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2. 부도덕 (2/11)

챕터 2. 부도덕

남자를 좋아한다고 깨달은 건 열네 살. 색을 잃은 광활한 정원에 봄의 푸르름이 짙어진 5월의 기억이었다.

최세계의 등장은 영하의 삶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취향이니 자아니, 그런 것들이 확립되기도 전에 그를 만났다 어린 열네 살의 인생에 갑자기 떨어진 벼락같은 존재였다. 폭풍우처럼 영하의 온몸과 머릿속을 가누지도 못하게 최세계로 적셔 버리는.

매일 그를 기다렸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반. 새 친구들. 그리고 어울리기 힘든 새로운 가족들. 그 모든 기대와 상심, 간절함과 두려움을 모조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존재가 바로 최세계였다.

틈날 때마다 그를 훔쳐봤다. 그가 집에 있는 한, 영하도 집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그는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방, 이라기엔 또 하나의 작은 주거 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자신의 구역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날이 좋은 봄에는 종종 바깥에 나와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영하는 그럴 때면 제 방 창문에 붙박여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는 영하가 여태 보아 왔던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고, 누구나 선망할 만한 완벽한 남성이었다. 두께감 있는 기다란 목에 도드라지는 목울대. 곧고 넓은 뼈대와 짜인 듯한 탄탄한 몸. 갸름하지만 단단하고 각이 선명한 턱에 사선으로 뻗은 뺨. 그리고 그늘진 눈썹 뼈 아래에 아주 예쁜 두 눈.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가서 애살이라도 좀 부려 보지.”

가끔 돌봐 주는 아주머니의 말에 뺨이 붉어졌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진 남들이 알아볼 만큼 하루 종일 그를 쳐다보는 줄 몰랐다. 뒤늦게 깨닫고 우물우물 입술을 깨물던 영하는 때아닌 변명을 했다.

“멋있어서요. 그래서…… 봤나 봐요.”

“우리 도련님이 멋지긴 하지. 가만히 보면 영하도 도련님 어릴 때랑 좀 닮은 것 같아.”

“그래요? 안 닮은 거 같은데.”

“닮았어. 코랑 눈이랑. 특히 코는 완전히 똑같은 것 같은데.”

“그런가?”

“씨는 못 속이지.”

전혀 안 닮았다. 자신과는 딴판이다. 영하는 절대 닮지 않았다고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를 닮은 건 오히려 승준이 쪽이었다.

그렇게 잘난 남자를 닮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야 정상인데 영하는 썩 기껍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받은 노트북.

박스에는 자신들의 기술을 자랑하는 글자가 잔뜩 새겨져 있다. 키패드에 알록달록하게 LED가 들어오는 제품이었다. 묵직하다. 이전에 받은 노트북들보다 확실히 무거웠다. 박스의 이름을 제대로 확인하니 게이밍용 노트북이다.

방 안에 노트북이 두 개 더 있다. 이제 막 중학교에 진학한 어린애가 컴퓨터를 종류별로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을 필욘 없었다.

“자. 받았으니까 감사 인사 해야지.”

하지만 기대를 갖고 저를 보는 표정에 영하는 손가락을 꼬며 눈을 내리깔았다. 천천히 의자에 앉은 아빠의 앞에 다가갔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의 시선이 따라왔다.

그의 무릎 바로 앞까지 다가선 영하는 힘들게 들고 있던 노트북 박스를 책상 위에 올리곤 슬그머니 밀어냈다. 받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밀려나는 노트북을 보던 세계가 단단하게 턱을 다물고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꼭 말해야지.

일주일에 세 번씩 선물을 줘서 곤란하다. 방에 보관할 곳도 여의치 않아 며칠 전에 받은 태블릿은 아주머니께 말씀드려 따로 창고에 보관해 놨다. 아무리 부잣집이라지만 이 정도면 낭비다. 게다가 열두 번째 선물식을 겪고 난 영하는 드디어 그가 자꾸 선물을 하는 이유를 알아챘다.

심기가 불편해진 제 아빠를 힐끗 흘겨본 영하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이제 선물 안 주셔도 돼요.”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선물 안 주셔도, 뽀뽀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영하의 귀 끝이 수줍게 붉어져 있었다. 계속해서 꼬던 손을 뒤로 감춘 영하는 멍해진 그의 뺨에 예고 없이 입 맞췄다. 그러고는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더 쪽- 뽀뽀한 뒤 한 발짝 물러났다.

“매일 해 드릴게요, 아빠……. 이제 선물 안 주셔도 돼요. 저 너무 많아요, 이미.”

최대한 온순한 목소리와 말투를 냈다. 그에게 자신은 쓸모가 있으며 말도 잘 듣고 얌전하니 귀찮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최세계는 황당한 것을 본다는 듯 영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아예 앞으로 끌고 와 턱을 붙잡고 연구라도 하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영하는 조금 불안했다. 이러면 좋아할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손바닥에 땀이 나 허벅지 위로 문질렀을 때쯤, 턱을 쥔 손이 떨어진다. 동시에 그가 중얼거리듯 혼잣말했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튀어나온 거지?”

지금은 말버릇처럼 해 대는 말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줄기차게 들었다. 이제야 예쁘다고 하든 말든 익숙해 거리낌 없었으나 처음 들었을 땐 굉장히, 기쁘고, 설레고, 부끄러웠다.

그날, 잠들 때까지 그가 턱을 붙잡았던 순간을 되새겼다. 체온은 저와 비슷할 테니 유난히 뜨거울 리 없다. 하지만 영하는 아직도 그 부위에 닿았던 온도가 선연했다. 서로의 숨소리만 오가던 잠깐의 순간과 다리가 맞부딪칠 만큼 가까웠던 거리.

왜인지도 모르면서 침대 위에 몸을 문질렀다. 그러면 더운 기운이 조금 가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 툭 튀어나온 목젖과 평범한 티셔츠를 팽팽하게 만들던 넓은 어깨와 팔뚝 같은 것들이 뒤따라왔다.

왜 자꾸 생각하는 걸까?

왜 자꾸 보게 되는 거지?

핏줄이 당긴다고 할 순 없다. 그는 영하에게 선물 공세나 할 뿐 아버지가 할 법한 행위들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교우 관계는 어떤지, 수업은 잘 따라가고 있는지, 밥은 제대로 먹는 건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뽀뽀를 받기에만 급급했다.

가만 보면 이상하네. 이상한 사람이네…….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잠들기 직전까지 그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영하가 잠에서 깬 것은 그러고 한참 시간이 지난, 새벽녘이었다. 꿈속에서 그를 만났다. 선물 교환식 따위나 뽀뽀 받기 따위를 하지 않았다.

꿈속은 요란하고 음험했다. 상의를 탈의한 그가 두꺼운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으로 영하를 얽어 억압했다. 단단히 끌어안겨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팠어?

그가 전에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었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였다. 온전히 영하가 상상해 낸 것이었다.

그 달콤한 어투에 영하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끄덕였다. 억센 손아귀가 부드러워지더니 영하의 옷 속을 파고들어 맨몸의 살갗을 더듬었다. 헐떡이는 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겨우 그친 울음을 다시금 터뜨렸다. 뜨끈한 입술이 사방에 닿고, 그가 영하의 위에서 목울대를 넘기고 웃었다. 곧 다리가 벌려졌고, 영하는 그의 아래에서 완전한 나신이 됐다.

-예쁘다.

그가 얕은 굴곡을 가진 좁다란 허리께를 움켜쥐며 말했다. 벗은 몸을 칭찬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좋았다. 곧이어 발기한 성기가 함께 부딪쳤다. 영하가 가늘게 부서지는 야릇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아빠….

“흐악……!”

발작처럼 꿈에서 깨어났다. 전신을 퉁기며 일어난 터라 떨어지며 매트리스를 잘못 짚은 손목이 아려 왔다. 아픈 손목을 감싸 쥐니 그보다는 다른 곳이 더 불편했다. 인식하게 되자 몸이 떨렸다. 이불을 슬그머니 걷고,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헉, 허억… 아. 으으…….”

아니야. 아니, 아니야…….

꿈속처럼 신음이 흘렀다. 다만 현실 속에서 튀어나온 신음은 경악과 두려움이었다. 사타구니가 축축하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분명히 몽정이었다. 심지어 아직 발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누군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황급히 잠옷을 끌어 내려 앞섶을 가리고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왔다. 더듬대어 기어간 영하는 찬기가 흐르는 벽에 이마를 붙이곤 주저앉았다. 새카만 밤의 색깔이 두 눈에 익숙해질 때쯤 영하의 정신도 돌아왔다.

“안 돼.”

-예쁘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우욱….”

갑자기 치솟는 토기에 헛구역질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크게 뜨인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장실은 방 밖에 있었으나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한 발짝이라도 내딛는 순간 바닥으로 꺼져 내려 죽어 버릴 것 같아 영하는 오히려 방구석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그사이에도 헛구역질은 계속되는데 올라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더 괴로웠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눈동자는 천천히 감았다 뜨인다. 토기를 겨우 억누르고 숨을 곳을 찾던 영하는 아무런 빛도 닿지 않는 책상 밑으로 기어가 몸을 웅크렸다.

안 돼. 안 돼. 천벌받을 짓이잖아. 정신 차려야 해. 안 돼…….

아버지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 심지어 만나게 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생사도 모르던 부모를 겨우 만났는데,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나쁜 짓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지난 꿈이 온전했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건 섹스였고, 상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와의 섹스를 꿈꾸며 확실하게 흥분했다. 그가 예쁘다고 해 주자 기뻐 몸서리치고, 몽정까지 했다.

“왜, 왜 이러지….”

두 팔을 끌어안고 몸을 떨던 영하는 불안함에 자꾸만 방 안을 둘러보곤 숨을 삼켰다. 죄책감이 새카만 형태가 되어 온몸을 짓눌러 댄다. 책상 아래로 숨어들었지만 달리 피할 구석도 없었다.

불안한 시선이 여기저기 닿는다. 떠난 엄마가 보고 싶고, 동시에 지금은 잠들어 있을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를 떠올리는 순간 다시금 토기가 올라와 입을 가로막고 시선을 내리니 불룩해진 사타구니가 보여 울음을 삼키며 손으로 꾹꾹 내리눌렀다. 얼른 발기가 가라앉길 바라는 행동이었는데 오히려 손이 닿을 때마다 뱃가죽을 치고 오르는 전류 같은 쾌락에 눈물과 흐느낌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으응, 흑…….”

빈 시간마다 그만 생각하던 이유, 늘 그 사람만 보게 되던 이유. 선물을 이용해 뽀뽀하라고 강요하는 게 싫지 않은 이유.

그 모든 것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어야 했다. 영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꿈은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한 번도 그의 벗은 몸을 본 적도 없는데 그는 늘 헐벗은 몸으로 등장했다. 다정하게 웃고 안아 주고 영하의 몸을 어루만진다. 꿈에서 깨는 순간마다 늘 속옷이 젖어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영하는 꿈을 꾸지 않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애써 자기 전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잠들어도 늘 그가 몽마처럼 나타나 영하의 몸을 더듬으니 방법이라곤 꿈을 꾸지 않는 수밖에 없다.

낮에 꾸벅꾸벅 졸긴 하지만 모자란 수면을 채우기 위한 낮잠 시간엔 다행히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깼다. 몸의 피곤은 누적됐고,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벅찼다.

우습게도 영하는 꿈속의 그를 피하려고 안달을 냈지만 정작 현실의 최세계를 외면하지 못했다. 마음과는 달리 그가 눈앞에 있는 한 시선이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자석처럼 빠져들었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심장이 멎을 듯 놀라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대단히 의식하는 사람처럼 움찔대며 눈을 돌리니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이상하게 보이겠지…….

아직 별로 가깝지도 않은데, 계속 쳐다보는 거…….

혹여나 그가 제 마음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역겹고 더럽다며 그에게마저 버림받을까 무서웠다. 이곳에서 버림받으면 영하는 갈 곳이 없다. 피붙이라고는 대한민국에 오로지 그 사람 하나뿐이다.

버림받아선 안 된다. 영하는 사랑과 애정이 간절했다. 착한 행동을 하니 예쁘다고 무심코 튀어나왔던 그 말 하나가 마음 깊이 소중했다. 그 사람의 관심을 더럽히면 안 된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학교에서 내내 그 일로 골머리를 앓던 영하는 혹시나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가능성이 없진 않다.

굶주린 사람처럼 며칠 내내 온갖 글과 매체를 찾았고 원하지 않아도 동영상을 틀어 보기도 했다. 성기가 너무 쉽게 섰다. 자신을 대입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몸들을 보며 멍하니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구나, 난 그냥 남자를 좋아했던 거였어.

누군가에겐 절망스러운 결론이 영하에겐 하나의 희망이다. 게이가 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쁠 지경에다 무거운 짐을 덜어 한결 가벼워졌다. 주변에 어른 남자라곤 없는 삶을 살다가 한순간 충격받을 만큼 잘생긴 그를 봤으니 잠시 이상한 상상에 빠질 순 있다.

그 남자만 아니면 된다. 아빠만 아니라면 영하가 누구를 사랑하든 괜찮았다.

불행하게도 그날 밤, 그가 오로지 영하를 위해 사 온 케이크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퇴근한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다녀왔단 인사말도 없이 영하에게 케이크 박스 하나를 쑥 내밀었다.

하얀색 케이크 박스 위에 넓은 노란색 리본이 예쁘게 묶여 있다. 손잡이에는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앞면에 크게 난 창으로 언뜻 케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리본조차도 하늘하늘해 영하가 평소에 보던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받아도 되는지 몰라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먹어.”

“아이고, 도련님이 케이크 사 오셨구나.”

“최영하, 네 거야. 가져가.”

뒤에 있던 아주머니가 케이크 박스를 대신 받아 들려 하자 그가 더 빨랐다.

세계는 아주머니의 손을 치워 버리곤 영하의 품 안에 대뜸 케이크를 안겼다. 다른 사람들은 먹어 봤을 거라든가, 영하가 먹고 싶어 했다는 둥 인사치레도 없다.

영하가 두 손으로 케이크 박스를 드는 걸 보고서야 무신경한 태도로 “저 왔어요.” 하더니 2층으로 올라간다.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제멋대로인 점이 영하를 요동치게 했다.

노란색 실크 리본을 엄지로 매만졌다. 투명한 창 너머로 보이는 세 개의 작은 케이크는 처음 보는 예쁜 모양이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빨간색 동그란 돔 모양 위로 산딸기와 블루베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눈처럼 하얀 슈가 파우더가 뿌려진 사각형 케이크와 갈색의 얄팍한 파이지가 크림과 함께 겹겹이 쌓인 것도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들고 2층의 제 방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올려만 두고 한참을 바라봤다. 직접 샀을까? 아니면 비서 아저씨가 사 오신 걸까. 평소보다 퇴근이 조금 늦었으니 아마… 어쩌면 그가 직접 골랐을 수도 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핑크색이 가득한 케이크 가게의 장식장 앞에 서서 세 가지의 케이크를 고르는 모습을 상상하곤 조금 웅크렸다. 가슴 위쪽이 뻐근하다. 평범한 아버지가 할 만한 행동에도 설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사람은 그냥 남자가 아니라 아빠라고 수십 번을 되뇌어 봐도 막상 실물을 눈앞에 두면 모든 것이 잊혔다.

그를 향해 불어나는 마음은 꼭 눈앞이 흐려질 만큼 세차게 내리는 눈 같아서 영하의 능력으로는 쏟아질 듯 내려오는 눈을 모두 치워 낼 수 없다. 작은 손으로 주워 담아도 치우고 밀어낸 자리에 이내 눈이 소복이 내려앉는다. 의미가 없는 행위들이었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애를 써 본 손자국만 남을 뿐이다.

그와 자신은 혈연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알지만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동자를 몰래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잊혀 그와 영하만 남았다.

짝사랑 한번 안 해 본 숙맥에 바보천치라도 알 수 있다.

영하는 일생일대의 최악의 선택을 했다.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마음이었다. 영하 스스로에게도 그랬다.

*

깨어나고서도 침대에 틀어박혀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창문을 넘나드는 해가 방 안의 반을 차지하고서야 거실로 나가 보니 조용하다. 아빠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 본다. 비어 있었다. 하긴 이미 출근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적막한 거실에 오도카니 서 있던 영하는 느릿하게 움직여 소파 근처에 벗어 둔 외투를 들어 드레스 룸의 옷걸이에 걸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보니 어제 어떤 남자에게서 받은 손수건이 잡혔다. 들자마자 안에 함께 있던 명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주웠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서민석

“아.”

정신이 하나도 없어 깜빡하고 있었다. 명함과 함께 손수건을 가지고 나와 잠시 고민한다. 드라이하라고 했지. 손수건이 오십만 원이라고? 분명 거짓말이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그렇게 안 보였다. 비싸도 이십만 원 언저리였다. 굳이 드라이해야 할까? 이 작은 천 쪼가리를 가지고 세탁소에 가는 것도 웃기다.

“그냥 손빨래하면 되지.”

손수건이 드라이는 무슨 드라이야. 오버하고 있네.

딱히 그 남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으므로 드라이까지 해 줄 의향은 없다. 비록 우는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넨 착한 남자라지만 영 미덥지 못하다. 우는 걸 들켜서 그런 게 아니다.

명함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부착된 비누로 세탁할까 고민하다가 아빠의 값비싼 샤워젤을 열 번이나 펌프질해서 손수건 하나를 빨았다. 거품이 너무 올라와 나중에는 감당이 안 되어서 옷을 빠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을 낭비했다. 입은 티셔츠가 물로 흠뻑 젖었다.

빨아 놓은 손수건을 의자에 걸어 말린 후에는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배를 채웠다. 먹는 것도 귀찮아 억지로 밀어 넣고 치우고 나니 할 일이 없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자연스레 머리가 움직인다. 영하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안 해야지’ 하는 글자 위로 그의 잘난 얼굴이 떠올랐다. 비웃는 표정.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쁜 눈을 접어 웃는 얼굴로 뀌었다.

‘네 배 속에 정액을 싸지르고 싶어.’

‘네가 원하는 게 나잖아.’

모를 거라 생각은 안 했는데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놀라웠다. 영하는 그가 자신을 거칠게 안는 상상을 종종 했다. 정말 상상만 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눈웃음치며 여자들을 홀리더니 아빠는 몽마가 따로 없었다.

“모르는 게 없어….”

멀쩡한 소파를 두고서 바닥에 앉아 등을 기댄다. 큰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발치를 간지럽혔다. 영하는 발가락을 꼼지락대 햇빛 위로 발등의 반을 걸치곤 우울한 낯을 무릎 사이로 감췄다.

*

김씨에서 최씨가 된 이후로 영하의 1년 반은 죄의식과 싸움이었다.

최세계의 관심에 기뻐 어찌할 줄 모르다가도 돌아서 혼자가 되면 온몸에 꽂히는 칼날 같은 가상의 시선에 꼼짝을 못 했다. 아무도 영하의 속내를 몰랐지만 언제 들킬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마음이다. 영하는 언제든지 아빠가 자신을 혐오스레 쳐다보며 내다 버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단 한 번도 종교를 가져 본 적 없고 신의 존재를 믿어 본 적도 없는 자신이라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누군가에게 빌었다.

‘제발, 제발 이 마음을 거둬 주세요.’

하지만 스스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날이 갈수록 마음이 불어났고 욕심도 커져만 갔다. 기도는 어느새 처음의 목적을 잃었다.

다음 날은, 제발 더 깊어지지 않게만 해 주세요.

그다음 날은, 그 사람도 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제 속내에 구역질하면서도 떨쳐 내질 못했다 아무것도 저지른 것이 없는 죄인이 되어 밤이 되면 두려움에 떨며 웅크렸다 눈을 감으면 그의 손이 다가와 뺨을 쓸고 입 맞춘다. 다리를 벌리게 하곤 일어선 중심을 매만졌다.

-영하야.

시종일관 시니컬하거나 농담만 조금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최영하.’가 아니라 ‘영하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버지와 아빠를 번갈아 부르던 영하의 입에 “아빠”가 붙었고 존댓말과 반말이 뒤섞였다. 짧은 말을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에 영하는 완전히 그의 아들처럼 굴었다.

김영하가 아닌 최영하는 죄인이었다. 최세계가 최승준과 최영하를 눈에 띄게 차별한다는 것도 영하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죄책감을 동시에 안겼다.

이복동생에게 느끼는 미안함.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부도덕함. 그리고 그가 저만을 아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마다 단전을 짜릿하게 울리는 극악한 충족감.

영하는 일찍 자랐다. 철이 빨리 들어야 하는 가정환경 탓이었다. 이미 열다섯에 다 자라 버린 몸과 마음은 불결한 애정으로 더러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멈춰 버린 몸 안에 감정이 한 장 한 장 겹쳐지고 쌓여 도무지 쏟아 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다.

머릿속으론 그러면 안 된다고 수천 번을 되뇌지만,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바다를 본 적 없다는 이야기에 충동적으로 저만 데리고 떠난 밤바다 여행. 그 사람 손을 잡고 처음으로 내디뎌 본 타국의 땅.

‘왜 울어.’

‘응… 아니야.’

해가 기우는 프랑스 니스의 자갈밭 해변에서 영하는 뜻 모를 눈물을 흘렸다. 짙게 변해 가는 푸른 하늘의 절반. 수평선과 맞닿은 곳이 온통 태양이 뿜어내는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슬픔을 느낄 만큼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이기도 했고, 처음 만나는 낯선 공간에 함께한 사람이 아빠여서 행복했고, 또 동시에 엄마는 이런 예쁜 걸 볼 기회가 있었을까… 하고 엄마가 그립기도 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영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주변은 온통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도 영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운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영하와 세계를 알지 못했고, 또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들도 똑같았다.

순간, 영하는 감내하기 힘든 충동을 느꼈다.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노을의 타오르는 마지막 빛줄기가 그의 뺨에 내려앉아 있는 걸 깨닫자, 3년을 품어 온 검디검은 제 마음을 드러내어 그에게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이런 마음을 품은 것 같다고.

‘울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하지. 넌 꼭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더라.’

눈물을 닦아 주거나 달래 주지 않았다. 가만히 영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손을 잡은 채 등을 돌려 걸었다. 엉거주춤 그의 뒤를 따랐다.

파도 소리가 깊어지고 뜨겁던 여름날의 햇살이 사라져도 해변의 인파는 줄어들질 않았다. 세계는 사람들이 없는 방향으로 조용히 걷기만 했다.

하지만 유명한 관광지에는 한적한 구간이 없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여전한 사람들에 결국 포기했는지 멈춰 선 그가 돌아봤다. 영하의 눈물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다 울었네.’

무심한 어투로 이야기했지만, 그는 말라붙은 눈가를 엄지로 쓸고는 해변 너머 건물에 즐비한 카페테리아를 훑어본다.

‘목 안 말라? 카페 가서 마실 거라도…….’

영하는 그 물음을 듣고서야 갈증을 느꼈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는 순간 자신의 등 너머로 있던 시선이 입술로 옮겨지는 것을 의식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으나, 영하는 다시 한번 입술을 혀로 쓸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드드 떨렸다.

충동이 다시 머리를 들이민다. 어쩌면 그도 한 번은 용서해 줄 수 있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와 들떠 실수했다고 변명하면 넘어가 줄지도 몰랐다.

그래서 영하는 손을 뻗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잡아 지탱했다. 발뒤꿈치를 들자, 조그마한 자갈들이 얇은 신발 밑창 아래에서 흩어진다.

곁을 지나는 여행객들의 외국어를 뒤로하고 영하는 그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두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어리숙한 몸짓으로 바짝 붙어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술이 겹쳐졌다. 세계의 입술은 건조했지만, 영하는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입술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완전히 그의 생각으로 젖어 들어 엉망으로 질척였다.

얇은 리넨 셔츠 한 장만 입은 어깨 위를 손가락이 차례로 내리눌렀다. 두드러진 뼈마디가 느껴졌다. 느리게 맞닿은 입술은 그보다 더 느리게 떨어졌다.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영하는 그의 반응이 두려워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놓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단 반 발자국에 그가 영하의 팔을 붙잡았다.

