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25화 (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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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온 것은 여느 날처럼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보람찬 근무 시간이었다. 휴대폰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 쉽게 폴더를 열 수 없었다. 어머니의 간병인에게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전화하라고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었었다. 정말, 혹 무슨 일이 있다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았다. 최 선배가 ‘스토커? 대신 받아줘?’하고 농을 던졌다. 나는 초콜릿을 베어 물며 고개를 저었다. 연이어 한 번 더 전화가 온다면,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날은 하루 종일 벨이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회의 중이어서 곧바로 배터리를 빼버렸다. 전원을 다시 연결한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같은 번호로 부재 중 전화가 세 건이나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다. 메시지를 남긴 사람은, 어느 먼 나라에서 유학 온 사람처럼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반복해서 들은 결과, 그가 아주 쉬운 단어들, 그러니까 어린아이에게 쓰는 단어들만을 선택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약속 장소는 내가 정했다. 어차피 일요일 아침은 늦게 일어나니까, 브런치가 되는 청담동의 카페로 골랐다. 주로 태준과 함께 오던 곳이어서 여차하면 만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그즈음 대통령 선거가 있어 로비자금과 관련된 검찰 수사가 각 기업을 들쑤셨다. 꽤 오랫동안 그는 내 집에 들르지 못했다. 가끔 전화 통화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하긴, 바쁜데 브런치를 즐길 여유라도 있을까’ 싶었지만, 보고 싶었다.

늦잠을 잔 대가로 눈곱만 겨우 떼고 허둥지둥 카페로 들어섰을 때,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상대는 손을 휘휘 저으며 ‘여기요’하고 소리쳤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아직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 보이는 중년남성이었다. 남자는 악수를 건네며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은 남자를 ‘이음동화 대표 손이남’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어서 안 받으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시 전화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요즘 참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그나마 메시지를 남겨주셔서 전화를 한 겁니다. 실은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아, 제가 말하는 게 좀 이상하지요?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왜냐하면 말하고 싶은 게 많은데 이걸 정리하려면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멍텅구리로 꺼내다보니까...”

“저어, 주문 먼저 하죠. 식사 하셨어요? 전 아직 식전이라서 간단하게 브런치라도 들면서 이야기를 들어도 될까요?”

“아, 그럼요. 그럼요. 그런데 아침은 꼭 드셔야 하는데.”

횡설수설하는 남자의 말을 자르고 나는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마치 만화주인공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여기 왜 이렇게 비싸죠?’하고 물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국 남자는 그나마 가장 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내가 팬케익과 스크램블과 베이컨을 열심히 해치우는 동안 남자는 빨대를 이용해 주스를 모두 마시고 얼음 조각을 아삭아삭 씹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일남이도 아니고 세남이도 아니고 이남이인 까닭은 역시나 두 번째 남자아이라서 부모님이 그렇게 단순하게 지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젊은 여성들과 외국인들로 북적이는 카페 안을 둘러보며 자신은 예전에 조금 작은 전통찻집을 하나 했었는데 원금도 회수하지 못하고 쫄딱 망해버린 사담까지 들려주었다.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명함만으로는 출판사, 그것도 내가 들어보지 못한 아동문학 출판사의 대표인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뗄 수 없었다.

허기를 모두 채운 후에 커피를 마시며 나는 다시 한 번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빤히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내가 자신을 정체불명의 사람으로 의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얼른 자세를 바로 앉아 헛기침을 했다.

“사기꾼은 아닙니다. 절대로요.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네에.... 그런데, 제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다구요? 직접이요?”

“아니요. 그러니까....”

여전히 남자는 횡설수설,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뜨려 놓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는 최근에 전 재산을 몽땅 털어 아동문학만을 다루는 출판사를 세웠다. 한동안 여러 동화 작가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지만 성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제 망했구나, 싶어서 모두 접자하는 마음에 팔도강산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초췌한 몰골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오랫동안 믿고 따라준 후배가 불쑥 찾아와선 또 불쑥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하며 LCD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내 그림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저기 그러니까... 그 오랫동안 믿고 따라준 후배 분은 제 그림을 어떻게 찍으셨는지, 저는 그게 궁금하거든요.”

