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슈퍼 그리드 (3/39)

군의관 오재윤은 류진이 일시적인 쇼크를 일으켰다고 했다.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아서.

“만성은 아닌 건가?”

“그건 진료 기록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해범은 자기 담배를 통째로 오재윤에게 건넸다.

“고생했다. 한숨 돌리고 와.”

“예.”

“진 중령, 자네도.”

진치우와 오재윤이 나간 뒤 신해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커튼을 쳤다. 의자를 류진이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으로 옮겼다. 자그마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헐렁한 수의 사이로 도드라진 쇄골이 보였다. 신해범은 팽팽한 뼈가 힘겹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류진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아.”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신해범은 때때로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진치우는 그 이름 모를 충동을 서른이 넘어서도 고치지 못한 ‘불치의 지랄병’이라고 했다.

지랄병은 고모의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해에 발병했다. 혼자 몸으로 자신과 사촌 여동생을 키우며 악착같이 삶을 개척했던 고모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막을 내린 그해였다.

그 해, 신해범은 고모를 따라가려고 했다. 그런 그의 멱살을 잡고 이승으로 돌려놓은 건 독학으로 심폐 소생술을 익힌 사촌 동생이었다.

누워 있는 정류진의 얼굴에 신예나의 얼굴이 겹쳐졌다. 신해범은 움찔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정류진과 신예나라니.

신해범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어 대도 정류진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

그건 오직 하신성에게만 하는 말이었을까?

신해범은 류진을 바라보던 하신성의 얼굴을 기억했다. 짐작을 확신으로 만드는 필사적인 눈이었다.

하신성은 정류진을 좋아했다. 그는 한없이 일방적이고, 절대로 보답받을 수 없는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신해범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불쾌함이 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 퍼졌다.

요즘 애들 좋아하는 거.

신해범은 그렇게 주문했다. 카운터의 점원은 동작만큼 눈치도 빨라서, 가타부타 묻지 않고 제일 잘나간다는 세트 메뉴를 계산해 주었다.

신해범은 갈색 종이봉투를 안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에서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환호성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일곱 번 사인하고, 다섯 번 포옹하고, 열두 번 사진을 찍었다. 차에 올라타 조수석에 봉투를 내던지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연기는 에너지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보안계장에게 주먹까지 휘둘렀던 하신성은 이제 공무 집행 방해로 감방에 처넣을 이유가 생겼다는 신해범의 일갈에 입술을 부르르 떨며 물러났다. 승리의 쾌감이 솟구쳤다.

그 상쾌한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신해범은 약속했던 선행 하나를 베풀기로 했다.

상쾌했던 기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의무실 앞이 부산스러웠다. 신해범이 가까이 다가가자 굳은 표정의 기우희가 보고했다. 정류진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뭐?”

“오 중위가 인질로 잡힌 상황입니다.”

군의관 오재윤이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절절매고 있었어?”

기우희에게 햄버거 봉투를 떠넘긴 신해범이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퍽,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신해범은 난장판이 된 의무실을 둘러봤다. 제 위치에서 벗어난 침대들, 의자들, 흐트러진 책상 위에는 깨진 모니터가 쓰러졌다. 언제나 잠겨 있어야 하는 사물함 문짝은 활짝 열린 채였다. 바닥에는 온갖 의료용품이 나뒹굴었다.

신해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열린 창문 앞에 오재윤의 목을 그러안은 정류진이 서 있었다. 붕대 감은 유리 조각을 들고.

“야. 너 뭐 해?”

신해범이 혀를 찼다.

“아까는 뭐, 여기서 죽겠다더니.”

“혼자 죽겠다고 한 적 없어.”

“그게 이런 뜻이었어?”

“움직이지 마! 이 새끼 모가지를 따 버릴 거니까.”

오재윤은 겁에 질려 있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신해범은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신장 차이를 가늠해 보았다. 평균 키에 마른 체격인 오재윤은 정류진이 풍기 교육대에서 인질로 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상대였다. 어쩌면 정류진은 처음부터 오재윤을 눈여겨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신해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놈의 지랄병이 도져서 방심했다. 정류진은 <백사자> 소속이었다. 현장에서 뛰는 역할이 아니었다 한들, 기본적인 훈련은 받은 조직원이었다. 인질극도 뭘 알아야 가능한 거니까.

