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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까지 빠진 늪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꿨다. 늪 아래에서 더 이상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공포를 느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알몸인 채로 그와 다리가 교차되어 엉켜있었다. 이마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다리를 빼내려다, 단잠을 자는 그의 얼굴처럼 곤하게 잠든 그의 페니스가 허벅지에 닿았다. 깨우지 않으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그가 뒤척였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그는 깨지 않았다. 나보다 더 피곤했을 사람이었다.
좁은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불을 주워 그의 허리께를 덮어주었다. 걸음을 떼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익숙한 통증이 허리와 골반까지 찌릿하게 울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상한 반찬에서 나는 악취가 심했다. 먹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따지 않은 생수병이 하나 있었다. 뚜껑을 따고 물을 마시려는데, 순간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다.
허둥대며 휴대폰을 찾았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주인이 배터리도 갈아주지 않았으니, 전원이 꺼져있는 것이 당연했다. 침대 쪽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탁자 위와 아래를 샅샅이 훑어봐도 그의 것으로 짐작되는 휴대폰은 소리만 클 뿐, 그래서 정작 작은 원룸 안 곳곳에서 숨어있는 것 같았다. 의자에 놓아둔 그의 재킷을 들고 안주머니를 살피는데, 뒤에서, 낮고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아, 몇 시죠? ....알았어요, 한 시간만 늦춰줘요. 네. ...아니, 직접 운전해 갑니다. 네.”
태준은 엎드린 채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자 기지개를 펴며 침대헤드에 베개를 세워 기대어 앉았다. 나는 그의 재킷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베개를 들어 휴대폰을 쥔 손으로 손가락질했다. 휴대폰은 베개 밑에 놔두었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말리지 않고 잠든 대가로 머리는 삐죽삐죽 까치집이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괜히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리자 그가 비식 웃었다.
“안녕.”
아직 잠이 덜 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얼굴에는 아직 피곤이 풀리지 않은 노곤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고맙다고 해야 할까. 고민하여 머뭇거리자 그가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해진. 아침에 일어나서 눈 마주치면 하는 인사, 가르쳐줬었잖아.”
“...아...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재킷 놔두고, 그 물 다 마실 것 아니면 나도 좀 나눠줘.”
그가 내 손에 들린 생수병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시키는 대로, 재킷을 다시 의자 위에 걸쳐두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가 문득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대로 고개를 내리자, 그제야 내가 아직 알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퍼뜩 뒤돌아서자, 그가 또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몇 년 짼데, 넌 아직 그런 게 부끄러워? 정해진 씨. 물, 안 줘?”
하긴 이렇게 반응하는 게 더 부끄러운 것 같아 게처럼 옆으로 서서 주춤 걸음을 옮겼다. 생수병을 받아든 그가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마셨다. 절로 침이 삼켜졌다. 우선 속옷이나 꺼내 입자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그가 ‘자, 물’하고 팔꿈치에 생수병을 갖다 댔다. 고개를 돌려 받아들려는데, 그가 일어나면서 허리께에 덮여 있던 이불을 젖히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아래쪽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얼른 생수병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알몸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팬티...”
문득 어젯밤 그가 드로즈를 입은 채 욕실에 들어왔다가 결국 젖은 채로 벗어던진 것이 떠올랐다. 욕실이 건조해 바짝 말랐다 하더라도 제대로 빨지 않아 뭉쳐둔 세탁물에서 나는 꿉꿉한 냄새가 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른 옷장 서랍을 뒤졌다. 그의 집에는 내 속옷이나 간편한 실내복이, 그리고 내 집에는 그의 속옷이나 간편한 실내복이 몇 벌 구비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집에는 내 것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 집에는, 아직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그가 샤워기 아래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타일바닥을 바라보며 속옷을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걸 봤는지 그가 ‘고마워’하고 말했다. 그제야 알몸인 내 몸에도 무언가를 걸치고 그가 입을 대고 마신 생수병에 조심스럽게 입을 댄 채 물을 마셨다. 생수병을 모두 비우고 창문을 여는데, 욕실에서 ‘정해진’하고 불렀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욕실 문이 열렸다.
“머리 말리는 동안 들어와서 이 닦고 세안해.”
곧이어 욕실 안에서 드라이어기 작동소음이 들렸다. 바짓단을 접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니 그는 내가 준 드로즈 차림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곁을 엉거주춤하게 지나쳐 이를 닦고 세안을 하는 동안, 문득 내 욕실에는 아직 그의 칫솔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웃기게 여길까. 자존심이 상했다.
