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는, 진심으로 손 대표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봐주었다. 손 대표는 찬바람이 휭하니 부는 날씨에 땀을 흘리며 이마를 닦았다.
태인 기업 전무실 앞에서 나는 내 팔자의 기구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집을 옮기고, 출판사를 그만두고, 필명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손 대표가 말했듯 ‘새로운 인생이 개척’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꼬여버렸다. 차는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그 잘나신 에쿠스 리무진에 쥐어 박혔다. 내 불쌍한 똥차는 범퍼를 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속까지 완전히 뜯어고쳐야 했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원래 마음을 고쳐먹고 살신성인하여 살아간다던데, 김태준은 더욱 더 악독해져서 나타난 것 같았다.
합병 건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그의 말대로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동화작가가 사업한다는 데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었다. 손 대표는 그나마 태인 문학과 완전히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태인 기업 산하의 또 다른 출판사, ‘태인 이음동화’라는 새로운 형성체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덜 미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이음동화의 하나밖에 없는 전속 작가인 나는, 다른 출판사에선 전혀 탐내지 않는 필명 정희선 작가는, 졸지에 ‘태인 이음동화’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문을 열자 예전과 하나 다른 것 없이 두 명의 여비서가 맞아주었다. 키가 큰 쪽과 나는 눈인사를 했다. 손 대표는 계속 ‘크네요, 넓네요’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키가 작은 비서가 안쪽으로 안내해주었다. 내부의 인테리어가 약간 바뀌어 있었다. 손 대표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 동안 이번에는 안면이 있는 비서가 직접 따뜻한 차를 내어왔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손 대표를 힐긋거리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를 한 모금 홀짝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손 대표가 일어나 태준을 맞았다.
“앉아계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곧바로 이음동화 합병 건부터 처리하도록 하죠.”
그리고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손 대표가 준비해온 서류를 넘기고, 그 역시 비서를 시켜 준비한 서류를 손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대표님, 천천히 읽어보세요. 이렇게 서두르는 것 보니까 뭔가 사기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긴데, 조심하셔야죠.”
이죽거리며 말하자, 손 대표와 태준이 동시에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속이기 쉬운 손 대표는 정말 무언가 있는가 싶어 얼른 넘겼던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았다. 태준은 그런 손 대표와 나를 번갈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긴, 어차피 모든 사업가는 사기꾼이죠. 그런데 이번엔 어떻게 빼먹을 게 하나도 없더군요. 서두르는 건, 내가 내 선택에 후회할까봐 얼른 처리해버리기 위해섭니다.”
“요즘 사기꾼은 자선사업이 취민가 봅니다. 빼먹을 게 하나도 없는데, 굳이 스스로 후회할 건을 왜 추진하십니까?”
“예전에 정해진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태인 기업과 태인 문학, 이대로 가다간 독자와 문단에서 철저히 외면당할 거라고. 구린내가 어쩌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로 분위기 쇄신 좀 해보려는 계획입니다만. 정해진 씨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습니까?”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을 하필 구린내 나는 태인 기업에서 한다는 게 속이 뒤틀려서요. 애들이 참 바르게도 크겠다 싶어서요.”
태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손 대표가 내 팔을 붙들고 ‘해진 씨, 왜 그래’하고 속삭였다. 속이 뒤틀렸다. 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내린 결론인데, 그걸 어떻게 차 몇 번 갖다 박는 걸로 끝내버리려고 하는 걸까. 삶이라는 게, 모든 우연의 집합물이고, 그건 곧 교통사고로 표현될 수도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지만, 싫다, 나는 내 삶을 회오리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야..양심도 없잖아요, 뻔뻔하잖아요. 쪽팔리는 것도 모르고, 죄책감 같은 것도 모르고. 제멋대로잖아요.”
“해진 씨...”
손 대표는 거의 울상이 되어 내 팔을 흔들었다. 태준은 그런 손 대표를 보며 보던 서류를 계속 검토하시라고 권했다. 태준이 금방이라도 합병 건을 무산으로 만들까봐 노심초사하던 손 대표는 흥분한 나를 내버려두고 얼른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태인 기업이, 외부적으로 새어나가선 안 될 잘못한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대의 역할이었고 사회의 역할이었어요. 가끔은 도덕적인 판단보다... 기업의 생태보다 사회적 결단력을 요구받을 때가 더 많았어요. 그걸 다 무너뜨릴 순 없는 겁니다. 자칫, 단지 태인 기업 몇 명의 간부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건 외부적으로 새어나가선 안 될 몇 가지 중 하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해진 ... 정희선 씨한테 말해주고 싶지도 않은데. 계속 이런 일로 예민하게 굴 건 없지 않습니까?”