신해범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진치우 데려와.”

“퇴근해서 자리에 없어. 복귀하려면 내일 아침이나 돼야 하는데.”

“개소리 집어치우고 데려와! 이 새끼 죽는 거 보고 싶어?!”

“우리 공무원이야, 정류진. 직장에는 법정 근로 시간이라는 게 있다고. 집 갈 시간 돼서 간 놈한테 내가 뭐라고 하겠냐? 워라밸 몰라, 워라밸? 퇴근 후에 직장 상사가 연락하면 큰일 나. 요즘 세상엔.”

“내가 알 게 뭐야!”

“서로의 입장을 좀 이해해 보자는 거지.”

신해범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기우희의 품에서 햄버거 봉투를 받았다.

“배 안 고파? 저녁 먹을 때 지났는데.”

“…….”

“이거 먹고 얘기하자. 햄버거 사 왔는데 괜찮지? 내가 네 취향을 몰라서 대충 사 왔어. 요즘 잘나가는 거래.”

“미친 새끼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알아. 아는데,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지 않겠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 살벌한 거 내려놓고, 걔도 좀 놔주라. 숨 막혀 죽겠다.”

“이게 장난으로 보여?”

“심각하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들어왔지. 아니면 저기 애들한테 시켰지.”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불쌍한 군의관은 보내 주자. 나랑 얘기해. 맛있는 거 먹으면서 점잖게. 좋잖아?”

정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신해범이 햄버거를 꺼내 포장을 벗겼다.

“우리 신사답게 좀 살자. 응? 앉아. 이리 와 앉아서 먹어.”

“지랄…!”

“튕기지 말고 와. 너 배고프잖아.”

신해범은 류진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흥분 상태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은 각성제와 비슷하다. 확 치솟았다가 푹 꺼져 버린다.

“왜 엄한 군의관한테 그러냐? 쟤가 너 치료도 해 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네. 너 그러면 안 돼, 죽어서 천벌 받아.”

“천벌은 당신이 받겠지! 내가 아니라!”

“응, 네 말이 맞다.”

류진이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신해범이 말했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잖아.”

“…….”

“곤란하지? 쟤가 여기에 있으면.”

7월에 권세혁이 풍기 교육대 공익 근무 요원으로 입대한다. 신해범은 류진에게 복수 혈전 2회를 제안했다.

“곤란해지는 건 당신이지. 난 아무 상관 없어!”

“음, 글쎄?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을까?”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중은 파급력이 큰 쪽의 주장을 신뢰한다. 뒤늦게 바로잡으려고 애써 봤자 그때는 이미 대중의 관심이 한풀 꺾인 다음이다. 결과적으로 진실은 묻히고, 강한 쪽의 의견만 남아서 전해진다.

신해범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난장판이 된 책상을 치우고 햄버거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군의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필요한 건 아주 약간의 틈이었다.

“콜라도 사 왔어. 목마르지? 아까부터 계속 입술 핥던데, 혹시 탈수 증상일지도 몰라. 두통은 없냐? 그럼 진짜 위험해지는데. 하여튼, 고집부리지 말고 이리 와.”

“필요 없어! 가까이 오지 마!”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니… 까!”

신해범의 팔꿈치가 류진의 턱을 후려쳤다. 구속이 느슨해진 찰나의 순간, 오재윤은 잽싸게 빠져나갔다.

신해범은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류진에게 달려들었다. 손목을 비틀어 흉기를 놓치게 하고, 발로 차 멀리 떨어뜨렸다. 그는 류진의 마른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악!”

“기껏 생각한 게 인질극이냐? 새대가리 굴리는 수준 하고는.”

신해범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람을 봐 가면서 덤벼야 할 것 아냐.”

오재윤을 부축한 기우희가 정류진의 처분을 물었다. 신해범은 가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하실로.”

사진 속 소년은 웃고 있었다. 정재계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명문고의 회색 교복을 차려입은 소년이, 양팔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류진은 노트북 모니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교복에 달린 명찰로 시선이 갔다.

“고화질로 얼굴 보는 건 처음이지?”

