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붉은 호랑이 귀신 (2/39)

<해범 3>

고모는 미식가였다. 사람들은 고모가 남들보다 배로 예민한 혀를 가졌다고 했다. 조부에게 물려받은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있었다. 그건 고모가 시내의 조그만 한국 음식점을 삼 층 규모의 레스토랑으로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게가 커지자 나와 사촌 동생은 각자의 아르바이트를 정리한 뒤 고모의 레스토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예나가 홀 서버를 맡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요리에 큰 관심은 없었다. 고모가 미식가인 건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을 먹어 왔기 때문이다. 나와 예나는 그럴 환경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는 메인 셰프에게 나를 맡겼다. 그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내게 애피타이저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 뜻밖에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주방의 동료들은 내가 손이 빠르고 양 조절이 정확하다고 좋아했다. 고모와 예나는 내가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좋아한다고 말해 줬다.

기뻤다. 그건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이었다.

그때 나는 열네 살이었다. 출신 성분의 제약이 뭔지 모르던, 다만 약간의 성취감만으로도 꿈을 꿀 수 있었던 나이였다.

디저트를 전담하던 셰프의 제자가 되었다. 케이크와 과자 굽는 법을 배웠다. 여러 가지 대회에 나가 크고 작은 상을 탔다. 쌓여 가는 상장과 트로피는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다.

직업 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학업도 게을리해선 안 됐다. 고모는 생활비를 쪼개 요리 학교 입시를 준비할 수 있는 학원에 등록해 주었다. 담임은 본인의 경력에 오점이 남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게 추천서를 써 주었다.

내 꿈은 여러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이었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이 내게 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 내게 학교는 입학 시험의 최종 관문, 출신 성분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불합격 통지서로 보답해 주었다.

***

서경제약 신영산, 유성식품 하진주, 대일전자 진화영.

기우희는 모니터에 세 사람의 프로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공화당의 삼룡(三龍)이라고 불리는 세 사람에게는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라는 사실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중산층 이하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를 이뤘다는 점이었다.

삼룡을 중심으로 뭉친 공화당은 권씨 일가의 독재를 타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바야흐로 왕조의 위기였다. 보수와 진보, 독재와 평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49대 총통 권일혁은 갓 태어난 신흥 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기성세대를 포섭하지 못한 게 얼마나 큰 실책이었는지를, 다름 아닌 그들의 목숨으로 증명해 주었다.

권일혁은 어린 시절 지켜본 할머니의 강력한 절대 왕권을 목표로 했다. 그는 공화당이 분리해 놓은 삼권을 재통합하는 수단으로 군대를 동원했다.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권일혁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자국의 복지 시스템을 철폐하고 세율을 높였다. 각종 법과 규정을 입맛대로 주물러 국민들을 쥐어짰다. 그리하여 중산층이 무너졌다. 부의 차이가 극명해지면서 대다수 국민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대기근 시대의 막이 올랐다.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에는 각종 사이비 종교가 창궐했다. 그중 ‘백조교’는 수천의 신자를 끌어모으며 일약 혁명 단체로 떠올랐다.

권일혁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절대 왕권의 부활을 보여 줄 기회였다. 과녁이 준비됐고, 총알이 장전됐다. 권일혁과 그의 군대는 백조교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따르기 마련이다. 권일혁 군벌은 국정 안정을 위해서라면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급진파’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무자비한 진압은 국민들의 불안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온건파’로 갈라졌다. 평소 권일혁은 정치인들을 본가와 분가로 나누어 공공연하게 차별해 왔기에, 내부 분열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기우희는 또 한 사람의 프로파일을 오픈했다.

전 비서실장 곽재헌.

권일혁의 군벌이 쪼개지면서 온건파의 리더로 대두된 인물이다. 사회 기업 출신 정치가라는 점에서 ‘분가’의 수장이기도 했다. 곽재헌은 편부 가정에서 자랐고, 그의 아버지는 정치인도 뭣도 아닌 평범한 노동자였다.

기우희는 곽재헌의 프로필을 진화영 옆으로 옮겼다. 시기와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총통의 칼날에 목이 날아갔다는 점에서 같은 처지였다.

“난 류연비가 좆나 불쌍해.”

담배를 꼬나문 진치우가 웅얼거렸다.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아저씨랑 엮여서, 씨발, 국민 불륜녀 낙인이나 찍히고. 진짜 좆나 불쌍해서 눈물이 나와.”

“좋아하셨습니까?”

“우리 나이에 류연비 모르는 놈이 어디 있어. 여자 팬들도 많았는데. 넌 별로 관심 없었나 봐?”

“연예인 같은 거… 별로, 지금도 관심 없습니다.”

“그런 너도 이름 석 자를 아는데, 유명세가 어땠겠냐.”

류연비의 죄목은 풍기 문란이었고, 처분은 공개 총살이었다.

류연비와 곽재헌은 각기 다른 이유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공인이었다. 그건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식으면 힘이 약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간파한 사람이 권일혁의 친동생이자 최측근인 권주혁이었다. 지금 곽재헌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는.

권주혁은 곽재헌의 후임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직책 자체를 없애고 새로 만들었다. 과거의 비서실장이 현재 총통 보좌관이었다. 따라서 권주혁은 곽재헌의 후임이 아닌 제1대 총통 보좌관이었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기우희는 자신에게 담배를 건네던 권주혁의 무표정한 얼굴을 기억했다. 그때 들었던 말도.

“자유를 준다고….”

기우희는 자기가 권일혁 총통의 이미지 세탁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생각만 하면, 핏줄을 타고 흐르는 생물학적 부친의 피를 모조리 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우희를 바라보던 진치우가 말했다.

“자유는 없어. 아마 우리 세대에서는 누리기 힘들 거야.”

“그렇겠죠.”

“그래도 좆 빠지게 해 보면 우리 다음 애새끼들은 누릴 수도 있지 않겠냐?”

“표현을 해도 꼭.”

“아, 그래서 내 말이 틀리냐고.”

기우희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진치우는 자기가 신해범보다 편한 상관이라고 자부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큰 대가리나 작은 대가리나 똑같이 겉과 속이 달랐다.

“정류진 말이야. 괜한 동정심 갖지 마라.”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알아. 넌 야무지니까. 근데 내가. 내가 좀 헷갈려서 그래.”

기우희는 눈을 깜박였다. 진치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정류진은 류연비의 혈육이었다. 류연비는 권일혁 정권의 희생자였고. 그러니까 조금 다른 형태로 만났다면, 적어도 풍기 교육대에 반하는 <백사자> 소속만 아니었다면…. 지금 정류진이 있는 곳은 저 취조실 안이 아니라 이 모니터 앞일지도 몰랐다. 식었지만 맛있는 피자 한 조각을 질겅거리며.

“잠깐 눈 좀 붙이고 오십시오. 아직 끝나려면 먼 것 같습니다.”

“아니, 이건 내 일이기도 해.”

진치우의 목소리는 뚜렷했다.

“범이 놈한테 맡겨 놓고 퍼질러 잘 순 없지. 나도 사람인데 그 정도 양심은 있어야지. 그리고 정류진 저 썅년, 내가 안 조지면 우리 발키리가 폐차장에서 통곡할 것 같아.”

신해범은 류진을 발가벗겨 바닥에 패대기쳤다. 엉망진창이 된 알몸에 찬물을 뿌렸다.

“아!”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가 딱딱 마주쳤다. 샤워기를 든 신해범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제 얘기해 보자.”

“좆 까.”

군홧발이 날아왔다. 류진은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저 악마 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원하는 말은 한마디도 해 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아악!”

머리카락이 끌어 잡혔다. 류진은 자기 눈앞에 대고 샤워기를 흔드는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코뼈 내려앉고 싶냐?”

“좆 까! 이 변태 새끼!”

“난 네 캐릭터를 진짜 모르겠다. 그만하라고 빌었다가, 또 발딱 일어나서 욕했다가… 오뚝이야? 쓰러져도 일어나는 헝그리 정신?”

신해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서, 들고 있던 샤워기로 류진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담배로 지졌던 부위였다.

“아아악!”

“시간 끌 생각이라면 접어.”

<백사자>와의 교섭은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못 박았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유일무이한 친구 놈이 염라대왕 영접할 뻔했다.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신해범은 호스를 주먹에 감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상쾌함이었다. 다 정류진의 쫀득한 구멍 덕분이다.

신해범은 앞으로 기어가는 류진의 발목을 짓밟았다.

“악…!”

“너한테 일을 시킨 사람이 누구야?”

“그딴 거 없어.”

“다시 묻는다. 주동자가 누구야?”

“없어! 씨발 새끼야! 궁금하면 뒈져서 저승사자한테 물어봐!”

신해범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보통 세 번은 질문하니까. 주동자의 이름은?”

“…….”

“주관식이 어렵나? 그럼 선택지를 주지. 1번 하성록. 2번 하신성. 어때, 쉽지?”

“지랄.”

신해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야. 너 바보지?”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짧을까. 정류진은 바보였다. 이건 신해범이 친절하게 제공한 기회였다. 풍기 교육대의 골칫거리 둘 중 하나를 바치면 너 하나쯤은 선처해 줄 수 있다는 은근한 거래 제안이었다.

“넌 살고 싶지도 않냐?”

신해범은 궁금했다.

“아니면 자포자기했어? 너 혼자 다 뒤집어쓰고 죽으려고?”

“…….”

“류연우. 대답해.”

“대가리에 총 맞았냐? 누굴 쳐 부르고 앉았어.”

“잡아뗄 생각 마, 네 신상 명세 이미 다 조회해 봤어. 너 류연비 동생 맞잖아.”

“…….”

“찔리니까 입 다무네. 인마, 밑천 다 보인다.”

“잘난 척하지 마, 개새끼야!”

신해범은 킥킥 웃었다. 이래저래 힘들게 살았어도, 정류진은 역시 어렸다. 현실 파악 못 하고 캥캥거리는 꼴을 보면 알았다.

“개명한 이유는 짐작이 간다만. 그렇게 똑 닮아서야 하나 마나지.”

“아가리 닥쳐.”

“네가 닥쳐. 확 찢어발겨 버리기 전에.”

신해범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듀퐁 라이터 소리에 류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왜? 또 지질까 봐?”

“씨발 새끼! 개새끼!”

“그러니까 아무나 빨리 골라. 난 인내심이 긴 편이지만, 밖에 죽치고 있는 놈은 그렇지 않거든. 치우랑 신체검사부터 다시 시작할래?”

“정말 없어! 없다고! 없는데 뭘 어떻게 말해!”

“아… 그래.”

신해범은 쭈그려 앉았다.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류진의 발목이었다. 도드라진 복사뼈가 참 예뻤다.

발작적인 비명이 신해범의 고막을 찢었다.

“정말 없어! 나 혼자서 계획했어!”

“그래. 알았어.”

“정말이야! 사람 말 좀 믿어! 당신도 그랬잖아, 그 폭탄 좆나게 허접했다고…! 씨발, 그거 치워!”

“1번, 아니면 2번?”

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등 뒤로 묶인 손이 달달 떨렸다.

“머리가 나빠서 까먹었어? 그럼 더 쉽게 말해 주지. 이게 진짜로 마지막 기회야, 정류진. 생각 잘해라.”

“…….”

“큰 사자, 새끼 사자. 어느 쪽?”

“…….”

신해범은 한숨을 쉬었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류진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흐느꼈다. 입술에 맺힌 피가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 신해범은 손에 힘을 줬다. 울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신해범이 씩 웃었다.

“다음에는 눈깔에 박는다. 주동자가 누구야?”

이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류진에게 중요한 건, 이게 신해범이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이었다.

오전 아홉 시.

철문이 열렸다. 담배와 피 냄새를 온몸에 휘감은 신해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우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음.”

부사관이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신해범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진치우가 웅크려 자고 있는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생각보다 버티네. 오후에 다시 시작한다.”

신해범의 젖은 머리카락과 옷, 군화를 보며 기우희는 정류진이 물고문을 당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도 별다른 수확이 없다니. 키만 불쑥 큰 말라깽이라 허약해 보였는데, 의외로 강단이 있나.

기우희는 모니터에 CCTV 화면을 띄웠다. 화면을 곁눈질하던 부사관이 숨을 들이켰다. 취조실 안이 온통 물바다, 아니 피바다였다. 다리가 부러진 채 나뒹구는 의자와 깨진 좌변기가 처참했다. 그 파편을 뒤집어쓴 정류진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두 팔이 뒤로 묶였고, 당연하게도 나신이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부사관의 정강이를 걷어차 벽을 보게 만들고, 기우희는 신해범에게 질문했다.

“의무실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잖아도 들것 보내라고 했어.”

“백사자 측에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신해범은 생수 한 통을 단숨에 비웠다.

“버리는 말치고는 사이즈가 큰데.”

“정류진의 단독 범행 가능성은요?”

“가능성이야 있지.”

“그렇다면 취조는 소용없지 않습니까? 주동자를 이미 체포했잖습니까.”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거야, 소령.”

신해범은 빙그레 웃었다.

“정류진 약골이야. 지금은 악다구니 쓰면서 버텨도… 알잖아, 저런 애들 오래 못 가는 거.”

신해범은 언제나 초장에 기를 꺾어 놓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한번 주둥이 열리면 자기가 한 짓이든 아니든, 시키는 대로 나불대게 되어 있어.”

“저야 물론 대장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정류진이 강압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곽현우 일로 기세를 잡은 유미현에게 또 다른 구실을 제공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신해범은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우린 조직의 부대장을 잃을 뻔했어. 지금 상황에 물타기를 시도했다간, 아무리 유미현이라도 반란 분자 소리 듣기 십상이지. 난 유미현이 그 정도로 무모한 성격은 아니라고 봐.”

인기척을 느낀 듯 진치우가 부스스 일어났다. 신해범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친구의 코앞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푹 잤어?”

“…….”

“꿈속에서 애마와 재회라도 했어? 현실로 돌아오질 못하네.”

진치우는 꾸물꾸물 담배를 피워 물었다. 목소리가 푹 잠겨 있다.

“이제 들어가 봐도 되냐?”

“지금은 안 돼. 내가 반 죽여 놔서.”

군의관 오재윤이 의무병을 데리고 들어왔다. 진치우가 눈썹을 벅벅 긁었다.

“무슨 대단한 환자 납셨다고 호들갑이냐.”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기우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눈에도 정류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특히 관자놀이의 상처가 심했다. 정류진의 눈을 노렸던 신해범의 담뱃불은, 마지막 순간에 궤도를 바꿔 관자놀이로 향했다. 이미 한 번 지졌던 부위였다. 몸부림치는 정류진의 몸 위에 올라탄 신해범의 모습은 악마 같았다.

