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어머니가 사라졌다.
태준을 보낸 후, 다시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비척대며 일어나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으로 향했다. 마침 요양원 비용을 낼 때가 되기도 한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서울의 요양원으로 옮겨 모신 후부터 꼭 내 손으로 현금을 쥐고 직접 요양원의 원장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촌스러운 생각이지만, 왠지 그래야만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달라고 했더니, 아무런 경계도 없이 어느 납치범이 어머니를 데리고 가버리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담당자를 노려보았다. 담당자는 생각 없이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지난 주말에 모셔 가셨어요. 말씀 하셨다고 하던데. 잘 아시는 분이라고 하던데요. 아드님도 알고, 어머님도 알고. 더구나 어머님이 아주 반가워하시기에...”
“어머니가, 그 납치범을요? 말도 못하시는데 반가워하시는지 무서워하시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표정으로... 저..정말 납치인가요? 어떡하죠? 아... 경찰에 연락해야 하나요?”
“....키 크고, 악당처럼 생겼죠? 에쿠스 리무진 몰고.”
“예에... 그게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비싼 차 같아서... 운전기사도 따로 있고 그래서, 저희는 그런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리는 없을 것 같아서... 지..지금 바로 경찰에 연락을..”
“원래 부자들이 나쁜 짓은 더 많이 해요. 나쁜 짓을 해서 부자가 됐거나. 어쨌든 경찰은 됐어요. 내가 경찰보다 빠르니까.”
어차피 다신 이곳에 어머니를 모실 일 없을 테니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씩씩대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무릎을 탁탁 털며 혼자 왁왁 소리를 지르자 지나가던 어린아이들이 힐끔거리며 내 곁을 멀리 돌아갔다. 내가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건, 다른 데에 이유가 있었다. 나를 찾을 만큼이었다면, 당연히 어머니가 계신 곳도 알아냈을 터였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를 만난 후로 어머니에게 달리 안부 차 들르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가 먼저 행동을 취해주길 바라는 얄팍한 이기심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용인의 요양원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간간히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재활치료를 한다고는 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을 것이 뻔한 환경이 불안했다. 나는, 내 무능을 그가 덮어주었으면 했다. 정말, 한심한 인간이구나. 어깨가 푹푹 꺼졌다.
배가 또 콕콕 쑤시며 아파왔다. 아침을 걸러서 그런가. 나는 눈에 띄는 대로 정류장 앞의 작은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우유를 주문하자 점원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성인 남자가 혼자 우유를 마시면 안 되는 건가. 말은 하지 못하고 혼자 구시렁대며 구석에 앉는데, 마침 호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태준이었다. 오냐, 너 잘 걸렸다, 하는 심정으로 폴더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미성년자 성 추행범, 직장 내 성희롱 상사, 스토커, 사기꾼, 강간범, 거기다 납치범!”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그의 죄상을 낱낱이 쏘아붙였다. 우유를 가지고 오던 점원이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입을 헤 벌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우유를 벌컥 들이켜다가 혀를 데었다. 앗뜨뜨, 하고 난리법석을 피우자 점원이 한심하게 쳐다보며 차가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엄마 어디다 숨겼어!”
-용인.
“......”
-너 제정신이야? 그렇게 응급처치도 안 되는 곳에 모셔두고 마음이 편했어? 근육 경련이 더 심해지신 건 알아?
우유를 마셔도, 속은 여전히 쓰렸다. 내가 그를 혼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고, 그 정도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힘들었다고 말하려는데, 목이 멨다.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그가 작게 한숨을 훅 쉬었다.
-...밥 먹었어?
“......”
-어떻게 빌 건지는 생각하고 있어?
“내..내가 빌 건 없잖아요. 거짓말 한 건 태준 씨야.
-너한테 거짓말 한 거 없어. 네가 본 건 정말 제대로 된 친자확인서가 아니었어.
“태준 씨 이름, 분명히 봤어. 아니라고 우기면 내가 순진하게 아, 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리고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끌려 다니고?”