권일혁 총통의 자식 중 대중에 알려진 이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미 성인이 된 자식들은 웬일인지 일찍이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정계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차기 총통 자리는 신룡관의 두 실세, 권주혁과 유미현에게 달려 있었다. 그간 두 사람은 권일혁의 장남, 장녀, 차남이 차례로 법적 성인이 될 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중은 그 이유가 아직 후계자를 논의하기에 이른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봤다.

눈치 싸움이 길어지면 긴장이 풀린다. 모두가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착각할 무렵 권주혁은 갓 고교를 졸업한 삼남 권세혁을 풍기 교육대 공익으로 추천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후계자가 누구인지를 ‘비공식적으로’ 공표했다.

“지금 권주혁이 가장 아끼는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이놈이야.”

“당신이 아니고?”

“쟤랑 나랑 차 타고 가다가 사고를 냈어. 그럼 누가 감방에 들어갈까? 여기서 누가 운전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이놈 죽일 거야?”

“죽으면 좋지만, 불구라도 괜찮아. 권주혁이 모든 걸 퍼 준 후계자가 몰락하기만 하면 돼. 그럼 나머진 유미현이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은 몸 사리고 있지만… 어차피 시간문제다. 난 그 숙청 여제가 점찍은 후계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

“그게 누군데.”

“여기 서명하면 알려 주지.”

신해범은 근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보면 몰라?”

“나 당신 말대로 한다고 한 적 없어.”

“면허는 있지? 아무리 너라도 운전기사 노릇은 할 수 있을 거야.”

류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없어?”

“차부터 사고 따려고 했어!”

“퍽이나.”

“애초에 난 권세혁 따까리 한다고 말한 적 없어!”

“죽을 때 죽더라도 네 누나 원한은 풀고 죽어야지.”

신해범은 류진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권주혁은 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았어. 이젠 네가 갚아 줄 차례야.”

“…….”

“사실은 너도 알잖아? 나도 진치우도, 권주혁에게는 그냥저냥 아까운 수준이라는 거. 하지만 여기, 이놈은 달라.”

권세혁은 진짜 왕자였다. 그것도 권주혁이 아끼는.

“끝내주는 타깃이지?”

“당신이 나설 생각은 안 해 봤어?”

신해범은 대뜸 시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단순한 소리야. 하지만 너는 음악이잖아.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하지.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가 있어.”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권세혁을 상대로?”

“말했잖아. 내가 너 설계한다고.”

“…….”

“권세혁은 분명 널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마음껏 뜯어내고 갖고 놀아. 그리고 내가 신호를 주면, 조준하고 쏴 버리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

“내 모든 걸 너한테 줄게.”

류진은 신해범을 올려다봤다.

“당신의 모든 거?”

“그래. 내 전 재산을 너한테 넘겨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돼? 난 벌써 이 프로젝트의 작전명까지 기획해 놨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군.”

“그래, 나 혼자서 반주 다 하고 있어. 이제 네가 노래 불러 주면 완벽해질 무대야.”

류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신해범이 손이 다가와 손깍지를 끼었다. 거칠고 딱딱한 손바닥이었다.

“넌 지금 죽기는 아까워.”

“…….”

“네 누나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맞잡은 손이 의미가 와닿지 않는 ‘근로 계약서’로 향했다. 신해범은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권세혁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영악하기로 따지자면 네가 더할 거라고.

“너라면 충분히 구워삶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하얀 종이 위에 기어가는 건 글자일까, 음표일까,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개미들일까. 모르겠다.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도 않았다. 류진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범은 서로 다른 계획서 두 개를 준비했다. 위로 올릴 것과 아래로 내릴 것. 전자는 신화 속 태양신의 이름인 <파에톤>, 후자는 아름다운 바다 요괴 <세이렌>이었다.

오래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와 문자, 알람 기능 정도만 살아 있는 이 구형 휴대폰은 오래전에 신해범이 고모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색만 다른 똑같은 기종을 여동생과 하나씩 나누어 가졌더랬다.

신해범은 단축 번호 3번을 눌렀다.

- 연지동입니다.

“안 바빠?”

- 괜찮아. 뭔데?

“오늘 갈게. 별관에 술상 좀 봐 주라.”

- …….

“예나야.”

- 바쁜 사람이 대낮에 전화를 다 한다 했네. 알았어. 몇 명이야?

