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29화 (29/35)

-29-

스물여덟의 아직 추운 초봄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선희가 결혼을 했고, 희철이는 학원가의 스타강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제작진의 실수로 진짜 스타강사 대신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졸지에 연봉이 두 배로 뛰게 되었다. 나는 이사를 했고, 전과 비교하면 조금은 시설이 떨어지는 서울의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모셔왔다. 그리고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옮겨 그려야 했다. 엉터리라고 생각될 만큼 동화책은 빨리 출간되었다. 진행하고 있던 작업이 하나도 없어서 오로지 내 책에만 출판사의 모든 인력을 올인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필명으로 낸 나의 첫 번째 동화책은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쪽 동네도 워낙 이름값을 중시하는 곳이라, 초짜 작가에 초짜 출판사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손 대표는 내게 미안해했고, 나는 그에게 미안해했다. 그리고 나는 ‘다니던 직장까지 관둘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은근슬쩍 하게 되었다. 당분간은 퇴직금과 전에 살던 집의 전세금으로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 드는 돈과 따로 병원에 다니면서 약물치료와 재활치료에 드는 돈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아버지의 사망 보험비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장담하건데, 정해진 씨가 그린 동화책은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이에요. 다만... 제가 못나서 그래요.”

마침 점심때에 맞춰 방문을 해,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손 대표가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또 ‘미안하다’ 타령을 시작했다. 나는 물컵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식탁 위에 단백질이라고는 두부 튀김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고개를 숙이자 두꺼운 수면양말을 신은 내 발이 보여서, 억지로 고개를 들고 밥을 먹으려고 했다.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원래 그리 겸손을 떠는 성격도 아니었다. 게다가 스카우트라면 스카우트였다. 그것도, 경험도 없는 초짜를 상대로 곧바로 출판 제안이 들어왔으니, 당시에는 그저 할 일이 있어 흘려들었지만, 막상 출판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동문학계의 갑작스러운 다크호스로 떠오를 내 필명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손 대표의 안목을, 믿고 싶었다.

“아니에요. 곧 잘 되겠지요, 뭐.”

“저기 그런데...”

덥지도 않은데, 손 대표가 갑자기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숟가락을 놓았다. 흠흠, 목을 가다듬고 의자를 고쳐 앉는 게, 무언가 불편한 말을 할 것이 분명해 보여 나도 긴장한 채 숟가락을 놓았다.

“말씀하세요.”

“저기... 출판사 사정이 많이 안 좋아요. 아, 무..물론 정해진 씨 때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도움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전부터 계속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다른 출판사에서 제작하는 동화책이나 출판물의 외주 작업을 맡기로 했어요. 그... 정해진 씨는 삽화를 맡아주었으면 해요.”

“그건 잘된 일이잖아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아무 일이 없는 것 보다, 우선은 재정형편을 좀 다진 다음에...”

“그게... 요즘 정해진 씨가 새로 작업하고 있는 작품 말이지요... 기획을 맡고 있는 후배가 그러는데요, 그게... 아무래도 좀...”

아,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은 상품성이 없으니 때려치우고 다른 출판물의 족두리 삽화나 맡으라는 얘기였다. 알겠느냐는 듯 손 대표가 얼굴을 쭉 내밀었다. ‘네’하고 대답했더니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꺼내기 어려운 말일 터였다. 기획 단계에서 ‘별로’라는 대답을 듣는 작가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흩어둔 크레파스를 바라보았다. 기운이 쑥 빠졌다.

“문제가 뭘까요? 그건 알고 싶은데요.”

“그... 이번 작품은 뭐랄까, 예전처럼 반짝반짝 거리고 뭔가, 희망이 보일 듯 말 듯한, 그런 아슬아슬하지만 따뜻한, 뭐랄까, 봄볕 아래의 병아리 털 같은, 그런 거요, 그런 게 좀 부족해요.”

“네에...”

“아무래도 우리가 하는 게,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꿈과 희망을 파는 일이잖아요? 이번엔 그런 꿈과 희망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저기, 혹 요즘 좀 피곤하신 건 아닌가요?”