의식 잃은 정류진이 들것에 실려 나왔다. 오재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하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누구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니까.

들것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기우희는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퉁퉁 부은 얼굴이 처참했다. 관자놀이 상처는 총구멍처럼 보였다. 가슴팍이 힘겹게 오르내리고, 목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피와 고름 냄새가 지독했다.

기우희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치우가 툭 내뱉었다.

“성형외과부터 보내 줘라. 예쁜 얼굴 다 뭉개졌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신해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클럽은 텅 비었다. 조명과 음향 기기를 철수하고 얼마 안 되는 가구들까지 모조리 내보내, 이젠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신성은 이곳이 누구에게 인수되었는지, 또 어떤 용도로 쓰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도 않았다. 하신성의 신경은 오롯이 차모은에게 쏠려 있었다.

2층 난간에 팔꿈치를 댄 채,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 사율 선배도, 걔한테 못되게 굴진 않았어.”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오히려 잘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믿든 말든 상관없는데, 적어도 우린 희망 고문은 안 했어. 속이지도 않았고. 죽을 수도 있단 거, 아니 죽을 각오 해야 한다는 거, 난 분명히 얘기했어. 누구 씨랑 다르게.”

“그런데 걔가 왜 그랬어.”

황량한 홀을 내려다보던 차모은이 말했다.

“처음부터 자폭할 셈이었던 거지.”

“뭐?”

“그럼 걔가 살고 싶겠어? 현우 그렇게 보내고?”

담뱃재가 허공에 흩어졌다.

“네가 걔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난 류진이 편이었어.”

“위선자.”

차모은이 코웃음 쳤다.

“넌 처음부터 정류진 따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잖아. 그 애 주위 맴돌면서, 어떻게든 약점 하나 잡아 보려고.”

“뭐야?”

“진짜 추했다, 하신성. 네가 현우를 눈엣가시로 생각한 거 다 알아. 걔가 정류진을 보호했으니까. 네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함부로 말하지 마라, 차모은.”

“정류진, 그 멍청한 놈은 속여 먹어도 나한텐 안 돼.”

하신성의 입매가 비틀렸다.

“소설 쓰냐? 미안한데 시나리오 너무 막장이다.”

“그 막장 시나리오 주인공이 너야.”

차모은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사율 선배는 분명히 말했어. 살고 싶거든 자기 말대로 하라고. 단 일 분이라도 늦거나 빨랐다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고. 지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건 정류진이야. 걜 그렇게 몰아붙인 건 너고. 그러게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어. 왜 진작 현우 죽었다고 말 안 했어!”

“…곽현우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현우를 죽인 건 진치우지만, 정류진을 죽인 건 너야.”

“적당히 해라, 차모은.”

“아니, 말해야겠어. 정류진을 죽인 사람은 너야, 하신성. 네가 그 애 마음을 꺾었어. 너한테 당하면서 걘 죽은 거야. 네 밑에서 걘 그냥, 숨만 쉬는 송장이었다고.”

난간을 움켜쥔 하신성의 손이 떨렸다. 차모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걔가 왜 그랬겠어. 왜 못 기다렸겠어. 왜 우리말을 안 들었겠어. 일 분, 일 초도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랬겠지.”

“그렇다고 내버려 둔 건 너희 책임이야!”

“잡아 오려고 했어!”

차모은이 소리쳤다.

“조원들 다 풀어서 뒤쫓았어! 그 멍청한 년이 뭔 짓을 저지를지 알았으니까!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난 막으려고 했어!”

“그런데 왜 못 막았어!”

“이미 늦었어.”

그는 자기가 본 광경을 묘사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겠더라. 진치우 차 유명하잖아. 그 빨간색 크라이슬러가 허공에서 공중회전을 하는데, 미친, 무슨 쇼 벌이는 줄 알았어.”

“…….”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너도, 나도, 사율 선배나 보스까지 전부 걔한테 속아 넘어간 셈이야.”

차모은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하신성의 시야를 가렸다.

“너, 정류진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뭐?”

“진짜, 너희들 무슨 사이였어? 현우는 말 안 해 줬어. 그 속 깊은 애가 네 체면 생각해서 입 다물었다는 걸 내가 모를까 봐?”

“지금 누가 더 잘못했는지 재 보자는 거야? 웃기네.”

하신성이 빈정거렸다.

“연애 사업 실패한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입 닥쳐. 대가리에 예광탄 꽂아 버리기 전에.”

하신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곽현우를 처음 본 순간, 그가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한 그 순간, 하신성은 정류진에게 사람을 추천해 보라고 한 과거의 자신을 거꾸로 메다꽂고픈 심정이었다.

곽현우는 모든 면에서 하신성과 달랐다. 허여멀건 얼굴, 그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 키는 크지만 비쩍 마른 몸. 앉아서 펜대 굴리는 직업 외에는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고작 그런 게 곽재헌의 아들이라니, 정류진의 친구라니.

하신성은 정류진이 곽현우를 어떤 표정으로 봤는지 기억했다. 그렇게 웃을 수 있는 놈인 줄 몰랐었다. 그동안 온갖 편의를 봐주고 아껴 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기에 감사의 표시를 할 줄 모르는 나무토막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정류진은….

‘현우 형은 내 가족이야.’

그럼 나는?

곽현우는 하신성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정류진의 뺨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심지어 한 침대에서 아무렇게나 뒤엉켜 잤다. 분위기 수상하다는 핀잔에는 친형제 같은 사이라고 변명했다.

지랄하고 있네. 세상에 어떤 형이 동생을 그딴 눈으로 보냐?

“기만자 새끼.”

하신성은 궁금했다. 곽현우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지. 대체 그 비실비실한 놈이 뭐기에 정류진이고 차모은이고, 정신을 못 차리고 엑스터시 씹어 삼킨 틴에이저처럼 해롱거리는지.

“기만자 새끼? 어이가 없네. 지금 현우 원망하는 거야?”

“곽현우 조장은 나였어. 그놈에 대해서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래?”

차모은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럼 이것도 알겠네? 정류진 보스하고 떡 치는 사이였던 거?”

“뭐?”

“병신. 표정하고는.”

“지금 무슨 헛소리야!”

“등신 새끼. 그러면서 무슨 놈의 조장 타령이야.”

“야! 차모은! 너 아무리 정류진이 싫어도!”

하신성이 발을 쾅, 세게 굴렀다. 물론 차모은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못 믿겠으면 사율 선배한테 물어보든가. 아니다, 넌 보스한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네.”

“개소리 정도껏 해라.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지금 봐주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있잖아, 난 보스가 정류진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이번 일에서 내 손을 들어 준 거라고 생각하거든?”

하신성은 입을 벙긋거렸다. 당최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보스가 정류진을 처리하고 싶었던 거야. 부자지간에 치정 싸움 터지기 전에.”

“그럴 리 없어.”

“그래, 지금은 현실 부정할 때지.”

하신성은 반박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류진을 지켜 주지 않은 이유는 자기 때문이었다. 조장이 사사로이 권력을 이용해 조원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누구도 그 조장을 존경하지 않을 테니까.

차모은이 고개를 기울였다.

“정류진, 걔가 대체 어떻기에 부자가 쌍으로 정신을 못 차려?”

차모은의 목소리는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독극물 같았다. 하신성은 간신히 난간을 잡고 섰다.

아버지의 격노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라고 변명할 셈이냐? 그 애가 먼저 다가왔다는 소리라도 하려고? 관둬라! 사내자식이, 거기까지 떨어지고 싶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의 평판과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내리사랑.

아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 순간 하성록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분노였다. 연적을 향한 적개심.

차모은이 신랄하게 비꼬았다.

“넌 보스랑 많이 닮았어. 그래도 설마, 애인 취향까지 똑같을 줄이야.”

하신성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류진의 빨간 머리카락과 가느다란 목덜미, 몸집보다 큰 외투로 감싼 등이 시야를 채웠다.

***

점심 약속을 잡았다. 자주 있는 일이라 특별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순간, 이로한은 하신성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눌러쓴 볼 캡 아래 드러난 두 눈이 퀭하다. 푹 꺼진 뺨과 부르튼 입술. 하신성은 혼자서 십 년의 세월을 건너뛴 사람 같았다. 이로한은 친구의 급격한 변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았다.

“괜찮냐?”

“뭐가.”

모자 밑에서 날아오는 시선이 공격적이었다.

“뭐냐니, 너 지금… 아니다. 가뜩이나 정신없을 텐데, 밥 먹을 땐 생각하지 말자.”

“넌 알고 있었어?”

“…뭐를?”

“아버지랑 류진이. 너 알고 있었느냐고.”

메뉴판을 더듬던 이로한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로한, 대답해.”

그는 앉은자리에서 찬물 한 컵을 비웠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데 하신성이 재차 물었다.

“아버지랑 정류진, 자는 사이라는 거 알고 있었느냐고.”

점심시간을 맞은 식당은 붐볐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식기 부딪치는 소리, 음식이 나왔음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 종업원들이 주문을 받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래도 하신성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신성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이로한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사율 선배가 입단속시켰다. 일부러 감추려고 한 거 아니야.”

“그래도 나한테는 언질을 줬어야지!”

“…….”

“사람 바보 만드니까 재밌냐? 내가, 아버지랑 정류진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걸, 그 얘기를 차모은한테 듣고 알았다는 게 믿어져?”

“난 그냥! 네가… 잠깐 가지고 노는 줄 알았지. 설마 진심이었냐?”

하신성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로한의 낯이 노래졌다.

“야, 너….”

기가 막혔다. 조직의 방향성, 아니 생존이 걸린 중차대한 시기였다. 이런 때에 치정 싸움으로 열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로한은 사내 연애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권장한다면 권장하는 쪽이었다. 애초에 팔팔한 이십, 삼십 대 현역들이 연애 한번 못 해 보고 늙어 간다면 그거야말로 비극이었다. 차모은과 곽현우도, 의외의 조합이었지만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본디 사람은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상대에게 끌리기 마련이라.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고.

이로한은 모든 조직원이 강철 심장을 갖기를 바라지 않았다. 역사 속 수많은 절대자에게도 연인은 존재했다. 그는 다만 주의를 줄 뿐이었다. 괜히 일반인과 손바닥 마주치지 말라고. 정 외롭다면, 정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조직 내에서 찾아보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조직의 보스와 그의 뒤를 이을 차기 보스가 연적이라니. 말단 조직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이라니. 심지어 그 둘은 부자지간이다. 이 무슨 막장 드라마 계보인가.

이로한이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말해. 잠깐 관심 준 거였다고, 그냥 재미였다고 말해라, 성아. 보스한테 맞먹으려고 들지 마.”

하신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성아. 우리 입장도 생각해 줘라.”

“…….”

이로한은 대답 없는 하신성의 목을 짤짤 흔들고 싶었다. 그는 천하를 호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놈의 사랑 때문에 몰락한 권력자들을 생각했다. 절대자란 무릇 사랑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부모든 연인이든, 제 피를 이은 자식까지도.

하물며 애완동물에게도 진심이어서는 안 되었다. 이 세상에 약점이 될 만한 소중한 무언가를 만들어서는 안 됐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에 침을 뱉고 쓰레기통에 처넣은 다음 가차 없이 뚜껑을 닫고 돌아서는 냉혈한이 아니고서야 절대 군주는 불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하성록은 이로한의 바람을 충족하는 존재였다. 그는 아내를 잃고 각성했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려는 각오 하나로 이역만리 타향에서 살아남았다. 진흙으로 과자를 굽고 나무속살을 뜯어다 죽을 끓여 먹었다는 눈물겨운 생존기를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하성록은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조차 복수의 수단으로 키웠다. <백사자>는 이 개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국민의 숨통을 틔워 주는 혁명군이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이로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신성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분노가, 그의 달아오른 혀 밑에서 꿈틀거렸다.

“나도 어쩌다가 알게 된 거야.”

이로한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 <화이트 스완>에서는 패싸움이 벌어졌다. 양아치들 싸움이야 흔한 일이지만, 그날은 유독 규모가 컸다. 영업에까지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기물 파손의 정도가 심했기에 보고를 올려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클럽에 있던 관리자는 백사율, 이로한, 차모은 세 사람이었다.

“사율 선배가 보고를 안 하더라고.”

이로한은 이유를 물었지만 백사율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나야 뭐, 선배가 생각이 있겠거니 했지만. 너도 알잖아, 차모은 성격 지랄 맞은 거. 그 폭주 기관차를 누가 막겠냐.”

이로한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는 차모은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 복도에 숨어서 보스의 방을 살폈다고 말했다. 백사율은 모르게.

“그런데 사율 선배 눈치가 얼마나 빠르냐.”

이로한은 그날, 자기가 뭘 봤는지 정확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성록이 자기 방에서 정류진을 데리고 나왔다. 정류진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신성은 이로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확실해?”

“확실해. 분명히 봤어.”

“잘못 본 거 아니야?”

이로한은 강하게 반박했다.

“영업 끝났어도 무대 조명은 다 켜져 있었어. 그리고 뒷모습만 봐도 알지, 그 빨간 머리. 네가 물려준 가죽 재킷에.”

“…….”

“내가 그 상황에 뭐라고 하겠냐?”

“나한텐 말해 줄 수 있었잖아.”

“그건 사율 선배가….”

“백사율, 백사율 타령 좀 그만해!”

하신성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맞은편 테이블에서 시선이 날아왔다. 이로한은 황급히 메뉴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사율 선배도 마찬가지고. 근데 차모은, 걔는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화가 많이 나서….”

“지금 소문이 중요하냐?”

이로한이 눈을 껌뻑였다.

“아니야?”

“이!”

“너무 화내지 마라. 나도 진짜… 당황했다고.”

하신성이 픽 웃었다.

“그래, 이제 소문 쫙 나겠네. 약장사하면서도 이미지로 먹고살았는데 어떡하냐? 다들 조장 노릇 관두고 깡통 차야겠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이로한은 변명하듯 말했다.

“승환이랑 밑에 애들은 아직 몰라. 앞으로도 알 일 없고. 차모은 걔는 사율 선배한테 다시 입단속시키라고 할게. 야, 걔가 지금 열 받아서 그렇지, 알잖냐. 평소에는 입 무거운 거.”

하신성이 침묵하자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해? 가게고 뭐고 다 정리하고 튀는 판국에? 야야, 너희 숙소는 어떻게 하냐?”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해.”

이로한이 한숨 쉬었다.

“성아. 화 많이 났어?”