신해범은 신예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 치우 오빠 소식 들었어. 뉴스에선 괜찮다는데 진짜로 어때? 정말 다친 데 없는 거야?

“응. 너무 멀쩡해서 내가 다 무서울 정도야.”

- 그래도 충격받았을 거야. 차가 완전히 망가졌던데.

“울고불고 난리를 치긴 하더라.”

- 웃지 말고! 속으로 꼴좋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오빠 그러면 진짜 개새끼야. 알지? 진심으로 위로해 줘. 그게 친구로서의 도리다.

“나 안 그래.”

- 안 그러기는. 이참에 싹 다 정리하길 바라는 오빠 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너한텐 숨길 수가 없네.”

정재계 인사들의 메카라 불리는 호월루(虎月樓)의 젊은 주인, 신예나가 웃었다.

- 당연하지. 생명의 은인을 물로 보지 마.

웅장한 기와지붕을 떠받친 열여덟 개의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입구 초입부터 바람에 흔들리는 홍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해범의 레인지로버는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 초소가 보일 무렵 방향을 틀어 샛길로 빠졌다.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어두운 길을 전조등에 의지해 저속으로 달렸다. 화려한 홍등이 사라지고 은은한 백색 등이 나타났을 때, 신해범은 차창을 내리고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부슬비가 내렸다.

호월루 별관의 문이 열렸다. 연녹색 전통복을 차려입은 마른 체구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차에서 내리는 신해범을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신해범은 그가 내미는 우산을 받아 드는 대신, 생명의 은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들어가.”

“매번 고맙다.”

“새삼스럽게 무슨.”

안내받은 신해범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보리가 잔뜩 들어간 고봉밥과 간장 종지, 바싹 말라비틀어진 고등어와 깍두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주는 대로 먹어.”

“생선 네가 구웠지? 앞뒤로 다 태웠네.”

“어우, 잔소리!”

신예나는 신해범의 손에 수저와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친구들 도착하기 전에 먹어. 오빠 평소에 사람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못 먹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신해범이 자조했다.

“사람 입맛이라는 게. 바꾸고 싶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더라고.”

“오빠 그거 기억나?”

신예나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가게에서 일할 때. 주말엔 사람 너무 많아서 마감하면 다들 기진맥진했잖아. 그때 밥솥에 남은 거 박박 긁어서, 계란이랑 치즈랑 햄이랑… 또 뭐였더라?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오빠가 밥 비벼 줬잖아.”

“기억하지. 머슴밥.”

“양푼에 담아서 나눠 먹다가 우리 대판 싸웠잖아. 오빠가 너무 빨리 먹어서. 진짜, 무슨 청소기인 줄 알았어. 씹지도 않고 삼켰지? 그때.”

“너는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신해범이 식사를 마칠 무렵, 진치우와 기우희가 5분 차이를 두고 나란히 도착했다. 매실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복귀할 때 운전해야 하는 기우희만 술 대신 탄산수를 마셨다.

신해범은 준비한 봉투를 눈앞의 세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읽어 봐.”

<세이렌>이었다. 가장 먼저 신예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치우 오빠 의견부터….”

“난 괜찮아!”

진치우의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신해범이 웃었다.

“정말 괜찮아, 치우?”

“아니, 그게, 그 뜻이 아니고. 내가, 그러니까 내가 멀쩡하다고. 정류진 그 새끼가 맘에 든다는 게 아니라.”

“취했네.”

“그러게 오빠. 취했다.”

“부대장님 취하신 것 같습니다.”

발끈한 진치우가 허둥댔다.

“이것들이 단체로, 사람 놀리냐?!”

신해범이 말했다.

“시간이 많진 않아. 권세혁 입소식은 7월 5일이다. 본래 계획은 중순이었는데 앞당겨진 걸 보니, 권주혁 마음이 급한 모양이야.”

“밀어붙일 땐 확실히 하는 늙은이야. 그 결단력, 실행력. 아주 브라보. 브라보.”

진치우가 머리 위로 손뼉을 쳤다. 취해서 해롱거리는 그와는 달리 기우희는 차분하게 계산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6월 말까지 정류진을 준비시켜야겠습니다.”

“그렇지.”

