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35화 (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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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대표는 직접 사가지고 온 뻥튀기를 아삭아삭 소리 내어 먹으면서 얼굴 가득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이 아니니까 뻥튀기는 먹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에 나도 조금씩 뜯어먹다가 결국 부스러기를 이불 위에 가득 흩날리면서 열심히 먹어댔다.

“역시 옛날 과자가 최고에요, 계속 먹어도 질리지도 않고. 그렇죠?”

“네. 혹시 여기에 초콜릿 녹여서 발라먹어 보셨어요? 그것도 되게 맛있는데.”

“그래요? 그렇게는 또 안 먹어봤네. 아, 요거트에 찍어먹어 보셨어요?”

“당연하죠. 그거 진짜 짱 맛있어. 엄청 좋아해요.”

“으허허허, 그럴 때보면 정해진 씨 아직 어린애 같아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만면에 가득 띤 손 대표를 보며 나는 그건 당신도 그리 다르지 않다고 응수해주려다가, 그래도 어른인데, 싶어서 그냥 참았다.

내가 강도를 당했다고 알고 병문안을 온 손 대표는 몸은 좀 괜찮으냐는 아주 통상적인 인사도 하지 않고 요즘 만화책은 뭐가 재밌고 과자는 어느 회사 것이 맛있는가에 대해서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좋았다. 그런 어른, 그런 중년이 되고 싶었다. 아픈 곳을 계속 상기시키고 분노하게 하는 것보다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로 인해 좋은 꿈을 꾸게 하는 사람.

“참, 해진 씨 책, 조금씩 판매부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아세요?”

“그래요? 신간도 아닌데요?”

“네! 내 생각이 옳았어요. 해진 씨 작품은 단지 출판사와 대표를 잘못 만난 것뿐이었어요. 이음동화 앞에 그냥 ‘태인’만 붙었는데도 광고효과가 제대로 됐던 것 같아요. 역시 이름값을 하긴 하네요.”

“그건 사람들이 얍삽해서 그래요. 그냥 무조건 이름만 따지니까.”

“아니에요. 태인 이름 효과도 컸지만, 김 전무가 일러준 대로 광고 대상 방향을 틀어잡은 게 확실히 제대로 한 몫 한 것 같아요. 김 전무가 그랬거든요. 아이들한테는 조금 어려운 책이라고. 차라리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컨셉으로 나가자고요.”

“...그런 얘기도 했어요?”

“아, 내가 말 안 했나요? 김 전무, 태인 이음동화 공동대표에요. 우리가 태인 문학하고 합병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김 전무 직속이죠 뭐. 그래서 마케팅 부분은 거의 김 전무한테 기대고 있어요.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긴 한 것 같아요. 괜히 태인 후계자가 아니지. 잘만 하면 해진 씨 책, 번역 돼서 비행기 탈지도 모르는데, 진짜 그렇게 되면 되게 좋겠다, 그렇죠?”

나는 뻥튀기를 아작 씹어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 대표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흥얼거리기까지 하며 뻥튀기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자신이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인정한 꼴이 되었는데도, 그리 좋을까. 나는 잠시 내가 정말 저런 중년이 되어도 괜찮은가, 고민해야 했다.

“저기... 제 말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아이구, 오해는 무슨. 깨끗한 마음으로 들을 테니 말씀하세요.”

“저... 손 대표님은요, 사업보다는 그냥 건전한 일을 하시는 게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아요. 아무리 아동문학 출판사라고 해도 이것도 어쨌든 치열하게 경쟁하고 물건을 팔아먹어야 하는 사업이잖아요.”

혹 어른께 실례가 되는 말이 아닐까 조심조심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었는데, 손 대표는 껄껄 웃으며 ‘맞아요, 맞아’하고 맞장구를 쳤다. 정말, 아무리 봐도 사업할 사람은 아니었다.

“김 전무도 그런 말 하더군요. 편집장으로서 출판물에 관해서만 일의 폭을 조금 좁히는 대신 깊게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긴 뭐, 공동 대표라고 해봐야 바깥일은 김 전무가 다 맡아서 하니까. 김 전무, 합병 된 뒤부터 거의 일인 대표로 일하고 있어요. 이거, 우리 쪽에 너무 관심 가져주시니까 오히려 부담스러운 거 있지요? 태인 기업 쪽 일로도 벅찰 텐데 미안하게스리. 으흠.”

“기분 안 상하셨어요?”

“에이, 기분 상할 게 뭐 있어요. 나는 합병 얘기 나올 때부터 그 부분은 이미 어느 정도 포기한 사람이에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많이 봐줘서 공동대표 이름만이라도 가지고 있지, 보통은 나 쪽박 차고 나가야 돼요. 욕심 부리면 안 되지.”

