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5화 (5/35)

-05-

막상 ‘연애나 하자’는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로 한동안 특별히 ‘연애’다운 ‘뭔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선 출판사 내에서 시상하는 문학상 준비로도 바빴고, 김태준은 출판사 대표로서의 업무와 함께 태인 기업의 업무 전향을 파악하는 기간이었던 터라,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벌써 미간 사이에 주름을 단단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연애다운 뭔가’를 기대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파악하기 위해 며칠 동안 골머리를 싸맸고, 그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이리저리 피해 다니거나 괜히 또 실수를 해서 따로 불려가 혼이 날까봐 오탈자를 찾는 데에 강박관념이 생길 정도였다. 그리고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까지 아무런 ‘농담’ 혹은 ‘장난’이 없기에 나는 자연스레 그것을 없던 일로 치부해버렸다. 그런데 그 ‘없던 일’은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나타나 내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헉..!!!”

“아, 깜짝이야.”

“왜.. 왜 여기...”

“방금 벨 누르려고 했어. 그런데 이런 원룸도 벨이 필요한가? 그냥 노크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

일요일 오전, 아르바이트 때문에 딱히 동아리에 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학과 생활에 충실했던 것도 아닌데다 남자 동기들은 모두 군복무 중이거니와 내 주위에 있던 유일한 ‘시끄러운 인간’이었던 희철까지도 국방의 의무에 임하고 있어, 나의 일요일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내 작은 냉장고 안에는 반찬거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 인스턴트식품이나 배달 음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주말마다 부모님 집에서 밥을 먹는 게 내게도 편한 일이 되었다.

빨래거리를 좁은 베란다에 겹쳐 널어놓은 뒤 고등학생 때부터 입던 후줄근한 후드티를 걸쳐 입고 막 문을 나서던 때였다. 철컥, 고릿쇠를 풀고 문을 여는데, 내가 문을 미는 힘보다 더 강한 어떤 힘이 문을 당기고 있었다. 그 힘에 딸려 문고리를 잡은 채 당겨져 밖으로 튕겨지듯 나왔더니, 코앞에 그 남자, 김태준이 있었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없이 ‘타’ 하는 명령에 기가 죽어 잠자코 그를 따라 잘빠진 세단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저기요.”

“겨우 시간 냈어. 미리 전화하면 핑계 대고 피할까봐, 주말에 부모님 집에 간대서 무작정 아침부터 쳐들어온 거야. 연애 하잔 얘긴,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 장난삼아 수작 거는 한심한 인간은 아니니까 괜히 겁부터 먹지도 마. 나도 눈치라는 게 있고 상대방이 건네는 피드백을 알아차릴 정도의 감성지수는 가지고 있어, 무조건 싫다는 변명은 하지 말고, 내 착각이라고 허풍 부릴 생각도 하지 마. 한마디로 적당히 튕기란 얘기야.”

“......”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것도 하지 마, 저것도 하지 마, 하는 말에 모든 게 뒤엉켜 버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금, 뜨끔했다. 그래도 이대로 끌려가긴 자존심 상하고 뭔가 반박할 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그래도 수작 걸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놀려대고...”

“연애 안 해봤어? 처음엔 관심 끌려고 다 그렇게 하잖아.”

또, 뜨끔했다. 거기서 진실대로 ‘예, 한 번도’하고 실토하긴 죽기보다 싫었다. 게다가 내가 매번 실패했던 연애에는 그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 생각을 하자 또 울컥, 했다. 나는 또 뭔가 시비 거리를 찾기 위해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뜨거운 늦여름의 거리를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파헤치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란 얘기가 결국 가볍게 생각한다는 말 아닙니까?”

“무거움의 반대가 가벼움이야? 나름 문학과 관련된 일 하는 사람이 그렇게 이원론적이어야 되겠어?”

“그래도 성추행한 건 맞잖아요.”

“.......”

“눈치가 있고 감성지수가 있으면 상대에 따라서 수작의 수위도 맞춰야 하잖아요.”

“......”

연애 초보인 나는, 내가 스스로 얼렁뚱땅 그의 고백에 동의해버렸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마음껏 떠들었다. 그리고 그의 침묵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태준은 그런 나를 보며 같잖은 듯 웃으며 명품 매장이 즐비한 거리로 차를 몰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말로 그를 이겼다는 생각에 목이 좀 빳빳해졌다. 문득 그가 어느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안전벨트를 푸르며 또 건방지게 명령했다.

“내려, 너 옷 좀 갈아입혀야겠어.”

“에? 내 옷... 왜요?”

