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34화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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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섹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처음 알았다. 이런 걸 바로 강간이라고 하는구나, 생각하니 이제껏 태준에게 성 추행범 혹은 강간범이라고 타박하며 투덕거렸던 것이 정말 어린아이 장난처럼 느껴졌다. 여느 오래된 연인처럼, 우리도 간혹 다툰 후에 ‘몸으로 풀기’식의 화해를 하곤 했는데, 그때에도 태준은 거칠긴 했지만 한 번도 내가 수치스럽다거나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게이로서 정식 데뷔한 날에도, 아프고 무서워서 다음날 아침 엉덩이를 잡고 도망친 후로 삼년 동안 의도치 않게 순결을 지키게 했던  태준과의 첫 관계 때에도, 찢어지거나 피를 흘리지는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김태준 물건이 훨씬 크고 잘 생겼는데.

나는 흰색 시트에 번져있는 붉은 점을 바라보며, 그러고 보니 김태준 실력이 꽤 쓸 만했구나, 멍청한 생각을 했다. 기다시피 침대 아래로 내려와 벗겨 던져진 바지 속 호주머니를 뒤졌다. 던져진 충격으로 휴대폰 배터리가 빠져나와 있었다. 제대로 끼우고 전원을 켜자 곧바로 메시지 알림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희철이었다. 감히 제 전화를 씹었다는 둥,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둥, 투정과 투정이었고 화려한 육두문자로 마지막 문자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놈이... 친구는 지금 다 죽어 가는데...”

피식 웃는데 입술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 팔뚝을 물어뜯었더니, 곧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엄청 야비한 놈, 입술을 삐죽이다가 상처가 더 찢어졌다. 김태준한테는 탁상시계 던져서 이마를 터뜨리고, 어깨를 물어뜯고 등을 할퀴고 발꿈치로 찍었어도, 그래도 김태준은 한 번도, 장난으로라도 때린 적 없는데. 문희철이놈은 유도까지 한 놈인데, 내가 그 놈한테 참 맞을 짓 많이 해서 또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맞으면서도 ‘아, 이놈이 제 힘을 모두 쓰진 않고 있구나’ 감동했었는데.

이상민은 단 두 대였지만, 정말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비겁한 정해진은, 두 대 맞고 완전히 겁에 질려서 그 후로는 최대한 힘을 빼고 얌전히 다리를 벌려줬다. 이상민이 눈이 돌아가서 신나게 박았다. 거기가 찢어지는 건 정말 다신 못할 경험이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차라리 얼굴이나 다른 곳을 얻어맞는 것보다 더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었다.

“무섭다. 저 미친 새끼.”

욕실에서는 샤워기의 세찬 물줄기가 타일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와 함께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간한 주제에 샤워라니, 노래라니. 미친놈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들리지도 않겠지만, 나는 최대한 휴대폰 통화음을 줄이고 희철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더니, 녀석이 고의적으로 끊어버렸다. 어린이는 정해진이 아니라 문희철이다. 나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연결음이 오래 울릴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욕실 문을 힐긋거리며 다시 번호를 하나씩 꾹꾹 눌렀다. 대충 화가 풀렸는지, 이번에는 연결음이 세 번째로 반복되는 동안 ‘뭐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녀석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반갑다, 희철아.”

-배신자! 데이트가 그리 좋더냐! 친구 전화 막 끊어버리고!

“저기 희철아, 내가 지금 걷지를 못하겠거든. 그런데 미친놈이 샤워를 끝내고 나오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거든. 그래서 네가 좀 와줬으면 좋겠거든.

-이놈이 갑자기 무슨 말이야. 걷지를 못한다니... 미친놈은 또 뭐야.

“내..내가 무슨 일만 터지면 김태준, 그 유부남 아저씨를 불러서 이번에도 또 부르면 나 되게 쪽팔릴 것 같거든. 그냥 지금 우리 집에 좀 와주면 안 되냐?”

