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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의 겨울에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해만에 나는 어서 12월 31일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서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꺼지지 않는 불꽃도 식지 않을까.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속눈썹처럼 그저 허무하리만치 담담하게 이 생(生)을 건너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물여섯의 한 해는 내게 잔인했고 지독했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잊을 수 없었고, 잊어선 안 되었고, 그래서 안타까운 한 해였다. 나는 자주 손톱이 뒤집히도록 모래흙을 파내는 꿈을 꾸었고, 땀으로 흥건히 젖어 깨어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거나, 또는, 곁에 없었다.
태준은 더 이상 반지를 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반지가 아주 꽉 끼었었는지, 약지에 반지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점차 그것도 희미해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아무 흔적도 없었다. 평소에도 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넌지시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았지만, 액세서리는 귀찮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하여튼, 배려 같은 것은 없는 남자였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부모님의 집은 처분되었다. 워낙 끔찍한 사고가 있었던 집이어서 그런지 주택으로서는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집터의 기가 좋지 않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결국 집은 허물어졌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진 후에야 상점으로 팔리게 되었다. 집이 뜯겨나가고 마침내 무너지는 것을, 나는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제야,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다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연히 와 닿았다.
집을 처분하는 것 역시 태준에게 맡겨두었다. 집터에 새 건물을 짓는 것으로도 충분한 지출이 있었을 터였는데, 그는 건물의 매매가를 내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나는 그 중에서 아파트의 전세 값을 대충 계산해서 그의 무이자 대출을 한꺼번에 갚을 수 있었다. 몽땅 현금으로 바꾸어 그에게 가져갔건만, 그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리곤 종이가방에 대충 넣어버렸다. 나는 한동안 삐쳐서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왜 삐쳤는지도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를 만난 이후로 내게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일처리를 맡겨두곤 했다. 아니, 어느새 나타난 그가 뚝딱뚝딱 일을 해결해버리는 것에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막히면 그를 찾곤 했다. 언젠가 희철이 지적한 대로,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도련님’ 행세를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야지’ 생각은 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언제나 각오보다는 무의식이나 습관이 한 걸음 더 빨랐다. 나는 그가 곁에 있는 것이 익숙했고, 든든했고, 그리고, 욕심은 매일 조금씩 자랐다.
욕심이 자라는 만큼 나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고, 내 욕심이 두려웠다.
* * *
크리스마스이브답게 온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상점마다 화려하게 장식된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산타클로스가 아이에게 ‘착하게 자라라’는 주문을 부드럽게 설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단순한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딱딱한 논리쯤은 잠시 잊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스스로 설득시키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들떠 있었다. 그게 겉으로도 티가 났는지, 운전을 하던 태준이 간간히 그런 나를 힐긋거리며 비웃었다.
“정해진 어린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받고 싶어?”
“전 올해 너무 많이 울어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없답니다.”
“그런 털 많고 배 나온 할아버지는 때려치우고 미끈한 김태준 산타한테 애교 부리면 아무리 많이 울어도 선물 뚝딱 나오는데, 어때.”
“됐거든요?”
“거 참 야박하네.”
그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 찼다. 태준은 하루가 멀다하고 능글거리면서 유부남 아저씨 티를 냈다. 가끔 나는 그가 현재 그의 처지를 아니, 우리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간혹, 밥을 먹거나 나란히 누워있을 때에, 나도 모르게 ‘지금 웃음이 나오냐!’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러면 태준은 밥을 먹다가, 혹은 누워서 기지개를 펴고 있다가 밥주걱으로 따귀를 맞은 흥부처럼 입을 헤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영문도 몰라 하는 그의 표정이, 아주 미웠다.
“눈 오려나...”
운전을 하다가 태준이 문득 하늘을 힐긋 올려다보았다. 나도 앞 유리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그의 단단한 손가락 마디를 보다가, 역시 아무 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내 빈약한 손가락 마디를 주물렀다. 그는 액세서리는 귀찮다고 하지만, 나 역시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쩐지 조금 허전해서, 스스로 깍지를 꼈다.
오랜만에 용인에 같이 가자고, 막상 불러서 나오긴 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븐데. 하긴, 이브는 나와 보내고 진짜 크리스마스는 아내와 보내는 걸까.