신해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예나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아직 어린 앤데.”

“…….”

“얘한테는 한 사람도 없었을까? 복수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모두가 입을 다문 가운데, 신해범은 굳게 닫힌 창문을 바라보았다. 동백이 아로새겨진 블라인드가 내려져 밖이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 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게 설계된 비밀의 방. 신해범의 <붉은 호랑이>가 계획되고 탄생한 곳.

신해범은 이 닫힌 공간이 자기 삶이라고 생각했다. 피할 수 없으니 부딪치기로 결심했다. 자기 자신을 숙명의 굴레에 가둬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가슴을 쥐어뜯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은 어디에도 묻을 수 없는 것이다.

신해범은 술잔을 비웠다.

“정류진, 나랑 닮았어.”

진치우가 빈정거렸다.

“인마! 자의식 과잉도 정도가 있지. 골격 자체가 다른데 무슨 헛소리냐? 방송에서 띄워 주니까 저거, 진짜 자기가 세기의 미남인 줄 알아.”

“대장님 인물 좋은 건 사실 아닙니까?”

“야 기우희!”

“어머, 치우 오빠 왜 그래? 우리 오빠 인물이 어때서? 군복만 벗으면 바로 영화배운데.”

두 사람의 합동 공격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언제 저놈 인물 못났다고 그랬냐. 정류진이랑은 종류가 다르단 얘기지, 종류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나, 내가 정류진이랑 얼굴 닮았다고 말한 적 없다.”

“그럼? 걔랑 너랑 뭐 성격이 비슷하냐, 스펙이 똑같냐, 하다못해 동년배이기라도 하냐?”

“느낌이.”

“뭐?”

“내 어린 시절 생각 나. 걔 보고 있으면.”

“진심이냐?”

진치우는 신해범을 이해하지 못했다. 본인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상대를 그렇게 패고, 강간해서 떡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나?

“일종의 애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기우희가 말했다.

“애즈응?”

“예.”

“무슨 헛소리야. 걔네 둘이 사귀냐?”

“연인 사이의 애증이 아니라, 과거의 힘없었던 자신을 향한 감정 말입니다.”

“그게 뭔 소리야….”

“부대장님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지금보다 훨씬 젊고 팔팔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 정도로 말입니다.”

“미쳤냐!”

상상만으로도 싫다는 듯, 진치우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천하를 줘도 싫다. 내가 미쳤다고 그 고생을 다시 해?”

“그겁니다.”

기우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대장님께서 정류진이 닮았다고 한 건, 아마 어린 시절 자기 모습이었을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힘없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대장님 말입니다.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이죠. 부정하고 싶은 자기 자신.”

“모르겠다. 그런 철학적인 소리는 가방끈 긴 니들이나 알아먹지. 난 잠이나 잘란다. 도착하면 깨워.”

“예. 쉬십시오.”

신예나는 <세이렌>의 표지를 넘겼다. 빨간 머리에, 희고 갸름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 활짝 웃는 사진이 나왔다. 화질이 약간 떨어지는 걸 보아하니 멀리서 렌즈를 당겨 찍은 모양이었다.

“누구랑 얘기하는 걸까.”

다른 이의 얼굴은 화각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소중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뭐라고?”

“여기 류진이 말이야. 누구랑 무슨 얘기하는 중인지 궁금하다고.”

“…별게 다 궁금하다, 넌.”

신예나의 손가락이 사진 속 류진의 뺨을 쓸었다.

“예쁘게 생겼네. 류연비랑 닮았다.”

“지금은 저 얼굴 아니야.”

“어머, 왜?”

신해범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면서 말했다.

“고문 때문에. 부기랑 멍은 차차 빠지겠지만 관자놀이에 화상은 안 없어질 거야. 좀 깊게 지졌거든. 아, 발목도.”

신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가 그랬어?”

“그래.”

“치우 오빠 때문에?”

“변명은 안 할게.”

“…….”

“잘 씻기고, 먹이고 입혀 줘. 누가 봐도 미인이어야 해.”

“그럼 좀 살살 다루지 그랬어.”

“믿는다, 신예나.”