어린애들이나 쓰는 베이비로션을 바르고 있는데, 그가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자, 등을 돌린 채 재킷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끼고, 역시나 내가 준 양말을 신는 동안 나는 뭘 해야 좋을지 몰라 괜히 냉장고 안의 상한 반찬들을 꺼내었다. 준비를 다 한 그가 저벅저벅 다가와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었다.
“나가자.”
“그.. 난 그냥 있을게요.”
“먹을 것도 없잖아. 이 앞에 내려다줄 테니까 뭣 좀 사들고 와.”
그리고 먼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잡은 채 ‘얼른’하고 재촉했다. 머리도 다 뒤집어졌는데. 할 수 없이 야구 모자를 쓰고, 휴대폰의 배터리를 새 것으로 갈아 끼운 후에 밖으로 나왔다. 긴 복도를 걸으며 그가 문득 ‘출판사에는’하고 말을 꺼냈다. 아, 그 문제가 있었지.
“이주 뒤에 나가는 걸로 해뒀어. 좀 더 쉬게 하고 싶은데, 이미 한 달 넘게 병가를 낸 상태고, 혼자 있으면 또 나쁜 생각만 들 거 아냐. 나머지 사고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하루라도 빨리 몸 추슬러. 옛날 어른들 말씀 하나 틀린 거 없어,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
“...네...”
이 앞에 내려다준다더니 정말 차를 타고 얼마 안 가, 곧바로 죽 체인점 앞에 차를 세웠다. 내려주고 바로 가려는 줄 알았는데, 그도 함께 내렸다. 그리고 앞서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게살죽과 전복죽을 포장 주문했다. 나는 곁에 멀뚱히 서 있었다. 포장을 기다리면서 그가 내 모자 창을 툭 쳤다. 코끝까지 내려온 모자를 다시 제대로 쓰자, 또 툭 쳐서 내렸다. 두어 번 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더니, 얼굴을 덮은 모자를 다시 올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이번엔 그가 모자를 올려주었다.
“정해진. 주말까지 몸무게 원상복귀하면 일요일에 용인 데려갈게. 어머니한테 아들 건강하게 무사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당신도 얼른 쾌차하시라고 직접 말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우선 네 몸부터 추슬러. 저녁에 들를게. 주문한 거 그때까지 다 먹어야 돼. 알았어?”
“네...”
포장한 죽이 나왔다. 그가 계산을 치르고 이번에도 먼저 봉지를 들고 앞장서 걸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얼른 달려가 그의 손에서 봉지를 건네받았다.
“네. ...아니 지금 가는 중입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네.”
회의인 것 같았다. 한 시간이나 미루자고 하는 것 같더니, 거기서 더 늦은 것 같았다. 나는 손목시계가 없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늦은 걸까. 그의 차 앞에서 미적거리자 그 역시 운전석으로 가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그리고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못 데려다주겠다. 저기 마트에서 다른 먹을거리도 좀 사. 햇볕이 좋다. 천천히 걸어서 들어가.”
그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내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당황해하자, ‘좀 받아라’하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며 ‘고맙습니다’하고 작게 속삭였다. 모자를 쓴 머리 위로 그가 커다란 손을 얹었다. 쓰다듬어주는 줄 알았는데, 아플 만큼 머리를 꽉 쥐었다. 아, 하고 머리를 빼내자 그가 비식 웃으며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보조석 창문을 열고는 ‘들어가’ 한 마디 하고는 그도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해가 내리쬐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말처럼 햇볕은 좋았지만,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빌딩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전해졌다.
“여보세요.”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호랑이가 물어간다.
“......”
뒤돌아보니, 그의 차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마트 갈게요, 하고 대답하자 그가 소리 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우린 어떻게 되죠? 물으려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
* * *
한 입, 딱 한 입 떠먹는 게 어려웠지, 그 후로는 뱃가죽에 걸귀가 달라붙었는지 떠먹는 게 아니라 아예 입을 그릇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마셔버리는 것처럼 죽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렇게, 허겁지겁 그릇에 붙은 죽까지 긁어 먹으면서 또 문득 눈물이 뚝뚝 떨어지곤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니. 이렇게까지 살고 싶은 건가, 이 몸뚱어리는. 눈치 없는 내 허기가 미웠다.