“아니요, 요즘엔 놀고먹고 남는 시간마다 낮잠이나 자서, 피곤한 건 전혀 없는데요.”

“아, 네에... 그러시군요...”

손 대표가 또 어깨를 푹 수그렸다. 나는 얼음물을 따라주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가실래요?’하고 묻자, 그는 마시던 얼음물을 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닦으시라고 티슈를 뽑아주고, 나는 빈 밥공기를 치웠다. 손 대표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그럼 이만’하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의 한 가운데가 듬성듬성 비어있었다. 저 사람도 참 고된 길을 택했구나, 싶어서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해주려는데, 그는 허둥지둥 현관으로 가 신발을 꿰신었다. 뒤따라가 배웅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그 자리에서 바로 ‘누구세요’하고 외치자 밖에서 ‘나’하고 한마디가 들려왔다. 자물쇠를 풀어주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아우, 춥다. 어...”

오들오들 떨면서 현관에 들어서는 상민은 이제 막 나가려던 손 대표를 멀뚱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인사시키는 것도 좀 그래서, 나는 어서 손 대표를 내보내었다. 그는 문을 닫으면서 나와 상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현관문 밖까지 조금 따라 나가서까지 인사를 했다.

“저 영감은 누구야?”

문을 닫자마자 상민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표정이 금방 금방 변하는 건 꼭 누굴 닮았다고 생각했다.

“출판사 대표. 너 말이야, 말 좀 조심해. 영감이 뭐야?”

“뭐 어때. 듣지도 않는데.”

“그리고, 너보다 한참 어른인데 어떻게 인사도 안 하냐?”

“아 거참 말 많네. 그딴 거 관두고 이리 와 봐.”

상민은 내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 도리질을 하더니 또 금방 팔푼이처럼 웃으며 내 팔을 끌어 자기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 곧 입술이 겹쳐졌다. 나는 졸지에 바닥에 미끄러진 채 그의 체중을 받아야 했다. 등에 닿는 딱딱한 바닥이 불편해서 몸부림 쳤지만,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 티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깥의 추운 날씨를 그대로 알리듯 그의 차가운 손바닥이 소름을 돋게 했다.

“아... 차가워, 잠깐만.”

“괜찮아.”

냉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역시 상관하지 않고, 이번에는 아예 티셔츠를 돌돌 말아 가슴팍이 보이도록 위로 올렸다. 추위 때문에 딱딱하게 선 유두에 그의 까끌까끌한 혓바닥이 와 닿았다. 상민은, 곧잘 여자의 가슴을 빠는 것처럼 내 가슴을 희롱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가끔은 아플 만큼 앞니로 유두를 물고 잡아당기기도 했다. 싫었다.

“하..하지 마, 싫어.”

“알았어, 나만 하게 해줘.”

밑에서 철컥, 하고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겁을 먹고 내빼려고 하자 그가 얼른 일어나서 자신의 바지만 벗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바닥에 누워버렸다.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아래로 내린 상민은 한참 전부터 서 있었던 것 같은 자신의 페니스를 직접 애무했다. 고개를 내려, 또 한 번 입술이 겹쳐졌다. 혀를 집어넣으면서, 그가 한쪽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밑으로 내렸다. 단단한 페니스가 그의 손과 함께 겹쳐 잡혔다.

“아아... 소리 좀 내봐, 흥이라도 돋워야 할 거 아냐.. 흐읏...”

“하....”

나는 그냥 한숨소리만 내버렸다. 그에 골이 났는지 그는 갑자기 내 벗은 상체에 올라탄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맨살에 와 닿는 그의 하체가 그리 에로틱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멍청하니 흥분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그런 내 얼굴을 쓰다듬다가 입속으로 제 손가락을 불쑥 집어넣었다. 이런 거라도 해주자 싶어, 그나마 정성껏 손가락을 핥아주었다. 그는 높은 신음을 질렀다. 현관문 근처라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소리 좀 죽여, 밖에서 들리겠어.”