“아, 그건 말이지요....”

그리고 또 남자는 횡설수설,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 후배는 자신의 대학교 3년 후배로서 참 착하고 건실한데다 영혼이 맑기까지 하다. 그런 사람이 대기업에서 14년 동안 이리저리 치이다가 견디지 못하고 작은 사업을 했다가 역시 자신처럼 쫄딱 망해버렸다. 결국 어찌어찌하다 그럼 둘이서 무언가를 해보자, 하고 의견을 모았다. 그 무언가는 바쁘고 각박한 현대인들을 위로할 ‘무언가’였다. 바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제가 궁금한 건 그 후배 분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저희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는 제 스케치북을 그 분이 보셨는지가...”

“아, 이제 다 끝나 갑니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거든요. 기승전결은 참 어려운 말이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 정리하자면, 어쨌든 그 선후배는 출판사를 세웠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별로 사정이 시원치가 않았다. 선배가 팔도강산을 도는 동안, 후배 또한 낙심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까워서, 그렇다면 무언가 보람된 일이라도 해보자 싶어 각종 고아원이나 요양원 등을 돌아다니며 예전에 잠시 배웠던 풍선 아트를 이용해 외롭고 아픈 사람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 결국 내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까지 들어갔다.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워낙 경비가 삼엄해서 건물 내에서 공연을 하는 것은 불가했고, 잔디 뜰에서 조촐하게 사람들을 둥글게 앉힌 뒤 풍선을 불고 또 불었다. 그러던 중, 내가 드린 스케치북을 가지고 나와 산책을 하고 계시던 내 어머니를 보게 된 것이었다. 아니, 어머니가 보고 계신 스케치북의 그림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아, 예에....”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는 나는 또 배가 고팠다. 결국 스파게티도 시켜야 했다. 무언가를 같이 드시자고 권했지만, 남자는 두 손을 저으며 고개까지 저어댔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사기꾼도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좀 엉뚱한데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기엔 조금 힘겨울 타입이었다. 나는 문득 남자의 가족관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실례인 것 같아 말없이 스파게티를 돌돌 말았다. 그런데 연신 생수를 마시던 남자가 또 입이 간지러웠는지, 서슴없이 자신의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역시, 예상대로, 마누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갔다고 했다.

“저는 참 감동 받았어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직접 어머님이 계시는 요양원에 가서 직접 스케치북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님을 모시는 간병인에게서 처음에 전화가 갔었지요? 제가 전화를 빌렸었거든요. 혹 모르는 번호면 받지 않으실까봐. 그런데 그 전화도 받지 않으셔서 아, 많이 바쁘시구나, 생각했지요. 그래서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 정해진 씨 전화번호를 따서.. 아니, 적어 와서 다음날 아침부터 전화를 드린 겁니다. 그 낯선 번호가 제 휴대전화 번호거든요. 에... 그러니까 제가 이리 만나자고 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혹 스케치북을 저희에게 넘기실 수는 없으신지요?”

“네?”

“아니지. 그... 저희 출판사와 계약을 하시고 그림동화 작가로서 새로운 삶을 개척... 아, 어려운 말이지요? 그러니까 말...”

“아니요.”

“네?”

“스케치북을 팔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림동화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남자는 입을 헤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지루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모든 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거기다 남자는, 내 인생을 바꾸어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내 인생을 걸 만큼 그리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원금도 회수하지 못하고 개인 사업을 망쳐버린 남자, 그 때문에 가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남자,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내게도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메뉴판의 가격을 보며 절대 식사를 시키지 않는 남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내 말투가 쌀쌀맞게 들리진 않았나 걱정은 되었다. 내 대답에 고개를 숙인 채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를 긁적이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좀 더 다감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제 그림을 보고 감동받으셨다니,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그런데 그건 제 어머니를 위해 그린 그림일 뿐이에요.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게 아니에요. 게다가 저는 지금, 손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새로운 삶을 개척할 만한 상황도 아니고요.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아... 그렇지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나는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남자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 더 달라고 해서 한꺼번에 마시고는 ‘그럼’하고 입을 열었다.