-무슨 소리야... 다리 다쳤어? 알았어, 어쨌든 지금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욕실에서도 물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상민이 침실로 들어왔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나를 보고 그는 픽 웃고는 멋대로 내 토너를 얼굴에 두드려 발랐다.

“너는 미친놈이야.”

“유부남하고나 노는 닳고 닳은 놈보다는 나아, 닥쳐.”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신고해봐. 왜, 강간죄? 우리나라에선 객체가 남자일 경우엔 강간죄 성립 안 되거든? 기껏 성추행정도야. 그리고 너랑 나, 사귀고 있던 거 우리 바 사람들 거의 다 알아. 게이들끼리 좀 거하게 놀다가 구멍 찢어지는 거야 뭐, 경찰 아저씨들은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걸.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무단 침입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이 집에서 뭘 훔친 것도 아니고... 아, 주먹 한 대 날린 거? 뭐 그 정도야. 여기 이거 보여? 팔뚝. 네가 먼저 물어뜯었어. 피를 본 건 내가 먼저야. 신고, 한번 해봐.”

“......”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찰 놔두고 문희철이 놈을 부른 건데, 그래도 알고 있던 거랑 나쁜 놈의 입을 통해 듣는 거랑은 또 달랐다. 우리나라 법 한번 참 편리하구나. 나쁜 놈들이 더 나쁜 짓 할 수 있게 만들어 놓다니.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깔걸. 엄청 고상한 척 하길래 뭐 진짜 처녀라도 되는 줄 알았지. 하! 유부남이랑 뒹굴어? 야, 차라리 내 손님들 너한테 좀 나눠줄 테니까 대주든가. 유부남이라니, 그럼 여자하고 사는 놈 아냐? 그냥 살기만 해? 그럼 그 새끼는 여자 구멍에도 남자 구멍에도 두루두루 좆 박는 새끼네? 그거 순 변태 아냐?”

“...너나 좀 닥쳐. 내가 아래가 걸레면 넌 입이 걸레야.”

바르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꾸덕꾸덕하게 마른 정액과 피가 떨어지며 상처를 더 벌려놓았다. 입술을 물면, 입술의 상처가 또 터졌다. 결국 이를 악문 채 버틸 수밖에 없었다. 벽을 짚은 손에 핏줄이 다닥 튀어나왔다. 이거 꽤 남성미가 넘치는 손등이라고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상민이 그런 나를 보며 ‘진짜 미친놈이 누군데’하고 비웃었다.

“변태들끼리 뒹굴 때는 뭐 어떻게 노냐? 어? 말 좀 해봐. 궁금해서 그래. 피스트 퍼킹(fist fucking)같은 것도 막 하고 그래? 아니지, 그 정도로 유연한 구멍은 아니던데. 찢어지기나 하고 말-”

“이제 조금만 있으면 유부남 아니야.”

김태준이 변태는 맞긴 하지만, 그래도 나쁜 놈한테 그런 얘길 들으니 비위가 상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끊고 꺼낸 얘기가, 고작 유부남을 옹호하는 발언이었다. 입을 합 다문 채 고개를 숙이자 상민이 배를 잡고 웃었다.

“크크큭... 아, 그러셔? 이제 유부남 아니면, 이혼남이야? 뭐야, 설마 너 때문에 이혼한대? 대단한데? 정해진,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네.”

“...나 때문이 아니야. 내..내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했어. 함부로 말하지 마. 완전히 정리 못하고 너 만난 거, 그건 미안하지만 어쨌든 지금 넌 미친놈이고 개새끼야. 이젠 너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

눈을 치켜든 채 이를 악물고 말하자, 침대에 앉아있던 상민이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벽에 기대어 있던 터라,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겁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의 화난 콧김이 이마를 미지근하게 적셨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꾹꾹 밀었다.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정해진. 같은 남자한테 구멍이나 뚫리는 주제에, 것도 모자라 유부남이나 꼬여내고 말이야.”

