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30화 (30/35)

-30-

늦은 밤에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나 불길하다.

출퇴근할 필요가 없으니 생활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졌다. 전화가 온 것은 늦은 저녁을 먹고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며 케이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중이었다. 갑작스레 울리는 벨소리에 커피를 조금 흘렸다. 옷을 닦으면서 벨소리를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선뜻 수화기를 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가장 불길한 뉴스는,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끊겨라, 끊겨라.”

나는 그것이 잘못 걸려온 전화이길 바랬다. 주문을 외우는 동안, 정말 전화벨이 갑자기 뚝 끊겼다.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기정이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폴더를 열고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휴대폰으로 하지 왜’하고 타박을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울먹임이었다.

“왜, 무슨 일인데?”

-우우... 해진이 형... 저 쫓겨났어요.

“뭐? 어디에서... 집에서? 왜, 무슨 일 저질렀어?”

-아니요... 저, 희철이 형님 원룸에서... 팬티만 입고... 흑, 지갑도 안에 있고... 휴대폰만 겨우 들고 나왔는데... 우우우... 맞기도 했고요...

“대체 무슨 소리야... 하여튼 희철이 집 앞이란 얘기지? 기다려, 갈게.”

혹시 장난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목소리도 떨리는 데다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아마 싸운 것 같은데, 희철이가 애를 잡아도 단단히 잡았다는 판단이 섰다. 선희가 결혼을 하고, 나는 주로 저녁에 작업을 하거나 상민을 만나다 보니, 남은 둘이서 자주 만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전히 ‘형님, 형님’하며 희철이를 마치 곰 신(神)처럼 모시는 기정과 그런 녀석을 귀찮아하면서도 심심할 때마다 찾는 희철이었다. 희철이라면 몰라도 기정의 성격을 고려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었다.

불난 집 구경을 하러가는 아줌마처럼 속도를 밟았다. 희철이 사는 원룸 아파트 앞에 주차를 시키고 내려서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기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난친 거였나, 생각하며 휴대폰으로 기정의 번호를 찍는데, 뒤에서 ‘형’하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자, 주차된 트럭 뒤에서 기정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이리 나오라고 손짓하자, 기정이 커다란 덩치로 고양이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주춤 다가왔다. 그런데 꼴이...

“꼴이 그게 뭐야?”

“패..팬티만 입고 쫓겨났다고 했잖아요...”

대답을 하며 또 서러운지 울먹이는 기정을 나는 얼른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어주었다. 아직 날씨도 추운데, 아무리 덜떨어진 최기정이 뭔가를 잘못했더라도 속옷만 입힌 채 내쫓다니. 거기다 얼굴 이곳저곳이 울긋불긋한 게, 두드려 맞은 게 틀림없었다. 발갛게 열이 오른 피부로 오들오들 떠는 기정을 보며 나는 울컥 화가 치솟았다. 가자, 하고 기정의 손목을 붙잡고 무작정 3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아무도 마주친 사람이 없었다.

벨을 눌러도, 당연히 반응이 없었다. 주먹으로 문을 쾅쾅 내리치자 안에서 ‘꺼져!’하고 희철이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팔로 제 몸을 감싸고 앉은 기정에게 재킷을 벗어주고 나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나야! 문 열어, 인마!”

잠시 후 현관문의 도어뷰 렌즈가 안쪽에서 까맣게 변했다.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앉아있는 기정에게 일어나지 말라고 손으로 표시한 뒤 렌즈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드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곧바로 기정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희철이 냉큼 문을 안으로 잡아당겼다. 나도 기정을 도와 문을 밖으로 당겼다.

“이...배신자!”

“야! 우선은 옷이라도 입혀야 할 거 아냐! 좀 열어! 옷만! 안에 못 들어가게 하고 현관에서 옷만 입히자!”

“혀..형님... 추워요...”

“닥쳐!”

