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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무언가 툭 날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선희가 맞은편에서 ‘책상’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책상 위에는 아무렇게나 뭉친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하여튼 여자애가 예쁘게 꾸미는 건 죽어도 못하지. 투덜거리며 쪽지를 펼쳐보자 ‘점심 같이 먹자’ 딱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팀장실로 옮긴 최 선배가 힐긋거리며 건너다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선희가 쪼르륵 달려와 팔짱을 꼈다. 나는 최 선배 눈치를 보며 안 어울리게 무슨 짓이냐며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몇 달 뒤엔 새신부가 될 선희는 변함없이 나보다 힘이 더 셌다. 결국 나는 기정을 등 뒤에 단 채로 선희에게 질질 끌려 찌개백반 집으로 향했다.
“뭐 대단한 얘기라고 이렇게 손수 쪽지를 다 날려 보내? 누가 보면 비밀이야긴 줄 알겠네.”
“응, 질투심 유발 작전.”
“웩.”
찌개 안의 순두부를 떠먹다가 뜨거운 혀를 말리는 셈 치고 토하는 시늉을 해주었더니 선희는 금방 눈을 쭉 짖어선 노려보았다. 기정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됐을 걸 괜히 ‘웩’하고 나를 따라했다가 기어코 숟가락으로 이마를 한 대 맞아야 했다. 이마를 문지르며 불쌍한 척 입을 삐죽이고 있는 기정을 모른 체하며 선희는 어깨를 돌렸다.
“자고로 연애에는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이게 엄청 치열한 게임이거든. 피를 말려.”
“강선희도 그런 거 하는구나.”
“당연하지. 야, 최기정, 커피 뽑아와.”
선희가 기정의 무릎을 툭 차며 가게 내에 있는 커피자판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기정이 웬일로 ‘칫’ 소리를 냈다. 그러나 선희의 ‘안 가?’ 한 마디에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릎걸음으로 움직였다. 뒤뚱거리는 기정의 엉덩이를 보며 나는 강선희도 정말 그런 걸 한단 말이지, 하고 감탄했다.
“저게 요즘 부쩍 반항하네? 뒤늦게 사춘기 오나?”
“나한테도 요즘 가끔 그래. 사춘기는 아니고... 아마 나 때문일 걸.”
나는 상민과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는 것을 기정에게 가장 먼저 털어놓았다. 불륜 관계가 아니어서 축하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토라진 아이처럼 볼을 부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기정이 처음 내뱉은 말은 ‘별론데’였다. 기가 차서 헛기침이 다 나왔다. 제가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쩌란 말인가. 기정도 점점 희철을 닮아가고 있었다. 비록 친형제 지간은 아닐지라도, 중증 브라더 콤플렉스였다.
“그래. 너, 그... 바에서 만난 바텐더랑 사귄다며?”
“응, 뭐... 그렇게 됐다. 만난 건 한달 전인데, 보고한 건 지난 주말이었거든, 희철이한테. 나 또 맞을 뻔 했다.”
“...괜찮아?”
“뭐, 그럭저럭. 처음엔 좀 발랑 까진 놈 아닌가, 싶었는데 그냥 그런 데서 일하니까 평소에도 좀 업된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나중에 같이 가볼래? 거기 분위기가 좀... 정신없어. 그래서 평소에도 목소리도 좀 크고, 기분파에다... 그래. 아, 나보다 두 살 어린데 반말하는 건 좀 싸가지 없어 보여.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닌 거 같아.”
“그게 아니라...”
“거기다 유부남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괜찮은 지 묻는 게 아니라, 내가 괜찮은 지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했다. 아침마다,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맡아지는 블랙스톤 체리향이 무릎을 꺾게 했다. 누군가, 그 무릎을 좀 단단하게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좋았다.
“뭐, 괜찮아. 그럭저럭.”
“그러니까, 그럭저럭 정도로 괜찮...”
“커피 대령이요!
기정이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가게 안의 손님들이 ‘거참 기운 찬 젊은이네’하고 허허 웃었다. 선희는 종이컵을 잘근 씹으며 커피를 마셨다. 나는 오랜만에 기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기정은 금방 헤헤 거리며 웃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어딘가 분위가 어수선해져 있었다. 팀장실에서 최 선배와 현 출판사 주간이 된 전 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주간님이 팀장실에서 나왔다. 편집과 영업을 아우르는 총직이다 보니 그는 예전처럼 자주 각 출판사와 언론, 문학계의 소식통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가끔 최 선배와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다들 귀를 쫑긋 세운 채 주위를 맴돌곤 했다.
