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삼계탕을 실컷 먹은 희철은 입영 통지서가 나온 지 한참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 머리를 박박 깎고 나타났다.
“야, 그런 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쪽팔리잖아.”
“군대 가는 게 뭐가 쪽팔린 거냐! 자랑스러운 거지!”
“아니, 나... 울 것 같아서.”
“......”
덩치는 곰 같은 주제에 감수성만은 여린 녀석을 위해 나는 특별히 논산으로 떠나는 길, 기차역에서 특별히 꽃돌이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해진아. 그날 가발 쓰고 나오면 안 되냐?”
“뭐? 무슨 가발?”
“쪽팔리게 사내놈한테 꽃 받으면서 떠나면 더 우울할 것 같아서 그래.”
“......”
그리고 D-day, 나는 출판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정말 꽃다발을 들고 희철을 배웅 나가주었다. 가발은 쓰지 않았다. 희철은 내 짤막한 머리길이를 보고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기어이, 내가 가발을 쓰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정말 입대하는 게 싫어서 그런지, 울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곰만 한 녀석을 달래느라 나는 참, 부끄러웠다.
“정해진, 너는 정말 복 받은 줄 알아라. 흑...”
“그래, 알았다. 참회하면서 살게.”
“면회 올 때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꼭 챙겨 와야 한다..”
“응, 알았다. 훈련이나 잘 받아라.”
그렇게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울며불며 군 입대를 했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약간의 후련함과 또 약간의 부러움을 가지고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뽀얀 먼지가 둥실 떠 있다 가라앉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항상 옆에서 떠들어주던 녀석이 없으니 이제 심심해서 뭐 하고 놀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호주머니에 넣어뒀는데 거참 요란도 하다, 생각하며 액정을 확인했다. 그럼 그렇지. 한숨이 폭 나왔다.
“예, 팀장님.”
-친구 훈련소 가는데 배웅 나갔다며?
“그런데요.”
-그런데요, 정해진씨. 일을 이따위로 해놓고 개인적인 일로 덜컥 휴가를 내다니, 배짱 한번 좋네요.
“예? 뭘... 아니, 지금 곧 가겠습니다.”
딱히 생각나는 실수는 없었지만, 하긴 실수란 게 스스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 나는 다급히 전화를 끊고 무작정 달렸다.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출판사로 가는 동안 내가 더위를 먹었나, 정말 무슨 배짱으로 달랑 최 선배한테만 휴가 허락을, 그것도 바로 전날 통보한 걸까,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계속 열심히 하면 정직원으로 올려준다고도 했는데, 비록 말만이라도 이렇게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그게 얼마나 소중한 연인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르바이트 치고는 꽤 많은 월급을 받는데, 정말 미쳤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화도 너무 건방지게 받았다. 아무리 김태준이 평소에 날 놀려먹는 걸 낙으로 아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그래서 좀 만만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긴 해도, 그래도 타이틀이 팀장... 아니, 엄밀히 대표인 사람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등 뒤로 땀이 주룩 흘렀다.
“헉..헉...헉.....”
“어라, 해진씨. 오늘 휴가 쓴다고 하지 않았어요?”
계단을 뛰어올라간 탓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고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데, 사무실 안쪽에 투명 벽으로 막아놓은 팀장실 안의 김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하나, 어쩌나 하고 잔뜩 주눅 들어 있는데 결국 그가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넓은 보폭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걸음에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쓰거나 원고를 뒤적이거나 타자를 두드리거나 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거나 했다.
“저... 팀장님. 제가 뭘 실수..”
그가 내 책상 앞에 와 서자 나는 뻣뻣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혼나는 아이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물었다. 그러나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내 말을 잘랐다.
“이번 호 계간지에서 작가들 인터뷰 딴 것, 해진씨가 교정했습니까?”
“예...”