“혹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시거든, 꼭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함, 명함을 드렸던가요?”

“예, 명함 넣어뒀어요. 생각이 바뀌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남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제 자신의 목덜미를 긁적여 댔다. 아무래도, 개인 사업으로 성공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꿈은 원대하지만 추진력도, 그리고 보는 눈도 없었다. 나는 작게 한숨지으며 먼저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제야 남자가 허겁지겁 다가와 자신이 계산을 하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남자의 지갑 안에는 만 원권 지폐 한 장과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전부였다. 결국, 브런치에 스파게티까지 먹었으니 내가 계산하는 것이 옳다고 설득시킨 후에야 카드를 내밀었다. 카페를 나와 나는 일부러 남자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남자는 내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내 등에 대고 ‘생각이 바뀌시면 꼭 연락을’하고 소리를 질렀다.

낯선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나는 한참 후에야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남자가 나타나 ‘혹 생각이 바뀌셨나요?’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무엇으로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인정받는 것은 오히려 뿌듯한 일이었다. 비록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마도 곧 없어질 출판사의 대표라 할지라도, 그로인해 잠시 동안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어쩐지, 무슨 일이 닥쳐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오를 넘기면서 조금 더워지기는 했지만, 걷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황당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고, 입맛에 맞는 요리로 적당한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태준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저녁에 전화가 와서 오늘도 바빠서 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줌마처럼 온갖 잔소리를 퍼부어댔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먼저 보고 싶다는 말은 죽어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호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스쿠터를 저마다의 개성대로 색칠하고 꾸며서 타고 다니는 것이 유행인지 거리마다 꼭 한 대씩은 빨갛고 노란 스쿠터들이 세워져 있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순서대로 세워진 것들도 보였다. 아마 칠공주파쯤 되나보다, 생각하며 실없이 혼자 웃었다. 발걸음이 가벼웠고, 그래서 주인에 의해 목줄이 채워진 애완견을 향해 ‘안녕’하고 손을 흔드는 유치한 짓도 해버렸다. 개 주인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태준이 ‘연애나 하자’고 선포한 뒤에 무작정 집으로 찾아와 끌고 간 디자이너 숍들이 즐비한 거리를 오랜만에 걸었다. 각 숍들 앞에 세워진 차들이 으리으리해서, 조금 기가 죽었다. 차를 끌고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우아한 산책자처럼 여유 있게 걸으며 쇼윈도 앞을 지나칠 때였다. 높은 굽을 신은 여자가 막 가게 안에서 문을 열고 인도로 내려서고 있었다.

“앗!”

“으...!”

내려서면서, 발목이 접질린 여자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얼른 팔을 뻗어 어깨를 잡아주었다. 덕분에 내 발목이 접질리고 말았다. 여자의 체중을 받치고 있던 내가 인상을 찌푸린 채 어깨를 움츠리자 여자가 얼른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오히려 내 어깨를 받아 부축해주었다. 그러나 곧 좀 더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어깨를 지탱했다.

“괜찮으세요? 미안해서 어쩌...”

“아....”

“맞죠? 태준 씨 후배라던, 그....”

“...예, 정해진이라고 합니다.”

“아, 맞다. 정해진 씨.”

태준의 부인이었다. 여자는 반가운 듯, 미안한 듯, 그리고 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어깨를 부축해주고 있는 사람은 예전에 보았던, 여자의 운전기사라던 남자였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남자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제대로 서보려는데,

“읏...!”