“팀장님, 오늘은 뭐 없어요?”
주간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팀장실로 모여들었다. 워낙 다들 이야기꾼이었다. 가끔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출판사 직원 주제에 책을 읽는 것보다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악의 없이, 새로운 소식이나 별난 이야기에 굶주리곤 했다. 그들의 기대에 찬 질문을 받으며 최 선배가 팀장실에서 나왔다. 무언가 있다는 뜻이었다. 최 선배는 먼저 선희를 힐긋 노려보곤 에헴, 하고 입을 열었다.
“나라님이 제정신이 아니니까 사람들도 점점 미쳐가나 봐. 글쎄 태인기업 김태준 전무가 말이야, 일요일, 어제, 이 한겨울에 말을 타셨대. 승마 말이야. 으랴으랴, 하는 거. 스포츠도 참 고상하게 즐기시지. 하여튼, 승마 도중에 떨어졌대. 낙마. 그래서 지금 병원에 있다네. 많이 다쳤나봐. 쯧,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서 있어도 찬바람에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거기다 또 무슨 승마? 에이, 한 식구였던 사람인데 신분이 미천해 병문안도 못 가고. 에이, 에이.”
“세상에. 낙마사고는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난다는데. 지금 그 부인도 만삭 아니에요? 뭐 큰일 나는 거 아냐?”
“에이, 말이 씨 된다. 말 함부로 하지 마.”
사람들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단순한 유희거리로서의 뉴스가 아니었다. 걱정과 안타까움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사람들을 낮게 가라앉게 했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그저 쯧쯧 혀를 차며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무릎이 꺾였다. 선희와 기정이 양 옆에서 내 팔을 붙들었다.
* * *
최 선배의 말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찬바람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추운데, 왜 승마 같은 걸 했을까. 나는 높다란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하아, 내쉬었다. 몽글몽글한 입김이 뿌옇게 눈앞을 적셨다가 곧 사라졌다. 곧 사라질 것 같은 초승달이 아스라이 건물의 끄트머리에 걸려있었다. 별은, 별은 없는 걸까.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올려다보았지만 캄캄한 밤하늘엔 초승달만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팔자 한번 기구하지. 영감 같은 생각을 하며 또 한숨을 훅 내쉬었다.
얼굴만, 얼마나 다쳤는지 그냥 몰래 얼굴만 보고 갈 방법이 없을까. 몇 호실에 입원해 있다는 것만 알면,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타고서라도 창밖에서 몰래 지켜볼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걸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안 될까. 이상한 사람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말을 걸어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을까. 아닌가, 그건 너무 과대망상인가. 그래도, 병실 안에서 혹은 그 앞에서 그의 가족들이 지키고 있을 것은 틀림없었다.
하아, 또 한숨을 내쉬는데 휴대폰 벨이 울렸다. 상민이었다.
“어, 왜.”
-우리 지금 파티 하는데, 놀러 와! 오늘 정말 끝내준다!
휴대폰 너머로 광광 거리는 음악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평소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제가 내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같은 시간인데, 그곳의 사람들은 다들 신나고 재미있게 몸을 흔들고 있을 것이었다. 갑자기, 상민이 아주 미워졌다.
“그런 거 별로야.”
-뭐?!
“시끄럽게 노는 거, 별로라구.”
-너 말이야! 순진한 건 좋은데 너무 고지식해! 놀 땐 좀 놀자고!
그리고 그는 먼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고지식하다고, 그런 주제에 게이인 게 희한하다고, 그런 말을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잘 못 노는 게이,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잖아. 발부리에 걸리는 돌맹이를 툭 걷어차 버렸다. 돌맹이가 걷어차인 게 억울한 듯 떼구르르르 굴러가다가 툭, 툭, 모서리를 돌더니 마침내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멈추었다. 마주 걸어오던 사람은 다행히 그것을 가볍게 넘었다. 서로 어깨를 지나치면서, 나는 문득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나는 얼른 걸음을 빨리했다.
“저기...”
문득 낯익은 얼굴의 사람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낸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여자가 내 등 뒤에서 명확하지 않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겁먹은 동물처럼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반가운 얼굴로 몇 걸음 다가와 섰다.
“맞으시죠? 정해진 씨.”
여자는, 언젠가 출판사 합병 건으로 태인기업 전무실로 찾아갔을 때 보았던 늘씬한 비서였다. 얼굴을 본 건 단 한번뿐인데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대단하다,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써 웃으며 ‘기억력 좋으시네요’하고 웅얼거렸다.