“…….”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진짜 개새끼로 보이겠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말이다. 류진이는 잊는 게 좋아. 보스가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

“같은 조원 대가리에 소주병 날린 애야. 나중에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누가 알겠냐?”

하신성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로한의 태세 전환에 박수를 보냈다. 다들 이런 식으로 살아남고 있었다는 생각에 환멸이 났다. 결국 조직 정치였던 것이다.

정류진은 운이 더럽게 없었다. 아주 개좆같은 팔자였다. 산전수전 공중전 겪다가 이제 좀 있을 곳을 찾았나 싶더니, 결국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내가 너를 그렇게 몰아넣었다.

하신성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

칼같이 다려 놓은 셔츠를 꿰어 입었다. 책상 밑에 놓인 군화는 새것처럼 깨끗하고 앞코가 반짝거렸다.

계급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 외투를 걸쳤다. 목깃에 그윽한 냄새가 나는 향수를 뿌렸다. 마른 입술에 투명한 립밤을 바르고, 피곤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눈 밑에는 컨실러를 펴 발랐다. 자기 자리에서 초밥을 두 개씩 입 안에 밀어 넣던 진치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피곤하냐?”

“피곤해.”

“그러기에 대충 시켜 먹자니깐 굳이 식당을 가겠다고… 야 인마, 요새 서비스 체계가 얼마나 잘 돼 있는지 아냐? 배달 음식이 더 맛있어. 이거 봐라. 국물도 안 식은 거.”

“난 우리 식당이 좋아.”

신해범은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말했다.

“여사님들 손맛이 일품이거든.”

“손맛 좋아하고 자빠졌네. 할배냐?”

“개인의 취향이지. 치우, 네가 빠르고 신속하게 식사를 해치우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난 내 입에 익숙하고 정성이 들어간 영양 만점 식사가 좋아.”

“염병한다. 배달 음식은 뭐 로봇이 만든대?”

“아무리 뛰어난 로봇도 사람 손은 못 따라오지. 요리에 한해서는 특히.”

“어우, 그래 너 잘났다. 네 입맛 미슐랭 쓰리 스타다.”

신해범은 친구를 향해 미소를 날렸다. 진치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해범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이며, 한때 각종 요리 기구들을 다뤘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내식당은 붐볐다. 신해범이 대장으로 취임한 직후,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개편한 시설이 바로 직원 식당이었다.

식자재 협력 업체를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고 영양사와 조리원들을 공채로 뽑았다. 최종 면접 자리까지 참석했다. 신해범의 행보는 인맥과 뒷돈으로 결정되는 체계를 뒤엎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방송 문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신해범은 짧게만 대답했다.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당연한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힘든 세상이었다. 생활 전반에 적폐가 가득했다. 과거의 복지 국가 시절을 기억하는 기성세대가 권일혁에게 등 돌리지 않는 이상, 아래에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그 체제 안에서라면?

오늘의 메뉴는 두 가지였다. 양식과 중식.

신해범은 양식 코너의 긴 줄 끄트머리에 가 섰다. 줄 서 있던 대원들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댔다. 신해범은 순서를 양보하려는 대원들을 만류했다. 화사하게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편리만 추구하는 멍청한 친구야, 나는 이 맛에 식당 밥 먹는다.

“소령님, 소령님!”

“뭐.”

“준장님 오십니다.”

기우희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쟁반을 든 신해범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아, 딴 데 가지….

“편하게 식사들 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입구가 떠들썩할 때부터 알아봤다. 사내 식당을 애용하는 간부 중에는 부하들을 배려해서 북적이는 시간대를 피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도대체가 신해범은 그걸 몰랐다. 그는 식당이 가장 북적일 정시에 정확하게 들이닥쳤다. 기우희는 신해범이 미래에 가지게 될 별명 하나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삼식이.

“식사들 하라니까. 나 좀 그만 쳐다보고.”

테이블이 떠나가라 웃음소리가 터졌다. 대체 뭐가 웃긴지 모르겠다.

씹지도 않고 삼킨 교자만두가 목에 걸려 있었다. 기우희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느라 다른 대원들이 하나둘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기 소령.”

“예?”

“점심시간이 부족한가? 다들 빨리 일어나는 것 같은데.”

“아… 그게.”

이 배신자들!

기우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신해범을 보았다.

“글쎄요. 저는 잘.”

신해범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역시 어울리기 힘든가.”

“…….”

“난 우리 식당이 좋아. 밥도 맛있고, 인테리어도 훌륭하지. 이 수저 하나만 해도 말이야. 주방에서 어찌나 깨끗하게 관리하는지 먼지 한 톨 묻은 걸 본 적이 없어. 무엇보다 여기엔 우리 대원들이 있어. 계급장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줄을 서고, 그날 메뉴에 따라 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야. 그래서 난 우리 식당이, 정말 좋아.”

기우희는 반쯤 띄웠던 엉덩이를 도로 의자에 붙였다. 입술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기 소령 생각은 어때?”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 마침 물을 떠 오려는 참이었는데,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런. 심부름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심부름이라니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기우희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차라리 밀폐된 취조실에서 피자 쩝쩝대는 진치우가 나았다.

신해범은 식사 때 소리를 내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레이저로 자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식사 예절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지 않고, 반드시 음식을 삼킨 후에 입을 열었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고가의 잉크 펜 다루듯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베이글에 딸려 나온 크림치즈를 바르는 모습은 레스토랑 CF 같았다.

기우희는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교본을 만들어서 배포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상류층의 자원입대를 조장하는 의미에서. 언제까지고 <풍기 교육대>가 신분 상승의 등용문으로만 기능할 수는 없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나?”

“저희 대원들 말입니다. 테이블 매너 교육 진행해 볼까요?”

“갑자기 웬?”

“아무래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니까요.”

“그게 맘먹은 대로 되면 내가 그 고생을 안 했지. 나이 서른에 수저로 손등 얻어맞는 기분, 아주 좆같다고.”

기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학습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습한 걸 습관으로 만드는 일은 어려웠다. 신해범의 동작이 저만큼 자연스러운 건, 분명 어린 시절 상류층으로서 어느 정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맛있어.”

“예?”

“오늘따라 밥맛이 좋네.”

“아, 예.”

“유 씨는 점심 먹었으려나.”

신룡관의 넘버 쓰리, 수석 전략가 유미현. 그는 신해범과 공통점이 많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뿜어낸다는 점에서, 그게 전부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기우희는 완벽에 가깝게 다듬어진 유미현의 기세등등한 얼굴을 떠올렸다. 곽현우의 사망으로 풍기 교육대를 공격했던 유미현은 진치우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안 지금 기분이 어떨까.

“레드 립스틱 발랐겠죠.”

기우희는 무심하게 말했다.

“기분이 아주 거지 같을 테니까.”

세상은 진치우에 대한 동정 여론으로 시끌시끌했다. 공무원이 제 직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니 말이 되느냐, 풍기대 부대장급의 고위 공무원이 테러를 당할 정도면 국가 차원의 안전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 거냐, 뭐 그런 얘기였다.

기우희는 권주혁의 이미지 메이킹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은 이 합법 살인자들에게 관대했다.

“부대장님은 식사 안 하십니까?”

“안부 인사 받기 귀찮겠지. 자기도.”

신해범은 고기를 잘라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켰다.

“내가 드라마를 좀 써 볼까 하는데 말이야.”

“드라마요?”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주인공 진치우, 악역 정류진.”

기우희는 찬물로 목을 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쪽 스토리가 빈약해. 곽현우랑 정류진 얘기는 대충 들어도 드라마틱하잖아. 곽재헌이랑 류연비가 워낙 화제성이 있어서.”

“어떤 시나리오입니까?”

신해범은 나이프와 포크를 든 채 말했다.

“빤하지 뭐. 불행 장사.”

사실만으로는 스토리텔링이 되지 않는다.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드라마는 과장과 허위로 범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대중의 호감을 얻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소재는, 바로 불행이다.

“저희가 더할 필요 있겠습니까? 벌써 기사들 나오는 중인데요.”

뉴스, 신문, 라디오, 인터넷 등. 대중이 쉽게 접하는 각종 매체들은 하나같이 진치우가 얼마나 성실한 군인인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거기에는 신해범 풍기 교육대장과의 특별한 우정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거 가지고는 부족해.”

기우희는 신해범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점점 더 권주혁과 닮아 가고 있었다. 남의 불행조차 세일즈 포인트로 이용한다.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면 뭐든지 팔아치운다. 자존심? 그딴 건 죽어서 찾든가 말든가.

“기 소령이 나서 줘야겠어. 치우한테는 비밀로 하고.”

“어떻게 말입니까?”

“걔가 빚이 좀 있거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치료 시기를 놓쳐서 병을 키웠는데 어지간히 많이 들어가나 봐.”

“…저는 몰랐습니다.”

“그런 거 티 낼 놈이 아니니까.”

신해범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치우 걔, 겉으로는 번드르르하게 보이지? 그거 다 빚으로 풍차 돌리기 하는 거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그놈의 차 좀 팔라고 해도 내 말은 안 들어.”

“하하….”

“부자 근성이 그래서 무서운 거야. 아직도 자기가 대일전자 막내인 줄 안다니까.”

신해범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씁쓸함이 묻어났다. 기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대장님 어머니 뵙고 오겠습니다.”

“사진은 없어도 되니까 질문을 가능한 한 많이 해. 최대한 동정표 살 수 있는 방향으로 편집해서 내보낼 거야.”

그렇게 말한 신해범은 자기 몫으로 나온 푸딩을 은근슬쩍 기우희 앞으로 밀었다.

“기 소령 피곤하잖아. 피곤에는 단게 좋아.”

기우희는 신해범의 미소에 숨은 의미를 파악했다. 치우한테는 비밀이다?

***

기우희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섰다. 블루투스 이어폰 너머 들려오는 숙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내 이런 일 터질 줄 알았다. 치우 그놈, 파오훼이(炮灰) 시절부터 요란하지 않았냐. 그래도 이젠 정신 차려야지. 부대장 직함 단 지가 언젠데.

“여전히 팔팔합니다. 정신 못 차렸어요.”

- 그런 놈은 정말로 죽을 위기를 넘겨 봐야 해. 그래야 알아.

기우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뜻하다.

- 그놈 이름이 정류진이냐?

“본명은 류연우입니다. 류연비 동생이요. 현장에서 체포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신해범이 전담하고 있습니다.”

- 헌병대로 올려 보내. 내가 직접 봐야겠다.

“숙부님이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해범의 푸딩은 이미 기우희의 배 속에서 소화 중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 왜?

“유미현 눈에 띄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그 여자, 풍기 교육대의 풍만 들어도 발작할 것 같은데. 괜히 정류진 건드려서 엉뚱한 소리 하게 만들면 귀찮아집니다. 저희끼리 조용히 처리하는 게 나아요. 진치우 동정 여론 형성도 잘되고 있고요.”

- 해범이가 전담한다고 했지?

“네. 괜찮으시면 한번 오세요. 류연비 닮아서 애가 참 예뻐요. 겸사겸사 저희 대원들도 봐 주시면 좋고요. 아시잖아요, 숙부님 한번 뵙는 게 평생소원인 놈들이라는 거.”

기우희는 속으로 초를 셌다. 오, 사, 삼이일.

- 조만간 위문차 들르마. 해범이는 어떠냐?

“정류진 묵사발 만들어 놓고 기분 좋아졌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이 참 일관성이 있어. 진치우는 정말 칼같이 챙겨요.”

- 그게 그놈 장점이지. 들개 우두머리로 딱이야, 딱.

허공에 대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을 노인네를 상상하니 우스웠다. 신해범이 들개 대가리인지 호랑이인지는, 나중에 뚜껑 열어 보면 알겠지.

- 우희야.

“예, 숙부.”

- 해범이 잘 지켜봐라. 들개는 절대 사냥개가 될 수 없어. 제아무리 엎드려서 꼬리 흔든다 해도, 먹이가 떨어지면 혀 빼물고 주인에게 달려드는 게 그놈들 본성이야.

기우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통화가 끝났다. 기우희는 이어폰을 빼서 제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똑바로 앞만 보고 걸었다. 복도 끝, 취조실을 향해서 뚜벅뚜벅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이제 일할 시간이었다.

신해범은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퐁, 하는 소리에 류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아….”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대신, 물었던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류진이 툭 내뱉었다.

“안 어울려.”

“뭐가?”

“인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지 마!”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신해범의 갈고리 같은 손이 머리카락을 잡고 끌어당겼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착각이 심하네, 정류진.”

“이거 놔!”

신해범은 류진의 관자놀이에 선명한 화상 자국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인정을 베풀 거라고 생각하나? 말도 안 돼. 얼마나 순진하면 그런 기대를 하지?”

“지랄 마.”

“벌벌 떨면서 센 척은. 왜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설치지? 요즘 애들은 다 너처럼 시건방지냐?”

“그러는 당신은!”

홧김에 외쳤다가 입을 다물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몰랐다.

“나는, 뭐.”

“당신은… 몇 살이나 처먹었는데.”

“그걸 몰라?”

진심으로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살았나 보지?”

“당신 그렇게 유명인 아니야.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당신 숭배자들만큼 안티도 많아.”

“상관없어. 종류가 뭐든지, 관심은 좋은 거거든.”

류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뭐, 군인이 아니라 연예인병 말기 환자다.

“그건 그렇고…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나?”

참아 보려 했는데 안 되겠다. 신해범은 집어넣었던 담배를 도로 꺼내 입에 물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류진은 침대에 앉은 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병원.”

“땡. 여긴 풍기대 의무실이야.”

“지금 장난쳐?”

“장난치는 것처럼 보여?”

두 사람은 잠자코 서로를 노려보았다. 끝내 시선을 돌린 쪽은 류진이었다.

“왜 날 살려 둬?”

“왜, 불만이야?”

“현우 형은 죽였잖아.”

“넌 예쁘고 섹시하잖아.”

류진이 고개를 쳐들었다. 신해범을 노려보는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지금 장난쳐?”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해. 아, 아직 어려서 이해 못 하나?”

“빈정거리지 마. 좆나 모자라 보여.”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나잇값 좀 하지 그래?”

“기가 막혀서. 정류진, 넌 내가 무슨 악의 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맞잖아!”

재떨이가 류진의 귓바퀴를 스치고 날아갔다.

“내 말 끊지 마.”

류진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현우 형 살려 내.”

“내가 잘나긴 했지만, 죽은 놈은 못 살려 내.”

“그럼 그 새끼 내 앞으로 데려와! 갈기갈기 찢어발겨 버릴 거니까!”

실로 감탄스러웠다. 저게 바로 이십 대의 패기인가? 아니면 어제 머리를 잘못 맞아서 어디가 단단히 잘못됐나? 신해범은 담배 든 손을 흔들며 킥킥 웃었다.