증거를 똑똑히 봤는데, 뭘 믿고 저렇게 발뺌을 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속이 왈칵 뒤집힐 것 같아 점원이 가져다준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콕콕 쑤시는 느낌에 배를 움켜잡고 ‘아아’하고 흐린 신음을 흘렸는데, 그걸 들었는지 휴대폰 너머 태준이 ‘왜’하고 금방 반응을 해 왔다. 찬물 마셨더니 이가 시려서, 하고 거짓말 했는데, 순진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쨌든,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마.
“내가 바본 줄 알아요? 내가 진짜 어린이야? 그런 감정서가 실수로 막 잘못 나오고 그런 거예요?
-정해진. 그래, 네가 본 거... 잘못 나온 거 아니야. 그런데 그거, 아예 처음부터 시료를 잘못 전달해서 그래. 내 건 맞는데... 내 아들 건 아니야. 다시 전달했다. 일주일 후에 제대로 된 결과 나오니까, 보고 싶으면 그때 보여줄게. 응? 야, 정해진, 대답해.
정말 타고난 사기꾼이었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그런 주제에 임기응변은 또 아주 허술했다. 고작 생각해낸 게 시료가 잘못 전달됐다니. 자기 손으로 직접 아이 머리카락과 타액을 채취해 갔다는 것, 누가 모를까봐.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나는 유전자 변형 대표 농산품인 미국산 옥수수를 떠올렸다.
“혹시... 유전자 검사 조작 같은 거 할 생각이에요?”
-뭐? 야! 내가 무슨 옥수수야?! 콩이야?!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어떻게 나한테 싹싹 빌까 고민이나 해.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니야.
나는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 낀 놈이 성낸다더니. 나는 휴대폰을 노려보며 픽픽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온전히 내 것이 되길 바라는 남자가 이혼을 한다는데,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의 친자이길 바라는 마음이라니. 보통 이런 경우엔 그 반대를 꿈꾸지들 않을까.
“나는... 내가 이해가 안 돼.”
시계를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을 것 같아, 선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쩝쩝 소리 내며 밥을 먹고 있는 선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글쎄. 네가 남자기 때문이 아닐까? 여자인 내 경우에는... 만약 이혼남이랑 다시 시작한다면, 그 사람한테 딸린 자식이 없었으면 싶겠지. 아무래도 남의 자식 키운다는 게 어렵잖아. 정 아이를 갖고 싶으면 내가 낳으면 되고. 그런데 넌 남자니까, 임신을 못하니까, 거기다 그 남자는 대를 이어야 하는 남자니까. 근본적으로 네가 해줄 수 없는 걸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서라도 얻어왔으면, 하는 심리 아냐? 뭐, 전부인도 그 남자 자식이면 말없이 곱게 떠나준다는 마당에, 진짜 친자라면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아기’가 되는 거다, 응?
“뭐가 뭔지 모르겠어.”
-넌들 너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그렇게까지 강하게 주장하는데 그냥 한번 믿어줘. 아무리 악질이래도 제 자식도 아닌데 다시 결혼하기 싫어서 기라고 하겠어? 야, 그나저나 최기정이 이상해. 너하고 희철이 관계를 막 꼬치꼬치 캐묻는다. 거참 내가 둘이 목욕하면서 등판의 어디부터 어디까지 밀어줬는지를 어떻게 아냐고. 하여튼 또라이 새끼. 이것도 은근히 집착이 강해요.
“으응...”
그렇다면 내가 만약에 여자였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그가 아주 홀가분한 몸으로 이혼하길 바라게 됐을까. 나는 문득 볼록하게 배가 솟은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아....”
-응? 뭐라고?
“아니야. 저기 선희야. 끊자. 다음에 또 보고할게.”
그리고 그제야 내가 왜 상황이 여기까지 와 있는데, 그의 친자 확인 문제는 둘째치고서라도 이 상황과 거기에 놓인 내 마음까지도 몰라서 복잡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제껏 태준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짐작만으로도 내가 먼저 아파서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란 그의 아내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더구나 아이까지 낳고 얼마 되지 않은 이때에 그런 폭탄선언을 터뜨렸을까.
그녀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언지, 내가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그녀가 왜 먼저 입을 열었는지 알아야 했다. 단순히 그녀가 부도덕하기 때문이라거나 모성본능이 부족한 여자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가방을 뒤져 명함 케이스를 꺼내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끼워 넣었던 명함들을 모두 테이블 위로 쏟아내었다. 언젠가, 아마도 처음 여자를 만났을 때, 내 발을 처음 밟았을 때 명함을 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받았는데...”
