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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137/137)

-137화-

“이미 굉장한 소문은 잔뜩 퍼져 있는 걸요. 하나쯤 더해봤자 아무것도 아니에요.”

린델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대범하게 굴었다. 카시어스도 동의했다. 천사의 계시를 받아 6만의 병사를 지킨 영웅이자 사내이면서도 황후가 될 린델과 관련된 소문은 이미 굉장했다.

카시어스는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소문은 무시하라고 린델을 가르쳤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가 부여되고 소문이 퍼졌다. 일일이 신경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더니 이제는 린델도 무던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좀 억울하긴 하군. 이렇게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말이지.”

“제가 당신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면, 소문은 예전에 퍼졌을 거예요.”

“학대받는 황제라니. 굉장한 스캔들이 되겠어.”

카시어스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대담한 발언을 하는 린델 때문에 이번에는 제대로 웃었다. 침대 위에서 적극적인 애인인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애석해했다. 아무리 깨물어도 하룻밤이면 흔적이 사라진다면서 노골적으로 불평할 때도 있었다.

황제로서 카시어스는 거리낌 없이 맨몸을 드러냈다. 만약에 린델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카시어스는 열렬한 애인을 두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농담에 서로 킥킥거리며 웃는 사이에 애쉰 부인이 나타났다. 린델이 마실 약과 작은 봉투 하나를 은쟁반에 담아 내밀었다.

“제라르 경께서 보내신 겁니다.”

애쉰 부인이 제라르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카시어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약을 다 마신 린델이 서신을 읽고는 빙긋 웃는 것을 보고서야 말을 걸었다.

“그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오후에 약속이 있었는데, 제가 이러니까 취소해야 했거든요. 그러니 경께서 결혼식 준비는 원래 힘든 법이라고 하네요. 경의 형님들이 모두 결혼을 하셔서 고충을 잘 안다고요.”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온건한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카시어스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린델과 제라르의 관계는 누가 봐도 친한 친구 사이였다. 눈치 빠른 사람이야 제라르의 본심을 알아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 그만큼 제라르가 거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소리였다. 린델과 가장 가까운 친인이면서도 청탁이나 혜택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소개시키는 사람들의 면면도 모두 훌륭했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제라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연심을 숨긴 채 믿음직스러운 친구의 자리를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몸을 낮추고 기회가 올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의 인간이었다.

기분 같아서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럴 능력도, 기회도 충분했다. 승진을 핑계로 먼 곳으로 발령 보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가 린델의 거의 유일한 친구라는 점이었다. 황제의 피후견인으로 데뷔해, 테누안의 왕자로, 전쟁 영웅으로, 그리고 이제는 황후가 될 린델에게 진실된 호의를 가진 친구는 아주 중요했다.

카시어스는 서신을 접어 한쪽으로 놓는 린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린델에게 제라르를 붙여준 것은 자신이었다.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려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카시어스는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질투를 숨기고는 화제를 돌렸다.

“낮에 빅토리아를 만났다지. 그녀가 동대륙으로 가지 말라고 하더냐?”

“어떻게 아셨어요?”

“빅토리아가 하소연할 곳이 너밖에 없지. 린델. 은퇴한 황제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는 법이야. 멀리 떠나주는 게 좋아.”

반은 사실이었고 반은 핑계였다. 멀리 떠나는 게 좋은 건 맞지만 그게 꼭 바다 건너의 동대륙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은퇴한 카시어스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여행을 핑계로 지방 시찰을 해달라고 할 게 뻔했다. 카시어스가 그렇게 가르쳤다.

후계자가 유능한 것은 좋지만,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럼 황태녀 전하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 의전 문제가 귀찮아.”

“주제넘은 말이지만, 그래도 폐하께서 한동안은 제국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군부는 황태녀 전하를 지지하지만 폐하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요. 폐하께서 후계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린델은 순진한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로 앞으로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확실히 군부는 카시어스의 은퇴를 반대하고 있었다. 양위를 강행하면 어떤 식으로든 반발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장군들이 뭐라고 하든, 그건 빅토리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그래서 전하께서는 제게 부탁하셨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는 하는 말이냐.”

“네. 알지요.”

의미는 하나였다. 카시어스가 아주 린델에게 약하다는 것이었다. 아주 바보 멍청이 같은 부탁이 아니라면 카시어스는 제 심장을 꺼내 보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빅토리아가 린델에게 카시어스를 붙잡아 달라고 사정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제일 악당은 린델이었다. 카시어스가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성껏 설득했다. 선의로 빅토리아를 도와주려고 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 역시 자신이 가르친 것이었다.

“케드리안에서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다고 전하께서 알려주셨어요. 그리고 저는 가네킨에 있는 붉은 계곡을 직접 보고 싶어요.”

린델이 눈을 곱게 접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결국 카시어스는 항복하고 말았다.

“빅토리아에게서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물어라. 감히 황제의 뜻을 바꾸는 청탁을 빈손으로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아주 좋은 것을 주실 거예요.”

“그리고 내게는 키스를 해. 린델.”

