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2화 (2/35)

-02-

멋대로 방향을 돌린 태준은 아무런 말도 없이 운전만 했다. 나는 그가 내 어깨를 쳐주지 않으면 영원히 꼼짝도 못할 것처럼 굳어 있었다. 거친 유턴과는 달리 그가 모는 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차를 세운 곳은 앤티크한 건물의 칵테일바였다. 지은 죄도 없이 왠지 자꾸만 움츠러드는 태도로 머뭇거리며 그가 이끄는 곳으로 가 역시 주춤거리며 의자 끝에 간당간당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픽 웃었다.

“안 잡아먹어. 그냥 긴장이나 풀자고 데려왔으니까 너무 움츠러들지 말아요.”

“좀 추워서 몸이 움츠러드는 것뿐입니다.”

“춥다고? 여기가?”

“...이제 좀 풀리네요.”

어딘가 놀리는 듯한 시선과 말투에 기분이 상해 나도 모르게 턱을 빳빳하게 들고 톡 쏘아 말했다. 그래봤자, 그런 내 태도가 더 재미있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지만. 잠시 후 그가 멋대로 내 것과 함께 주문을 했다. 나는 이왕 들킨 것,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을 결심을 하고 그에게 대들어야 할지, 그래도 아직은 팀장 대우를 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자 그가 눈썹을 올리며 ‘왜?’하고 물었다. 좀 전부터 계속 반말과 존대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데, 팀장이라도, 그가 나보다 다섯 살이 많더라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과연 그래도 되는건가, 또 고민했다. 내 의견을 말해도 될까, 과연 사회생활에서는 속엣말로 그쳐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태준은 이미 아는 사이처럼 바텐더와 이것저것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붉은 색을 띠는 칵테일이 둥근 글라스에 담겨 나왔다. 그는 병맥주를 들었다.

“팀장님.”

“네, 정해진씨.”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가 정중하게 답했다. 혹시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또 잠시 고민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태준은 나쵸를 한입 물었다. 바삭,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마셔요. 골든메달리스트, 논알콜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술 약하잖아요.”

맥주병의 입구에 입을 댄 채, 역시 웃음기가 담긴 대답이었다. ‘술 약하잖아요.’ 나는 잠시 그게 무얼 뜻하는지 생각하다가, 곧 얼굴이 화끈거려 그 골든메달리스트인가 실버메달리스트인가를 제쳐두고 찬물을 벌컥 마셨다. 그는 3년 전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그와 함께 모텔에 간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술기운이었다.

“그..그땐 어렸고, 술을 처음 마셨으니까 금방 취했던 겁니다!”

“아, 그래서 지금은 잘 마시고? 그럼 다시 주문해 줄게요. 참, 그런데, 역시 기억하고 있군요? 난 계속 새침 떨기에 기억 못하는 줄 알았지.”

“..새침이라니, 그런 거...!”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럼 그걸 뭐라고 하지? 분명히 날 의식하고는 있으면서 애써 외면하는 게 빤히 눈에 보이는 거. 뭐, 어쨌든 그때 일을 꺼내서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모른 척 했다는 건, 역시 숨기고 싶다는 뜻이죠? 알았어요. 말했다시피, 난 그저 해진씨가 나만 보면 굳는 것 같아서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뿐이야. 그런 상태로는 혼자 끙끙 앓다가 덥석 사표나 던질 게 뻔하니까.”

확실히 내 반응이 강하면 강할수록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제 의젓한 성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거리며 ‘됐습니다’ 짧게 답해버렸다. 그리고 바텐더에게 나도 병맥주를 달라고 주문했다. 병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있을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벌컥 들이키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찌릿 울릴 정도로 시원한 맛이긴 했지만, 역시 뒷맛은 시큼하고 역겨웠다. 아쉽게도 나는 그때까지, 아니 아직도 술 맛을 모를뿐더러 약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왕 주문한 건데, 이것도 마셔 봐요. 어울릴 것 같아서 시켜줬는데.”

내가 맥주를 마시며 인상을 찡그린 것을 본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옆으로 치워진 칵테일을 가리켰다. 하긴, 그래도 나름 생각해줘서 주문한 건데 이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주저하며 둥근 글라스를 쥐었다. 코 가까이에 대자 딸기향이 맡아졌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를 힐끗거리며 한 모금 마셔보니, 달달한 바나나 맛이 입안 전체에 퍼졌다. 논알콜이 확실한지 알콜 냄새나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딸기 향이 나고 바닐라 맛이 나지. 나도 꽤 맛있더라고. 좀 유아틱하긴 하지만.”