‘또 울려고?’

머릿속으로 변명할 이야기를 잔뜩 만들어 냈다. 정 안 되면 울면서 사과해야 하나 걱정하던 시점에 그가 그렇게 물었다.

속내를 모조리 들킨 것 같아 고개를 내젓곤 눈을 들어 보자, 그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내밀고 있었다. 덕분에 영하는 그의 눈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라앉아 있지 않았고, 어두운 밤바다 위에 물결치는 물비늘을 담은 듯 반짝였다. 그 안에는 조금의 역함도, 거부감도 없었다.

세계는 싱긋 웃고는 허리를 들었다. 자연스레 손을 마주 잡았다.

‘그만 놀고 호텔로 가자. 내일 아침 일찍 파리로 가야 하잖아. 파리에 가서, 셔츠를 사는 거야. 폴로셔츠랑 반바지, 신발까지 봐 뒀으니까 세트로 사 줄게. 입국할 때는 그 옷 입고 가.’

그가 즐겁게 이야기했다. 키스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인 것 같아 오히려 영하가 당황스러웠다. 다급히 그를 뒤따르며 물었다.

‘아빠, 싫지 않았어?’

‘왜 싫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소리였다. 불행히도 최세계와 천진난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만큼 안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무감한 대꾸와 달리 호텔에서 최세계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뒤척이고 일어나 물을 마셨고 거실로 나가서 조그마한 소리로 TV를 켰다. 영하 또한 잠들지 못했지만, 눈을 감고 규칙적인 숨소리만 내었다.

새벽이 밝아 올 때쯤 침대맡에 다가온 그가 영하의 마른 입술을 더듬었다. 아주 소극적인 태도로 입술 위를 매만진 손길이 작은 턱을 쓸고 그를 닮은 콧대와 코끝을 매만지더니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달라붙은 것은 그의 입술이었다. 잠결에도 주먹이 바짝 쥐어졌다. 이번에는 그의 것이 축축했다.

그 성근 입맞춤에 열일곱의 영하는 확신했다. 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영하는 그를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주는 것 말고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짐이 아니라 일부가 된다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알 수 없는 그의 대답처럼, 둘 사이에 모호한 관계의 정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죽어 땅에 묻힌다 하더라도 남이 될 수 없는 관계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가까운 존재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 사람에게 첫 번째가 최영하이기만 하면 된다. 더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가능한 오랫동안 그의 옆에서 가장 소중한 상대로 남아 있기만 하면 된다. 단지 그것만으로 영하의 세계는 완성될 수 있었다.

그렇게 열일곱 살의 영하는 죄의식을 떨쳐 냈다.

*

퇴근하고 돌아온 세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전과 같은 얼굴로 시답잖은 농담을 하거나 영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뉴스를 봤다. 너무 거리낌 없는 행동이라 순간 그가 약혼하겠다고 했던 것이 다 꿈이었나, 하고 멍청한 생각이 들었으나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당장 세계가 영하의 허리를 안은 채로 할머니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네. 얼마 안 남았죠. 준비는 거의 다 됐어요. 수민 씨가 알아서 한다길래 그냥 다 맡겼어요. 그런 건 여자들이 더 잘하니까. 네. 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네, 없게 할게요.”

연신 무신경한 말투로 대꾸한다. 자세를 고쳐 앉던 그는 아예 드러누워 영하의 허벅지를 베곤 휴대폰을 드는 것도 귀찮은지 스피커폰으로 바꾸며 통화했다. 뭐 저런 철면피가…….

-수민이한테만 맡기지 말고 너도 신경 좀 써.

“굳이 해야 하나. 알아서 잘하겠죠.”

-그래도 한 번밖에 없는 약혼인데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해서 되겠니?

“한 번일지 두 번일진 모르는 거고.”

-뭐라고?

“알겠어요. 신경 쓸게요. 먼저 끊습니다. 몸조심하세요. 네.”

원치 않게 대화를 적나라하게 들었다. 정말 원치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뻔뻔하게 다리 베고 누워 있는 이 남자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수민 씨?

“두 번 하다간 사람 잡겠네.”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대충 건너편 소파에 집어 던지며 눈을 감길래, 영하도 어리둥절하던 마음에 가려져 있던 분노가 다시금 치솟았다. 화를 참지 못하고 쿠션을 들어 얼굴을 짓누르려 하자마자 놀라운 반사 신경에 손목이 붙잡혔다.

“그만.”

때리기는커녕 쿠션이 코끝에 닿지도 못했다. 영하는 시도도 제대로 못 하고 붙잡힌 게 짜증이 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최세계는 여전히 차분했고 오로지 영하만 안달복달이었다.

“일 많아서 피곤해. 집에선 좀 쉬자. 싸우기 싫어.”

손에 쥔 쿠션을 바닥에다 던진 그는 팔을 들어 눈 위를 가렸다. 이대로 자려는 모양이지만, 영하는 그에게 편하게 다리 베개나 해 주고 있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자고? 이 남자는 철면피라 가능할지 몰라도 영하는 불가능하다. 지금도 약혼 이야기만 들어도 배 속이 울렁거렸다.

“본인 방에 가서 자.”

“너랑 있으려고 이러고 누워 있는 거지.”

이런 말에도 이젠 안 설렌다. 약혼녀한테도 똑같은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가 하는 행동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바람둥이. 제비. 여우.

“난 같이 있고 싶은 생각 없어.”

동시에 최세계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졌다.

“하아아…….” 하고 깊게 내쉬더니 곧바로 누운 몸을 일으켜 영하를 돌아본다. 들어올 때만 해도 평소에 장난기 있는 모습이었는데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경직된 표정을 보자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어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마른 얼굴을 문지른 그는 여러 번 심호흡한 후에 억지로 웃는 낯을 했다. 화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가상했으나 영하는 그 행동이 더 무서웠다. 사이코패스 같았다.

“내 결혼은 단지 남녀 문제가 아니고 사업이야. 네가 싫다고 흔쾌히 취소할 일이 아니라고. 정 그렇게 내 결혼이 싫으면 뻗대지만 말고 네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말해. 네 이유가 타당하면 나도 수용할 테니까.”

“몇 번을 말해? 결혼하지 말라고. 그냥 싫다고 했잖아! 약혼도 결혼도 다 싫다고.”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까, 아빠 열받게. 이유를 말하라고 했어. 네가 반대하는 진짜 이유.”

대체 그딴 걸 들어서 뭐 할 건데? 어디다 써먹을 건데?

입 밖으로 내 봤자 현실을 깨닫고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온몸의 피를 다 뽑아낸다 한들 그와 자신의 관계는 변하질 않았다.

어차피 서로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를 수가 없는 상황에다 영하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욕심에 괜히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 최세계는 지금껏 그래 왔듯 모든 것을 가진 절대 권력자로 살아야 하고 최영하에게는 최세계만 있으면 된다. 그것보다 나은 미래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유 같은 거 없어.”

말이 끝나자마자 다물린 그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애써 웃던 입꼬리가 내려가자 남은 것은 오로지 뒤틀린 서늘함뿐이다. 입술을 달싹인 그는 갑작스레 돌변해 영하의 목덜미를 낚아채 당겼다.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영하를 비난했다.

“악…!”

“그럼 하지 말라고 떼쓰지 말아야지. 내가 언제까지 떼쓰는 걸 받아 주기만 할 것 같아?”

“싫어! 그냥 싫다고. 마음에 안 들어. 내 엄마가 될 사람이잖아.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하하하… 그 여자랑 넌 아무것도 아닌 관계야. 너뿐만 아니라 최승준도 똑같아. 어떤 집안에서 결혼할 남편의 다 큰 아들 둘을 자기 딸한테 키우게 둘 것 같아?”

눈빛에 광기가 서렸다. 영하는 그가 거칠게 붙잡아 아픈 목보다 남편이라는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그가 누군가의 남편이 될 거라 생각하니 목이 메이고, 순간 아름다운 호텔의 예식장에 선 아빠가 상상됐다.

“나는……?”

“글쎄. 어떻게 될까.”

“그걸 알면서도 결혼한다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네가 똑바로 말해. 원하는 바를. 더는 같은 말 반복 안 할 거야.”

“……결혼하면 집 나갈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속상함에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와 달리 최세계는 볼일을 마쳤다는 듯 목을 놓아주곤 기지개를 켜며 성의 없이 대답한다. 천장을 향해 길게 뻗는 손이 뒤로 넘어갔다.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피곤하네.” 뒤이어 붙은 말도 영하를 괴롭게 했다.

꼭, 영하의 진정한 속마음을 말해 주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을 거란 표현 같다. 여기까지 오자 그의 약혼보다 빼앗길 다정함이 두려웠다.

아빠에게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것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저 손수건은 뭐야.”

방으로 향하던 남자가 식당 의자에 걸린 서민석의 손수건을 보며 이야기했다. 제대로 대답해 줄 의향이 없어 “몰라.” 하고 대꾸했더니, 잠깐 침묵한 세계가 미련 없이 뒤돌아 안방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한참 뒤, 영하는 숨을 크게 삼켰다.

그가 자신을 향한 손길을 거두는 순간 영하는 숨이 막혀 죽어 버린다. 그는 온통 버려진 영하의 삶에 유일한 호흡이었다.

*

요즘은 마주치기 싫어 일부러 늦게 일어났다. 종종 영하가 그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정도로 아빠가 예쁘지 않았다. 열 시가 넘어 일어난 영하는 출근한 도우미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고 침대에 틀어박혔다. 가만히 있으니 눈물이 나오고 움직이자니 기력이 없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진짜 가출이라도 할까.

돌아누워 벽을 코앞에 두고 바라본다. 눈이 시려 질끈 감았다. 가출은 시간 낭비였다.

갈 데도 없거니와 영하는 수중에 천 원 한 장도 없다. 명절날 받는 용돈은 액수가 제법 컸지만, 몽땅 아빠의 손으로 들어갔다. 주식에 넣어 잘 불려 주겠다고 했어도 어차피 뺏긴 돈이었다. 평소에는 아빠 명의로 된 카드를 용돈으로 쓰니 현금이라곤 한 푼 가진 게 없어 가출하려면 아빠의 카드로 숙박을 긁어야 한다. 그런 한심한 가출이 어디 있을까.

아빠를 자극해야 해. 약혼을 포기하게 할 뭔가를 만들어야 해.

영하는 죽어도 그가 바라는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빠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가 끔찍하게 아끼는 아들로 남는 것이었다. 남자로 생각한다는 둥의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영하는 몇 달, 길어 봐야 몇 년의 행복을 위해 남은 삶을 그 사람 없이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그 방법 말고도 아빠가 결혼을 포기하게 하려면, 대체 뭘 해야 할까.

약혼녀의 비리를 캐야 하나? 그러나 영하에겐 그런 재주가 없다. 더불어 아빠가 그녀를 사랑해서 결혼을 결심한 것도 아닐 게 분명해 의미가 없었다. 다른 여자와 선을 보면 된다. 이래서야 도돌이표다.

그가 새로운 여자와 만나 즐거이 속닥이는 것을 떠올렸다. 누가 봐도 잘난 남자니 애초에 결혼을 목적으로 선을 보는 여자라면 그를 선택하지 않을 리 없다. 오히려 먼저 채 간 사람이 없는 걸 의아해하겠지.

억울하다. 맨날 나만 속이 타들어 가고. 나만 상처받고.

하룻밤으로 지나가는 상대라도 그녀들이 질투 났다. ‘대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되고 싶었다.

순간 영하는 빛처럼 떠오르는 무언가를 낚아챘다.

“나도 똑같이 하면….”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자기만 인기 많은 줄 알아? 나도 인기 많아. 학년과 학교가 바뀔 때마다 몰아치는 관심과 시선에 학업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여자랑은 못 사귀겠는데.

남자는 더 큰 일이었다. 영하의 주변에 게이라고는 민재밖에 없었고, 게이들은 대부분 어플을 통해 만남을 가진다는 건 알지만 썩 끌리지 않았다. 신원이 보장되지 않은 익명의 남자를 만나려다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그러면 남은 남자라곤 영하 주변의 친구들 몇뿐이었다. 으음…….

그냥 포기하고 낮잠이나 잘까 할 때, 책상 위에 대충 던져둔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멀어 글자가 보이지 않지만, 그 하얀 명함에는 검찰의 로고와 함께 손수건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민석.

홍채가 큰 눈이 안구 운동을 하듯 방 모서리 끝에서 끝까지 이동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로 보인데다 키도 컸고, 마른 편이어도 멀끔하게 생겼다. 당시에는 소속사 관계자일까 봐 짜증부터 내긴 했어도 곰곰이 복기해 보니 검사와 어울리는지는 몰라도 고위 공무원이라는 직업과는 꽤 어울리는 남자였다.

“으으음…….”

사실 그가 우는 영하에게 도움을 주긴 했으나 조금 석연찮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 남자라 그런지 몰라도 아빠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만나는 상대로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 말고 아는 남자라곤 이 사람뿐이다. 너무나도 협소한 인간관계에 서글퍼지지만 애초에 그렇게 된 이유도 다 최세계 때문이었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다.

“연락해 볼까…….”

어차피 한 번은 봐야 한다. 손수건 줘야 하니까.

택배로 보내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잊고 일어나 명함을 주시했다. 한참을 ‘서민석’ 세 글자를 노려보던 영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안 받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몇 번의 통화음이 지나자 곧바로 연결됐다.

-네. 서민석 검사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달싹인 영하는 곧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

영하가 꺼림칙해했던 것과 달리, 그는 꽤 젠틀했다. 매너도 좋은 편이었다. 영하가 신세를 진 일인데도 위치를 고르게 했다. 약속 시간에도 늦지 않았고, 오히려 오 분 일찍 도착한 영하보다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설마 그 손수건을 정말 드라이해 온 거냐고 물을 땐 조금 짜증이 났지만, 분위기를 풀기 위한 나름의 농담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싫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하는 그를 이용해 질투 작전 따위를 펼칠 용기가 사라졌다. 애초에 멀쩡한 남자 데리고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행위이긴 하지만, 식사가 끝날 무렵 사람 좋은 얼굴로 웃던 서민석이 대뜸 뱉은 말 때문이었다.

“저 영하 씨한테 관심 있어요.”

“네?”

바보같이 얼빠진 얼굴로 반문했다. 목적 달성이나 다름없는데도 영하는 순간 말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원체 겁이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아빠가 아닌 남자가 자신의 생활 반경에 들어온다는 것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모츠나베를 앞접시에 덜다 말고 얼어붙은 영하가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킥킥 웃었다. 서민석은 넥타이가 없는 흰색 셔츠에 까만 정장 차림새였다. 처음 봤던 그날처럼 첫 번째 단추가 풀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과 스타일이 거의 흡사하다. 딱히 패션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 대부분 남자가 그렇겠지. 명품 컬렉션 같은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같은 집에 사는 잘생긴 아저씨 하나가 유난일 뿐이었다.

“저는, 저는 그런 거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온 거라…….”

거짓말이다. 영하는 집을 나서며 서민석을 애인으로 만들기 위한 다짐을 했다. 마주하는 순간 용기가 급격히 사그라들어 마음이 쏙 들어갔지만.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미안해요.”

“…….”

“하지만 남자라는 놈들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뺏기기 싫으니까 먼저 차지하려고 덤벼들죠. 주제도 모르는 녀석들이 즐비하거든요. 형사부에 있으니 원치 않아도 성범죄나 스토킹 사건을 많이 맡아요. 많으면 하루에도 수십 건씩.”

미안하다고 곧바로 사과하길래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판단하는 순간 그가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종업원이 따르고 간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어 말했다.

“서점에서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믿어 줄래요?”

“어…….”

“매번 일하면서 여자들의 거절을 못 받아들여 사고를 저지르는 놈들 볼 때마다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마음이 급했나 봐요, 저도. 손수건 억지로 쥐여 주고 드라이해 달라고 하고… 아직도 그때 무슨 옷 입고 있었는지 전부 다 기억해요.”

간지러운 첫인상을 고백하는 목소리는 내용과는 달리 덤덤했다. 그래서 설렘보단 의아함이 앞섰다. 그는 손수건 이야기를 할 때는 피식 웃기도 했다. 목소리 톤이야 변호사와 매번 논쟁을 치러야 하는 검사이니 단지 직업병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죄송해요. 저는 좀 부담스러워서……. 그리고 저 남자 안 좋아해요.”

“아닐 것 같은데.”

“…거짓말 아닌데…….”

“이해해요. 나이 차이도 크게 나고. 나도 내가 대학생이면 더 들이댔을 것 같은데, 양심이 있어서.”

서민석은 정말로 영하가 게이가 아니라는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영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물방울이 맺힌 스테인리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싫다고 하니까 더 질척거리진 않을게요.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면 연락 줘요.”

게다가 서민석은 깔끔하게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영하가 최세계를 좋아하질 않았다면 어쩌면 서민석의 마지막 말에 흔들려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에게 받는 고백은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하게 들뜨게 된다.

*

들뜨든 가라앉든 영하는 서민석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머니가 깨끗하게 치우고 퇴근하셔서 집 안은 여전히 깔끔했지만 종종 생활의 흔적이 사라져 적막하기도 했다.

현관문을 열고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치면 월넛 컬러의 길고 좁다란 파티션 너머로 그의 취향이 곳곳에 묻은 거실이 나타났다.

소파 건너편에는 TV라곤 뉴스밖에 안 보는 사람이 영하를 위해 배치해 둔 큰 사이즈의 벽걸이 TV가 있었다. 그는 종종 거실이 아름다우려면 TV부터 없애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영하는 아빠의 취향 속에 자신을 위한 배려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방 창문 너머에 벚나무를 심어 침대에 누워서도 너른 창문을 통해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말라 앙상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이 만개할 것이고, 꽃이 지고 나면 새파란 초록이 창 안에 가득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하가 좋아하는 초록색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지친 얼굴로 씻고 나온 영하는 방 안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베갯잇을 느리게 적셨다. 이불 속에 손을 넣어 한참을 더듬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까만 유리 위로 열어 놓은 문 너머로 거실의 불빛이 비친다. 휴대폰을 얌전히 만지고만 있다 잠금을 풀어 연락처를 눌렀다. 제일 위쪽에 즐겨찾기를 해 놓은 연락처가 딱 하나 존재했다.

엄마였다.

엄마와 헤어지고 난 후, 힘들 때면 휴대폰 연락처에서 엄마의 번호를 물끄러미 보곤 했다. 작년에 수능 치기 일주일 전 한 번 걸어 봤는데 당연하게도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미국으로 간 지 몇 년이나 된 사람이 한국 번호를 유지할 리가 없다. 알면서도 서운했다.

엄마는 멀쩡히 타지의 땅에서 남편과 잘 살고 있을 텐데, 꼭 사별한 기분이라, 그러면 영하는 더 우울함에 빠졌다. 기분을 풀기 위해 한 행동이 무색해졌다.

휴대폰 도로 내리고 웅크렸다. 며칠 전 아빠와 싸운 그날. 아빠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거칠고 성마른 목소리로 잔뜩 야한 소리를 지껄였다. 둘 사이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귓속으로 그가 했던 이야기들이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나를…….

“나한테…….”

그가 아랫배를 내리누르던 손길. 귀를 깨물던 감각. 상상만 하던 것이 현실에 형태를 드러냈다. 그러나 모두 물거품일 이야기다.

그날 저녁. 최세계는 일곱 시 사십 분에 도착했다. 그의 코트 어깨 자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송이는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녹아내렸다.

거실의 창문 밖을 슬쩍 보니 정말로 눈이 드문드문 내린다. 아직 눈이 내리는 게 이상하지 않을 추운 날씨였다.

“잘 있었어?”

그가 다녀왔다는 인사 대신 영하의 안부를 물었다. 꼭 집에서 주인만 기다리는 강아지에게 묻는 물음 같아 싫었다. 그래서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최세계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영하의 품으로 넘기곤 코트를 벗으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손바닥에 물기가 조금 느껴졌다. 대문 앞에 내려서 집 안까지 들어오는 사이에 가방에도 눈이 내린 모양이다. 잠깐 멈춰 선 영하가 그를 따라 들어갔다.

“저녁 먹었어? 안 먹었으면 뭐 먹을래. 오늘 아주머니 오는 날이던가.”

옷걸이에 롱 코트를 걸어 둔 세계는 뒤따라 들어오는 발소리에 넥타이를 풀며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아본다. 손은 부지런히 넥타이를 풀어 손목 위에 올렸다. 정작 영하가 입을 꾹 다물고 가방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자, 조명이 들어온 시계 장식장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영하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할 말 있어?”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자 영하는 곧바로 할 말이 생겨났다.

“왜 모르는 척해? 왜 자꾸 아무 일도 없던 척하냐고.”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더 싫었다. 결혼마저 어물쩍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하는 가방을 얌전히 제자리에 올려 두곤 입을 앙다물었다. 마치 그러면 위엄이 좀 선다는 듯이.

아들의 단호한 말에 눈만 크게 굴려 뜬 세계는 곧 돌아서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드레스 룸 가장 왼쪽의 옷장 문을 열면 그의 운동복과 잠옷이 있었다. 허리를 숙이자 셔츠의 등판과 어깻죽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중간 서랍을 열며 그가 대꾸했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너한테 시간을 주는 거야.”

서랍장에서 하얀색 티셔츠를 꺼내곤 셔츠의 단추를 푼다. 하늘색 셔츠 아래로 그을린 살결이 드러났다. 돌아선 그는 일부러 또렷하게 눈을 마주친 채 옷을 벗었다.

아빠의 시선에 발가락이 곱아드는 기분이었지만 영하는 나가지 않고 꼿꼿하게 버텼다.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셔츠를 팔에서 벗어 낸 그가 티셔츠를 손에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영하가 자신의 몸을 방어하듯 지껄였다.

“내… 대답은 하나야. 말 못 해. 아빠가 뭐라고 하든 아빠가 원하는 대답 안 할 거야.”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아니… 야.”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해.”

“아니니까. 그만 좀 해. 그리고 자식이 결혼 반대하는 게 뭐가 이상해. 편부모 가정에선 그런 일 많아. 그러니까…….”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영하는 시선 가득 차오른 최세계의 벗은 상반신을 계속 보지 못하고 기어코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이 쉼 없이 깜빡였다.

깊은 쇄골 아래 두께감 있는 가슴팍과 긴 팔뚝에 자리 잡은 탄력적인 상완근 따위가 머릿속을 침투했다. 변태 같은 상황이었고 이 와중에 그의 근육을 훔쳐본 자신이 우스웠다.

그냥 내 방에 갈까…. 하지만 세계는 둘 사이에 남은 한 발자국의 거리마저 완전히 붙였다.

등이 벽에 바짝 붙었다. 영하가 뒷걸음질 쳐 거리를 띄우려던 것이라도 결국 최세계가 몰아붙인 것과 다름없다. 그는 허리를 조금 굽혀 코끝을 마주 대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아주 밀접한 거리. 영하는 숨마저 쉬는 것을 멈추고 눈동자만 굴렸다. 시선을 숙이려다 그의 헐벗은 가슴팍이 훤하게 보이는 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왜, 왜 이러…….”

좀 전의 당당한 배포는 다 어디 가고, 영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항변했다. 귓등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현재의 기분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대답 없이 고요하던 그가 잠시 후 영하의 턱을 부드럽게 쥐었다. 덕분에 어렵게 피하던 시선이 온전히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전등의 빛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영하는 순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였지…….

데자뷔 현상을 오래 느낄 시간은 없었다. 그가 둥그런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 보더니 곧게 선 콧대를 함께 문질러 댔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흰 양말에 감싸인 발가락을 잔뜩 움츠리며 벽 위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끝내 앞에 선 남자의 숨결이 느껴지자 영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얕게 떨렸고 그에게 붙잡힌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그러나 호흡 소리만 가깝게 들리는 의미심장한 침묵 속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에 찡그린 얼굴에 미묘하게 힘이 풀리는 동시에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또 못된 말이었다.