“그럼 그 시대의 역할, 사회의 역할이나 잘 수행하시지 왜 갑자기 어린이 타령입니까? 아,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 손 대표님, 검토 끝나셨으면 사인하시지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사항과 별로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사인하러 나온 자리니까요.”
그는 아예 내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 대표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사인을 한 서류를 서로 교환한 뒤,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만 나가시라는 정중한 표현이었다. 손 대표는 그와 악수를 하면서도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힐긋거렸다. 그리고 기어이 태준이 먼저 일어나 배웅할 기미를 보이자 ‘우리 작가님이 아직 사인을...’하고 미적거렸다.
“작가님은 지금 좀 흥분한 상태 같으신데, 머리를 맑게 하는 차라도 한 잔 마시게 하고 내보내도록 하죠.”
그리고 그는 비서를 불러 ‘정신이 번쩍 뜨이는 허브티’를 주문했다. 나는 머리로 그의 턱을 들이박고 싶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순진한 손 대표는 내가 정말 이상이 있는 줄 알았는지 자기 손수건을 내게 건네주고는 ‘그럼 우리 작가님 잘 부탁한다’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문을 나섰다. 잠시 후, 이번에도 키가 큰 비서가 페퍼민트 차를 놓아두고 나가, 이번엔 정말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에 등을 기대앉은 채 빤히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쌍욕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말이었다. 그래도, 틀린 것 없지. 나는 주먹을 쥔 채 그를 마주본 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느닷없이 표정을 풀고 혼자 픽픽 웃어댔다. 미쳤나보다. 나는 페퍼민트 차를 그의 앞에 놓아두고 싶었다.
“차 박살내서 미안.”
“...하!”
“그래도 너무했잖아, 너 말이야. 내가 수족을 못 쓰고 누워있는데, 병문안 한번 안 와? 내가 아예 골로 갔으면 왔을까? 정해진 의외로 독해, 참 독해.”
“고..고작 그것 때문에 내 차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어요?”
“아니. 반가워서. 네 몸을 부러뜨릴 만큼 격하게 포옹하고 싶은 걸 참느라, 대신 네 차를 박았어.”
“...진짜 미쳤어요?”
“아닌데.”
나는 내 앞의 페퍼민트 차를 냉큼 그의 앞으로 밀었다. 태준은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고는 홀짝,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좋네’ 한 마디 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미쳤거나, 김태준이 미쳤거나, 둘 중에 하나는 분명했다.
“뭐라고 했더라. 양심도 없고, 뻔뻔한 데다, 쪽팔린 것도 모르고, 죄책감도 없고, 제 멋대로 라고 했지, 아마?”
“틀린 말 아니잖아요.”
“정해진.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수도 없이 많아.”
“난 그런 축에 들고 싶지 않아요.”
“난 그런 축에 속해. 그것도 아주 악질이지.”
“잘 아시네요.”
“대신 너 창피하게 만들 일은 안 만들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미 충분히 쪽팔리고 있는 중이에요.”
“그 정도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서 예뻐 보여. 괜찮아. 그런 의미로, 키스해도 돼?”
“...... 미친 새끼.”
“아, 욕먹으니까 흥분 된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김태준은 낙마사고로 몸은 멀쩡하게 회복한 대신 머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분명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얼른 사인인지 뭔지를 해버리려고 만년필을 꺼내드는데, 그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얼른 만년필촉을 그를 향해 치켜들었다. 태준이 그것을 보곤 비식 비웃으며 ‘그걸로 찌르게?’하고 놀란 척을 했다. 정말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찔러버릴 테다. 나는 두 손으로 만년필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쉽게 내 두 손을 제압했다. 만년필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나는 그에게 밀려 졸지에 소파에 누운 꼴이 되었다. 그는, 포악한 육식동물처럼 그런 내 몸 위로 올라타 앉았다. 혀를 물어버릴 테다.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성격만 포악한 초식동물처럼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더없이 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찌푸려진 두 눈이, 마치 걸쇠를 건 문틈 사이로 보았던 그의 마지막 표정처럼,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나는, 내 욕심 때문에 네가 다칠까봐, 네가 스스로 창피해하고 자존심 상해 할까봐, 그게 제일 겁이 났었어. 내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날뛰었는지, 너는 몰라. 그러니까 정해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한테 네가 말한 그 악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너한테는 그런 말 듣기 싫다. 너는, 그런 거 몰랐으면 좋겠다.”