“아, 아아..! 무슨 상관..이야, 으읏..!”

그리고 그는 몸을 비틀면서 사정했다. 내 배와 가슴, 그리고 얼굴까지 그의 정액이 튀었다. 그는 눈을 찡그리며 깔깔 웃어댔다. 나는 씩씩거리며 그를 밀치고 일어나 티슈를 뽑아 닦았다.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데, 갑자기 그가 뒤에서 몸을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내 바지 위로, 그의 손이 사타구니를 훑었다. 나는, 젖기는커녕 서지도 않았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불쾌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또 배를 잡고 뒹굴었다.

“너 혹시 불감증, 그런 거 아냐?”

“아니야.”

“그럼 너... 처녀 아니란 거, 뻥이지?”

“보통 자기 애인한테 처녀라는 게 뻥 아니냐는 말을 하지, 처녀 아닌 게 뻥 아니냐고 묻지는 않아. 그리고 처녀라는 말 사용하지 마. 난 여자 아니야.”

“흥. 어쨌든 내 생각엔 너 분명히 불감증 아니면 처녀야. 그래도 너, 애인 잘 만난 줄 알아. 나정도 되니까 싫다, 한 마디 하면 바로 떨어지지 딴 놈들 같았음 벌써 깔았어.”

“그런 말 하지 말랬어. 됐어, 밥이나 먹어. 안 먹었지?”

더는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끌기 싫어 얼른 밥공기에 가득 밥을 퍼주었다. 상민은 여전히 눈을 휜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반찬 투정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열심히 밥을 먹었다. 물을 따라주자, 그것을 보며 또 눈을 휘었다. 무언가 챙겨주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가족사에 대해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물어보았던 적도, 그래서 이야기를 들었던 적도 없지만, 나는 어렴풋이 그가 그리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

“근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지금 잠자는 시간 아냐?”

“그냥 빨리 일어났어. 너 보고 싶어서. 기분 좋지?”

“응.”

“넌 솔직해서 좋아.”

그가 또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잘 웃어서 좋아, 뭐든 가볍게 생각해서 좋아. 상민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덜어주었는데도 순식간에 밥을 해치우곤 배를 두드렸다. 빈 반찬그릇과 밥공기를 들고 일어서는데, 그가 먼저 후딱 일어나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팔을 걷고 제가 먹은 그릇과 내 것, 그리고 손 대표가 먹은 밥공기까지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혼자 시키기엔 미안해서 옆에 서서 그가 씻은 그릇을 마른 행주로 닦는데, 그가 또 씩 웃었다.

“결혼할래?”

그릇을 깰 뻔 했다. 나는 들고 있던 그릇을 마저 닦고 찬장 안에 넣어두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뭐?”

“난 너 같은 애랑 결혼하고 싶어. 딱이야, 결혼상대로는.”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선 동성 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지 않거든?”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영국... 많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어 있는 나라는. 골라, 그런 나라 중에 한 군데로 가서 결혼해 버리지 뭐.”

피식, 웃음이 났다. 대꾸하지 않자 상민은 엉덩이로 내 엉덩이를 툭 건드리며 ‘응?’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도 계속 실없이 웃는 나를 따라서 키들거리며 웃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런 질문도 또 난생 처음이라서, 나는 그저 ‘엉뚱하긴’하고 대답을 회피해버렸다. 뭐가 웃긴지, 그는 허리를 젖히며 깔깔 웃어댔다.

“그래도 말이야, 진심이야. 너랑 결혼하고 싶은 거.”

“....응, 고마워.”