“넌 네가 게이인 게 창피해?”

그가 꾹꾹 밀던 손가락질을 그만두고 삐딱하게 선 채 ‘뭐?’하고 노려보았다.

“나는 내가 되게 쪽팔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네가 쪽팔려. 맘 없이 너랑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유부남이랑 질질 끌었던 것보다 더 쪽팔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놈이랑 뒹굴고 뒤도 박으라고 먼저 엉덩이 흔들었던 것도, 이제 안 쪽팔려. 그런 건 이제 하나도 안 쪽팔려. 최소한 너처럼 게이인 걸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게이 주제에 어설픈 마초도 아니고, 더럽게 노는 주제에 처녀나 동경하는 변태도 아니야, 나는.”

“너... 겁이 없구나?”

“이상민 너는, 처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처녀가 되고 싶은 거야, 이 변태 새끼...아악!”

상민이 이를 악무는 것까지 보았는데, 갑자기 후려친 손바닥에 한 순간 앞이 캄캄한 채로 멀리서 별이 번쩍였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내 쌀알 같은 폭력성을 휘저었다. 그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자신보다 약한 것을 향한 그의 독선과 자신의 비도덕성을 덮기 위해 타인의 비도덕을 비난하는 야비한 돌팔매질에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한 행동은 고작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둥글게 말아 움츠리는 것뿐이었다. 등허리로 그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아주 돌았지, 응? 정해진.”

“흣... 왜, 저..정곡을 찔렀냐? ..으읏..!”

“이게 진짜...아!”

오기였다. 한번 피를 봐서 그런지, 무서운 게 없었다. 죽지만 않으면, 마지막으로 백만 번째 살고 있으니까,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오기였다. 어차피 사람을 죽일 만큼 간이 큰 놈은 아니었다. 죽이지는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꼭지로 그의 턱을 받아버렸다. 뒤쪽으로 나뒹구는 녀석을 보자 속이 시원했다.

아래에선 이미 다시 찢어진 상처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통도 오기를 치켜세웠다. 나는 상민의 얼굴을 밟고 거실로 뛰쳐나갔다.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껑충 뛰기까지 했다. 벼랑 끝에 서면 못하는 게 없구나, 생각하며 현관문의 걸쇠를 푸는데 갑자기 뒷 머리채가 확 잡아당겨졌다.

“아흑..!”

“씨발... 정해진, 너 오늘 죽자.”

“노...놔! 놔, 이 개새끼야!”

나는 결국 바닥에 엎어진 채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침실로 다시 끌려갔다. 악다구니를 쓰며 그의 발목에 매달려 종아리를 물어뜯었다. 그가 펄떡 뛰며 내 아랫배를 걷어찼다. 배를 움켜쥐며 뒹굴었지만, 나는 또 언제 그의 턱을 받아버릴까 기회를 노렸다. 상민은 씩씩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태준의 이마를 향해 던졌던 탁상시계를 집어 들었다. 나는 개구리처럼 몸을 바짝 움츠렸다가 그가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숙일 때에 펄쩍 뛰어 머리로 그의 턱을 박아버렸다.

“아읏!”

꽤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뒤로 나뒹굴었다. 그런데, 그냥 뒤로 주춤하고 마는 줄만 알았는데 그의 상체가 뒤로 확 넘어가버렸다. 그리곤 그의 머리가 침대헤드 꼭지에 부딪치고는 바닥으로 힘없이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침대에 등을 기댄 채여서, 꼭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아....하....”

움직이지 않았다. 발끝으로 그의 무릎을 툭 건드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덜컥 무섬증이 일었다. 죽은 건가. 죽었을까. 설마.

“야... 이상민...”

그의 어깨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초인종이 날카롭게 울렸다. 대답을 않자, 문을 쾅쾅 두드렸다가 미리 걸쇠를 풀어놓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왜 또 문을 열어놓고 있냐. 야, 정해진. 해진아, 어디에-”

“희..희철아...”