“그리 긴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짧은 원고에서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해서 소설은 손이나 댈 수 있겠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출판사에서 나오는 계간지에서 그런 기본적인 실수가 있으면 독자들 신뢰 잃는 건 시간문제 아닙니까? 벌써 항의가 몇 건이나 있는 지 아십니까? 계속 이렇게 나오면 해진씨가 해야 될 일을 다른 사람들이 몇 번이나 검토해야 하는데,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데, 김태준은 휙 발걸음을 돌려 역시 넓은 보폭으로 저벅저벅 걸어 자신의 투명막으로 둘러싸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멍하니 서 있자 옆에서 최 선배가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역시 일제히 모든 사람들이 이번 호의 계간지를, 그 속의 작가 인터뷰 란을 훑어보았다. 저마다 내가 놓친 오탈자를 찾는 모양이었다.
“뭐야, 딱 세 개네.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혼낼 정도는 아닌데. 해진씨, 너무 기죽지 마. 그동안 해진씨가 너무 완벽하게 해내서 그래.”
“예에...”
“그래, 우리도 처음엔 어이구, 오탈자 정도가 뭐야, 아예 문장 전체를 비문으로 바꾸는 바람에 욕 많이 먹었지. 이 정도는 일도 아냐, 응?”
“예에...”
“그건 그렇고 저 사람 요즘 계속 왜 저래?”
“계속 누구 하나 걸려라, 하는 분위기였어. 오늘 딱 해진씨가 걸린 거지.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해.”
“예에...”
“그래도 따로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해. 아까 안 받아줬잖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최 선배가 옆구리를 찔렀다. 안 그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을 질질 끌며 그의 사무실로 향하는데, 그 모습을 보던 직원들이 모두 하나같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차는 바람에 더욱 우울해졌다.
똑똑-
투명벽 너머로 빤히 모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노크는 해야 할 것 같아 유리문을 두드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들어오라는 어떤 표시도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들어가, 그냥 들어가’하고 속삭이는 것에 힘입어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입술을 물고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소한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수리 위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 없이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시선은 맞추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있구나 싶어 나는 한동안 발을 비비기도 하고 손가락을 맞잡은 채 꼬물거리기도 하고 그의 책상의 빈 구석을 뜬금없이 응시하기도 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여전히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떤 응답도 없어 나 또한 아까 선배들이 이야기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좀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 이렇게 나오면’이라고 했는데, 내가 휴일이 아닌 평일에 따로 휴가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오탈자 실수를한 것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처음이라는 점에서 상사로서는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훈계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역시 또 누군가의 말처럼 실수에 비해 그의 반응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근래 들어 계속 내 행동에 시비를 걸어왔다. 내게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으면 바로 칼을 겨눌 것처럼 유난히 내게만 까다롭게 굴었다. 그러니 또 누구의 말대로 ‘오늘 딱 내가 걸린’ 게 아니라 ‘오늘에서야 걸린 것’이다. 여전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눈을 굴렸다. 역시 반투명으로 된 천정의 미세한 무늬를 세어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그때... 삼계탕 집에서 그 친구는... 그러니까 오늘 입대한다고 배웅 나간 친구요, 그 친구는 그냥...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고요... 그러니까... 아주 담백한 친구 사이거든요...걔는 제가 이쪽.. 노멀이 아닌 것도 모르고...”
내가 무슨 이야길 지껄이는 건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입은 마음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김태준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합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자세를 바꾸어 비딱하게 앉아 드디어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볼펜을 돌리다 그것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그냥... 그렇다고요.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머쓱한 마음에 서둘러 걸어 나가려는데, 문에 손을 대는 순간 그가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예?”
“다시 문 닫고 들어와요.”