“......”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나 좀 안아줘.”
이거 정말 순 엉터리 아냐. 이랬다저랬다 하고. 나는 그를 한심하단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찌푸린 두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그의 사타구니를 무릎을 올려 걷어차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한 행동은, 손을 들어 그의 등으로 팔을 두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온순한 양처럼 내 품에 안기듯 털썩 내 몸 위로 쓰러져 누웠다.
“하... 이제 살겠다.”
무겁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내 목덜미에 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긴 여행을 다니는 여행자가 마지막 탐험을 앞둔 날 저녁,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내쉬는, 고단함과 피로가 그대로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나도,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함께 한숨을 쉬어주는 것, 그게 내 위로의 방법이었다. 그가 얼마나 악질이든, 어쨌든 그는 너무 지쳐보였다.
“아..아무리 그래도, 난 가정 파탄범... 그런 거 되기 싫어.”
“너한테 그런 소리 듣게 안 해. 넌 그냥... 그대로만 있어. 어린이한테만 꿈과 희망을 주지 말고, 김태준한테도 좀 나눠달라고.”
웃기지 말라고, 아무리 우리가 달리 생각한데도, 내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런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고, 천사라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내 위에서 힘없이 안겨있는 그의 체중이 너무 무거워서, 목소리를 낼 힘이 나지 않았다. 잔뜩 쌓인 죄의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나는 계속 입술만 달싹였다. 잠시 후 그가 내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내 코끝이 그의 코끝과 부딪쳤다.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내 얼굴을 다시 바로 잡았다. 그리고 입술이 겹쳐졌다. 나는, 그의 혀를 물어뜯지 못했다.
퉁퉁 부은 입술을 손등으로 가린 채 얼른 전무 비서실을 통과해 나갔다. 뒤따라 나온 태준이 곁에 바짝 붙어 함께 걸으며 내 팔꿈치를 슬쩍 건드렸다. 성추행이다. 매섭게 팔을 확 뺐더니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을 뿐이었다. 가소롭다는 뜻이었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닫음 버튼을 누르는데 그가 문 한쪽에 손을 뻗어 저지하며 기대어 섰다.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저씨였다.
“또 놀러와.”
“싫거든요.”
“그럼 내가 가고. 차는 다 고쳤어?”
기대 서 있는 그의 어깨를 밀쳐버렸다. 그는 과장되게 ‘어이쿠’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좁은 틈 사이로 그가 힘없이 웃는 것이 보였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면 누워나 있지 왜 벌써 일어나서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니는 걸까. 김태준은 백일, 아니 천일동안은 쑥과 마늘을 페퍼민트 차와 함께 먹어야 할 짐승이었다.
......아들도 있으면서. 이제 막 백일 정도 됐을까. 많이, 닮았을까. 성격만은 제 아빠를 닮지 말아야 할 텐데. 하긴, 그 유전자가 어디 갈까.
가벼운 실로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계적인 안내음이 1층을 알렸다. 먼지 하나도 떨어져 있을 것 같지 않은 대리석 질감의 바닥을 타닥타닥 걸으며 태인 기업 건물을 막 나서는데, 검정 슈트를 입은 무형질의 남자가 곧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젠가, 출판사 앞으로 은색 메르세데스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이었다. 순간, 불쑥 반감이 생겼다.
“내가 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만나는 것 아닌데. 이번엔 정말 내 잘못이 아니다. 난 그를 떼어내려고 최선을 다했고, 무작정 내 차를 들이박고 빼먹을 것 없는 이음동화와 합병을 추진한 것은 김태준이었다. 난 잘못한 게 없다. 침착하자. 빌딩을 돌자 은색 메르세데스가 길 위에 세워져 있었다.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뒷문을 열어주었다. 얼굴을 먼저 들이밀고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직접 나타나시지 왜 자꾸 사람을 오라가라야. 심술이 나서 괜히 뒤에 선 남자를 잔뜩 노려봐주고 올라타 앉았다.