“....... 여기, 한 병 더 줘요. 아니, 맥주요.”

입술에 묻은 것까지 혀를 날름거리며 맛있게 마시는 나를 보며 그는 의자 뒤로 등을 젖히며 다시 빈정거렸다. 역시, 놀리려는 것이 맞았다. 바닥까지 드러날 정도로 맛있게, 촌스럽게 벌컥벌컥 마셔놓고 이제와 맥주를 주문하는 것은 당연히, 말로 할 수 없는 그에 대한 미약한 반항이었다.

“맛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보니, 팀장님 취향도 좀 유아틱한 점이 있나봐요.”

“아니, 내가 말하는 건 칵테일이 아닌데.”

나쵸를 바삭거리며 그가 즐거운 듯 웃었다. 정확하게는 파악이 안 되지만, 어쨌든 또 뭔가로 놀려놓고 혼자 재미있어 하는 게 분명했다. 그저 그가 웃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상했다. 새로 나온 가득 찬 맥주병을 든 채 꿀꺽꿀꺽 마셔버리자 태준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쳐다봤다. 그러나 기껏 반도 비우지 못하고 ‘윽’ 소리를 내며 병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해진씨, 내가 아까 말해줬잖아요. 뭐든 너무 열심히 하면, 당한다고.”

“뭘요!”

“적당히 마시라고.”

“...물 좀...”

낮은 목소리로 타이르는 듯한 어투에 금방 기세가 꺾여 기껏 물이나 찾는 나를 보며 그는 또, 비웃었다. 그리고 어린아이 대하듯 ‘나쵸도 좀 먹고’ 하며 안주그릇을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짭쪼롬한 나초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머리가 서서히 달구어지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자, 태준은 바텐더에게 했던 것처럼 이것저것, 가벼운 대화를 유도했다.

요즘의 날씨, 문학계 뉴스, 자신의 정치적 입장, 종교의 자유를 외쳤던 어린 학생 등, 여러 가지가 대화의 주제로 올랐지만, 나는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어찔어찔한 기분으로 ‘네, 네’하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포켓볼 칠래요?”

그가 갑자기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당구대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태준은 그런 나를 내버려두고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어가 혼자 포켓볼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를 비스듬히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몸이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아 테이블 위에 상체를 기댔다. 바텐더가 위에서 ‘괜찮으세요?’하고 물었지만, 나는 손만 겨우 들어 흔들었다. 가물거리는 시선 끝에서 그가, 나를 진짜 게이로 데뷔시켜준 남자가, 김태준 팀장이, 그러나 이제와 새삼 그때 일을 꺼내려는 것은 아니라는 그가 혼자 포켓볼을 치다말고 예의 그 질 나쁜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    *    *

일어나보니, 내 작고 허름한 원룸 안이었다. 싱크대 쪽에서 커다란 덩치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라면 냄새가 났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여기가 네 집이니까.”

“...넌 여기 왜 있냐?”

“어제 우리 마마님께서 카드 고지서를 내밀며 출가를 명하셨거든. 하루만 신세지자.”

“어떻게 들어왔냐고.”

“참, 너 인마! 아무리 네가 밋밋한 사내새끼지만, 아무리 이 방에 돈 되는 물건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문은 잠그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난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헛. 이 놈 보게. 곧 죽어도 술은 입에 안 대던 녀석이. 설마, 마셨냐? 하긴, 회사 선배가 학교 선배보다 무섭지? 암, 요게 걸린 문젠데.”

여태 등을 보이고 섰던 덩치가 아직 끓고 있는 냄비에서 젓가락으로 면발 몇 가닥을 건져 올려 후룩 삼키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돈’ 표시를 했다. 나는 멍청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보려 했지만 몸에 힘을 주자 머리가 찌릿 아파왔다. 결국 작은 침대 위에 대자로 누운 채 과연 내가 어떻게 이 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는지 기억해 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어찔한 머리를 쥐어짜 봐도 포켓볼을 치던 김태준의 모습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엉덩이에도 힘을 줘 봤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몸의 이상은 쓰린 속과 지끈거리는 골이 전부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후룩, 하는 소리와 얼큰한 라면 냄새가 침을 고이게 했다.

“야, 혼자 먹냐?”

“안 돼. 이건 목숨과도 같은 거다.”