오늘은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얌전히 도로 문을 닫고 그의 앞에 가 섰다. 그런데 김태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아니, 문 옆의 블라인드로 향했다. 그리고 조리개를 조절해 블라인드를 내려 바깥 사무실과의 시선을 차단했다. 대체 뭘 하려나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다시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를 보며 차츰차츰 뒤로 물러나다보니 그의 책상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그는 내가 영원히 뒤로 물러날 것처럼 내가 벌써 서 있는데도 점점 더 다가왔다. 코앞에 바짝 다가선 남자의 가슴에서 아쿠아 디 지오 향수 냄새가 났다. 시원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숨을 깊이 쉬었다.
“정해진씨.”
“예.”
귓가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불행하게도 꼴깍, 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입가가 조금 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게 불편해 그의 어깨 부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 얘길 나한테 왜 하는 겁니까?”
“그.. 제가.. 너무 문란하게 생활해서 일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실까봐...”
더운 날씨에 뛰어온 것이 이제야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을 깜빡인 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문 옆의 화분을 또렷하게 응시하려 노력했다. 내 멍청한 대답에 흥, 하고 비웃은 그의 미지근한 숨이 이마에 와 닿았다. 나는 책상에 엉덩이를 기댄 채로 상체를 더욱 뒤로 젖혔다. 최대한 몸을 쭉 뺀 모양을 보고 태준은 다시 한 번 ‘하!’ 짧게 비웃었다.
“정해진씨, 나는 직원들 성생활까지 참견하는 상사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말을 끌며 뒤로 젖힌 내 등허리 쪽으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졸지에 그에게 안긴 꼴이 된 나는 황급히 화분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적당한 성생활은 오히려 생활에 활력을 주죠.”
그의 무릎이 내 허벅지를 가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어깨를 밀쳤다. 그리고 도망치다시피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직원들이 그런 내 모양을 보곤 놀라 다들 한마디씩을 해댔다.
“왜 그래? 많이 혼났어?”
“아..아니요.”
“얼굴이 왜 그렇게 붉어? 설마, 맞았어?!”
“아니요, 그건 아니고...”
“뭐야, 사람 막 치고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심보 아냐?”
멋대로 떠드는 것이 귀에 제대로 와 박히지 않았다. 어찔한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자리로 가 털썩 앉았다. 정말 잔뜩 혼이 났거나 혹은 진짜로 한 대 맞았다고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책상에 머리를 기댄 채 ‘예, 예’하고 대답하는데, 에어컨에 차게 식은 책상에 뺨을 맞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화가 치밀었다. 놀리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사표를 내던지면 내던졌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당-
의자를 밀어뜨리기까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블라인드가 내려진 그의 사무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해진씨, 어, 어, 왜 그래? 왜... 해진씨, 참아, 참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아니, 그건 오기였다. 길거리에서 잔뜩 마신 더운 열과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가 맞붙어 아직 적응하지 못한 몸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두툼한 원고를 넘기고 있던 김태준이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 이상은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인간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있고, 그것은 동물의 세계와는 달리 생물학적인 요인보다 학습과 사회학적인 요인이 강약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태준은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학습되고 사회화된 기준에서도 강자로서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위압적인 시선에 오기가 바짝 오그라들었다.
“들어오려면 두 발자국 더 들어와서 문을 닫아요.”
그러니까 그건, 기 싸움이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두 발자국 더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그러나 로봇처럼 걸어가 그의 책상 앞에 마주섰다.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팀장님.”
“네, 정해진씨.”
“아까 저한테 직장 내 성희롱 하신 것 압니까? 제가 남자라도... 그러니까, 남자끼리라고 해도 성희롱 처벌이 성립된다는 거 아십니까?”
“아,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노동부에 고발하면 팀장님은 당장...”
“고발하지 마세요.”
“......”
갑작스러운 공격에 할 말이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태준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눈가라던가 입가라던가, 오랜 시간 몇 번이고 놀림감이 된 대상이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능글거림이, 그 어딘가에 분명히 묻어나왔다. 당황한 채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가 피곤한 듯 목을 옆으로 꺾으며 말했다.
“한번만 봐 줘요. 미안해요.”