여자의 체중까지 더해진 채 제대로 접질린 건지 참으려고 해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머, 이것 봐. 다친 거 맞잖아요. 아휴, 난 정말... 저번에도 내가 정해진 씨 발등 밟았잖아요, 그렇죠? 계속 미안한 일만 저지르네요, 내가. 아... 어쩌지? 우선 내 차에 타요. 치료하러 가요.”

“아니요, 이런 건 그냥 집에서 찜질이나 하면 됩니다.”

“안 돼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데 뭘. 경현 씨, 이분 좀 부축해 줘요.”

남자의 이름이 경현인가 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어깨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부축했다. 말이 부축이지, 신장 차이 때문에 거의 들린 꼴이었다. 나는 여자와 한 차에 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차 문이 열리고, 억지로 앉혀지기 전까지 나는 계속 내 발목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는 결국, 여자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한의원으로 향했다.

VIP 고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한의원이어서 그런지, 고객 비밀 보장 하나는 확실했다. 물론 아무도 내가 태준의 불륜 상대라는 것을 몰랐을 테지만, 이미 안면을 익힌 간호사들까지도 내가 먼저 눈길을 돌리니 알아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원장은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말에 따라 내 발목을 살펴보곤 침을 놔주었다. 나는 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부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심한 건 아니니까, 침 요법은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돼요. 이틀까지는 냉찜질해주고 붓기가 완전히 빠지고 나서 온습포를 하면 좋습니다.”

“걸어도 되나요?”

“오늘? 오늘은 당연히 꼼짝도 하지 말아야지요.”

끔찍했다. 여자는 분명 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할 게 뻔했다. 나는 여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선수를 쳤다. 그러나 여자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는 너무 미안하잖아요. 저번에 식사 초대한 것도 있으니까, 이 앞에서 같이 저녁식사라도 하고 가요. 식사 후에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예? 아, 아니요! 지금은 걷는 것도 힘들고... 그리고 이렇게 병원까지 데려와 치료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 역시 좀 불편하죠? 선배 와이프하고 식사하는 것. 미안해요.”

여자가 아쉬운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사람에게서 정체모를 자신감을 얻은 나는, 키가 비슷한 여자의 숙인 이마를 바라보며 문득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뜨거운 난로를 향해 손을 뻗는 고양이의 못된 호기심이었다. 여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도 궁금했다. 임신한 여자들 특유의 얼굴의 광채가 눈이 부셨다. 그것이 단지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며,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집으로 초대하신 것 대신...”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향한 곳은 도로가에서 바로 입구로 연결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몇 걸음만 걸으면 된다는데도 운전기사는 굳이 내 어깨를 부축해 테이블까지 내 몸을 날랐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나는 또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여자는 나이프가 접시에 닿는 소리도 내지 않으며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입덧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여자가 먹는 모습을 흘긋대고만 있자 여자는 부끄러운 듯 ‘식성이 좋죠?’하고 웃었다.

“저어... 그런데, 임신 중에 그렇게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나요?”

“아, 유학 중에 키 큰 외국인들하고 시선을 맞추려고 매일 하이힐 신고 다니던 게 습관이 돼서요. 이제 좀 편한 신발을 신어야...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벌써 티가 나요?”

여자가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태준에게서 들었다고 하면 다시 그에게 말이 돌아갈 것 같아, 실은 방금 다녀온 한의원 원장의 손자와 조금 친분이 있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가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나 때문에 두 번이나 다친 사람한테 내가 너무 무심히 대하죠? 미안해요, 내가 별로 재미가 없어요. 말수도 적은 편이고.”

“아니요, 괜찮습니다.”

여자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거나 재치가 부족한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 같았다. 그저 가끔 내가 먹는 요리가 입에 맞는지, 발목은 아직도 아픈지 정도를 물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나에 관해 알고 있기 때문에 할 말을 고심 중이어서 말을 아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차를 마실 즈음에야 자기 속으로 깊이 침작하는 성격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요, 신혼살림 차린 여자가 매일 울상이어서 거참 안 됐다고, 아무래도 부부금슬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했었는데....’