“...문희철, 내 집에서 나가.”

“...치사한 새끼.”

라면 나눠먹는 게 그리도 억울한 지,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투덜거리며 그러나 침대 옆에 얌전히 상을 펴고 냄비와 젓가락 두 쌍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젓가락마다 뭉텅이로 면발을 들어 올려 입에 쑤셔 넣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숟가락으로 국물만 홀짝거렸다. 그제야 희철은 안심한 듯 내 숟가락 위에 김치를 올려주었다.

“너는 인마, 그렇게 먹으니까 아직 유아 체형인 거다.”

“난 대한민국 표준이거든? 그나저나, 넌 다이어트 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두 개밖에 안 끓였거든?”

“그러냐?”

다이어트용으로 라면 두 개를 퍽이나 자랑스럽게 말하는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자, 희철은 무안한 듯 찬물을 벌컥 마셔댔다. 대한민국 표준 체형인 나는 그러나 내심 기분이 상해 냄비 째 들고 국물을 후룩 마셨다. 역시, 얼큰한 국물이 들어가니 속이 풀리고 골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쥐어짜도 나오지 않던 기억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생각났다.

“푸..풉..!”

“야, 정해진! 죽고 싶냐?! 감히 라면 국물을 품어?!”

그깟 라면 국물에 수선을 떠는 희철을 내버려두고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기억을 정리했다.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살아났다.

‘...봐요, 정해진씨, 다 왔어요. 일어나.“

‘뭐...치워... 건드리지 마, 이씨...’

‘다리에 힘 좀 줘요. 열쇠, 이봐, 정해진. 열쇠는 어디...’

‘내 몸은.. 내가 지킨다..’

‘하...! 이런 걸 건드릴 정도로 굶진 않았으니까 그런 걱정은 말고 열쇠나 내놔. 어디.. 뭐야, 가방에 있어?’

‘내놔! 이 호로자식, 내 가방은 건드리지 마!’

‘무슨...! 하여튼, 내놔. 가방, 아니, 열쇠 내놔. 여기서 잘 거야?’

‘안 자! 너랑 안 잔다! 강간범!’

‘그래서 집에 데려다 줬잖아! 어서 열쇠나 내놔.’

‘씨발새끼!’

‘....정해진, 열쇠.’

내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가 이를 악무는 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그 뒤에도 뭔가 더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몸을 춥게 했다. 나는 오돌오돌한 팔을 감싸며 제발 그 후로 내가 뻗어버렸길 바랐다.

“문희철....”

“왜 이 덜떨어진 새끼야!”

생긴 것과는 달리 깔끔한 성격의 희철이 마른 걸레를 가져와 국물이 튄 방바닥은 물론 내 옷까지 주섬주섬 닦아주다 말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라면 국물 품은 게, 정말 큰 죄인 것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더 큰 죄를 그에게 고발했다.

“나 어제... 팀장한테 쌍욕 했다...”

“......”

걸레를 한 손에 든 희철이 쯧쯧 소리를 내며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왔다.

*    *    *

그 당시, 즐거워야 할 일요일의 저녁 식사시간은 언제나 엄숙했다. 아버지는 계속 화를 풀지 않으셨고, 어쩌면 화를 풀었다 해도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 언제나 화가 난 것처럼 대하셨고, 나는 내가 집을 나간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그저 독립적인 대한의 건아라면 당연히 이십여 년 동안 보살펴주신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봐야 한다고, 나의 독립 또한 그러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했으나 언제나 실패했으므로,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고 초라한 원룸에서 궁상맞게 사는 것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간간히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물었지만 대부분은 그분의 성격처럼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셨다.

실은 나는 내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중학교 때 처음 알았는데, 부모님은 당신들이 알려주기 전에는 내가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줄 아셨나 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두 분이 손을 꽉 맞잡으신 채 내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내가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것과 그리고 얼마 후 학교 근처의 원룸으로 들어가 독립한 것이 두 분을 실망스럽게 했다. 어쩌면, 배신감을 느끼셨던 게 아닐까. 정 많고 감성적이 두 분은 내게 사실을 털어놓기 전부터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계셨다. 아마 내가 대성통곡을 하리라 생각하셨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이 걱정하시지 않도록 오히려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알고 있었는데요.’

‘..그.. 그러냐? ...언제부터?’

‘중학교 때요. 생물 시간에. 어머니는 0형이시고 아버지는 B형이시잖아요. 그런데 전 몇 번을 검사해도 A형이라고 해서...’