고작 그게 전부냐며 타박할 줄 알았는데, 그는 또 한 번 엉덩이를 툭 치며 혼자 웃었다. 이번에는 나도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 그를 툭 건드렸다. 이 정도면, 괜찮은가. 괜찮은 것 같았다.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거실의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흩트려 놓은 크레파스를 치우고 있는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움직인 게 피곤했는지, 상민이 소파에 털썩 앉은 채 눈을 감고 기대어 누웠다. 최대한 조용히 정리를 하는데, 문득 얕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상민이 고개가 꺾인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 똑바로 눕게 했다. 으응, 하고 잠투정을 부리는 게, 조금 귀여워서 볼을 툭툭 건드려주었더니 잠결에도 입가가 휘었다. 이불을 가슴까지 엎어주는데, 문득 그의 눈가가 발갛게 부풀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다시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왜에...”

“너, 왜 이래?”

“뭐가.”

처음 들어올 때에도 눈가가 발갛게 젖어 있었지만, 바깥이 추워서 잠시 그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누군가와 싸운 후의 상흔처럼 보이진 않았고, 피부 안쪽에서 발갛게 부풀어 오른 게 꼭, 심한 독감에 걸렸을 때 몸 안의 열 때문에 생긴 붉은 열꽃 같았다.

“눈가가 발개. 어디 아파?”

“응? 아...아니야. 그냥 추워서 그래.”

감기기운이 있는 걸까. 나는 얼른 침실로 뛰어가 이불 한 채를 더 가지고 나와 덮어주었다. 그는 숨이 막힌다고 과장되게 콜록거리면서도, 계속 웃고 있었다.

*   *   *

일주일 동안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던 선희가 돌아왔다. 새색시가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내 집에서 모이기로 한 금요일 저녁, 선희는 여전히 술을 양손 가득 들고 현관문을 발로 찼다. 그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양손의 술이 소주나 맥주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사온 와인이라는 것이었다.

희철은 치킨을 사왔고, 기정은 과자와 마른안주를 담당했다. 나는, 어차피 지저분해질 집이지만 우선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선희의 결혼과 내 동화책의 출판 일정이 겹쳐져 상당히 오랫동안 모이지 못한 터라, 다들 얼굴을 보자마자 얼싸 껴안기까지 했다. 거기다 나는 이미 두어 달 전에 출판사까지 관둔 상태여서 그런지 모처럼 친근한 분위기에 주책없게 눈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다들 그런 나를 보며 한 마디씩 했다.

“지랄을 해라.”

“주책바가지, 어린이 졸업하고 이젠 아줌마냐?”

“선배는 참 감수성도 풍부해요.”

외로웠나 보다, 하고 문득 대답하자 셋이 일제히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머쓱해하며 테이블 위에 각자가 사온 술과 안주거리를 펼쳐놓았다. 앉아, 앉아, 하고 손짓을 하자 다들 ‘아구구구, 다리야’ 엄살을 떨며 다리를 뻗어 앉았다. 한 살 더 먹은 티를 내는구나,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읏차’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기지도 못할 술을 한잔, 두잔, 마시면서 이젠 늙었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서러워져 또 혼자 훌쩍훌쩍 울었다.

“이 자식이 오늘따라 왜 이래.”

“그냥, 막 서럽다. 우리, 벌써 스물여덟이다. 뭐 해놓은 거 하나도 없는데, 나이만 먹은 것 같다. 씨이...”

“나는 빼줘. 난 결혼이라도 골인했잖니.”

“배신자.”

희철이 이를 바득 갈며 닭다리를 선희를 향해 던졌다. 둘이 투덕거리고 있는데, 기정이 한쪽 구석에서 무릎 위에 고개를 박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부스스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까요, 저도 뭐 해놓은 거 하나 없이 벌써 스물일곱인 거 있죠.”

“......”

“저걸 죽여, 살려.”

“말을 해서 뭐해. 죽이자.”

그래서 우리는 기정을 한쪽 구석에 몰아넣고, 밟았다.

“그래도 넌 네 이름... 아니, 필명으로라도 이 세상에 책 한 권은 냈잖냐.”