“있잖아요, 여자들은 크리스마스보다는 오히려 이브를 더 특별하게 여긴다는데.”
따뜻하게 틀어놓은 히터의 열기로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에다가 손가락 끝으로 온갖 도형을 그리며,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태준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응?’하고 물었다가 곧 ‘아’하고 대답했다.
“그쪽이 먼저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어.”
“아.”
“응.”
나는 여전히 차창에다 손가락 낙서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퉁이에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썼다. 신호에 걸렸는지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가 양 옆의 차들과 함께 나란히 섰다. 나는 그의 이름 옆에다 ‘IQ 50’이라고 적었다. ‘김태준 IQ 50'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문득 내 목덜미에 이어 뒤통수까지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정해진. 요즘 내가 참 부드럽지?”
“......”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김태준 IQ 50’을 손바닥으로 지워야 했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닌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앉자 그가 질 나쁘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아, 저기요. 저기 케익 맛있어.”
태준은 내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케익 전문점 앞에 차를 멈춰 세운 후,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는 박치기라도 하려는 듯 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박력 있게 다가와서, 정말 박아버리려나, 하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은 사이, 입술 위로 축축한 것이 핥고 지나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내리는 중이었다. 나도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와서 ‘뭐하는 짓이에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점 바깥에 설치된 앰프에서 캐럴이 광광 흘러나오고 있어 내 목소리는 그리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뭐가 좋은지,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선물’하고 뻔뻔스레 대답했다.
“그런 선물 필요 없거든요?”
“좋으면서. 뭐해, 안 들어와?”
나는 씩씩거리며 그가 잡고 있는 문 사이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혼자 성큼성큼 걸어 매장 안의 진열장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블루베리 치즈케익이 없었다. ‘블루베리 치즈케익’이라고 적혀진 작은 네임텍이 세워진 빈 공간을 향해 손가락을 꾹 누르고 있자, 진열대 위에서 직원이 머리를 빠끔 내민 채 ‘다 나갔는데요’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알려주었다. 인기 있는 케익이,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아침부터 동이 난다는 건 당연한 일인데 뭘 그런 걸로 미안해하긴. 나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어떤 걸로 사갈까, 고민하며 여전히 쪼그려 앉아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왁왁 소리를 지르며 밀려왔다. 한 어린 아이가 매장 안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를 피하려고 오히려 어른들이 수선을 떨며 움직였다.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무릎으로 내 등허리를 찍었다. 이럴 때 김태준은 어디서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거야, 뿔을 내며 일어서려는데 발등에 뾰족한 것이 꾹 눌러왔다.
“아!”
“어머, 미안해요. 괜찮아요?”
뾰족 굽으로 내 발등을 찍은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여러 번 사과를 반복했다.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게 했다. 나는 찍힌 발등을 다른 쪽 다리 종아리에 대고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절대 괜찮지 않을 게 뻔했지만, 어쨌든 그리 미안해 하니 우선 괜찮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괜찮...’하고 입을 열었는데, 그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많이 아프세요? 저기, 여기 명함이요. 혹 이상이 있으시면...”
“정해진, 이 칠칠맞은 녀석아, 복잡한 데서 왜....”
단 한 번, 우연히 스치듯 봤는데 인상이 강해서 그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태준의 아내였다. 나는 종아리에 문지르던 발등을 내리고, 북적이는 틈에 밀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섰다. 태준은 여자와 마주선 채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 다, 어떤 당혹감도 내비추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웠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저 녀석이 케익 사가자고 해서.”
여자의 물음에 태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딸꾹질이 나올 뻔 했다. 혹시, 저 사람도 아는 걸까. 그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벌써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걸까. 하긴, 주말마다 외박하는 남편에게서 떠올리는 건 ‘외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불륜의 대상이 설마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텐데. 아니, 그가 아주 태연히 ‘저 녀석’이라고 말했으니까, 설마, 설마, 설마 태준이 직접 말해버렸나? 그래서, 알고 있는 걸까? 이 자리에서 나, 따귀 맞을까? 아니, 물, 물을 끼얹을까? 아니면, 그의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그렇게 하세요’하고 작고 예리한 칼로 한 점 살을 떼어낼까.