‘..그.. 그랬냐...’

‘예. 어머니나 아버지 혈액형이 잘못 기제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요.’

‘응, 그랬구나.’

‘예. 저기.. 전 괜찮아요. 그땐 어려서.. 왜, 저 한동안 학교 안 간다고 속 썩혀드린 적 있었잖아요, 그때 잠시 힘들었는데, 이제 괜찮아요. 오히려 부모님한테 감사한 마음은 더 커요. 바뀌는 것도 없구요.’

‘그래.. 그렇구나..’

‘예.’

간신히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당신들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 마음은 그게 또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내 나름대로 중학교 이후로 조금씩 어리광도 덜 피우고 의젓해지는 것이 부모님께 그동안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부모님들 그게 또 아쉽고 섭섭했던 것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끼니는 제때 챙겨먹고 다니냐?”

“예, 저 식성 촌스러워서 밥은 꼭 먹고 다녀야 되잖아요.”

묵묵히 숟가락과 젓가락만 움직이시던 아버지가 문득 내 얼굴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니는 숟가락까지 놓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얼굴이 그게 뭐냐.”

“저... 금요일 저녁에 술을 좀 마셔서요.. 어젠 속이 아파 아무 것도 못 먹어서요.”

“술도 못 마시면서 무슨.”

“아르바이트 하는 출판사에서요, 팀장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약 올려서...”

“응?”

오랜만에 하나밖에 없는 금둥이 아들 역할 좀 해볼까 하는 생각에 약간 혀 짧은 소리를 냈더니, 두 분은 아들이 놀림이나 받고 홧김에 술 퍼마셨다는데도 흐뭇하게 웃으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낯간지럽긴 하지만 종종 혀 짧은 소리 좀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하는 것 좀 더 해볼까 싶어 이번엔 정직원들이 내가 바닥 청소 해 주고 책상 정리도 해주니까 게을러졌다며 재잘재잘 떠들어대니, 역시 아버지는 곧바로 그딴 곳 당장 그만 두라며 열을 내셨다. 너무 멀리 왔다 싶어 얼른 살살 웃으며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둘러댔다.

다시 숟가락을 드는데, 거실에 놓아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일어나려고 하는데 거리가 가까운 어머니가 얼른 의자를 끌며 일어나시며 앉아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액정에 뜬 것을 확인하곤 웃으시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엄마가 대신 받아서 혼내줄까?”

무슨 말씀인가 싶어 액정을 확인하자, ‘팀장님’이라고 떠 있었다. 어머니는 ‘뭔데’하고 고개를 내미는 아버지에게 ‘팀장, 약 올렸다는’하고 냉큼 고했다. 아버지는 또 냉큼 ‘줘봐’하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정해진씨.

“예, 말씀하세요.”

그가 보지도 않는데 나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삐딱하게 기대앉아, ‘나는 무섭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정말 어디선가 보고 있는 것처럼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어딥니까?

“집인데요.”

-뭐 하는데요?

“밥 먹고 있는데요.”

-혼자?

“부모님 집에 와 있습니다. 일요일엔 웬만하면 집에서 같이 먹자고 하셔서.”

-어린애로구만.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빈정거리는 말투에 내 자세는 또 금방 차렷 자세가 되었다. 좁은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나는 내가 화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옅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건 어린애가 아니라 효자라고 표현하는 거라고 한 마디 해주려다가, 그러면 또 말꼬리를 잡고 늘어 질까봐 얼른 용건을 물었다.

-아, 해장이나 시켜주려고.

“술 마신 건 금요일이고 오늘은 일요일인데요.”

-그래서 다른 것도 사주려고 했더니. 인형 같은 거.

“... 저희 아버지 바꿔드릴까요?”

-뭐라구요? 아버지? 왜?

“...됐습니다. 어쨌든 이제 속은 말짱하고, 인형은 취미가 없어서요. 끊겠습니다.”

-그럼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참, 내일 출근할 겁니까?

혹시 전화 건 용건이 내가 쌍욕 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사표처리하려는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방안을 빙글빙글 돌다말고 우뚝 멈춰 서서, 나도 모르게 어릴 때 버릇처럼 손톱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가만히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잘근, 손톱을 물어뜯으려는데 수화기 너머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 또, 해진씨가 부끄러워서 말도 안 하고 회사 안 나올까봐. 그럼 됐습니다, 끊죠.

나는 얼른 휴대폰을 들고 주방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내밀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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