널브러져있는 기정을 내버려둔 채 우리는 오징어 다리를 씹었다. 그러다 문득 희철이 한숨을 쉬며 내 동화책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별로 뜨지도 않은 책인데 무슨 영광이 있냐고 맞받아쳤다. 그래도 보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희철은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가. 나는 문득 희철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첫사랑은 실패했고, 가장 친한 친구라는 놈은 호모에다, 평생직으로는 잘 인식이 되지 않는 학원 강사. 나는 희철에게 마지막 닭다리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넌 티비에 나온 적도 있잖아.”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제작진의 실수로?”

“...그래도 뭐... 결국 나온 게 중요하지.”

“그럼! 역사는 결과에 의해 채택된다 이거야!”

선희는 어느새 와인 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고 있었다. 희철이와 나는 그런 선희를 보며 최 선배가 참 불쌍하다고, 모처럼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선희가 버럭 소리를 질러서 얼른 기정을 일으켜 세워 노래나 해보라고 부추겼다. 기정은 더 맞기 싫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춤까지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여자가수의 노래였다. 꽤 농밀한 가사와 섹시한 춤이 포인트였던 터라, 그것을 소화해 내는 기정을 보며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칭찬해주면 더 열심히 하는 최기정은, 한 곡 더 뽑기도 했다.

문득, 6개월여 전 즈음의 밤이 떠올랐다. 쭈쭈바를 물며 걸어가다 죽은 매미를 걷어차고, 역시 쭈쭈바를 문 세 명을 아파트 현관 앞에서 만나 데리고 들어가서 밤새 먹고 마시고, 코미디 영화와 호러 영화를 번갈아 보던 늦여름의 밤. 그리고 맥주를 사러 나갔던 길에서 만났던 성 추행범까지. 계획된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뻔뻔한 남자가, 문득 떠올랐다. 겨우 반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벌써 6년은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근데 넌 그 놈이랑 잘 사귀냐?”

소파에 누워 다리를 뻗던 희철이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엔 선희가 ‘연하 사귀니까 좋냐?’하고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멍청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이 주방으로 가서 얼음을 꺼내어 아작아작 씹어댔다. 그런 기정을 보며 선희가 들으란 듯 더 큰 목소리로 ‘연하는 힘도 좋지?’하고 물었다. 몰라,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자 기정이 얼른 뛰어와 옆에 바짝 앉았다.

“뭐야, 안 하냐?”

“어우, 저거 아줌마 됐다고 이젠 아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우, 어우, 징그러워.”

“문희철은 닥쳐. 좋아하고 연애하고 사귀면 당연한 순서지 뭘 그래. 정해진, 말해봐. 나는 네가 순진한 얼굴로 얼마나 무시무시한 걸 하는지 다 알고 있다. 이실직고 해보렴.”

“그게... 좀 조심하고 있어. 임신 안 한다고, 처녀성 같은 거 없다고 막 하는 거, 좀 그래 나는. 그... 예전에도 처음 할 때까지 좀 오래 걸렸었고. 걔도 내가 싫다 그럼 억지로는 안 하고.”

“걔는 동의해? 참아?”

“아니 뭐... 적당히, 방법을 달리 해서 하긴 하지만...”

선희는 누가 딱하다는 건지 쯧쯧 혀를 찼고, 희철과 기정은 무얼 상상하는지 얼굴이 발개진 채 서로를 안고 뒹굴었다. 그러다 곧 서로를 확인하고는 확 밀쳐내곤 옷을 털어냈다. 나는, 둘 다 아직 총각 딱지를 떼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하긴, 나는 정해진이 어떻게 혼자 외로움을 견디는지 알지.”

선희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희철과 기정이 ‘어떻게?’하고 물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언젠가 택배로 온 내 바이브레이터를 선희가 뜯어본 것을 기억해냈다. 이번엔 내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몸을 둥글게 말고 혼자 뒹굴었다. 선희가 악당처럼 웃었다. 아직도 있냐? 하는 물음에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지만 사용한 적은 없어.”

“거짓말. 걔랑 끝까지 하지도 않는다며, 그런데 혼자서도 안 해?”

“혼자서는 해도, 그걸 사용한 적은 없단 말이야.”