그 짧은 순간동안 머리가 터지도록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태준을 번갈아 보며 ‘누구...?’하고 물었다. 태준이 ‘아’하고 입을 떼려는 순간, 내가 먼저 ‘저는’하고 조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귀가 달아오르고, 정말, 죽고 싶었다. 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 뜬 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저는... 후..후배요. 아..안녕하세요, 정해진이라고 합니다.”
“아. 후배시구나. 한 번도 못 뵀는데... 학교 후배세요?”
“정해진 씨는 참 인사성도 발라.”
태준이 그의 아내의 말을 자르며 비꼬듯 말했다. 나는 그가 왜 나를 비난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저는’할 때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태준이 부인을 향해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그쪽은, 혼자 왔어?”
“저기에.”
여자가 턱 끝으로 매장 한 쪽을 가리켰다. 태준과 내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여자가 가리킨 곳에는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슈트 차림의 남자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태준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짧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태준은 ‘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주며 ‘빨리 골라’하고 짧게 명령했다. 부인 앞이니까, 다정하게 대해주지는 못해도, 그래도......
나는 얼른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허리를 숙였다. 냉장고 속의 케익은 하나같이 모두 너무 예뻐서 이걸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내가 케익을 고르는 동안 둘은 오늘 저녁엔 몇 시에 들어오는지, 내일 파티는 함께 갈 것인지 각자 따로 갈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답했다. 체리 치즈케익이요, 진열대에 팔꿈치를 올린 채 직원에게 빠르게 말했다. 직원은 내가 주문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안쪽 창고에서 미리 포장되어 있는 것을 꺼내어 왔다.
“내가 계산할게요. 발 밟은 거 사과하는 의미로. 참, 발등 계속 아프면 꼭 연락해요. 아니, 안 아파도 집에 한번 들러요. 태준 씨가 이렇게 데리고 다닐 만큼 아끼는 후배가 있다는 거, 신기하니까. 태준 씨, 꼭 한번 데리고 와요.”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케익과 함께 내 것까지 계산을 해 버렸다. 나는 평소에 태준과 함께 무언가를 먹거나 살 때에 그가 준 카드를 썼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모두 다 내가 계산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의 카드를 손에 쥔 채 어설프게 서 있었다. 하긴, 이 카드나 저 카드나, 결국 같은 건가.
계산을 끝마치는 것을 보고 케익 상자를 들려고 손을 뻗는데 누군가가 굉장히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석상처럼 서 있던 남자가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요령 좋게 파고들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고른 케익 상자를 들고는, 태준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까딱인 뒤 밖으로 나갔다. 둘 모두 매장 밖으로 나간 후, 나는 초콜릿을 고르겠다며 머뭇거렸다. 그리고 유리 문 밖을 힐긋거렸다. 남자가 뒷문을 열어준 차로 여자가 올라탔다. 뒷문이 닫고서야 남자는 운전석으로 향했다.
“멍청하게 서 있으면 이번엔 사람들이 네 머릴 밟고 올라설걸?”
바로 뒤에 바짝 붙어선 태준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귀를 벅벅 긁으며 뒤돌아 세모눈을 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태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또 왜’하고 투덜거렸다. 그렇다고 딱히 할 말은 없어서, 바구니에 초콜릿을 듬뿍 담으며 ‘아니요’ 웅얼거렸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는 보디가드, 뭐 그런 거예요?”
“뭐 대단한 인사라고 보디가드를 달고 다녀. 친정에서부터 계속 일했던 운전기사야.”
“아... 근데 태준 씨는 왜 운전기사 안 데리고 다녀?”
“일할 때는 몰라도 사적으로 움직일 때는 오히려 불편하지. 여자들은 과시욕인지 뭔지 무조건 데리고 다니는 것 같지만. 왜, 정해진, 기사 부리고 싶어?”
“됐거든요.”
“부리고 싶다고 해도 이번엔 나도 됐거든, 이다.”
나는 다른 바구니에 또 초콜릿을 듬뿍 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태준이 ‘이 썩는다’하고 참견했지만, 무시했다. 초콜릿을 아주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여전했다. 먼저 들른 클리닉 센터에서 담당의를 면담한 결과, 어머니의 상태는 더 나아지지도, 더 악화되지도 않았다. 의사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도 앞으로 호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사의 말처럼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하십니다’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주먹이 가슴을 향해 크게 휘둘러 치는 것만 같았다.
