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20화 (20/35)

-20-

내가 언제나 궁금했던 것은 드라마 작가들의 머릿속이었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재벌가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의 어머니가 나타나 여주인공에게 돈을 주며 떠나라고 하거나, 또는 물을 끼얹으며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같이 똑같은 장면이 포함되어 있을까. 유치해.

하지만 내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정말 그럴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나야 여자가 아니니까 조금 상황이 달라질 텐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달라질까. 내가 생각한 것은, 남자를 상대하는 만큼, 좀 더 와일드하고 터프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만한 집안에서 보통 사람 하나 감쪽같이 없애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나는, 시멘트와 함께 인천 앞바다에 처넣어질까. 아니면, 다시는 걸어 다닐 수 없을 만큼 집단린치를 당하게 될까.

은색 메르세데스의 뒷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가냐고 묻지도 않고 나는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생각했다. 작년에 대한민국 10대 기업 안에 태인 기업이 있었던가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려 봐도, 없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0위 안에 드느냐 못 드느냐 하는 것에 내가 인천 앞바다에 빠지느냐 마느냐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재벌가임은 틀림없었다.

10대 기업 안에 못 들어도, 사람 하나 없애는 건 쉬운 일일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119에 전화를 해야 할까, 아니면 112에 전화를 해야 할까. 혹은, 불효자식을 용서해달라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혼자 떠들어야 할까. 경찰이나 119보다는 차라리, 한번 화가 나면 말릴 사람이 없는 희철이나, 그런 희철이도 꼼짝 못하는 선희에게 구조요청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또는, 또는, 또는, 태준에게 전화를 걸어 네 어머니가 날 없애려고 하신다고 일러버릴까. 그럼 그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줄까.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죽기 직전이라도 모두 말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직 이런 관계인 것은 당신네 아들 역할이 더 컸다고, 그러니까 날 해칠 생각이면 그렇게 하시고 그 후에는 반드시 태준 역시 채찍으로 두드려 패야 할 것이라고,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대들어버리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출발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은색의 메르세데스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커다란 한옥 앞에 멈추어 섰다. 서울에도 아직 이런 곳이 있나, 생각했는데 입구를 지나치고 들어가 보니 가옥이 아니라 한정식집이었다. 그리고 차문을 열어줬던 남자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방 안에는, 그의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어서 와요. 갑자기 불러내서 당황했지요?”

“아..아니요. 괜찮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해진입니다.”

“알아요, 당연히 알지요. 요즘 젊은 사람답지 않게 참 예의가 바르네. 자, 앉아요. 언제 도착할지 몰라 마음대로 주문했는데 괜찮아요? 점심 전이지요? 들어요.”

나는, 이번에도 드라마 작가들은 물론 캐스팅 디렉터의 머릿속도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고생이라고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고, 그게 어떤 것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그와 같은 환경으로 시집을 가 한 평생 그런 생활을 가꾸어나가는 사람. 한 번도 누군가의 명령을 들어본 적 없고, 오히려 군림하는 사람. 그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여기는 사람. 아이러니하게, 그런 사람들은 모두 악의가 없었다. 악을 써야 할 생활이 아니니 인상도 선했다. 고집을 부리지 않아도 주어지니, 포용력도 넓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정말, 한 군데도 닮은 곳이 없었다. 태준이 그러했다고 말한 것처럼 나도 은근슬쩍 김태준의 친모가 맞느냐고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차안에서 했던 각오는 모두 싹 다 잊어버리고 앞에 차려진 음식을 열심히, 꾸역꾸역 먹었다. 그의 어머니도 식전이었는지 함께 식사를 했다. 입안에 음식물이 보일까봐 대답조차 잘 못하는 나와 반대로, 태준의 어머니는 식사 중간 중간, 그러나 전혀 지저분해보이지 않게 가벼운 대화를 유도했다.

