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12화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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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이어 생리휴가를 쓴 월요일까지, 단 이틀만 쉬고 출근한 선희를 나는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 걸까, 나는 선희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오리새끼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럴 때마다 선희는 뒤쫓아 오는 나를 향해 발길질을 해댔고, 나는 깜짝 놀라 제발 그렇게 움직이지 말라고 빌었고, 사무실 사람들은 우리가 장난을 친다고 여겼는지 그저 껄껄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점심시간을 이용해 약국에 뛰어다녀왔다. 한참을 머뭇거린 뒤  유산을 한 여자에게 좋은 영양제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여자 약사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쌀쌀맞게 철분제와 엽산제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검정 봉지에 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헐레벌떡 뛰어와 곧바로 선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거 뭔데?”

최 선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선희는 삐딱하게 앉아 노려보고만 있었다. 저렇게 앉지 말지, 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물어뜯었다. 최 선배의 시선을 등으로 가리며 ‘초콜릿이요’ 대답하자, 선희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야, 초콜릿이면 왜 선희씨만 줘? 나도 줘!”

“두 사람 수상하다! 뭐야, 아까부터. 정해진 어린이가 감히 선희씨한테 작업 거는 거야?”

순식간에 시선이 모아졌다. 선희는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그리고 몇몇이 일어나 다가오려 하자 얼른 봉지를 가방에 넣어버렸다. 야유가 쏟아지자 선희가 귀찮은 듯 가벼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초콜릿 아니에요. 생리대 사달라고 부탁했어요.”

“......”

“에이, 정해진 달린 거 떼야겠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심부름 할 게 없어서 그걸. 에잇, 에잇.”

최선배가 혀를 차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정말 아래가 허전해진 것 같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발을 돌렸다. 걸음을 떼려는데 문득 뒤에서 옷깃이 쭉 잡아당겨졌다. 뒤돌아보자 선희가 볼펜으로 메모지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숙이자, 작게 휘갈겨 쓴 글씨가 보였다.

-정해진, 계속 삽질한다.-

아무래도 좋았다. 삽질이라도 물질이라도 좋았다. 그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나는 여자도, 그렇다고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도 아니어서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자궁이 없고, 여자를 향한 욕정이 없으니 그 모든 일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속죄처럼, 신기할 정도로 금방 회복하는 선희를 대신해 며칠을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펄펄 날아다니는 선희 뒤를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다닌 지 며칠, 선희가 씩씩거리며 점심시간에 따로 호출을 했다. 사무실 사람들은 ‘혼내려나봐’하고 수군거렸다. 선희는 아무 말 없이 옥상으로 향했다. 이제야 한 대 때리려나, 주먹을 꽉 쥔 채 옥상 문을 열었다. 녹슨 철제문이 끼익, 익숙한 신음을 내며 열렸다.

“야... 너 그러면 안 돼!”

선희는 난간에 기댄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재빨리 다가가 입에 문 담배를 뺏어 바닥에 던졌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선희는 눈이 부신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흥, 하고 비웃었다.

“나 술 잘 마시는 건 알았을 테고, 담배까지 하는 줄은 몰랐지? 대학 입학하자마자 시작했어. 학교 복도에서 당당하게 담배 피는 여자선배가 멋있어 보여서, 따라했어.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더라. 그런데 사회 나와 보니 아니더라. 그래서 몰래 폈다. 내가 냄새 없애려고 얼마나 애쓴 지 아냐? 술 하고 담배 하고, 애가 잘도 붙어있었겠다. 나, 처녀도 아니야. 난 남들 앞에서 담배 피는 건 부끄러운데, 남자친구랑 둘이 있을 때 옷 벗고 성욕에 충실한 건 하나도 안 부끄러워.”

“...그런 말 하지 마.”

“자학하는 거 아니야. 사실을 말하는 거지. 네가 아니라 내가 실수했다는 말, 넌 못 믿지? 아니, 이해를 못 하겠지? 사회에서 떠들어대는 그 흔한 모럴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너 지금. 남자가 실수하면 그냥 실수고, 여자가 실수하면 실패야. 그런데 정해진, 나는 실패한 게 아니야. 네가 책임 느끼면 나는 실패한 게 돼. 넌 누가 너더러 이성애자가 아니니까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면 좋겠어?”

나는 걸음을 옮겨 해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선희는 픽 웃으며 ‘거봐’하고 응수했다.

“그래도... 내 맘이 안 편해.”

“그거, 네 이기심이야.”