그런데 수십 장의 명함 사이에서 그녀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명함은 함부로 버리지 않는데. 후, 한숨을 쉬며 다시 명함을 정리해 넣는데, 문득 ‘차경현’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여자의 전 운전기사였다. 그래, 그의 명함도 받은 적이 있었다. 사고로 업무 내용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결혼 전부터 함께 다녔으니 여자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입술을 잘근 물며 명함에 적혀 있는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연결음이 열 번 정도 울렸을 때였다. 안 받나보다, 생각하고 끊으려는데 ‘여보세요’하는 늦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안녕하세요, 저기 저는... 그러니까... 저번에 좀 취하셔서 제 차를 박으셨거든요, 그쪽이요...”
나는 언젠가 만난 적이 없냐고 묻던 그에게 그런 적 없다며 외면했었다. 이제와 내가 김태준의 후배로, 당신네 사모님한테 두 번이나 발을 밟혔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데 그가 대뜸 ‘기억합니다’하고 대답했다. 무얼, 어디까지 기억하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담담한 어투로 훨씬 앞질러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엔 정해진 씨와 김 전무님 사이도 새로 알게 됐고요.
그냥 단순한 운전기사가 아닌가보다, 오랫동안 같이 다니다보니 친구처럼 막역한 사이구나, 생각하며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얘기를 그렇게 막 하고 다니나. 어떻게 생각할까. 휴대폰을 꼭 쥔 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니,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 저기, 김 전무님... 사모님... 연락처를 좀 알고 싶어서요. 만나서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요즘 몸이 안 좋아 외출을 삼가고 있습니다. 제가 대신 나가지요.
“아니요, 직접 만나서 얘기를...”
-웬만한 얘기는 저한테서도 들을 수 있으실 겁니다. 듣고 싶은 얘기가 이혼에 관한 거라면, 저도 관여된 입장이니까요.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네? 네? 네?’하고 멍청이처럼 지저귀었다.
카페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나를 발견하곤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아니, 한 걸음마다 하나의 꼭지를 찍으며 걸어왔다. 남자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실례가 될 것 같아 얼른 남자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었지만, 남자가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리를 다쳤다더니, 아직 다 낫지 않은 걸까.
“비난하고 싶으십니까?”
“에..예?”
어설픈 인사를 나누고 그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커피 잔을 든 채 입술에 갖다 대기만 한 남자가 뜬금없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황해 또 멍청이처럼 말을 더듬었지만, 그는 투명한 눈빛으로 그런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만 있었다. 비난이라니, 내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가 나를 비난할까 겁먹고 있던 터였다. 고개를 떨구자 머리 위에서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겁이 많으시군요. 그런데도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고요.”
“죄..죄송합니다...”
입술을 깨물며, 이유도 모를 사과를 하자 그가 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아래로 그의 다리가 자꾸만 눈에 띄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남자가 다리를 꼬아 앉았다.
“생각하고 계신 걸 맞추어볼까요? 그날, 술에 취한 채 정해진 씨 차를 박았던 날 혹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겠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힐긋거리며 다시 입술을 물었다. 남자의 날선 목소리는 많이 무뎌져 있었다. 대답 없이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며 슬핏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음주운전으로 사고가 난 건 맞지만, 그날은 아니었어요. 보름 후였습니다. 재미있죠? 한 병원에서, 김 전무님은 낙마사고로 수술 후에 치유 차 누워있었고, 수연인 분만실에서 아이를 낳았고, 저는 교통사고로 막 실려와 응급실에 누워있었죠.”
그리고 나는 태준의 비서를 통해 아무도 모르게 그의 병실에 숨어들어가 있었다. 재미있네요, 하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저... 다리는 아직 치료 중이신가요?”