“그때 첫인상도 인상 깊었고... 아, 혹시 전무님 병문안 오신 건가요?”
“아..아니요! 전 그냥 지나가다가...”
“그런가요. 들어가셨다 가시면 좋을 텐데. 저도 지금 전무님 병실에 아무도 없다는 얘기 듣고 이것저것 챙겨 오는 길이거든요.”
예전에 봤을 땐 분명히 아나운서 같은 딱딱한 말투와 인상이었는데, 회사를 벗어나서 그런지 여자는 좀 더 부드럽고 다감한 어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가까운 사람 대하듯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친근한 여자의 태도에 나는 조금 쑥스러웠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저... 전무님 상태는 어떤가요? 많이 다치셨나요?”
“발목뼈가 부러지셨어요. 손목 인대도 늘어나서 지금 수족 모두 깁스를 대고 계시고요.”
“예에...”
“다행히 모두 완치 가능한 부분입니다. 다만 눈가 주위가 조금 찢어졌었는데,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거나 방향이 틀어졌으면 실명 위험까지 갈 뻔 했어요. 낙마 당시 작은 돌맹이가 안구로 튀어 각막에 상처가 난 터라, 지금은 양쪽 눈 모두 안대를 덮고 계시고요.”
여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팔다리에 깁스를 대고 눈에도 하얀 안대를 덮고 있는, 한 마디로 말만 할 수 있는 김태준을 상상해보았다. ‘잔소리 심한 반병신이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들었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어쨌든 고맙다고 인사한 뒤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데 '저기‘하고 여자가 또 나를 붙들었다.
“안대를 덮고 계세요, 양쪽 눈 모두요. 손에도 다리에도 깁스를 대고 계시고...”
“예.”
“알리고 싶지 않으시면, 그냥 잠깐 보고만 가셔도 됩니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또 혼자 중얼거렸는데,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앞장을 섰다. 나는 죄를 고하러 가는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자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자가 12층을 누르는 것을 보며, 문득 ‘정말 그 사람이랑 잤었냐’고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경쾌한 종소리를 내며 열리고, 긴 복도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에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하고 말았다.
“혹시... 아시나요? 저... 그러니까 제가...”
단순히 같은 계열의 출판사 직원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병문안을 유도하는 것은, 이상했다. 거기다 여자는 내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러나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했다. 한 걸음 앞서 걸어가던 비서는 내 갑작스런 질문에 조금 멈칫하다가, 곧 입가에 차분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전무님 굉장히 무서운 거 아세요? 일하실 때요. 유일하게 저희한테 농담이랄까, 웃으면서 얘기 건네실 때가 있는데, 정해진 씨 관련된 일에서였어요. 저희들은 이렇게 개인적인 비서 노릇까지 하느라... 실은 정해진 씨 어머님 요양원 건이나 지금 계시는 아파트 예약 건 같은 것도 모두 제가 처리했어요. 물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건 없지만, 대충 예상만 하고 있던 정도였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아니요. 오히려 고..고맙습니다, 어머니 요양원, 좋은 곳으로 알아봐주셔서요...”
옆으로 비켜선 여자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호랑이 전무님이 웃으면서 내 이야기를 할 때, 더럽다거나 부도덕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느냐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여자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가 먼저 노크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주무시는 것 같은데요. 혼자 들어가시겠어요?”
나는 여자의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건네받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특실이어서 그런지, 흔히 ‘병원’하면 떠오르는 크레졸 냄새도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조심해서 병실 안의 작은 복도를 돌아 들어가자,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있는 그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양손과 한쪽 다리에 깁스를 대고, 얼굴의 절반을 가린 안대를 덮은 김태준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매운 걸 먹은 것처럼 눈이 시큰거렸다.
테이블 위에 서류봉투를 올려두고, 뒤꿈치를 든 채 침대가로 걸어갔다. 깊이 잠들었는지 옅은 숨소리와 함께 환자복에 가려진 가슴팍이 높이 올랐다가 낮게 가라앉는 것을 반복했다. 손끝으로 까칠한 촉감의 환자복을 매만지다보면 들숨을 쉬면서 올라오는 가슴팍이 옷감 아래로 느껴지기도 했다. 날숨과 함께 가슴팍이 가라앉을 때에는, 허공 같은 것이, 허무 같은 것이, 느껴져서 얼른 손을 거두어버렸다.