나는 또 뻥튀기를 우물거리면서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 대표를 보며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나는 절대 사업에는 손대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선희가 말해주었는데, 나는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유형이라서 절대 큰돈을 만지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울한 지적이었다.

열심히 뻥튀기를 뜯으면서 역시 손 대표가 가지고 온 만화책을 뒤적이는데 휴대폰 문자 알림음이 따랑, 울렸다. 얼른 폴더를 열고 확인하니, 화끈하게 데워준다는 의문의 광고 문자였다. 곧바로 지운 후에도 씩씩거리며 뻥튀기를 뜯자 손 대표가 ‘왜요?’하고 물었다. 이상한 광고 문자가 왔다고 대답하자 ‘어떤 거?’하고 또 물었다.

“화끈하게 데워준대요.”

“으음, 프라이팬 광곤가?”

나는 순간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보일러 광곤가?’하고 중얼거리는 손 대표를 보고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프라이팬이든 보일러든, 공짜로 준대도 싫었다. 내가 기다리는 문자나 전화는 따로 있었다. 태준은, 일주일 전에 내 혀를 핥고는 나간 후로 다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이틀 후에 문자로 ‘바쁘다, 기다려’하는 아주 성의 없는 메시지가 딱 한 통 온 후로는 코빼기는커녕 전화나 문자도 오지 않았다. 혀, 내주지 말걸.

“재수 없어.”

“에..예?” “손 대표님 말고요.”

아작아작 뻥튀기를 씹는데, 이번엔 노크도 없이 갑자기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반쯤 누워있던 상체를 퍼뜩 일으켜 쳐다보았는데, 들어온 인간들은 웬수 삼인방이었다.

“여어, 팔자가 늘어진 정해진. 나도 출판사 관두고 이런 특실에서 며칠 좀 푹 쉬었으면 좋겠다.”

“해진이 형은 초췌하니까 더 예뻐 보여요! 하늘하늘한 꽃사슴!”

“이런 미친놈. 야! 그런 건 여자한테나 쓰는 표현이잖냐! 그리고 저게 어딜 봐서 하늘하늘한 꽃사슴이냐! 눈곱도 안 뗀 꼬질꼬질한 몰골이구만.”

들어오자마자 싸워대는 녀석들 때문에 손 대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손에선 뻥튀기를 놓지 않고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선희가 먼저 손 대표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우리 애 잘 봐주십사, 어쩌고 하며 인사를 했는데, 나는 대체 그 ‘우리 애’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희철에게 기정은 ‘희철 형님은 오동통한 내 너구리~’하며 기름을 부었다. 나와 손 대표와 선희는 둥글게 앉아서 과연 곰이 너구리가 되려면 몇 등분으로 나누어야 하는지 계산을 해야 했다.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선희가 손 대표를 의식하지 않고 ‘저 둘 수상하다’ 속삭였다. 손 대표는 뭘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잘 어울리네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손 대표와 인사를 나누지 않고 둘이서만 싸우고 있던 희철이 싸늘히 식은 표정으로 다짜고짜 손 대표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기정이 어른께 그럼 안 된다며 말렸다.

진정하고, 화해하고, 손 대표를 포함한 우리 다섯은 369 게임을 하며 우애를 다졌다. 하지만, 싸우고 화해하고 놀았더니 출출해졌다며 멋대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내 앞에서 먹어대는 네 명을 향해 저주를 퍼부은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희멀건 죽을 떠먹으며, 치킨과 피자 냄새에 훌쩍거리며, 욕을 했다. 손 대표가 동화 작가는 바른 말 고운 말만 써야한다며 욕 하는 정해진을 말렸다.

“냅두세요.”

삐딱하게 답했더니, 손 대표도 더 이상 나를 말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잠시 후 불독처럼 생긴 수간호사가 ‘주사 맞을 시간’이라며 들어왔다가 그 꼴을 보곤 왈왈 짖으며 모두를 쫓아내 버렸다. 나는 평소보다 훨씬 얌전하게 엉덩이를 까고 불평불만 없이 주사를 맞았다.

간호사가 나가고, 제자리에 누워 엉덩이를 문지르는데 또 문이 빠끔 열렸다. 또 누구냐, 하고 소릴 지르자 희철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곤 무얼 놔두고 갔는지 제가 앉았던 의자에서 까만색 봉지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뭔가 하고 쳐다봤더니, 두툼한 여성 잡지였다. 아니, 주부잡지였다. 설마, 갑갑한 병원에서 내가 아무리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지만 이걸 읽으라고 주는 걸까 싶어 입을 헤 벌린 채 올려다보니, 희철은 ‘자’하고 불쑥 그것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두는 게 아닌가.