“......아니요. 치료는 끝났습니다. 수술 경과는 좋았는데, 뒤처리를 잘못했더니 이렇게 영영 절름발이로 살게 됐죠. 죗값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끔은 위로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내가 왜 이 남자와 마주앉아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져 멍하니 테이블 위의 찻잔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남자의 시선이 계속 내 얼굴을 훑어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다리에 철심을 박은 채 누워있는데 전무님이 목발을 짚은 채 제가 있는 병실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수연이가 해산 후에 계속 제 병실에 와 있었으니까, 어림짐작하셨겠죠. 아직 누워있는 절 보며 하신 첫 마디가... 그러시더군요, 그렇게 절절하면 결혼, 아니, 약혼을 파기했어야 했다고요. ......그때는 정해진 씨에 관해 몰랐던 터라 물어보지 못했던 건데, 대신 답해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전무님은, 왜 계속 정해진 씨를 만났습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됐더라. 그래, 전화. 피가 묻은 손으로 습관처럼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나는 그가 필요했고 그는 나를 동정했다고, 한 마디로 요약해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젓자, 그가 다시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더럽고 지저분한 불륜이고, 전무님... 김태준 씨와 당신이 하고 있는 건, 그건, 로맨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태준... 전무님도 그렇게 까진 생각 안하실 거예요. 우린 전무님 결혼 전에 헤어졌었어요. 다시 만난 건... 저한테 사고가 있어서 그걸 해결해주시느라... 그..그래도 다시... 또 헤어졌어요. 우리는, 한 번씩 상대를 버렸어요. 그렇게까지 했어요.”
“당신들은 그렇게까지 했는데, 수연이나 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으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왜 이제 와서... 아이도 있는데...”
“그 이유라면, 제 다리가 대답이 될 겁니다.”
남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그의 다리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더 정확한 대답을 기다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 또한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저..저하고 만났던 날... 사고가 난 건가요?”
그가 내게 날카롭게 대하는 이유가 아무래도 그 때문인 것 같아서 조심스레 물었는데,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하... 그러면, 만약에 그렇다면, 죄책감을 느낄 겁니까? 음주 운전자를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서, 그래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좋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두죠.”
남자는 언제 노려봤냐는 듯 허탈하게 손을 저으며 웃었다. 나는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 대답하죠. 왜 하필 지금이냐면... 타이밍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든 나든, 불륜 사실이 들통 나 버렸고, 내 다리는 이 지경이 되었죠. 그 상황에서 수연이가 택할 수 있었던 게 이것뿐이었겠죠. 타이밍,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아이는...아직 친자확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다른 남자 아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을 문제였어요. 나도 아무런 욕심 없이...”
“그냥 조용히 넘어갈 게 뻔하니까 먼저 터뜨린 겁니다. 태경인... 그 남자 아이가 맞을 겁니다. 내가 실수한 게 아니라면, 확실해요.”
남자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기운이 모두 빠진 것처럼 속이 헛헛했다. 배가 고팠다. 그런데, 동시에 또 속이 쓰렸다.
“불륜과 로맨스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남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이라는 게 있을까. 그게 그거지. 이번엔 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우리는 이제 곧 모든 걸 잃을 겁니다. 난 예전처럼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반짝거리며 빛나는 걸 다신 볼 수 없을 지도 몰라요. 그래서 난 당신이 싫어요. 증오합니다.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다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모든 걸 얻었으니까. 하지만 우린, 스스로 모든 걸 다 버렸어요. 자의든 타의든, 결국은 우리가 선택한 일입니다. 정해진 씨, 내가 생각하기에 불륜과 로맨스의 차이는 말입니다, 얼마나 버리느냐의 문제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남자가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절뚝이며 카페를 걸어 나갔다. 나는 자리에 남아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배가 고파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해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말이 떼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상민이었다.
-우리 내일 만나는 거 맞아?
“응.”
-난 또, 말이 없길래. 알았어, 그럼 내일 봐.
나는 전화를 끊고, 무릎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어라도 먹고, 힘을 내야했다.
* * *
“씨발 새끼, 딴 놈 생겼냐?!”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상민은 상소리를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카페의 손님은 물론이고 서빙을 하던 직원들까지 멈칫한 채 나와 상민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집으로 오라고 할 걸.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내가 만만하냐? 어?!”
“저기, 상민아, 목소리 좀 줄이자.”