“그게 뭐야? 애랑 같이 다니는 것 같아서 창피해.”

그가 마땅찮은 눈으로 내 후드티를 훑어보았다. 나는 또 금세 기분이 상해 그의 깔끔한 수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들었다.

“팀장님은요? 팀장님은 휴일에도 그런 옷 입고 다녀요?”

“응, 난 오히려 이런 옷이 편해.”

“거짓말. 괜히 멋 부리려고.”

“거짓말 아니야. 난 정말 이런 옷이 더 편해.”

“나도 아저씨처럼 입고 다니는 사람이랑 같이 다니는 거 창피하거든요?”

“......아, 그래? 알았어. 그럼.”

별로 화가 나진 않은지 그는 곧바로 수긍하고 다시 벨트를 맸다. 그리고 두어 블록을 더 가서 좀 더 캐주얼한 옷들이 보이는 매장 앞에 차를 세웠다. 그를 따라 들어간 매장 안에서 나는 멀뚱히 서서 그가 순식간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고른 후 갈아입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청바지에 부착된 가격표를 훔쳐보다 혀를 내둘렀다.

“골라. 사줄게.”

“됐거든요? 돈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하다. 다들 좋아하던데.”

그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계산을 치렀다. 이때까지 대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건지 뻔했다. 그리고 그를 앞질러 먼저 매장을 빠져나와 세단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자 그가 조금 딱딱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돈 자랑 하지 못하게 했던 게 기분이 나빴던 걸까, 돈도 너무 많으니 사람 성격까지 희한하게 만드는구나, 생각하며 차 문을 열려는데, 그가 손목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아무 말도 안 해줘?”

“뭘요?”

“옷, 갈아입었잖아.”

“그런데요.”

“...됐다. 타기나 해.”

그는 거칠게 운전을 했다.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밥 먹으러’하고 단답형으로 간단하게 말했다. 뭣 때문에 화난지도 모르고 나는 서서히 그의 본성이 나온다고 결정지어 버렸고, 정식으로 ‘오케이’한 것도 아닌데 그냥 확 물러버릴까 생각했지만, 생각만 했다. 나 역시 뾰로통해 있으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해진. 네 매력은 말이지, 뭐랄까...”

나는 자세를 조금 그를 향해 기울여 귀를 쫑끗 세웠다.

“머리는 나쁜 주제에 성격에 강단이 있다는 점이야. 재밌어, 아주 매력적이야.”

머리가 나쁜 것은 분명 나쁜 말인데, 강단이 있다거나 매력이라는 말은 또 좋은 말인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왠지 화내야 할 것 같아서 ‘뭐요?!’하고 한 박자 늦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태준은, 그제야 웃었다.

“참, 그리고 말이야. 나 너랑 다섯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

“그런데요?”

“......”

그리고 또 시무룩해져선 거칠게 운전을 해댔다.

그날, 얼렁뚱땅 대충 데이트라고 우겨본 그날의 데이트는 여느 연인들과 같은 코스였다. 밥을 먹고, 무서운 영화를 보고 소리를 질렀고, 차를 마시며 또 투닥거렸고, 드라이브를 했고, 내 요청에 따라 오락실에 들어가 촌스러운 오락기로 게임을 했고, 또 밥을 먹었고, 마지막으로 그의 요청에 따라 납량 특집 연극을 보며 또 소리를 질렀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은 뭔가 다를 줄 알았더니,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혹시 또 성추행을 하거나 엉큼한 짓을 하려들면 어쩌나 겁을 먹었는데, 내 원룸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입을 맞추며 손이 은근슬쩍 티셔츠를 들추기에 벌벌 떨었더니 의외로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만 들어가라며 엉덩이를 두드리는 손길은 역시 그리 담백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진지한 프러포즈나 정확한 대답은 없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놀려대는 것만 빼면, 이만하면 연애라는 것도 꽤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해 가을, 고생한 탓인지 코가 높아 보일 정도로 살이 빠진 희철이 100일 휴가를 나왔다. 녀석은 휴가의 절반을 자기 집에서 뒹굴었고, 나머지 절반은 내 집에서 뒹굴었다. 며칠이었지만, 그 동안은 태준과 따로 만날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내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은 커밍아웃을 하고 싶었지만, 여태껏 계속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나 사실...’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귀대하는 길에 또 다시 꽃돌이를 자청해 쓸데없는 일을 했다. 귀대하는 길까지 따라 나온 사람은, 부모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출판사 또한 어느 정도 큰일을 모두 치룬 후였다. 태준은 단 둘이 만날 수 없었던 날들에 관해 특별히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공과 사를 정확히 지키겠다는 말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유난히 하늘이 높은 어느 날, 그가 밝은 얼굴로 자신의 사무실에서 나오며 직원들을 주목시켰다.