“....응, 그런 것 같다.”

“넌 솔직해서 무섭다.”

선희는 구두 앞코로 내 발등을 꾹 누르며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내게도 한 개비 건네주었다. 막상 받아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버둥거리며 선희가 하는 대로 따라 입에 물고 불을 붙여 빨아들였다.

“흑...큭...쿨럭...쿨럭...!”

“뭐야, 너 설마... 정말, 어린이냐?”

선희가 입을 헤 벌린 채 내 손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나는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선희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벅벅 긁었다.

“세상에. 정해진, 너는 정말 내 인생의 오점이다. 혹 나중에 나랑 원한 질 일 있어도 제발 나랑 썸씽 있었다는 얘긴 하고 다니지 마라. 아, 쪽팔려. 내가 이런 어린이한테 한때 흑심을 품었었다니.”

아무리 그래도 담배 좀 못하는 것 때문에 오점으로 낙인찍히다니, 좀 억울했다. 담배라면, 중고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그런 쪽으로 워낙 엄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고, 대학 들어가서는 부족한 용돈에 비싼 담배 값으로 축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부러 멀리 했었고, 일을 하면서는 그, 자기는 마음대로 하면서 내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는 싫다며 극구 반대하는 김태준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물론 누군가 말렸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고, 호기심에 두어 번 입에 대 본 결과, 이 맛없는 걸 왜 그렇게 입에 달고들 사는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저리주저리 해명을 하는 동안, 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선희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든 요지는, 더 이상 그렇게 따라붙지 말란 말이다. 난 네 인생 책임 못 져줘.”

“내가 뭘...”

“너, 요즘 나 그렇게 쳐다본단 말이야. 네 인생 모두 나한테 맡길 것처럼. 행동하는 거나 말하는 건 꼭 지가 날 책임질 것처럼 굴다가, 눈빛은 반대야. 내가 실수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너 책임질 생각은 없어. 자세한 건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가, 지금 네 상황. 하지만 그건 오롯이 네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야. 지금 내 문제는 내가 책임질 일이고 말이야. 신경 끄란 말이 아니야. 다만, 어설프게 서로 아픈 부분을 나눠 갖진 말잔 얘기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술친구가 전부야. 네가 그쪽이란 걸 안 이상, 나도 더 이상 너한테 흑심 없다.”

어느새 햇빛이 선희의 얼굴 반쪽을 비추었다. 나는 이번에는 더 이상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선희의 말대로, 그 정도는 오롯 선희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대로 내 앞가림이나 잘 해야 했다. 그제야 허리와 하체에 머물던 저린 통증이 사르르 내려가는 것 같았다. 후련했고 시원했고 섭섭했고 서운했다. 불이 잘 붙지 않는지, 찰칵찰칵,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걸음을 옮겨, 바람을 막아주었다.

“강선희, 너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엄청나게 나쁜 놈이었을 것 같다.”

한숨을 쉬며 말하자, 선희가 비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남자였으면 여자들 엄청 후리고 다녔을 텐데. 아깝다.”

*    *    *

그 해 가을은 희철의 눈치를 보거나 선희에게 술을 따라주며 보냈다. 그리고 주말은 한가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주말에 집에 들르는 것을 피했던 것과 비교해 시도때도 없이 찾아가 밥 달라는 아들에 대해, 다행히 부모님은 별 말씀은 없었다. 다만 어렴풋이 갑자기 한가해진 이유를 알아채셨는지, 평소 여자 친구 사귀면 좀 데려오라던 청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이것도 쳐낼까요?”

언제나처럼 한가한 휴일, 아버지의 부름도 없이 자발적으로 찾아가 마당의 침엽수들을 가지치기하는 데에 일손을 거들었다. 조경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라 작은 가지 하나를 치는 데에도 일일이 허락을 맡아야 했다. 내가 보기에 그대로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지나치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났고, 분명히 지저분해 보여서 깔끔하게 쳐내면 조경을 망치고 쓸데없이 나무를 상처 낸다고 또 혼이 났다.

“그래, 아래의 가지를 쳐내.”

“예에...”

두 개의 가지가 나란히 뻗어 나간 가지를 붙들고 물어보니, 냉정하게 하나를 쳐내라는 대답에 나는 왠지 시무룩해졌다. 아래쪽의 가지를 쳐내면 오히려 받치고 있던 것이 없어져 위쪽 가지가 힘을 잃고 주저앉을 것 같은데. 나는 가지를 붙들고 톱은 여전히 한 손에 내려 잡고만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왜’하고 물었다.