부른 배가 포만감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치욕스러웠다. 음악을 틀어놓고 창문을 열었다. 옅게 들어오는 햇빛으로 집안 곳곳에 먼지가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청소를 하고, 상한 반찬을 모두 비운 빈 그릇들을 설거지까지 하고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헝클어져 있는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태준의 체취가 이불과 베개에서 은근히 느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한숨처럼 탁 숨을 놓았다. 침대 가운데에 팔과 다리를 뻗어 대자로 눕자 솔솔 졸음이 쏟아졌다. 가물거리는 시선 끝에서, 창밖으로 하늘의 한 귀퉁이가 보였다.
“...아빠... 이제 어떻게 하지? ..... 대답이 없네. ...아직 도착 안 했어요?”
중얼거리고 있으니, 혼자 참 잘도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려 그가 베고 잤던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시 잠이 깼을 때는 벌써 캄캄한 저녁이었다. 불을 켜려고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벨이 울렸다. 저녁에 들를게. 그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희철의 말에 따르면 그가 병원의 일도 그렇고 경찰 조서도 그렇고, 거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벌써 한 달이 넘게 내 일에 묶여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신혼인데, 토끼같은 자식은 아직 없어도, 그래도, 여우같은 마누라가 기다릴 텐데.
캄캄한 방 안에서 우두커니 서서 조용히 기다리니, 두어 번 벨을 더 누르다가 마침내는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다. 옆집에서 뭐라고 할 것 같아, 그제야 불을 켜고 현관문을 열었다. 찰칵, 고리쇠가 돌아가기 무섭게 바깥에서 급하게 문이 당겨 열려졌다.
“정해진, 괜찮냐?”
“...희철아.”
“인마, 걱정했잖아. 자고 있었어? 밥은, 밥은 좀 먹었어? 우선 들어가자.”
집에 들어오자마자 희철은 두 손에 가득 들고 있던 짐을 풀었다. 하나는 옷가지였고, 또 하나는 생필품과 먹을거리였다. 텅텅 비어있는 냉장고 문을 열고 희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가지고 온 것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가장 나중에 나온 것은 내가 먹었던 죽이었다.
“먹어라. 갑자기 단단한 걸 먹으면 탈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죽 사왔다.”
“...나 아까 이거 두 그릇이나 먹었...”
말을 하는데,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도 났다. 순간 멈칫한 채 나는 얼굴을 붉혔다. 희철이 그런 내 어깨를 툭 치며 ‘당연한 현상이야, 인마’하고 털털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랩을 벗기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아직까지 김이 폴폴 나는 죽을 내 앞에 내밀었다. 앉아, 얼른. 나는 못이기는 척하며 앉아서, 또 허겁지겁 떠 넣었다.
“나 되게 한심하지. 뭐 저런 불효자식이 다 있나 싶지.”
“아니, 다행이다 싶다.”
물로 입을 헹구며 자책하듯 말하자 희철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답했다. 친구가 좋구나, 허물도 덮어주고. 쓴웃음이 났다.
“워낙 끔찍한 사고여서, 아마 평생 너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다. 아니까, 차마 너한테 훌훌 털고 일어나란 얘길 못하겠다. 우리가 살면서, 그래도 참 편하게 살았잖냐. 대충, 그럭저럭. 어디 아픈 곳 없고 찢어질 듯 가난하지도 않았고, 누군가한테 지속적으로 인격모독을 당한 적도 없고. 그게 당연하다 여겼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참 복이더라. 그런데, 작년에 우리 큰아버지 돌아가셨잖냐. 그거, 자살이었다. 친척들 중에 제일 잘 살고 자식걱정도 없던 양반이, 부도나서 회사 말아먹고는 정신을 못 차리더라. 나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행복했던, 그래서 매사에 긍정적이던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일어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더라. 바로 떨어져버리더라, 27층에서 말이다.”
작년, 나는 희철의 큰아버지 장례식에 조문하러 가서 본 영정 사진 속 얼굴을 기억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그 나이의 어른에게서 보이는 고생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해진. 너도 나도 그리고 선희도, 좀 일찍 누굴 잃는 걸 배웠다고 생각하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깊게 충격을 견디고 상처가 아무는 법 배웠다고, 생각하자. 해진아, 나는 네가 이렇게 막 퍼먹는 거 보니까 참 좋다. 정말 다행이다 싶다. 네 몸이 알고 있는 거다. 너 혼자만 살려고 하는 거 아니고, 어머니도 있고 선희도 있고 또 나도 있잖냐. 혹 너 잘못되면 우리, 못 견딘다. 네 몸이, 그거 알고 그렇게 밥 달라고 아우성인 거다. 정해진. 이 놈, 이거, 매일 어리다고 놀렸는데 이제 못 그러겠다. 대견하다, 너 문희철 친구답다! 우리 정해진이, 다 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죽을 입안에 떠 넣었다. 그릇 속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먹으로 훔치면, 또 떨어졌다. 앞에서 희철이 얼른 찬물을 컵에 따라주었다.