“우리 아가가 파이팅이 넘치네.”

“장난치지 말라고!”

“변상할 방법은 생각해 봤냐?”

“무슨 헛소리야?!”

“네가 날려 버린 치우 차, 외제 차에 튜닝까지 덕지덕지해서 들어간 돈이 엄청나거든? 이름까지 붙여 주고 애지중지했단 말이야.”

“그래서 뭐!”

“정류진, 넌 나한테 감사해야 돼. 네 담당이 치우였으면 지금쯤 너 뼛가루밖에 안 남았어.”

신해범은 물끄러미 류진을 내려다봤다. 진치우가 왜 성형외과부터 데려가라고 했는지 알 만했다. 멍들고 부은 얼굴이 터진 토마토 같았다.

솔직히 아깝긴 했다. 정류진은 신해범의 미적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얼굴을 가졌다. 그걸 저 지경으로 뭉개 놓았으니, 진치우가 얼마나 감동했을지 짐작이 갔다.

신해범은 담배를 창살에 비벼 껐다. 창틀을 잡은 그의 손가락이 톡톡 리듬을 탔다. 저걸 어떻게 발라 먹어야 후회 없는 식사가 될까.

***

손목시계의 은색 초침이 오후 세 시를 가리켰다. 신해범은 달깍대던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우희와 부사관 성재경이 굳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생해.”

“예.”

신해범은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개를 푹 숙인 류진이 보였다.

“…….”

신해범은 곧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에 노트북을 내려놓은 뒤, 함께 가져온 곤봉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탁, 탁 때리면서 류진의 앞을 오갔다.

신해범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류진의 시선이 따라갔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새로 수리한 취조실에 익숙해질 무렵, 신해범이 말했다.

“네 얘기 좀 들어 보자.”

“무슨 얘기.”

“말 그대로야.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해 봐.”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봤다.

“나한테 관심 많네. 누나 때문인가 본데, 사람 붙잡고 지랄할 시간에 인터넷이나 찾아봐. 어릴 때 개파라치 새끼들한테 찍힌 사진 많으니까. 딸 치려면 그거 써.”

“말 한번 예쁘게 한다.”

“그럼, 내가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줄 알았어?”

신해범은 웃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곤봉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파오훼이 시절, 공공 기관을 무단 점거하고 불법 농성을 하던 시위자들과 붙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이었다. 서른 남짓한 시위자들은 전원 무장 상태였다. 인질로 잡힌 기관 직원들 때문에 발포 허가가 내려지지 않는 상황에서, 지원 인력은 폭설과 퇴근 시간 러시아워에 갇혀 도착이 늦어진다는 무전을 보냈다. 교통 체증… 기가 막혔다. 무기를 든 이상 저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무장 강도였다. 신해범은 연거푸 발포 허가를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당시 출동한 인력은 신해범과 진치우를 포함해서 열둘에 불과했다. 수적 열세로 포위망이 좁혀 왔다. 신해범은 비로소 왜 자기들이 총알받이라고 불리는지 깨달았다.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우린 너희들 대가리가 시위자들 몽둥이에 깨지든 총 맞아 터지든 좆도 신경 안 써.

자신들의 우세를 파악한 무장 강도들은 기세 좋게 덤벼 왔다. 아차 하는 순간 대열이 무너졌다. 비명과 고함이 뒤엉켰다. 삼 미터가 넘는 죽창을 휘두르며 돌격한 시위자와 정면충돌한 대원 하나가 가슴팍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봉조! 똑바로 안 받쳐?!’

진치우가 악을 썼다. 신해범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총부리에 관자놀이를 얻어맞았다.

안면 보호대가 날아갔다. 눈밭에 얼굴을 처박은 신해범의 뒤통수에 총구가 와 닿았다. 뜨끈한 피가 눈꺼풀을 적셨다. 흐릿해진 시야에 광분한 남자들에게 구타당하는 진치우가 보였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순서를 읊을 정도로 받았던 훈련은 대열이 무너진 상황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권력의 개들을 거꾸러뜨렸다는 성취감에 난폭해진 시위자, 아니 강도들에게 우린 당신들 또래, 형제, 아들 나이의 젊은이들에 불과하다는 호소가 먹힐 리 만무했다.

정신없이 눈밭을 헤치던 손바닥에 딱딱한 물체가 잡혔다. 뭔지도 모른 채 휘둘렀다. 붉은 띠를 맨 남자의 얼굴 반이 뭉개졌다. 신해범의 맨얼굴로 핏방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뜨거웠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곤봉의 주인은 현장에서 뇌진탕으로 즉사한 대원이었다. 어렵사리 스케줄을 맞춰 방문한 장례식장에서, 유품으로 전해 줄까 했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런 용도로 사용한 물건을 유가족 앞에 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신해범이 말문을 열었다.

“이쪽에서 질문하지.”

불신 가득한 눈길이 건너왔다.

“널 <백사자>로 스카우트한 게 누구야?”

“그게 왜 궁금한데?”

“하성록이겠지? 그가 보스니까.”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내가 궁금한 게 중요한 거야. 대가리 터지고 싶지 않으면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차피 알잖아.”

류진은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응시했다.

“나에 대한 정보, 여기 다 들어 있는 거 아니야? 물어보는 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관둬. 난 당신한테 무슨 말이든 할 생각 없고, 당신도 이게 시간 낭비라는 걸 알 거야.”

“왜 그렇게 비딱하게만 생각해?”

“그냥 죽여. 당신들 그런 거 잘하잖아. 사람 파리 목숨 취급하면서, 죄책감도 안 느끼잖아!”

류진은 신해범을 올려다보았다.

“현우 형한테 한 것처럼 해 보라고. 나한테도.”

“그건 힘들겠네. 나랑 치우 스타일이 달라서.”

욱하는 표정이 볼만했다. 신해범은 무심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멈칫했다. 머릿속에 전구 하나가 탁 켜진 기분이었다.

“정류진.”

그는 류진의 눈앞에, 듀퐁 라이터의 불꽃을 흔들었다.

“너 이거 무섭지?”

멍든 자줏빛 뺨이 실룩였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졌다. 흉흉하게 노려보던 눈동자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신해범이 씩 웃었다.

“무섭나 보네.”

“치워.”

싸늘한 목소리가 일갈했다.

“내 눈앞에서 그거 치워 씹새끼야!”

“그럼 말해.”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가 꾹 닫혔다. 침묵을 결심한 텅 빈 눈이 나타났다.

신해범은 곤봉을 내던지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억지로 돌려서 자기를 보게 만들었다.

“네 유일한 재산이 뭔지 알아.”

집도, 절도, 돈도 없는 애송이였다. <백사자>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빚더미에 짓눌려 오늘내일하고 있을 불가촉천민이었다. 그런 류진에게 남들 앞에서 내세울 게 있다면, 얼굴이었다. 짧으나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신, 아이돌 가수 류연비를 닮아 누구라도 돌아보게 만들 수 있는 얼굴. 비록 지금은 붓고 멍들어서 본래 형태를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두 번 다시 거울 못 보게 해 줄 수 있어.”

“미친 새끼.”

“내가 못 할 것 같지?”

그는 류진의 등 뒤로 돌아갔다. 솜털이 곤두선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한테 한 짓을 떠올려 봐. 이 미친놈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새낀지…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감이 올 거다. 현실적으로,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신해범은 시선을 내렸다. 수갑으로 묶인 두 손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때?”

“닥쳐.”

“주둥이 잘못 놀려서 인생 망치지 않길 바라.”

“닥쳐. 입 닥쳐! 지금 나더러 배신을 하라는 거야!”

“협조라고 하는 게 어떨까? 그게 네 마음도 편할 것 같은데.”

“개소리 집어치워! 그냥 죽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

“…….”

“정류진. 내 말 들려?”

류진은 입을 벌렸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세상천지 어느 또라이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문하고 구타해서 반쯤 짓이겨 놓고, 가족 같은 동료들을 배신하라 부추긴단 말인가.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빨아 줘? 아니면 후장 대 줘?”

“뭐야?”

“뭐든 당신 꼴리는 대로 해. 그 대신에 나, 편하게 죽여 줘. 당신 총 가지고 있지? 머리통에 대고 쏴. 깔끔하게, 한 번에 죽여 줘.”

“내 구애를 받느니 총 맞아 뒈지는 게 낫다?”

“그래. 그게 나아.”

류진의 어깨 뒤에서, 신해범의 긴 팔이 뻗어 나왔다.

“그럼 이건 어때.”

신해범은 노트북을 류진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류진의 눈앞에 이미지 파일 하나가 떴다. 오래된 종이 신문 스캔본이었다. 신해범은 고개를 돌리려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잡아 정면을 보게 단단히 고정했다.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타이틀을 읽었다.

“18세 고교생 A군, 또래 남학생들에 집단 강간. 연예인 스캔들로 인한 보복성 행위로 확인. 이거 너지?”

“아니야.”

“표정도 못 숨기면서 거짓말은.”

“씨발, 이 좆같은 새끼야!”

“정류진.”

“알면서!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사람을 갖고 놀아?! 이, 개, 시팔 쓰레기 새끼!”

류진의 고개가 홱 꺾였다. 신해범의 주먹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출혈이 멎었던 상처가 도로 터졌다. 류진은 울음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수갑 찬 손을 흔들었다.

“개새끼! 죽어! 너 같은 개새끼는 죽어 버려야 돼!”

“정류진.”

신해범이 주먹을 흔들었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욕지거리 하면.”

그는 손가락으로 류진의 멍든 뺨을 쿡쿡 찔렀다.

“지난번이랑 똑같은 일 겪게 될 거다.”

기우희는 헤드폰을 벗고 옆에 있는 부사관의 어깨를 툭 쳤다.

“성재경.”

“예, 예?”

“지금 잔류 인원 있나?”

“진압 팀 대기조가 있긴 한데… 왜 그러십니까?”

“너, 집단 강간 라이브 섹스 쇼 보면 충격받겠냐?”

“예?!”

기우희는 픽 웃었다. 경악하는 부사관의 얼굴이 볼만했다.

성재경은 죽은 곽현우와 동갑이었다. 아직 어리고, 군기가 바짝 들었고, 무엇보다 인생에 큰 실패 없이 무난하게 엘리트 가도를 걸어왔다. 이런 놈은 군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기꺼이 즐길까, 아니면 평범하게 충격받을까.

기우희는 성재경의 당황한 얼굴을 응시하다 헤드폰을 도로 썼다. 신해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색을 바꾸면 인상이 꽤 달라진다고 하지.”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빨간 머리였다. 정수리에서부터 손톱만큼 검은 뿌리가 자라 있었다.

류진은 노트북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앉은자리에서 덜덜 떨었다. 호흡이 거칠었다. 류진의 목덜미를 더듬는 신해범의 손가락에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무서워?”

“이거 치워….”

“아직 다 안 보여 줬다.”

신해범은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바꿨다.

“류연비 죽고 나서도, 널 돌봐 준 사람이 있긴 했지.”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깨를 맞댄 채 웃고 있는 부부의 사진이었다. 류진의 시선은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에게 향했다.

“알아보겠어? 박진아 씨.”

“이모한테… 무슨 짓 했으면, 당신 죽여 버릴 거야.”

“대답만 해.”

겁에 질린 눈동자가 돌아봤다.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거야,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연락 끊긴 지 오래됐어! 이제 저 사람들은 나하고 상관없다고!”

“왜 상관없어? 피로 맺어진 가족인데.”

“가출하고 나서….”

류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연락했어… 가출 신고할지도 몰라서.”

“뭐라고 말했어?”

“조직 일 한다고는 안 했어.”

“…….”

“진짜야. 이모는 아무것도 몰라! 괜히 엉뚱한 사람 끌어들여서 일 벌이지 말고, 나 하나만 죽이고 끝내. 그럼 간단하잖아! 왜 쉬운 일을 두고 어려운 길을 돌아가?!”

신해범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류진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성록,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냐?”

“뭐가?”

“상상력을 발휘해 봐, 정류진. 혹시 말이야, 네가 보스라고 따르는 그 인간이, 사실은 일부러 널 힘든 상황에 몰아넣은 거야. 류연비의 동생인 널 손에 넣으려고 말이야. 그렇잖아? 네 이모한테 가서, 우리는 현 정부를 박살 내기 위한 반정부 조직인데 조직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 네가 필요하다, 내가 먹이고 입히고 재워 줄 테니 양육권 넘겨 달라, 이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 미쳤어? 약 했어?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신해범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정류진은 하씨 부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관생도로 재학 중이던 성재경을 부사관으로 낚아챈 건 기우희와 신해범의 큰 그림이었다. 당시 신해범은 풍기 교육대 내에서 쓸 만한 인재를 추려 내느라 눈에 핏발이 설 지경이었는데, 기우희는 처음부터 그가 원하는 바를 충족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야망으로 똘똘 뭉친 복수의 화신에게,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군인은 삐악거리는 병아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병은 보기만 해도 열불이 치솟는다던가. 신해범과 진치우가 신참 대원들을 복날 개 패듯 두드려가며 사제 물을 빼던 시기, 기우희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파오훼이 시절을 견뎌 낸 자신들의 기준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입대한 젊은이들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한창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어떤 시대를 살았느냐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진다.

두 차례의 ‘숙청’ 이후 적림부는 유미현의 ‘포용 정책’을 받아들여 권일혁 총통의 이미지 메이킹에 안간힘을 썼고, 전 국민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철혈일성의 공포 정치는 그 방향을 틀어 다른 궤도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기우희가 생각하는바, 요즘 젊은이들은 안정과 소속감을 원했다. 그 바탕에는 이만하면 살 만하니 순응하겠다는 체념이 깔려 있었다. 순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일찍이 국가가 정해 둔 제도를 박차고 나가거나, 그럴 용기조차 없다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이 불행한 시대를 한탄하며 손가락이나 빨고 있겠지.

하지만 신해범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붉은 호랑이>를 만들었을 때부터 굽히지 않던 주장은 확고했다. 바깥에서 암만 두드려 봐야 권씨 왕조의 철혈일성은 깨지지 않는다. 내부의 폭발이 일어나야만 비로소 틈이 생긴다.

그리고 신해범은, 기우희가 ‘요즘 애들’을 과소평가한다고 생각했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야망이 없을까?’

신해범은 알았다. 비교는 당연하다는 걸. 누구라도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더 나은 환경을 갈구하게 되어 있다는 걸. 또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건 무조건 그럴싸한 명분만이 아니었다. 남들 보기엔 하등 쓸데없는 것 같은 이유로도 사람은 움직였다.