도착한 곳은 예전의 그 으리으리한 한정식집이었다. 같은 꼴을 당할 게 뻔했다. 이를 악물었다. 혼내려면 당신 아들을 혼내라고, 당당히 말해주리라 각오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차에서 내리는데, 바로 옆에 또 한 대의 외제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흘깃 쳐다보니, 짙게 선팅 된 차창 너머로 한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이건 누구 차죠?”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묻자 ‘작은 사모님도 오셨습니다’ 하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장 내 혀를 깨물고 싶었다. 창피하게 만들 일 안 만든다며. 김태준을 곱게 놔두고 오는 게 아니었다. 사타구니를 걷어찼어야 했다. 혀를 물어뜯어버렸어야 했다. 나는 또 죄 없는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자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어서 가자며 먼저 한 걸음을 떼었다.
“저는 두 분을 뵐 일이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가겠습니다.”
“...들어가셔야 됩니다.”
남자는 내가 도망이라도 가려는 줄 알았는지 다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나는, 달릴 준비를 하다가 곧 포기해버렸다. 대신 그나마 안면이 있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옆에 주차된 차의 운전석으로 돌아 걸어갔다. 나는 그에게 너무 과한 수표를 돌려주었고, 술이 깰 때까지 쉬어가라고 충고도 해주었고, 거기다 결정적으로 음주운전을 고발하지도 않았다. 잘만 이야기 하면 나를 다시 안전한 내 집으로 데려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차창을 똑똑 두드리자 창이 부드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낯선 얼굴의 남자가 왜 그러냐는 듯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저..저기... 예전에 운전하셨던 분은...”
“사정이 있어서 교체되었습니다.”
“무슨...”
“차 실장님께 사고가 있었습니다.”
순간 석상 같은 남자의 술에 취한 어눌한 말투가 떠올랐다. ‘제 과실이니까 제가 다 부담 하겠습니다’라고 했던가. 설마, 그날 사고가 난 건 아니었을까. 혹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였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혹 그렇다고 한다면, 또 하나의 죄를 지은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사고는 누군가의 과실인 동시에 누군가의 방심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무관심이 불러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삶에 개입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미련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운전기사는 그저 다리를 조금 다쳤다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먼저 앞장을 서라고 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확실하게 해두어야 했다.
문을 열자, 두 명의 ‘사모님’이 마주본 채 앉아있었다. 태준의 와이프가 의문에 찬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나를 건너보았다. 아직도 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남편의 후배’가 전부임이 틀림없었다. 참 둔한 여자거나, 정말 타인에게 무관심한, 타인을 넘어서서 자기 남편에게까지 무관심한 여자구나, 생각했다. 나는 둘에게 인사를 하고,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작은 사모님’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또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태준의 어머니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되바라진 사람으로 비쳐져도 할 수 없다고 각오하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당돌하게 말했다. 두 명의 사모님이 그런 나를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보았다.
“몇 달 전에 벌써 태준... 전무님하고는 관계를 끝냈습니다. 최근에 다시 만난 건 제 의지가 전혀, 정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겁니다. 다시 시작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모님이 왜 또 저를...”
“아니. 내가 부른 건 그저 오해를 좀 풀어줬으면 해서에요.”
‘큰 사모님’이 내 말을 자르고 ‘작은 사모님’을 쳐다보았다. 나는 하던 말이 잘린 것에 화가 나서 미지근한 물을 벌컥 마셨다. 오해를 풀어줬으면 하면 내 말을 왜 자른단 말인가. 말 그대로 오해를 풀고 있는 중이었는데.
‘작은 사모님’은 그런 나를 쳐다보다가 바람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무슨 뜻일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남편의 후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연관계였다니, 그것도 남자. 웃기기도 하겠다. 나는 작게 ‘죄송합니다’하고 웅얼거렸다. 죽고 싶었다.