대화의 주 내용은 그의 어릴 적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가벼웠고, 그녀의 표정은 밝았고 목소리는 정감 어렸다. 나는, 한번 기대해 봐도 좋은지, 꿈을 꿔도 괜찮은지,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묻고 싶었다. 그래도, 되는지. 어쩌면,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벼웠는지도 몰랐다. 태준의 말처럼 나 혼자 고지식한 인간인 척,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식사를 모두 끝내자, 차가 나왔다. 나는 쓰디쓴 차를 마시며 언젠가 홍종욱 작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된다는... 차는 전혀 쓰지 않았다.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태준의 어머니는 그가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마치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간혹 흉을 보기도 하면서 들려주었다. 찰칵, 하고 다잔을 타착 위에 올려두는 소리에 나도 따라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한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 애가 그래요. 그 고집은 누구도 못 꺾었지. 문제는, 가끔 제가 고집하는 게 착각 때문인지 진짜배기인지 구분을 못할 때가 있다는 거야. 하지만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 내 새끼 마음은 내가 더 잘 알 때도 있지. 그래도 그냥 놔두고 바라보는 편이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도 없거니와, 괜히 말렸다간 그 녀석 성격에 더 고집부릴 게 뻔하니까. 그리고 잘 되든 못되든, 그걸 통해서 저도 깨닫고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 ...... 저 사람, 다 큰 자기 아들 흉을 뭐 저리 보나, 싶지요?”

“아..아니에요. 재미있어요.”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태준의 모는 고맙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 그리고 다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나도 따라서 찻잔을 들었다. 내려놓을 때 역시, 그녀가 먼저 내려놓는 것을 보고서 따라서 내려놓았다. 태준의 모가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싱긋 웃었다. 귀가 달아올랐다.

“무조건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격이지요? 수다스럽거나 애교스럽지 않은 대신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자상하게 챙겨주는 성격이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나요. 같이 한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태준이가 왜 해진씨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요.”

“....네?”

“놀라지 말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불렀을까. 참, 아버님 일은 정말 안 됐어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직장도 나가고, 건강하게 생활하니까 어머님은 든든하실 거야.”

“네.... 고맙습니다.”

“그래도 태준이가 말이에요, 똑똑한 아이야. 자기가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 무얼 버리는 대신 무얼 얻는 지도 알고 있고. 자기 역할이 뭔지도, 다행히 아주 잘 알아요. 저런, 얼굴이 새파래졌네. 아니야, 해진씨가 생각하는 그런 얘길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급하게 물컵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팔꿈치에 찻잔이 나뒹굴었다. 어수선하게 손수건으로 탁자 위를 닦고 찻잔을 다시 세우고, 좀 더 멀리 놓아두고, 다시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그동안 태준의 모는 그저 고요하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나는 뒤늦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추워졌다.

“부모가 제 자식이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면, 자격이 없죠. 한창 여자애들 만나고 다닐 시기에 가끔 남자애들도 데리고 다니곤 했지. 모를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도 그런 걸 숨기려고 하지 않았어. 다행히 우리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거든. 영감님하고 나 말이에요. 그런 게 혼낸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똑똑한 아이니까, 믿는 구석도 있었고. 약혼 직전에 해진 씨 문제로 말썽 일으킨 건 좀 의외였지만, 포기하는 게 오히려 지키는 거라는 걸 이해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나도 좀 당황한 게 사실이에요. 매사에 분명하게 맺고 끊는 녀석이라서 이런 건 미처 생각을 못했거든.”

“그..그건...”

“고집이건 착각이건 진짜배기건, 이제는 상관 안 해요. 착실하게 제 할 일은 잘 해주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야 답습처럼 계속 내려오고 있는 일이고. 특히 우리 영감님이야 할 말이 없을 테지. 큰집, 아랫집, 먼 아랫집, 대체 몇 명인지 헤아리지도 못하고 살았어. 괜찮아요,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큰일을 하다보면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쌓일 테지.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태준이 또래 아이들 보면 벌써부터 서넛은 두고 있던걸. 나쁜 건 줄 알면 젊은 애들 대에서 그만두면 될 텐데, 어떻게 나쁜 것만 그대로 따라하는지. 그래도 그중에서 태준인 양반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서넛은 두고 있다는 말인가. 큰집은 뭐고 아랫집은 또 뭔가. 답습처럼 내려오고 있는 일, 큰일을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푸는 일. 그리고, 약혼 직전의 말썽이라니, 그런 것, 몰라. 그저 기억나는 것이라곤 우울한 가사의 경쾌한 템포의 노래.