그 와중에 희철이는 수업이 비었다며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며 귀찮게 했다. 대체로 문자의 내용은 ‘호모란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관한 장대한 논술식이었다. 나는 거의 대부분은 그냥 무시해버렸지만, 또 상민에게 욕을 들어먹어가면서도 간간히 ‘지금 바쁘다’하고 간단하게 문자를 찍어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희철은 멈추지 않고 ‘문자질’에 열을 올렸다.
“너 지금 나 무시 하냐?”
상민은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폰의 문자 알림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괜한 오해를 할 것 같아 나는 그 앞에서 희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상민에게 받아먹은 욕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것을 본 상민은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는지 차분히 ‘누구야?’하고 물었다.
“왜, 그... 처음에 바에 같이 갔던 친구. 덩치 크고. 저기... 어쨌든 상민아, 나는... 지금 이렇게 내가 너한테 살갑게 못해주는 게 미안하고... 너는 더 괜찮은 애 사귈 수도 있는데..”
“웃기고 있네. 먼저 꼬리 살랑살랑 흔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발 빼시겠다? 아니지, 처녀를 더 비싸게 팔고 싶어? 내가 영 돈줄은 아니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먼저 꼬리를 흔든 적,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나를 여성화하는 버릇이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나쁜 버릇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마초증후군처럼 여성화시킨 나를 비하하고 스스로의 남성성을 우월시했다. 차라리 내가 진짜 여자라면 그를 향해 ‘덜떨어진 마초새끼’라고 욕할 수만이라도 있으련만. 나는 잠시 상민의 저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을 때까지만 같이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암캐처럼 흘리고 다니는 주제에.”
“하아...”
차라리 김태준처럼 쓰러지기나 하면 연민이나 가지.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민이 눈을 치켜뜬 채 ‘어딜 가?’하고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물었다.
“화장실, 얼굴 좀 식히고 올게.”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희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내가 녀석에게 욕을 퍼부은 지 3분이나 지났다는 것을 감탄했다. 3분, 꽤 오래 참았구나. 그러나 역시,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희철의 육두문자가 퍼부어졌다.
“좀 봐줘. 내가 지금 좀 예민해.”
-이 자식, 너 또 그 유부남 만나고 있냐!
화장실이어서 그런지, 녀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던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가장 안쪽 문을 닫고 들어가, 먹었던 육두문자를 그대로 뱉어주었다.
-이게 정말! 야! 넌 친구 고민 상담이 중요하냐, 유부남이 중요하냐!
“안 만나, 안 만나! 그 유부남 아저씨 안 만나!”
-진짜냐?
“에이씨! 상민이 만나고 있어! 얘 하나로도 모자라 너까지 열 받게 할래?!”
깔끔하게 헤어지지 못한다면, 지저분하게 헤어지지만 않았으면 했다. 하루, 시원하게 욕먹고 자존심 상하더라도, 딱 하루만 참자고 생각했다. 이를 앙다물고 문을 열고 나왔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상민이 세면대에서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씻고 있었다.
“...뭐해?”
“나도 열 받아서, 얼굴 좀 식히고 있어. 그런데 이거 의외로 효과 좋네. 좀 가라앉는다.”
진짜? 하며 나도 얼른 찬물을 틀어 얼굴을 적셨다. 그런가, 하며 몇 번 더 얼굴을 적시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상민이 묘한 얼굴로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거울 속에서 비쳐보였다.
“왜?”
“너, 내가 싫냐?”
“아..아니야. 그게 아니라... 말했잖아, 내가 너한테 잘 못 해주니까 미안해서라고.”
“...알았다, 정리하자. 너 말은 그렇게 해도, 어쨌든 나는 아니란 얘기잖아. 아니라는데, 별 수 없지. 알았다.”
“저..정말?”
상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먼저 화장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갑작스러운 응답에 오히려 당황스러워져서 나는 틀어놓은 수돗물을 잠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갖다 대자, 세찬 물줄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옷을 털며 자리로 돌아오자, 상민은 벌써 나가려는지 지갑을 꺼내들고 있었다. 나도 재킷을 걸쳐 입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정말 끝인가. 멀뚱히 서 있자 상민이 먼저 카운터로 향했다. 얼른 앞장서며 ‘내가 계산할게’하고 지갑을 꺼내드는데, ‘됐다’ 무뚝뚝한 대답이 나왔다.