내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저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식사하신 건 아닌가요? 집에 저..전무님도 계실 텐데...”

“아니에요. 태준 씨도 요즘 계속 회사일 때문에 집에 잘 못 들어와요.”

여자는 창밖으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 채 대답했다. 바쁘시네요, 대꾸하며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무성해지기 시작하는 가로수와 그 아래를 지나가는 연인들, 가족들, 그리고 도로가에 세워진 여자의 BMW가 그녀의 눈빛만큼 무심하게 다가왔다. 스파게티는, 하나도 맛이 없었다.

나는 밤이 깊을 때까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있었다. 얼른 집에 들어가 찜질을 해줘야 다음날 출근을 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은 하면서도 어린 아이들과 아이들의 엄마가 나를 경계하며 슬금슬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릴 때까지 나는 혼자 흥얼거리며 한쪽 발로만 그네를 실었다. 그때,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태준이었다.

-집에 없네? 어디 나갔어?

“어딘지 알아맞히면 내 전 재산을 드릴게요.”

-어린이 주제에 갈만한 데야 뻔하지. 놀이터.

“......”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 정말 그가 나타났다. 달빛과 조명등 아래에서도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태준은 내 앞에 우뚝 서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놔, 전 재산.”

“뻥인데.”

“거짓말하면 엉덩이를 두드려 맞는다고 유치원에서 안 가르쳐줘?”

“...회사 일은 어떻게 됐어요?”

“말 돌리긴. 괜찮아, 대선 총선 때마다 정기행산데 뭘. 그나저나, 새 옷까지 꺼내 입고 어디 갔다 온 거야?”

나는 바지를 조금 걷어 압박붕대를 감은 발목을 보여주었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화낼 것 같아서 자수해서 광명 찾자 싶어 ‘애들이랑 술래잡기 하다가 접질렸다’고 털어놓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태준이 등을 돌린 채 상체를 숙였다. 업혀,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냉큼 그의 등에 매달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겁냐.”

“내가 오늘 밥을 좀 과하게 먹었거든요. 황당하고 웃긴 남자랑 한 번 먹고, 되게 미인이랑 또 먹고. 아, 다비드상 같은 남자한테는 겨드랑이 아래를 허락했어요.”

태준은 비겁하게 허벅지를 받치고 있던 손으로 엉덩이를 꼬집었다. 나는 그의 귀를 물어뜯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내 엉덩이를 쓰다듬었고, 나는 그의 귓불을 빨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터프한 남자답게 그를 벽으로 밀었다. 그는 소심한 남자답게 내 적극성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가봐야 돼.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거야.”

“시..싫어, 잠깐만. 잠깐이면 돼요.”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얼굴 못 봐서 심심했어? 외로웠어?”

“무서웠어. 무서워.”

그가 얼른 끝내주려는 듯 내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다시 바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벽에 밀친 뒤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벌써 불끈 힘을 얻어 세우고 있는 그의 페니스를 바지 천 너머에서 한 번 쓰다듬고는 지퍼를 내림과 동시에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타이트한 드로즈를 돌돌 말아 아래로 내리자 우뚝 선 페니스가 튕겨 나왔다. 나는 입술을 혀로 적신 뒤, 곧바로 고개를 내렸다.

“자..잠깐만, 해진아.... 읏...!”

그러나 그도 곧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허리를 들썩였다. 입으로 담기에는 벅찼다. 입가로 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입을 떼자 이번엔 그가 급하게 내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탄탄한 복근을 쓰다듬었다. 으으, 하고 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한 손으로 그의 것을 잡고 연하고 주름진 피부를 혀로 샅샅이 핥았다. 조금씩 흐르고 있는 그의 쿠퍼액과 나의 타액으로 반질반질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그런 걸 예쁘다고 느끼는 나는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이용해 사정을 유도하는데, 그가 문득 손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올려다보자, 그가 내 입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나는, 두 말 않고 다시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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