계속 그런 상태라면, 집으로 와 모실 수가 없었다. 간병인을 따로 집에 둘 여유도 없었고,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한다고 해도 행여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평생 이렇게 한 달에 서너 번 겨우 잠깐 얼굴을 보는 것으로, 괜찮을까. 만약 어느 늦은 밤 걸려온 전화에서 끔찍한 소식이 전해진다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것을 털어버리려, 머리를 흔들었다.
“엄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그래서 케익도 사 왔고요, 이것도 사 왔어요. 모자, 산타 모자. 써 봐요? 내가 쓸까?”
나는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의 굳은 무릎 위에 빨간 색의 산타 모자를 얹어 놓았다. 어머니가 웃으며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얼른 모자를 뒤집어썼다. 벽에 붙은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다듬은 뒤, 뒤뚱거리며 다가가자 어머니가 오른쪽 어깨를 들썩이며 활짝 웃으셨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굳은 왼쪽 얼굴 또한 웃는 얼굴로 볼 수 있는 마법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서비스로 받은 빨간 색의 모형 루돌프 코를 내 코에 끼웠다. 어머니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 같은 것이 나왔다. 나는, 괜찮다고, 어떤 소리라도 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따라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어머니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출판사에서의 이야기, 요즘 자주 보는 드라마 이야기 같은 것을 주절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태준이 ‘정해진’하고 부르며 어깨를 두드렸다. 네? 하고 뒤돌아보는데,
“치-즈.”
찰칵, 하고 사진기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코앞에서. 뭐야,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니 태준이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며 ‘푸풉’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이상하게 나왔죠? 내 놔, 지워.”
“안 돼. 못 지워.”
그리곤 내 손이 닿지 않도록 휴대폰을 쥔 손을 높이 뻗어 올렸다. 유치하게 한참을 방 안에서 쿵쿵 뛰고, 도망 치고, 쫓고 하다가 결국 먼저 지친 것은 나였다. 나는 씩씩거리다가 어머니에게 달려가 ‘혼내 줘요!’하고 일러바쳤다. 어머니는 내 마음도 모르고, 마냥 즐겁게 웃고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어머니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그리고 태준의 어머니가 내게 어떤 말을 했는지 까지, 모두 일러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누구를 혼내실까. 아마도, 어머니라면, 태준과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으름장을 놓으실 테였다. 엄마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앞머리를 입 바람으로 훅 올린 뒤, 태준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주먹으로 그의 배를 쳐 버렸다.
“윽.... 너, 이건 좀 심하잖아.”
방 안에 있던 간병인은 물론 어머니의 표정까지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태준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배를 문지르다가, 어머니를 돌아보곤 얼른 케익을 꺼내었다. 그리고 케익 위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간병인이 얼른 방안의 조명을 낮추었다. 나는 다시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태준의 발등을 꾹 밟은 채, 손동작을 겸하여 ‘울면 안 돼’를 불렀다. 어머니는 다시 웃으셨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치즈케익이 없었다고, 대신 체리로 사 왔다고 수다를 떨다가, 문득 이것을 계산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이 짙은, 그러나 선한 인상의 옆모습. 케익을 한 조각 떠먹는데, 목에 생선가시가 박힌 듯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함박눈이 내렸다. 다행히 국도를 달리던 길이라 도로가에 정비소가 있었다. 정비소에 엔진 점검과 스노우체인 작업을 맡기고 우리는 잠시 텅 빈, 황량한 들판에 서 있었다. 정비소의 직원이 안에 들어와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찬바람을 쐬고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태준은 곁에 서서 블랙스톤을 빼 물었다.
도로는 한산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에 국도를 달리는 차량의 주인은 서울시내에서 빈 방을 찾지 못해 좀 더 멀리까지 러브모텔을 찾아 나온 연인들일 것이었다. 간간히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다들, 열심히들, 사랑하고 있구나.
“정해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태준이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막상 내 이름을 불러놓고는, 또 한참 담배만 피우며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요.”
“아무리 그래도, 안 돼.”
“....뭘?”
“사진, 안 지워줄 거야.”
“......담배, 나도 줘요.”
“그것도 안 돼.”
“그럼 되는 게 뭐가 있어?”