“여름휴가도 없이 각종 행사 치르시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다음 주부터 편집 팀, 마케팅 팀, 기획 팀, 이렇게 순차적으로 주말부터 화요일까지 팀별 전체 휴가가 시작됩니다. 예, 드디어요. 월, 화요일은 개인적으로 쓰시고, 주말엔 강원도 리조트를 예약해 뒀으니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카지노든 레저관광이든, 여름휴가 빼앗은 사죄의 뜻으로 휴가비 최대한 넉넉히 준비했으니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혹 엠티는 싫다 하시는 분은 펜션 예약비가 불필요해지지 않도록 각 팀장한테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도 자기 할 말만 하고 들어가는 것을, 이번에는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을 구르며 환호했고 또는, 저 사람이 가진 걸 베풀 줄도 안다는 둥, 역시 배포가 큰 인간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는 둥, 졸지에 ‘안티 김태준’에서 ‘사랑해요 김태준’이 되어버렸다. 나는 원고를 들고 결재라도 받으러 가는 것처럼 살그머니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저기요, 팀장님.”

“왜요, 정해진씨.”

별 필요도 없는 원고를 괜히 그의 책상 위에 건네는 척 하며 말을 걸자, 그가 빙글 웃으며 답했다.

“저는 주말 엠티 빠지고 싶은데요.”

“...왜요?”

“그게... 시험도 다가오고... 저는 단체 수련 모임 같은 건 좀...”

“졸업 후에 어디 다른 데 취업 할 생각 아니면 시험 같은 걸 뭘 걱정을 하고 그래요? 학점 안 볼 테니까 그냥 평소 실력대로 대충 해요. 그리고 엠티는... 말이 엠티고 그냥 예약해둔 한 펜션에 몰아넣는 것뿐이지 그냥 각자 놀라고 풀어놓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

“그럼 그게 무슨 엠티에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직원들 화합을 위한 것도 아니면서 뭘 하러 그런 돈을 쓰나, 차라리 전체 다 개인 휴가로 쓰게 하지. 나는 그가 경영자로서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준은 그런 나를 보며 귀찮다는 듯,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말을 맙시다. 그냥 딴소리 하지 말고 준비하기나 해요. 아니, 준비할 것도 없어. 그냥 시간만 비워둬요.”

자기가 안 갈 사람은 미리 말하라 해 놓고선. 나는 그가 ‘태인 문학’은 물론 훗날 ‘태인 기업’까지 말아먹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 저녁, 편집팀 전원은 ‘태인 기업 전체 수련회’라고 휘장이 둘러진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팀 전원이라고 해도 몇 명 되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따로 운전해 오라고 할 순 없으니 ‘태인 기업’ 전용 관광버스를 빌린 모양이었다. 몇몇은 몰래 사인펜으로 ‘기업’글자 아래에 가위표를 긋고 ‘문학’이라고 썼다가 버스 운전사에게 혼이 났다. 태준은 버스에 오르지 않고 자신의 세단을 몰고 따라오기로 했다. 예전 같았으면 ‘황태자 납셨네,’ ‘저 혼자 잘났네,’ 난리였을 사람들이 이번에는 아무도 딴죽을 걸지 않았다.

나는 시끄러운 것이 싫어 은근슬쩍 태준을 향해 눈짓을 건넸지만, 그는 모른 척 하고 훌쩍 혼자 세단을 몰고 가버렸다. 결국 나는 광광 울리는 음악에 잠을 잘 수 없었고, 기어이 버스 가운데에 끌려나와 관광버스 춤을 춰야만 했다. 선배들이야 미친 듯이 웃어대며 좋아했지만, 나는 죽고 싶었다.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캄캄해진 밤이었다. 오후까지 업무를 보고 오는 길 내내 버스 안에서 너무 체력소모들을 했는지 다들 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가 쉬고 싶어 했다. 펜션의 각 방마다 세 명 혹은 네 명이 들어가도록 되어있어서 대충 친한 사람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바람에 나는 어물쩍거리다 최 선배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태준은 역시 혼자 방을 쓰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모두 서너 명씩 짝을 맞추다 보니 남은 것은 방 하나와 김태준 한 명이었다.

“아하하... 팀장님 혼자 방 쓰게 되었네. 이를 어쩌나... 누구, 팀장님이랑 같이 방 쓰실 분 안 계신가요?”