“거어짓마알.”

“진짠데!”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났을까. 아마도 술기운이었을 것이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것을 박스 채로 가지고 나왔다. 선희가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희철과 기정은 ‘그게 뭔데?’하고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용감하게, 바이브레이터를 꺼내어 작동 버튼까지 눌러주었다. 진동과 함께 회전까지 하는 것을 보며, 희철과 기정은 기겁을 하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나는 그것을 마치 성화처럼 한 손에 쥔 채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희철과 기정은 서로를 더욱 꽉 껴안았다.

*   *   *

상민이 저녁부터 일을 하다 보니,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일을 나가기 전에 내 집에 잠시 들르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저녁에 그가 일하는 바(bar)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희철이나 기정은 내게 짝을 지어주는 임무를 모두 완수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더 이상 함께 오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혼자 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하고 불안했다. 상민은 그런 나를 보며 촌스럽다고 놀렸지만, 어쩐지 게이바 특유의 화려하지만 음울한 분위기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 언니 오늘 온다고 했었어?”

“아직 오픈 전이잖아요. 잠시 얼굴만 보러 왔어요.”

문을 열자마자 눈이 마주친, 언제나 내게 ‘언니’라고 부르지만 나야말로 그의 주민등록증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바텐더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걸었다. 특별히 상민이 부르지 않는 이상 스스로 바에 왔던 것은 몇 번 되지도 않았지만, 올 때마다 항상 그에게 먼저 전화나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너무 바쁘거나 파티 같은 시끄러운 행사가 있을 때면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꾀를 낸 것이, 영업시간 전에 잠시 들렀다가 손님이 들어오고 북적거리기 시작하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당연히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상민을 찾는 척을 하자 그 ‘언니’가 글라스를 닦으며 ‘여기 없는데’하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어디 갔냐고 묻기도 전에 ‘화장실 청소’하고 말했다. 고맙다고 인사한 뒤 홀을 건너 화장실 쪽으로 가려는데 ‘언니’가 다시 불러 세웠다.

“갈 거야? 화장실?”

“예. 왜... 청소해요?”

“아니, 뭐 그건 아닌데...”

여성스러운 어투로 말끝을 끌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는 게 왠지 우스꽝스러워서, 고개를 돌려 몰래 웃었다. 그리고 별 문제가 되진 않는다는 말 같으니, 그대로 화장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화장실 표시판의 캐릭터 다리 사이에 기다란 막대기를 그려놓은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나오려던 사람도 들어가려던 나도, 한 걸음씩 뒤로 주춤했다가 눈이 마주쳐 멍청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어 명이 더 뒤따라 나왔다. 모두들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실없이 웃었다. 거참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구나,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서니 상민이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고 있었다.

“세수 안 했어?”

“...! 아, 놀랐다. 왔어?”

찬물로 씻었는지 발간 얼굴로 상민이 웃으며 반겼다. 그리고 두어 번 더 목과 얼굴을 적신 후 무언가를 찾는 듯 허둥거렸다. 뭘 찾냐고 묻자 ‘수건’하고 답하고 또 이리저리 눈길을 돌렸다.

“너 바로 뒤에 걸려있네.”

“아. 나 멍청한가봐. 이리와 봐, 네가 닦아줘.”

가끔 무언가를 해달라고 조를 때마다, 나는 그가 확실히 연하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 이건 또 이것대로 재미있구나, 생각하며 나는 ‘축 어린이 졸업’의 휘장을 떠올리곤 했다.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목을 꼼꼼히 닦아주는데, 상민이 갑자기 허리를 당겨 껴안았다. 그리고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좋다아’하고 중얼거렸다.

“나, 정말 너랑 결혼하고 싶다.”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영국... 어쩌고 하는 나라들, 전부 물가 엄청 비싼 나라거든? 가고 싶으면 우선 돈이나 열심히 벌자, 응?”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엉덩이를 두드려주자,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키들거렸다. 가만히 내버려두는데, 한참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떼어내려고 하면 더 바짝 당겨 안았다. 예전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라도 고유의 얼굴이 있고, 그 중에서도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쁘고 멋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방긋방긋 웃고 다니면 미움을 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왜 그래?”