삐친 척, 고개를 팩 돌리며 쏘아 말하자 그가 담배를 깊이 빤 뒤 재빨리 내 얼굴을 돌렸다. 턱이 잡힌 채로 입이 벌려졌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혀가 엉키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숨결과, 그가 머금었던 담배연기가 내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뒤에 그가 떨어졌다. 나는 내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정말, 달착지근한 맛이 났다.
“내일, 파티... 그런 거 언제 가는데? 아침 일찍?”
“저녁.”
“...하고 싶어. 되게, 되게 비싼 호텔방에서.”
“...계산 네가 해.”
“응, 태준 씨 카드로.”
* * *
연일 계속되는 망년회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건 사무실 사람들도 마찬가진지, 아침마다 속이 아프다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투덜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최 선배는 특히 더 ‘죽을 상’을 하고 다녔다.
“아으, 죽겠다. 작년까진 안 이랬는데. 이젠 나도 갔구나, 갔어. 아아, 슬프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그렇게 부실해서 어떻게, 장가는 가실 수 있겠어요?”
맞은편에 앉은 선희가 콧방귀를 뀌면서 비꼬는 어투로 물었다. 힘없이 책상 위에 엎어진 사람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볼이 빨개진 최 선배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난데없이 책상 모퉁이를 짚은 채 팔굽혀펴기를 했다. 그때, 팀장과 함께 독일어권 도서 번역을 맡고 있는 강민하 씨가 들어왔다. 두어 번 팔굽혀펴기를 하다말고 최 선배는 퍼뜩 일어나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체를 했다.
“강민하 씨! 할아버지가 저어기 마나님들 사이에서 유명한 한의원 하신다고 하셨죠? 손자 아는 사람, 특별할인 안 되나? 나 장가 좀 갑시다. 보약이라도 지어먹어야겠어.”
“특별할인만 되나요? 특별진료도 해드리라고 하죠.”
남자가, 얄밉게 생긴 주제에 배시시 웃으며 친절하게 답하자 여기저기에서 ‘나도, 나도’하며 예약을 선점하려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한 첩 지어먹을까, 생각하며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누구 호강시키려고, 하는 생각에 그냥 말았다. 강민하 씨는 그 자리에서 어딘가로-아마도 그 대단하다는 한의사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과 진료가 가능한 날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는 예약한 사람들의 명단을 돌리며 ‘아’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한테 들었는데요, 워낙 그쪽, 마나님들 상대를 많이 하시잖아요. 근데 태인 기업 쪽에서는 유난히 까다롭게 군다고, 돈 안 벌고 말지 안 왔으며 좋겠대요. 올봄에 며느리 들였잖아요, 그때부터 여자 몸에 좋다는, 아이 갖는 거요, 그런 걸 바리바리 주문했대요. 근데 애가 아직 안 들어서니까 그걸 약 탓을 한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약은 계속 타 가고. 할아버지, 그쪽 되게 싫어하세요.”
“태인 기업 며느리라면, 김태준 전무 와이프? 아직 젊은데 뭘 벌써 그러시나?”
“원래 그쪽 집안이 씨가 귀해. 막말로, 그 회장이 둔 부인들도 몇인데 슬하에 겨우 김 전무 한 명만 뒀잖아. 그것도 양자 들여야 하나 하던 때에, 막둥이로. 나도 이건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그 때 뒷말이 참 많았다네. 진짜 회장 씨냐 아니냐, 뭐 그래서 유전자 검사도 하고 막 그랬대. 이것도 그냥, 그 시절 돌던 카더라 통신 중에 하나겠지만.”
사원들과 함께 예약 날짜를 적고 있던 팀장이 대화에 끼어들어, 내가 오래전에 태준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그의 유년시절에 관해 떠들었다. 사원들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의 스캔들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호기심을 보였다. 한때 같이 일했던 사람, 그러나 근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가 섞인 모호한 감정의 눈빛들이었다.
“그래서요? 유전자 검사 결과가 어땠는데요? 그러고 보면 김태준 전무, 그 회장이나 사모나 전혀 안 닮은 것 같은데. 진짜 그쪽 씨 아니에요?”
“회장도 그렇게 생각하고 온갖 구박 다 하고 사모 내쫓으려고까지 했는데, 결과는 친자가 맞았다 이거야. 김 전무 눈빛 떠올려봐. 일반 편하게 자란 재벌가 황태자들하고는 좀 다르잖아. 그거 다, 울분이 있어서 그래. 그러고 보면 그 사람도 참 안 됐어. 결혼 자체는 합병이고 생활은 교배기야.”