“이것도 친구들한테 가서 물어보지 그래. ‘아빠가 가까이 오면 키스할까 봐 눈 감는 것도 다른 집에선 비일비재한’ 일인지.”

“…놔.”

“놓을 생각이었어.”

가볍게 대꾸하는 동시에 붙잡힌 턱이 자유가 됐다. 영하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손바닥 안으로 손톱을 박아 넣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기분이 나빴다.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논 것 같지 않은가. 영하는 좀 전에 정말로 심장이 떨렸다. 그의 입술이 다가와 부딪치는 상상을 하고 귓바퀴를 붉게 물들였다.

억울함과 서운함에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영하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하는 그가 손에 든 티셔츠를 꿰입고는 조각난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상견례 있으니까 알아 둬. 너도 가는 거야.”

*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웅크리고 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빛 한 점 없는 방 안에 열린 문 너머로 사다리꼴의 빛이 들었다. 그 위로 최세계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전날부터 아프다고 핑계를 댔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세계는 네가 엄살을 부린다는 것을 다 안다는 표정을 하고선 머리 위로 갈아입을 옷을 던졌다. 그가 골라 준 예쁜 옷을 입고 그의 상견례장에서 착한 아들 노릇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꼴불견처럼 하고 그 자리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빨리 입어. 10분 남았어.”

아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휴대폰만 바라보며 대꾸한 그는 영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실로 나간다. 여전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짜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한숨을 뱉고는 침대 위에 떨어진 옷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옷인 걸 보니 새로 사 온 것 같은데, 태그를 확인하니 22minute. 아빠 회사의 신규 브랜드였다.

본인은 대부분 회사 브랜드의 옷을 입어도 회사 일과 관련 없는 영하는 고가의 브랜드 옷을 사다 주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나까지 회사 옷을 입힌다……. 어지간히 신경 쓰네.

이제는 꾀병이 아니라 정말로 아팠다. 민트색 코듀로이 로고 셔츠에 블랙 재킷. 보고 있자니 속이 갑갑해졌다. 문득 울음이 날 것 같아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참아 냈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 퓨전 한정식 식당까지는 차가 밀려 한 시간 반가량이나 걸려 도착했다. 널린 게 고급 레스토랑인데 굳이 여기까지 와야 하는 건가. 얼른 끝내고 집에 가서 잠들고 싶은데 이러면 또 집까지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

“영하도 왔구나.”

할아버지 내외분과 승준이는 식당 입구에서 만났다. 이 먼 거리에 있는 식당인데도 주차장이 꽉 차 조금만 늦었어도 주차가 곤란할 뻔했다.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안색을 살피니 할머니는 뭔가 언짢은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온다는 걸 모르셨나, 아니면 알고도 못마땅하신 건가.

어느 쪽이든 영하는 이해할 수 있다. 저라도 금이야 옥이야 기른 아들에게 난데없이 열네 살짜리 자식이 생긴다면 정을 주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영하는 할머니 곁에서는 늘 초라해졌다.

됐어.

딴생각하자 싶어 승준이를 보니 얼마나 지났다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좀 더 커 보였다. 이제는 대충 봐도 자신보다 크니 안 그래도 상한 속이 더 상한다.

“가게도 크고 괜찮네. 예약 룸은 어디야?”

“제일 안쪽에 있을 거예요.”

기와를 얹은 높은 한옥 형태의 건물 네 채에는 부지런히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온다.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창가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웃는 낯의 그들을 보던 영하는 우울한 얼굴을 애써 숨기려 바닥을 보고 걸었다. 오늘은 늘 데리고 다니던 수행 비서들도 없어 세계가 길을 안내했다.

제일 안쪽에 있는 건물은 상견례나 미팅을 위한 공간인지 큰 사이즈의 룸이 복도에 연이어 있었다. 세 번째 룸의 문 앞에 최세계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단출한 이름 하나가 영하를 괴롭게 했다.

직원이 열어 주는 장지문 너머로 들어가는 그의 말쑥한 뒷모습조차 미웠다. 아무도 그와 만나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 있지만 사실은 방어 기제였다. 미혼부 처지라도 신랑감으로 크게 손색없는 남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떤 여자가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문만 넘으면 아빠의 약혼녀를 볼 수 있다. 보고 싶은 마음 반, 그렇지 않은 마음 반. 문 앞에 멈춰 서서 들어가질 못하고 있으니, 뒤에 선 승준이 힐끗 보고선 어깨를 잡아 문 안으로 영하를 밀어 넣었다.

들어가자마자 고개부터 숙여 인사하곤 의자에 앉았다. 느지막이 고개를 들다 영하가 놀란 것은, 아빠의 약혼녀 때문이 아니었다. 맨 끝자리에 앉은 남자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영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순식간에 눈이 마주쳤다.

서민석.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아니. 여기에 있다는 건 저 남자가…….

“처음 뵙습니다. 서민석입니다. 저희 누나보다 두 살 어린 서른입니다.”

“세계한테는 이야기 들었어요. 아버님 따라 검사라고 하던데. 인물도 훤칠하네요.”

그가 대뜸 인사하며 명함을 아버지와 할아버지 내외 두 분께 전달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인상이 부드러웠으나 시선은 오롯이 영하에게 박혀 있었다.

명함은 영하의 책상 서랍에도 있다. 불쑥 그 명함이 떠오르자 집에 가자마자 버려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기다리겠다는 사람에게 희망 고문할 생각도 없고, 그와 만나 밥까지 먹은 이유는 단지 아빠가 미워서였다. 저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엮일 생각이 없다. 영하는 일부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약혼녀의 존재가 상기된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낮게 묶은 그녀는 하얀색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하고 깨끗한 미인이다.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웠다.

서민석이 서른이고 저 여자는 서른둘이다. 조금 늦은 듯하더라도 아빠의 나이도 서른여섯이니 괜찮은 나이 차이였다. 그것마저 짜증이 났다.

“수민씨 다닌 음대 거기도 뉴욕 아닌가? 우리 세계랑 유학 시기가 겹치는지 모르겠네. 세계도 대학 졸업하고 뉴욕으로 바로 유학 갔으니까.”

“아마 겹쳤을 거예요. 저는 스무 살부터 서른까지 쭉 있었으니까요. 세계 씨한테 유학 이야기는 들었어요. 우리나라 최고 대학까지 나와서 또 대학으로 유학 갔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그때 어머님 아버님께서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할아버지가 말도 마라는 모양새로 크흠- 팔짱을 끼는 동시에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경영을 제대로 하려면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고 하니 어떻게 반대하겠어요. 그래도 어쩌면 둘이 미국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겠다. 한인 사회는 좁으니까.”

“저도 그럴 줄 알고 물어봤는데 이야기 들어 보니 세계 씨는 교회는 안 다녔대요. 어울렸던 한국인은 재학생이 전부고. 그래서 아마 저랑도 못 봤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인연이네. 어떻게 이렇게 만나 약혼을 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야기한 것도 많다. 유학 이야기는 영하도 들은 것이 거의 없었다. 한국인이랑 안 어울렸는지, 교회를 안 갔는지 죄다 처음 듣는 내용이다.

남들에겐 무뚝뚝한 타입이라 밖에선 과묵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것도 틀렸을 수 있다. 여자들 앞에서는 바람둥이처럼 유창하게 말하나 보다. 아빠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

게다가 정수리가 따끔했다. 서민석이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무슨 사기 치고 도망간 친구 감시하듯 시선이 끊이질 않는다. 왜 저렇게 날 쳐다보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고개를 치켜들고 뭘 보냐고 맞서 노려보고 싶었으나 상견례장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생 둘 중에 누가 최 서방 아들인가?”

할머니와 약혼녀의 대화 도중, 그녀의 아버지가 슬그머니 물었다.

아. 영하는 그제야 룸에 앉아 처음으로 아빠에게 시선을 줬다. 저 인간 설마 말 안 한 거야?

재빨리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분 모두 당황하여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아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최세계는 동요 하나 없는 잘생긴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제일 끝에 앉은 게 둘째고 최승준입니다. 승준이는 아마 아실 거예요. 그리고 여기 제 옆에 첫째. 최영하,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최영하입니다. 스무 살이에요.”

“예쁘죠?”

단언컨대 이 상견례장 안에 당황하지 않은 인간은 최세계밖에 없었다. 그는 멀쑥한 낯으로 영하의 등을 쓸며 칭찬을 요구했다.

갑자기 등장한, 예기치 못한 추가적인 아들 소식에 상대방 가족들은 경황을 감추지 못해 헛기침을 연달아 흘렸다. 흘겨보니 서민석도 꽤 놀란 눈치였다. 영하는 저 남자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최세계가 여유로운 자태로 물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

“수민 씨한테 말했는데, 부모님께 전달 안 드렸나 봐요?”

“아…… 제가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어요. 어제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따로 말씀드려야 했는데 제 불찰이죠.”

“세계 씨는, 미리 말했어요. 그…….”

그녀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애써 숨긴 채 말했다.

말도 없이 데려온 게 분명했다. 대외적으로 세계의 아들은 최승준 하나. 상대방 가족도 그런 줄 알았을 텐데 난데없이 아들이 둘이니 놀랄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게다가 상견례장에서 폭탄처럼 선언한 데다 그걸 몽땅 약혼녀의 책임으로 돌렸다.

둘도 없을 나쁜 놈이었지만 영하의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가셨다.

“첫 만남에 말했어요. 사실 아들이 둘인데 괜찮겠냐고. 재혼도 아니고 초혼인 아가씨한텐 불편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수민 씨가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리 애들 얼굴 보여 줄까 했는데, 아무래도 영하는 대학생이고 승준이는 고2라 입시 때문에 시간이 여의치 않네요.”

입시에는 한 톨의 관심도 안 주면서 거짓말을 얼굴 하나 안 바뀌고 자연스럽게 이어 갔다. 누가 보면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로 착각할 만한 얼굴이었다.

“영하는 사학과에 합격했는데 졸업하면 큐레이터를 할 수도 있으니 갤러리나 하나 사 주려고요. 회사 일에 관심은 없다길래. 뭐, 교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생각 없으면 제 품에 끼고 사는 게 낫죠. 영하한텐 늘 미안해서.”

갤러리는 무슨. 이 역시 나와 전혀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다.

확실히 다 큰 아들이 있다고는 상상이 안 되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로 자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유례없이 가정적인 남자로 보일 만했다. 게다가 연신 헛기침을 하던 상대방의 아버지는, 영하가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는 대목에서 어깨를 풀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안도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구나. 그나저나 영하 너무 귀엽게 생겼다. 세계 씨 어렸을 때도 저런 느낌이었을까요?”

“내가 저 얼굴일 땐 초등학생이었지.”

“어머, 그럼 영하는 동안인가 보다.”

약혼녀의 상냥한 말투가 적응이 안 된다. 거기다 굳이 따지자면 영하는 동안은 아니고 이미 중학생 때부터 이 얼굴이라 지금은 제 나이를 찾아 가는 중이었다.

뚱한 모습으로 애호박으로 산나물과 고기를 동그랗게 만 월과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는 순간 세계가 저를 보며 비웃었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인 남자가 영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덧붙였다.

“몸도.”

본인에 비해 형편없는 몸매라고 놀리고 있었다. 입맛이 싹 가신다. 그렇다고 입에 넣은 음식을 뱉을 순 없으니 돌 씹는 기분으로 으적으적 씹어 넘겼다. 표정이 말이 아니긴 한지, 옆에 앉은 그가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혼자 웃곤 했다. 왜 이러는 거야 정말.

“왜 또 도끼눈이야. 아빠 거 먹어. 전복죽 좋아하잖아.”

웃다 말고 자기 몫의 죽 그릇을 옆으로 넘겨준다. 영하의 것은 이미 다 먹어 좀 전에 종업원이 가져갔다.

손 하나 대지 않은 전복죽을 보다 고개를 드니 건너편에 그와 마주 앉은 서수민 씨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녹아내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좋을까?

아마 둘 사이에 낳은 자식에게도 그렇게 다정한 모습일 거라 상상이라도 하나 보지. 배알이 꼴렸다. 아빠의 아기를 생각하니 갑자기 욕지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러면 정말 법조인 집안이네. 외할아버님이 대법원 판사에, 아버님께선 고등검찰청 차장 검사에 동생도 작년에 신임한 검사면 아버님께서 참 뿌듯하셨겠어요.”

“엄청나게 뿌듯해하셨죠. 저보고도 법대 가라고 몇 번 말씀은 주셨는데 저는 한자 외우는 것보단 피아노 치는 게 더 좋아서요.”

“우리 세계도 대학은 법대 나왔는데. 사법고시 합격해서 연수원도 갔었지?”

“연수원으로 따지면 제가 처남보다 선배네요. 뭐 요새는 연수원 없다지만.”

처남 좋아하시네. 괜히 기분이 나빠 고개를 들어 서민석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부터 내내 영하를 쳐다보던 남자가 테이블에서 손을 들다 물컵을 넘어뜨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죄송합니다.” 하고 내뱉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어 테이블 위를 닦았다. 영하가 세탁해 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세계의 시선이 오랫동안 손수건에 붙박여 있었다.

물을 모두 닦아 낸 서민석이 뒤늦게 대답했다.

“한참 선배님이시죠.”

“그나저나 수민 씨는 미국에서 쭉 살 거였다면서, 어쩌다 한국에 왔어요?”

영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미국에서 살지 왜 한국에 와서 아빠랑 약혼할까? 못된 생각에 빠져 물컵만 손에 쥔다. 아빠의 아기를 상상한 이후로는 음식이 도저히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았다.

“사실은… 저는 계속 미국에 살 생각이었어요. 근데 작년에 잠깐 한국에 들렀거든요. 그때 친구, 그러니까 명진 그룹 막내딸이 제 친구거든요. 명진 그룹 회장님 생신이셔서 생신 파티에 갔었는데 거기서 세계 씨를 만났어요.”

“어머. 그래요?”

“네… 사실 저 혼자 본 거지만,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세계 씨가 워낙 잘생겼잖아요. 부끄럽지만 제가 거기서 먼저 반했어요. 그래서 그날로 한국에서 정착하기로 했죠.”

그녀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반해 얼굴은 창피하다는 듯 잔뜩 붉어져 있었다. 어지간히 아빠를 좋아하는 듯했다. 흘끗 할머니를 쳐다보자 고아한 얼굴에 어쩔 줄 모르는 기쁨이

“우리 세계가 인물 하나는 어딜 가도 안 빠지죠. 어릴 때는 인기도 얼마나 많았는데요. 집에 찾아오는 여자애들도 많았고. 한번은 여자애들 다섯이서 놀러 왔는데 세계는 애들끼리 놀라고 하고 지 방에 틀어박힌 적도 있었다니까요?”

“정말요? 그럼요, 어머니. 파티장에서 세계 씨밖에 안 보였어요.”

서수민이 흘러나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날의 최세계를 떠올린다는 듯이.

“그래서 저는, 피아노는 한국 오면서 거의 그만뒀고 결혼하게 되면 살림하며 세계 씨 내조에 신경 쓰려고요.”

“너무 좋지. 세계가 워낙 일이 바빠서 사실 집안에 신경 쓰기가 힘든데, 여자도 요즘엔 일하는 게 좋긴 하지만, 나는 내심 며느리는 집에서 살림하는 쪽이 좋았거든. 내가 가르쳐 줄 것도 많고. 요리는 좀 해요?”

“사실… 잘은 못 해요.”

“그래? 사실 못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종갓집에서 자라서 요리는 좀 하거든. 내 밑에서 배우면 되겠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혼외 자식 둘만 있던 소중한 아들이 드디어 멀쩡한 여자를 만나 장가를 간다니 할머니 입장에선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영하에게는 닿을 일이 없었기에 속이 쓰리다.

할머니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영하는 지금 와서는 모든 게 싫고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꾀병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몸 상태가 좋질 못했다. 좀 전에 먹은 음식이 명치에 걸린 것도 같고. 갑자기 눈동자가 젖어 들어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작은 머리통이 아래로 향하자 옆자리에 앉은 세계가 물끄러미 드러난 목덜미에 시선을 내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다. 하필이면 물도 찬물이 아니라 뜨뜻미지근하다. 마셔도 마신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아…….”

“많이 아파?”

“죽을 것 같아…….”

자꾸만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니 최세계의 시원한 손이 목덜미를 주무른다. 목의 열기가 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못 버티겠다. 아빠의 무릎을 쥐고 고개를 들자 그가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째 아드님 몸이 좀 안 좋아 보이네요.”

서민석이었다. 세계는 그의 말에 대충 대꾸하곤 아들의 얼굴을 이어 바라본다. 영하의 큰 눈이 느리게 감긴다. 눈빛 또한 몽롱하여 누가 봐도 몸 상태가 영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차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일어난 것은 끝에 앉은 최승준이었다.

“아니요, 아버지 제가 데려갈게요.”

“괜찮아. 내가 데려갈…….”

최씨 남자 둘이서 영하를 데려가겠다고 잠깐 실랑이가 붙었다. 세계가 날카로운 불쾌감이 서린 얼굴로 영하의 어깨를 잡는 찰나, 자신을 붙잡는 어머니 손에 멈춰 섰다.

더 시끄럽게 하기 싫고 귀찮다. 테이블을 잡고 일어난 영하가 말했다.

“승준이랑 갈게요. 죄송합니다.”

영하는 팔을 잡은 승준의 손을 느리게 뿌리치곤 걸었다. 뒤로 최승준이 바짝 붙으며 찡그렸다.

“뭐야. 너 연기였어?”

“연기 아니거든. 진짜 아파.”

룸을 빠져나오자마자 비교적 멀쩡하게 걷는 영하를 향해 최승준이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아프긴 아프다. 부축받을 정도로 아픈 게 아니라서 그렇지.

“반만 아파. 반만. 나 차에 가서 쉴게.”

“나도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어쩐지 왜 날 도와주나 했다. 담배 피우러 가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겠네. 영하는 담배 이야기에 최승준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냄새나. 담배 좀 피우지 마. 건강에도 안 좋은데.”

“신경 꺼.”

싸가지 없기는. 무뚝뚝한 게 아빠가 할머니 대할 때랑 똑같지. 이렇게 보면 승준이는 여러모로 아빠랑 닮았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언뜻 봐도 아빠의 핏줄인 데다. 자신과 달리 벌써 180이 넘었으니 스무 살쯤 되면 180 중반까지 자랄 수도 있다.

하아.

밖에 나와 찬 바람을 쐬니 울렁거림이 조금 잦아든다. 주머니 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찾는 최승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최승준이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아버지 이번엔 진짜 결혼할 거 같지.”

“…몰라.”

“한 번도 인사시킨 적 없잖아. 약혼 발표도 처음이고. 하시겠지.”

영하는 대꾸하지 않고 너른 정원에 시선을 둔다. 주차장까지 가려면 5분은 족히 걸어야 한다.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거지만, 생각해 보니 차량 번호가 기억에 없다. 심지어 주머니가 텅 비었다. 폰도 차 안에 두고 온 것이다.

뒤돌아보니 최승준은 흡연 구역으로 걸어가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싸가지 없는 놈. 흡연 구역 가서 피워야지…….

그냥 밖에서 계속 바람이나 쐬는 게 낫겠다. 조금 기다리다 정신이 들면 다시 들어가서 차 번호만 받아 가면 된다. 마침 근처에 작은 정원으로 조성된 휴식 공간이 있었다. 가로등과 벤치가 있는 걸 보니 앉아 쉬기 적당하다.

그곳으로 걸어가 등을 기대고 앉았다. 공기가 조금 차긴 하지만 바람이 없는 날이라 밖에 있기 힘든 날씨는 아니었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하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멍하니 아빠 생각을 했다. 뜨끈하던 두 뺨이 조금 식어 갈 즈음.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성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아프다더니 차에 안 들어가고요.”

담배를 입에 문 남자. 서민석이었다.

“우리 이제 사돈, 아니지. 사돈이 아니라, 이게 족보가 꼬이네. 굳이 따지면 삼촌이죠. 곧 가족이 될 건데 잘 지내봐요. 우리 누나, 남의 자식이라고 차별할 타입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팩 돌렸다. 담배를 문 잇새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영하는 제가 꼭 토라진 모양새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속이 끓었다. 에이씨.

“한 대 피울래요?”

영하는 부러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담배 안 피워요.”

“요새 애들은 다 피우던데.”

“걸리면 죽어요.”

“누구한테?”

“아빠한테죠.”

“아빠라고 불러요? 신기하네.”

조금 인상이 찡그려졌다. 뻔하지. 호적에도 못 올린 자식과 친밀해 보인다는 게. 서민석이 제 표정을 보곤 손사래 쳤다.

“아,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뜻은 아니에요. 미안해요.”

“상관없어요. 안 들어가세요?”

“담배 다 피우고 가야죠. 그나저나…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상견례장에서 만났다고 이렇게 날을 세우니 말짱 도루묵 됐네요.”

“제가 서른 살 아저씨랑 가까워질 일이 뭐가 있어요.”

“이상하네.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착각이다. 가까워질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자 거부감이 들어 벤치의 끝자리로 옮겨 앉았는데, 그래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가려고요?”

“…저 휴대폰 좀 빌려주세요.”

“휴대폰 없어요?”

“차에 두고 왔어요.”

무시하고 가려니 여전히 차 번호를 모른다는 게 걸렸다. 다시 식당 안까지 가기는 너무 귀찮고, 빌려야 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라 거슬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신 안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는 순순히 재킷 안쪽에서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풀어 줬다.

“감사합니다.”

휴대폰을 받자마자 곧장 아빠의 번호를 눌렀다. 처음엔 비서 삼촌한테 물어볼까 했는데, 영하가 외우고 있는 번호는 아빠 번호뿐이라 다른 선택지가 없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여덟 번의 신호가 지나서야 통화가 연결됐다.

-전화받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냉랭한 목소리에 놀라 조금 멈칫하곤 뒤늦게 대답했다.

“아빠, 나야. 차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서 전화했어.”

-영하? 너 아직도 밖이야? 혼자?

“응? 뭐… 응.”

-기다려. 내가 나갈게.

“아니야, 아니, 괜찮은데. 차 번호만 알려 주면…….”

-기다려.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끊긴다. 까만색 화면이 뜬 휴대폰을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영하는 그대로 서민석에게 휴대폰을 주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 내역을 삭제했다. 어차피 서민석 누나에게 있는 번호지만 혹시 모를 일이고. 서민석을 몰래 만난 걸 아빠한테 들켜선 안 된다.

“잘 썼어요. 담배 계속 피우세요. 전 갈게요.”

담배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온몸을 덮친다. 더는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을 받아 가자마자 후다닥 도망치려고 했더니 서민석이 휴대폰을 쥔 채로 영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서민석의 안경 너머 눈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먼저 연락 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다시 보니까 또 욕심나네.”

“네?”

“귀찮게 하진 않을게요. 가끔 먼저 연락해도 되겠어요?”

서민석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물었다. 잡힌 손목이 신경 쓰여 흔들어 보이자 그는 어깨만 으쓱일 뿐 놓아주지 않는다. 연락해도 된다고 해야만 놓아준다는 뜻 같았다. 완전 순 억지야.

“어차피 이제 가족이 될 거잖아요. 호적상 삼촌이면 엄청 가까운 사이인데.”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다니 안타까우나 그와 영하가 호적상 친척이 될 일은 없다. 영하는 고모할머니의 최씨 손자라서 족보가 이상하게 꼬인 사람이었다. 다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자세히 해 줄 마음이 없는 영하는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러면 더더욱 안 되죠. 가족이 될 텐데. 이상하잖아요.”

“영하 씨야말로 이상하네. 꼭 아빠가 결혼하지 않길 바라는 거 같잖아요. 결혼 반대하고 토라질 나이는 아니지 않나.”

“남이사 그러든 말든.”

마음 한구석이 찔려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서민석이 따라와 그가 뿜는 담배 연기가 얼굴에 닿았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서 그런가. 꼭 애인 질투하는 것 같네.”

눈이 따갑고 저절로 캑캑 헛기침이 쏟아져 코와 입을 감싼 사이 서민석이 뜻모를 말을 지껄였다. 그의 입에서 애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서민석을 밀쳐 냈다. 영하는 반동으로 본인이 뒷걸음질 치고는 이를 으득 물었다.