“아가. 여기 이 사람이다. 보다시피, 그냥 평범한 남자애야. 태준이가 출판사 있을 때 만났다가 계속 관계가 지속된 모양이야. 그래도 남자애니까, 별 탈 없겠지 싶어 그냥 놔뒀어. 너도 알다시피 이런 일이 어디 한둘이니. 그저 태준이 힘들 때 기댈 상대 하나 더 있어도 상관없겠다, 싶었을 뿐이야. 네가 마음 쓸 정도로 큰 일 아니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벌써 끝냈다고...”
“아니에요, 어머님.”
이번에는 태준의 와이프가 ‘큰 사모님’의 말을 잘랐다.
나는, 내가 풀어줘야 할 오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수치스러웠다. 평범한 남자애, 아이를 낳지 못하는, 김태준이 힘들 때마다 와서 정액을 안전하게 잔뜩 뿌려대고 갈 수 있는 편리하고, 그래서 작은 사모님 마음 쓸 일 없는 남자애.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데, 태준의 어머니가 ‘작은 사모님’을 향해 ‘그럼’하고 냉랭하게 되물었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무릎이 후들거렸다.
“제가 이혼을 요구한 건 이 사람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에요. 태준 씨하고도 상관없는 문제고요.”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건가. 이것 때문에, 김태준이 그렇게 뻔뻔하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건가. 나는 머리가 식었지만, 태준의 모는 얼굴이 싸늘히 식었다. 그리고 나와 그의 와이프를 동시에 노려보았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고개가 숙여졌는데, 작은 사모님은 과연 사모님답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문제가 뭐야.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결혼이 어디 니들 둘 문제기만 해?”
“그래서 참았어요. 죄송합니다, 어머님. 이젠 못 해요. 태경이,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저희 집안에서도 저 안 받아줄 것 압니다. 다 버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헤어지겠단 것도 언감생심인데, 태경일 데리고 나가겠다니, 태경이를! 누구 집 자손인데 네가 감히 누굴 데리고 나가!”
쾅, 하고 테이블이 울렸다. 태준의 어머니 앞에 있던 찻잔이 엎어지며 테이블 위로 노란 꽃잎 차가 흥건히 고였다. 노기 어린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며칠 동안 범퍼를 공격하는 태준에게 시달리느라 스트레스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결국 부들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났다.
“저..저는 이만...”
“어딜 어른이 얘기하는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이 꺾였다. 내가 왜. 숨도 제대로 터져 나오지 않는데, 문득 입안에서 시큼한 피맛이 감돌았다. 물고 있던 입술 안쪽이 터진 것이었다.
“태준이 때문이 아니면, 뭐야, 네가 문제인 거야? 그래?!”
“......”
“말 없는 건 그렇다는 대답인 게야? 그래! ....하! 우리가 나서기 전에 네 집에서 가만히 있는다든! 그런 주제에 어디서 감히 태경일 거들먹거려!”
“태경이, 태준 씨 아이 아니면 괜찮은 건가요?”
어지러웠다.
“너, 너 무슨 소리야,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태준 씨가 직접, 태경이 타액과 머리카락을 채취해 가져갔어요. 태준 씨가 안 했으면 제가 먼저 했어요. 적어도 이주 후면 알게 되겠죠.”
어지러웠고, 눈앞이 캄캄했고, 먹은 것도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너 지금 그 말...”
“우...우욱!”
벌써 테이블 위에 고여 있는 꽃잎 차처럼 노란 위액을 쏟아내었다. 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과 턱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것에 당황해 몸을 아래로 수그리자, 옆에 앉아있던 태준의 아내가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목구멍이 타들어갈 듯 아팠다. 나올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이 계속되었다.
겨우 구역질을 그치고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옆에 앉은 여자의 꽉 움켜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눈이 마주쳤다. 파리한 안색이었다. 무슨 생각일까.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네 집에서도 아시니.”
“아직... 모르십니다.”
“그래, 그럼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아이 가지고 누구 씬지 네 스스로 밝히겠다 나섰으니, 할 말 다 한 셈이지. 그런 딸 보내놓고, 그쪽에선 할 말 없으실 테지. 태경인... 그래, 어디 이주 후에 보자꾸나. 태경이가 태준이 자식이든 아니든, 어찌됐든 너는 아니구나, 아니야.”