“읽으라고? 이걸? 나더러? 설마, 네 눈에도 내가 꽃사슴으로 보여?”

“꽃사슴 얘기는 꺼내지 마. 어쨌든 읽어봐. 오늘 발간된 따끈따끈한 거다. 다 안 읽어도 되고... 245 페이지, 그것만. 간다.”

그리곤 희철은 홍콩영화 주인공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 치는 제스처를 취하곤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빈 병실에서 손가락을 입속으로 넣어 ‘웩, 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다시 병실 가득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허벅지 위에 놓인 잡지를 멍하니 보다가, 우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두었다. 채널은 상관이 없었다.

245페이지를 찾지는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첫 장부터 광고 페이지까지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아줌마들이나 읽는 잡지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정보가 꽤 많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부부생활에 관련된 기사를 꽤 꼼꼼하게 읽었다. 딱 한 번 바람피우다 현장을 잡힌 남편을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주부들의 실제 인터뷰 내용은 정독을 했다.

그러다 어느새 244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245페이지에 실린 내용은 태인 기업과 JH 기업 사이에 있었던 정략결혼이 결국 파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한쪽 지면의 절반가량을 멀리서 찍은 태준의 전부인 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배경은 공항이었다. 아마도 몰래 찍은 듯 초점은 흐릿했지만, 내가 확실히 알아본 것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그 곁에 측면을 향해 서 있는 차경현의 얼굴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JH의 차녀이자 태인 기업의 며느리가 유학을 핑계로 출국을 했지만,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전부터 불거져 나오던 소문들로 미루어보아 사실상 정식 이혼절차를 밟기 전 별거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성 기사였다. 그리고 수많은 ‘관계자’와 ‘지인’들이 등장을 해서 두 사람의 파국의 원인을 진단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며 나는 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다행히 내 이름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차경현의 이름도 나오지 않았다. 양쪽의 불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사이니만큼 부부로서의 정이 돈독하지 않았다는 점과 태인과 JH 간에 상호 추진하던 통신사업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수많은 ‘관계자’와 ‘지인’들의 이혼사유 추측이었는데, 후자가 더 힘을 얻고 있었다.

기사는, 결국 모성이나 부성보다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 갓난아이를 두고 헤어지는 박정한 부모에 관해 꼬집으며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주 객관적인 시선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볼 것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골고루 나눠 짊어져야 할 비난이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다가 종이의 모서리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계속 읽어 내려간 기사의 끄트머리에는 JH 차녀가 현재 유학 중 머물고 있는 아파트의 시세와, 내용에 비해 어이없을 만큼 짤막한 한 줄로 정리된 태준의 현 상황이 기재되어 있었다.

“...현재 태인 기업의 전무이사로 재직 중인 김태준 전무는 경영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 현직에서 물러나 해외근무를...”

잡지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휴대폰도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락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는지 사람들이 와글와글 웃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나는 다시 이불을 홱 걷어내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리모컨도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이 깬 것은 사락사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에 의해서였다. 잠귀가 그리 밝은 것도 아닌데, 그저 종이 넘기는 소리일 뿐인데도 의식이 선명하게 깨어났다. 이불은 어느새 허리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대로 누운 채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는 벌써 홀쭉해진 달이 외롭게 떠 있었다. 그리고, 창가에 선 여자가 내가 던졌던 잡지를 달빛에 기대어 훑어보고 있었다.

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내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닮았다. 그는 전혀 닮지 않았다고 했지만, 나도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태준은 그의 어머니와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눈빛이 닮아 있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듯 곧게 바라보는 눈빛.

“나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닌가요? 내가 너무 늦게 왔나보군요.”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다. 울다가 힘이 빠져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퉁퉁 부은 눈가를 비비며 ‘아니에요’하고 답했다. 비적거리며 일어나 앉는데, 그의 어머니가 손을 저으며 ‘그냥 누워있어요’하고 말렸다. 그래도 나는 앉아만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강도를 당했다던데, 좀 괜찮아요?”

“예, 이제 며칠 후면 퇴원해도 될 정돕니다.”

태준의 어머니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또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잡지를 올려둔 채 다시 창가에 기대어 섰다. 나는 또 ‘닮았다’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참 복잡하고도 단순해요. 이런 잡지에 은근히 정보를 흘리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구나, 하고 믿어버리니까. 사람들은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파탄으로 치달은 원인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의 불륜이라는 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재미있어 하지만, 실제로는 차라리 두 기업 간의 이윤추구 문제로 인한 갈등이 진짜 원인이라는 데에 더 쉽고 빨리 이해를 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얼 내려다보는지, 태준의 모는 창가에 바짝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긴, 기업인들한테 가장 중요한 건 이윤추구니까. 무어든, 남는 게 있어야 하죠. 나도 알아. 아니, 내가 가장 추구하는 것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아들과 며느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아니다, 마치 내 속을 훑어보기라도 하듯 응시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다들 후회할 거예요. 아직 젊은 혈기로 무작정 뛰어들었겠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야. 곧 지나가버리지.”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잖아요.”