“크..크큭...뭐가? 히..힉..”

그런데, 나는 가끔 그가 웃을 때 문득 무섬증이 일곤 했다. 그치지 않는 그 웃음이, 두려웠다.

“계속 웃고 있잖아. 숨도 안 차? 그만 좀 웃어.”

“크크... 뭐...하아.. 기분이 좋아서 그래서..흐흣...킥..”

나는 억지로 몸을 떼어내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고정시킨 뒤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여기, 왜 이래? 아픈 거 아냐?”

“아니야, 좋아서 그래.”

그가 웃으며 입을 맞춰왔다. 나는 벽에 밀려 그가 자신의 바지 지퍼를 열고 그 속으로 내 손을 집어넣는 것을 얌전히 따라야 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점퍼와 티셔츠를 한꺼번에 밀어 올렸다. 드러나 가슴위로 그가 이를 세웠다.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곧장 홀을 지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뒤에서 ‘언니’가 ‘안녕, 자기’하고 여성스런 목소리로 꾸며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만 힐긋 돌린 채 까딱 고개를 숙인 뒤 문을 열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아파.”

상민이 물어뜯은 유두 부근이 옷깃에 스칠 때마다 화끈 아파왔다. 약을 발라야할까. 수치스러웠다. 아주 독한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바의 입구를 한껏 노려본 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드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손 대표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때는 백발백중 출판사가 어렵다느니, 자기 능력이 모자라 내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느니, 하는 넋두리만 늘어놓을 게 뻔했다. 그냥 끊어버리려다가, 종로에서 맞은 뺨 한강에서 풀어보자 싶어 씩씩거리며 ‘네, 또 어쩐 일이세요’하고 쌀쌀맞게 전화를 받았다.

-저어기... 그게...

“여기요, 말씀하세요.”

-예, 저기... 오늘까지 보내주시기로 한 삽화물이요...

“그거 어제 택배로 보냈는데요. 오늘 도착했을 텐데, 아직인가요? 그럼 제가 한번 송장조회 해볼게요.”

-아..아니요, 그건 오늘 도착했습니다. 잘 받았어요. 이번에도 역시 참 색감이 좋았어요. 단순한 그림이지만, 그런 족두리 삽화로 넣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지 뭡니까.

이번엔 넋두리의 방법이 좀 바뀌었나. 어리둥절해 하며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받느라 약사의 인사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동안에도 그는 내 그림의 어떤 부분이 자신을 감동시켰는지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모 기업의 사내(社內) 잡지 한 귀퉁이에 아주 작게 실리는, 눈에 띄지도 않는 삽화였다.

“상처 난 곳에 바르는 연고하고 반창고 주세요. 아, 비타민제 한 통도.”

-예? 뭐라고...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하실 말씀 하세요. 계속 말 돌리지 않으셔도 돼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그게... 정해진 씨,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가... 태인 문학이라고 했지요?

“...예, 그런데요.”

-말씀 드렸다시피, 우리 이음동화가 참... 어렵잖아요, 그래서 여기저기 외주도 받고...

“예.”

약사가 연고와 반창고, 비타민제를 모아 봉지에 넣어 건네주었다. 아차, 하고 나는 한쪽 어깨와 얼굴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로 지갑을 찾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손 대표는 계속 ‘저기’와 ‘그게’를 찾았다.

-참 어려워서요... 도저히 우리 힘만으로는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요?”

-그런데... 마침 합병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게... 참 다행히 태인 문학이 아니라... 태인 기업 측에서 직접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고...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떨어뜨린 건 휴대폰인데, 이상하게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갑 안의 동전들이 모두 떨어진 채 바닥에 파편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주우려는데, 휴대폰도 동전도 모두 주우려고 몸을 숙이는데, 옷깃에 스친 가슴이 화끈 아파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