신해범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창문을 열어도 괜찮았다. 그는 창가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웠다. 열린 창밖으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오늘따라 하늘에 별이 많았다. 별이 비처럼 쏟아질 것만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말소리, 차량 소리… 아득했다. 호월루의 밤이었다. 진정한 불야성의 시작이었다.

“넌 사람 마음을 주무를 줄 아는 애야. 상대가 원하는 것, 듣고 싶어 하는 말, 속에 감춘 생각까지도… 네 앞에선 감출 수가 없었어, 난.”

“내가 또 한 눈치 하지.”

“부탁 하나만 할게.”

“무슨 부탁?”

“정류진한테 잘해 줘.”

“…….”

“걔한테는 너 같은 사람이 필요해. 나한테 네가 유일했던 것처럼.”

정류진을 살려 줄 수 있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신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입사에 필요한 신체검사를 한다는 말에 류진은 발작하고 날뛰었다. 그런 류진을 붙잡아 진정시킨 사람은 성재경이었다. 나도 했는데, 전혀 아프거나 무서운 게 아니었다는 말에 류진은 겨우 잠잠해졌다.

그렇다고 경계를 늦춘 건 아니었다. 성재경은 잔뜩 긴장한 류진에게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음악, 영화, 드라마… 하지만 곧 류진이 어떤 분야에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고문으로 수척해진 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류진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영양실조에 심각한 저체중이었다. 폐활량과 근력을 비롯한 모든 신체 능력이 평균 이하였다. 그나마 내세울 게 있다면 양안 2.0의 동체 시력이었다.

기우희의 기준에서, 류진의 장점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조막만 한 얼굴과 긴 팔다리는 보기에나 좋지, 군인으로서의 좋은 점은 아니었다. 그래도 성재경의 평가는 후한 편이었다.

“못 먹고 자랐는데 178이면 선방한 거죠. 그리고 뭐, 시꺼먼 덩치들 사이에 가늘가늘 이쁜 애 하나 껴 있으면 분위기 환기도 되고 좋지 않겠습니까?”

“그 칭찬 그대로 정류진한테 전해 주지.”

“아, 안 됩니다. 소령님. 절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걔랑 친구처럼 지낼 생각이라면 접어. 너랑 맞는 타입이 아니다.”

“그게….”

성재경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좀 안쓰럽기도 하고.”

“네 걱정이나 해. 후임한테 먹히고 질질 짜지 말고.”

“소령님!”

기우희는 담배를 비벼 끄고, 고개를 들어 풍기 교육대의 최상층을 바라보았다. 건물 뒤로 보이는 하늘이 울긋불긋했다. 어느새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신해범은 류진의 눈앞에 보고서를 툭, 던졌다.

“네가 풍기 교육대 지원자였으면 신체검사에서 탈락했을 거다.”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고개 숙인 류진이 중얼거렸다.

“허리랑 무릎이 아파서 걷기도 힘들어. 그 와중에 단거리, 장거리 달리기 따위가 다 뭐야? 철봉이랑 팔 굽혀 펴기를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당신 나 엿 먹이는 거지? 정말 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하고 싶었다면 이딴 식으로 안 했을 거야.”

“구차하게 변명은.”

류진의 얼굴이 벌게졌다.

“변명 아냐!”

“그 연약한 몸으로 인질극은 잘도 해내셨어?”

신해범은 움찔하는 류진을 보고 웃었다.

“그래도 시력은 좋더라.”

“내가 눈이 좀… 좋긴 하지.”

“다행이야. 네가 흔해 빠진 운전 로봇이 아닐 수 있어서.”

신해범은 책상 밑에 있던 쇼핑백을 꺼내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 든 류진이 안을 들여다보고 의아해했다. 사복이었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이걸 왜?”

“갈아입어. 우리 사격 연습장은 야간에도 이용 가능하니까.”

류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밖에 나가는 거야? 지금?”

“잔말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

류진은 신해범의 눈앞에서 옷을 벗기 싫었지만 꾸물거리면 사격장이고 뭐고 그만두겠다는 신해범의 말에 황급히 벽을 보고 섰다. 바지에 구겨 넣는 발이 몇 번이고 엇나갔다. 마침내 류진이 목까지 발개진 채 뒤돌아섰을 때, 신해범은 정확하다고 믿었던 자기 눈에 마이너스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시키는 대로 사 가지고 온 성재경은 죄가 없었다.