머뭇거리며 그러나 또박또박 대답을 하자, 태준의 모가 놀랐다는 듯 그러나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조금 빼고 ‘흥’하고 웃었다.

“이게 백만 번째 삶일 지도 모르잖아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저는. 아니, 저희는요.”

“정해진 씨가 지금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끝이 뻔해. 그런데도 계속 가겠다고?”

“사..사모님은 언젠가 눈 감을 게 뻔한데도 지금 열심히 살고 계시잖아요.”

“...건방진 말도 다 할 줄 아네.”

“죄..죄송합니다...”

건방졌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손톱을 물어뜯자 태준의 모는 또 ‘흥’하고 비웃었다. 나는 발발 떨면서도 ‘정말 똑같다’하고 생각했다.

“사랑이라...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그걸 불륜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어때요? 정해진 씨는,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언 것 같아요?”

“......”

“정해진 씨. 그런 말이 있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 생각엔 말이에요, 사랑이 불륜이 되는 순간은 그 책임을 저버릴 때부터인 것 같아. 수연인 갓난아이를 버렸고, 태준인 제 역할을 버렸어. ....평소엔 똑 부러지다가도 결정적인 데에서 미련을 떠는 건 꼭 그 사람을 닮았어.”

태준의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홀쭉한 달을 바라보았다. 나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가득 찬 만달보다도 오히려 손톱달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러지기 직전의 간절함 같은 것이 병실 안으로 교교히 흘러들어왔다.

틀렸다. 그녀의 말은 틀렸다. 언젠가 눈 감을 날이 있으니까, 언젠가 뒤돌아설 사랑이므로 더없이 소중하다. 나는 자연스레 늙을 것이고, 우리의 사랑도 언젠가는 열정보다는 버릇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살아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태준인... 태인 기업 경영 승계권에서 제외될 거예요.”

무덤덤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나였다.

“그게 무슨...”

“나는 그 아일 위해서 모든 걸 버렸는데... 아니, 그 아일 위해서 모든 걸 가졌는데, 그 아인 정해진 씨를 위해서 모든 걸 다 버렸어요. 거기엔 물론 나도 포함되고 말이야. 흥, 이래서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거야. 가당치도 않은 협박이라니. 호랑이 새끼도 제 어미 엉덩이를 물진 않는데. 태경이한테 똑같은 꼴을 당해보라지.”

태준의 모는 짧은 한숨을 내쉬곤 작은 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인사는 받지도 않고 문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 나갔다. 문을 열다말고, 멈칫 선 채 뒤돌아본 얼굴에는 원망도, 안타까움도, 그 무엇도 담겨있지 않았다.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도, 사랑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평생, 죄 짓는 마음으로 살아요. 그래야 공평하겠지.”

탕, 하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빈 복도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을 두드렸다.

*   *   *

고개를 꺽은 채 한참을 활짝 핀 벚꽃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며칠 후면 모두 져버릴 것이었다. 봄비라도 한번 내리면, 순식간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꽃이 지면 새파란 새싹이 돋을 것이다.

머리 위로 윙윙 소리를 내며 돌고 있는 꿀벌을 손으로 쫓으며 나는 멍하니 벚꽃의 색감을 눈으로 익혔다. 곧 다시 작업을 시작해야했다. 이번에는 아주 근사한 사계의 풍경을 그려 넣고 싶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의 색채를 담고 싶었다.

이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햇빛을 가리며 온갖 봄꽃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호주머니 안의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손 대표였다. 인세가 오를 예정이니 잠시 출판사에 들러 상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저 어제 퇴원했어요.”

-에이, 그래도 인세 오르니 좋지요? 어디 불편한 데 있는 거 아니면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하는 겸 나와요. 밀린 삽화 작업 얘기도 해야 하는데, 네?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는 둘째치더라도, 그래, 밀린 작업은 해야 했다. 즐기면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게 또 생계와 연관이 된다고 인식을 하면 어깨 힘이 쭉쭉 빠지곤 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러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아주 희미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미윰-”

“어디에 있어?”

수풀을 뒤지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자 산책을 나온 연인들이 내 꼴을 보곤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시선을 상관 않고 한참을 여기저기 손을 휘젓다가, 축축하게 이슬이 맺힌 수풀 사이에서 작은 새끼 고양이가 빤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자 또 ‘미윰’하고 울었다.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었다. 물면 어쩌나, 조심조심 머리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내 손바닥에 꾹꾹 문질렀다.