카시어스가 태연한 얼굴로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린델은 반 박자 늦게 웃었다. 황제 폐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데 키스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목에 팔을 둘러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가 뗐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겨우 이걸로?”

“사랑해요.”

“이럴 때만 고백이지.”

카시어스는 다정하게 웃는 린델의 고백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린델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은 보드라웠다. 키스는 곧 깊어졌다.

결혼식까지는 아직도 이틀이나 남았다.

* * *

결혼식 당일, 하늘은 더없이 화창했다. 황제의 결혼식이 있을 대신전은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대신전에 미리 도착해 있던 카시어스는 휴게실을 서성이며 시계를 확인했다. 본식은 오후 2시였다. 지금 시각은 1시 40분인데, 린델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하객들은?”

“카들란 공자님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시나 인파 때문에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카시어스의 질문에 답한 것은 시종장이었다. 카시어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의 위치상 닐르의 시가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린델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결혼식은 비공개로 간단하게 준비되었다. 카시어스 역시 화려하고 요란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 동의했다. 결혼식은 고전적이고 장엄하게 열릴 예정이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결혼식의 증인과 하객은 가까운 친족만으로 한정했다. 그러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특히 시아무크와의 전쟁에 참전한 장군과 장교들이 격렬했다. 결국 그들을 위해 황궁에서 성대한 피로연을 마련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닐르의 시민들을 위한 잔치도 준비되었다. 황제의 결혼식은 그 자체로 축제였다. 광장에는 황제의 이름으로 준비된 술과 음식들이 잔뜩 쌓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술과 음식보다 오늘의 주인공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악마를 죽인 황제와 악마로부터 6만의 병사를 보호한 영웅의 결합을 보기 위해 대신전 앞의 광장은 물론이고, 황궁과 대신전을 잇는 대로에 사람들이 들이찼다. 결혼식이 비공개였기에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그 탓에 린델이 타고 오는 마차가 인파에 갇혀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근위기사들이 잔뜩 호위를 하고 있긴 했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혹시나 하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필라무트의 제전 때와 같은 패턴이라 더욱 그랬다.

아마도 평생을 이렇게 마음 졸이며 살 것이다. 초조한 기다림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같이 왔어야 했어.”

결혼식 당일에는 본식 전까지 신랑, 신부가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고리타분한 전통 때문에 따로따로 움직여야 했다. 신랑은 있어도 신부는 없으니 그런 전통 따위는 무시했어도 그만이었다고 후회해 보지만 이제 늦었다. 다행히 린델은 느리게나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사의 광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근위시종이 다가와 린델이 대신전 앞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지척에 있음을 느꼈다. 당장에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힘들게 참았다.

린델이 카시어스 앞에 나타난 것은 식이 시작되기 5분 전이었다. 흰색 천에 금실을 수놓은 예복을 입은 린델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애쉰 부인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였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는지 린델의 숨결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이겨냈다.

“아니야. 아직 시간이 남았어.”

“다행이에요. 사람들이 엄청 몰려들어서 마차가 거의 움직이질 못했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시종들이 준비된 망토를 가져와 린델의 어깨에 고정시켰다. 동시에 흐트러진 옷자락과 머리도 정리해 주었다. 부부가 될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지만 시종들은 감탄할 시간이 없었다. 황제의 결혼식에선 어떤 흠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시종들의 손길은 바쁘게 움직였다.

“맹세의 말은 모두 외웠지?”

“외우긴 외웠는데, 더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잘할 거야. 너는 실전에 강하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사제가 나타나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렸다. 때맞춰 린델의 마무리 치장도 모두 끝났다.

신부가 없는 결혼식이었다. 이번에도 선례에 따라 두 사람이 나란히 식장에 입장하기로 이미 합의가 된 상태였다.

“잡아.”

카시어스가 린델을 향해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린델은 웃으면서 카시어스의 손을 잡았다.

“정말 결혼을 하네요.”

카시어스의 손을 잡고 휴게실을 빠져나가던 린델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왠지 결혼식 날에 도망가고 싶어 한다는 신부의 심정이 이해갔다.

“이제야 결혼을 하는 거지.”

부사를 살짝 바꾼 카시어스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긴 복도를 걸어 활짝 열린 내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에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져 내리는 색색의 빛이 가득했다. 저 끝에는 화려한 제대와 추기경도 보였다. 통로 양쪽에는 눈에 익은 축하객들이 모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델은 저도 모르게 옆에 선 카시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왔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 린델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붉은 융단과 스테인드글라스, 추기경, 축하객 모두 그대로였다. 저곳을 카시어스와 나란히 걷는다고 생각하자 감격스러웠다.

“네가 내 운명이야.”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린델은 다시 한 번 더 카시어스를 보았다. 천사를 닮은 남자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햇살을 후광으로 붉은 머리가 황금처럼 반짝거렸다. 린델은 카시어스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삶과 복수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던 순간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 아주 제멋대로인 운명이었다.

“네. 운명이에요.”

린델은 더 멋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정할 여유가 없었다.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되고 찬가가 울려 퍼졌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외전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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