“침실에 있냐? 어디 아픈 거...”

침실로 들어온 희철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발가벗은 나를 보곤 입을 합 다물었다. 희철의 일그러진 표정이 내 처참한 몰골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 몸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멍하니 서서 입술을 달싹였다.

“너... 이게 대체 무슨...”

“사..상민이가... 희철아, 상민이가...”

그제야 희철이 시선을 내리고 침대에 기대앉은 상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거리를 쿵쿵 발소리를 내며, 왁왁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와 상민의 멱살을 잡고 올려 세웠다.

“너 이 새끼, 대체 무슨 짓...!”

그러나 상민은 여전히 축 늘어진 채였다. 희철이도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상민의 몸을 침대 위로 눕힌 뒤 천천히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이거, 왜 이러냐?”

“주..죽었어? 머리..머리를 침대꼭지에 부딪쳐서... 움직이지 않는데... 죽었..죽은 거야?”

“오..오지 마, 기다려.”

다가가려 하자 희철이 등을 돌린 채 막아 세웠다. 그리고 상민의 얼굴 가까이 제 고개를 숙였다. 콧구멍 아래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보고, 목에도 손바닥을 대어 본 상민이 한숨을 훅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숨 쉬어. 맥박도 뛰고. 머리 부딪쳤다고? 그냥 기절했나봐. 너... 괜찮아? 대체 왜 이렇게...”

무릎이 후들거려서 제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대자 희철이 시트를 가지고 와서 아래를 대충 둘러주었다. 시트 위에 번져있는 핏자국을 본 희철이 아랫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축 늘어져 있는 상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 새끼, 정말 죽여 버릴까? 씨발... 그냥 죽여 버리고... 묻어버릴까?”

축 늘어진 채 힘없이 흔들리는 상민의 얼굴을 보자, 기가 막혔다. 허탈하고 허무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울먹임도 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이런 걸 생각한 게 아니었다. 내 인생에서 내가 계획한 대로 되었던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이래야 하는 건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좋아하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한때, 사랑하지 않아도 그에게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꼭... 이래야만 했냐? 어..? 흣... 이 개새끼야... 왜.. 왜 이렇게...”

나는 희철이 둘러준 시트가 내려가는 것도 잊고 상민에게 다가가 대신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나도 이제 힘이 하나도 없어서, 침대 위로 늘어진 그와 함께 엎어져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서러워서 엉엉 소리 내어 우는데, 희철이 묵묵히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어 건네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속옷을 받아들면서도 입을 크게 벌린 채 울었다.

“희..희철아... 나 아프다... 흐으... 이제 다.. 정말 다 끝났다...흐어어어... 끝났...흣...”

“그래, 다 끝났다. 이 새끼는 콩밥 좀 먹이고, 너는 아프니까 그래, 병원가자.”

“으으으... 나 되게 아프다...흐으으...윽..우..우욱..!”

속옷을 손에 꼭 쥐고, 나는 목이 쉬어라 울었다. 그러다 왈칵 올라오는 토기에 입을 급하게 막았지만, 식도를 태울 듯 신 것이 올라왔다. 흰색 시트에 토해진 것은 노란색의 위액과 함께 붉은 피도 섞여있었다. 그리고 점점 눈앞이 흐릿해졌다. 해진아, 정해진. 하고 부르는 희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   *   *

블라인드를 쳐놓지 않았는지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이 부셨다. 인상을 찌푸리며 끙끙 신음소리를 내자 ‘정해진’하고 부르는 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또 문희철이냐?”

“괜찮아? 야, 눈 좀 떠봐.”

눈이 부시다고 말하자, 희철이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감은 눈 위로 비치던 햇살이 걷혀졌다. 실눈을 뜨자 희철이 바짝 얼굴을 가까이 드밀었다.

“좀 어때? 아프냐? 간호사 부를까?”