“사회적인 분위기가 많이 가벼워졌어요. 둘러보면 점잖게 자란 도련님들이 가끔 예쁘장한 남자애들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은 많이 떠돌아다녀. 그래도 태준이 녀석처럼 아예 들어앉히겠다고 나선 건 처음이라... 영감님은 아직 모르지만, 이번엔 정말 화내실 지도 몰라.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내가 해진 씨한테 부탁하는 말이에요.”

나는 다시 물컵을 들었다. 물은 비어있었다. 태준의 모가 벨을 눌러 조용히 ‘여기 물 좀 가져다 줘요’하고 주문했다. 곧바로, 마치 문 앞에서 물병을 들고 기다렸다는 듯,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직원이 물을 따라주곤 다시 소리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예의고 뭐고 간에,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한 컵을 모두 비우고 컵을 내려놓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그녀도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해진 씨가 너무 되바라진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건 한 시름 놓았어요. 오히려 참 마음에 들어요. 얌전하고 예의바른 사람인만큼 내 뜻도 잘 따라줄 거라 믿어요. 말했듯이, 이제 와서 태준이 말릴 생각은 없어요. 말린다고 들을 성격도 아니고. 다만, 해진 씨가 결정을 해줬으면 해요. 그러니까... 분명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혹 잘라내고 싶으면, 유학이라든가.. 그런 건 내가 해결해줄 수 있어.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태준이 녀석 얌전히 있지 않을 테니까. 대신, 태준이가 하는 대로 따라줬으면 싶은데. 지금 같은 해진 씨 태도가 그 아일 많이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요. 한동안 해진 씨 아버님 일 때문에 소홀했던 거야 어떻게 잘 넘긴 것 같지만, 그러고 보통 때라면 금방 정신 차릴 녀석이 요샌 계속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삐거덕거리는 게 들려. 명색이 아직 신혼인데, 그 아이 마음 못 잡고 이야기 떠돌게 하는 건 사돈한테 예의가 아니지. 며느리야 우리 집 사람 되었으니 그렇다 쳐도. 참, 그 아인 아직 해진 씨 몰라요. 나중에 좀 안정이 되면 인사도 해야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그 녀석 맘 좀 편하게 해주고, 해진 씨 출판사 나가는 것도 정리를 했으면 싶은데. 혹 모르니까. 아, 나중 일이 걱정이라면, 그런 건 걱정 말아요. 우린 사람 내치는 일은 안 해.”

“......”

“늙은이가 너무 떠들었지요? 내가 참, 이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닌데, 쉬운 말이 아니라서 장황하게 떠들었네요. 어때요, 어설프게 설명한 것 같긴 한데, 이해했어요?”

“...네...”

아니다. 무슨 말인지, 정말,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태준의 어머니는 한숨 놓았다는 듯 ‘다행이네요’하고 웃었다.

“참, 지금 아파트는 주위도 시끄럽고 좁지 않아요? 나중에 태준이 집안 정리가 좀 되면, 아무래도 남자를 들어앉히는 건 없던 일이라 본가에 들어올 순 없겠지만, 아쉽지 않게 마련해 줄게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욱...! 흣... 하아...하아... 우...우욱!”

“선배! 문 열어봐요, 등 두드려줄게요! 선배, 선배! 괜찮아요? 아우.. 어쩌지? 저기, 약 사다줘요? 예?”

말간 위액이 나올 때까지 모두 토하고 나니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아니, 버릇처럼 책상을 열고 초콜릿을 꺼내 먹는 순간 숨이 막혔다. 초콜릿도 목에 걸리다니. 웃음이 났다.

점심으로 열심히, 꾸역꾸역 먹었던 것들이 소화도 되지 못하고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변기의 물을 내리며, 회오리치며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또, 웃음이 났다.

“비싼 건데... 아깝다.”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저기 기정 씨, 그래, 약 좀 사줄래?”

“예! 잠시 만요, 금방 다녀올게요!”

