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틀 후 린델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황제의 결혼식이었고, 또한 국혼이었다. 준비할 것이 잔뜩이었다.
카시어스는 양위에 관한 찬반 논란이 한참 뜨거워지는 시점에 결혼을 발표했다. 그동안 카시어스가 워낙 유난을 떨어왔기 때문에 다들 올 것이 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후궁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대신전에서 국혼이 열릴 거라는 소리에 궁정 사교계는 물론이고 정계 역시 발칵 뒤집혔다. 얼마나 논란이었냐면 양위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황제의 국혼이라고 하면 린델이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 당장에 반대를 하고 나선 쪽은 황실 원로와 고지식한 귀족들이었다. 어떻게 사내가 황후가 될 수 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시작부터 힘을 얻지 못했다.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황태후가 반대하기는커녕 국혼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장 보수적인 세력 중 하나인 군부에서도 침묵함으로써 지지를 보냈다. 군부는 황제의 양위는 너무 이르지만, 린델이 황후가 될 자격만큼은 충분하다고 했다.
마탑은 황제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열렬히 찬성했다. 신전의 입장은 애매했다. 불꽃의 지배자인 황제는 신의 총아이자 대리인이었다. 수장이 직접 결혼을 선포하니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대법전에도 성서에도 동성혼을 금지한다는 명문은 없었다. 거기다 훌륭한 선례가 있었기에 반대 세력은 힘을 얻지 못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다. 황실 원로가 모 후작의 연회에서 사내 황후는 당치도 않다며 린델을 모욕하다가 포병대 장군인 닐카라오스 백작으로부터 결투 신청을 받았다. 6만 병사를 살린 영웅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그의 선언에 연회에 참석한 장군과 고위 장교들이 동조하면서 꽤나 사건이 커졌다.
큰 망신을 당한 황실 원로는 용감하게도 황제를 찾아갔다. 아무리 선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내 황후는 타국이 비웃는다면서 황제에게 읍소하다시피 항의했다.
카시어스의 반응은 격렬했다.
‘짐이 다섯 번을 차이고 여섯 번 만에 청혼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그는 황후 자리가 부담스럽다며 파혼할 기회만 찾고 있는데, 그대 때문에 짐이 한 번 더 차여야겠는가?!’
그 자리에는 황제와 황실 원로뿐만 아니라 근위시종과 빅토리아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이드나카와 빅토리아에게서 당시의 일을 고스란히 전해 들은 린델은 민망함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청혼을 다섯 번이나 거절당한 남자의 집요함은 무서웠다. 전날 저녁에 황후가 되는 것은 무리이지 않냐고 린델이 말했던 여파이기도 했다.
황제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한껏 으르렁거렸다. 그 기세에 눌린 황실 원로는 주저앉아서 황제의 자비를 구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궁정인들은 황제가 다섯 번이나 차인 사실을 즐거워했다.
봄에는 양위 공표로, 여름에는 국혼 선포로 제국은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도 양위와 결혼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린델은 빅토리아만큼은 아니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백작이 되면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작위뿐만이 아니라 영지가 함께 주어졌고, 그와 관련된 각종 업무도 린델의 몫이 되었다.
무엇보다 결혼식이 문제였다. 황제의 결혼은 국가 행사였다. 식에 참석할 증인과 하객을 초대하는 것조차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해야 할 정도였다. 그것 말고도 소소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이 넘쳐났다.
그중에서 린델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밤낮으로 향유를 온몸에 발라야 하는 것이었다. 결혼식 날에는 린델이 누구보다 빛나야 한다고 주장한 애쉰 부인은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피부 상태는 생애 어느 때보다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정말로 두 번은 못 할 일이었다.
“결혼식 당일에는 정신이 없대요. 역시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공작부인께서는 아예 기억이 없다고도 하셨지요. 그리고 태후 마마께서도 마지막에는 정신이 몽롱했다고 했어요. 좀 무시무시하죠?”
빅토리아의 무시무시한 위협에 린델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성대한 결혼식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와 조언을 종합해 보면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못 할 만큼 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로벅에서 결혼식이란 마을의 작은 축제와 같았다. 그런데 수도 사교계에서의 결혼식은 전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틀 후면 끝날 거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습니다.”
“이틀 후면 끝이라니. 위안을 얻을 일이 아니죠. 이건 확인차 물어보는 건데, 폐하께서 양위 후에 동대륙에 가실 거라고 하셨어요. 백작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예. 에메랄드의 궁전을 보러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건 카시어스와의 약속이었다. 최근 린델은 카시어스와 만나면 결혼식과 동대륙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빅토리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는 유려하게 뻗은 눈썹을 찡그렸다.
“폐하께서 그란디스 메시스에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건요?”
“처음 듣습니다.”