“나 여기 며칠 있었냐?”

“...일주일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건 무슨 충격만 받으면 페이드 아웃이야... 그래도 저번처럼 한 달은 안 끌어서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희철의 얼굴도 많이 상해있었다. 꾀죄죄하다고 놀렸더니, 희철이 멍청이처럼 허허 웃으며 기름 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벽시계를 확인하니 희철이 출근할 시간이 지나있었다. 학원 안 가냐고 물었더니 ‘휴가’하고 짧게 답했다.

“휴가는 무슨. 그쪽 휴가 짠 거 다 아는데. 혹시 잘린 거 아니냐?”

“나 이래봬도 스타 강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기 있는 강사다. 함부로 못 잘라.”

“...나 때문에 휴가 낸 거야? 뭐 이런 걸로 휴가까지 내고 그러냐? 무슨 죽을 병 걸렸다고.”

은수저 안 물고 태어난 인간들은 그저 죽어라 일해야 한다고 타박을 하는데, 희철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혹시 내가 정말 죽을 병 걸린 거냐고 묻자 입술을 삐죽이며 ‘행여나’ 하고 피식 웃었다.

“근데 왜 그렇게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쩔쩔매고 그러냐.”

“....너 깨어나면 제일 먼저 말하고 싶었던 건데 말이다...”

“응, 말해라.”

“...미..미안하다. 미안해, 정해진.”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희철은 얼굴이 확 붉어진 채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뺨을 감싼 채 ‘죽겠네’하고 중얼거렸다. 혹시 이놈이 날 좋아하나, 손을 뻗어 엉덩이를 툭 건드리자 ‘히익’ 소리를 내며 기겁을 했다. 별로 안 좋아하네. 얌전히 팔을 배 위에 올려두고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놈이랑 만난 거... 게이바 간 거... 다 내 탓이잖냐. 다 내가-”

“미친놈. 그게 왜 네 탓이냐? 사귈 생각 없었으면 처음부터 나 혼자 찾아가지도 않았다. 누구 탓이 아니야. 그냥... 이렇게 될 법 했으니까 그렇게 풀린 거지.”

“호...호모라고 욕하고... 유부남하고 사귄다고 때린 거... 다, 다.. 미안하다...흐윽...”

“....네가 걱정한 거 다 안다. 호모가 죄는 아니지만, 솔직히 유부남하고 사귄 건 맞을 만하지 뭐. 울기는. 울지 마, 인마. 추하다.”

울지 말라는데도 희철은 꺽꺽 소리 내며 울었다. 그리곤 티슈를 뽑아 팽팽 소리 내어 코를 푸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호모가 죄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유부남하고 사귄 건 맞을 만하다는 것도 아는데도, 그동안 꽤 서러웠다. 그래서,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하니까, 고마웠다. 내가 호모인 게 되게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그런데 문득 유부남하고 사귀는 문제는 이제 어떻게 되나, 생각하다가 병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이게 보통 병실이 아니라 특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유부남 아저씨한테 연락하지 말랬지.”

“경찰이랑 병원이랑 동시에 떠올리면 생각나는 게 그 사람밖에 없는데 어떡하냐. 그..그리고 이제 이..이혼한다며. 유부남 아니지 뭐...”

“지랄. 지가 언제부터 김태준 편들었다고.”

“그..그래도 그 사람이 이상민이 그 새끼, 있는 죄 없는 죄 몽땅 끄집어내서 형량 최대한 늘려놨단 말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

상민의 이름을 듣는데,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저, 토사물처럼 역겨운 것으로 더럽혀진 지난 추억에 대한 냉정한 회상이었다. 나는 앞으로, 아버지를 죽였던 살인자를 떠올리면 피가 들끓겠지만, 상민을 떠올리면 차갑게 가라앉을 것이다.

“걔는 어떻게 됐어? 머리 다친 건.”

“그냥 가벼운 뇌진탕이었단다. 하루 만에 깨어났어. 빌어먹을 새끼.”