최 선배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동갑인 태준을 향해 꼬박꼬박 ‘팀장님’ 호칭을 붙이던 그는 끝내 자기가 총대를 메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태준이 슬쩍 눈치를 줬지만, 나는 그저 발로 땅을 후벼 파고만 있었다.

“됐습니다. 전 시끄러우면 잠을 잘 못자니까 오히려 편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유 시간입니다. 주무시든, 나가서 즐기시든, 뭐... 방끼리 자유롭게 오가든, 각자 알아서들 하시고, 일요일 오후에 서울로 출발 시간 전까지는 편하게들 즐기십시오.”

쓸데없이 모여 다니며 어설픈 관광을 하기 싫었던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리고 각자, 그러나 우르르 모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세 명이 쓰는 방으로 들어가 가장 늦게 샤워를 하고 또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우스꽝스러운 관광버스의 후유증이 컸던지, 베개에 머리를 눕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푹 잤다는 느낌과 함께 일어났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다른 선배들도 다를 것은 없었다.

“해진씨는 어디로 갈 거야?”

“에... 딱히 계획은 없고, 그냥 주위나 둘러보려고요.”

“응, 산책. 좋지. 이런 자연 경관에서 그만한 것도 없지. 그럼 저녁에 봐. 다들 따로 행동해도 저녁엔 모여서 다 같이 나이트클럽 가기로 했으니까.”

“예에...”

누구는 낚시, 누구는 산악, 또 누구는 환한 대낮부터 카지노, 어떤 무리는 축구, 또 어느 무리는 주변 호텔 식당의 뷔페 탐험 등등, 정말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즐겼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가장 늦게 일어나 가장 늦게 씻는 바람에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에는 방이 텅 비어 있었다. 어차피 느긋하게 둘러볼 계획이어서 드라이어기를 내버려두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여유를 부리는데 갑자기 방안의 전화기가 울렸다. 받아도 되는 건가, 주춤거리며 ‘여보세요’ 소곤거리니 수화기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겁먹은 거야?

“팀장님?”

-응. 다들 나갔지?

“예.”

-그럼 나와.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달칵 끊어버렸다. 언제 이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데, 생각하며 드라이어기를 집어 들었다.

펜션 정문을 나서자마자 어디선가 검정색 세단이 흐르듯 다가와 앞에 와 섰다. 나는 누구 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얼른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느슨하게 맨 채 최대한 몸을 낮게 해 앉았다. 태준은 그런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누구한테 들키는 게 그렇게 겁 나?”

“팀장님은 그럼 겁 안 나요? 내가 어제 차 태워달라고 눈치 줬는데도 모른 척 했으면서.”

“그래서 어제 내가 눈치 줬는데도 땅바닥만 후벼 팠고?”

“..... 근데 어디 가요?”

“밥 먹으러. 방금 일어났지? 눈이 퉁퉁 부었네.”

나는 차가 멈출 때까지 조용히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한 시간 반을 달려,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산길이라 돌고 도는 바람에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곳은 아마도 속초 해수욕장으로 짐작되는 바닷가와 바로 접해 있는 고급 횟집이었다. 3층짜리 건물은 온통 유리 강화벽으로 처리되어 근사한 경관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빙글빙글 도는 길 때문에 약간 멀미를 일으켜 주문을 미루고 우선 근처의 까페 먼저 들렀다.

“죄송해요, 빈속에 커피 먼저 마시면 안 좋은데.”

“괜찮아. 난 아침에 커피부터 마셔. 지금은 한낮이지만.”

커피를 마시며 폐장된 한산한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주말이라 그런지 드문드문 연인들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넌지시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외동아들에 늦둥이라 오히려 외롭기만 했고 그나마 있는 친척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잡아먹을 생각만 하니 딱히 어떤 추억거리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나 또한 외동아들에 늦둥이라면 늦둥이랄 수 있을 만큼 부모님이 어느 정도 연세가 있으셔서 그와 별다르지 않았다고 답했다. 대신 친척은 많지만, 그의 친척들과는 달리, 내가 입양된 사실 때문인지 그리 큰 정을 주지 않았는데, 그 말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렸다.

잠시 후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식사 전에 입안의 커피 잔향을 없애기 위해 바닷가를 조금 거닐었다. 대부분 별 의미도 없지만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저기요’하고 불렀다. 뒤돌아보니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노인이었다. 폴라로이드와 노인이라, ‘디지털 카메라와 노인’의 경우보다는 덜하지만,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그가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아니, 형제지간이신가... 사진 한방 찍어드릴까?”

“휴양철도 아닌데 수고하시네요.”