중요한 건 계기였다. 신해범은 기우희에게, 눈에 잘 띄지 않는 나비의 가냘픈 날갯짓을 찾아보라고 했다. 나머지는 훌륭한 설계자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결과물이 저거라니 조금 실망스럽지만.

“소령님? 왜 그렇게 저를… 보십니까?”

“담배 피울래?”

성재경의 안색이 밝아졌다. 덩치는 산만 하고, 인상은 곰 같은 놈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기우희는 제복 앞주머니에 넣어 둔 담뱃갑을 꺼내 건넸다. 감격한 표정으로 불을 붙이는 성재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쟤는 진짜 고기 방패로 뽑은 걸지도.

신해범은 곽현우와 정류진의 입장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봤다. 곽재헌은 정계의 주요 인물로서 신룡관의 실세였고, 그 별칭 또한 신룡관의 빅 대디였다. 반면 류연비는 대중적인 인지도는 있었지만 서민 가정 출신의 뒷배 없는 여자애였다.

자고로 분노는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서 분출된다. 전 국민의 질타를 받을 류연비를 국가 차원에서 처형해 버렸으니, 갈 곳을 잃은 대중의 분노가 류연우에게 상속된 건 예정된 사태나 다름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왜, 내가 말을 안 해서 불안해?”

류진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신해범은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담배는 더 이상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곤봉 끄트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류진은 저 곤봉이 언제고 자신에게 날아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신성이랑 사이가 나빴다고?”

“어쩌다 보니까. 같은 조직이라고 다 친한 거 아니야. 당신도 싫어하는 상사나 부하가 있을 거 아냐.”

“그래. 나도 하성록, 하신성 싫어해. 그래서 네 마음 이해해.”

신해범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너랑 나는 닮았어. 확실히.”

“…….”

“이렇게 만나게 돼서 안타까워, 정류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이만한 얼굴에, 그 악바리 같은 성격이면 뭘 해도 해냈을 텐데. 진치우 내가 서포트한 거 알지? 귀족 근성 못 버리고 밑바닥에서 징징대는 거, 내가 멱살 잡고 여기까지 끌어올렸잖아. 너라고 못 해 줄 이유가 있겠어?”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난 배신 안 해.”

“7월에, 권세혁이 풍기대 공익으로 들어온다.”

권일혁 총통의 7남 4녀 중 삼남. 모친 장승희는 대대로 왕가의 외척인 평안 장씨 집안의 장녀로 그 정통성이 충분하며,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총통 후보.

“그 권세혁 왕자 맞아.”

“그걸 왜 나한테 알려 주는데.”

“복수 혈전 2회차.”

“뭐?”

“게임도 삼세판이라는데, 한번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나 버리면 억울하지. 다음 판에서 부활할 수 있는 캐릭터도 아니고 말이야.”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신해범이 류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젖혔다. 무게 중심을 잃은 의자가 통째로 넘어갔다. 류진의 맨발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

뒤통수를 후려치는 통증이 없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형광등도 보이지 않았다. 신해범의 한 손이 류진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정류진.”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지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너 내가 설계해 줄게.”

기우희의 손가락에 사이에 들린 툭, 담배가 떨어졌다. 연기를 잘못 마신 성재경이 기침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 중, 어느 쪽도 신해범에게 언질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우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인데.

“나 물 좀.”

“예, 예!”

냉수 한 병을 비우고 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기우희는 매직미러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건 신해범의 돌발 행동이었다.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어메이징 드라이버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건 단순히 길을 벗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직선 도로를 달리던 차가 별안간 가로수를 들이받고, 가드레일을 쳐부순 뒤, 절벽 아래 저수지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운전자의 이름은 신해범이었다.

“…….”

류진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지금 신해범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자신을 어떤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덫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신해범은 권주혁이 이미지 메이킹 한 배우였다. 화사하게 웃는 겉모습 뒤에 감춰진 본질은 악마였다. 그에게 거짓말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좆 까.”

류진이 비아냥거렸다.

“이 개변태 사이코패스 새끼, 또 뭔 수작을 부리려고 헛소리야.”

“그럼, 곽현우 때문에 죽을 거냐?”

신해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류연비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곽가하고 묶여서 뒈진 것도 억울한데, 동생 새끼는 그 아들놈이랑 나란히 저승 문턱을 밟네.”

신해범은 양손을 펼쳐 보이면서 웃었다. 무대를 장악하는 쇼 호스트 같았다.

“시야를 넓혀 봐. 네가 이 세상에서 쳐 죽여야 하는 사람은 진치우도, 나도 아냐. 저어기 용집에서 꽈리 틀고 앉아 있는 총통이지.”

“당신이 나한테 한 짓은…!”

“그래서 기회 준다잖아.”

“못 믿겠어. 당신이 하는 말.”

“최고의 기회를 걷어차는군.”

“기회라고?”

하성록도 그렇게 말했다. 억울하게 처형당한 류연비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그 말을 믿었었다. 지금은 후회한다. 가진 전부를 걸었지만 돌아온 건 곽현우의 죽음, 그리고 악마의 현신 같은 신해범과의 만남이었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아무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신해범을 노려보던 류진은 문득 깨달았다.

“…….”

알 것 같았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철혈일성의 공포 정치 아래, 세상을 뒤집어엎고 영웅으로 군림하게 될 자가 어디에 있었는지.

류진은 새삼스레 신해범을 뜯어보았다. 군인들은 흔히 사냥개에 비유된다. 그 공식에 신해범을 대입해 보니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단단한 가슴과 튼튼하고 유연한 다리를 고루 갖춘 수렵견 그레이하운드가 탄생했다.

“곽현우 때문에 죄책감 느껴? 너한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말했잖아, 우린 닮았다고.”

“하지만 당신 친구는 살아 있어.”

그게 중요했다. 곽현우는 죽었지만, 진치우는 살아 있었다. 류진은 그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신해범이 한탄했다.

“루저 집단에서 지내더니 패배자 정신이 대가리에 박혀 버렸군.”

“루저 아니야!”

“미안하지만 맞아. 너희들 보스는 실패했다. 지금 <백사자>는 혁명군도 뭣도 아니야. 창립 목적은 내팽개치고 술장사, 약장사에 정신없이 단속이나 피해 다니는 범죄자 신세지.”

“함부로 말하지 마! 당신이 뭘 알아!”

“원래 쓰레기통 안에서는 썩은 냄새를 못 맡아. 바깥으로 대가리 내밀고 신선한 공기를 좀 마신 뒤에야, 아 여기가 쓰레기통이었구나, 깨닫는 거지.”

신해범이 말했다.

“숨통 트이게 해 줄게.”

“…….”

“잘 생각해. 류연비도, 곽현우도, 이 나까지도 네가 혀 깨물고 뒈지는 상황은 바라지 않아.”

네게는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류진은 뻑뻑한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저녁에 다시 올게. 그때까지 마음 정해.”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창문도 시계도 없는 취조실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란 불가능했다.

취조실 문을 나서던 신해범이 몸을 돌렸다.

“먹고 싶은 거 있나?”

“…….”

“치킨이나 피자, 햄버거 좋아해?”

눈치 빠른 기우희가 헤드폰을 벗어 던졌다. 치근대지 말고 꺼지라는 고성이 스피커를 찢고 튀어나왔다.

신해범은 부하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포커페이스 기우희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짓는 성재경이 무색하게도, 진치우는 똥 씹은 표정이었다.

“우리한테 정류진은 이용 가치가 있어.”

“그 ‘우리’에 나도 포함되는 거 맞아?”

“널 빼놓고는 불가능하지.”

기우희가 손을 들었다.

“정류진을 권주혁이 용인할까요?”

“저래 보여도 <백사자> 정보조원이야. 하신성 바로 밑이었고. 협력하겠다고만 하면, 당분간 목숨 부지할 이유는 충분해.”

“<백사자>에서 움직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아직까지도 나서지 않는 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문제가 뭔지는 알아봐야겠지만.”

뜻밖에 성재경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구했다.

“중사.”

“정류진이 거절하면 그를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십니까?”

신해범이 피식했다.

“기 소령. 내가 정류진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인가?”

“아닙니다.”

실수를 자각한 성재경의 안색이 파래졌다.

복도의 전신 거울 앞에서, 신해범은 자기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 자기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웃는다.

신해범이 나간 뒤, 기우희가 말했다.

“박아.”

“예!”

성재경은 바닥에 정수리를 박았다. 두 손은 등 뒤로 돌려 단단히 잡았다. 기우희가 벨트를 풀어 손에 감았다. 열병 걸린 사람처럼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진치우는 이마에 손등을 얹고 연신 아이고, 아이고 탄식했다.

“우리 발키리 황천길 보낸 새끼하고 내가 한솥밥을… 아이고,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기우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성재경의 등에 내리꽂혔다.

“사람이 실수는 할 수 있어.”

“예.”

“그런데 군인이 상관 앞에서 실수하면 안 돼.”

“예!”

흑갈색 가죽 벨트가 공기를 가르고, 엎드린 성재경의 등허리에 작렬했다.

성재경이 <붉은 호랑이> 소속이 되고 처음으로 눈치챈 건 세 상관이 피우는 담배 브랜드가 전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맞담배 상대를 고르라면 진치우였다. 그는 싸구려 담배 냄새도 맡기 싫어했고, 부하들과 같은 공간에서 흡연할 상황이 오면 자신의 값비싼 담배를 흔쾌히 나눠 주었다.

풍기 교육대 주차장은 문제의 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임시 폐쇄되었다. 간부들만 이용할 수 있는 지하 주차장이 한시적으로 개방되었으나, 지금껏 넓은 주차장을 여유롭게 써 온 대원들은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진치우와 성재경은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테이프를 바라보았다.

“어깨 펴, 새끼야. 뭘 그런 거 가지고 풀 죽어.”

“예….”

“기우희 성격도 많이 죽었다. 걔가 자기한테 피해 오는 걸 두고 볼 애가 아닌데. 널 아끼긴 하나 봐?”

“잘 모르겠습니다.”

성재경을 빤히 바라보던 진치우가 툭 내뱉었다.

“너 풍기대의 모체가 어딘지 아냐?”

“중앙 헌병대 아닙니까?”

“십 점 만점에 오 점짜리 답이군. 아, 그런 표정 지을 필요는 없다. 니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파오훼이에 대해서는 기록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풍기 교육대 출범 당시, 신해범의 강력한 주장으로 관련 자료가 전부 폐기됐다. 정부의 비밀 유지 조항과 소속 대원들의 신분 세탁에 대한 욕구가 맞물린 결과였다.

파오훼이(炮灰). 총알받이라는 의미다. 모욕적인 별칭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그들은 헌병대 소속의 비공식 쓰레기통이었다.

진치우가 기억하는바, 파오훼이는 한 번도 정원 서른을 맞춘 적이 없었다. 한번 나갔다 돌아오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해 빈자리가 넘쳐 났다. 정확한 가이드라인 없이 온갖 임무에 차출되고, 부대 내 뒤치다꺼리와 잡일까지 맡아 하는 탓이었다.

당시 파오훼이의 소대장은 라인 잘못 타서 나가리 됐다고 소문이 자자한 최금호 대위였다. 곽재헌 군벌 소속 군인들이 모조리 처형당하거나, 옷을 벗거나, 좌천당하던 시기였다. 최금호는 자신이 고기 방패 집단에서 소대장 노릇이나 할 인물이 아니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그는 어떻게든 엘리트 대열에 재합류하고자 윗선에 열심히 손을 비비고 다니느라 소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윗물이 그 모양이니 아랫물이라고 맑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군대 꼴이라도 갖춘 건 전적으로 신해범 덕분이었다. 그는 자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이 부대, 저 부대 전전하다 최종적으로 쓰레기통에 떨어진 관심병사나 처음부터 출세는 불가능한 출신 성분의 깔받이들을 어르고 달래 가며 최선을 다해 이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치우는 자신에게 입대를 추천한 신해범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아버지처럼 살게 해 주겠다는 친구의 맹세는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의 왕년 타령만큼이나 덧없게 들렸다.

바로 그 시기에 기우희가 전입해 왔다. 무려 전직 사형수였다. 그것도 생물학적 모친과 그 지인을 죽이고 가스 폭발 사고로 위장해 대서특필된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진치우는 그 사이코패스가 소대원들을 실험용 쥐로 보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전입 첫날, 신해범은 사형수 시절보다 대우가 못하다고 빈정거리는 기우희를 개머리판으로 후려갈겨 입 다물게 만들었다.

“생각하니까 또 좆나 웃기네. 그게 이불 한 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게.”

“이불이요?”

“엉. 냄새난다나 뭐라나. 걔가 좀 뒷배로 들어와서 처음부터 기세가 대단했거든.”

중얼거리던 진치우는 입을 다물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노출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성재경은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아는 부관이었다.

“그 최금호 대위라는 분은, 구체적으로 어땠습니까?”

“완전 핵폐기물 쓰레기. 걘 내가 지옥 가서 패 죽인다.”

진치우는 자기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신해범을 옹호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확실히 배웠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치는 악인의 분야라는 거.”

최금호가 윗선에 손바닥 싹싹 비비고 다니던 시절, 매일같이 대동했던 운전병이 신해범이었다.

최금호는 신해범을 예뻐했다. 못 미더운 소대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기 기대를 충족하는 데다,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신해범을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신해범의 출신 성분을 비하하는 타 소대원들을 그들의 상관에게 찔러 버림으로써 아끼는 부하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진치우는 사석에서 형, 동생 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을 기억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의 끝은 파국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성재경은 머뭇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한 신해범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성재경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었든, 이유가 뭐든 간에 말입니다. 대장님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성재경이 보기에, 신해범은 완벽에 가까운 피조물이었다. 짧게 쳐올린 머리카락 때문에 드러난 매끈한 얼굴선, 탄탄하고 긴 목,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조차 완벽했다. 행동거지에서 묻어나는 귀족적인 분위기는 또 어떻고.

“그래?”

진치우의 입술에 비웃음인지 자조인지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하긴, 인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냐.”

“맞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입니다.”

용기를 얻은 성재경이 질문했다.

“부대장님, 저희 대장님이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지신 겁니까?”

“뭐. 성격? 응. 많이 변했지.”

진치우가 키득댔다.

“더 괴상하고 이상한 데 한눈팔고 있지. 예전엔 그래도 이 빠진 접시 같은 거 사 모으는 취미는 없었는데… 야. 저거 뭐냐?”

성재경은 진치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입 금지 팻말이 떡하니 세워진 주차장으로 검은 캐딜락이 들어서고 있었다.