희철이 기정을 향해 곰처럼 포효했다. 하지만, 문희철이 아무리 곰이라고 해도, 정해진이 아무리 미발달 체형이라 해도, 강원도 산골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장작을 패고 할머니와 함께 맨손으로 감자를 캐던 최기정의 힘으로 문을 점점 더 많이 열리게 되었다. 결국 희철은 갑자기 힘을 확 빼버렸다. 기정과 나는 졸지에 뒤로 나뒹굴게 되었다. 그나마 나는 기정이 등을 감싸안아줘서 다치지는 않았다. 희철이 그런 우리를 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척 올려보였다.

“괜찮아? 얼른 들어가자. 저 문은 또 언제 닫힐지 몰라.”

“예에...”

기정의 등을 털어주며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희철이 정말 ‘현관에서 옷 입어!’하고 기정의 옷을 던져주었다. ‘할 수 없다’하고 혼자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술 냄새가 확 끼쳤다. 혼자 마신 것 치고는 꽤 많은 맥주병이 비어 있었다. 아마도 술 마시다 싸웠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한쪽 구석의 찌그러져 있는 모양새가, 수상쩍었다. 다가가 어깨를 흔드니, 눈가가 조금 붉었다.

“뭐야, 너... 설마, 우..울었냐?”

“씨발, 아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우선 기정에게 차키를 주고 들어가 있으라고 일렀다. 기정이 등 돌리고 앉은 희철을 한번 바라보곤 어울리지 않게 훅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쓰러진 술병을 한쪽으로 치우고, 흩어진 안주도 쓰레기봉투에 모아 담았다. 그동안에도 희철은 간간히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충 집안 정리를 마치고, 나는 녀석의 등을 툭툭 걷어찼다.

“왜 그러는데. 싸웠어?”

“......”

“말 안 해? 나 간다.”

“....시..심심해서, 그냥 시간 되는 놈이 저 놈밖에 없어서, 불러서 같이 낮술이나 했는데...”

주말 오후, 할 일 없고 애인도 없는 두 녀석이 같이 낮술을 마셨는데, 필름이 끊겼다고 한다. 나는 내가 치운 술병을 세어봤다. 아무리 술이 센 녀석들이라 해도, 끊길 만 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런 상태에서 둘이 무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어렴풋이 둘이 동시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마어마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는데, 둘 다 아랫도리를 홀딱 벗은 채 서로의 다리가 꼬인 채 누워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면 그냥 보일러를 너무 빵빵하게 켜놓은 채 잠이 들어 잠결에 벗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둘의 하체 가득 누구의 것일지 모를, 그러나 양으로 치자면 둘 모두의 것이리라 짐작되는, 끈끈하고 우윳빛의 불투명의 점액질, 정액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씨발... 야, 해진아, 나 이제 호모 되는 거냐?”

“......어디까지 했는지, 둘 다 정말 아무 것도 기억 안나?”

“나..나는 그냥 모..몽정인 줄 알았고... 최기정이 새끼는 개 패듯 패 봐도 아무 것도 안 나오는 거 보면, 그 새끼도 완전히 필름 끊겼던 것 같고...”

나는 문득, 둘이 만약에, 정말 만약에 했다면, A부터 Z까지 했다면, 과연 바텀은 누구였을까를 상상해보았다. ......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취향의 세계란 다양하고, 상민이 일하는 게이바를 드나들며 외적으로 탑과 바텀의 경계가 확연한 커플들은 오히려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 지금 뭘 상상하는 거냐.”

“......”

“씨발, 이상한 상상 하지 마! 혹 몰라서 또..똥구멍 검사까지 해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럼... 기정이가?”

“이게 진짜! 그 새끼한테도 물어봤어. 또..똥구멍 괜찮냐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도 몰라, 그 새끼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희철은 문전박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내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재빨리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키곤 ‘어떻게 생각해?’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치우지 않은 새우깡을 하나 주워 먹으며 ‘아니야’하고 고개를 저었다. 단답형 대답에, 희철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뭘’하고 또 물었다.

“호모, 아니라고.”

“저..정말? 진짜? 어..어떻게 알아?”

“그전에. 너, 내가 호모 바이러스 같은 거 옮긴다고 생각한 적 있지?”