태준의 모는 노기 띤 목소리로 호령하던 늙은 암호랑이의 모습을 지우고 다시 고고한 학처럼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가에 다가서다 말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누른 채 바들 떨고 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한 게야?”
“......”
“네가 뒤에서 태준이 저리 조종한 게냐고 묻는 거야.”
“아...아니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데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자,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위인은 못 되는구나.”
그리고 얇은 백상지 넘기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또 닫혔다. 한숨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무서웠고, 역겨웠고, 위액보다 더한 구린내가 나는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위액을 닦아낸 손수건으로 이번에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잠시 후 옆에 앉아있던 여자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느다란 다리가 바들 떨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쳐다보자, 여자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비난의 말을 퍼부을까.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당신도 참...’하고 혼잣말을 하듯 속삭였다.
“불쌍한 사람.”
좁은 욕조 안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고 몸을 뉘었다. 구부린 무릎의 볼록한 부분이 물 밖으로 튀어나와서, 왠지 추운 북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간간히 손으로 튀어나온 무릎 위로 뜨거운 물을 끼얹었지만, 금방 또 무릎만 시렸다.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뜨거운 물속으로 담그면, 모든 외부의 소리가 잠기고 숨어있던 미세한 소리들이 왕왕 울려왔다. 그러면 내가 마치 태아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자꾸만 속으로 엄마를 찾게 되었다. 엄마, 하고 말하면 뽀글뽀글한 물방울들이 입과 코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문득, 아주 먼 곳에서 묵직한 철제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었다. 푸하, 입속의 물을 내뱉으며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신발을 벗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거실을 돌아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민에게조차 보조열쇠를 주지 않았다. 도둑일 리는 없었다. 매일 꾸벅 조는 노인이지만, 그래도 경비원이 있는데 용감하게 현관으로 들어오는 도둑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새벽녘도 아닌데다가 거실불도 환하게 밝힌 채였다.
“......”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동그란 물바가지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고, 조심스레 욕실 문을 열었다. 주방 쪽을 향해 거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범인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윽..! 야, 정해진,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당한 봉변에 당황했는지 태준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닦아내며 왁 소리를 질렀다. 다시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퍼 담기에는 그 전에 잡힐 것 같아서, 손에 들린 물바가지를 그대로 그의 얼굴을 향해 던져버렸다. 플라스틱의 물가바지는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앞섶을 털어내고 있던 그의 이마를 정통으로 들이박았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그의 이마를 타격한 물바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한 손으로 덮은 채 그것을 현관 쪽으로 차 버렸다. 타탕, 하는 소리를 내며 물바가지가 현관문에 가 부딪히면서 쪼개져버렸다.
“야!”
“오지 마! 죽여 버릴 거야!”
“뭐 하는 거야!”
그래도 그는 잡으려는 듯 팔을 뻗은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얼른 침실로 들어가 푹신한 베개는 물론이고 위협이 될 만한 탁상시계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그를 향해 던져버렸다. 그는 베개를 피하려다가 탁상시계에 또 이마를 맞았다.
“악!”
피부가 약한 눈썹 부근이 찢어졌는지, 순식간에 붉은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
“씨...제기랄!”
손바닥으로 피가 나는 곳을 막으며 그가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타월을 뭉쳐 한쪽 얼굴 전체를 막았다. 나는 쭈뼛 선 채 소독약과 연고를 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더 상처내고 싶었다. 할퀴고 물고, 거길 발로 차서 뭉개버리고 싶었다.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자 태준이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나는 또 다른 던질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만 해! 뭐야, 대체 왜 이래!”
“이씨...씨...”
“씩씩대지 말고 말을 하란 말이야! 왜, 멋대로 찾아와서? 그럼 칼이라도 던져봐, 내가 또 안 찾아오나! 말했잖아, 차라리 네 손 붙잡고 염라대왕 앞에 섰음 섰지 다신 안 물러나. 죽여 버린다고? 그래, 죽여, 죽여 봐, 한번!”
나는 왕왕 짖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발로 무릎을 차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어깨를 물어도, 그는 인상을 찡그릴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피가 멎지 않는지, 눈가를 누르고 있던 타월이 얼마나 젖었는지 확인하곤 욕실에 던져 넣고, 서랍을 뒤져 약상자를 꺼내었다.