“태준 씨가 있는 죄 없는 죄 몽땅 끄집어냈다는 건 무슨 소리고.”

“그게... 그 새끼, 알고 보니 해시시 하고 있었더라고. 그 바에서 일하는 놈들하고 다 같이.”

“...해시시..? ...마약?”

희철이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였나. 아픈 게 아니라, 열이 나는 게 아니라, 성격이 원래 활달한 게 아니라, 그런 곳에서 일해서가 아니라, 고작 그런 것 때문이었나. 문득, 그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마약이라니. 얼마나 사는 게 심심했으면 그런 거에 기대었을까.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새끼를 아예 공급원으로 덮어버렸다. 아..아니, 그 놈이 직접 약도 하고 약도 팔고 파틴가 뭔가 열어서 모르는 사람한테도 억지로 하게하고, 하여튼 다 그놈이 한 거다. 그리고 너, 절대안정이니까 무조건 여기서 며칠 푹 쉬어야 한다.”

“...나, 죽기 직전까지 맞은 걸로 돼 있냐?”

“......정해진, 너 그 정도면 죽기 직전까지 맞은 거 맞아!”

희철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리고 이상민이 놈이 얼마나 악덕한 놈인지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서, 조금 지루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만하면 알아들었다고, 이상민이 놈 정말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동조해주고 말았다.

“거기다 너! 진짜 절대안정이야 인마! 네 속 지금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야. 넌 아프면 병원 와서 검사라도 좀 받아봐야지 미련하게 왜 참고 있었던 거냐?!”

“속이... 너덜너덜해졌어? 그럼 이제 그거 못하겠네...”

아쉬워하며 말하자 희철이 왁왁 소리를 지르며 ‘돌겠네’하고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짝짝 두드렸다.

“그 속 말고! 진짜 속! 몸 속! 처음엔 그냥 신경성 위염이었는데 네가 그냥 냅둬서 역류성 식도염까지 덤으로 얻었단다. 위액 토하고, 피까지 같이 나온 거 다 그거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 무조건 병원에서 주는 것만 먹고, 스트레스는 절대 받으면... 하긴 그게 받으면 안 된다고 해서 안 받을 수 있겠냐만은...”

그렇지,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떠오르지 않을까. 성인군자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거나, 내가 꼽추 노인에 관한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분노와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상민의 일 또한 차가운 경멸로서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이, 구멍이나 뱃속이 아니라, 진짜 속이 너덜너덜해지면, 머리가 하얗게 새고 뼈가 약해지고 주름이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희철아. 나는 건강하게 늙고 싶다.”

“...걱정 마, 인마. 선희랑 기정이랑 나랑, 그렇게 평범한 인물들은 아니잖냐. 웃겨줄게, 매일 책임지고 웃겨준다. 원래,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잖냐.”

“응, 고맙다.”

그래서 우리는 머저리처럼 웃었다. 병신처럼 웃었다. 웃을 때마다 찢어진 입술이 따가웠지만, 그래도 만병통치약의 위대함을 믿고, 웃었다.

저녁 즈음에는 선희와 기정이 병문안을 왔다. 혹 출판사 사람들을 우르르 몰고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단 둘이 손을 잡고 왔다.

“당연하지. 호모들의 치정 사건 때문에 드러누웠다고 어떻게 말하냐?”

“선배!”

“괜찮아, 기정아. 호모들의 치정 사건 맞지 뭐. 근데 선희야, 너 그렇게 막말 계속 하면 내가 최 선배 확 꼬셔버린다. 예전에 최 선배가 나 좀 귀여워했는데.”