길을 잃었거나, 어미를 잃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그거지만. 불쌍한 것, 인생은 원래 혼자 가는 거란다.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새끼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차 열쇠를 집어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정비소 직원은 웬만하면 차를 바꾸라고 말했다. 나는 정비비용을 몇 푼이라도 깎아보겠다고 ‘네가 새 차 살 돈 보태줄 거냐’는 말을 삼켜야 했다. 고양이를 허벅지 위에 올려둔 채 시동을 거는데, 뭐 이만하면 아직 탈만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허벅지 위의 고양이가 몸을 부들 떨었다.

“있잖아, 손 대표만 얼른 만나고 병원 가자? 인세, 현금으로 달라고 해버려야지. 제일 비싼 동물병원에서 주사도 맞고 미용도 하고. ...그런데 제일 비싼 동물병원은 어디지?”

고양이는 이미 잠들어 있는데, 나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를 몰았다. 내가 참 많이 심심한가보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손 대표 말처럼 정말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라도 하는 것 같은, 할랑할랑한 봄바람 같은 느낌이었다. 멀리서 ‘이음동화’라고 간판을 내건 건물이 보였다. 말이 건물이지, 고작 3층을 쓸 뿐이었다. 주차장으로 커브를 도는데, 뒤에서 빵! 하고 클랙슨이 울렸다.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데 왜 그러나 싶어 룸미러로 뒤를 확인하는데,

“....설마...또...”

어느새 나타난 에쿠스 리무진이 뒤를 따라붙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왠지 안심이 되지 않아 그 자리에서 차를 멈춰 세우고 허벅지 위에서 얌전히 자고 있는 고양이를 두 손으로 안아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잘난 에쿠스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이제 막 햇빛을 본 내 똥차를 박아버렸다. 덜컹, 하고 차가 앞으로 밀렸다. 다행히 고양이는 깨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문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자, 결국 에쿠스의 차주가 문을 열고 걸어왔다. 똑똑, 하고 차창을 두드리는 차주를 나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며칠을 감감 무소식이다가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나면 단가. 아니,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게 아니라 꼭 차를 박아야만 했나. 한참 할랑할랑 봄바람처럼 좋았던 기분이 용암처럼 뜨겁게 들끓었다. 제멋대로다.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내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그냥 밀어붙이면 단 줄 아는 사람이다. 아주, 제멋대로다. 내 나이가 벌써 몇인데, 아직 나는 생각이나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애로만 대한다.

“문 좀 열어보시지, 똥차 주인.”

말이나 하자 싶어서, 나는 차창을 반 정도만 내렸다. 에쿠스 차주는 내려진 차창 위로 팔꿈치를 기댄 채 불량한 얼굴을 내밀었다. 0.1초 만에 창문이 올라간다면 나는 당장 차창을 올렸을 것이다.

“집도 차도 없을 거라면서요?”

“내가 언제 그렇게 확정지어 말했냐, 만약이라고 했지. 그리고 차는, 남자의 자존심이야.”

그럼 내 자존심은 똥이냐고 물으려다가,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아서 그냥 말았다.

“올라가지? 내가 차 한 잔 대접할게, 정희선 작가님.”

“......”

“아, 나 이제 이음동화 완전한 일인 대표야. 나한테 잘 보여, 정희선 작가님.”

“...해외근무 나간다면서요?”

“그거야 공작이지. 한국에선 상하이지사 갔다 그러고, 상하이에선 홍콩 갔다 그러고, 한국에 있는 거 들키면 잠시 휴가 나왔다 그러고. 그래도 명색이 태인 황태자였는데, 졸지에 애들 보는 책이나 만드는 출판사 대표 됐다 그러면 쪽팔리잖아. 나야 경영 능력 의심 받아서 해외로 나돈다는 설이 더 쪽팔리지만. 혹시 나중에 신문이나 잡지에서 어느 집 도련님이 국내에서 일 잘 하다가 갑자기 해외근무 배정됐다고 실리면, 진짜 엉터리여서 완전 쪽박 찬 대가로 벌 받는 중이거나.... 그 집 씨가 아닌 게 뒤늦게 밝혀졌는데 그걸 까놓고 내쫓지는 못해서 그리 돌리는구나... 생각하면 돼. 재밌지.”

“......”

“재미없나?”

차창 너머에서 태준의 얼굴이 한쪽으로 비식 기울었다. 나도 따라 얼굴을 기울였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는 단지 ‘내 자리가 아니어서’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순간, 그의 어머니가 진심으로 미웠다. 그를 위했다고 했던가. 그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또 모든 걸 가졌다고. 그래서, 고작 이건가.

“나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고요?”