“이렇게 나란히 붙어 있는 건 잘못 쳐내면 오히려 무너지지 않아요?”

“아니야, 오히려 그대로 놔두면 상하지. 거 봐라, 아래쪽에 있는 가지는 벌써 상해 있잖아. 위에 가지 때문에 햇빛을 잘 못 받아서 그래. 그런 걸 평행지라고 한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네 허리 즈음에 있는 가지 말이다. 제법 융숭하게 나 있는 것들. 그것도 모양만 그럴 듯 하지, 쳐내야 해. 그런 걸 내측지라고 한다. 그렇게 속으로만 나 있으니 햇빛은커녕 통풍도 잘 안 되니까 모조리 다 제거해야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던 가지 중 하나를 톱으로 잘라냈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사내 녀석이 저리 마음이 약해 어쩔꼬.”

핀잔 아닌 핀잔에 잘라낸 가지를 바닥에 던지며 배시시 웃어보이자 아버지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손질하고 있던 가지를 들추어내며 혼잣말을 하듯 낮게 속삭이셨다.

“네 엄마가 널 가졌을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배가 불룩하게 불러서도 자기 배고픈 건 생각 안 하고 동네 거지부터 시작해서 도둑괭이들 먹이까지 챙기는 걸 보고 내가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려도 말을 안 들었어. 네 엄마가 그랬어. 그래서 네가 그렇게 쓸데없이 인정이 많은 게다.”

아버지는 종종, 내게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기 전은 물론 그 후에도 이렇게 내가 진짜로 어머니의 배에 잉태되었던 것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에 젖었다. 마치, 지금 이 생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태아인 내가 꾸는 꿈인 것처럼 느껴지곤 했던 것이다. 그 꿈은 아름답고 또 슬펐다.

“내 욕하고 있지요?”

현관문 사이로 빠끔 고개를 내민 어머니가 소녀처럼 웃으며 농을 던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지를 치며 ‘글쎄요’하고 얼버무렸다.

저녁까지 배불리 먹고 언제나처럼 현관 앞에서 두 분을 억지로 들여보낸 후 깔끔하게 정돈이 된 마당을 거쳐 철제대문을 열었다. 버릇처럼 하늘을 바라보자 밝은 보름달이 아주 가까운 듯 낮게 떠 있었다. 제대로 닫힌 대문을 확인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골목을 지나자 옴푹 파인 곳에서 그림자가 웅크려 있었다.

“저기...”

이상한 공포는 여전했다. 그러나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나는 노인을 불렀다. 노인은 수줍은 듯, 부끄러운 듯, 미안한 듯, 오묘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밤에 보는 노인의 얼굴, 그 중에서도 특히 두 눈은 항상 동공이 활짝 열려있어 마치 봄밤 수음하는 들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나는 손을 떨면서도 버릇처럼 지갑을 꺼내 들었다. 노인의 동공이 더욱 크게 확장되는 듯했다. 지갑 안에는 삼만 원뿐이었다. 만 원을 남겨두고 이만 원을 건네자 노인 역시 버릇처럼 잽싸게 지폐를 낚아채갔다. 그리고 등을 구부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문득, 그가 꼽추인 것을 알아챘다. 이제야 눈에 띄다니, 나도 참 둔하다,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    *    *

쉬는 국경일도 하나 없는 11월, 출판사에는 묘한 긴장과 활기가 돌았다. 제 3세계의 문학 작품들을 주로 번역, 출판해 오며 마니아층을 꽤 탄탄하게 유지해 왔던 지방의 작은 출판사가 합병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마니아층이 탄탄하다지만 워낙 소규모인데다 또 그만큼 대중적이지는 못한 이유로 재정형편이 어렵게 된 그쪽 출판사 측에서 자체 팀별 운영을 조건으로 자발적으로 인수합병을 요구해온 것이었다.

“우리 쪽에서는 당연히 좋은 것 아니에요?”

“합병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죠. 얼핏 보면, 저쪽에선 자기네들 프라이드는 그대로 유지하되 당장 어려운 재정분야만 풀 수 있으니 좋고, 우리 쪽에선 그동안 태인 기업 뒷구멍 돈줄이라는 오명을 벗어서 좋으니까 윈윈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아무리 문학예술을 찍어낸다지만 이것도 엄연한 사업인데 저쪽의 마이너스 재정까지 껴안고 모험하기엔 좀 위험부담이 크단 거죠.”