선희가 날뛰었고, 기정이 그런 선희를 겨우 잡아 눌러서 나는 더 이상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정은 내가 먹을 수 없는 떡볶이를 사가지고 와선 쩝쩝 소리 내어 먹다가 선희에게 결국 뒤통수를 까이고 말았다. 나는 말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떠난 늦은 밤에야 나도 다시 잠을 잘 수 있었다. 꿈을 꾸었는데, 산속에서 길을 잃는 꿈이었다. 앞뒤 사정이야 모르지만, 꿈속에서 나는 아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았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커다란 나뭇잎을 헤치고 보니 위쪽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는 샘이 보였다. 마침 목이 말라서 샘물을 떠 마시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좁다란 산길에서 비구니들이 승무를 추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나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비구니에게 그렇게 물어보자 비구니는 그저 살풋 미소 지으며 계속 승무를 출 뿐이었다. 다른 비구니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 돌아오는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결국 승무를 모두 마칠 때까지 느긋하게 앉아 샘물이나 마시며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한참을 비구니들의 승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여승들의 얼굴이 나비의 그것과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나야 곤충학자가 아니니 나비의 대충의 모양새가 아닌 머리 부분의 정확한 생김새 같은 거야 알 수 없지만, 그저 꿈이니까 아련하게 ‘아, 나비의 얼굴이구나’하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정말 모든 비구니들이 갑자기 진짜 나비가 되어서 훨훨 날아가 버렸다. 허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또 다시 혼자가 되어서 서럽기도 해서 샘물을 술처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문득, 샘물이 진짜 샘물이 아니라 다른 무엇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번엔 또 뭘까, 하고 곰곰이 흐르는 샘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버지의 얼굴이 비치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니, 아빠!’

‘응, 그래. 괜찮다.’

‘예? 거기서 뭐 하세요?’

‘응, 그래. 괜찮다, 다 괜찮아.’

아버지는 앞뒤 설명도 없이 그저 ‘괜찮다, 괜찮아’하는 말만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말인지 물으려다가, 어린아이처럼 ‘히힝’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 허무하고 아쉽고 서러워서가 아니라, 위로가 되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샘물로 뛰어 들어가 찰박찰박 물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초봄의 둥근 달이 창문 가득 넘치도록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언젠가, 달빛에도 눈이 부신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편안해서 형광등 불빛이나 태양광선보다 매일 달빛으로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밤이었으면.

나는 아득한 시선으로 달을 바라보다가, 역시 창가에 서서 그런 달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의 넓은 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포즈가 영락없는 불량배였다. 따지고 보면 김태준도 별로 재벌 3세답지는 않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태준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내가 깨어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당신도 희철이처럼 일주일 동안 머리를 감지 못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거짓말하면 안 돼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죄를 더 불려서 덮어씌울 수 있는데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죄책감 느끼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놔 봐요. 돈으로? 인맥으로?”

“......둘 다. 실제 공급원 찾아내서 매수했어. 그쪽은 꿩 먹고 알 먹은 거지.”

“우와.”

“...죽이고 싶었어. 몰래 죽이고, 어디 묻어버릴까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안 죽였는데요?”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착한 척해봤자.”

입을 삐죽이자 태준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알고 그러는 거다. 아주 약았다. 은근슬쩍 입술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서, 불리고 불려서 몇 년 형이 나왔는데요?”

“아직 그건 안 나왔어. 계속 조사 중이고, 난 계속 더 불릴 거니까.”

“거봐. 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우리나라 참 살기 좋은 나라야.”

“내가 뒤끝이 좀 있어. 이번까지만 조금 나쁜 짓 할게. 다음부턴 안 해. ...근데 그 놈 정말 나쁜 놈 맞아.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 약으로 폐인 만들고 중간에서 돈 챙기고.”

내가 계속 몰아붙이자 억울했는지, 태준이 투정을 부리듯 이상민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해도 싼 놈이네’하고 동조해주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거야 말로 부끄러웠다. 성격이나 배경은 둘째 치고, 하필 그런 범죄형을 사귀어서는.