“뭐… 대충 맞네.”

“이게 뭐가 맞아!”

“불평을 해? 이게 배때기가 불러 가지고.”

신해범은 웃음을 참으면서 자기 캐비닛을 열었다. 가죽 벨트를 골라 들었다.

“이리 와.”

“내가 할 수 있어. 줘.”

“이리 와.”

신해범은 주춤주춤 다가오는 류진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마른 어깨가 들썩였다.

“소말리아 해적도 너보다는 살집이 있겠다.”

벨트 구멍을 최대한으로 조여도 손가락이 들어갔다. 신해범은 새삼스레 류진의 몸을 훑어봤다. 이 뼈다귀를 언제 벌크 업 해서 사람 꼴 만드나.

“오늘은 테스트만 한다. 가능성이 보이면 기우희 소령이 널 맡을 거고.”

“총질이지?”

신해범이 류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왜 때려!”

“총질이 뭐야, 총질이. 교양 없게. 사격.”

“사격이나 총질이나 똑같은 말인데 트집 잡고 난리… 악! 왜 또 때려!”

“말이랑 식사 예절은 어지간한 노력으로 고치기 힘들어. 지금부터 네 일상생활 전반을 내가 관리할 거다. 특히 말.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하도록.”

신해범은 자신 있었다. 오랜 시간 겹겹이 들러붙은 가난과, 외로움과, 고통의 흔적을 정류진의 몸에서 벗겨 낼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유력한 총통 후보라 해도, 권세혁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애였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왕자님을 구워삶는 건 어려서부터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 자란 정류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권세혁을 본명으로 부르지 마. 우리에게 주어진 호칭은 MVP다.”

“걔가 무슨 운동선수야?”

“선수라면 선수지. 승계 전쟁 1등 경주마. 권주혁 군벌은 다 걔한테 판돈 걸었어.”

불이 환하게 켜진 사격장은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류진은 안심했지만, 어쩐지 신해범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전시용 총기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거 다 진짜야?”

“그럼 모형을 갖다 놨을까.”

“난 이게 좋아.”

류진은 데저트 이글을 가리켰다. 하신성이 소장 중인 총이었다. 전쟁 영화나 격투 게임에 단골로 등장하는 모델이기도 했다.

“그거?”

신해범이 다가왔다. 류진은 신해범과 팔이 부딪히지 않게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나 섰다.

“응….”

“애들 취향이네.”

“뭐야?”

신해범은 류진에게 방탄조끼와 헤드기어를 떠안겼다.

“총 잡기 전에 장비부터 갖춰.”

“나 이걸로 할래.”

“네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한테 맞는 걸 찾아야지. 여기가 게임장이냐.”

신해범은 베레타 92A1을 선택했다. 제식 권총의 기본이었다. 초보자가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류진이 고른 데저트 이글은 대구경 권총으로, 위력은 대단하지만 초보자에게 적합한 총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신해범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변수가 있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생각하는 것만큼 초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타깃을 중앙에 고정시켜서 1회전, 좌우로 이동시켜 가며 2회전. 류진이 총을 쏘는 동안 신해범은 뒤에서 지켜보았다. 마지막 실탄을 격발하고 난 뒤 류진이 돌아보았다.

“어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신해범은 류진의 동체 시력을 알아본 자가 <백사자>에 있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능력을 키워서 유용하게 써먹을 생각까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신해범은 류진에게 다가갔다. 군화에 탄피가 차였다.

“별로.”

“그래도 이만하면…!”

“자세가 엉망이잖아.”

신해범은 류진의 어깨와 허리를 잡았다.

“전방 주시.”

“거기 잡지 마…!”

“엉덩이 주무르기 전에 조용히 해.”

신해범은 확신했다. 정류진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폼을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 하는 아마추어였다. 그 와중에 명중률이 좋은 건 타고난 재능 덕이었다. 그러나 명중률이 아무리 높아도, 자세가 엉망이면 명사수라고 할 수 없었다.

교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은 몸이 편하겠지만 장기간 잘못된 자세로 격발하면 몸이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해범은 손등으로 류진의 무릎, 허리, 어깨를 연타했다.