사무실로 들어가니 선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너 지금 귀신같다, 허옇고, 깡마른. 대체 점심으로 뭘 먹었기에 그래? 누구하고 먹었어? 설마... 희철이가 오늘 때렸어? 밥 먹는데 때리디? 내 이 자식을 그냥...”

“아니야. 그게 아니라... 혼자 되게 비싼 거 먹고 왔어. 근데 역시 몰래 먹으니까 체하는구나.”

힘없이 책상 위로 풀썩 상체를 눕히는데, 기정이 헉헉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소란스럽게 컵에 물을 따르고, 약봉지와 함께 들고 다가왔다. 놔두고 가면 조금 있다 먹겠다 말하자, 꼭 먹는 걸 봐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리고 아예 시위라도 하는 듯 무릎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냥 빨리 먹고 보내야겠다 싶어, 부스스 일어나 약을 삼켰다. 기정이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여기저기서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최기정 씨. 내가 왜 좋아?”

“그게... 예쁘신 데다... 착한 사람 같아서요!”

“예쁘신 거야 둘째 치고, 착한 사람인 건 어떻게 아는데? 택시비 그냥 줘서?”

“그...그건 그냥 보면 알아요! 눈빛이 착하잖아요.”

“......뭐야, 그것도 결국 얼굴 얘긴데. 기정 씨 외모지상주의자구나.”

“예? 아..아닌데....”

기정이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기가 확 죽어선 자리로 되돌아갔다. 선희가 볼펜으로 그런 기정의 이마를 따콩, 때렸다. 자리 너머에서 누군가 ‘정해진 어린이, 오늘도 한 건 하셨다’하고 놀렸다.

퇴근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거의 10여년 만에 담배를 샀다. 호기심에 담배를 피우는 학생처럼 긴장되기도 했다. 제대로 된 담배 이름을 대지 못하자 아르바이트생이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냥 제일 싼 것 달랬다가 금방 또 제일 비싼 것으로 달라고 하자, 비웃기까지 했다. 싸구려 라이터와 함께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로 갔다. 그리고 낮은 그네에 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러 나온 것인지, 젊은 여자가 갓난아이를 안고 지나가다가 힐끗 쳐다보곤 얼른 걸음을 빨리해 지나가버렸다.

“나쁜 사람 아닌데... 최기정 씨가 내 눈이 착하다고 했는데.”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이는데, 곧바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것 봐, 나는 몸까지 착하고 정직해. 버리기는 아깝고, 속 깊이 빨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아 얌체처럼 입 속에서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가 했다. 연기가 독한지, 눈이 매웠다. 이상하다, 김태준이 피우는 담배보다 훨씬 순한 것 같은데. 하긴, 최기정 씨가 내 눈이 착하다고 했지. 착해서, 담배 연기에도 눈물이 났다. 아주 구질구질했다.

이렇게 착한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무조건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도, 수다스럽거나 애교스럽지 않은 대신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자상하게 챙겨주는 것도,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착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사실, 난 그렇게 착한 것도 아닌데. 그냥 눈이 좀 순해 보일 뿐이지, 난 정말 착한 게 아닌데.

가방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어 킁, 코를 풀었다. 얼굴도 닦았다. 축축한 휴지를 다시 가방 안에 넣으려다가, ‘내가 뭐가 착해’하고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그때 발 앞으로 손전등 불빛이 비췄다. 눈을 가늘게 떠서 손전등의 주인을 확인했다. 경비 아저씨였다. 발로 모래흙을 파헤치다가 슬금슬금 일어나 던졌던 휴지를 다시 주워 가방 안에 넣었다.

“거 담배꽁초도 가지고 가야 됩니다.”

“예에...”

손전등 불빛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티슈를 꺼내어 코를 킁 풀고는 더 멀리 휙 던져버렸다. 칫, 입을 삐죽이는데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희철이었다.

“응, 희철아.”

-어디야!

“여기... 아파트 놀이턴데. 너는 어딘데?”

-기다려!

뭐야, 이 자식은 또. 안 그래도 열 받는데. 만나면 내가 먼저 때려줘야겠다 생각하며 또 칫칫, 입을 삐죽이는데 누군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뛰어왔다. 얼른 일어나 휴지를 주우려고 팔을 뻗는데,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야’하고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자, 잔뜩 뿔이 난 얼굴의 희철이었다.