내가 입을 오물거리고 있자 그것을 알아챘는지 태준이 ‘괜찮아’하고 말해주었다. 이 사람은 또 뭐가 괜찮다고 하는 건지 역시 모르겠지만, 어쨌든 괜찮다니 안심이 되어서 어깨를 조금 펼 수 있었다.

“또 궁금한 거.”

“응.”

“내 차 박은 거, 정말 내가 병문안 안 가서, 심술 나서 그랬어요?”

“말했잖아, 너무 반가워서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포옹하고 싶은 걸 참느라 그랬다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한번은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응.”

“내가 본 친자확인 감정서, 그건 뭐예요?”

“아...”

대답은 않고 태준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뭔가 하고 봤더니, 꼬깃꼬깃 접힌 종이였다. 건네주는 걸 받아들고 펼쳐보니, 친자확인서였다. 검사한 모든 유전자 좌위에서 일치하고 친부 확률값은 99.99%. 그러니까 한마디로, 김태경은 김태준의 친자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거봐, 내가 맞다고 했잖아. 제 자식 몰라보는 부모는 없어.”

“......그런데 태준 씨도 되게 웃기네요. 자기 친 아들 맞다고 불륜상대한테 자랑하는 건 무슨 심본데요? 자랑하는 건가?”

“......”

“그건 그렇고. 내가 물어본 건 이게 아닌데?”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넌 대체 잠자다 일어나서는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얼른 다시 자. 너한테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

잠을 재우려는 건지 억지로 내 눈 위로 손바닥을 덮으며 가슴을 토닥이던 태준이 문득 말을 하다 말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혼내려는 건가 싶어 얼른 눈을 감았는데, ‘정해진’하고 이름을 불렀다. 다시 눈을 떴는데, 그의 얼굴이 너무 외로운 사람의 그것처럼 메말라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손끝이 눈가를 쓰다듬으면 눈을 깜빡이는 인형처럼 저절로 눈이 감겨서 계속 그의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는데, 그가 문득 내 손을 잡아 입술로 꾹 눌렀다.

“너도, 대답해줘. 내가 궁금한 거.”

“하나는 뻥이고 하나는 제대로 대답 안 해줬으니까, 질문 하나만 받아요.”

“응.”

“해요.”

하라는데, 그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손을 잡고 손등 위로 입술을 부비기만 했다. 키스하고 싶은 건가, 입술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서 아플 텐데, 생각하면서도 한번 해줄까 싶어 말을 꺼내려는데 그가 먼저 ‘만약에’하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아무 것도... 집도 없고, 차도 없고, 경찰이랑 짜고 치는 돈이나 인맥도 없으면, 그래도, 정해진은 김태준한테 올 수 있나?”

“...김태준한테 집 없고 차 없고, 경찰이랑 짜고 치는 돈이나 인맥도 없으면, 대체 남는 게 뭐가 있는데요? 무서운 얼굴이랑 욱하는 성격밖에 없잖아.”

“......자랑은 아닌데, 내가 테크닉도 좀 좋잖아.”

“그거 참 대단한 자랑이시네요.”

“자라, 자. 넌 그냥 입 다물고 자고 있을 때가 제일 예뻐.”

그가 막무가내로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씌웠다. 하체는 잘 움직일 수 없지만 손만이라도 움직여 그와 투덕거림을 하는데, 그가 또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만 있어서 나도 얌전히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너무하잖아요, 환자한테.”

“....가기 전에, 혀 한번만 핥아도 돼?”

“......”

“보아하니 입술은 안 되겠고. 혀만 좀 내밀어 보지? 여기 특실 비싼데.”

혀를 물어버릴까 생각했지만, 비싸다니까, 입술은 안 건드리고 혀만 핥는다니까, 그냥 조금 내밀어주었다. 그리고 그도 고개를 숙이고, 정말 혀만 조금 핥고 말았다. 이건 키스하고는 달라서, 기분이 좀 이상해서, 얌전히 누워 얼른 눈을 감고는 코고는 시늉을 했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을 때는 병실 가득 달빛이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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