“저게 뭐….”

성재경은 엉거주춤 일어나 섰다. 경비병이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를 꼬나문 진치우가 중얼거렸다.

“낯이 익은데. 저 똥차.”

수많은 범죄 중에서도 특히나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범죄가 있다. 사회적 약자를 노렸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범죄가 그렇다. 남성이 여성에게, 젊은이가 노인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부자가 가난뱅이에게 가하는 권력성 가해는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적나라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성록은 머리가 좋았다. <백사자>는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혁명군이라는 명예로운 약자 포지션에 놓여 있었다.

한번 박힌 인식은 좀처럼 바꾸기가 어렵다. 대중은 <백사자>가 클럽 운영과 마약 판매, 기타 불법 도박으로 운영 자금을 충당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혁명 단체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현 정부의 자작극이라고만 생각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불의는 불가피하다는 부분에서 ‘그런데 어쩌라고?’ 하는 분위기도 없잖아 있었다.

신해범은 대중이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이 지쳤고, 마음 붙일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공화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권일혁은 온갖 규제와 허들로 자국민들을 쥐어짰다. 이 나라에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경계가 뚜렷하고, 신분 상승의 계단은 없어졌다.

권일혁의 철혈일성은 자수성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재능 있는 자들에게서는 출신 성분을 이유로 기회를 빼앗고, 성실하게 일하는 자들에게는 빚을 잔뜩 지워서 하루하루 허덕이게 만들었다. 당장 눈앞의 문제 외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그 풍파를 견디며 하성록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라는 게, 오늘날 신해범의 결론이었다.

“정류진은 <붉은 호랑이>가 수면 위로 올라갔을 때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기우희가 반박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조만간 권주혁이 풍기대를 방문합니다. 위문차라지만, 7월 입소식에 앞서 현장을 둘러보려는 목적이겠지요.”

“위기를 기회로 바꿔 보자고.”

신해범은 싱긋 웃었다.

“하성록이 정류진을 찾은 이유가 뭐겠어? 류연비의 후광이 필요해서야. 개혁의 명분을 위해서라고. 정류진을 끌어들이면, 곽현우야 저절로 딸려 오는 원 플러스 원 상품이었을 테고. 난 하성록이 정류진에게 먼저 접근한 이유도 짐작이 가.”

기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적으로 만만해서겠지요. 곽현우보다 훨씬 필사적인 상황이기도 했을 테고….”

어리고, 마음 붙일 데 없고, 평생 죽어라 일해도 못 갚을 액수의 빚더미를 떠안았다. 심지어 또래 친구들에게 폭행까지 당했으니 말 다 했다.

마침 국립 은행에서 보내겠다고 약속한 자료가 도착했다. 신해범은 기우희 쪽으로 모니터를 돌려놓았다. 정류진의 신용 내역은 깔끔했다.

“누가 갚아 줬을 것 같아?”

“그 늙은이 수완이 대단하군요.”

“유성식품 데릴사위였던 인간이야. 중국에서 돈깨나 긁어모았겠지.”

“반란군 활동 자금으로 어지간히 쏟아부었을 텐데… 어디 금광이라도 발견했답니까?”

“초기 정착 지원금이 빵빵했어. 자기 돈은 아니었지만.”

신해범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팔짱을 낀 기우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권세혁이 정류진을 마음에 들어 할까요?”

“마음에 들게 만들어야지.”

“정류진, 무슨 보직에 앉힐 생각이십니까?”

신해범이 대답하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기우희의 표정이 굳었다.

“대장님, 접견입니다.”

기우희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하신성이 정류진의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 휴고 보스의 정장과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왁스로 넘긴 헤어스타일. 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의 하신성이 풍기 교육대 1층 로비에 떡하니 서 있었다.

훈련받은 대원들은 동요하지 않았지만, 은근한 술렁임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접수처의 직원 둘은 무례도 잊은 채 하신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우희는 그들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주 나가서 사인받아라.

기우희가 성재경에게 물었다.

“손님은?”

“대기 중입니다. 면회 신청 접수했고, 신체검사 끝났습니다.”

“소령은 여기 있어. 내가 직접 얘기하지.”

“하지만 대장님.”

“여기 있어.”

워커 밑창이 대리석 바닥을 차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해범은 중앙 로비 의자에 앉아 있는 하신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신성은 신해범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단 일 초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하신성이었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또 보네.”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거리였다.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서로의 이마를 겨냥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였다. 기우희는 속으로 감탄했다. 권주혁과 하성록의 뒤를 잇는 차세대 보스의 격돌. 이걸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이야.

“정류진 만나러 왔다고?”

“그런데 네가 나왔군.”

“내가 그 애 담당이라서 유감이야.”

하신성의 짙은 눈썹이 꿈틀, 했다. 신해범이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하신성은 꿈쩍하지 않았다.

신해범은 손을 거두고 빙그레 웃었다.

“너무 그렇게 보진 마. 나랑 정류진, 꽤 친해.”

“그렇게 속없는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정류진 예쁘잖아. 난 예쁜 애들 좋아해.”

“진치우가 그 말 들으면 좋겠다.”

신해범의 뺨이 경련했다.

“걔는 너 같은 새끼 몰라.”

하신성은 주름 하나 없이 다려진 정장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섰다.

“권주혁 대본이나 읽으면서 잘난 척은.”

“보는 눈도 많은데 예의는 차리자. 여기가 동네 파출소는 아니잖아.”

두 사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발짝 떨어져서 보기에는 그랬다. 신해범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머물렀고, 하신성의 목소리도 차분했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가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어 안달한다는 것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들의 목에 쇠사슬이 걸려 있고 그 줄을 각자의 보스가 잡고 있기 때문이리라.

성재경은 신해범과 하신성, 두 사람이 형제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기우희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눈 깔아라.”

“죄송합니다. 좀 의외라서.”

“왜, 보자마자 총질이라도 할 줄 알았어?”

신해범은 접수처로 갔다. 하신성이 방금 써 놓은 면회 신청서를 낚아채 자기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12층으로 가지.”

아껴 뒀던 로열코펜하겐을 꺼냈다. 하얀 보디에 푸른 꽃이 수놓아진 고급 찻잔을 알아본 하신성이 말했다.

“좋은 세트네. 소장품이야?”

“하나둘씩 사 모으고 있지. 옛날 생각도 나고.”

“그거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하신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기 교육대 12층 건물의 최상층은 지금껏 한 번도 대중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내부 관계자들 또한, 직원들이 소지한 카드에 따라 오갈 수 있는 층이 다르기에 아는 바가 없다고 일관했다.

하신성은 지난번 신해범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홀로 곽현우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신해범은 철저하게 보안을 지켰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만 태우며 자신을 지켜보던 모습은 수문장 그 자체였다. 그러던 놈이 싱글싱글 웃으며, 고급 찻잔까지 꺼내 놓으면서 손님 대접을 한다? 수상했다. 지나치게 수상해서 의심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리가 차 마시면서 담소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불편한 관계는 개선하라고 있는 거지.”

“그럼 평소에 궁금했던 거 하나 물어볼까. 신해범, 권주혁의 끄나풀로 사는 기분이 어때?”

신해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남의 속 긁는 개소리 같은데.”

하신성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테이블을 내려다본 하신성의 얼굴이 굳었다. 로열코펜하겐 하프 레이스에 담겨 나온 건 커피도, 차도 아닌 미적지근한 맹물이었다.

“손님 대접을 하다 마는군.”

“입에 댈 생각은 있었어?”

하신성은 신해범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레 섭섭할 것도 없었다. 그는 어른이 지켜 주지 못한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이 어떤지, 빈곤과 외로움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잘 알았다. 아버지가 이곳의 두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권폭(權暴)에 모든 걸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권력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하신성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머니를 뒤졌으나 라이터가 없었다. 신체검사 때 압수당한 걸 깜빡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담배를 잡는 순간, 하신성의 코앞으로 금색 듀퐁이 다가들었다.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로 연기를 내뿜었다.

“차라리….”

하신성이 말했다.

“차라리 진짜 배우를 하지 그랬어. 평생 남의 인생을 연기하면서 사는 게 너한텐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류연비 대신이 됐겠지. 곽재헌이랑 엮여서.”

“확대 해석하지 마.”

“왜? 가능성 있는 얘긴데.”

하신성은 검은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댔다. 몸을 푹 감싸 주는 촉감이 예술이었다. 돗대를 미련 없이 재떨이에 비비며, 신해범이 말했다.

“면회는 해서 뭐 하려고?”

“얼굴 한번 보고 가려고.”

“로맨틱하기도 하셔라.”

비꼬는 말이라는 걸 모를 만큼 속 빈 강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숙이고 들어가야 할 때였다. 하신성은 차분하게 응수했다.

“면회 가능하다는 거 알고 왔어.”

“누가 그래?”

“내가 알기로는 풍기대 규칙이….”

“규칙? 지금 규칙이라고 했나?”

신해범의 입 안에서 불꽃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는 줄곧 이 말을 해 보고 싶었다.

“여기선 내가 규칙이야.”

군홧발로 내려친 테이블이 흔들렸다. 찻잔에서 흘러넘친 물이 하신성의 휴고 보스를 적셨다.

“내 생각이, 말이 법이라고.”

신해범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굳어 있는 하신성을 올려다보았다. 긴 겨울잠을 끝내고 굴에서 대가리를 내민 코브라처럼.

“내가 된다면 되고,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변호사 찾아보는 중이야. 그거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어.”

“오, 그래? 어떤 미친놈이 정류진을 변론할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나 보지?”

무릎을 잡은 하신성의 약지가 움찔했다. 신해범이 차갑게 일갈했다.

“현행범에, 동기가 분명하고, 공범은 없는 상황이야. 장담하는데 1심에서 바로 사형이야. 풍기대를 상대로 상소는 의미 없다고 말해 두지.”

“…….”

“아깝지 않았나? 버리는 패로 쓰기엔.”

“곽현우와 각별한 사이였어. 그래서… 참을 수 없었던 거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신해범의 싸늘한 눈빛이 따져 물었다.

“<백사자>가 스물한 살짜리 애송이 하나 설득하지 못했다고?”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은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 말을 끝으로, 하신성의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신해범은 그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가 결코 털어놓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아, 이 빌어먹을 깡패 새끼. 밑천 떨어졌으면 죽든가….

“이봐. 정류진은 테러범이야. 풍기대 부대장을 암살 시도한 거물이라고. 이런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간단하게 만나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신해범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해진 신청서를 꺼내 하신성의 가슴팍에 던졌다.

“여기까지 온 수고는 인정해 주지. 취조실에 처넣기 전에 꺼져.”

“날 체포할 명분이 없다는 거 알아.”

“명분? 그딴 건 일단 처넣고 나서 만들어도 상관없어. 내 부하 중에 괜찮은 고문 기술자가 있거든.”

“뒷감당이 되겠어? 유미현 눈치 안 봐도 돼?”

신해범은 웃어 버렸다.

“적의 적은 아군이 아니라 또 다른 적이야. 이 멍청아.”

하신성의 안면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승리의 예감이 느껴졌다. 신해범은 하신성을 거꾸러뜨릴 한 방을 준비했다. 정류진의 흰 등허리를 떠올리며 입을 여는 순간, 상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왜 여기 남아 있었어?”

“뭐라고?”

“출국했으면 좋았잖아. 너도, 진치우도. 대체 뭣 때문에 여기 남아 살았던 거냐? 난 이해가 안 돼. 빌어먹을 출신 성분 때문에 뭘 해도 안 풀릴 인생이라는 거, 모르고 헤맬 나이 아니었잖아.”

“지금 누구한테 그딴 소릴 지껄여?!”

노크하려던 진치우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대신 엘리베이터 앞에서부터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포진해 있는 진압 팀 대원들을 모조리 물러나게 했다.

신해범이 언성을 높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신성은 그가 아무것도 없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가엾은 십 대 소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치부 중 하나였다.

신해범의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왜 출국하지 않았느냐고?!”

하려고 했다. 고모가 구해다 준 비행기 표와 여권을 가지고 공항까지 갔었다. 죽은 하진주 회장에게는 항공사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동창이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삼룡의 아이들을 태워 주기로 했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일행은 두 팀으로 나누어 이동했다. 하성록과 하신성이 한발 앞서 출발했다. 신해범은 유성식품 부자와 자기 일행 간에 다섯 발짝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발각된 사람은 진치우의 모친이었다. 신해범은 군인들에게 돌진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동복을 입은 군인이 다가와 여권을 보자고 말했을 때도, 이걸로는 출국할 수 없다며 함께 가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하성록과 하신성 부자가 탑승한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신해준이 아니야.”

그 병신 같은 애새끼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지하 취조실에 처박힌 정류진도,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신해범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정류진 만나고 싶어?”

하신성이 끄덕였다.

“아래층에서 기다려.”

진치우는 문을 열고 나온 신해범의 얼굴을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가면 같았다. 눈은 차가운데 입만 웃는다.

“치우.”

신해범이 말했다.

“샤워실 비워 놔. 정류진 데려갈 거니까.”

철문 여닫는 소리가 요란하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퍼질러 자고 있네. 여기가 네 집 안방이냐?”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팔짱 끼고 선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안 잤어.”

“침이나 닦고 말해.”

“이건 약 기운 때문에….”

“냄새 지독하네. 너 지금까지 화장실 한 번도 안 갔냐?”

“사, 사람 불렀어! 그런데 아무도 안 왔다고!”

류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변명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신해범이 아니었다면 자기가 이렇게 될 일도 없었다. 산송장이 된 몸에 링겔만 꽂아 넣으면 단가? 지금껏 밥 한 끼, 물 한 모금도 안 주고 방치한 게 누군데. 화장실 보내 달라고 그렇게 소리쳤는데.

“더러워 죽겠네, 진짜.”

류진이 소리쳤다.

“그럼 꺼지든가!”

“생각은 좀 해 봤어?”

“무슨 생각?”

무심코 되물었다가 아차, 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해범의 곤봉이 당장이라도 관자놀이를 후려칠 것만 같았다.

살면서 폭력적인 인간을 한둘 만나 본 게 아니지만, 신해범은 그중에서도 악질이었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자기 행동이 정당하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모르겠다고 말하면 아가리 찢는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네가 나한테 쌍욕한 건 다 잊었지?”

“당신은 욕먹어도 싸.”

신해범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내가 얼마만큼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정류진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너무 까칠하게 구는 거 아니야? 우리 사이에.”

류진이 코웃음 쳤다.

“당신이랑 내가 무슨 사인데?”

“세기의 명작에서 호흡 맞춘 사이.”