“그렇죠? 아직 백작이랑 이야기 된 게 아니죠? 폐하께서 즉위식에만 참석하시고는 그대로 동대륙으로 가실 계획이라고 하시는 걸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린델은 일정을 떠올렸다. 이틀 후에 결혼식이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 보름 후에 카시어스는 서류상으로 양위을 하고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게 된다. 빅토리아의 즉위식은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그 직후에 바로 그란디스 메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혼도, 즉위식도, 그란디스 메시스도 모두 국가적 행사였다. 촘촘히 이어지는 행사 준비에 근위시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나마 린델이 간소한 결혼식을 원했고 카시어스 역시 의례만 제대로 지키면 괜찮다고 했기 때문에 그나마 숨통이 조금 트인 상태였다.
여하튼 아무리 카시어스가 양위를 한 후라고 해도 당장에 동대륙으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바쁜 빅토리아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초대장을 보낼 만한 일이었다.
린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빅토리가 웃었다.
“폐하께서 하시겠다고 하면 가능하긴 하죠. 부탁이에요, 서머롯트 백작. 폐하를 설득해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군부에서는 폐하께서 은퇴하시는 걸 반대해요. 그들을 다독이려면 폐하께서 건재하심을 보여야 해요. 세상의 비경은 동대륙에만 있지 않아요. 제국에도 많이 있어요. 케드리안에, 그러니까 제국의 남부에 황실 별장지가 있어요.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죠. 바다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눈부신 일출을 볼 수 있어요. 1년. 1년만 폐하께서 제국에 계시도록 백작이 힘써주길 바라요.”
“어떻게 될지 확답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폐하께는 제 결혼식을 보고 싶다고 하세요. 경사는 축하해야 하니까요.”
빅토리아의 결혼식은 내년 봄으로 예정되었다. 동대륙을 왕복하는 데는 2개월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동대륙을 2년은 돌아다닐 거라고 했다. 즉위식 직후에 떠났다가는 빅토리아의 결혼식을 볼 수 없다.
린델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역시 백작밖에 없어요.”
그렇게 다과 시간은 훈훈하게 끝날 뻔했다. 빅토리아가 바쁜 일정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 일어나던 린델이 채 두 걸음을 떼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못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리자 소란스러워졌다.
“서머롯트 백작?”
빅토리아가 혼비백산하며 린델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린델은 괜찮다고 했지만 당장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이명에 머리가 더 아래로 기울어졌다.
“의원을 불러.”
빅토리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했다가는 결혼식 때까지 침대에서 지내야 한다. 카시어스도 걱정할 것이다. 아니, 모두 카시어스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린델의 의지와 달리 세상이 캄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요란하게 쓰러진 것이 무색하게, 린델의 병명은 과로로 인한 피로 누적이었다.
황태녀의 궁에서 의원에게 진찰을 받은 린델은 백장미 궁으로 돌아와 침대로 직행했다.
애쉰 부인은 린델의 안색이 창백하다며 속상해했다. 빅토리아는 시종을 보내 린델의 상태를 한 번 더 살폈다. 그사이 세투아가 찾아와 린델에게 쓰디쓴 약을 먹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카시어스였다.
린델은 침대 위에 앉아 카시어스를 맞이했다.
“과로라고?”
“예. 무리해서 그렇대요.”
인상을 살짝 쓴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얼굴로만 웃었다. 궁정어는 입으로 나오는 말과 별개로 표정과 몸짓으로 뜻을 전하곤 했다. 린델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카시어스를 쏘아보았다.
작위 계승식에 이어 결혼식 준비로 일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과로로 쓰러진 원인의 대부분은 카시어스 때문이었다. 지난밤의 정사는 격렬하고도 길었다. 린델은 중간부터 허덕였는데, 카시어스는 집요하게 굴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린델의 소리 없는 질책에 카시어스가 애매하게 웃으면서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연약해서야 어쩌나.”
“제가 연약한 게 아니라 당신께서 너무 힘이 넘치시는 거예요.”
“내가 힘이 넘치긴 하지.”
“사실이라서 더 얄밉게 들리는 거 아시죠? 알베르토 경이 심장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셔츠를 벗기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괜찮다고 해도 안 통했어요.”
말끝을 흐리며 투덜거리는 린델의 눈빛에는 여전히 원망이 담겨 있었다. 카시어스는 이번엔 웃지 못했다.
린델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흔적이 있는 것을 싫어했다. 덕분에 카시어스는 옷으로 감춰지는 곳에 치흔과 입술 자국을 잔뜩 만들었다. 특히 어제는 흥이 났었다. 린델의 쇄골 부근과 어깨, 가슴에 흔적을 가득 만들었다.
진찰을 위해 셔츠를 풀어 헤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눈에 훤히 그려졌다. 알베르토 경은 나이가 지긋한 황실 의원이었다. 린델이 알베르토 경 앞에서 얼마나 당황했을지 생각하면 조금 미안해졌다.
“알베르토 경은 네가 학대를 당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지도 모르겠군.”
“학대요? 제가요? 아니, 폐하께서 저를요?”
“상식에 벗어나는 거니까. 굉장한 소문이 퍼질 거야.”
사랑받은 흔적은 눈에 띄는 곳에 하나 정도만 남기는 것이 예의였다. 카시어스처럼 멍이 들 정도로 흔적을 잔뜩 남기는 것은 독특하고 위험한 취향에 속했다. 알베르토 경은 입이 무거운 편이었지만, 그의 보조는 그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