“그래서 태인 기업 쪽에선 오히려 좀 시큰둥한 반응이래요. 그냥 잘 좀 다독여서 합병해버리면 안 되나? 난 어디 가서 태인 문학사에서 일한다 말하기 쪽팔려요. 태인 기업 돈 세탁소라고 그래. 광고홍보나 문학상 시상식만 열심히 하면 뭐해. 겉만 번드르르하고 알맹이는 황량한데.”

“그래서 말인데요, 다음 주에 저쪽 출판사 대표가 올라와서 인수합병 협상을 할 겁니다. 그때 누가 같이 김태준 전무이사 뵙고 가운데서 조절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전 목요일부터 토론토에서 열리는 아동문학 세미나에 참석해서요.”

월요일 아침, 떠들썩하게 둘러앉아 회의 아닌 회의를 하는 도중 팀장이 합병 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해도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별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이름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맞은편에 앉은 선희가 떫은 것을 먹은 듯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새로 입사한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원들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색하는 표정이었다.

“김태준 전무이사? 우리 전 팀장 말이죠?”

“예, 아직은 김 전무님이 출판사 대표로 전체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데다 어차피 합병이라고 해봐야 출판사 대 출판사가 아니라 그쪽 출판사가 태인 기업에 들어가는 식이 될 테니까. 누구 저 대신 가운데서 조율해주실 분? 이왕이면 전무님이 팀장으로 계실 때 좀 가까웠던 분이었으면 좋겠는데요. 이번 합병은 기업인의 이윤추구가 아니라 문화사업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설득해야 하니까.”

팀장의 마지막 말에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팀장은 반색하며 ‘정해진씨가 전무님하고 좀 가까웠나요?’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해십니다.”

“에이, 빼기는. 팀장..아니, 전무님이 다른 사람들한테 다 인조인간 로봇처럼 대했어도 그나마 해진씨한테는 농담도 걸고 서로 장난도 치고 그랬잖아. 팀장님, 해진씨 보내세요. 둘이 좀 투덕거리긴 했어도 해진씨가 어릴 때부터 일해서 전무님이 많이 귀여워했어요.”

최 선배가 활짝 웃으며 떠들어댔다. 이번엔 선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깨가 뻣뻣하게 아파왔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합병을 요구한 출판사의 대표는 아직 중년처럼 보였는데도 백발이 성성했다. 그런 외면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보여주는 듯 했다. 스스로 인수합병을 요구한 만큼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중간에서 조율이나 하러 나왔다고 하면 대표로서 자존심이 상할 만한데도 그는 정중하지만 꼿꼿한 태도를 보였다.

그냥 잘 부탁한다와 ‘잘 좀 부탁한다’의 차이는 선명했다. 얼핏 비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굽히는 것은 아니었다. 문득 그가 인수합병의 조건으로 자체 팀별 운영을 전제로 걸었다는 점이 떠올랐다. 제 식구를 챙길 줄 아는 리더였다. 그냥 대충 몇 마디만 거들고 얼른 나와 버리려고 했는데, 대충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전무실 앞에 서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노크하기를 주저하자 백발의 대표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곤 오히려 ‘너무 떨지 마세요’하고 격려해주었다. 훅, 한숨을 내쉰 뒤 똑똑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명의 여자 비서가 먼저 우리를 맞았다. 비서실을 통과해야 진짜 전무실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아직 회장, 사장도 아닌 주제에. 괜히 속이 비틀렸다.

“태인 문학에서 왔는데요.”

“예, 우선 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주주총의회가 조금 늦어져 전무님은 잠시 후에 도착하실 겁니다.”

둘 중에서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비서가 직접 전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안내하는 데로 들어가 엉덩이를 붙이기도 미안할 정도의 고급 가죽소파에 대표와 나란히 앉았다. 대충 방안을 휘 둘러보니,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출판사에 있을 때는 좀 더 모던한 스타일로 꾸몄었는데. 인테리어 하나 마음대로 못하다니, 전무라고 해봐야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좀 더 어려보이는 여비서가 차를 가지고 왔다.

“지금 도착해서 올라오시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귀여운 인상의 얼굴이었다. 한 명은 늘씬하고 이지적인 스타일에, 또 한 명은 어리고 귀여운 스타일이라. 골고루 뽑았다. 여기 찬 물 좀 달라고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정해진이다.”