“난 여자가 더 불쌍하다. HJ 공주로 마냥 곱게 자랐는데 막상 결혼 했더니, 씨받이로 전락한 거나 마찬가지지 뭐. 게다가, 그렇게 따지면 애 안 들어서는 게 여자 탓이야? 씨가 부실한 거지.”
여자 사원의 노골적인 말에 사람들은 서로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킥킥대며 웃었다. 황태자에다, 겉모습도 그럴싸해 보이는 김태준이 알고 보면 ‘씨가 부실한 남자’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묘한 쾌감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선희가, 다른 사람들처럼 웃지 않는 나를, 역시 웃지 않으며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한숨처럼 힘없이 웃었다.
예약 날짜를 적은 종이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은 채 사무실을 나서는 번역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와일드 필드’를 떠올렸다. 그가 약혼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긴 하지만, 도저히 그런 게 선물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한 번도, 승마를 배우러 가기는커녕 ‘와일드 필드’를 보러간 적도 없었다. 그래도, 전용 조련사가 따로 있는 것 같으니까, 잘 지내고 있겠지.
“퇴근합시다-”
“내일은 신정입니다- 내일 아침 떠오르는 새해는 부디 말짱한 정신으로 보기 위하여, 모두들 오늘은 빨리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보냅시다-”
“일출 보러갈 사람 여기 붙으세요! 찜질방에서 몸 지지다 출발할 거니까, 물론 술은 안마시니까 걱정들 마시고.”
다들 한 마디씩 하며 ‘오늘은 금주’를 다짐했다.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면서 서랍에서 초콜릿을 꺼내었다. 우물거리며 가방과 코트를 챙겨 드는데,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액정을 확인하니 희철이었다. 왜, 하고 전화를 받는데 희철은 다짜고짜 ‘너 인마, 정해진’하고 소리를 질렀다. 발음도 꼬였고, 벌써 어디서 한잔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선희에게 손짓으로 SOS를 청했다.
“어딘데?”
-어디긴, 우리 술 마시는 데가 두 군데냐, 세 군데냐. 나와! 야, 너 선희 데리고 나오지 마! 싸나이답게 한 판 붙자! 내 오늘은 기필코 네 머릿속을 세탁에다 드라이클리닝까지 해주겠어. 나와!
그리곤 뚝, 끊겼다. 선희가 쓰게 웃으며 ‘또 지랄이냐?’하고 물었다.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자 ‘지원군 납신다, 걱정 마’하고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가자, 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기정이 앞을 막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유난히 들떠보여서 나는 절로 한 발 주춤 물러서야 했다.
“왜?”
“약속이요!”
“무슨 약속?”
“일주일 동안 안 따라다녔잖아요!”
“아....”
하도 귀찮게 굴어서 일주일 동안 얌전하게 있으면 저녁 사준다는 약속까지 했었다. 손가락 걸고, 사인하고, 복사까지 했었다.
기정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나를 좀 더 따라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깨우쳐주었으면 싶었다. 그건 태준에게 갖는 감정과는 달랐다. 연애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같은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한다고 밝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록 우스꽝스러운 농담 정도로 받아들여질지언정, 거부감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내게는 묘한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기정을 보면, 그를 가까이 하면, 내 죄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데리고 가지 뭐. 지원군 하나 더 얻는다 치고. 잘못하면 혹 하나 더 붙이는 꼴 되겠지만. 데리고 가. 그놈이랑 붙여놓으면 되게 재밌겠다. 곰이랑 개.”
선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기정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그저 데리고 가자는 선희의 말에 함박웃음을 띈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대신 얌전하게 굴어야 된다는 약속을 또 받아내고서야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은 내 가방과 선희의 핸드백을 들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버렸다.
“어, 선희 씨, 술 마시러 가는 거?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그러다 시집 못 간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최 선배가 선희를 보며 빙글 농담을 던졌다. 입을 삐죽이는 선희의 귀에다, 나는 이럴 때 사용하는 모범답안을 속삭여주었다. 선희가 우렁찬 목소리로 최 선배를 향해 외쳤다.
“됐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