“그..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바본 줄 아냐? 나 이래봬도 과학적인 인간이야!”

“....어쨌든 아니야, 호모. 그냥 너나 기정이나 둘 다 오랫동안 쌓였던 게 술 마시고 달아올라서 그랬을 거야. 그냥 옷 벗고 비비다가 서로 체온이 따뜻하니까 같이 엉켰을 테고.”

“지..진짜지?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호모들은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 동족 냄새. 근데 너나 기정이한테선 호모 냄새가 안 나.”

“정말? 진짜지? 확실하지? 응?”

“....그래, 참 과학적인 인간아. 그러니까 얼른 애인 만들어. 아니면 쌓이기 전에 미리미리 오른손을 빌려서라도 처리를 하든가.”

나는 희철의 머리를 쥐어박고 재킷을 걸치고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희철이 쪼르르 따라 나와서 ‘미안’하고 중얼거렸다. 별로 네가 미안해할 건 없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 이제는 기정에게 뻥을 칠 계략을 세웠다. 하긴, 기정에게는 희철이보다 더 잘 먹혀들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호모 바이러스든 호모 냄새든, 무엇이든.

창문을 똑똑 두드리자, 멍하니 앉아있던 기정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바로 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앉자, 히터도 틀어놓지 않았는지 입김이 폴폴 났다. 너도 참 미련한 성격이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어... 희철 형님은 좀 괜찮으세요?”

“응. 넌, 몸 괜찮아?”

“예, 저야 뭐...”

“있잖아. 상황 설명은 희철이한테 다 들었어. 너한테도 확실하게 듣고 싶은데, 정말 기억나는 거나... 그... 뭔가 엉덩이 쪽이 아프다거나...한 거 없어?”

남은 기껏 곤란한 질문으로 혼자 얼굴이 발개져 말을 더듬는데, 기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엉덩이요?’하고 제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리곤 ‘엉덩이 괜찮은데요’하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정아. 게이나 호모가 뭔지 알아?”

“네. 남자하고 남자가 좋아하는 거요.”

명쾌한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대자, 기정은 뭣도 모른 채 헤헤 따라 웃었다. 한참을 웃다보니,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나는 기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면이 좋았다. 단순하고 명쾌하고, 가볍고 순수하고, 맑은 시선. 남자와 남자가 좋아하는 것.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가 되는 것을. 이렇게 순수하게도 이해가 되는 것을, 왜 사람들은 꼭 애널 섹스를 떠올리는 것일까.

“기정아, 너 그런 거 아니야. 게이, 호모, 동성애자. 아니야. 다만 술이 올라서, 몸도 달아올라서 쌓인 걸 무의식중에 푼 것뿐이야. 그러니까 겁먹지 마.”

“저... 겁 안 먹었어요. 다만 저는... 희철이 형님이 너무 화내시니까...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고... 또 그렇다 해도, 그게 왜 나쁜 건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실은... 저도 게이나 호모, 그런 걸 수도 있다 싶은데요. 저는 해진이 형도 좋아하고 희철이 형님도 좋아하고, 두 분 다 남잔데, 그러면 저도 게이 아니에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손 대표처럼 ‘그게’와 ‘저기’를 찾아댔다. 기정은 대답을 바란다는 눈빛으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세상 사람들이 모두 최기정처럼 단순하고 맑은 시선을 갖게 된다면,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가끔은 호모를 설명할 때 애널 섹스를 예로 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모는 그냥 남자하고 남자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 좋아하는 걸 넘어서서...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것 보면 화나고,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상상하면 슬프고, 나하고만 있었으면 좋겠고... 그게 안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고, 그래도 죽어버리는 건 너무 하니까, 죽기 싫어서... 떠나고... 그러는 건데, 기정아, 그런 걸 사람들은 왜 호모라고 부를까?”

“...그럼 세상 사람들은 다 호모네요?”