담배 매너 거지 같기는.

서민석의 대꾸를 듣기도 전에 있는 힘껏 달려 그와 멀어졌다. 이럴 바에 그냥 식당 다시 들어갈걸.

애인 소리는 그냥 해본 말이겠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고 길게 늘어져 심어진 소나무 길을 지나 식당 입구 쪽으로 향하던 길. 마침 나오던 세계가 영하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영하는 마저 눈물을 훔치곤 멈춰 섰다. 다행히 담배 연기 맞고 울었던 흔적을 알아차리지 못한 세계는 영하의 양팔을 붙잡았다.

“밖에서 뭐 했어. 아픈데 진작에 전화하지. 누구 폰으로 전화한 거야?”

“저기.”

눈을 맞춰 주며 이야기하던 그는 영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서민석이 여전히 가로등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하필… 저 인간을? 하… 됐어. 가자. 데려다줄게.”

“나 많이 안 아파.”

“됐어.”

세계는 유난히 서민석에게 예민하게 반응했고, 영하는 곧 그에게 손이 꽉 붙잡혀 차까지 걸어갔다.

서늘한 공기 속 아빠의 상견례장. 그곳에서 손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자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다. 하면 안 되는 짓을 한 것 같아 심장이 조금 철렁하기도 했지만 싫지 않았다.

차에는 기사 아저씨가 대기 중이었다.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영하를 태운 세계는 차 문을 쥔 채로 안을 들여다본다.

“쉬고 있어. 30분 안에 끝낼 테니까.”

“집에 가면 안 돼?”

“기다려.”

“집 가고 싶어. 머리도 아프고… 너무 어지러워.”

그는 엄살인 걸 알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잔병치레는 거의 없지만 영하는 연례행사처럼 1년에 한두 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크게 앓는 편인데 마침 환절기를 앞둔 지금이 딱 그 시기다.

걱정을 예상하면서도 영하는 아픈 연기를 이어 갔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지어내는 이야기를 듣던 세계는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기다려. 김 실장 부를 테니까.”

“아니야! 됐어. 집에 가고 싶어.”

“병원 가.”

“이 시간에 무슨 병원이야. 진짜 그냥 집에 가고 싶어……. 힘들단 말이야. 병원 싫어. 집에 가서 그냥 자고 싶어.”

기겁하고 애원했다. 제바알. 나 집에 가고 싶어어. 세 번쯤 연달아 말하니 푸욱 한숨을 내쉰 최세계가 졌다.

“그래. 집에 먼저 가. 쉬고 있어.”

드디어 나온 허락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제발 집에 가고 싶다. 제발. 가능한 빨리 자신 빼고 모두가 행복한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세계의 샤워젤을 다섯 번 꾹꾹 짜서 씻고 머릿속을 비우겠답시고 찬물로 머리를 헹궈 봤는데 잡념이 사라지는 건 둘째 치고 두통과 두피의 통증에 얼얼하다.

“으아아.”

괜한 짓을 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아직 겨울인데 찬물에 도전하기엔 너무 일렀다. 바들바들 떨며 팬티만 겨우 걸치고 욕실에 걸려 있는 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집 안은 따뜻한데도 몸이 덜덜 떨린다. 머리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다시 욕실로 가서 드라이어로 말리고 나왔다. 여전히 춥다. 내일 몸살이 오겠구나 예감이 들었다.

약부터 미리 먹어야지.

구급약 통이 어디 있는지 몰라 거실을 한참 헤매다 우드 캐비닛 제일 안쪽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다행히 여러 종류의 상비약 중에서 몸살약을 찾아냈다. 두 알을 꺼내 들고 식탁에 있는 유리 물병에서 물을 따라 약과 함께 호방하게 넘겼다.

영하는 또 한 번의 괴성을 내질렀다.

“아아악! 씨! 뭐야 술이잖아.”

식탁 위에 투명한 물이 있길래 당연히 생수일 줄 알았다. 왜 제대로 생각을 못 했지? 누가 술병처럼 입구가 좁은 유리병에다가 생수를 넣어 마셔. 돌돌 돌려 상표를 확인하니 술이었다.

“…….”

한 모금 마셔 버렸는데. 게다가 감기약이랑.

내일 망한 컨디션은 따 놓은 당상이다. 무겁게 한숨을 뱉고는 그대로 식탁 위에 엎어졌다. 뜨끈한 뺨을 차가운 대리석에 딱 붙여 놓자 시원하다. 애써 고통받으며 찬물로 머리를 헹군 보람이 없게, 영하의 작은 머릿속에 상견례에 관한 생각이 쉽게 파고들었다.

예뻤다.

잘 자란 티가 나는 여자였다. 누구처럼 왕자로 떠받들려 키워져 막무가내에다 권위적이고 오만한 타입도 아니었다. 교양 있고 친절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스무 살짜리 아들의 존재에도 놀라긴 했으나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서민석 말대로 착한 사람이다. 정말로… 결혼한다면 영하에게도 상냥하게 대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싫다.

그래서 속이 들끓어 못된 짓을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영하는 아빠의 약혼녀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악녀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의 돈과 배경에만 관심이 있고 딸린 객식구인 아들을 찬밥 취급하는 그런 여자.

토할 것 같아….

물 대신 술을 마셨더니 속이 더 안 좋아진다. 황급히 일어나 싱크대에서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서 있었다. 울렁거리는 배 속에서 알코올 성분이 작용하고 있는지 서서히 몸에 취기가 도는 게 느껴진다. 싱크대 끝을 잡고 더운 숨을 뱉었다.

더러워.

아빠의 약혼녀한테 질투하는 미친 새끼.

그 여자 집안은 상상이나 했을까? 예비 사위와 혀를 나누고 입맞춤을 하는 그의 아들을.

‘네 속에 정액을 싸지르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어지럽다. 영하도 바라던 바였다. 수십 번 상상했다. 제 다리를 강제로 벌리고 박아 주길 바랐고 그래서 그가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남편의 바람을 목격한 아내처럼 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속상하다. 괴롭고, 슬프고, 자괴감이 그득그득 쌓였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해서 뻔히 보이는 삶을 망가뜨리는 본인이 답답하지만, 지난 몇 년간 아무리 애를 써도 아빠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다. 겨우 몇 년 전에 조금은 받아들여 편해졌는데 이제 와 그가 관계의 변화를 시도했다.

“머리 아파…….”

이젠 배 속도 함께 쓰리다. 술과 함께 먹은 약 때문에 쓰린지, 죽었다 깨어나도 최세계의 약혼자가 될 수 없는 자신의 핏줄 때문인지 모르겠다.

몸의 힘이 빠져 중심을 잃은 채로 비틀대며 식당을 걸어 나왔다. 방으로 향하려던 영하의 발이 문득 멈춘다. 시선이 안방으로 향해 있었다.

성산동 본가에서 살 때 영하는 세계가 없이도 그의 방에 종종 들어가 지냈다. 이 집으로 와서는 굳이 어딘가로 ‘피신’ 갈 필요가 없어져 한 번도 그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사 온 날 방 구경을 하며 잠깐 들여다봤을 뿐이다.

자신의 방과 똑같은 방문을 멀거니 쳐다본다. 홀린 듯이 다가가 문고리를 내렸다. 어두컴컴한 내부의 전등을 켤 생각도 없이 바로 보이는 침대로 향해 몸을 내렸다. 느릿한 몸짓으로 이불을 걷어 그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아빠의 향기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매일 밤 이곳에서 잠들 생각을 하니 몸이 뜨거워졌다. 술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눈을 감는다.

영하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바닥에 의자를 끄는 소리를 들은 순간이었다.

불도 켜지 않고 잠들었는데, 침대 옆 베드 테이블에 스탠드 하나가 켜져 있다. 투명한 유리로 조각한 듯한 화려한 스탠드 조명. 맞붙은 벽과 하얀 침대보 위에도 유리 조명의 음양각이 그려 낸 빛의 모양이 환하게 퍼져 있다. 영하는 손을 뻗어 멍하니 이불 위를 매만졌다.

“도둑고양이.”

의자에 정장 재킷을 걸어 둔 세계는 넥타이를 풀어 내리며 침대가로 다가온다. 영하는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했다. 입술만 뻐끔뻐끔하다가 그에게 안아 달라는 듯 두 손을 뻗었다.

“남의 침대에 속옷만 입고 들어오는 건 무슨 심보야?”

“가운도 입었는데…….”

“그것도 옷이라고.”

가운은 옷이라기엔 낯간지럽긴 하다. 영하도 평소에는 안 입는다. 오늘은 일부러 작정하고 입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정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안아 달라고 했는데 안아 주질 않았다.

세계는 넥타이를 마저 풀고는 팔 위에 올린 채로 셔츠의 단추를 위쪽에서부터 풀어 내린다. 멍하니 단추를 푸는 손길을 집요하게 따라 보고 있었다. 막 네 번째 단추를 풀던 손길이 멈춘다. 영하의 시선도 따라 멈췄다. 가슴팍이 언뜻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세 개로는 부족했다.

그는 영하의 갈증을 모르는 사람처럼 탈의를 멈추곤 침대맡에 앉아 영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디까지 보려고.”

열이 좀 나는 거 같은데. 이어 말하곤 목덜미에도 손을 댄다.

“하아아…….”

“여기서 자고 나한테 감기 옮길 셈인가?”

“감기 아니야…….”

웅얼웅얼. 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뱉었다. 올려다보려니 눈도 아프고 안압도 느껴진다. 열이 나서 그랬다. 다시 두 팔을 뻗자 이번에는 그가 마주 안아 준다. 허리 아래와 등을 받쳐 일으켜 앉혀 줬다.

등을 헤드에 받치고 뻐근한 목덜미도 벽에 대었다. 여전히 머리는 아프지만 좀 전보단 나아진 것 같다. 두 손을 얌전히 허벅지 위에 올린 영하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조금 더 어릴 때 만날걸….”

“그러면 지금이랑 달랐을 거 같아?”

영하의 주어 없는 이야기에도 세계는 와이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영하가 그의 물음에 답을 하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그래도 똑같아. 네가 태어나자마자 내 집에 왔어도 똑같아.”

“아니야. 달라.”

“같아. 넌 날 남자로만 봤을 거야.”

현실도피를 위해 꺼낸 말에도 자꾸 미운 말만 한다. 속상하고 그가 미웠지만, 영하가 위로받고 휴식할 곳도 최세계뿐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어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댄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무거운 몸을 애써 움직여 무릎으로 서자, 세계가 몸을 침대 안으로 가까이 했다. 두 발로 기어 그와 바짝 붙은 영하는 그의 너른 가슴에 귀를 대며 몸을 의지했다. 심장 고동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노는데. 그래서 예비 새엄마는 어땠어.”

그가 말할 때마다 가슴팍이 조금 오르내리며 진동이 뺨을 통해 전달됐다. 코끝이 조금 벌어진 옷깃 사이를 건드린다.

영하는 그와 맨살을 맞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타고 싶었다. 약혼녀와 했을 모든 것을 내 몸에도 똑같이 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다.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아들 둘 딸린 남자한테 시집오는 게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지.”

“듣기 싫어.”

“아빠도 양심이란 거 존재는 하는 사람이라, 너무 멀끔한 여자라 고민이 되더라고. 하지만 날 너무 좋아해. 선보는 자리에서 파티에서 우연히 보고 1년을 짝사랑했다고 눈도 못 마주치며 이야기하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자꾸 그 여자 이야기 하지 마.”

아랫배에 들끓던 욕망이 차갑게 식었다.

분위기 좋은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그 여자와 마주하고 웃는 아빠가 뇌리를 스쳤다. 그녀의 고백을 듣고 언젠가 파티장에서 마주쳤을 짧을 시선을 더듬어 보겠지. 그 여자는 그가 과거를 떠올리는 동안 아주 초조하고, 또 자신을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설레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멀쩡한 만남이다.

식은 정염만큼이나 낮아진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하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 상태 때문에 휘청이는 몸을 받아 낸 최세계가 흐느적대는 몸을 꽉 끌어안고 웃었다. 몸짓에 벌어진 가운이 흰색 드로어즈 끝이 보일 만큼 하얀 허벅지를 훤하게 드러냈다.

“하하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질투할 건 다 하고, 속옷만 입고 내 침대에 누워 날 기다리면서, 이런 짓까지 허락하면서 그 한마디는 하기 싫다고?”

“싫어. 죽어도 안 할 거야.”

“얼굴값을 하는 건가.”

“…….”

“이렇게 예쁘니까 져 줘야 하는 건가?”

뒤이어 말한 그는 영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흐릿하게 감겨 있던 영하의 두 눈에 안광이 서렸다. 등줄기를 찌르르 치고 오르는 만족감.

다급하게 세계의 머리를 끌어안고 매달려 그의 입술 위를 핥고 안으로 들어와 달라고 입을 벌렸다. 최세계는 목을 긁듯 웃고는 귀엽다는 듯 허리를 받쳐 천천히 몸을 기울인다. 천장이 기우뚱했다.

허리를 받치던 몸이 곧장 뒤통수를 받치고, 영하의 온몸이 침대에 안착했다. 그가 몸 위로 올라탔다고 느끼는 순간 턱 끝이 깨물렸다. 연달아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고는 강하게 흡입한다. 흰 셔츠를 꽉 쥔 손이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으, 으, 그거 아파…….”

아프다는 투정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흰 몸 위에 자국을 남기고, 새겨진 붉은 흔적 위에 입 맞추곤 조금 성급한 손길로 가운의 매듭을 풀어 양쪽으로 벌렸다. 푹신한 이불 위에 누운 몸이 속옷 한 장만 두고 나신을 드러냈다.

목덜미부터 서서히 따라 내려가는 눈길이 배꼽과 허리 부근에서 조금 찌푸려진다. 날씬하게 들어간 아랫배는 배꼽 주변만 말랑한 살결로 봉긋했다. 영하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무릎을 세운다. 이어 잠긴 목소리가 영하를 불렀다.

“말하면 이 이상 해 줄게.”

본인이 안달이 나 번들거리는 눈을 한 주제에,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적선하는 음성은 피어오른 정욕을 숨기지 않았다. 위험하다. 필요 이상으로 관능적인 목소리다. 아랫배에 닿은 집요한 시선에 숨을 헐떡인 영하는 아빠에 의해 벌어진 가운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끌어안고 자고 싶어….”

다시 유순해진 목소리로 말하며 베개에 머리를 댄다. 세계는 한동안 같은 자세로 영하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꺼뜨렸다. 대꾸 없이 일어나 샤워실로 가 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영하는 자신이 거절했으면서도 울적했다.

이대로 씻고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 아닐까 했는데, 한참 이어진 물소리가 멎은 뒤 세계는 영하와 마찬가지로 가운 차림으로 등장했다.

반쯤 말린 머리가 축축하다. 그 상태로 그가 침대 위에 올라와 옆에 누웠다. 기다란 몸이 부스럭대는 이불 소리와 함께 묵직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가 나가지 않는 걸 알게 되자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그는 바로 옆에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곤 영하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했다.

“우리 영하가 언제까지 예쁜 값을 하는지 두고 보자고.”

“두고 보든가.”

“얼굴값은 네 쪽이 아니라 내 쪽이 전공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반박할 수 없다. 그 얼굴에 홀려 미친 짓거리를 하는 산 증인이 본인이니까. 자신도 알고 있다. 아빠에게 휩쓸려 밀고 당기기나 하고 있는 현실을.

미친놈이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습기가 남은 손이 허리를 감아 당긴다. 등에 그의 가슴이 꽉 맞닿았다.

“그냥 껴안고 잘게.”

영하의 말투를 따라 한 가라앉은 목소리가 웅웅 동굴처럼 울린다. 영하는 베개에다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론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벌리곤 그의 성기가 배려 없이 뒤를 파고들었다. 단지 상상일 뿐이었다.

*

영하가 잠든 뒤, 밤의 장막이 여러 겹 내려앉은 시점. 세계는 아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났다.

작게 웅크린 영하의 허리 아래춤에 휴대폰이 있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열어 본 그는, 지문 인식이 필요하다는 알림을 보고선 곧장 영하의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렸다. 순식간에 잠금이 풀렸다. 아무런 의미 없는 보안이었다.

눈동자가 화면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휴대폰이 켜지자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메시지 내역이었다. 거리감이 있는 상대와는 곧바로 메신저를 주고받지 않는다.

역시나 예상대로 문자 내역 중 그가 찾던 상대가 있었다. 푸른빛이 덧씌워진 입술이 삐뚜름하게 기울었다. 이미 영하의 책상에서 명함을 발견한 상대다.

영하의 서랍에서 발견한 낯선 남자의 명함, 그리고 손수건의 주인일 것이 분명한 사람.

“서민석…….”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침음했다. 한참을 눈 위를 문질렀다. 화면의 불이 꺼질 즈음에야 손을 뗀 그는 영하의 휴대폰에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휴대폰을 원위치시켰다.

*

영하는 근래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사흘 전부터 그랬다.

영하가 쌀쌀맞게 굴어도 전혀 개의치 않던 사람이 요 며칠은 날이 서 있었다. 회사에 일이 생긴 걸까. 영하는 일 이야기에는 관심도 안 줬고 그도 딱히 회사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냉전 아닌 냉전 중에 묻기도 조금 그래서 입 다물고 있었더니, 어쩐지 점점 더 화를 내는 것 같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스러웠다.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게 아빠 아니었던가. 왜 화를 내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아침밥도 차려 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약혼식이 3월 초라는데, 벌써 2월 중순이다. 이 주 뒤에는 대학 입학식을 겸한 신입생 환영회도 있었다.

애인을 사귀어 질투를 유발하려는 작전도 주변에 남자가 없어서 실패했고, 영하에겐 더 패가 없었다. 못된 짓 잔뜩 해 최세계를 골탕 먹이고 지치게 만들려 했더니 이제는 그가 난리였다.

사실 반쯤 포기했다. 약혼을 막는 방법은 입 한 번만 열면 되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으나 그것은 최영하에겐 인생 최후의 보루였다. 스스로도 왜 그 한마디를 못 해 이런 지지부진한 일을 만들고 있나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결혼……. 언젠간 겪을 일이었다. 체념을 안고 있자니 무기력증이 몰려왔다. 제 친구들은 2월인 지금까지 성인 된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주에 3일은 호프집과 클럽을 전전한다는데 영하의 활동 반경은 오로지 집 반경 100m 이내였다.

“왜 화났을까.”

어제는 정말 이상했다.

이구아나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니 다시 몸이 노곤해 도로 소파에 누워 있을 때였다. 분침이 8에 가까워졌을 때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 왔어.’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감기인 것 같다.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져 움직이기가 힘들었으나 비척비척 일어나 고개를 들려던 참이었다.

‘이제 쳐다도 안 봐?’

며칠간은 그러긴 했어도 오늘은 쳐다보려고 했다. 단지 힘들어서 좀 늦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다가와 멍청하게 뺨이 달아오른 얼굴을 보더니 짜증스레 넥타이를 내리곤 재킷을 벗어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데나 내던졌다. 바닥에 툭 떨어지는 재킷을 보곤 영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던지지 마…. 그거 내가 다 치워야 하는데.’

그러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넥타이마저 바닥으로 던져졌다. 그 유치한 행동에 얼이 빠져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쳐다보자 소파 앞으로 다가온 그가 무작정 영하의 팔을 당겨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일어나 머리가 빙빙 도는 듯해서 다급히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우 어지러. 하지 마.’

‘또 아무것도 안 먹었지.’

‘음…….’

생각해 봤는데 아침에 바나나 하나 먹은 것 말고는 없긴 하다. 아, 카페 나가서 프라푸치노 사 먹었는데. 그 정도면 칼로리는 채운 거 아닌가? 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냈다간 정말 혼날 것 같아서 눈치만 보고 입을 다물었다.

세계는 영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몸을 위에서 아래로 슥 훑었다. 마치 그러면 살이 빠진 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더니 마른 뺨을 여러 번 문지르곤 뱉었다.

‘밥 챙겨 먹으라고 했잖아. 언제까지 혼자 있으면 굶고 살래? 그냥 도우미 매일 불러?’

‘먹을게… 오늘은 귀찮아서 안 먹은 게 아니라 진짜 그냥 배가 안 고팠어.’

‘종일 굶는데 배가 안 고프면 그게 사람이야?’

‘굶은 건 아닌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안 오시는 날에는 귀신같이 점심을 거른다. 그걸 알고 협박해댔다. 영하로선 매일 오시든 아니든 상관없는데 그게 왜 협박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굳이 트집은 안 잡기로 했다.

‘밥 안 먹고 또 어지럽다고 하기만 해봐.’

‘먹는다니까.’

알겠다는 대답에도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던 그는 영하의 얼굴을 말없이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보는 걸까?

전날을 곰곰이 떠올려 보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상견례 당일 밤까지도 괜찮았는데.

생각에 빠진 영하는 그가 잠깐 손수건 타령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손수건 써?’

‘응?’

‘며칠 전에 손수건 널어 둔 걸 봤는데. 너 원래 손수건 들고 다니는 거 아저씨 같다고 했잖아.’

‘아, 그거 친구 거야. 빌려 쓰느라 빨고 돌려줬어.’

‘아, 친구.’

‘응. 왜?’

‘아니. 새로 사 주려고 했지. 디자인이 너무…… 30대 느낌이라.’

설마 서민석 손수건인 걸 알아차렸을까. 그날 하필이면 서민석이 손수건을 꺼내서……. 아니. 그렇게까지 날이 선 질문은 아니었다. 시큰둥하게 묻고는 아니라는 말에 금방 관심을 껐다. 그럼 왜 그런 걸까. 조금 우울해졌다.

*

-첫 번째 서랍 열어 봐. 거기에 갈색 종이봉투 큰 거 있을 거야.

“첫 번째 서랍? 잠깐만. 찾았어. 등기라고 적혀 있는데?”

-그거 맞아. 이따 네 시 전까지만 가져다줘. 회사 로비 오면 전화하고.

“어? 내가 갖다줘?”

-그러면.

“어… 비서 삼촌이 가지러 오시는 거 아니었어?”

-일하느라 바쁜데 고작 그거 가지러 집까지 왕복해, 비서실장이? 백수가 심부름 좀 해.

아니 애초에 중요한 거라고 찾으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서랍을 마저 닫고 책상 위의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 시 사십 분. 네 시까지 한참 남았는데 그럼 본인이 와서 가져가든가.

“나 친구랑 약속 있는데…….”

-어디 가는데. 어디 가는지 문자로 보내 놔.

“왜?”

-하라면 해. 서류는 주고 약속 가.

“…알았어.”

-그래, 끊어.

뚝.

매몰차게 끊어지는 통화에 입이 빼쪽 나왔다. 갈색 서류 봉투를 보고 있자니 못내 서러워졌다. 휴대폰과 봉투를 함께 쥐고 서재를 걸어 나오는 발걸음에 힘이 쪽 빠졌다.

요즘 내내 그러더니 통화도 무뚝뚝했다. 밥 먹을 거냐, 뭐 하고 있었냐는 둥 안부 인사도 없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렸다. 잘 웃던 사람이 요즘은 웃지도 않는다. 그가 낮게 웃을 때마다 어쩐지 붕 뜨는 기분이 들던 영하는, 그 목구멍에서 깊게 나는 웃음소리가 그리워졌다.

영하는 보드라운 러그에 엉덩이를 대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어제 그렇게 끌어안더니 대뜸 밀치고는 서재로 들어가서 잘 때까지 나오질 않았다. 저녁 안 먹느냔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변한 아빠의 모습에 당황스럽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슬퍼져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그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하다.

오늘 아침에는 미리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려 줬다. 웬일이냐고 장난칠 줄 알았는데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출근했다.

“후우…….”

원래는 이게 맞겠지.

승준이랑 아빠 사이를 생각하면 이게 정상일 확률이 높다. 둘은 서로에게 용건이 없으면 일절 대화를 섞질 않았다. 용건만 간단히. 낯간지러운 말 없이. 스킨십도 최소한, 어쩌면 제로.