신해범의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켰다. CCTV를 발견한 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 농담하지 마.”

“진짠데. 그리고 우리, 지금부터 후속작을 찍을 거야.”

신해범은 류진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책상을 걷어차고 류진에게 달려들어 마른 팔에 꽂힌 링겔을 뽑아냈다. 거친 행동에 비명이 터졌다.

“악!”

류진은 휠체어째로 벽까지 밀려났다. 쿵 소리와 함께 방 전체가 흔들렸다.

신음을 삼키며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류진의 코앞에는 빙글빙글 웃는 신해범의 얼굴이 있었다. 귀신같았다.

“미친 새끼! 뭐 하는 짓이야!”

“요즘 관객들은 취향이 고상하거든.”

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무작정 박고 흔들고 싸는 레이프, 감방 플레이는 질린대. 이젠 좀 색다른 거 보고 싶대.”

“무슨 개소리야! 재수 없는 얼굴 치워!”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살면서 신해범 면상 후지다는 소리도 들어 보네.”

류진은 뒤통수의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신해범의 어깨 너머, 신해범과 똑같은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얼굴은 자세하게 살펴볼 수 없었다. 눈앞이 흔들려서, 또 남자가 모자를 코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깜짝이야.”

“뭘 놀라는 척이야, 새끼야.”

“말 좀 하고 들어오면 어디 덧나냐?”

“네가 안 들여보내 줄 거 같아서.”

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구 흔들리던 시야가 천천히 또렷해졌다. 마침내 류진은 확신했다. 남자의 정체는 진치우였다. 저 목소리, 말투, 웃을 때 한쪽 뺨에만 패는 보조개….

“진치우!”

묶여 있다는 사실을 잊고 달려들었다. 보란 듯이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휠체어와 함께 바닥을 뒹구는 류진을 내려다보며 진치우는 크하하 웃었다.

“쟤 뭐 하냐!”

신해범도 키득댔다.

“이해해 줘. 애가 워낙 열혈이라.”

“저, 저 눈깔 치뜨는 거 봐라. 버르장머리를 지나가던 개새끼한테 던져 줬나.”

“한창 반항할 때잖아. 나이든 아저씨들이 이해해야지.”

신해범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진심으로 류진을 이해했다.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소설 속에서, 복수에 눈이 멀어 개죽음당하는 엑스트라를 수없이 봤으면서도 자기만큼은 복수에 성공하는 주인공일 거라고 믿을 나이였다.

“샤워실 준비됐어?”

“준비됐어. 그런데 직접 할 거냐?”

“그래야지. 귀한 손님도 기다리시는데.”

귀한 손님?

류진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군데.”

진치우는 팔짱을 낀 신해범과 바닥에 쓰러진 채 으르렁거리는 류진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얘기 안 했어?”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했는데 네가 망쳤다.”

“알아듣게 말해! 왜 자기들끼리 중얼거리고 지랄야!”

“…….”

“왜 입을 다물어! 말해! 나한테 누가 찾아왔는지 말…!”

신해범의 군화가 반원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시끄러워.”

진치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정류진,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매를 버는 타입이었다.

신해범이 쓰러진 휠체어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닭도 너보다는 학습 능력이 있겠다.”

그는 사나운 개처럼 날뛰는 류진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하도 버둥거리는 통에 팔다리는 물론, 상체를 휠체어 등받이에 단단히 고정하고 나서야 겨우 취조실을 나설 수 있었다.

신해범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휠체어를 밀고 갔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우렁찬 목소리로 신해범에게 경례했다. 그때마다 류진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마침내 신해범이 멈춰 선 순간, 류진은 심장이 발등에 떨어지는 기분이엇다.

“다 왔다.”

신해범이 샤워실 팻말을 가리켰다.

“치우가 우릴 위해 만들어 준 세트장이야.”

류진은 휠체어에 묶인 손을 흔들어 보았다. 당연히 꿈쩍하지 않았다. 신해범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살인마가 시체를 처리할 때 반드시 욕실을 이용하는 이유는 피가 잘 빠지고 청소하기 쉬워서라고 한다.

샤워실이라지만 어지간한 공중목욕탕 규모였다. 옷과 소지품을 수납할 수 있는 관물대도 있었다. 한쪽 벽 전체가 거울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휠체어를 거울 쪽으로 돌려놓았다.

“잠깐 기다려.”

류진은 거울에 비치는 신해범의 모습을 노려봤다. 그는 탈의 중이었다. 제복 외투에 주렁주렁 달리 묵직해 보이는 배지들이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탄탄하고 유연한 몸을 감싼 새하얀 셔츠는 주름 하나 없고, 갓 드라이클리닝을 마친 것처럼 깨끗했다.

권씨 왕가의 심벌인 황룡이 아로새겨진 검은 넥타이를 풀며 신해범이 말했다.

“지금 나 보고 있지?”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재갈을 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괜찮아, 구경해.”

“…….”

“부끄러움 같은 거 없어. 웃통 까고 달력도 찍었는데 뭐가 대수야?”

그거라면 류진도 알았다. 풍기 교육대 창립 기념일 기념 한정 판매였다. 판매 개시 하루 전부터 풍찬노숙했지만 구하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민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간부들의 친필 사진이 들어간 그 달력이 암시장에서 원가의 열 배 가격으로 거래된다는 뉴스에 어이없어했던 기억이 났다.

“설마 자는 거 아니지?”

반라가 된 신해범이 다가왔다. 그는 류진의 몸을 구속한 매듭을 하나씩 풀어 주었다. 한쪽 발목이 자유로워졌을 때, 류진은 신해범의 턱주가리를 걷어차려고 했으나 갈고리 같은 손에 저지당했다.

류진의 발목을 잡은 신해범이 말했다.

“힘줄 잘리고 싶어?”

“…….”

“일어서.”

재갈을 풀어 준 뒤 신해범은 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

“싫어.”

냅다 뺨을 얻어맞았다. 류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신해범은 류진의 양 따귀를 번갈아 후려갈기고 머리카락을 붙잡아 거울로 밀어붙였다. 순식간에 코피가 터졌다.

“벗어.”

단추를 끄르는 손가락이 자꾸만 엇갈렸다. 검붉은 핏방울이 수의에 뚝뚝 떨어졌다. 류진은 옷을 벗으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신해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 좀 들어.”

신해범은 휴지 한 뭉텅이를 가지고 돌아와 류진의 코피를 닦아 주었다. 손길은 뜻밖에 다정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누그러지는 건 아니었다.

“놔!”

“해 줘도 난리야.”

“누가 필요하대?!”

“너 몸 선이 참 예쁘다.”

“뭐라고?!”

신해범은 뻔뻔하게 웃었다.

“…이!”

류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신해범의 눈빛이 따가웠다. 수의 안에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돌아서.”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신해범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류진은 자기 발등만 보았다. 푸르스름한 핏줄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했다. 그런 류진의 머리 위로 신해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류진은 자신과 신해범의 맨발을 번갈아 쳐다봤다. 큰 발이었다. 자기 한 사람쯤은 빈 깡통처럼 뭉개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만큼이나 큰 손이 팔뚝을 낚아챘다.

“아!”

“뭘 넋 놓고 있어. 따라와.”

커다란 욕조 가득 새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신해범은 선반에 놓인 목욕용품들을 헤치며 뭔가를 찾았다. 류진은 무심코 욕조에 손을 담갔다가 윽 소리를 내며 황급히 뺐다.

“너무 뜨거워.”

신해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반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류진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신해범의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킬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확률은?

그만두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은 호랑이가 한 마리일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게다가 이런 몸 상태로는….

류진은 바가지를 든 채, 선반 앞에 서 있는 신해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꽉 잡힌 근육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신해범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가는, 전형적인 수영 선수 체형이었다.

류진은 머뭇머뭇 벽으로 갔다. 타월을 끌어당겨 몸을 가리는데 빨간 통을 든 신해범이 다가왔다. 그는 엉거주춤 서 있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뭐 하냐?”

“물이 너무 뜨겁다고.”

“지랄한다.”

신해범은 빨간 통을 열어 내용물을 모조리 욕조에 쏟아부었다. 코를 찌르는 에탄올 냄새가 퍼졌다.

“뭐 하는 짓이야?!”

“들어가.”

“뭐?”

신해범은 류진이 들고 있던 타월을 빼앗고, 욕조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류진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 놔! 놔! 싫어! 놔! 하지 마!”

“한 번만 더 싫다고 해. 귀밑까지 아가리 찢어 준다.”

류진의 눈이 펄펄 끓는 욕조에 꽂혔다. 지옥 열탕 같았다. 어떻게 저길 들어가라고.

“너무 뜨거워!”

“안 뜨거워.”

“화상 입어!”

“이 정도는 돼야 깨끗해지지. 성가시게 하지 말고 들어가!”

“뜨겁다니까!”

류진은 욕조 끄트머리를 붙잡고 버텼다. 실랑이하는 와중에, 신해범의 제복 바지에 뜨거운 물이 튀었다.

그가 주먹을 쳐들었다.

“이 새대가리가 진짜!”

신해범은 류진을 뒤에서 끌어안아 욕조에 거꾸로 처박았다.

“푸하!”

곧장 올라오려는 작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소독하는 거야. 소독. 안 죽으니까 걱정 마.”

“사, 살려 줘! 살려 줘…!”

“안 죽는다니까.”

신해범은 턱을 괴고 킥킥거렸다.

그는 전문가였다. 물고문이라면 하루 세끼 밥 먹는 일만큼이나 익숙했다.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물속 깊이 집어넣었다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끄집어냈다. 팔다리에 힘이 풀린 류진이 축 늘어질 때까지.

신해범의 손가락에는 빨간 머리카락이 잔뜩 엉켜 있었다.

“엄살은.”

신해범은 샴푸를 손바닥에 쭉 짰다.

“이게 뭐가 뜨겁다고 그래. 엄살 부리지….”

얼굴로 바가지가 날아왔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신해범의 이마를 후려친 바가지가 통, 통 소리를 내며 타일 바닥을 굴러갔다. 온몸이 시뻘게진 류진이 소리쳤다.

“개새끼! 죽어 버려!”

“이게 눈깔에 뵈는 게 없나.”

신해범은 젖은 수건을 손에 감았다. 그는 물속에서 기어 나오려는 류진의 가슴팍을 걷어차 거꾸러뜨렸다. 물보라가 튀었다.

“아악!”

“일어나.”

“이 개새끼!”

“그래, 나 개새끼다.”

신해범은 허우적거리는 류진의 팔을 잡고 욕조에서 끌어냈다.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개새끼한테 개처럼 맞아 봐.”

젖은 수건이 허공을 날았다. 류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매질은 한 대로 그치지 않았다. 류진의 목과 어깨, 등허리에 불그죽죽한 자국이 남았다.

신해범이 젖은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흐으….”

“가만히 있어.”

흐느끼는 몸을 다리 사이에 가두고,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 위에 샴푸를 짰다. 거친 손길에 류진이 반항했다.

“아파! 하지 마!”

“시끄러워.”

“아프단 말이야!”

“넌 어떻게 된 게 싫어, 아파, 이딴 말밖에 못 하냐?”

“개새끼… 씨발 놈. 나쁜 놈. 이 후레자식!”

신해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애비 없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잖아.”

류진은 훌쩍훌쩍 울었다.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욕조에 처박힐 때 부딪힌 어깨, 등, 무릎… 뜨거운 물에 덴 피부는 어떻고.

에탄올은 류진의 눈과 코, 귓구멍을 적시고 다리 사이 은밀한 곳까지 흘러들어 갔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에 맥없이 몸을 내맡겼다.

“나도 귀찮아. 근데 네가 워낙 꼬질꼬질한 걸 어쩌냐.”

신해범은 손에 차가운 물을 받아 류진의 눈을 씻어 주었다.

“살 만하냐?”

“개새끼….”

“질질 짜면서 허세는.”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거품이 씻겨 내려가자 신해범은 때 타월로 류진의 달아오른 피부를 벅벅 문질렀다.

“악! 아파!”

“가만히 있어.”

“아프다고! 하지 마!”

“일곱 살도 너보다는 인내심이 있겠다. 이 말라깽이야.”

신해범은 류진이 비명을 지르든 말든, 발버둥을 치든 말든 어금니를 악물고 손을 놀렸다. 이 몸뚱이에 들러붙은 가난과 외로움의 흔적을 전부 벗겨 내고 싶었다.

“야. 저기 엎드려.”

신해범은 턱짓으로 방수 매트를 가리켰다. 흐느끼며 고개를 젓는 류진의 따귀를 한 대 올려붙였다.

“아!”

“엎드려.”

“싫다고…! 이제 그만 괴롭혀!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하는데!”

신해범은 한숨을 푹 쉬고, 류진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질질 끌려왔다. 이럴 거면서 반항은 왜 하는지.

엎어진 류진의 허리에 신해범이 걸터앉았다.

“뭐야!”

“가만있어.”

신해범의 무릎이 류진의 엉덩이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하지 마!”

“허리 추켜세운 건 넌데.”

류진은 숨을 삼켰다. 공포가 엄습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았다.

“하지 마.”

“…….”

“하지 말라고! 이 미친놈아!”

등 뒤에서 신해범이 웃었다. 양 손목이 매트 위에 짓눌렸다.

“아!”

류진은 자기 손목을 옭아맨 신해범의 손을 노려보았다. 길고 곧았다. 피아니스트처럼 근사한 손가락이었다. 그러나 마디가 불거지고, 손톱 끝이 죄 닳아 있었다.

축축한 혀가 귓바퀴를 핥았다.

“정류진.”

등에 달라붙는 신해범의 맨가슴은 딱딱하고, 수증기에 젖어서 촉촉했다.

“미인은 샤워하고 나왔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잖아. 나는 그 말을 이해 못 했었거든. 근데 지금 널 보니까 알 것 같아.”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는 신해범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한 사람은 십 초 안에 곤죽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너도 동의해?”

류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신해범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양손에는 피가 통하지 않았다. 손끝이 보라색에 가까웠다.

류진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던 신해범이 속삭였다.

“지금 무슨 생각 해?”

“시계….”

“음?”

“당신 거. 좋아 보이네.”

“오, 이게 마음에 들어?”

신해범이 웃었다. 풍기 교육대장으로 취임할 때 권주혁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비싼 거지?”

“뭐 그렇지.”

“그 멍청이도… 이런 거 갖고 있었거든. 어디 부딪치기라도 하면 발작을 하고 날뛰더라… 당신도 그래?”

신해범은 류진이 말하는 ‘멍청이’가 누군지 알았다. 하신성이었다. 휴고 보스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떠올라 욕지기가 치밀었다.