그래도, 아쉬워서, 까슬한 턱 끝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유난히 수염이 빨리 자라서 하루만 면도를 안 하면 턱이며 코 아래가 금방 푸릇해지곤 했다.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그는 내 얼굴을 고정시킨 채 자신의 까슬한 턱을 비벼대곤 했다.
‘정해진 어린이는 어린이라서 수염이 안나? 그러고 보니, 정말 넌 왜 수염이 안 나지?’
‘나도 수염 나요! 털이 가늘고... 연하고... 좀 느리게 자라서 그렇지.’
‘너도 면도 같은 거 해?’
‘그럼 하지, 안 해요?’
‘그래? 그럼 지금 한번 해 봐라. 보고 싶다.’
‘아직 깨끗하거든요?’
‘안 해? 그럼 거기 털을 밀어버린다. 얼른 해, 실시.’
‘에이씨.’
냉장고 문을 열고 오렌지 주스를 꺼내었다. 캔을 따면서 딸깍 하는 소리가 넓은 병실 안에서 벽과 벽을 치며 오래 울렸다. 멈칫한 채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목이 말라서, 꿀꺽꿀꺽 소리를 내면서 한 자리에서 주스 두 캔을 비워버렸다. 그래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외로 약골인가 보다. 쓰러지기나 하고, 겨우 말에서 떨어졌다고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고. 김태준은 생각보다 약체인 게 틀림없다. 캔을 우그러뜨리며 마음속으로 몰래 그의 흉을 보는데, 문득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
그러나 음성화되지 못한 말이 숨으로만 흘러나왔다. 나는 어느새 그의 가슴 위에 올려둔 내 손바닥을 바라보며 ‘백만 번 산 고양이’를 떠올렸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사는 동안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단 한번 사랑했던 고양이가 죽자 백만 번이나 울다가 따라 죽은, 그래서 다시는 살아나지 않은 고양이. 이번 생은, 몇 번째인 걸까. 당신은 몇 번째 태어난 거지? 나는, 나는 아마도 이번이 그 백만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수야 없지. 그러니까...
“다치지 마. 죽어버릴 거니까.”
조용히 위협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역시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평온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 발꿈치를 든 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의 간이의자에 앉아있던 비서가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는 내 손에 쥔 찌그러진 주스 캔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증거 인멸이요.”
“아...”
“그런데요, 왜 아무도 없죠? 그러니까... 가족들은...”
“그게... 원래는 출산예정일이 아직 멀었는데 오늘 오후부터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셨다고 해서...”
여자는 주어를 빼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복도 저 멀리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얼른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한 떼의 레지던트, 인턴, 간호사, 그리고 외과과장 명찰을 단 중후한 인상의 주치의였다. 그들은 바람처럼 빨리 걸으며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뒤에서 비서가 주치의를 맞는 인사말이 들렸다. 무언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던 주치의가 병실로 들어서려다 말고 ‘참’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건강한 남자 아이라더군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내림 버튼을 꾹, 힘주어 눌렀다. 힐긋 뒤돌아보다가 비서와 얼핏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도 나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 층, 한 층 숫자가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 위의 층수 표시판을 올려다보았다.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에 ‘땡’하고 울리는 알림음이 꼭 ‘틀렸습니다’하고 쳐지는 실로폰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기대어 섰다. 문이 닫히고, 주룩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아버리자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남자가 ‘괜찮아요?’하고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네’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만 했다. 병원을 나올 때까지, 누군가가 계속 머릿속에서 실로폰을 뚱땅대는 소리가 들렸다.
* * *
최 선배는 내가 내민 것을 보더니 입을 헤 벌린 채 내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나는 팀장실에 앉은 그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아 별로 변한 것 없는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기만 했다. 최 선배는 내가 자신의 시선을 피한다고 생각했는지 내 얼굴 앞에서 손 박수를 짝짝 쳤다.
“이게 뭐야?”
“사직서요.”
“왜 이래, 정해진. 이러지 말자.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해진 씨 갑자기 빠지면 편집팀 안 돌아간다, 응?”
최 선배가 울상이 된 얼굴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뒤에서 꽂히는 선희의 시선을 의식하며 손을 슬금 빼내었다. ‘그럼 인원 보충할 때까지만 다닐게요’하고 한 발 물러서니, 그는 오히려 더 바짝 다가와 이번에는 내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어댔다.
“정신 차려. 왜 이러는 거야. 뭐야, 문제가. 왜, 최기정이 계속 귀찮게 해서?”