기정이 콘솔박스에서 티슈를 꺼내어 몇 장 뽑아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코를 팽 풀고, 멍청하게 웃었다. 기정은 여전히 자신이 호모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기정에게 도저히 애널 섹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어서 ‘어쨌든 너는 아니다’하고 못을 박아버렸다.

아무래도 감기기운이 도는 기정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각이라면, 상민이었다. 어차피 다 왔으니 헤드셋도 끼지 않고 그대로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뭐 해?

“꼴통 친구들 상담해주고 오는 길.”

천천히 차를 몰며 주차할 구석을 찾는데,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온통 차들로 꽉꽉 차 있었다.

-뭐야, 이렇게 늦게? 너, 미리 경고하는데 행여 딴 놈 만나고 다닐 생각은 하지도 마. 나는 내 꺼, 때 타는 거 싫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어. 물건 취급, 여자 취급, 질색이라고 몇 번을 말해? 나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

할 수 없이 지하로 내려가야 하나, 핸들을 꺾고 지하 주차장 입구로 향하는데 아까부터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에쿠스가 멈추어 섰다. 내가 그냥 지나친 주차 공간이 있었나 보다. 아깝다. ‘아이씨’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상민이 ‘지금 나한테 욕했어?’하고 목소리를 깔았다.

“아니야. 너 말고, 뒤따라오던 얌체 차가.... 아악!”

쾅! 하고 차체가 흔들리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무언가 뒤를 박은 것이었다. 당연히, 에쿠스였다. 휴대폰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던 차가 앞으로 밀리기까지 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뒤에서 계속 미는 힘 때문에 주춤주춤 계속 밀리기만 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뒷목을 붙잡았다. 안전벨트를 아직 풀지 않아 그나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속도를 내서 의도적으로 박은 게 분명한 에쿠스 덕분에 이마가 반으로 갈라질 뻔 했던 것이다.

지하까지 차체의 앞이 닿자, 그제야 뒤차도 속도를 줄여 세웠다. 완전히 선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안전벨트를 푸르고 뒷목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이런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더럽게 비싼 에쿠스 리무진을 몰고 다니시는 사장님은 대체 어떤 정신병을 앓고 계시기에 중고 똥차를 막 들이박으시나, 아주 왕창 뜯어내주마, 하는 생각으로 눈을 부릅뜬 채 씩씩하게 걸었다. 마침 뒤차에서도 문이 열리고, 남자가 느릿한 동작으로 차에서 내렸다.

“......”

씩씩하게 걷다말고, 멈춰서 버렸다. 다리가 그냥, 스톱 버튼을 누른 것처럼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아주 여유로운 걸음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불량스럽게 다가왔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마자 남자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데, 팔이 잡혔다.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저, 아주 냉정하고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 본 적이 없다.

“제가 석 달 전에 종마를 타고 거친 들판을 달리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똑 부러졌거든요. 이상하게, 똑 부러진 다리는 잘 붙었는데 그냥 인대만 늘어난 손목은 어째 아직도 가끔 욱신거리고 아픕니다. 그러다보니까 이런 실수도 저질렀습니다만, 어떻게, 보험회사 부르시겠습니까?”

“......”

눈가가 찢어졌다더니, 어두워서 그런지 우선은 상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인상이 무서운데, 눈가에 상처까지 남으면 야쿠자도 ‘형님’하고 무릎을 꿇을 게 뻔했다. 안구에 튄 돌맹이 때문에 각막에 상처가 났다더니, 눈동자도 아직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대답을 안 하시네. 응? 어떻게 처리할까? 정해진 씨. 아니, 정희선 씨라고 불러야 되나? 그건 그렇고 대체 정희선이 뭐야, 김희선도 아니고. 자기 이름 여자 같다고 만날 개명할까 고민했던 주제에 겨우 필명으로 선택한 게 정희선이야?”

“......”