“너 인마! 내가 삐쳤으면 석고대죄를 하고 먼저 기어들어왔어야지, 어디서 감히 튕김질이야?! 내가 우습다 이거지!”

“아... 내일 찾아가려고 했어.”

“웃기고 있네. ...... 뭐야, 담배 피우고 있냐? 네가 웬일로?”

“뭐, 그냥. 앉아. 아니다, 바닥에 앉아. 이거 어린이용이라서 너 타면 줄 끊어질 지도 몰라.”

“이게 진짜!”

그러면서도 희철은 그네에 엉덩이를 슬그머니 얹었다가, 기우뚱거리자 화들짝 일어나선 정말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리고 멋대로 내 무릎 위에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가 한 대 빼 물었다. 인상도 쓰지 않고, 기침도 하지 않고, 눈물도 빼지 않고 훅, 하고 빨아들이는 것이 꽤 부러웠다. 그래도 내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살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끼익, 끼익, 발을 구를 때마다 그네를 매단 쇠줄이 신음처럼 소리를 질렀다.

“희철아.”

“왜.”

“지금 나 때릴래?”

“....맞고 싶냐?”

“응, 지금 맞고 싶다.”

“맞아야 될 일 있냐?”

“...응, 그럴 거 같다.”

“이.... 병신 새끼야, 왜!”

“그게... 그게 잘 안 된다, 희철아.”

희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날아들어왔다. 커다란 주먹이 빈속을 퍽 때렸다. 겨우 한 대 맞고, 나는 두 팔로 배를 감싸 쥐었다. 역시, 운동한 녀석은 다르구나, 감탄했다. 봐주지 않고, 희철이 또 멱살을 잡아 올린 채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갈비뼈 쪽이라서 잔뜩 겁을 먹고 미리 몸을 움츠리자, 아무래도 힘을 좀 줄였는지 무언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아아... 희철아.. 이번 건 그래도 좀 덜 아팠다...헤...”

“이..이 미친 새끼, 웃음이 나오냐! 야 이 개새끼야! 웃음이 나와?! 왜... 왜 안 돼! 그게 왜 안 돼!”

그리고 이번엔 아무런 기술 없이 마구잡이로 얼굴을 향해 손바닥이며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을 날렸다. 그래도 보이는 데는 때리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을 하려다가 입 쪽으로 향한 주먹에 입술이 터졌다. 이빨이 나가진 않았을까, 혀로 이를 살살 훑으니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도 머리며 얼굴이며 배, 옆구리, 등, 허벅지, 닥치지 않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쪽팔려.

“희..희철아.. 아프다.. 인제 아파...”

“아프라고 때린다, 이 새끼야! 미친 새끼, 돈 새끼, 환장한 새끼! 어떡할 건데! 어쩌려고! 씨발 새끼, 개새끼, 후레자식! 나... 나는 나중에 아저씨 얼굴 어떻게 보라고! 그게, 그게 왜 안 되는데!”

“그게... 그게 희철아... 내 맘이 내 맘처럼 안 된다. 그게, 안 된다, 희철아. 주...죽을 것 같아서... 못하겠다... 정말 못하겠다, 희철아...”

머리를 막다말고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자 희철이 또 내 멱살을 잡고, 아예 우주 밖으로 던져버릴 기세로 모래흙 너머로 휙 밀어버렸다. 푹신한 모래흙에 처박히면서, 나는 정말 우주 밖으로 던져지고 싶다고, 내가 던진 코 푼 휴지처럼, 아주 가볍게 날아서 휙 던져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철은 제 성질을 못 이겨 정말 곰처럼 포효하듯 왁왁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손전등 불빛 두어 개가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것이 보였다.

거실에 불을 켜지 않고 소파 뒤에서 등을 기대어 베란다 쪽을 향해 앉으면, 몇 개 보이지 않지만 희미한 두어 개의 별빛 때문에, 마치 내가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집을 옮겨서 좋은 점이 있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찢어진 입술이 아팠다. 입술에 침을 바르면, 피맛이 났다. 피에도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지, 얼른 일어나 씻고 찢어진 곳에 연고를 발라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혀끝으로 입술을 샅샅이 핥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 멍청하게 앉아있는데, 현관문의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비밀번호는 곧바로 바꿨는데. 원래의 비밀번호를 눌렀다가 락이 풀리지 않자, 두어 번 더 시도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느릿느릿하게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오픈 버튼을 누르려다가, 걸쇠를 먼저 건 후에 문을 열었다.