“너는 은근히 잘난 척 하더라? 차라리 나처럼 대놓고 잘났으면 듣는 사람 민망하지나 않지.”

나는 차창을 올렸다. 0.1초 만에 닫히는 줄 알았는지 그가 깜짝 놀라 팔을 내렸다. 김태준도 무서운 게 있구나, 싶어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내 표정에 그게 드러났는지, 태준이 나를 보며 으르렁거리듯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양이를 보조석에 놓아두고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내가 문을 닫고 내려서자마자 바짝 가까이 와 붙었다. 나는 엉덩이를 슬금슬금 빼며 외려 그를 차체로 붙이곤 냉큼 자리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차 좀 지켜요.”

“뭐?”

“주차 똑바로 안 됐잖아. 난 얼른 손 대표님 만나고 와야 하니까, 차 좀 지키고 있으라고요.”

그리고 건물 후문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 버렸다. 태준이 뒤에서 야!’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따라오지는 않았다.

더 이상 손 대표가 아니게 된 손 대표는 내 책의 인세를 10%까지 올려준다고 장담했다. 대표도 아닌데 그래도 되냐고 묻자, 손 대표는 금방 꼬리를 내리며 이제는 김 대표가 된 김 전무가 그리 시켰다고 털어놓았다. 하필, 오늘, 굳이 이리로 부른 것도 그가 시킨 것이었다. 이중 스파이가 된 손 대표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저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현금을 받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만을 안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태준이 내 똥차의 차창에 바짝 붙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자,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세 정말 10%까지 올려줄 거예요?”

“하는 거 보고. 그런데 저 고양이는 뭐야?”

하는 거 보고 인세 올려주는 대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순 핫바지 대표 아냐?’ 콧방귀를 뀌자 그가 ‘씁’하고 겁을 줬다. 하나도 안 무섭다고 입을 삐죽였지만, 몰래 했다.

“수풀 속에서 운명적으로 만났어요. 병원도 데려갈 겸, 집에 혼자 놔두기 뭐해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

“고양이는 장소 옮겨 다니면 스트레스 받아. 한 곳에 머물게 해야지. 너처럼.”

“내가 뭐요?”

“괜히 딴 데 옮겨 다니지 말고 한 군데 정착하란 말이야. 뭣하면 내가 받아주고.”

“하!”

나는 그를 밀쳐버리고 문을 열었다. 냉큼 올라타 문을 쾅 닫고 시동을 거는데 그가 다급하게 차창을 두드렸다. 손을 밀어 넣지 못할 정도로 조금만 내려주었더니, 태준은 내려진 차창 위로 이번엔 손가락을 걸쳤다.

“그... 있잖아, 기업 간에 추진하던 사업 시스템도 아직 진행 중이고... 그쪽은 그래도 여잔데... 지금 이혼했다간 소문이 진짜라고 확답 주는 꼴이잖아. 그게 그러니까... 아직 우리나라가 남자가 바람났다고 하는 것하고 여자가 바람났다고 하는 게, 사람들이 인식이 다르잖아. 그래서 해진아, 저기... 한 삼 년까지는 내가 아직 호적이 정리가 안 될 것 같거든?”

“그런데요?”

“그... 호..혹시, 애 딸린 호적 지저분한... 아니, 애 딸린 이혼남한테 관심 없나?”

“싫은데요.”

“...뭐?”

“태준 씨 맘대로 하는 거, 이제 싫어요.”

창문을 끝까지 올려버렸다. 그가 얼른 손가락을 빼내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주먹으로 차창을 쾅쾅 두들겨댔다.

“야! 김희선도 아닌 주제에! 정희선 주제에 튕겨? 어?!”

뒤에는 여전히 그의 차가 막고 있어서, 나는 앞으로 주욱 돌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싫었다. 또다시 가만히 앉아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   *   *

어머니는 계속 싱글벙글 웃으셨다.

나는 단벌신사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이 큰 맘 먹고 비싼 양복을 사 주셨다. 그게 내가 가진 단 한 벌의 양복이다. 딱히 양복을 입을 일도 없었고, 출판사 분위기도 정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당연히 더 이상 구입하지 않은 것이었다. 내 단 한 벌의 양복은 새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양복이 구겨질까, 수트케이스에 반듯하게 넣어서 용인까지 왔다. 운전하는 내내 차가 심하게 움직일 때마다 수트케이스가 흔들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화장실에서 갈아입으면 혹 냄새가 밸까 걱정이 되어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기 전에 먼저 어머니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보았다.

“괜찮아요? 멋있어 보여요?”

어머니는 오른쪽 눈을 깜박거리셨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거울 앞에 서서 직접 평가를 해 보았는데, 역시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안 입어버릇해서 그럴까요?”