필명으로 무얼 쓸까 고민할 때, 희철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정해진과 문희철과 강선희, 세 명의 이름 중 한 자씩 따서 합친 것이었다. 이름 하여, ‘멋지다 삼총사’ 작전이라고 했다. 나는, 그럴 바에야 이왕이면 ‘정선철’이라는 그나마 남자다운 이름이었으면 했지만, 희철이 곧 죽어도 자기가 두 번째여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리하여 탄생한 정희선이라는 필명의 배경은 기정에게는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한 번 삐치면 달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이름 같다는 손 대표의 의견이 있었지만, 어차피 얼굴 사진을 내보낼 것도 아니어서, 그 기회에 완벽하게 신비주의 작전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작전 따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정해진 씨, 아니 정희선 씨. 왜 아무 말이 없어? 정 할 말이 없으면 반갑습니다, 인사라도 해야지.”

“....하지 마세요.”

“뭐?”

“합병, 하지 마세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하!’ 비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밉상 얼굴이었다.

“뭘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정희선 씨는 지금 나한테 발이라도 핥으며 고맙다고 해야 돼. 이음동화, 합병이라도 안 하면 그대로 파산이야. 그러면 별로 인지도 없는 정해... 정희선 씨 책은 아무 출판사에도 못 팔리고 그대로 묻힌다고. 손 대표하고 난 말 그대로 사업을 하고 있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동화작가님은 합병을 하세요, 마세요, 상관할 수 없는 문제야.”

“......찾아오지도 마세요. 이번엔 정말, 아무도 못 찾는 데로 숨어버릴 거야.”

쾅, 하고 이번엔 그가 자신의 차를 자신의 발로 걷어차 버렸다. 소리에 놀라서 움찔 어깨를 떨었는데, 내가 겁먹은 줄 알았는지 그가 또 밉상인 얼굴로 비웃었다.

“왜? 쪽팔려서? 정해진, 네가 앞으로 쪽팔려할 상황은 더 많이 남았어. 겨우 이정도로 물러서지 마.”

“나..나는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기니까, 두 번 죽는 건 별로 안 무서워. 한 번 도망가 봐. 나란히 손잡고 염라대왕 앞에 서볼래? 어때.”

“혀..협박 같은 거 하..하지..”

“너나 협박 같은 거 하지 마. 어린이 주제에, 못된 것만 배워서는.”

그가 잡고 있는 팔이 욱신거렸다. 뒷목도, 아팠다. 아무래도 엑스레이 찍어봐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팔이 당겨져 도로 한 걸음 다가서고 말았다. 이마 위로 그의 숨결이 와 닿았다.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왕왕 울렸다. 창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무 것도 하지 마. 쪽팔린 거, 창피한 거, 내가 그런 거 참 잘해.”

그리고 드디어 그가 팔을 놓아주었다. 그가 놓아준 건 팔이었는데, 나는 숨이 놓였다. 지탱할 데가 없어 엉거주춤하게 선 나를 그는 한참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재킷 안쪽을 뒤적이더니 지갑을 꺼내었다. 무얼 하려나, 바라보는데 그가 나를 힐긋거리며 수표 몇 장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호주머니에 멋대로 쑤셔 넣었다.

“범퍼 수리해. 그리고 엑스레이도 한번 찍어보시고. 다음에 또 봅시다, 정희선 씨.”

얄미운 소리를 지껄이더니,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자기 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타이어 마찰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벗어났다. 나는, 다른 차가 내려와 비켜달라고 클랙슨을 울릴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   *   *

상민은 계속 웃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휠체어 앞에서 계속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그런 상민을 오른쪽 눈으로 힐긋거리셨다. 나는 상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엄마, 이 친구가 웃음이 좀 많아요. 평소에도 되게 실없이 웃고 다녀요. 그래도 엄마, 잘 웃는 사람이 예쁘다고 했죠?”

어머니가 오른쪽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리고 잠깐 산책을 하고 곧바로 상민을 데리고 차에 올라타야 했다. 평소라면 드라마 두어 편을 같이 보고, 남자 주인공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에 대해 한참을 떠든 후에야 저녁까지 먹고 돌아가야 했다. 나는 말없이 눈으로만 아쉬워하는 어머니를 꼭 껴안아주고, 상민이 먼저 타 앉아있는 내 찌그러진 똥차로 향했다.