“문희철, 너 애들 가르치더니 말 되게 잘한다.”
“당연하지. 이걸로 먹고 사는데. 너 인마, 울지 마. 울면서 먹으면 체한다. 그만큼 울었으면 됐어. 너무 울면 아버지도 마음 편히 못 가신다. 뚝!”
“지랄. 저도 울면서.”
눈물을 방울방울 단 채, 나는 녀석의 눈물, 콧물로 엉망인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울면서, 또 웃으면서 타박을 하자 희철은 주먹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리고 내게 따라주었던 찬물을 제가 벌컥벌컥 마셨다.
“이..인마. 사나이가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는 건 옛말이야! 21세기의 사나이는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누군가 보고 싶을 때는 울어도 돼! 아저씨도 내가 너무 안 울면, 오히려 섭섭해 하실 거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그만 울고, 나도 좀 울자.”
그러면서 희철은 코를 킁 풀었다. 아아, 울면서 웃으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던데. 곤란해 하면서, 나도 티슈를 뽑아 킁 코를 풀었다.
옷가지를 가지고 온 게 이상하다 싶더니, 희철은 갑자기 욕실에서 씻고 나와선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남는 이불이 없냐고 묻더니 맨 바닥에 달랑 차렵이불 하나를 덮고 누웠다.
“뭐...하냐?”
“나 오늘 여기서 잔다.”
걱정해주는 건가 싶어, 안 그래도 된다고 말렸지만 등을 돌린 채 코고는 소리를 냈다. 설마 혼자 자다가 죽기라도 할까봐, 그의 큰아버지처럼 뛰어내릴까봐 걱정하는 건가. 은근슬쩍 여긴 3층이고, 고작 3층에서 뛰어내려봤자 다리에 금 하나 가는 정도라고 말했지만, 희철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럼 여기 올라와서 자. ...응? 야, 문희철. 너 그러면 내가 불편해서 못 잔다.”
“....침대 좁잖아. 내 등치를 봐라.”
“아니야. 그래도 좀 붙어서 자면 괜찮아. 올라와라, 응?”
“자라.”
바닥에서 자면 아침에 허리 아플 텐데.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녀석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자 녀석은 또 코고는 소리를 냈다. 위로하러 온 녀석이, 고집은. 나도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어둠 속에서 벽시계가 똑딱똑딱 소리를 냈다. 수도꼭지를 꽉 잠그지 않은 것인지 욕실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선 길 잃은 개가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침대 아래에서 희철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자냐?”
“아니.”
“실은... 그 사람한테 전화 왔었다. 주말까지 여기 와서 자라고.”
“...누구?”
“그 사람. 너네 출판사, 전에 있던 팀장. 네가 매일 싸가지 없다고 뒷다마 까던.”
“.......”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전화 왔었어. ....해진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저기, 희철아.”
“너 혹시.. 뭐.. 그런 거냐? 그..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동성애자.. 뭐 그런 거.”
“......”
개는 주인을 찾았을까. 아니, 주인이 개를 찾았을까. 낑낑거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무사히 올라가셨을까. 생전에 남한테 해 한번 끼친 적 없고 적은 월급에서 얼마만이라도 꾸준히 기부도 하셨고, 집 앞에 버려진 아이를 친자식처럼 아니 친자식 그 이상으로 알뜰히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셨으니, 아버지 가신 곳은 분명 좋은 곳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돌아가시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했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더 좋은 곳이리라.
“응. 맞다. 희철아, 나 그런 거 맞다.”
“...언제부터?”
“조금 이상하다 싶었던 건 중학교 때부터,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
“...... 너 인마.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아니면 조금만 더 늦게 알았으면 너 한 백대는 맞았다.”
“응. 그런데 희철아, 내가 그런 거라서 기분 나쁘냐?”
“그래. 기분 더럽다.”
“...그렇구나...”
“수능 치고 내가 사창가 가서 총각딱지 떼야 된다고, 같이 가자고 조를 때, 네가 얼마나 날 비웃었을까. 씨발, 쪽팔리게. 만날 여자 타령할 때는 또 어떻고.”
“별로.. 비웃은 적 없는데. 그리고 희철아, 실은 나도 그 즈음에 처음 했다. 게다가 그게.. 그 사람이랑...”
“뭐?!”