그가 바닥에 앉아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작은 반창고로는 부족했는지 아예 솜을 뭉쳐 갖다 댄 채 붕대를 감을 때까지 나는 그의 등을 발꿈치로 걷어찼다. 가끔 꽤 큰 둔탁한 소리가 나고, 충격이 심했는지 그가 몸을 구부린 채 가만히 숨을 고르기도 했지만, 난리를 피우는 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런 태도에 오히려 약이 올라서 나는 이불까지도 그를 향해 날려버렸다.
“먼지 나! 그만하고 옷이나 입어!”
뒤집어씌웠던 이불을 걷어내며 그가 마침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문득 내가 아직 물기도 닦지 않은 알몸인 것을 깨달았다. 물기는 모두 말라있었다. 속옷만 달랑 입고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서는데, 그의 바지 앞섶이 불룩하게 튀어나와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야 이 변태새끼야!”
“하..!”
“흐으...으으....으으으...”
“뭐..뭐야, 왜 울어. 난 너한테 손 하나 까딱 안 했어. 네가 때려놓고 왜 우냔 말...”
“이..이혼해요?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뻔뻔해?”
붕대를 감아 더욱 무서워진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누구.. 누구 만났어?”
“누구? 누구가 누군데? 어머니 아니면 부인? 아니, 둘 다. 그 사이에 끼어서 내가 어떻게 병신처럼 떨었는지 물어봐.”
“......미..미안, 몰랐어. 어머니가.. 직접 너 만날 줄은 몰랐어. 미안, 미안해, 해진아.”
“그런 거 듣기 싫어! 대체 무..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소매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의 옷에다 코를 풀어버렸다. 태준은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보다가 피곤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허리가 구부정했다.
“...끝내자고 얘기 꺼낸 건 저쪽이 먼저야.”
“그래서, 그래서 태준 씨는 아무 잘못 없다? 나는 아무 죄책감 안 느껴도 된다? 이거 말하는 거였어요? 이거였어? 아..아이 타액이랑 머리카락이랑.. 태준 씨가 직접 채취해 갔다며. 그..그런데 아무 잘못..”
“정해진, 분명 말했어. 다 내가 책임진다고. 내가 책임 느껴야할 것, 있어. 그래도 넌 아냐. 아이 친자확인 해서 데려가겠다고 한 것도 저쪽이 먼저야. 어차피 너 하나로는 안 될 문제니까 내가 직접 행동한 건 맞지만, 너나 나는 이미 충분히 물러섰어.”
“태준 씨도 당한 일이잖아! 아..아버지 죽이고 싶었다고 그랬었잖아!”
“...아직 백일 갓 넘은 애야. 아무 것도 기억 못해.”
“태..태준 씨는 악질이야.”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이미 ‘더한 짓’을 하고, 피 냄새를 본 육식동물의 냉혹한 눈빛이었다. 그가 무서웠다. 문득 아직도 그의 바지 앞섶이 불룩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얼른 바지와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꿰어 입었다. 그가 그것을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현관으로 밀었다.
“안 해, 안 한다고.”
“나가. 열쇠 놔두고 나가.”
신발을 신는 그의 어깨를 계속 두들겨대자, 드디어 그가 ‘너 진짜!’하고 내 손목을 움켜잡곤 벽으로 밀었다. 어깨뼈가 벽에 부딪쳐 인상을 찌푸리자 다시 그의 가슴팍으로 당겨졌다. 나는 다시 그의 어깨를 두들겨댔다.
“하.... 어쨌든 이렇게라도 알게 됐으니까... 아무튼,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바보야? 국어 몰라?”
“....당분간 처리할 게 있어서 좀 바빠. 내가 나서기 전에 그 놈, 정리해.”
“태준 씨는 나쁜 놈이야, 냉혈한이야, 악질 중에서도 최고 악질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도어뷰로 밖을 내다보자, 그가 곧바로 내려가지 않고 또 복도에서 담배를 빼 물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순간 손톱만한 도어뷰의 렌즈 사이로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얼른 눈을 떼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갖다 대는데, 쾅! 하고 문이 흔들렸다. 그가 발로 걷어찬 것이었다. 밖을 확인하자, 그는 내려가고 있었다.
침대에 털썩 쓰러져 눕는 순간, 회오리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만 같았던 하루 동안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배를 움켜잡았다. 속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