“싫은데…….”

영하는 가능하다면 아빠랑 매시간 닿고 싶다. 그에게 예쁨받고 싶었다. 영하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그 사람이 주는 관심과 애정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닿아야 직성이 풀렸다.

깨끗하게 닦인 바닥 위로 손가락을 튕긴다. 토닥토닥 작은 소리 너머로 다정했던 그를 상상했다.

그때…… 말하면 더 해 준다고 한 날, 싫다고 해서 그런가.

하지만 그날은 술 취해서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실제로 다음 날 아침부터 오전 내내 숙취로 토하느라 화장실에서 살았다. 그런 저를 오가며 쳐다볼 때마다 그가 얼마나 한심한 눈을 하고 있었던가.

짜증 나.

“어휴!”

뽀득뽀득 바닥을 긁다가 열불이 뻗쳐 무릎에 얼굴을 쿵 박고 잔뜩 찡그렸다. 혼자서 삽질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만나려면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

“진짜 최영하 실망이다.”

“그러게, 졸업식 하고 처음 보는 건데 술집을 가야지 무슨 점심이냐. 우리 이제 성인이라고.”

“술 먹고 뻗었다고 몇 번을 말해. 그날 너무 시달려서 술만 봐도 또 토할 것 같아.”

남자 넷이서 몸 구겨 가며 꾸역꾸역 택시를 타서는 가는 내내 영하를 탓했다.

어차피 자기들끼리 3차 가겠다고 했으면서 왜 굳이 날 거기에 못 끼워서 안달일까. 술자리를 피해 다닐 생각은 없지만 정말, 두 시간 동안 화장실 변기 붙잡고 있어 봤어야 내 마음을 이해한다. 당분간 알코올은 멀리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곧 오티가 있으니 싫어도 그날은 억지로 술을 마셔야 했다.

덩치가 제일 큰 선우는 조수석에 앉았고 비교적 고만고만한 영하와 민재, 동준이 셋이서 뒷자리에 앉았다. 택시가 하필 조금 작은 편이라 어깨끼리 맞부딪친다. 조금만 움직이면 옆에서 성질을 냈다.

“아, 움직이지 말라고 붙잖아.”

“누군 좋은 줄 아냐, 시끄러워.”

험악한 소리가 오가는 와중에 택시는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높은 호텔 건물이 낮은 상가 건물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날은 차가웠지만, 하늘이 맑다. 중국 공장 가동 안 했나? 미세 먼지와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날씨였다. 청명한 날씨를 만끽하니, 머리에 가득한 잡념이 환기되는 것 같다. 비록 아빠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긴 하나 친구들과 만날 때는 잠시 잊기로 했다.

영하는 상쾌한 기분을 숨기며 투덜댔다.

“너네 진짜 날 너무 뽑아 먹는 거 아니야?”

“야, 꼴랑 이십만 원으로. 술 약속 세 번이나 깼으면서. 그거 다 갚으려면 이십만 원이 아니라 오십만 원 써야 해.”

“그래도 무슨 남자끼리 망고빙수야. 거기다 호텔까지.”

“원래 그런 건 남의 돈으로 먹어야 하거든. 내 돈 주고 절대 안 사 먹지. 구만 원 주고 빙수를 왜 먹냐? 술 사지.”

스무 살 된 지 이제 한 달 반밖에 안 된 민재가 대단한 애주가처럼 킥킥대며 좋아했다.

그놈의 망고빙수 얘기를 처음으로 꺼낸 주범이 바로 김민재였다. 영하가 피씨방 가자는 약속, 술 마시자는 약속을 여러 번 깨 버려서 이번에는 기필코 같이 호프집에 가서 주사를 봐 주겠다고 벼르더니 또 걷어차이곤 의리도 없는 새끼라며 만나자마자 계속 징징거렸다.

계속 어깨를 잡아 흔들고 툭툭 때리고. 정말 너무 시끄럽고 정신 사나워서 밥을 사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걸로는 용서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고는 휴대폰으로 보여 준 게 망고빙수였다.

‘이거 사 줘. 우리 누나가 남자 친구랑 먹고 왔는데 진짜 맛있다더라.’

‘…네가 내 여자 친구야?’

‘아니지. 나만 먹는 게 아니라 네 명이서 같이 먹는 건데.’

‘징그럽게 니들이랑 호텔을 왜 가?’

‘야. 이거 하나에 구만 원이야.’

‘구만 원?’

‘우리 네 명이니까 두 개 사 줘야지, 최영하야.’

‘받고 음료수도 인당 한 개씩 시켜야지.’

호텔 빙수에 시큰둥하던 녀석들도 가격을 듣더니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영하한테 돈을 쓰게 한다니까 혹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남자 세 명과 함께 호텔로 가는 꺼림칙한 경험을 함께한 동지가 됐다.

신나서 다른 호텔의 비싼 빙수 이야기를 하던 녀석들은 막상 택시에서 내리자 머쓱한지 떨떠름한 목소리로 쭈뼛댔다.

평일 대낮인데도 호텔 로비에 사람들이 꽤 있었다. 빙수를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회전문을 넘어가니 넓게 깔린 베이지색 대리석 바닥이 어찌나 깨끗한지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조명이 비춰 천장과 바닥 양쪽에 조명이 달린 듯해서 어질하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 보니 어젯밤, 아빠가 밥 안 먹고 어지럽단 이야기를 한 번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른 말이 떠올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갑자기 가만두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해졌다.

다들 비슷한 수트와 까만 코트를 입은 직장인들이 로비 소파에 여럿 앉아 있었고 리셉션에도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평일인데 호텔에 묵는 사람이 많네. 지방에서 여행 온 걸까?

“어디로 가야 하지?”

“그냥 안내판 보면 되잖아. 저기 있네.”

대체 호텔 안에서 지도 앱은 왜 켜는 건데. 김민재 머리를 한 대 쳐 줘야 고장 난 TV처럼 제대로 되돌아올까?

민재의 패딩을 잡아끌며 벽에 붙은 안내판의 글자를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가던 때였다. 영하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온다.

스쳐 간 기둥 너머로 죄다 맞추기라도 한 듯 비슷한 새카만 코트, 비슷한 까만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 사이로 도드라지게 우뚝 선 남자가 있었다.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눈에 띄는 미남자임을 뒷모습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곧은 자세와 남들보다 한 뼘은 높게 선 키. 다른 이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무미건조한 표정. 곧은 선이 뚜렷한 유려한 외모.

빠르게 지나치는 이들과 달리 겨울 하늘을 따온 듯한 새파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리셉션에서 이야기를 하다 넘어온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여전히 웃음기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무례한 태도도 아니었다.

“야. 왜?”

라운지로 향하는 방향을 찾겠다며 저를 끌던 영하가 멈춰 서 있으니 민재의 시선도 영하의 눈을 따라간다. 부지런히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영하의 시선은 한 군데에 못 박혀 있었기에 민재도 시선의 대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모르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사람이다.

“어…….”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저쪽에서도 영하와 민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열다섯 걸음. 아니 스무 걸음쯤 될까.

민재가 탄식하며 영하의 옆얼굴을 흘낏 본다. 친구의 시선이 느껴져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누가 봐도 실의에 빠진 멍청한 얼굴일 게 분명하다. 아빠의 옆에 선 남자는 영하의 마음도 모르고 손에 카드 키를 들고 흔들어 댔다.

평일 낮. 이 시간. 타지에서 여행 온 사람들만 호텔에 방문하는 게 아니었다. 영하와 친구들처럼 단순 라운지 방문일 수도 있고. 아빠처럼…… 섹스하러 나타난 걸 수도 있다.

“야. 야, 괜찮아…?”

그를 발견하고 기껏해야 몇 초 지나지 않을 잠깐의 시간인데, 그사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 먼지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속이 상한 마음을 숨겨 내지 못했다.

결국 입술을 꾹 물며 숨을 뱉어 내자 민재가 곧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떠올랐다. 민재는 아빠가 내 남자 친구인 줄로 안다. 멀리서나 봐서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는데 알아차리는 모양이다. 잘됐다. 어차피 헤어졌다고 말하려던 계획이었으니 이 기회에 바람피우는 걸 목격하고 찼다고 하면 된다. 괜찮다.

괜찮긴 개뿔.

“영하야? 야, 최영하?”

머릿속으로 김민재가 아니라 아빠의 머리를 후려치는 상상을 할 때쯤 민재가 영하를 부르며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 이름을 들은 걸까. 너른 등을 보이고 서 있던 그가 무심코 뒤돌았다.

“…….”

눈이 마주쳤다. 민재도 스르륵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보고 흠칫 떤다. 무감하던 최세계가 고개를 느리게 기울이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곧이어 얼굴 위로 심상치 않은 표정이 드러났다. 다가오려는지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것을 보고 먼저 움직인 것은 영하였다.

“가자. 반대편이야.”

민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빠의 화난 얼굴에 영하는 더 화가 치밀었다.

화를 내?

지금 화를 낼 쪽이 누군데.

빙수고 뭐고 그 인간 얼굴에다 확 집어 던져 버리고 싶었다.

우아한 로비에서 시끄러운 발소리를 쿵쿵 내며 라운지를 향해 걸었다. 멀뚱멀뚱하게 기다리던 두 녀석도 얼렁뚱땅 무리에 합류했다.

너무 미워 눈앞이 막막했다.

*

당분간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으나 명령 같은 부탁을 받았으니 어쨌든 서류는 전달해 주어야 했다. 차라리 아까 로비에서 던져 버리고 올 걸 그랬다. 이걸 주러 회사까지 찾아가려니 상한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민재는 빙수를 먹는 내내 죄인처럼 처져 있었다. 김민재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영하는 제 코가 석 자라 민재를 거의 달래 주질 못했다.

빙수를 먹은 뒤 친구들을 보내고 영하가 도착한 곳은 결국 아빠의 회사 앞이었다. 죽을 만큼 싫었다.

“하아…….”

높은 빌딩 외관에 한 번 기가 죽어 슬그머니 1층 로비로 들어갔다. 여기도 또 로비네. 그 생각에 뒷덜미가 서늘하다. 아빠 옆에 선 남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얼굴은 제대로 못 봤어도 키는 큰 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최세계 상… 상무이사님 심부름으로 왔는데요.”

깔끔하게 머리를 올린 로비의 직원은 영하의 앳된 얼굴과 그 입에서 나온 상무의 이름을 듣고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네?” 하고 되묻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로비의 뒷문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카드 키를 찍으며 나오던 직원 두 명이 영하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지나간다. 굉장히 민망한 시간이었다. 괜스레 갈색 봉투만 소리 내어 매만지고 로비의 데스크를 붙잡고 있다 보니, 같은 유니폼을 입은 남자와 함께 나온 직원이 영하에게 웃으며 안내했다.

“상무님께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저는 이거만 드리고 갈 건데요?”

“하지만 상무님께서 올려 보내라고 하셔서요.”

“어…….”

무심코 서류를 바짝 쥐고는 혹여나 구겨질까 봐 손의 힘을 풀었다. 정말 전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내가 말 안 듣고 집에 가 버리면 이 직원이 혼나게 되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나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이 욕먹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다.

영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직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올랐다. 층수가 오르는 내내 마음이 너무 무겁고, 또 무너졌다.

아까 그 남자랑 체크인한 거 아닌가? 왜 벌써 회사에 있지. 아니면 체크인이 아니라 체크아웃인가. 아. 그럴 수도 있다. 아침에 회사로 출근한 게 아니라 그 남자가 있는 호텔 방으로 출근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감히 내가 해 준 밥을 먹고…….

영하는 주먹을 여러 번 쥐었다 폈다. 애써 화를 억누르지 않으면 아빠 회사에서 소리치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분명 탄수화물을 가득 먹고 디저트까지 배에 넣었는데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이다. 그러니 내 어지럼증은 공복의 문제가 아니라 아빠였다. 아빠가 내 속만 썩이지 않는다면 나도 건강해.

17층에 도착해서는 데스크 직원이 아니라 아마 아빠의 비서로 추정되는 여자분에게 안내받아 상무이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노크하고 문을 연 영하는 그의 얼굴에 서류를 집어 던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일찍 왔네. 아직 네 시까진 시간 남았는데.”

책상 앞에 앉아 무심하게 종이 파일철을 넘기며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 대뜸 화를 내던 그를 떠올리며 서류를 소파 위로 던졌다.

툭, 떨어지는 소리에 흘끗 소파 위를 보던 그가 곧 파일철을 책상 위에 내린다. 책상의 뒤편에는 영하도 이름을 외운 한국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이 자리했다.

사무실에 걸린 작품은 잿빛을 닮은 흑색으로 두껍게 바른 유화가 마르기 전, 뭉툭한 무언가로 수백 번을 긁어 입체감을 살린 그림이었다. 영하의 나이보다도 더 오래된 그림으로, 세계가 이십 년 전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한 미술 경매장에서 구매했던 그림이 지금은 500배의 가치가 됐다.

처음으로 산 그림, 수백 배의 가치. 어쩌면 최세계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가 멀게 느껴졌다. 오는 내내 마주쳤던 많은 직원들. 영하의 기를 죽이는 고층 빌딩. 그리고, 아마 그와 비슷한 레벨로 보였던 호텔의 그 남자와 상견례장에서 만났던 우아한 약혼녀.

영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아마 대학을 졸업해도 별 볼 일 없을 사람일 뿐인데.

“바쁘다면서 나한테 이런 심부름 시키고. 자기는 호텔 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별것 아닌 자신에게 괜한 기대를 심어 준 건 아빠였다. 마음을 접으려고 할 때마다 몸서리칠 정도로 다정하게 대해 준 것은 그였으니 모두 저 남자의 잘못이다.

영하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새카만 소파에 풀썩 앉아 중얼거렸다. 듣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더니, 꽤 멀리 앉은 그가 용케 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마.”

하는 말이라곤 죄다 사람 속 뒤집는 소리밖에 없다. 처진 눈 끝이 빼쪽하게 섰다. 영하는 곧바로 앙칼진 고양이 소리를 내며 그를 노려봤다.

“나더러는 어디 가는지 보고하라면서 아빠는 간섭하지 말라고?”

“뭐가 궁금한데.”

“아까 그 남자랑 왜 호텔에 있었어?”

“뭔갈 했겠지.”

“농담하지 말고.”

“여자에 민감해서 울고불고 난리 치는 녀석 때문에 이번엔 남자를 만났어. 이러면 네 궁금증이 해결돼?”

넓은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세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의자를 양옆으로 느리게 움직이며 영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에 코끝이 시큰했다.

“그 남자랑 잤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뱉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잔 거면.”

“…….”

“왜, 너도 아빠랑 하고 싶어?”

장난스레 흐르는 말에 입을 벌리고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자 굳게 닫힌 문만 보였다. 자세를 고쳐 앉은 최세계가 영하를 불렀다. 이리 와. 그에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했다.

“싫어.”

“화나게 하지 말고. 넌 왜 호텔에 있었어.”

자신을 추궁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좀 전에 본인은 섹스했다면서 지금 나한테 화를 내? 울컥 욕지기가 치솟아서, 영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이제 스무 살이니까. 호텔 가도 되잖아. 심부름 끝났으니까 갈게.”

소파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새카만 미니어처 자동차 오브제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앙-!

바닥의 회색 포셀린 타일 하나를 깨부수며 묵직한 소리를 내고 떨어진 것은 곧이어 쿵, 쿵 여러 번 바닥에 부딪치며 데굴데굴 굴러 영하의 발치에서 멈췄다.

쿵쿵 소리는 연이어 잔뜩 웅크린 영하의 심장에서 울렸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자신을 맞히려고 던진 것은 아니었으나 아빠가, 물건을 집어 던졌다. 시커먼 자동차 모양의 문진이 부딪쳐 쩍 금이 간 회색 타일을 발견하고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이리 와.”

가라앉은 음성이 재차 말했다. 이제는 가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책상을 돌아 다가가자, 의자째로 빙그르르 회전한 세계가 약하게 몸을 떠는 영하를 자신의 다리 사이로 바짝 당겼다. 영하의 울렁거리는 눈동자와 마주하고는 화를 내는 사람치고는 침착한 표정과 언사로 이어 말했다.

“속일 생각 말고 사실대로 말해. 아까 호텔은 왜 갔어.”

무서운 마음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자꾸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자동차가 떠올라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양쪽 손목을 붙잡은 그가 팔을 조금 흔들었다. 영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대답했다.

“나는… 그냥 친구들이랑 밥 먹으러 간 거야…….”

“거기까지?”

“정말이야. 빙수 먹으러… 간 건데.”

영하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흐릿했다.

“친구들은 무슨. 네 옆에 남자 하나던데.”

“아니야, 걔 말고 둘 더 있었어.”

“그래? 난 너한테 남자 친구라도 생긴 줄 알았지. 첫 남자 친구가 생긴 기념으로 성인을 만끽하러 호텔에 가는 줄 알았는데.”

“무슨…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아니야, 믿을게.”

올려다보는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무릎이 의자 끄트머리에 툭 닿는다. 아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영하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낀 것이 언제냐는 듯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호텔에서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야?”

“몰라도 돼.”

“진짜로…….”

“진짜로 잤냐고?”

영하의 허리를 당겨 안은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턱이 가슴팍에 닿아 그가 말할 때마다 가벼운 부딪침이 일었다. 그 간지러운 감각과 이런 걸 묻는 관계는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하는 그의 솔직한 대답을 바라 고개를 끄덕였다.

“잤어. 아침부터 체크아웃 시간까지 내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까? 상대방이 걷지도 못하도록 질척하게 했지. 여자랑 달리 남자랑 할 때는 좀 과격하게 해도 괜찮거든.”

자상한 어투로 속이 뒤집어질 이야기를 했다. 영하는 울컥하는 마음에 얼굴을 찌푸리곤 입술을 짓이겼다. 꽉 잡힌 손목 아래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걸레.

걸레. 걸레!

하루라도 그거 안 하면 죽어? 대체 몇 명을 만나는 거야. 복상사로 죽는 게 꿈이야?

이를 악물고 사나운 눈초리를 하자 세계가 눈매를 길게 접으며 웃었다.

“뭔가 속으로 굉장한 욕을 하는 것 같은데.”

“약혼녀 있는데 남자랑 잠을 자…? 아빠 대체 왜 그래?”

“여자가 싫다고 해서 남자랑 만난 건데. 널 위해서.”

“하지 마.”

“섹스? 아니면 말을 하지 말라는 건가?”

“둘 다 하지 마.”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싫으니까!”

핏물이 배어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영하는 타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 이상 화날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머리끝까지 열이 차오르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들뜬 목소리로 이어 하는 말에 영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내가 예뻐한다지만 아들이 아빠 연애 사업에 이래라저래라 해서 쓰나.”

“여, 연애해?”

“생각 중이야.”

“하, 하지 마. 싫어. 싫어. 하지 마!”

매번 하룻밤으로 끝나는 게 분명했던 그가 연애를 한다고? 약혼녀가 있는 이 시점에? 덜컥 겁이 나더니 눈앞이 번쩍했다. 영하가 아는 한 그가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남자와 호텔에서 만난다면, 일반적인 범주의 상황은 아니었다.

“왜 늘 고집만 부리지? 그럼 내가 언제까지 참고 수절할 것 같아? 여기 안에다 깊이 싸 주겠다고 했는데, 대답 안 한 건 너잖아.”

“수절한 적도 없잖아!”

“자꾸 나를 곡해하다니. 서운하네.”

그가 영하의 배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리눌렀다. 배꼽 부근이었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에 영하가 신음하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히익…!”

놀란 마음에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것뿐이었지만 섹스할 때 내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정말로 무언가 배 속 아래에 삽입된 것인 양.

동시에 세계가 눈을 가늘게 좁히곤 아들의 몸을 단단하게 옭아맸다. 자신을 결속하는 손길에 영하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껴 고개를 저었다.

“안, 아빠…!”

“딱히 네 말 들어줄 생각 없어.”

최세계는 갑작스레 영하의 바지 버클을 풀고는 바지를 내려 버린다. 헐렁한 청바지는 너무나 손쉽게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드러난 다리에 영하가 발버둥을 치며 이곳이 사무실이라는 것도 잊고 비명을 내질렀다.

“싫어! 놔!”

“하루 종일 싫다고만 하네. 거슬려. 조용히 해. 비서실에 네 목소리 다 들려주고 싶으면 계속 지르든가.”

속옷까지 함께 허벅지께로 잡아 내리자, 짙은 색으로 젖어 든 팬티 안쪽이 드러난다. 영하가 헛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검사를 해볼까.”

“무슨…….”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다본 그는 곧 엉덩이를 큰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통통한 엉덩이 아래를 문지른 손가락이 빠져나오자 미끈한 액이 손가락 사이를 실처럼 엮어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영하의 벌어진 입은 채 다물리지 않았다. 티셔츠가 길어 아랫도리가 가려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대낮에 사무실에서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간 수치심에 통곡했을지도 모른다.

“또 젖었네.”

“왜 이래. 하지 말라고…….”

“이러면 하루에 몇 번씩 팬티를 갈아입어야 하는 거지?”

“대답 안 할 거야. 싫-.”

곧이어 거칠게 양쪽 엉덩이를 벌리는 손길에 숨이 크게 멈췄다. 영하는 충격에 손을 떨었다.

엉덩잇살을 벌려 구멍이 강제로 벌어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다물려 있는 것이 뻐끔 벌어지곤 묽은 액이 골을 타고 허벅지까지 흘러내린다. 그 위로 세계의 길고 곧은 손이 갈라진 둔덕 사이를 파고들며 문질렀다. 히익. 등을 굽으며 몸을 움츠리자 멀어진 허리를 당겨 안고는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그냥 확인하는 거니까. 자꾸 반항하면 무슨 짓 할진 모르지만.”

그러나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흰 티셔츠 밑단이 위로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고작 뒤가 조금 만져졌다고 아래가 발기했다. 영하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밀어냈으나 단단한 바위처럼 꿈쩍도 안 했다. 세계는 즐거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어떡할까. 으음.”

“싫어, 제발 그만해….”

“나한테 만져지고 발딱 세운 건 너잖아.”

허벅지에 걸쳐진 속옷마저 종아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영하는 그의 앞에서 하체를 완전히 드러낸 채로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서 있는 것마저 괴로워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겨우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타고난 피지컬이 약세이니 아빠와 완력 차이가 상당해 그를 밀쳐 내기 쉽지는 않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하는 떨기만 할 뿐 그를 쉽사리 거부하지 않았다.

“으음.” 하고 짧게 고민하던 그가 발기한 성기에 손을 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발작하듯 몸을 떨고 “안 돼.” 했지만, 막상 상상만 했던 손길이 성기에 닿자 저릿한 쾌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읏…….”

“소리 크게 내면 밖에 들리잖아. 영하는 여기도 귀엽네.”

몸이 돌려져 그의 무릎에 앉아 두 다리가 넓게 벌려진 채로 성기가 만져졌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감당하기 힘든 충격인데, 쩍 벌어진 허벅지를 만지던 손이 내려가 오밀조밀하게 다물리는 항문 위를 힘 있게 문질렀다. 점막이 문질러지는 그 충격에 전신이 굳어졌는데도, 앞은 오히려 빳빳했다.

“우응, 안 돼……!”

“안 되긴. 곧 있으면 쌀 것 같은데.”

애처롭게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는 안 된다고 말하는 내용과 사뭇 다른 음란한 신음을 담고 있었다.

세계는 웃음기 섞인 대답을 들려줬다. 달아오른 뺨에 입술이 느리게 닿았다. 그가 한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팔로 받치니 저절로 몸이 옆으로 기우뚱한다. 이제는 정말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착하게. 아직 아무도 안 썼네.”

최세계가 꼭 다물린 구멍의 주름 하나를 매만지듯 느리게 문지르며 양심 없는 발언을 지껄였다. 낮게 가라앉은 퇴폐적인 목소리가 영하를 더 흥분케 했다.

“으응, 응, 흐읏.”