민망하기도 하고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그래도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조금 아쉽기도 해서 카페 문을 열고 나오면서까지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쉽게 먼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도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어물거리다가 ‘참, 저기’하고 말을 걸었다.
“응?”
“너희 집에 내 옷 몇 벌 놔두고 왔는데...”
“아... 다음에 내가 너 일하는 데로 가져다줄까?”
“아니, 그냥 오늘 깔끔하게 다 끝냈으면 하는데. 더 봐서 좋을 거 없잖냐.”
그런가. 괜히 미안해서 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렇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옆에 두고 ‘개나리가 피고 있네’하며 눈치도 없이 꽃타령이나 했다. 상민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맙다고, 마지막으로 말하려다가, 말았다.
고마웠다. 부딪친 적도 많았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류의 사람이어서 당황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서 최악으로 치닫는 감정을 조절해주기도 했다. 이것 역시, 그의 의지는 아니었겠지만. 혼자 피식 웃자, 그가 ‘왜?’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려다가, 그건 또 너무 야박한 경우 같아서 옷을 찾는 동안 차라도 한 잔 더 마시라고 권했다. 침실 옷장을 왈칵 뒤집어 그의 옷을 찾는데, 주방에서 커피포트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빠끔 내다보자, 그가 혼자 커피를 타 마시고 있었다.
“빨리 찾을게.”
“천천히 해도 돼. 커피 다 마실 때까지.”
그래도 나는 내 옷 사이를 마구 헤집으며 그의 면티로 보이는 것을 찾아내었다. 워낙 감정의 기복이 큰 사람이다보니, 또 언제 버럭 화를 낼지 몰랐다.
“그런데 말이야.”
“응?”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역시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커피 냄새가 좋구나, 생각하며 나는 ‘왜?’하고 물었다.
“너, 유부남이랑 사겨?”
“...무..무슨....”
“아까, 화장실에서 그랬잖아. 유부남 아저씨랑, 오늘은 안 만난다고.”
그의 표정이 너무 무덤덤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아서 일어서는데, 상민이 어깨를 밀어 벽 쪽으로 밀었다. 그리 힘을 주지 않았는데, 긴장한 몸이 저절로 기우뚱 기울었다.
“아..아니야.”
“아니야?”
“응.. 그런 거 아니야.”
“저기 그러면 말이야, 확인을 좀 해봤으면 하는데.”
응? 하고 되묻기도 전에 그가 쥐고 있던 커피 잔을 내 어깨 위로 기울였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그리 뜨겁지는 않았지만 순간 놀란 기운에 움찔거리는 순간 상민이 내 몸을 뒤집었다. 벽에 이마를 박은 채 버둥대자, 그는 또 순식간에 내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아!”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갔다. 겁에 질려 숨이 삼켜졌다. 그가 목 뒤를 꽉 누르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발을 뒤로 차려고 하는데, 엉덩이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불쑥 쑤시고 들어왔다.
“아..아..! 아파!”
한꺼번에 넣어진 두어 개의 손가락이 무자비하게 안을 헤집었다. 이틀 전의 정사로 인해 아직도 조금 부어있는 곳이었다. 거칠게 안을 탐하던 손가락을 또 한 번에 꺼낸 상민이 몸을 바짝 붙였다. 귀 뒤로 더운 숨결이 와 닿았다. 고개를 숙이려는데, 뒷 머리채가 잡힌 채 당겨졌다.
“으...사..상민아..왜...”
“헤에... 진짜네? 응? 아주 엉망으로 해 놨네? 난 또, 공주님처럼 곱게 모시고 있었더니, 더럽게, 하필 유부남하고 뒹굴었네? 응? 화대 받고 막 그랬어? 아이씨... 괜히 참았네...”
“...하..함부로 지껄이지 마.. 아악!”
머리가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바닥으로 넘어져 몸을 웅크리는데, 그가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왜, 그냥 하던 대로 얌전히 다리나 벌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렸다. 다치지 않도록 얌전히 힘을 빼야하는지, 한번 맞붙어 싸워봐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상민이 재킷을 벗었다. 벗겨진 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가 발로 그것을 멀리 차 버렸다. 뚝, 끊긴 벨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