“치사하게.”

“정해진은 못 생겼고 머리도 나쁘고, 게다가 싸가지도 없으니까.”

복도의 주황색 조명을 받으며 태준이 서 있었다. 조금은 다급한 표정이었다. 알고 있는 건가. 걸쇠를 풀지 않고 어두운 거실을 배경으로 좀 더 물러서자, 그가 문틈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봤어?”

“뭘?”

“뉴스.”

뉴스, 말 그대로 새로운 소식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말하는 건지 몰라서 어둠 속에서 벽에 기대어 오도카니 기다리니,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미안. 미안해, 해진아. 내가 거기까진 신경을 못 썼어. 그..그래도 이제 다 끝났잖아, 응? 이제야 정말 끝난 거야. 그 사람은, 이제부터 진짜 죗값을 받는 거야.”

아. 살았나보다. 살아서, 치료를 모두 끝내서, 건강하게, 이제부터 진짜 죗값을 받으러 징역살이를 갔나보았다. 몇 년형일까. ......그래도, 이왕이면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쁜 생각을 하면서도 픽 웃음이 나왔다. 최기정 씨, 틀렸어. 나는 별로 착한 사람이 아니야.

이상하게, 그런 뉴스를 직접 봤으면 또 한 번 머리가 돌았을 텐데, 그의 입을 통해 한번 걸러 들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하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안 봤다고 하면 뉴스도 안 보고 뭐하냐고 타박할까봐,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 안 보고 그 시간에 친구한테 얻어터졌으니까. 쪽팔려. 그가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건너보았다. 꼭,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괜찮아요, 이제. 되도록 오래 형을 살았으면 좋겠지만.”

“응. 우리 살 날 동안 보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해진아. 이제 네 눈에 안 보여.”

태준이 문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줄까, 생각하며 다가서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불쑥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눈을 깜빡이는 사이, 턱이 잡혔다.

“뭐야, 너 얼굴 왜 이래. 왼쪽으로 돌려봐. 아니, 왼쪽 인마. 뭐야! 누가... 그 녀석이야? 이걸 그냥...!”

그리고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납작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곧바로 희철에게 전화를 하려는 심산이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약혼하기 전에, 며칠 출판사 안 나왔었잖아. 그때, 뭐했어요?”

뜬금없는 말에, 그가 휴대폰 버튼을 누르다말고 멀뚱히 쳐다보았다.

“....몰라, 기억 안나. 그냥 좀 바빴어. 뭐야, 그런데 갑자기 그때 얘긴 왜 꺼내?”

“나, 출판사엔 계속 나갈 거야.”

무얼 생각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곧 장난스레 입가가 휘었다.

“누가 정해진 놀고먹는 꼴 그냥 본대? 너,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서 부지런히 대출 갚아야지. 농땡이 부릴 생각하면 이자까지 받는다.”

“집도 안 옮길 거야. 여기, 좋아. 마음에 들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또 집 옮기래? ...... 그 녀석이지? 잠깐만, 이거 진짜!”

그리고 또 이를 갈며 휴대폰을 젖혔다. 희철이 유도한 적 있어서 쉽지 않을 건데. 말리려다가, 걸쇠를 풀었다. 태준이 또 멀뚱히 그런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고 갈래요?”

“....약 먹었냐?”

“응.”

“무슨 약?”

“소화제.”

“소화제로도 사람이 취하는구나. 들어가. 들어가서 야식 같은 거 먹지 말고 그냥 자.”

“왜 매번 내가 먼저 손 뻗으면 피해?”

“......”

“자고 가.”

태준이, 의심 많은 동물처럼 눈을 가늘게 떠 멀리 있는 사람을 보듯 나를, 그렇게 보았다.

대체 뭘 포기하고 뭘 지켰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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