성기를 쥐고 흔들다 귀두부를 엄지로 쥐어 약하게 압박하자 울음소리가 흘렀다. 야릇하고 저질스러운 영상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천박한 소리였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 빼곡히 어쩌지 못한 욕망이 차올랐다.

아아. 그와 맨몸을 맞대고 싶다는 충동과 동시에 중지가 구멍 위를 반복적으로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구멍이 화끈화끈했고 허리가 크게 휜다.

영하는 종종 다리를 벌려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상상을 했다.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 상상 속 세계는 치미는 성욕을 애써 내리누르며 영하의 바람대로 부드럽게 안아 줬다. 미끄러운 실크 이불이 몸을 감쌌고, 따뜻한 조명 아래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였다. 이윽고 배 속에 뜨거운 정액이 퍼진다. 영하의 상상 속 섹스였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영하는 이성이 바래지는 느꼈다. 상상과는 다르다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단전을 가로지르는 야릇한 자극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아응! 읏, 흐응…….”

단지 문지르는 감각임에도 이겨 내기 힘든 쾌감이 느껴졌고, 엉덩이의 다물린 틈 사이로는 미끈한 액이 자꾸만 흘러 세계의 손바닥을 완전히 적신다. 눈앞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이 안에 넣고 싶어.”

벌름대며 액을 토해 내는 구멍 입구를 손가락으로 압박하며 그가 말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뒤쪽의 감각에 발가락이 잔뜩 곱아들고 덩달아 허리도 함께 휘었다. 고작 구멍이 만져지는 주제에 영하는 그의 성기가 제 뒤를 헤집는 상상을 하며 가늘게 허벅지를 떨었다.

“응? 영하야. 아빠가 말하잖아. 네 안에 넣고 싶다고.”

“흐으…! 아, 흣……!”

척척하게 젖은 음란한 목소리가 귀 가까이 닿는다. 자신을 희롱하는 그 목소리에 절정을 느꼈다. 꽉 잡힌 몸이 파르륵 떨리고 이내 최세계의 손바닥 안에서 흰 액을 사출했다.

이후 영하는 몇 번 더 앞뒤로 허리를 떨며 정액을 흘렸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절정에 다다르는 부끄러운 모습을 그가 온전히 쳐다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흐, 끄흐으…….”

남은 여운을 뱉어 내는 입술에 입 맞춘 세계는 내내 벌어져 있던 마른 두 다리를 한꺼번에 팔뚝에 올리고 고쳐 안았다. 한쪽 다리가 팔걸이 위에 올라가고, 등이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졌다.

“하아… 응, 흐으으…….”

절정감이 가시자마자 영하는 울기 시작했다. 온갖 감정과 쾌락의 뒤편에 자리 잡은 허탈함과 두려움이 영하를 구속했다. 축 처진 몸에 힘이 돌아온 뒤로는 울며 잡히는 대로 아빠의 온몸을 때려 댔다. 허벅지부터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자 그가 신음하며 버둥대는 몸을 붙잡았다.

“왜 이러는 거야! 왜! 그 남자랑 호텔에서 잤으면서 나한테 왜 이래!”

“너 짜증 나면 아빠 패는 거 진짜 버릇없어.”

“내가 할 말이야. 아빠야말로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주어를 제대로 말해. 네 자지 만져서 사정시켜 준 거? 아니면 엉덩이 구멍 만진 거?”

“왜 자꾸 다른 사람 만난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건데?”

엉뚱하게 튀어나온 대답에 세계가 만족한 듯 웃었다.

“네가 이렇게 울고 화내는 걸 보는 게 좋아.”

좋다는 말이 진심인지 표정이 상쾌하다. 희롱당한 영하만 속이 상했다. 바지 내려 확인을 해야 하는 건 영하가 아니라 아빠 쪽이었다. 아랫도리 휘두른 사람이 어디다 역정인지. 허벅지를 때려도 분이 안 풀려 어깨를 콱 깨물어 버렸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근육을 물어 보니 내 입만 아팠다.

“건드리지 마!”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될 텐데, 우리 영하는 왜 아직도 어린애처럼 짜증만 내지.”

그 어린애 데리고 별짓 한 사람이 누군데.

눈물을 닦아 내고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뒤쪽에서 흐른 물이 다리를 타고 내려 바지와 속옷이 엉망이었다. 이것도 다 싫었다. 애초에 아빠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이만큼 흐를 일도 없다. 일상생활이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부끄러워 죽어 버릴 것 같다. 아빠 회사에서 이 모양이라니.

아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소리를 내는 중에, 세계는 티슈를 수십 번 뽑아 손 위에 하얀 휴지 뭉치를 만들더니 대뜸 다리를 붙잡았다. 맨살에 닿은 촉감에 놀란 몸이 휘청거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으나 세계가 재빨리 붙잡은 덕에 타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모면했다.

“키도 덜 큰 게 왜 이렇게 기린처럼 휘청거려. 서 있는 것도 못 해?”

짜증스레 타박하며 휴지 뭉치로 다리 사이를 닦아 내길래, 영하가 그의 손에서 휴지를 빼앗아 들고 뒷걸음질 쳤다. 흥분의 여운이 남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으로 씩씩대 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가 할 거야. 놔.”

“그러든가.”

그가 몸을 떼어 내곤 가볍게 손을 털어 낸다. 정액으로 범벅이 됐을 손이 어느새 깨끗하다. 아마 그의 손에서 닦아 낸 정액은 휴지와 함께 대충 뭉쳐져 휴지통에 굴러다니겠지.

귀까지 새빨개져 소파로 달려갔다. 티셔츠의 기장이 긴 것이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그사이 세계는 아들을 희롱하기 위해 걷어붙였던 셔츠 소매를 단정하게 내리곤 전화기를 들었고 영하는 씨근덕대며 눈물을 닦아 냈다. 부끄러워 아직도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옷 한 벌 준비해. 상의 95, 하의 28.”

“100이야.”

“100 같은 95로. 음. 캐주얼. 바로 갖다줘.”

간단한 통화를 끊은 그는, 겨우 그치나 했더니 소파에 앉아 다시 흐느끼고 있는 영하를 보곤 허탈하게 웃는다. “눈물 그치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건가.” 하고 중얼거리고는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대고 턱을 괴고 있었다. 딱 맞는 정장 베스트 아래로 탄탄하고 두께감 있는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동요 하나 없는 자태였다.

그렇게 만져 대고 내 안에 넣고 싶다고 말해 놓고선… 흥분한 것도 나뿐이지.

영하는 세계의 시선이 벗은 다리에 향한 줄도 모르고 분에 못 이겨 씩씩댔다. 그러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팔뚝으로 거칠게 뺨을 훔쳐 내는 꼴이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광경이다. 아직도 덜 자란 못된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

“자, 이제 흥분 가라앉히고 대화를 해 보자.”

“난 생각 없어.”

“이제 스무 살인데 좀 어른처럼 말을 해 봐.”

“나 아직 애야. 아까 애라며.”

“애면 곤란한데. 밖에선 널 내 애인으로 알고 있을걸.”

“……뭐? 왜?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건데?”

난데없는 소식에 눈물로 젖은 휴지를 쥐어뜯다 고개를 쳐들었다. 어룽어룽한 두 눈이 더 커질 데도 없이 커졌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본인들이 그렇게 판단할 뿐. 이제 그만 울어. 언제까지 울 거야. 그러다 탈진 오겠다. 물부터 마셔.”

제법 부모다운 다정한 충고였으나 영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넘겼다. 그의 말을 듣기 싫은 것도 싫은 거지만, 바지 벗은 꼴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아. 속옷도 다 젖었는데……. 하지만 직원에게 속옷도 가져오라는 건 너무 미친 짓이었다. 이상한 짓 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물 마시란 말에도 움직이지 않자,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결국 일어나 한숨을 쉬며 한 켠에 비치된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아 내밀었다.

“마셔.”

이번에는 그냥 듣기 싫어서 입 꾹 다물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연이은 한숨 소리와 함께 그가 허리를 굽혀 입에 종이컵을 대어 준다. 그쯤 되니 더는 거절하기도 민망해 입만 벌려 꼴깍꼴깍 물을 마셨다. 다 비운 종이컵을 우지끈 구긴 그가 옆자리에 앉았다. 물기로 젖은 입술 위에 손가락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다.

“입술 좀 가만히 내버려 둬.”

“…….”

하지만 원인 제공은 다 본인이 하셨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영하는 일부러 대꾸하지 않고 상의로 가려지지 않는 다리를 손으로 가렸다. 세계가 이미 볼 거 다 봤다고 첨언했지만, 여전히 무시했다.

“이제 뚝 그쳐. 울 일도 아닌데 왜 울고 그래.”

“울 일인지 아닌지는 내가 정해.”

“하여간 말대꾸는.”

타박하면서도 손수건이 뺨에 닿았다.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훔쳐 낸 손수건은 곧 젖은 속눈썹 위로도 조심스레 닿았다. 그가 숨까지 멈춰 가며 세심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낸다. 고작 눈물을 닦아 주는 데에 집중한 그의 얼굴이 황홀할 만큼 잘생긴 까닭에, 마음이 조금 풀린 영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불유쾌한 핑계를 댔다.

“약혼녀 있는데 막, 아무나랑 자고 그러면 안 돼….”

“네가 수민 씨 신경 써 주는 거야?”

수민 씨. 다정한 호칭이 마음에 거슬린다. 제 마음도 몰라주는 아빠가 야속했다. 멋대로 아래를 만지고 희롱하는 것보다 농담이라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제게 하는 게 더 속상한데 왜 몰라줄까.

“잤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네가 느끼는 내 평판과 달리 의외로 아랫도리에 정신이 지배당한 놈은 아니라서, 대낮부터 호텔에서 남자랑 뒹굴 생각은 없어. 네가 무슨 반응을 할지 궁금해서 해 본 말이지.”

“뭐라고?”

별것 아니라는 그의 폭탄 발언을 듣곤 뒤통수를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얼얼했다. 벌떡 일어나 노려보니, 세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영하를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폭삭 젖은 바지와 아랫도리가 생각나 앉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아빠 옷 더러워져.”

“괜찮아. 다 닦았잖아.”

하지만 자신의 뒤에서 나온 액체로 그의 옷이 젖는 건 죽어도 싫다. 영하는 애써 옆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싫어. 됐다니까! …대체 아까는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잤다면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는 둥….”

“난 단지 네가 상상하고 있던 말을 해 준 거야. 애초에 날 호텔에서 봤을 때부터 넌 그런 생각밖에 없었잖아. 내 말은 들어 볼 생각도 없이. 너 혼자 상상하고, 멋대로 재단하고. 혼자 결정하고 또 화를 냈겠지?”

“…….”

“왜. 속상했어?”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또 누군가와 하룻밤을 보냈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그를 미워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세계가 실제로 종종 누군가와 관계 맺은 건 사실이고, 대체로 그가 그런 날은 영하는 가슴이 무너지는 감각을 매번 느꼈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빠는. 네가 대답 안 해 주고 미루는 거에 속상할 거라고 생각 안 해?”

“그거랑 다른 이야기잖아.”

“전혀 다르지 않은데.”

이 또한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다. 자꾸 아빠는 영하에게 능력 밖의 일을 원한다.

왜 계속 나한테서 허락을 구하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내 몸을 만지기도 하면서 왜 꼭…….

“그래도 앞으론 그런 거짓말 하지 마.”

좀 전엔 정말로 괴로웠다. 영하 스스로도 갈피를 잡질 못했다. 그가 앞과 뒤를 만져 억지로 희롱한 것은 싫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남자와 섹스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미움과 분노가 솟구쳤다.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네가 말 잘 들으면.”

“이것보다 얼마나 더 말을 잘 들어?”

전혀 통하지 않는 대화로 다투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에 영하의 바둥거림이 멈췄다. 흠칫 몸을 굳힌 영하는 세계의 몸뚱이를 거칠게 밀고 옆자리로 구르듯 잽싸게 도망쳤다.

-상무님, 옷 준비됐습니다.

“못 들어오게 해!”

“아주 상전 납셨네. 내가 심부름꾼을 부른 건지 대기업 회장님을 모신 건지.”

몸을 가릴 것이 없어 구석에서 움츠리는 아들을 두고 먼저 일어난 세계가 문을 열었다. 바깥에 선 직원은 그가 나올 거라 생각 못 했는지 놀란 기색으로 옷을 전달했다.

짧게 옷만 주고받은 뒤, 여전히 날이 선 기색으로 웅크린 영하에게 옷을 가볍게 던져 준 그는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어쩐지 안색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옷 갈아입고 집에서 쉬어.”

“아까 그럼 그 남자는 누구야?”

옷을 받아 든 영하가 짙은 그레이 톤의 오버핏 니트를 양쪽으로 펴 보며 물었다.

“사업차 만난 거야. 너는 친구들이랑 아기자기하게 빙수 먹으러 갔고 나는 식사하러 갔고. 호텔 38층에 일식 다이닝 있어. 거기서 밥 먹고 나오는 길에 널 본 거지. 의심되면 뭐, 먹은 메뉴라도 말해 줘? 스시 코스 먹었어.”

그러고 보니 조금 늦은 점심시간이긴 했다. 옷을 받아 든 채로 머뭇거린다. 딱히 해 줄 말이 없어 괜히 입고 있는 흰 티셔츠의 끝단만 끈질기게 만지작댔다. 역시나 완전히 믿진 못하겠다. 그냥 믿어 주기엔 그간 아빠가 보낸 하룻밤에 속을 너무 많이 썩였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건지, 팔짱을 끼고 뚫어지라 보던 그가 영하의 콧등을 검지와 중지로 잡아당겼다.

“아아아!”

아프진 않았지만, 어린애 취급 하는 것 같아 싫다. 아빠 말대로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했다. 엄살로 울상을 짓자마자 혀를 차며 빨개진 콧대를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그가 말했다.

“대체 날 얼마나 섹스에 미친 난봉꾼쯤으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 그런 흔해 빠진 놈이랑 정말 잤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얼굴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어….”

“아빠가 누구랑 호텔에 있는 걸 보니 막 질투도 나고 화가 너무 나서 정신을 못 차렸어?”

“그렇게 말 안 했잖아.”

“최영하. 이건 피로스의 싸움이야. 이겨 봤자 의미 없는 소모전일 뿐인 데다 어차피 넌 말하게 돼 있어. 굳이 자존심 싸움 하느라 객기 부려서 차일피일 시간만 흘려보낼 이유가 있어?”

상황은 그렇게 치달았지만, 실제로도 자존심 싸움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또 그뿐만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이 무서웠다. 남들은 이해 못 할 행동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이니까.

“나 옷 갈아입을 거야.”

“입어.”

“보지 말고 뒤돌아.”

“미치겠네.”

당돌한 요구에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착실히 뒤로 돌아 준다. 영하는 그의 뒤쪽, 세계가 만들어 낸 그림자 밑에서 안주하듯 자리를 잡아 겨우 하나 입고 있는 티셔츠를 벗어 올렸다.

“내가 이렇게 상전 대접 해 주는 거 너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거지?”

대답 대신 옷만 갈아입었다. 대충 던져둔 젖은 옷을 개켜 두곤 여전히 뒤돌아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말쑥한 블랙 베스트 차림이라 평소보다 몸집이 커 보였다. 상대적으로 가는 허리를 조이는 만큼 두껍고 넓은 어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하는 아빠를 보며 자신이 근육질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영하가 가진 모든 취향이 그로 인해 비롯됐다. 남자 취향. 옷 취향. 음식들, 평소에 사사로이 하는 행동들마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오른편의 벽은 모두 통유리창이었다. 사무실의 전등을 켜지 않아도 이렇게 환했다. 그는 빛이 드는 사무실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창밖의 높다란 빌딩과 건물 사이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하다가도 이렇게 바깥을 보며 잠깐 쉬는 거겠지.

세계의 시선을 잠깐 따라갔던 영하는 다시금 그의 널따란 등을 본다. 저 등에 아무런 걱정과 죄책감 없이 매달려 보는 게 소원이었다.

‘수민 씨.’

부드러운 니트의 소매를 만지작대며 망설이던 영하의 뇌리로 약혼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던 아빠가 떠올랐다. 약혼녀에게 밀려나기 싫었다. 영하는 치졸하게 그녀를 질투했다.

충동적으로 뒤돌아 있는 세계의 등을 껴안고 그의 어깻죽지에 뺨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미동 하나 없던 그가 움직인 것은 허리춤에 닿은 영하의 손길을 느낀 후였다.

세계는 배 위로 올라온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엄지가 손목 위를 느릿하게 여러 번 문질렀다. 손등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삐쭉하게 서 있었던 몸도 마음도 뭉글뭉글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야기했다.

“아까 그 남자는 정말 일적으로 만난 거야. 대성 셋째 아들. 캐나다에서 7년 유학하다가 한 달 전에 입국했어. 캐나다 유학 전엔 사교 모임에서 가끔 봤고. 얼마 전에 밑바닥부터 시작하면서 일 배운다고 연락 왔길래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조언도 할 겸. 사업상 친목도 다질 겸 만난 거야. 우선은 다른 거 다 제쳐 두더라도 외모는 전혀 내 취향 아니라고. 난 덩치 큰 곰 타입은 질색이야.”

할 말을 마친 그가 뒤돌아 마주 본다. 영하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빙수는. 그래서 맛있게 먹었어? 이 추위에다 빙수라니.”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왜.”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낮게 웃은 그가 아들의 이마에 턱을 대곤 대답했다.

“그럴 거면 가지 말고 와서 뺨이라도 날리지.”

“뺨을 왜 때려….”

“빙수 먹으러 갈까? 기억 안 난다며.”

“아니. 괜찮아, 안 갈래. 근데… 곰 타입이 싫으면 무슨 타입이 좋은 건데…?”

넌지시 물으니 그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모르겠어?”

“몰라. 아빠 여자 친구,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서수민은?”

“몰라.”

“아빤 예쁜 걸 좋아해.”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똑같지. 그분도 뭐… 예쁘잖아.”

우울하게 속삭였다. 서수민은 누가 봐도 예쁜 사람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쁘지 않다고 단정할 순 없는 외모였다.

영하의 우울함을 느꼈으면서도, 최세계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뭐? 하하하!” 하고 웃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 화면을 켰다. 셀카 모드로 영하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왔다. 너무 코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치워.”

콱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으나 휴대폰 화면이 자꾸만 얼굴 방향을 따라왔다.

“얘는?”

“싫어. 못생겼어. 울어서 얼굴 시뻘게져서.”

“이상하네. 예쁘기만 한데.”

자신의 꼴 사나운 모습이 자꾸 눈앞에 비치는 게 짜증이 나 휴대폰을 빼앗아 소파로 던져 버렸다. 아들의 박력 있는 태도에도 어깨만 으쓱인 그는 휴대폰을 돌려받을 생각도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최대한으로 기다려 주겠지만 솔직히… 언제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진 모르겠어. 약혼 날짜도 이제 이 주 남았는데.”

영하는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선택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지만 어떤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처음 마음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쌓아 온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한다 생각하는 순간마다 영하는 스스로와 싸워 왔다. 감정이 대립하며 충동했다.

세계를 생각하면, 애정과 욕망이 혈액 속으로 솟구치고 이어 뇌를 집어삼켰다. 그 남자의 목소리, 살갗의 감촉, 체향, 안아 주던 팔의 옥죄임.

시시각각 가슴과 뇌가 서로 다른 말을 지껄였다. 네가 착각하는 거야. 아니, 너는 네 아빠를 남자로서 사랑하고 있잖아.

자신과의 싸움이 끝나면, 영하는 곧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손가락질을 견뎌야 했다. 그러니 아빠가 원하는 말을 해 줄 순 없다. 내 남자라느니, 사랑한다느니. 영하는 차마 죽어도 꺼내지 못할 말들이었다. 이미 최세계는 영하의 남자였지만, 그저 마음속으로 간직해야 할 집착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결국 하나밖에 없다.

기운이 쭉 빠져 소파에 주저앉은 영하는 풀 죽은 얼굴로 넌지시 그에게 던졌다.

“어린애처럼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은 알아?”

“…….”

“나는 그냥 아빠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돼. 다른 건 다 괜찮아.”

단지 그의 주변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의 옆자리는 아마 평생 차지할 순 없겠지만 뒤쪽이나 한 발자국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것도… 괜찮았다. 그가 주는 사랑을 약혼녀와 반 갈라야겠지만 그것도 어쩌면…… 버틸 수 있다.

침묵하던 최세계는 영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험상궂은 얼굴을 지어 냈다. 미간이 실금이 가고 길게 뻗은 예쁜 눈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결혼해도 나 버리지만 말아 줘…….”

“하아… 최영하. 생각해 보라고 시간 줬더니 고작 결론 내는 게 그런 거야?”

“…그럼 어떡해. 어떡하라고. 누가 나더러… 지 아빠랑 붙어먹는…….”

짜증이 밴 그의 목소리에 움츠러든 영하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고 이마를 쓸어 넘기던 최세계의 몸짓이 굳은 것도 동시였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하는데.”

“아무도 없어. 그냥 내 상상이야.”

세계는 책상에 팔을 괴고 이마를 짚더니 감은 눈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화를 참는 중인 듯도 했고 단지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책상 위를 쿡쿡 두드린 세계가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한숨을 뱉었다.

“드라마 좀 적당히 봐.”

“아빠는 왜 늘… 내가 하는 말은 진지하게 안 들어?”

“진지하게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니까.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 머리 속에 대체 뭐가 든 건지 해부를 해 볼 수도 없고 어떻게 매번 사람 속을…….”

“내 나름대로 생각을 오래 한 거라고.”

“그러면 생각을 아예 안 하는 쪽이 낫겠네. 알겠으니까 일단 집 가서 쉬어. 더 입 열지 마. 화내기 전에. …차 대기시켜요. 손님 모셔다드릴 거니까. 기사는 이 팀장으로.”

말을 하다 말고 유선 전화로 비서실에 요청한다. 영하는 내내 소파 위에서 우물쭈물 앉아 있었다. 기껏 말했더니 대차게 까였다. 그럼 어쩌란 말이지. 난 못 한다고. 못 해.

“딴 데로 새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 어차피 집 앞에 데려다줄 테지만.”

“알았어.”

“당분간 집에 얌전히 있어. 괜히 나가서 음흉하고 애먼 놈 만나지 말고.”

“걔네는 엄한 놈 아닌데.”

친구를 감싸느라 뚱하니 뱉은 말에 그가 피식 웃는다. 하나도 안 웃긴데. 영하는 도대체 아빠의 반응을 따라갈 수가 없다. 머리 속에 뭐가 든 건지 해부를 하고 싶은 건 영하 쪽이었다.

“아빠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걔네 진짜 다 착하거든.”

“그래. 네 친구들은 그렇다고 치자. 오늘 좀 늦을 수도 있어. 많이 늦지는 않을 거야.”

“어디 가?”

“서수민 만나러 가는 거 아니니까 캐묻지 마. 섹스하러 가는 것도 아니야. 집 가서 밥 먹고 있으면 들어갈게.”

단호한 대답에 조금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섹스도 데이트도 없는 일정이라니 마음이 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똑똑, 누군가 노크했다.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기 전에 영하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나 자신이 지른 신음을 바깥에서 들었나 싶어 기척이 예민해졌다. 아빠의 사무실을 나서며 비서들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펴봤는데 다들 별 동요 없는 얼굴이다. 다행이다. 못 들었나 보다. 사실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낸 것 같지도 않다. …정말 못 들었겠지?

*

너무 늦지는 않게 들어오겠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12시 좀 넘어 잠들었는데 아빠는 그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침엔 집에 있는 걸 보니 들어오긴 한 건데, 대체 언제 퇴근한 거지?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그날은 그렇게 흘려보냈는데, 이후로도 세계는 나흘 내내 1시 넘어 퇴근했다. 영하가 아빠를 기다려 보려 애를 쓰다 잠들었던 게 1시였고, 겨우 잠들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몽롱하던 와중에 발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꼭 가위눌리는 기분이라 조금 무서웠다. 세계는 소파 앞에 멈춰 서더니 영하의 몸을 안아 들었다.