“선희가 막아주는데요, 뭘.”
“그럼, 혹시 다른 데서 스카우트 제의 들어왔어?”
“웃긴다. 이 바닥에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있어도, 제 짬밥으로 그런 게 들어오나요, 어디.”
“되지!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몇 년짼데! 아니, 그럼 대체 이유가 뭐야, 응?”
“그게...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뭐 그렇다는데요.”
“무슨 소리야.”
“어쨌든 그렇게 알고, 한 달 안에 새 사람 뽑아주세요. 웬만하면 빨리 나갈 수 있게 경력자로요.”
“정해진!”
팀장실 문을 여는 순간 최 선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문을 닫는 나를 쳐다보았다. 선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팔을 붙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뭐야, 혼났어?”
“아니야. 사직서 냈거든.”
“뭐?”
“아, 그리고 조만간 이사도 할 거야. 힘 좋은 네가 꼭 필요하다, 선희야. 짐 날라줘야 돼.”
“뭐야?!”
이번엔 선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 안에서 기정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가 선희가 뒷말로 벽을 쾅 치자, 군소리 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선희는 최 선배가 했듯이 내 손을 붙잡고 설득을 했다가 별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내 어깨를 부여잡고 몸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사직서 제출의 이유를 최 선배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읊었다. 나는 목이 짤짤 흔들리며 똑같은 변명을 했고, 마지막으로 ‘그래도 나갈 거야’를 고수했다.
선희는 제가 땀을 주룩 흔들리며 ‘하아’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깨를 두드리며 나도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정해진. 너 갑자기 변하면 탈난다, 응? 좀 천천히 가라. 따라가기 힘들다.”
“응.”
“어린이답게 대답은 참 잘하지.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서 육하원칙에 따라 상세히 보고해 봐라.”
나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어린이답게 또 ‘응’하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뒤 ‘육하원칙에 따라 상세히 보고’를 했다.
올해 여름 즈음에 ‘이음 동화’라는 신생 아동문학 전문 출판사의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우연히 내가 어머니에게 드린 스케치북을 보고 동화책을 한 번 내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며 거절했었는데, 최근에 문득, 그 엉뚱한 대표의 말처럼 새롭게 한 번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받은 명함을 겨우 찾아내어 전화를 걸었더니, 아주 반가워하더라.
선희가 뽑아준 캔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며 ‘보고’를 마치는데, 선희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그림도 팔려?’하고 물었다. 나는 아그작 캔을 우그러뜨렸다. ‘그런 그림도 팔려’하고 답했더니 돌아오는 건 ‘흥’하는 비웃음이었다.
“그럼 정말 네 이름으로 책... 동화책이 나온다고?”
“아니, 내 이름으로는 안 나와. 필명 쓸 거야.”
“꼴에. 본 건 많아가지고. 그런데 너, 이사 간다는 것도 필명 쓰는 이유랑 같은 거야?”
선희가 속을 꿰뚫어보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얼굴을 드밀었다. 무섭다. 뜨끔해서, 나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언제나처럼 꿀밤을 맞았다. 이마를 문지르며 씩씩 노려보는데, 코앞에 주먹이 왔다갔다했다. 입을 합 다물고 차렷 자세로 잔소리를 기다리는데, 순식간에 선희 눈이 글썽거렸다. 놀라서, 최 선배가 볼까봐, 손부채로 얼굴의 열을 식혀주는데, 친구의 노력도 몰라주고 기어이 주먹으로 배를 쿡 찔렀다.
“아야.”
“정해진. 내가 제일 속상한 게 뭔지 알아? 너한테 이러라고 할 수도 없고, 저러라고 할 수도 없는 거야.”
“응, 알아.”
“알긴 뭘 아냐? 저거 완전 밉상.”
“아, 다들 왜 나더러 자꾸 밉상이래? 왕자병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생긴 건 좀 괜찮은데. 그래도 선희야, 너, 나 도와줘야 된다.”
“뭘.”
“이사 말이야. 짐 날라주는 거.”
“이게 진짜!”
이번엔 등허리를 맞았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선희는 내 짐도 날라주고, 내 동화책도 제 돈 주고 직접 사주고, 이렇게 해도 고개 끄덕여주고 저렇게 해도 고개 끄덕여주리 라는 것을. 그게 바로 내가 선희와 맺은, 속에서부터 끊어낸 무언가를 공유한 사람들끼리 맺은 공동 연합체의 모토였다.
내게 필요한 건, ‘괜찮다’는 말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