나는 태준의 눈치를 보며 노인에게 웃으며 답했다. 태준은 별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까칠하게 또 성질부리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얌전히 따라주어서 한숨이 놓였다. 노인이 자리를 잡아주는 대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하나, 둘, 셋’하는 신호에 맞춰 나는 사진기 앞에서의 버릇대로 씨익 웃었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나왔다. ‘어디보자-’하며 노인이 사진을 팔랑팔랑 흔들더니 ‘참 잘나왔네’하고 아부성 멘트와 함께 사진을 건네주었다.

“나는 사진 찍을 때 활짝 웃는 사람 보면 참 실없어 보이더라.”

사진을 보며 태준이 혼잣말 하듯, 그러나 분명히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사진 속에서 나는, 정말 실없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맞받아쳤다.

“나는 사진 찍을 때 무표정인 사람 보면 참 싸가지 없어 보이더라.”

“뭐야?”

“그러면, 한 장 더 찍어드릴까?”

기회다 싶었는지 노인이 냉큼 말을 받았다. 나는 태준의 눈치를 살폈고, 그는 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노인이 가리키는 자리에, 그게 그거인 다른 방향의 바다를 배경으로 나란히 섰다. ‘둘 다 살짝 씩만 웃어요, 하나, 둘, 셋’하는 노인의 지시에 맞춰 나는 태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간지러웠는지 같잖았는지, 어쨌든, 두 번째 사진에서 우리는 모두 ‘살짝 씩만’ 웃고 있었다. 그런데 태준은 내가 ‘실없이 웃고 있는’ 첫 번째 사진을 가지겠다고 고집 부렸고, 나는 결국 두 번째 사진을 가지게 되었다. 그도 나도, 지갑 안쪽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각자 사진을 넣어두었다.

근사한 풍광을 자랑하는 횟집의 3층에서 느긋하게 그러나 아침도 건너뛴 채 늦은 점심으로 배가 터지도록 식사를 했다. 태준은 비싼 회 먹이려고 했더니 매운탕만 먹는다며 나를 촌스럽다고 구박했다. 그래서 나는 그 ‘비싼 회’를 조금이라도 깨작거렸다.

횟집에서 나왔을 때에는 어느새 오후 여섯 시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에 나이트에서 모두 모일 거라는 최선배의 말을 떠올리고 이만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는 리조트로 향하는 도로에서 갑자기 또 길을 꺾더니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괜히 화를 내면 일부러 더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아서 나는 잠자코 어디까지 가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려.”

“싫어.”

“왜 반말이야?”

“...억지로는 안 한댔잖아요.”

“...... 또 멀미할까봐 잠깐 쉬어가자는 거야.”

도착한 곳은 ‘청초호’라는 펫말이 세워진 술단지 모양의 커다란 호수 앞이었다. 그러나 그가 차를 세운 곳은 호수와 나란히 선, 호텔치고는 작은 규모지만 어쨌든 ‘호텔’이라고 간판을 내건 호텔 주차장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호수치고는 큰 호수와, 호텔치고는 작은 호텔. 그리고 별 의미 없이 쉬어가자는 남자. 웃겨, 이건 꼭 우스갯소리로 하는 ‘오빠 못 믿니?’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아니, 우리 경우엔 ‘팀장 못 믿니?’가 되겠지만. 나는 벨트도 푸르지 않고 꿍하니 자리에 버티고 앉아있었다. 결국 그가 이쪽 차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직접 벨트를 풀어주었다.

나와, 싫어, 한참 실랑이를 벌이는데, 어디선가 급히 뛰어오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태준과 내가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자 중년치고는 젊어 보이는, 굉장히 화려한 여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태준 앞에 바짝 다가서서는 아직 차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곤 활짝 웃었다.

“아, 다행이다. 이쪽이 남잔지 여잔지 잘 안 보여서 말이야. 선후밴가? 두 명? 오케이, 내가 우리 애들 잘 빠진 애들로 두 명 대기시키고 있을게. 전화해요, 자 , 여기.”

그리고 재빨리 태준의 재킷 호주머니에 명함으로 생각되는 것을 쿡 찔러 넣고는 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얼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아줌마!’하고 고함치는 것으로 보아, 호텔의 요주의 인물인 것 같았다.

“풉.”

“큭.”

뜻밖의 계기로 긴장이 풀렸다. 태준과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아직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다정한 얼굴로 차체 위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 정말 네 멀미 걱정하는 거야. 그리고 여기, 내가 좋아하는 데야.”

나는 흔치 않은 그의 다정한 얼굴에 홀린 듯,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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