잠에 거의 취한 와중에도 영하는 기민하게 코끝을 킁킁댔다. 그에게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는 행위였다. 다행히도 며칠 전, 약혼녀와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더니 정말로 그에게선 본인의 체향 말고는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세계는 영하를 방 침대에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곤 뺨을 만지작댔다. 그 뒤로는 완전히 잠이 들어 기억이 없다.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그가 누군가와 밤을 보내느라고 늦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이 그렇게 많은 건가? 상무인데도 이렇게 늘 밤늦게 들어올 정도로 일이 많으면 그 밑의 직원들은 대체 얼마나 바쁜 거지? 그는 결정권자지 실무자가 아니다. 아빠의 잦은 야근에 그의 부하 직원들이 더 걱정스러웠다. 연락도 없이 날 혼자 내버려 두는 아빠는 상관없다고, 영하가 생각했다.

*

발치에 낙엽들이 자박자박 밟힌다. 겨울이 끝나 가는 시점, 앙상한 가로수에도 몇 나뭇잎들이 간신히 붙어 있었나 보다. 몇 달을 버텨 낸 나뭇잎이 잔뜩 말라 영하의 발바닥에 밟혔다.

바작바작 소리가 재밌어 나뭇잎을 여러 번 밟고 고개를 들자마자, 플라타너스의 널따란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영하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하고 스쳐 지나갔다.

“아악!”

근처 편의점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왔다가 봉변을 당했다. 몸을 부르르 떨곤 얼굴을 닦아 냈다.

짜증 나. 여러 번 얼굴을 털어 내고 편의점으로 향하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확인하니 아이씨. 서민석이었다.

  010-51XX-XXXX

다음 주에 한 번 보고 싶은데.

연락처에 등록도 하지 않은 번호로 몇 번 주고받은 문자 내역이 있다. 영하는 짜증스레 화면을 보며 고민했다.

번호 차단할까. 괜히 차단했다가 이 남자가 다른 꼼수를 쓸까 걱정되어 계속 차단은 미루고 있었다. 질투 작전은 무기한 보류다. 단지 아빠의 질투를 위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감정 소비였다.

내향적인 최영하가 감당하기에는 꽤 벅찼다. 영하는 이미 남에게 쏟을 수 있는 감정의 대부분을 아빠에게 공들이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과 만나 장단을 이룰 여력이 없었다.

서민석은 객관적으로 조건이 좋은 남자였지만 질척하게 굴지 않겠다고 한 것에 비해 뒤끝이 길다. 상견례장에서 만난 이후로 여러 번 문자를 보내왔다. 게다가 영하의 성에 차지 않았다. 영하는 키가 더 크고 몸집도 큰 데다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남자가 좋았다.

그냥 무시하자. 몇 번 무시당하면 자기도 자존심 상하니까 더 이상 안 들이대겠지.

괜히 사이가 틀어지면 곤란하다. 서민석은… 아빠의 약혼녀의 남동생, 그러니 훗날 영하의 가짜 삼촌이 될 사람이었다. 따지자면 호적도 다르고 피가 섞인 삼촌은 아니니 진짜 삼촌처럼 자주 만날 일은 없겠지만 1년에 한두 번은 보지 않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아마 아빠가 결혼해서 그 생활이 익숙해질 때까진 내내 이러겠지. 어쩔 수 없다. 이런 질척하고 지저분한 감정 또한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견뎌 내야 하는 과정이다. 어차피 제가 그의 아내가 될 수는 없다. 애초에 자신은 여자도 아니었다.

“그냥 마트 갈까…….”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이럴 땐 밖을 쏘다녀야 했다. 날이 추워 공원을 오래 걷기는 힘들고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으니 장 보는 김에 걷기라도 해야겠다.

편의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틀었다. 10분만 더 걸으면 목적지가 나온다. 패딩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 보니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서민석이 또 문자를 보내나 싶어 무시했는데 진동이 이어진다. 전화였다.

[김민재]

그날 호텔에서 빙수를 먹은 후로 민재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뭐지. 잠깐 화면을 들여다보다 곧 민재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이 갔다. 한숨을 뱉으며 휴대폰을 귀에 댄다. 민재는 어울리지 않는 은근한 목소리로 영하를 불렀다.

-야. 영하야.

“왜?”

-그, 있잖아. 그날. 그 호텔에서…….

“그래, 그 호텔에서 뭐.”

-아니….

자꾸 귀찮게 뜸을 들인다. 어차피 무슨 말 할지 뻔한데. 게다가 민재는 그날 벌어진 일이 죄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민재가 무슨 잘못인가. 하필 빙수 먹으러 간 그 호텔에 그가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됐어. 헤어졌어.”

-뭐? 헤어졌다고?

그 남자와 아빠는 말 그대로 비즈니스 관계였지만 그런 것까지 민재에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헤어졌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잊을 만하면 자꾸 민재가 애인이랑 뭐 하고 지내냐고 물어봐서 힘들었다.

김민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헐떡댔다. 쿵쿵대며 걷는 소리가 이어 들린다. 보아하니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너 피시방이야?”

-어. 어어. 야, 진짜 헤어졌어? 그러면 진짜… 바람이었던 거야?

그 말엔 조금 고민했다. 바람피워서 헤어졌다고 하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는 거 아닌가? 하지만 길게 이야기를 지어낼 솜씨가 없다. 잠깐 고민하여 신호등을 기다린 영하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영하가 말을 지어낼까 말까 생각에 잠긴 시간이 속상함을 참아 내는 시간으로 느껴졌는지, 한숨을 푹 내쉰 민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영하를 위로했다. 분명 가짜 남자 친구와 대충 지어낸 헤어짐의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영하는 진심으로 본인이 바람맞은 남자가 된 것 같아 영 석연찮았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생 저만 예뻐해 줄 거라 생각했던 아빠에게 배우자가 생겼으니.

“됐어.”

-아니, 시발 그 미친 새끼는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바람을 피워?

“됐다니까.”

-못해도 열 살 차이라고 하지 않았냐? 열두 살인가? 나라면 열두 살 어린 애인… 이면 큰일 나지만. 아무튼 내가 그 남자면 업고 다니지 절대 한눈 안 팔 텐데. 하여간 좆 달린 새끼들은 아, 시발… 나도 달렸지. 어쨌든 마누라가 희대의 미녀라도 추녀랑 바람피운다잖아.

하지만 본인은 희대의 미인도 아니었고 서수민도 추녀가 아니었다. 조건만 따져 보면 나이 빼곤 죄다 최영하가 진다. 전혀 위로되질 않았다.

“어엉. 고맙네. 그래.”

-야, 너무 상처받지 말고. 내가 그 인간보다 더 잘생긴 남자로 구해 줄게.

“너 아는 남자 없잖아.”

-이제 대학 가면 아니거든. 야, 나 저번 주에 이태원 바 갔던 거 말해 줬던가?

“해 줬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가 게이 바에 갔던 체험담을 주의 깊게 듣기엔 그 당시에는 정신이란 게 워낙 없던 날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태원의 게이 바가 아니라 할리우드에 가더라도 아빠보다 잘생긴 남자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6년 전 그를 처음 봤을 때도,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도 그는 영하의 삶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

마음이 쓸쓸해서 그럴까. 횡단보도를 건너며 휴대폰을 반대편 뺨으로 고쳐 받던 영하는 맞은편 횡단보도 너머 인도 보도블록 위에 서 있는 남자의 정수리에 나뭇잎이 올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앙상한 겨울나무 밑에 선 남자는 머리에 낙엽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귓가에 연신 쫑알대는 민재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넘기곤 돌부리를 발로 걷어찬다. 사거리에 도착하고서 세 번째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고서야 영하도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나무 아래 남자는 교차로를 넘어가는 게 목적이 아닌지 파란불에서도 미동하지 않고 서 있었다.

오는 길에 낙엽에 뺨을 맞은 기억을 떠올리며, 영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꼭 나뭇잎 모자를 쓴 것 같은 모습이라 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그의 머리에서 낙엽을 들어 올렸다.

거칠한 이파리에 걸린 까만 머리카락 몇 올이 함께 딸려 올라간다. 손에 든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영하를 바라본다. 까만 두 눈과 마주쳤다. 당황해하길래 손에 든 나뭇잎을 몇 번 흔들었다.

“아. 고맙습니다.”

인사말과 함께 흰 손끝에서 나뭇잎이 주르륵 떨어진다. 마주친 남자는 영하보다 시선이 위에 있었고, 예상외로 어린 또래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아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등을 돌렸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남자의 허벅지에 맞아 비틀대더니 바닥을 쓸며 멀리 날아갔다.

휴대폰에선 김민재가 여전히 쫑알대고 있었다. 묻지도 않은 게이 바 체험기를 자꾸만 말해 줬다. 그래 봤자 난 기억도 못 할 텐데.

간간이 “그래? 재밌었겠다.”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해 주며 마트로 들어갔다. 카트를 끌면서 한 손으로 전화하기는 좀 힘들어 카톡으로 말해 달라고 하고 통화를 끊자마자 아빠의 퇴근 시간이 궁금해졌다.

며칠째 영하는 혼자 저녁을 먹었다. 오늘도 혼자 먹기는 싫은데. 우유 코너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영하는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전화해 봤자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고 있었냐면서 헛소리만 5분 하고, 정작 중요한 건 말해 주지 않은 채로 통화가 끝날 게 분명했다.

“삼촌.”

-네.

김 실장에게 말을 놓아도 된다고 했으나 여전히 존댓말을 섞어 사용했다. 그의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으나 아빠와 비슷한 연배일 텐데 존댓말을 듣는 것은 불편하다. 1.5L와 900mL 팩 우유 중에서 고민하던 영하는 팩 우유를 카트에 담았다.

“아빠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상무님 오늘 정시에 퇴근하실 겁니… 퇴근 하실거야.

“그래요? 그럼 오늘은 집에 일찍 오겠네.”

정시 퇴근이란 말에 화색이 돌았다. 오래간만에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카트를 돌려 야채 코너로 향하던 도중에 김 실장이 이어 말했다.

-근데 상무님 오늘 회사 마치고 바로 성산동 가실 거라, 자택에는 조금 늦으실 수도 있어.

“본가에요?”

-응. 아마 거기서 저녁 드실 것 같은데 영하 저녁이라도 뭐 시켜 줄까? 배달이라도.

“아, 아니요. 괜찮아요. 지금 마트라서 장 보는 중이거든요.”

-그래. 상무님도 이번 일만 끝나면 일찍 퇴근하실 거야. 안 그래도 네 걱정 많이 하시더라고. 7시만 되면 네가 삐졌을 거라고 한탄하시던데.

삐진 건 사실이다. 예전에는 늦으면 늦는다고 이유를 말해 줬는데 이번엔 말도 없이 매번 늦는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면서 한탄은 무슨… 죄다 쇼다.

저녁에 맛있는 거 해 주려고 했는데.

알겠다고 전화를 끊고 나서는 레토르트 음식만 잔뜩 카트에 담았다. 혼자 먹을 땐 귀찮아서 요리 같은 짓 안 한다. 애초에 귀찮아서 밥도 거르는 인간이 퍽이나 예쁘게 차려서 먹겠다.

함박스테이크와 파스타 간편 식품을 잔뜩 담고는 밀키트도 몇 개 채워 넣으니 혼자서 들고 가긴 무거울 만큼 카트가 찼다. 속상한 얼굴로 카트를 들여다본다. 아빠와 둘이서 본가를 나올 때는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는 상상도 했었다.

멍청하긴. 최영하…… 정말로 아빠랑 살림이라도 차리는 생각을 했구나.

자괴감이 물씬 들었다. 마트 한복판에서 울음이 나올 것 같아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빠가 보고 싶다.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리며 곁에 있어 달라고 조르고 싶었다. 늦게 들어오는 것도 싫고, 약혼하는 것도 싫고, 결혼하는 건 더 싫다. 이럴 거면 나에게 괜한 희망을 심지 말았어야 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했다. 니스 해변에서 먼저 키스했을 때 이런 짓 하면 안 된다고 화를 냈어야 했다.

자기 좋을 대로만 하고 살지.

키스는 왜 했어? 혀는 왜 집어넣어? 그런 걸 누가 아들이랑 해.

손을 꽉 쥔 탓에 짧은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싫다는데 억지로 바지 벗겨서 성희롱해 놓곤 다음 날부터 늦게 들어오는 건 진짜 아빠 잘못이다.

예쁜 사람이 좋다면서 휴대폰으로 내 얼굴 비춰 준 것도 죄질이 나빴다. 그런 식으로 다른 여자들을 꾀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나 카트를 지지대처럼 붙잡고 선다. 당장 근처에 아빠가 있었으면, 사무실에서 그가 말했던 것처럼 뺨이라도 날렸을지도 모른다.

속상한 마음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전날 세계는 이전보다 빠른 9시에 들어왔지만, 영하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가 본가에 가는 이유가 어림짐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약혼식 때문에 불려 갔겠지. 아무래도 결혼식이나 약혼식이나, 부모님의 입김과 손길이 닿기 마련이다. 그의 약혼식에 할머니가 지대한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했다.

약혼식이 얼마나 남았더라. 두 손에 꼽힐 만큼 시일이 가까웠다. 약혼식과 약혼녀. 그리고 올해 안에 이루어질 결혼식을 떠올리니 몸을 잠식하는 우울감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떼를 쓰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이제 일 다 끝났어. 일찍 들어올게. 그만 삐지고 화 풀어.’

아침에 대꾸 없이 뚱하게 앉은 영하를 보며 세계가 말했다. 통통한 볼을 꼬집고 툭 튀어나온 입술을 쿡 찔러 봐도 영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닝 키스 할까?’

‘안 해.’

어깨를 퍽 밀쳐도 세계는 실실 웃었다. 날이 갈수록 불안해지는 아들과 다르게 그는 며칠 전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사무실에서 무거운 문진을 타일 바닥이 깨지도록 던지며 화를 내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처럼.

영하가 거부해도 억지로 잡고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춘 그는 아들의 양 볼을 손으로 잡아 꾹 내리누르며 통보했다.

‘저녁에 차 보낼 테니까 예쁜 옷 입고 나와. 외식하자. 그것도 싫다고 할 건 아니겠지?’

‘알았어.’

‘알았어 말고.’

‘네에.’

‘응. 다녀올게.’

그가 기분을 맞춰 주고 있었다. 약혼식 날이 다가오면 영하가 더 히스테릭해질 것이란 걸 아는 듯했다. 그래서 밉고, 그래서 좋았다. 그의 다정함을 나눠 가질 생각을 하면 제 영혼이 찢기는 기분이었지만 남은 반절이라도 가지려면 넝마가 된 가슴으로도 참아야 했다.

*

슬픔에 잠긴 영하에게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은 세계의 출근 뒤, 겨울의 햇볕이 가장 따뜻한 3시쯤이었다.

띵동-

자꾸만 울리는 벨 소리에 슬그머니 발을 놀려 인터폰 앞에 섰다. 인터폰 화면에는 작은고모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고모가 왜?”

당황한 마음에 얼른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현관으로 나갔는데, 그사이 들어온 작은고모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보라색 보자기를 보고서야 영하는 난데없는 방문의 이유를 알게 됐다.

아, 저거 주러 오셨구나.

“안녕하세요, 고모. 할머니가 보내신 거예요?”

“그래. 안녕. 네 아빠 먹이라고 명란젓을 석 달 전부터 예약하셨어. 무슨 서른여섯 살을 아직도 열여섯 살로 본다니까.”

영하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그녀가 보자기를 내밀더니 곧 인테리어를 둘러보곤 감탄을 뱉었다. 밝은 분위기의 거실에는 우드 실링 팬이 느리게 돌아가고 있다.

“이 집은 남자 둘이 사는데 무슨 신혼집 같이 꾸며 놨네. 오빠도 취미가 고약하다니까.”

“아빠는 예쁜 거 좋아하시니까요.”

우물우물 대답했다. 보자기를 식당에 두고 나오자, 그사이 소파에 기대어 선 고모가 영하를 보곤 물었다. 큰고모는 속을 알 수 없어서 무섭고, 작은고모는 무뚝뚝하고 예민해서 조심스러웠는데 오늘 그녀의 표정은 편안했다.

“아빠랑 단둘이 나가 사니까 좋아?”

“네…?”

말에 뼈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단순 영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속을 알 수 없는 큰고모나 아빠와 달리 작은고모는 솔직한 편이었다. 가감 없는 사람이다. 정말로 영하가 좋아 보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감추는 게 많은 사람이라 가슴이 졸아든다. 애써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이어진 말에 영하는 크게 어깨를 떨며 말을 더듬었다.

“왜. 너 좋아하잖아. 너희 아빠.”

“무, 무슨….”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굴어? 얼굴 좋아 보여서 그래. 눈치 보는 것도 덜하고.”

“아, 아아. 네에에.”

눈높이가 비슷한 고모의 표정을 살폈다. 특별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그냥 하는 말인가 보다. 다행이었다.

“나도 사람이라 조카가 우중충하게 있는 거 좀 신경 쓰였어. 아무튼. 너희 아빠 잘 챙겨. 어떤 깐깐한 할머니 심부름 귀찮으니까. 멀대 같은 아들내미 때문에 자꾸 치맛바람을 휘두른다니까. 자, 이거 받아. 이건 너 주라더라. 할머니가.”

나? 할머니가 나한테… 뭘 주신다는 거지.

의아했지만 일단은 고모가 내미는 종이 가방을 받아 든다. 작은 가방 안에는 까만색 가죽 지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금방 돌아가는 그녀를 배웅해 주고 돌아와 아무런 걱정 없이 지갑을 펼쳐 든 영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단순한 갈색 가죽 지갑 안에는 통장과 인감도장, 그리고 체크 카드가 들어 있었다.

“이게…….”

통장을 확인한 영하는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친할머니에게 이렇게 비밀스레 통장을 받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며 통장을 펼치는 순간 종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작은 메모였다. 무심코 주워 들어 읽어 본 영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피가 차갑게 식었다.

*

영하의 친할머니이자 최세계의 모친인 김수림은 전날 아들과 본가에서 조우했다.

짙은 월넛 컬러의 웨인스코팅 장식 아래, 우아한 동양란 화분 세 개가 줄지어 자리했다. 식물 키우기엔 영 재주가 없는 그녀가 요즘 공을 들여 보살피는 녀석들이었다.

화분 옆, 시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함께 가져왔다는 오래된 황양목 자개 약장은 정성 들인 기름칠과 관리를 통해 그 화려함이 여전하다. 촘촘하게 자개로 장식된 소나무와 목이 긴 사슴의 형태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았다.

마른 수건으로 약장을 닦아 내는 와중에 도착한 최세계가 맞은편 테이블 소파에 앉았다. 다녀왔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는 못된 아들내미였다.

수건을 접어 둔 그녀가 가볍게 걸어 마주 보고 앉는다. 똑똑- 노크와 함께 집안일을 도와주는 세진 댁의 목소리가 들려 홍차 두 잔을 부탁하곤 상견례 이후 처음 보는 아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집에 온 지 몇 분이나 됐다고, 세계는 벌써 지루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는요?”

“골프 가셨다. 그래. 할 말 있다더니.”

“같이 들으시면 좋을 텐데. 저 파혼하려고요. 결혼 생각 없어졌어요.”

같이 듣는 게 좋다더니, 덜컥 하는 이야기가 파혼이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놀라지 않은 모습으로 침착하게 아들의 눈을 살폈다. 세계가 입술을 당겨 지그시 웃었다.

누구 배에서 태어났는지,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외모로 태어난 데다 두뇌 또한 명석하고 영리했다. 단지 교과서적인 학업에만 뛰어난 게 아니라 사업적으로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

그녀가 아들을 유난히 귀히 여기는 것은 단지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최고의 작품이기도 했으며, 아픈 과거를 이겨 내고 당당히 반짝이는 생명력과 쇠심줄 같은 의지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다만 머리가 굵어지고부터는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중학생 재학 시절 큰일을 겪었다. 미치지 않고 잘 버텨 준 것만으로 무릎 꿇고 감사할 실정이었다.

어쩐지 먼저 선을 보고 싶다고 하더니……. 전혀 예상을 못 했던 일은 아니다. 나이가 서른여섯인데 결혼도 아니고 약혼부터 하겠다는 점이 수상했다.

“안 놀라시네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약혼식이 열흘 남았는데 인제 와서 말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이런 갑작스러운 파혼을 서 검사가 받아 주실 것 같니?”

“양해 구하러 온 게 아니라, 통보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따지자면 그쪽에서도 파혼이 나을 텐데요. 애지중지 키운 딸이 저한테 시집와 봤자 앞으로 지옥의 시작일 텐데.”

“그런 말 마라. 네가 모자라는 게 뭐가 있다고.”

“남편을 아들과 나누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세계야…….”

끔찍한 소리에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파혼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불안하다 했더니. 아들과 나눈다는 의미가 어떤 뜻을 내포한 건지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옅은 주름이 진 이마의 홈이 깊어졌다. 두 번째 한숨을 내쉴 때쯤, 세진 댁이 들어와 홍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조용히 물러선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신 거 알아요.”

“됐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어차피 승준이 있으니 후계자 문제는 없잖아요. 사업 확장에 굳이 결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방법은 충분히 있습니다.”

승준이 이야기에 답답한 한숨을 뱉었다.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 이야기했다.

“사업 확장이 문제가 아니라 괜히 검찰이랑 척질 일을 왜 만들어? 이럴 거면 애초에 약혼 이야기를 꺼내지를 말았어야지! 혹시 서 검사가 복수라도 하겠답시고 회사 들쑤시면 너나 회사나 무사하지 못해!”

“고작해야 차장 검사입니다. 공수처장 이야기가 나오긴 했어도 아직 다른 후보들과 함께 거론되는 정도지 내부적으로도 확정된 후보는 아닙니다. 제가 검사 하나 처리 못 할 것 같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결혼에 뜻이 없어진 것도 있지만, 영하가 약혼 이야기만 나오면 종일 울고불고하는데, 아빠가 된 도리로 어떻게 모른 척하고 밀어붙이겠습니까.”

아들은 그 이야기를 꽤 즐거이 풀어냈다. 영하 핑계를 대는 것을 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훤히 보였다.

식은 홍차를 넘겨도 목이 탄다. 당장 다음 주 사모님들 모임에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걱정이었으나 세계가 제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문제가 가장 컸다.

초조하게 잔의 손잡이를 엄지로 매만진다. 금색으로 덮인 골드림 장식을 깎아 낼 듯 문질러 댔다. 영하는 그녀의 친손자였지만 내내 거슬리는 존재였다. 차라리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이라면 걷어 내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으론 어림도 없다. 그녀의 아들은 영하를 절대 자신의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리라.

“너 그래서…… 거물 기업들 딸내미 다 치우고 서 검사 딸로 고른 거니?”

“검찰도 골치 아프지만 다행히도 저는 검찰과 얕은 인연이 있죠. 성가시게 굴어도 해결할 방법은 충분합니다. 반대로 70년 묵은 능구렁이 재벌 회장님들은 상당히 껄끄러워서요.”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 전혀 없었구나, 너.”

“비약이 심하시네요.”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들 녀석이 고집부리면 누가 와도 꺾지 못하는 것을 아니 굳이 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도 아들을 못 이겼다. 그래도 제가 하는 말처럼 알아서 잘할 것은 아니 더 가타부타할 것도 없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세계가 웃음을 거뒀다. “그럼 남은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일어나려는 것을 그녀가 붙잡았다. 애초에 아들이 집에 들른다고 할 때부터 하려고 했던 말을 꺼내야 했다.

“승준이 내일 생일이다. 좀 있으면 과외 마칠 텐데 말이라도 붙여 주고 용돈 좀 쥐여 줘.”

“아아.”

전혀 몰랐다는 건 둘째 치고, 감흥도 없는 무심한 얼굴이다. 그마저도 대꾸할 말도 없다는 눈치였다.

“승준이한테 정 못 붙이는 건 이해한다만 그래도 아들 둘 차별하는 거 다른 애한테 너무 티 내면 너한테 좋을 것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너한테 승준이 안 챙긴다고 잔소리 한번 한 적 있니? 영하만 데리고 나가고 승준이 생일인데 전화 한 통 없고…. 승준이가 널 닮아 무뚝뚝해도.”