“..에... 예... 뭐.. 그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라 그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나는 버벅거렸다. 그리고 ‘정 그렇다면야 뭐’하는 태도로 주춤 물러섰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나가려는데, 문득 어떤 의문이 더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런데 팀장님.”
턱을 문지르며 다가가자 태준도 눈을 가늘게 뜬 채 응시해왔다.
“팀장님, 군대 다녀오셨어요?”
“...어머니께서 절 가지셨을 때 영국에서 유학 중이었고, 그래서 저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국적이 아니시다?”
“예, 이중국적이었다가... 사정이 있어 한국 국적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도 안 다녀오셨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꼭 편지로 희철에게 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는 정해진씨는 군대 갈 때 안 됐습니까? 군대 가는 친구 꽃돌이나 하고, 왜 안 갑니까?”
태준이 턱을 치켜든 채 물었다. 뭔가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왠지, 천칭이 내쪽으로 약간 기운 느낌이었다. 나는 신이 나 그의 얼굴 앞으로 손을 바짝 내밀어 펴 보였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애가 있거든요.”
“장애... 어디에요?”
바로 눈앞에 보여주고 있는데도 태준은 눈을 더 휘둥그레 뜨고는 내 몸을 아래위로 살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코앞에 손가락을 편 채 파닥거렸다.
“이쪽 손가락이요, 반 마디 정도 짧거든요.”
반대편 손으로 정확하게 가리켜주자 그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검지를 움켜쥐었다.
“겨우, 이거 말입니까? 이런 걸로도 군 면제 사유가 됩니까?”
“그럼요. 총을 못 쏘는데요. 총 못 쏘는 군인은 쓸모가 없잖아요.”
“흥.”
태준이 비웃으며 내 검지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내팽개치듯 놓아주었다. 나는 손가락을 흔들며 ‘그러는 저는’하고 속엣말을 하며 입을 삐죽였다.
“어쨌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휴가 썼는데, 오늘은 그냥 나가도 되지요?”
“잠깐만.”
발길을 돌리려는데 또 붙잡혔다. 이젠 상사고 뭐고, 그저 귀찮기만 해서 조금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게 왜 궁금했던 겁니까?”
“예?”
“혹시 나한테 관심 있습니까?”
“아니요!”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군대에 갔다 왔는지 아닌지, 그런 게 왜 궁금하냐구요.”
“그게... 그냥....”
“그냥? 뭐든 그냥입니까? 정해진씨,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에.. 아니요... 죄송합니다....”
또 뒷덜미를 잡혔다는 생각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친구 이야길 하지 않나, 좀 혼냈다고 성희롱으로 고발할 거라고 협박을 하지 않나, 뜬금없이 군대는 다녀왔나 묻지를 않나. 시간이 남아도는군요.”
“죄송합니다.. 휴가 반납하고 저녁까지 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일 없고 시간이 남아돌면, 나하고 연애나 합시다.”
“예.... 에..? 예?”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얼른 고개를 들었다. 역시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듣지는 않았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블라인드에 막혀 밖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긴, 목소리가 새어나갈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장난인가, 무슨 장난을 저렇게 살벌하게하나. 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예, 라고 방금 대답했죠?”
“예? 아..아니요, 팀장님. 그게 아니라요.”
“자, 나가요. 일 좀 합시다. 공과 사는 정확하게 지킬 테니까, 정해진씨도 할 일 있으면 휴가 반납하고 저녁까지 일 해요.”
“저기요, 저기...”
저기요, 여기요, 불렀지만 들리지도 않고 눈앞의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그는 보고 있었던 원고를 다시 휘적휘적 넘길 뿐이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뒷걸음질 쳐 겨우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그대로 주룩 미끄러져 바닥에 앉아버렸다. 직원들 몇몇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해진씨, 너무 상심하지마.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되지 뭐.”
“해진씨, 힘 내.”
“그래, 우리가 도와줄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