그리고 그가 멍청하게 지껄였다. 나는 그의 뒤쪽에 선 비서를 향해 ‘차가운 물 좀 주세요’하고 버벅거리며 말했다. 태준은 여전히 문을 잡고 선 채 내 이마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계속 서 있으니 나도 다시 자리에 가 앉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결국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팀장님.”

“이제 팀장 아니라 전문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무님.”

“정해진씨는 여전히 못생겼네.”

“......팀장...전무님은 여전히 밉상이시네요.”

그의 뒤로 보이던 비서 두 명이 멈칫 서선 입을 헤 벌린 채 이쪽을 돌아보았다. 태준은 ‘그런가’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내 어깨를 지나쳐 백발의 대표와 인사를 나누었다. 귀엽게 생긴 비서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내 앞에 쟁반을 내밀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차가운 물을 한꺼번에 마셔버렸다. 이가 시렸다.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대표는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내밀며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전했다. 태준은 서류를 넘기며 간간히 대표의 의견에 수긍하거나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럴 거, 오지 말걸. 역시 이런 자리는 익숙지 않았다. 소파의 가죽을 손톱으로 긁고 있는데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손끝으로 향했다는 것을 느끼곤 얼른 허벅지 위로 손을 모아 잡았다.

“그나저나, 출판사 쪽에선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한때 내가 가족으로 있었다고 쉽게 보나 봅니다. 편집부 팀장이 토론토 학회 갔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렇다고 이런 초짜를 보내다니.”

태준이 대표를 향해 마치 고자질하듯 떠들어댔다. 대표는 나를 곁눈질하며 빙그레 웃었다. 월급쟁이 주제에 까라면 까야지 뭘. 나는 입을 삐죽였다.

“아니면 아예 날 설득하는 걸 포기했든지 말입니다. 이번 합병 건은 우리 쪽에선 그리 매력적이지 못해요. 건강한 M&A라면 양쪽 모두 이익이 있어야 할 텐데, 이건 위험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난 사업가에요. 사회사업이라면 좀 더 홍보효과가 큰 쪽을 노리겠지요.”

그의 갑작스런 태도변화에 대표가 멈칫 표정을 굳혔다. 나는 이미 팀장에게 당부 받았던 내용이라 그리 놀라진 않았다. 그리고 역시 팀장이 미리 숙지시킨 내용을 꺼내었다.

“전무님이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이번 합병은 우리한테도 충분히 이익이 돼요. 현재 태인 문학이 문단이나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지는 전무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반짝 히트하는 대중소설로는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아요. 1년 안에 7, 8쇄 찍어내는 것 보다 7,80년 동안 꾸준히 몇 쇄든 찍어내는 게 더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단순히 정신적인 가치만이 아니라는 건 전무님도 잘 아실 겁니다. 벌써부터 고집 있는 작가들은 우리한테 원고도 주지 않아요. 이대로 계속 가다간 언젠가 독자도 등을 돌릴 겁니다. 구린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고약해지잖아요.”

“......"

달달 외운 것을 모두 쏟아내자 백발의 대표가 흘깃 태준의 눈치를 보았다. 안 될 것 같다는 낭패감이 깃든 표정이었다. 태준은 비식 웃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정해진씨, 태인 문학 사람 맞습니까? 정해진씨가 지금 어떤 말을 한 건지 알고 있어요? 누가 보면 날 잡아먹으려고 보낸 스파인 줄 알겁니다. 이렇게 뒤통수치라고 누가 가르쳐 줬습니까?”

“...말이 심했다면 죄송합니다.”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표현이 잔인했습니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좀 친절하게 대해줄 수도 있잖아요?”

그가 꼬았던 다리를 느슨하게 풀며 소파 뒤로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턱을 치켜든 채 오만한 코끝으로 내 시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옛정. 나는 결국 후들거리는 무릎을 단단히 견디며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옆에 앉은 대표가 황망하게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자..잠시만, 화장실 좀...”

뛰어나가다시피 곧바로 걸어 비서실 문을 열었다. 복도를 둘러보다 가까이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자 뒤에서 비서가 부르는 듯했지만, 얼굴을 돌릴 수 없었다.

미지근한 물살을 손바닥으로 받아 뜨거운 얼굴에 끼얹었다. 온도를 조절한 뒤 차가운 물로 두어 번 더 얼굴을 식히고 거울을 바라보자, 또, 낯선 얼굴이었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꾹 누른 뒤 티슈를 뽑으려 몸을 돌리는데 불쑥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멈칫 서서 거울을 보니, 무표정한 얼굴의 태준이었다.