거울 뒤에서 어머니가 또 오른쪽 눈을 깜박거리셨다. 별로 미덥지 않았지만, 할 수 없지, 하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장 중요한 날엔, 꼭 이 양복을 입고 싶었다. 열아홉, 혹은 스물.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이 양복을 입은 채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거울 앞에 섰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 컸다, 우리 아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어머니 앞에 서 보았다. 그리고 수트케이스 안에 함께 넣어왔던 넥타이 두 개를 양 손에 하나씩 집어올린 채 ‘어느 거?’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시다가 왼손을 들어 내 오른손에 들린 넥타이를 가리켰다.

나는 넥타이를 매는 법도 잘 몰라서, 결국 어머니의 간병인으로 일하시는 분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간병인이 넥타이를 매어주는 동안 어머니는 그 모습을 축축한 눈으로 지켜보고만 계셨다. 나는 고개를 숙여 다 매어진 넥타이를 드밀었다.

“다 됐어요? 정리해주세요.”

그리고 어머니는 왼손으로 이미 다 매어진 넥타이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바지 주름이 질까, 불효자식은 쪼그려 앉지도 못하고 기우뚱하게 서서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

“제가, 아직 말씀 못 드리는 게 있어요. 조금만 더 뒤에, 더 뒤에, 미루다가 이제는 엄마 건강해지시면, 하고 또 미루고 있어요. ....남들하고 다르다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약속드려요, 나쁜 짓은 안 해요. 사회에서 나라에서 금하는 것도 절대 안 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가 아직 아무 말씀 못 드려도, 아무 것도 묻지 마시고 그냥 제 편이 돼주셨으면 좋겠어요. 엄마는 내 엄마니까... 그냥 괜찮다고, 괜찮다고 한 마디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뭐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결국 어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버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대답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왼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다가, 입술을 달싹이시다가, 그리고, 바람과도 같은 소리를 입 밖으로 내셨다.

“...개...차...아...”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나는 아주 똑똑히 그리고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구를 한 손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손 편집장이 된 예전 손 대표도 따로 사무실을 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좁다란 출판사에 쓸데없이 자리차지 해서 뭣하겠냐는 것이었다. 김태준이 쓸데없이 자리차지하고 들어앉은 대표실은, 그전까지는 책을 쌓아두는 창고처럼 쓰이던 곳이었다. 하여튼, 겉멋만 잔뜩 들었다. 어차피 국내에선 유령처럼 살아야 하면서.

나는 대표실 문 앞에서 훅훅 숨을 내쉬었다. 손 대표, 아니 손 편집장은 휴대폰 카메라로 양복 입은 내 모습을 찍기 바빴다. 양복 입은 모습이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그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몰라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저 괜찮아요?”

“그게... 양복이 아주 좋은 거네요? 명품이다, 그렇죠? 이야, 좋다아...”

“아니요, 저요, 제가 괜찮게 보이냐고요.”

“그게... 옷 관리를 참 잘했네요? 꽤 오래 전에 샀죠? 디자인을 보니까... 그래, 요즘 유행하는 복고풍이구나!”

“......”

한마디로, 촌스럽다는 얘기였다. 치, 옷이 깨끗하기만 하면 되지 뭘. 입을 삐죽이며 나는 노크도 하지 않고 대표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버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겨보고 있던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본 것처럼 표정이 찌그러졌다.

“그.. 꼴이 대체 뭐야, 정희선 작가님?”

“이게 어때서요, 대표님?”

“촌스러워.”

“대표님도 그렇게 옷 잘 입는 거 아니거든요?”

“난 옷걸이가 좋아서 아무 옷이나 입어도 다 잘 어울려.”

정말, 재수 없다.

“진짜 뭐야. 어디 선이라도 보러 가나보지?”

“네.”

“뭐야!”

목청 한번 좋다. 나는 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런 나를 태준이 이를 악 물고 노려보았다. 목청이 좋은 만큼 성격도 좋으면 얼마나 좋아, 구시렁거리면서도 나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앞에 가 섰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도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뭘 찾아.”

“애는요?”

“...뭐?”

“싱글파파잖아요. 애 봐줄 사람 없어서 애기 들춰 업고 직장까지 데리고 나와서 일 대신 분유 타고 기저귀 갈고. 그런 거 해야 하잖아요.”

이죽거리며 말하자 그는 오히려 ‘흥’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평일엔 본가에서 돌봐주기로 했어. 주말엔 데려오는 걸로 하고. 그래도 호적상으론 아직 손자라고 올라가 있는 앤데 그럼.”

“차는 남자의 자존심이니까 있고...집은 있어요?”

“내가 정말 구질구질하게 살 것 같았어? 너 만나는 시간 외에는 죽도록 일만 했는데 그 정도도 안 빼돌리면 억울하지.”