“흔들흔들하지 말고 버티고 서. 다리 더 벌리고. 어깨는 또 왜 이렇게 굽었어? 팔을 더 들어!”

류진은 신해범의 지시를 따랐다. 몸을 더듬는 것과 자세를 바로잡아 주려고 터치하는 건 구분했다.

“불편한데….”

“네가 그동안 얼마나 틀린 자세였는지 알겠냐?”

지금 당장은 불편해도, 장기적으로 본다면 명중률이 훨씬 높아질 거라고 신해범은 말했다.

“알았어.”

“그 엉망인 폼은 누구 보고 배웠어?”

“딱히 가르쳐 준 사람은 없어. 그냥 내가 관심 있어서….”

“그래도 롤 모델은 있었을 거 아냐.”

류진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테러조장.”

“사이가 별로 안 좋았나 봐?”

“그런 것까지 다 조사했어? 대단하시네.”

“굳이 조사할 필요도 없어. 사격의 가장 기본인 자세가 엉망인데 그걸 고쳐 주지 않았다는 건, 널 싫어했거나 어지간히 관심 없었다는 뜻이겠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얘긴데.”

류진의 낯이 어두워졌다.

“그럴지도 몰라. 나한테 총 가르쳐 준 것도… 현우 형 때문이었거든.”

“곽현우가 왜?”

“둘이 친해서.”

“뭉뚱그리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해.”

류진은 탄창이 빈 베레타를 내려놓았다.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핥았다. 곽현우를 생각하면 목이 메고 눈 밑이 뜨거워졌다.

류진은 띄엄띄엄 끊어 말했다.

“테러조장이… 현우 형을 좋아했어. 단순히 동료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형도 그쪽에 마음이 있었고. 그런데 조가 달라서… 같이 있을 구실도, 시간도 부족했었거든.”

“그래서 사랑의 큐피드가 되셨다?”

“비꼬지 마.”

“솔직한 감상인데.”

“테러조장은 내 눈이 좋다고 했어. 저격수를 하면 테러조에 들어올 수 있다고도 말해 줬고.”

“그런데 못 들어갔군.”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어!”

신해범은 속으로만 수긍했다. 차모은이 정류진을 원했다 한들 하신성이 순순히 보내 줬을 리 없었다. 그나저나 <백사자> 테러조장과 곽현우라니 퍽 의외의 조합이었다. 곽현우는 차모은의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볼 것 같았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곽재헌 아들이다 이건가?

“잠깐만. 저격수?”

“그런데 왜?”

“라이플이 주력이었나? 어떤 형식?”

“레버 액션 개조한 거.”

“구닥다리군.”

신해범의 핀잔에 류진이 발끈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난 스핀 로드도 할 수 있어!”

“오, 그건 고급 기술이지.”

“알아?”

“한번 해 봐.”

신해범은 총신이 긴 라이플을 건네주었다.

리볼버의 패닝 스킬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스핀 로드는 사실 실전에 적합한 기술은 아니었다. 조준점을 잡기 힘들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라이플 때문에 한 손으로 지탱하기 어려웠다.

유일한 장점을 꼽자면 뭔가를 타고 달리면서 한 손으로 장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인데, 요즘 세상에 그렇게까지 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 모양새가 화려하고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어 아직까지 보여 주기식 스킬로는 건재했다. 신해범도 신룡관 의장병의 교대식에서 이러한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긴 총신이 멋들어지게 돌아갔다. 류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신해범을 돌아보았다.

“어때?”

“겉멋이 아주 단단히 들었군.”

“무슨 평가가 그래!”

“평가고 뭐고, 애들 재롱잔치 보는 기분이야.”

신해범은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수준 알았으니 됐다. 정리해.”

류진은 앞서가는 신해범의 뒤통수에 대고 총구를 겨냥했다. 물론 탄창은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손가락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류진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총, 조준… 발사.

***

소년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외부의 소음을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차단해 주었다. 블루투스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초소형 디자인을 고르고 골라 구입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간편해서, 또 어른들의 테이블에서 몇 시간이라도 웃는 얼굴로 버티기 위해서.

숙부가 알면 당장에 귀뺨을 올려붙이겠지만, 권세혁에게 음악은 생존 전략 그 자체였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디스곡은 언제나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l don’t like you little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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