅토리아의 농담에 린델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나머지는 신에게 맡기겠다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는 것도 모두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