한심하게 쳐다보며 이제 나쁜 짓 안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그는 아주 뻔뻔한 얼굴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대답했다. 믿지 못할 말이었다.

“그래놓곤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집이랑 차 없어도 되겠냐고 아주 궁상을 떨어놓고는.”

“꼬시려면 무슨 말을 못해?”

“악당.”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애 딸린 이혼남은 싫다고 내팽개친 네가 알고 보면 더 악당이야. 언제는 내가 또 결혼해야 할까봐 친자감정서나 몰래 훔쳐보면서 전전긍긍했던 주제에. 재벌 3세 타이틀 벗으니 흥미 없다 이거지?”

“모..몰래 훔쳐 본거 아니에요! 그냥 떨어져서...!”

이번엔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두 귀를 막았다. 얄미운 인간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냥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는 뭣해서 책상 위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아무 의미도 없는 낙서를 했다.

“인터뷰 하는 거야? 이상한 옷이나 입고와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 뭐, 인세?”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끄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하고 그가 물었다. 힐끔 쳐다보자, 그가 책상 위로 팔꿈치를 기댄 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다음 메모지에 낙서를 계속했다.

“뭐가 궁금한데 이렇게 뜸을 들여. 궁금한 게 많아? 야, 낙서 그만 해.”

“냅둬요. 한참 자라나는 어린이잖아요. 궁금한 것도 많고, 낙서도 많이 해요.”

“왜, 언제는 어린이 졸업한다며. 하긴, 이제 그 키가 네 최종 신장이 될 거다, 이 땅에 붙은 어린이야.”

“...출판사 대표가 작가한테 이렇게 막말해도 돼요?”

“그럼 계속 인터뷰 하시죠, 정희선 작가님.”

나는 선 하나만으로도 내가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그릴 수 있었다. 나는, 선 하나만으로도 김태준을 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 선 하나만으로도 나를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며 최종 목적지가 출발선과 만나게 되는, 하나의 선으로 그리는 그림. 그런 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메모지 하나에 잠자는 고양이를, 또 다른 메모지 하나엔 기지개 펴는 고양이를, 그리고 마지막 메모지에는 제 몸을 핥는 고양이를 그렸다. 세 장의 메모지를 꼬깃꼬깃 접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몸을 똑바로 펴고 그를 마주보았다.

“불륜과 로맨스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요?”

“......”

고양이를 그리다말고 뜬금없는 질문에 그가 당황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내 목소리나 태도가 더없이 진지했기에, 그도 장난이라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태준은 책상 위에 올려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아마도’하고 입을 열었다.

“책임의 문제겠지.”

나는 웃었다. 역시, 유전의 힘은 속일 수 없구나.

“태준 씨 전 부인은 아이를 버렸으니까 불륜이고... 그럼, 태준 씨는? 태준 씨도 역할을 버렸잖아요. 그럼 우리도 불륜인가?”

“그건 원래부터 내 자리가 아니었어.”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글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태준이 ‘그럼 넌?’하고 되물었다.

“나는... 내 생각엔 말이에요. 불륜과 로맨스의 차이는... 내가 하느냐, 남이 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큭, 뭐?”

그가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정희선 작가님.”

“내가 보기에 지금 대표님은... 우선 차도 있고 집도 있으니까 내 집 마련하려고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평일엔 본가에서 애도 봐주고... 일도 예전에 비해선 턱없이 하찮은 것들만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심심하니까 자꾸 작가나 갈구고...”

“뭐야, 갑자기 또 시비냐?”

“그러니까... 그렇게 할 일 없고 시간이 남아돌면, 나하고 연애나 합시다.”

“......”

웃을 듯 말 듯, 그가 이상한 얼굴을 하곤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시선을 피한 것은 태준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가 또 어딘가를 보며 피식 웃고는 ‘생각해보고’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뭐야, 그게. 남은 어깨에 힘 빡 주고 고백해줬는데.”

“뭐긴 뭐야. 나도 한 번은 튕겨봐야 할 거 아냐.”

“치사하게... 아, 지금 당장 결정해요! 나 이 옷 다신 입기 싫단 말이야!”

“글쎄다... 혀 한번만 핥게 해주면 뭐...”

끝까지 능구렁이다. 그의 넥타이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그런데도, 나는 심통 맞은 얼굴을 하고서도, 책상 위로 손을 짚고 일어나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에에-’하고 혀를 내밀었다. 태준은 입술을 휘며, 역시 책상 위로 손을 짚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한 건, 단순한 키스가 아니었다.

당신들은 이것을 ‘당신들의 로맨스’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죄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한, 우리의 이야기일 뿐이다.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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