“지금 다른 놈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안 돼?”

“안 되지.”

신해범의 입술이 실룩였다.

“지금 네 위에 있는 새끼가 누군데.”

“윽!”

강한 힘이 뒤통수를 짓눌렀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류진의 시야에, 차갑게 빛나는 바쉐론 콘스탄틴이 들어왔다.

하신성과 억지로 키스했던 적이 있었다. 클럽 마감을 했던 날이었다. 바 매니저에게 비싼 술을 공짜로 얻어먹어 기분이 좋았다. 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식도가 타는 듯 뜨거웠다는 점과, 두 잔째를 받아 마셨을 때 느닷없이 달려들었던 하신성의 지독한 향수 냄새는 기억났다.

바 매니저는 손나팔을 불며 환호했다. 다른 직원들의 상태도 다르지 않았다.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하신성의 혀는 축축하고 역겨웠다. 저항하는 팔은 머리 위로 끌어 올려지고,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류진은 바 테이블에 눕혀졌다. 다리 사이로 뜨거운 몸이 들어왔다. 유리컵들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졌으나 하신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하신성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왔다. 크고 거친 손바닥이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팔을 흔들고, 다리를 버둥거리고, 허리를 비틀었다.

한 사이즈 크게 신고 다니던 운동화가 벗겨졌다. 하신성의 손이 바지 버클을 풀었다. 류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장이 신입을 상대로 장난친다고.

그렇게 모두가 웃고 있는 상황에서, 류진은 하신성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어 버렸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기 입술을 짓씹으며 조금이라도 신음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하… 아.”

류진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팔꿈치와 무릎으로 지탱하는 몸이 위태로웠다.

“들어.”

신해범이 무너지는 허리를 추켜올렸다. 결합부가 깊어졌다. 류진이 헉, 소리를 내며 매트에 이마를 찧었다. 신해범이 등허리를 토닥였다.

“긴장 풀어. 긴장하면 더 안 들어가.”

“그만… 그만.”

“힘 빼고, 숨을 천천히 쉬어 봐.”

“흐윽. 흑.”

“옳지. 잘하네.”

신해범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허리를 움직였다. 젖은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 아, 아…!”

코앞에서 가는 목덜미가 흔들렸다. 혀를 내밀어 핥자 솜털이 곤두섰다. 신해범은 류진의 안에서 부피를 키우는 아랫도리를 느낄 수 있었다. 아플 정도로 딱딱했다. 한시바삐 이 통증에서, 조급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자꾸만 앞으로 달아나는 류진의 골반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

젖은 살갗에서 물이 튀었다. 추삽질이 거세졌다. 류진의 엉덩이 사이, 찢어진 구멍에서 피에 엉긴 정액이 흘러나왔다.

“아, 아악…!”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파, 아, 아파, 그만, 아!”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 보고자 류진은 허리를 흔들었다. 그런 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신해범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 아.”

숨이 턱 막혔다.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구역질까지 치밀었다.

“아. 아, 아, 앗, 아악…! 아…!”

류진은 맥없이 무너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구멍을 벌리고 들어와 창자를 끄집어내는 기분이었다. 입을 벌렸으나 나오는 건 누런 위액뿐이었다.

“커흑!”

구역질하던 류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신해범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었다.

신해범은 괴로워하는 류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으… 으. 흐으. 읏.”

“뜨겁다.”

그는 웃고 있었다.

“너 엄청 뜨거워.”

바닥을 긁던 손가락에 젖은 수건이 걸렸다. 류진은 그 수건을 움켜잡았다. 지금은 뭐라고 부여잡을 게 필요했다.

내벽을 긁으면서 빠져나갔던 성기가, 도로 처박혔다.

“흑!”

“궁금하다. 넌, 언제쯤, 익숙해질지.”

수증기로 뿌예진 거울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비췄다. 이제 신해범은 류진의 몸이 앞으로 밀려도 끌어당기지 않았다. 자기도 함께 움직였다. 찢어진 속살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류진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세상 전부인 양 하반신을 거칠게 움직였다.

“아. 아, 아, 아으, 읏… 아, 아흐…!”

류진은 벽에 붙은 거울을 손으로 짚었다. 수증기로 뿌예진 거울에 비치는 자신과 짐승처럼 움직이는 신해범이 보였다.

“싫어… 싫어.”

“좀 즐겨 봐.”

가슴으로 뻗어 오는 손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신해범은 자극으로 꼿꼿해진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쥐어뜯듯이 잡아당겼다가, 이내 손바닥 전체로 쓰다듬었다.

“으윽. 읏. 아아!”

“너 여기… 되게 부드럽다.”

류진은 한 손으로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유두를 잡아당기던 손가락 움직임이 멈췄다.

“왜?”

“만지지, 마….”

“되게 아끼네.”

신해범이 킬킬거렸다.

“그러니까 더 만지고 싶다, 야.”

가슴을 희롱하던 손이 복부로 내려왔다. 류진은 숨을 들이켰다. 복부가 짓눌려 이뇨감이 치밀었다.

“하윽.”

신해범은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그는 저항하지 못하는 몸을 꿰뚫은 성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듯 류진의 아랫배를 쥐어뜯었다. 신해범의 손가락이 체모를 파고들었다.

“으, 아!”

“여긴 만지게 해 줄 거지?”

류진은 신해범의 손에 성기를 붙잡힌 채 신음했다. 거칠고 뜨겁고 딱딱한 손바닥이었다.

“아, 하지 마. 하지… 안, 싫어, 안 돼.”

“안 되기는.”

신해범은 허리를 움직이며 류진의 성기를 주물렀다. 한참 손을 놀리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불감이야?”

“아니야…!”

“근데 왜 이래? 상태가.”

“놔!”

신해범은 놓지 않았다. 엄지로 귀두를 쓰다듬던 그가 외쳤다.

“너 고자구나!”

신해범은 웃음을, 류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어쩐지… 어쩐지!”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면 손을 뗄 것이지, 신해범은 류진의 성기를 아까보다도 빠르게 흔들어 댔다. 류진이 비명을 질렀다. 아랫도리가 뜯겨 나갈 것 같았다.

“아, 악…! 하지 마!”

“눈 떠.”

신해범의 손을 뻗어 왔다. 그는 수증기와 입김으로 뿌예진 거울을 닦았다. 그러곤 류진의 턱을 붙잡아 정면을 보게 했다.

“눈 뜨고, 똑똑히 봐.”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신해범의 손이 빨간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놔…! 손 떼!”

“잘 봐. 이게 너야.”

류진의 두 뺨이 눈물로 축축해졌다.

“이게 지금 네 모습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아냐!”

류진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 바람에 신해범의 손가락이 관자놀이의 화상을 스쳤다.

“악!”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와 성기를 놔주고 두 팔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버둥거리는 몸을 껴안은 채 관자놀이 상처에 키스했다. 류진이 흉터를 평생 갖고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무심코 손끝이 스칠 때마다, 이 예쁜이가 나를 생각할 텐데.

신해범은 허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성기를 다 빼지는 않았다. 귀두를 입구에 걸쳐 놓은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예쁘다… 너.”

류진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허리와 골반이 부서질 것 같았다.

“흐으. 흐윽.”

말라붙은 폐부에 공기가 들어차는 순간, 신해범이 뺐던 성기를 도로 처박았다.

“악!”

달아오른 내벽이 확 쓸렸다. 안을 적신 정액이 팍, 튀었다. 류진의 허벅지 안쪽에 흰 방울이 점점이 남았다.

“흑!”

신해범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완전히 바닥에 엎어진 채 엉덩이만 쳐들고 있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덤프에 치여 아스팔트 도로에 내팽개쳐진 사슴 같았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덜미를 핥았다. 입술을 어깨로 미끄러뜨렸다. 말라서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확 깨물자 축 늘어진 몸이 경련했다. 신해범은 어금니를 악물고 류진의 안에 사정했다.

“야.”

신해범은 엎어진 류진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어찌나 입술을 깨물어 댔는지, 뺨과 턱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신해범은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웃었다.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 씻겼는데 전부 헛수고가 됐다.

그는 천천히 다리를 모아 웅크리는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저분하네. 나중에 잘라 줄게.”

“…필요 없어.”

류진은 푹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온몸이 난자당한 듯 고통스러웠다. 대퇴부를 적시는 피와 정액이 끔찍했다.

이 모든 비참함의 원흉이 말했다.

“일어나.”

“꺼져.”

“일어나라고.”

“꺼져 줘! 제발 좀!”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두덩이 뜨끈뜨끈했다.

“나한테 손대지 마….”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신해범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차갑고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류진은 몇 번이나 고꾸라졌다. 그때마다 신해범의 손에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허리가 부러질 듯 아프고 무릎이 후들거렸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면회실 팻말이 붙은 철문 앞에서 신해범은 류진을 돌아보았다.

“누군지 말해 줄까.”

“필요 없어.”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일 수도 있는데?”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개수작 집어치워.”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문이 열렸다.

류진은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던 ‘귀한 손님’이 벌떡 일어났다.

“류진아.”

하신성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게 조장이랑 무슨 상관인데.”

신해범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신성은 신해범이 창가에 기대서 담배를 입에 무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당사자의 말마따나, 여기선 신해범이 규칙이었다.

하신성은 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밥은 먹었어?”

“…….”

“네 앞으로 영치금 넣었다. 힘들겠지만 몸 챙기면서 지내.”

“필요 없으니까 꺼져.”

“류진아. 나 좀 봐라.”

류진은 눈을 감았다. 등줄기를 훑어 내리던 신해범의 뜨거운 손바닥 감촉이 생생했다. 엉덩이를 적시는 정액이 찝찝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꼴로 하신성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이게 자기 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이 스쳤던 신체의 모든 부위를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건 내가 아니라고.

“진짜, 왜 온 건데?”

“미안하다.”

“그 소리 하려고 온 거야?”

“미안하다… 정말로.”

울컥했다. 인제 와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간 일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 저런 소리를 늘어놓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유리창 하나 사이에 두고 눈시울 붉힐 사이였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

“조장이 미안한데 나더러 어쩌라고!”

류진이 내려친 유리창이 흔들렸다.

“그딴 표정 짓지 마! 짜증 나니까!”

“나한테 화내 봤자 달라지는 거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꺼지라고!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말 안 듣고 인생 조진 애새끼 구경하러 온 거야, 뭐야!”

하신성은 발악하는 류진을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픽 쓰러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런 거 아니야. 일단 진정하고 앉아. 앉아서 얘기해. 류진아, 너 지금 쓰러질 거 같아.”

“그래! 지금 힘들어서 쓰러지기 직전이야. 그러니까 좀 가!”

신해범은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하신성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여기 와서 기죽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겠는데, 범죄자 신세가 된 부하 앞에서 때 빼고 광낸 모습이라니.

“변호사 찾고 있어. 우리 재판 갈 거다.”

“소용없어. 난 이제 죽어.”

“포기하지 마. 분명 어떻게든 할 방법이 있을 거야.”

“조장은 왜 항상!”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하신성의 희망 고문은 이제 넌더리가 난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나 하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하신성의 밤색 동공이 흔들렸다.

“류진아….”

“날 내버려 둬.”

신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없이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그는 팁 페이퍼를 잘근잘근 씹었다.

“날 내버려 두란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

하신성이 폭발했다. 신해범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만하면 오래 참은 편이었다.

신해범은 바르르 떠는 류진을 쳐다봤다. 헐떡이고, 흐느끼면서도, 꿋꿋이 버티는 근성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필요 없다고 하잖아!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다고!”

“부탁인데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그러면, 너까지 그러면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류진이 거칠게 내뱉었다.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잖아.”

“조장이 뭔데! 네가 뭔데! 날 사람 취급한 적도 없으면서, 인제 와서 뭘 안다고 헛소리야!”

보안계장이 괜찮겠느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신해범은 신경 쓰지 말라고 손짓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신성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는 내가… 지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 와 있는지… 모를 거다.”

차모은, 이로한, 백사율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들과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각자의 입장과 책임이 있는 만큼 부딪치고, 싸우고, 갈등했다.

그래도 철천지원수가 되지 않았던 것은 결국 한배를 탄 동료라는 근본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적어도 하신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동료들이 자기만 모르는 사실을 공유하며 쉬쉬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어떻게! 어떻게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아버지랑!”

차라리 곽현우였다면 이해하겠다. 화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해하겠다. 힘든 일을 함께 이겨 낸 사람끼리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하성록과의 관계는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싫었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마음에 묻고 모르는 척 넘어가자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류진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결심이 무너졌다. 하신성은 멍하니 앉아 있는 류진의 따귀를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자존심 세우고, 비싸게 굴더니.

“아버지랑 떡 치면서 무슨 생각 했어? 나 엿 먹이는 기분이라 좋았어? 아님 뭐, 그 늙은이가 용돈깨나 쥐여 주던? 나한텐 비밀로 하고?”

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하신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하신성이 유리창을 후려쳤다. 안절부절못하던 보안계장이 다가와 하신성의 팔을 잡았다가 책상에 허리를 부딪치고 나가떨어졌다.

“말해 봐, 류연우.”

흥분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래서 나한테 시큰둥했던 거야? 보스랑 자는 사이니까?”

신해범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입이 뚫렸으면 말을 해 봐!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그동안 잘만 대들었으면서, 왜 지금은 꿀 먹은 벙어리야!”

문이 벌컥 열렸다. 류진은 건장한 풍기 교육대원들이 하신성을 제압해 바닥에 짓누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도,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거봐.”

가까이 다가왔는지도 몰랐던 신해범이 말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라고 했잖아.”

신해범은 류진을 일으켜 세웠다. 힘없이 흔들리는 몸을 문으로 끌고 갔다. 신해범의 왼손이 문고리를 움켜잡은 순간, 류진이 소리쳤다.

“누나 빚 갚아 줘서!”

마치 토해 내듯이.

“고마워서 보답하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지금 그걸 변명이랍시고….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렸다. 신해범은 자기가 느끼는 불쾌함의 이름을 눈치챘다. 분노였다. 그게 이 한심한 애새끼를 향한 건지, 바닥에 엎어져 끙끙거리고 있는 하신성을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억눌린 목소리가 호소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그게 아무리 힘들고 좆같아도 참아. 왜냐면 그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많이 없었으니까.”

“…….”

“그런데 이상하지? 결과는 늘 엉망진창이야.”

류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렁그렁한 눈이 신해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류진. 똑바로 서.”

“…….”

“똑바로 서라고!”

신해범은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받쳐 안았다. 유리창 너머에서 하신성이 부르짖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진치우가 망연한 표정으로 신해범과, 그가 끌어안고 있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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