“여기 임원 전용 화장실인데. 어때, 누구 또 들어올 간 큰 사람도 없을 텐데 오랜만에 한 번 할까?”

“...그런 농담, 하고 싶어요?”

“이런 농담이나 하려고 회의 중인데 상사 두 명이나 앞에 두고 갑자기 불쑥 일어나 도망쳐 버린 것 아니었어?”

그는 직원으로서의 내 행동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었다.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어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도 아래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센서형의 수도가 내 손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적당히 차가운 물을 흘려보내주었다. 이깟 수도꼭지도 알아차리는데. 적신 손바닥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것 같았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문득 그가 뒤에서 ‘물 낭비야’하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한 번 더 얼굴을 적시고 세면대에 손을 짚었다.

“...비서랑도 잤어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말을 내뱉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않다가 팔짱을 낀 채 벽 한쪽에 등을 기대었다. 작게, 아주 작게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키 큰 쪽.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근사한 데다 명문대 출신으로 지적이기까지 해. 내 스타일이지. 네가 상처 받을까봐 말 안했는데, 솔직히 이제껏 내가 사귄 사람 중에 네가 제일 레벨이 낮아.”

“...그 하체는 여전히 방정맞네요.”

“건강한 거지. 그리고, 정해진, 네가 그런 걸 왜 궁금해 하는 거지? ...상관없잖아. 너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어.”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이 찢어진 듯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문을 나서려다 곧바로 그에게 제지당했다. 손목이 아프게 붙들린 채 벽으로 밀쳐졌다. 부딪힌 등이 아팠다. 거칠게 그의 손을 풀어내며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왜 네가 화를 내? 내가 뭘 어떻게 할까.”

“어..어떻게 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그냥 못생겼다고 놀려서.. 그래서 화난 거예요. 팀..전무님은 누가 대놓고 못생겼다고 그럼 좋아요? ...어떻게 해달라는 거, 없어.”

“...우리 문제는 바로 그거야.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없다는 거. 네가, 정해진 네가 한 마디만 했으면... 내가 어떤 꿈을 꿨는지 가르쳐 줄까?”

그가 바짝 몸을 붙여왔다. 나는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다. 가라앉아, 정해진, 조용히 가라앉아. 아무 것도 없는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나는 아무 것도 꿈꾸기 싫다. 정해진, 조용히 가라앉아. 달은 높은 곳에 있다. 그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요, 별로 듣기 싫은데요.”

“...너 다신 여기 오지 마. 앞으로 또 찾아올 일 있으면 다른 사람 보내. 진짜 밉상은 내가 아니라 널 두고 하는 말이야.”

얼굴을 찌푸린 채 그는 물러섰다. 그리고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온도를 조절해 차가운 물로 손을 적셨다. 아래로 숙인 그의 얼굴이 꼭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더 못하게 하면 저런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눈을 깜빡이며 거울 속의 그를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 정말 못생겼어. 내가 한때 눈이 좀 삐었다.”

“태준...아니, 전무님은 못됐어요.”

버릇처럼 그의 이름이 나와 버렸다. 얼른 ‘전무님’으로 정정했지만 그는 이름을 부르면 달려오는 잘 훈련된 견공처럼 자신의 이름에 멈칫하다 내가 몸을 돌리는 틈에 재빨리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버릇없이 굴어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너덜거리는 아랫입술을 또 꽉 깨물었다. 그것을 가만 지켜보던 태준이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내 입술을 문질렀다. 차가운 물에 담그고 있어서인지, 서늘한 감촉에 오히려 정신은 아득해졌다. 입술을 벌리고, 그의 손톱이 이 사이를 딱딱 하고 부딪혔다.

“정해진. 팀장님이든 전무님이든 상관없어. 마음대로 불러. ....태준씨라고는 하지 마. 못 참겠으니까.”

그리고 그가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채 닿기도 전에, 나는 얼굴을 돌렸다. 그가 아프게 턱을 꽉 쥐었다.

“전무님한테 바라는 것 생겼어요.”

“......”

그가 턱을 놓아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꽉 말아 쥔 내 주먹을 축축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는 주먹을 풀지 않았다.

“다신 여기 안 올 수 있도록, 그냥 지금 대충 사인 해 줘요.”

그를 밀치고 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으며 먼저 걸어 나가자 뒤에서 그가 ‘밉상’하고 이죽거렸다. 다시는 오나봐라. 당장 집에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인수합병에 동의하는 서류에 최종 사인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 나는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을 오랫동안 문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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