희철이 덮고 있던 차렵이불을 확 걷어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눈가를 비볐다. 우는 것으로 알았는지, 희철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누워라’하고는 자신도 다시 바닥에 누워 등을 돌렸다. 나는 조심조심 욕실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꽉 잠갔다. 다시 침대로 가 누울 때까지 희철은 차렵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그러면... 너 설마 아직도.. 그 사람이랑 그러냐?”
“...약혼 했을 때 헤어지고, 이번에 오랜만에 만난 거다. 지금은... 모르겠다, 희철아. 진짜, 나도 잘 모르겠다.”
“하... 정해진. 너 어서 몸 추슬러라.”
“응.”
“응은 무슨. 아저씨가 위에서 보고 계셔도, 너는 나한테 좀 맞는다. 알았냐?”
“...응.”
희철이 또 과장되게 코고는 소리를 냈다. 방안에는 희철의 코고는 소리와 벽시계의 시침 소리와 냉장고의 모터소리가 화음처럼 울려 퍼졌다. 잠시 후, 희철이 코고는 흉내를 멈추었다. 잠시 조용해진 틈에, 나는 얼른 눈가를 닦았다. 갑자기 희철이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아저씨! 우리 방금 콩트 한 겁니다! 콩트, 유머, 개그! 그냥 웃자고 한 소리니까 맘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리고 다시 침대 아래에 와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옆집에서 쿵쿵, 벽을 두드렸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희철은 벌써 출근했는지 차렵이불만 곱게 개어져 있었다. 그래도 저녁엔 또 오겠다는 뜻인지 속옷과 츄리닝을 담은 가방은 그대로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원래 잠이 많은 편이 아닌데 계속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도 허기는 느껴져 희철이 사다놓은 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몇 숟가락 떠먹었다. 걸귀가 떨어졌는지, 전날처럼 스스로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게걸스레 먹지는 않았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워버렸다. 창 밖에서 어린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또 쫓아갔다. 주인을 만난 개가 컹컹 짖으며 산책을 조르는 소리도 들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눈을 감아도 선잠에 들 수밖에 없었다. 몸은 무겁지만 의식은 뚜렷했다. 몸을 뒤척이는데, 벨이 울렸다. 그러고 보니, 문을 잠그지 않았다. 희철이라면 그냥 들어올 테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돌아갈 테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자연스레 문이 열리고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이나 가르칠 것이지 왜 또 왔냐고 잔소리를 하려는데, 시원한 손이 눈가를 훑었다.
“낮잠을 자도 눈곱은 떼고 주무시지, 정해진 씨.”
손길은 익숙했고, 그리웠고, 서러웠다. 일어나지도 않고 계속 눈을 감고 있자, 그가 손길을 거두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머리나 귀를 쓰다듬어주면 왠지 잠이 잘 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우리 엄마가 아닌데, 졸음이 머리카락에서 스며들어왔다.
“머리 많이 길었다. 주말에 용인 가기 전에 머리 자르자. 어머니한테 예쁘게 보여야 되잖아.”
“...희철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예전에, 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 모두 내 휴대폰으로 옮긴 적 있어.”
“왜?”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변태 스토커.”
“......”
“왜 왔어요?”
“점심시간, 잠깐 짬 내서 왔어. 어제 못 왔잖아. 한동안 농땡이 쳤더니 일이 밀렸어. 며칠 못 올 것 같으니까, 주말 전까지 그 녀석이랑 잘 지내고 있으라고.”
“왜 왔어요?”
“뭐 하면서 놀고 있나 궁금해서.”
“...왜 왔느냔 말이야... 집에... 집에 가야하잖아...”
“울지 마. 혹시 눈이 너무 부어서 못 뜨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서 입술을 꾹 물었는데, 입술 새로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상하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귀 뒤로 눈물이 떨어졌다. 안 되는데. 어제 희철이가 이제 정해진 다 컸다고, 대견하다고 해줬는데.
“어이, 붕어총각. 눈 좀 떠봐.”
그가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하지 말라고, 뿌리치려는데, 등 뒤로 두른 손으로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인형처럼, 앉자마자 자연스레 눈을 떴다. 정말 눈이 붕어처럼 부어버렸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은 보였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벅벅 문지르자, 그가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끌어당겨져 안겼다.
“너 괜찮아지고, 너희 어머니도 괜찮아지시면, 다 괜찮아지면. 그때까지, 해진아, 그때까지만 볼게.”
희철이 녀석이 또 수도꼭지를 꽉 잠그지 않았는지,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똑 들렸다. 그는 웃고 있었던가. 그게, 웃는 얼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