몸을 기대어 앉은 최세계가 마지막 말에 피식 웃었다. 어머니의 눈초리가 매서워지자 그는 웃는 낯 그대로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가 어른이고 어쨌든 그 애 아버지인데 신경은 써야지. 보는 눈이 많은데.”

“무슨 말씀이신진 알겠어요. 안 그래도 영하도 종종 잔소리하던데.”

또 영하 이야기. 가만 보면 첫째 이야기를 안 하면 대화가 진행이 안 된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혼해도 분가를 허락하지 않는 제 아버지에게 대들면서까지 이사를 나간 것도, 다 큰 아들내미를 남들 보는 눈앞에서 안고 다니던 것도. 김수림의 유일한 아들은 곁에 첫째가 없으면 안 된다는 듯이 굴었다.

“앞으로 어쩔 셈이야.”

그녀의 말에 홍차를 입에 머금고 있던 아들이 잔을 내리곤 어머니의 목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영하 주세요.”

목을 내려다본 그녀의 얼굴이 곧 울긋불긋해졌다. 손마디가 바짝 굳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차마 듣고 넘기기 힘든 발언이었다. 넌지시 알고 있는 문제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형태가 선명해지고 있다.

아들이 가리킨 것은 스물네 살에 시집오며 시어머니께 패물로 받았던 목걸이였다. 당시 시어머니는 제게 이 다이아 목걸이를 걸어 주며 앞으로 며느리에게 대대로 내려 주라 말씀하셨다.

언젠가 아들이 데려온 여자의 목에 걸어 주는 상상을 하며 고이 간직하던 것이다. 그 주인은 명망 높은 집안의 귀한 딸이어야만 했다. 김수림이 윙체어의 원목 팔걸이가 떨리도록 강하게 움켜잡으며 고함쳤다.

“이게 못 할 말이 없어서!”

“아버지 대에서 무너져 가던 회사 여기까지 올린 게 접니다. 이번에도 그냥 제 선택을 믿고 가만히 계세요.”

“그냥 믿고 넘길 일이냐? 집에서 아무 말 안 하니까 네가 정말 왕이라도 된 것 같아? 누가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네 자식이야. 혹여나 그 여자가 속이는 걸까 봐 유전자 검사까지 모조리 다 거친 걸 알면서도 네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하는 도중에 깨달았다. 세계는 유전자 검사 이야기를 해도 시큰둥했다.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다.

“어차피 남들은 제 아들이 하나인 줄로만 알고 영하와 호적상은 촌수도 애매한 사이인데 알아도 무슨 상관이에요? 여자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생 데리고 산다는 건데.”

평생 데리고만 살 것이면 화를 내지도 않는다. 김수림은 자신의 아들이 본인의 첫째 아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았다. 부모라면 모를 수가 없다.

그녀의 육십 넘는 평생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남편의 외도와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쏟아지던 집안의 멸시. 그 괴로움 끝에 태어난 완벽한 아들이 끝끝내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그것도 이런 더러운 방식으로!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영하 데리고 당장 다시 집에 들어와.”

“당분간 생각 없어요.”

“데리고 와서 살아. 아들 둘인데 하나만 데리고 나가서 사는 거 보기 안 좋아.”

“데리고 와서 사는 게, 더 보기 안 좋을 텐데.”

“세계야.”

몸을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를 보고도 별말이 없던 최세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 둔 코트를 챙겼다. 찻잔을 쥔 손도 연신 떨렸다. 단순히 화를 참는 데서 오는 떨림이었다. 큰 키로 일어서 멀거니 제 어머니를 바라보던 세계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곤 무심하게 작별 인사를 전할 뿐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서 검사 따님에겐 제가 따로 연락하죠. 아버지께도 어머니가 말씀해 주세요. 가 볼게요. 이번 달엔 더 안 와요.”

건조하게 인사하고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앉아 바라보던 그녀는 곧 이마를 쥐며 앓는 소리를 뱉었다.

세계가 어릴 때부터 영특하긴 해도 지나치게 침착하게 굴어, 언젠간 큰 사고 하나 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사람 속을 썩인단 말인가.

남 보기 창피하고 속 시끄러워서 당장 남편에게도 말 못 할 일이었다. 어떻게 된 게, 세상에 널린 여자를 두고…….

짐승도 상피 붙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그의 아들이 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세계는 영리하고 잘난 자식이다. 십 대에 겪었던 큰 사고도 이겨 내어 당대 최고의 대학을 나왔으며 인물까지 그 누구 못지않게 훤칠했다.

회사의 기세가 기울어 대기업 재계 순위 40위에도 못 들던 시점에도 저 꼭대기 기업의 고고한 사모님들마저 제 아들을 탐냈다. 혼외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혼처가 끝도 없이 들어왔다. 이 나라의 재벌은 결국 혼맥이다. 결혼으로 몸집을 불리고 세를 키우고, 적을 없애는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가장 꼭대기에 올라서야 하는 제 아들이, 그런 밑바닥 인간들도 하지 않을 역겨운 짓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세진 댁. 잠깐 들어와 봐요.”

“예, 사모님.”

“승주… 아니다. 지아 집에 있을 테고, 어제 전주에서 가져온 보리굴비 있죠. 그거랑 명란젓 좀 챙겨 줘요. 백명란으로.”

*

영하는 네 시가 되어 바삐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빠가 예쁘게 입고 오랬으니 그럴 생각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한편으로는 있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빠와 단둘이 나가 본 적도 오래됐다. 수능 끝나고 한 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으니 시간이 꽤 흘렀다.

얼마 전에 외출은 완전히 파투가 났었고…….

“진짜 싫어.”

대체 어제 성산동 가서 무슨 짓을 했길래 할머니가 통장을 보내시는 거지. 할머니도 그래. 아빠가 무뚝뚝하고 못되게 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대체 왜 나한테…….

할머니가 굳이 들쑤시지 않아도 이미 속상한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한숨을 자꾸 쉬어도 괜한 욕을 먹어서 서러운 마음은 쉽게 풀리질 않는다. 이따 아빠 만나면 잔뜩 괴롭혀 줘야지.

영하는 그가 싫다면서도 오랫동안 옷을 고른 끝에 무심코 그가 좋아할 만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골라서 입어 볼 때까진 몰랐는데 막상 다 걸치고 나갈 준비를 끝낸 후 현관문 앞에 거울을 보니 영락없이 그의 취향이었다. 뽀얀 결이 살아 있는 아이보리 컬러의 알파카 하프 코트에 흰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었다.

“너무 티 내나…….”

영하의 옷장에는 시커먼 것과 회색밖에 없었으나, 그 사이사이 최세계가 사다 준 옷들만이 유난히 하얗고 색감이 은은했다. 화이트는 분명 평소 입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거울 속 자신을 유심히 보던 영하는 이내 그대로 물러났다. 예쁨받고 싶어 선택한 옷이었다.

해가 조금 길어졌지만 여섯 시를 넘기니 밤처럼 어두워지는 건 변함없다. 영하가 그와 약속한 비스트로에 도착한 시간은 여섯 시 이십 분을 목전에 둔 시간이었다.

레스토랑이 아닌만큼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주차장도 넓고 야외 테이블과 그 위를 장식한 조명들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무엇보다 가게의 넓은 창 너머로 너른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군데군데 얼어붙은 강줄기 위로 솟은 갈대를 신기하게 보며 차에서 내렸다.

도시처럼 밤바람을 막아 주는 건물이 없으니 한풍이 영하의 등에 정확하게 내리꽂혀 몸이 으슬으슬했다. 이 날씨에, 세계는 밖에 나와 있었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주차장과 가게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터라 가게 외관에 장식된 수많은 램프의 조명이 이곳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이 밤중에 흐릿하게 보였지만, 영하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콩닥콩닥 뛰는 심박이 조금 빨라짐을 느꼈다.

푸른 어둠이 짙게 깔리는 이른 저녁. 마른 풀들과 강물이 흐르는 소리 한가운데 풍경을 보고 선 그의 모습은, 작가가 공들여 만들어 낸 구도 속 완벽한 피사체처럼 느껴졌다.

‘날 네 남자로 생각했잖아.’

내 건데…….

충동적으로 든 생각에 발걸음이 멈춘다. 아빠가 내 거일 리가 없지. 그는 약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도 할 것이다. 예쁘고 상냥한 여자와 어깨를 나란히 두고 멀쩡한 삶을 살 것이다.

괜히 제가 한심하게 느껴져 예뻐 보이겠답시고 흰 코트를 입고 온 것도 부끄러워졌다. 그때 스르륵 몸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세계는 영하를 발견하곤 별말 없이 두 팔만 뻗었다.

동시에 앞뒤를 잴 만한 이성이 남질 않은 영하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발돋움을 해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미묘하게 웃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영하는 세계의 품 안에 한가득 안겨 들었다.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으며 아빠에게 매달렸다. 다 큰 아들이 있는 힘껏 달려드는데도 세계는 뒤로 넘어가는 중심만 잡고는 가볍게 버텨 냈다.

“푸하!”

몸이 쿵, 부딪치자마자 숨을 푹 뱉고는 고개를 들어 아빠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인사말 하나 없이 영하를 내려다보더니 웃음기 내린 얼굴로 첫마디를 뱉었다.

“천사 같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곧장 두 뺨이 달아올랐다. 대꾸할 말도 잃어버려 입만 뻐끔대자 그의 손이 발긋해진 뺨을 쭈욱 잡아당겼다. 얇실한 볼살이 신기할 만큼 늘어났다.

“찹쌀떡.”

“아파아.”

“좀 걷자. 아직 예약 시간 남았어.”

세계는 그리 말하며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 조금 혼몽한 눈으로 손을 보던 영하가 가죽 장갑을 맞잡곤 “응.” 대답했다. 그가 곧바로 잡은 손을 당겨 자신의 코트 주머니로 안내했다. 몸 사이의 간격이 가까워졌다.

“어차피 오늘도 집에 박혀서 한 발자국도 안 나왔을 텐데.”

“그 정돈 아니야.”

“뭐, 굳이 밖에 나가서 엄한 놈 엮이는 것보단 그게 낫긴 한데.”

“아무도 안 엮인다니까.”

“그러면 소원이 없지.”

“자기는…….”

나더러는 엮이지 말라고 하고 본인은 약혼을 앞두고 있다. 영하가 땅을 바라보며 타박하는 소리에 세계가 슬며시 고개를 당겨 바라보았다. 그림자 진 아이홀 아래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 자기라는 거, 듣기 좋은데.”

“으,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마.”

질색하는 반응을 하자 세계가 어깨가 오르내리도록 웃었다. 그가 즐거워하는 포인트가 도통 이해되질 않는다. 영하는 뚱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마른 풀 위에는 아직도 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용히 산보를 즐기다가 턱을 들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아빠, 밥은 먹고 다녀?”

“언제 관심 준 적 있나.”

“당연히 관심 있지…….”

세계의 되물음에 영하가 흠칫 몸을 굳혔다. 뭐 먹고 사는지 관심 안 줬던 거 어떻게 알았을까. 마른 입술을 적시곤 남의 코트 속에 들어간 손을 꿈지럭거렸다. 그러자 느슨하게 잡은 손이 돌연 강하게 영하의 손바닥을 옭아맸다.

고작 그것에 심장이 튀어 오를 듯 놀라 몸을 크게 퉁기곤 발길을 멈춰 세우니, 세계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게 귀엽게 굴지 마. 잡아먹는 기분 들잖아.”

“…….”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아빠는 요즘 화도 안 내고 잘해 주려고 노력 중인데.”

안다. 알고 있다. “미안.”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반응이 왜 이래?”

뺨에 그의 손이 닿았다. 영하는 몇 시간 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작은고모와 할머니.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조심스레 뱉었다.

“아빠, 고모가.”

“응.”

“작은고모가 오늘 집에 오셨어.”

“걔가 왜.”

“할머니가, 명란젓이랑 굴비 주셔서. 그거 전해 준다고 오셨는데.”

“응. 근데 왜 울어.”

영하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뒤늦게 느끼곤 뺨을 벅벅 닦아내가 세계가 혀를 찬다. 피부가 약해 금방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하의 입에서 울음기 잔뜩 섞인 목소리가 흐른다.

“그냥 마음이 복잡해.”

할머니가 주신 돈. 작은고모의 악의 없는 발언.

‘너 좋아하잖아. 너희 아빠.’

고모는 단순한 의미로 말한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게 당연하니까. 영하에게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영하는 최세계를 사랑했다. 그러나 다른 의미였다. 그를 남자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목적지는 뚜렷한데, 그곳에 발을 내디딜 수 없어 외로운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이렇게 초조하고 무서울 바엔 그냥 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싶다. 어차피 내가 시커먼 마음을 가진 이상 태양 아래 떳떳할 순 없는데.

“지아가 너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아니. 그냥 전달만 하고 가셨어.”

“그럼 대체 왜….”

갑작스레 우는 영하를 초조하게 달랜 그가 허리를 굽혔다. 눈물로 어룽진 눈동자가 맹목적으로 그에게 향한다. 영하는 그와 함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최세계와 최영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하지만 도망친 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하가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약혼식 정확히 언제야.”

“아아.”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잠깐 사이 영하는 코끝이 빨갛게 얼어붙었다. 세계의 시선이 얼굴에 오래도록 잔류했다. 싱글 코트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문지른 그가 날렵한 턱 끝에 손을 대곤 고심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음.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지금 해야 하나?”

“뭘……?”

“파혼했어.”

“뭐?”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금 되물었다. 허리를 숙인 그가 코끝이 빨갛게 물든 축축한 콧등에 자신의 코끝을 비비곤 이어 말했다.

“파혼했다고. 오늘 깔끔하게 후처리도 전부 끝냈어. 식장 취소하고 위약금 내고. 약혼식은 가족끼리만 하기로 해서 가족 외 손님들한테 일일이 연락 안 해도 됐으니 다행이지.”

“정말…? 정말이야?”

“너 때문에 아빠가 고개를 못 들고 다녀. 약혼식 열흘 남기고 취소라니.”

영하는 환청을 듣는 기분이라거나, 판타지 소설의 줄거리를 듣는 것처럼 딴 세상 이야기로 느껴졌다. 파혼했다고? 정말? 정말로……? 여러 번 듣고도 믿기질 않아 눈만 댕그랗게 떴다.

“정말 파혼했어?”

“뭘 보여 줘야 믿을래?”

“아니, 아니 안 보여 줘도 믿어. 정말이야? 너무 기뻐서 그래….”

“기뻐서 그래?”

그가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의 말대로, 파혼 이야기를 듣고선 우울한 감정이 겨울의 차디찬 바람을 타고 몽땅 사라졌다.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고, 휘어진 눈에 애교살이 도톰하게 접혔다. 흰 얼굴에 찬란한 기쁨이 담기는 과정을 보며 그가 다정스레 타박했다. 영하가 뒤늦게 현실을 직시했다.

“아들이 돼서 아빠 파혼에 기뻐하면 어떡해.”

“근데 어떡해? 그렇게 막 파혼해도 되는 거야? 약혼식 열흘 남았는데… 대체 뭐라고 하고 파혼한 거야? 할머니랑 할아버지 엄청 화내셨을 텐데.”

“누군가가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하는데. 그걸 보고 어떻게 약혼을 강행하겠어?”

“파혼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건 정말 아빠의 결혼마저도 각오하고 꺼낸 말이었지, 그걸 듣고 죄책감에 파혼하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하는 그만큼 영악하질 못했다.

희미하게 미소 띤 남자의 얼굴을 보며 영하는 고모에게 전달받은 가방을 떠올렸다. 10억이 든 통장. 할머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걸 보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빠의 파혼 때문이었다. 밖에서 낳은 손자가 자식 혼삿길 망친다고 생각하셨겠지.

영하가 죄책감을 느끼는 동안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귀찮고 하기 싫어졌다고 했어.”

“미쳤어?!”

“그건 정답이네. 미치지 않고서야 아들한테 미쳐서 이 짓까지 하는 놈이 누가 있겠어?”

“진짜로 귀찮다고 한 거야?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래서 늦은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다 노발대발하시니 뒷감당은 혼자 다 해야 했거든. 검찰 집안이라 혹시 모를 보복도 대비해야 하고.”

“보복을?”

“그런 게 있어. 혹시 몰라서 하는 것뿐이야.”

그가 눈을 곱게 접으며 이어 말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하지만 다음은 내가 이길 거야.”

이기고 지는 데엔 관심 없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영하는 그의 어깨, 코트 자락에 뺨을 문질렀다. 우으으으응. 너무 좋아서 별소리가 다 흘렀다. 아빠의 몸을 꽈악 부둥켜안으며 생각해 보니, 그럼 요 며칠 그가 늦게 퇴근한 게 모두 파혼 절차 때문인가?

“그러면 요즘 늦던 게…….”

“응. 파혼이 쉽지는 않더라고. 힘들었지. 극구 반대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설득해야 하고, 양측 집안 갈등도 조정해야 하고.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최세계는 멀끔한 얼굴로 자연스레 거짓말을 늘어놨다.

“게다가 철강 회사 인수에 나일론 신소재 개발 발표 앞두고 샘플이 더뎌져서 골치 아픈 거 있어. 아빠 살 빠진 것 같지 않아? 고생 너무 많이 해서. 파혼하겠다고 할머니한테 사정사정했어. 알아?”

어머니 앞에서는 일방적으로 파혼 통보를 하고 돌아왔으면서 영하에겐 가련한 남자 행세를 했다. 순진한 최영하는 금방 넘어갔다. 자세히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정말 초췌하게 느껴져 울컥 눈가가 젖어 들 것만 같았다.

왜 몰랐을까? 왜 자세히 보려고 하질 않았을까.

영하는 그간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해 아빠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감정적으로만 굴지 말고… 말이며 행동을 정제해서 좀 더 깊게 대화를 해 볼걸…….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못 한다는 것은 단순 핑계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삐지기나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 아빠의 손을 잡아 내려 미끈하고 기다란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두 손가락이 얽혀 들자 세계의 눈이 세로로 좁아졌다. 영하는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만 달싹였다. 좁아 든 시선이 침으로 젖은 입술에 집중했다.

“일은 거의 마무리되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빠가 너보다 체력 몇 배는 더 좋으니까 네 몸이나 신경 써.”

자꾸 집 안에만 있으면 체력 더 떨어진다, 하고 세계가 영하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영하는 고개를 올려 그의 얼굴을 올려 봤다. 멀리 선 노란 가로등 불빛이 은근하게 내려앉은 얼굴이 여전히 아름답다. 아마 평생 그럴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를 위해 파혼했다는 그 말 하나로 심장이 시끄럽게 방망이질 쳤다. 몇 년 안에 있을 회장 취임에 책잡히지 않으려면 조건 좋은 상대와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편이 좋다. 세계는 그것들을 포기하고 영하를 선택한 것이다. 그게 못내 기뻤다. 여전히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최영하였다.

이 남자의 다정함을 다시금 혼자서만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열이 오른 듯해 더운 숨을 뱉어 낸다. 눈꺼풀이 발긋하게 물들고 입술 바깥으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영하는 그의 아래턱에 흰 이마를 대곤 나긋하게 속삭였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한가운데에 올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는 게 두 겹의 옷 너머로도 그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제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히는 행위가 영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빠랑 있으면…… 이렇게 되는데.”

낯 뜨거운 말을 뱉고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괜히 터틀넥을 입었다. 뒷덜미가 뜨끈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세계는 화가 난 듯, 얼어붙은 듯 알기 힘든 굳은 표정이었다. 경직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의 알 수 없는 반응에 영하는 곧 불안해졌다.

이상한가…. 이상한 짓 한 건가. 도저히 말로는, 아빠가 원하는 말을 못 하겠어서 그런 건데.

“일단은. 밥 먹고 얘기해.”

잠긴 목소리의 그가 조금은 난폭한 손길로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에게 끌려가듯 식당으로 들어갔다.

“왜 그래… 화난 거야?”

식사하는 내내 세계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평소에 하던 농담도 없더니, 영하가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의 절반을 다 먹기도 전에 식사를 끝내자며 멋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려 영하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화난 거지? 도통 따라가기 힘든 반응에 속상해져 눈물까지 비치기 직전. 거친 손놀림으로 영하를 잡아당겨 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은 그는 “집으로 바로 가죠.” 한마디만 기사에게 던지곤 곧장 앞좌석과의 칸막이를 밀어 완전히 닫아 잠갔다.

영하는 이어진 그의 행동에 놀라 비명을 냈다.

“아빠……!”

대뜸 영하의 몸을 밀친 그가 하얀 니트를 가슴 위쪽까지 끌어 올려 드러난 옅은색의 젖꼭지를 입에 담았다. 축축하고 미끈한 혀의 감촉에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흐악…!”

커다란 손이 판판하고 말랑한 살결을 억지로 모아 둥그렇게 만들었다. 얕게 튀어나온 둔덕에 다시 입술이 닿은 건 당연지사였다. 영하는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을 빨리는 감각에 충격받아 자지러졌고, 버둥대는 두 다리는 그의 딱딱한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었다.

차는 이미 움직였다. 출발했다는 뜻이다. 걱정으로 칸막이를 힐끗 돌아보며 물기 섞인 신음을 흘리자, 그가 짐승처럼 목을 울렸다. 파들파들 떠는 영하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샅에 가져다 댄다. 두껍게 부푼 중심부에 놀란 영하의 두 눈이 더 커질 데 없이 커졌다. 흰 가슴이 타액으로 젖어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숨넘어가기 직전이야. 안 된다고 하지 마.”

거부라곤 할 수 없는 낮게 깔린 목소리.

가슴이 요동쳤다. 숨을 멈추고 그의 번들거리는 눈빛과 마주했다. 까만 두 눈에 열기가 선명하다. 이곳은 움직이는 차 안이었다. 불투명한 칸막이로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 그를 거부해야 했다.

하지만 영하도 그를 원했다. 그의 손길과 정염을 받아 내고 싶다. 이 남자의 흥분이 오롯이 나에게 닿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파혼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 할머니는 어떻게든 그를 결혼시키려 하실 테고, 영하가 끝끝내 이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도 포기할 날이 올 것이 분명했다.

안 돼. 그건 안 된다.

최영하. 두 번은 견딜 수 있어?

지금 파혼해 봤자 아빠는 언젠간 결혼할 거야.

네가 가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이 남자를 가질 텐데. 너한테 발정하던 남자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고, 섹스하고 아이를 가질지도 모르는데.

버틸 수 있겠냐고. 그냥 아들로만 남을 수 있겠냐고.

치졸하게 죄 없는 여자를 질투하고, 더러운 감정을 눌러 가며, 앞으로 더 많이 남은 삶을 버틸 수 있겠냐고, 최영하.

“흐….”

“기사는 걱정 마. 못 들어, 저 사람.”

겨우 붙잡고 있던 동아줄이 끊어진다. 상상 속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에 힘이 풀려 느슨해졌다. 다리도. 겨우 걸어 잠그던 마음도.

질척하고 끈적한 늪 속, 잠기는 듯한 목소리가 영하에게서 흘러나왔다. 확신을 구하고 있었다.

“약속해. 다시는 아빠 인생에 여자는 없어.”

이윽고 영하에게서 단호한 대답이 나오자, 검게 빛나는 눈빛이 가늘게 휘어진다. 세계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커다란 손에 틀어잡힌 허리가 공중으로 뜨고, 영하는 다급히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이어 말했다.

“나 말고 다른 남자도.”

“말이라고.”

여유로운 목소리와 달리 세계는 영하의 몸에서 힘이 빠지자 잴 것 없이 곧장 다리를 벌리게 했다. 바지 버클을 성급하게 푸는 거친 손길이 이어졌고 그가 영하의 허벅지를 벌려 쥐며 납작한 가슴을 이로 물었다. 뜨끈한 혀가 미끄러지듯 맨살을 핥기 시작했다.

아마 영하는 죽어 지옥에 빠질 것이다. 상관없나. 어차피 신은 믿지 않으니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