“그런데 뒤 범퍼 왜 이래?”

“어떤 미친놈이 박았어.”

“하! 미친놈들 많지. 크큭..”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자체가 흔들리며 바퀴가 끼익, 하고 거친 마찰음을 냈다. 뒤에서 빵, 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화가 나서, 나도 클랙슨을 울려버렸다. 옆에서 상민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다가 또 키들거렸다.

“야, 나 너희 어머니 볼 때 되게 웃겼다? 왼쪽 눈은 왼쪽으로 획 돌아가 있고, 오른쪽은 또 막 움직이고. 왼쪽 눈하고 시선을 맞출까, 오른쪽 눈하고 시선을 맞출까, 고민했어.”

끽. 다시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차선을 옮길 때마다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차들이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려댔다. 상민이 귀를 막았다. 나는 차를 인도 쪽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상민이 ‘왜?’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려.”

“뭐?”

“내리라고.”

“여기가 어딘데?”

모르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장난인 줄 알았는지, 상민도 따라 어깨를 으쓱 올리며 웃었다. 그러나 내가 차를 출발시키지 않자, ‘뭐야, 이거’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려, 다시 한 번 말하자 ‘허’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찌그러진 차 안에서 찌그러진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상민이 거칠게 안전벨트를 푸르며 ‘씨발’ 욕설을 내뱉고는 차문을 열었다.

“정해진, 오냐오냐 봐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는구나?”

그리고 차체가 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문을 닫았다. 나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다가 두어 개의 신호등을 지난 후에야 보조석에 그의 지갑이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출발 전에 내 집에 그의 휴대폰까지 두고 왔다.

“후우...”

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차를 돌렸다. 상민은, 내리게 했던 장소에 아직도 그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차를 세우자, 그는 차창 너머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문을 열었다. 그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보고나서는, 이번엔 내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내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따라했다.

“너, 무슨 짓이야?”

“우리 엄마 상대로 그렇게 웃어대지 마. 죽여 버릴 거야.”

“하! 대단한 효자시네. 출발하기나 해. 나 너희 집에 휴대폰 놔두고 왔어.”

나는 집까지 돌아오면서 세 번의 신호위반을 했다. 그때마다 상민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 주차할 곳을 찾는데, 익숙한 차가 뒤를 따랐다. 제기랄, 입에 붙지 않는 말이 튀어나왔다. 속도를 좀 더 높였다.

“야, 주차할 데 찾으면서 왜 이렇게 속도를...”

“안전벨트 풀지 마.”

“뭐? 대체 무슨... 아!”

“윽!”

쾅! 하고 차체가 흔들렸다. 이번에도 역시, 잘나신 에쿠스 리무진이었다. 그의 차는 벌써 정비를 마친 건지 앞 범퍼가 깔끔한 걸 넘어서서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몸이 튕겨나가면서 상민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차가 서자마자 스프링처럼 발딱 차 밖으로 튀어나갔다. 시비가 붙을까봐, 나도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었다.

“이 새끼야, 눈깔 삐었어?!”

“......”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상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연히, 그 시선에 더 화가 난 상민이었다. 나는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 인대가 늘어나서 내 손이 내 말을 잘 안 듣네.”

“이 새끼가 지금...”

“상민아. 들어가 있어.”

말리는데,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또 지갑을 뒤적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수표 두어 장을 꺼내더니, 내가 아니라 뒤쪽에 선 상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민이 신경질적인 태도로 그것을 낚아챘다.

“....미친 새끼, 팔 병신이면 운전대 잡지를 말아. 야, 정비소나 가자.”

그리고 거들먹거리며 내 차로 먼저 걸어 들어갔다. 나도, 그를 조금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뒤에서, 그가 작게 속삭였다.

“겨우 저거야? 이거야 말로 쪽팔리는 거지, 정해진.”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 차로 걸었다. 그리고, 문이 부셔져라 거칠게 닫아버렸다. 룸미러 안에서, 그 역시 자신의 차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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