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매개 변수 上 (4/39)

신해범이 자리로 돌아왔을 무렵, 증상이 시작됐다.

권세혁은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혓바닥이 가뭄철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그때뿐,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이제 눈알까지 뻑뻑했다. 권세혁은 사과와 꿀을 듬뿍 넣은 찹쌀 타르트라는, 도저히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디저트를 포크로 뒤적이며 자꾸만 관자놀이에 배어나는 땀을 훔쳤다.

“형아 화장실 가고 싶어?”

권세혁은 멋모르는 동생이 마련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때마침 신해범이 자리로 돌아왔고, 그에게는 숙부와 어머니의 관심을 끌 능력이 있었다. 권세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를 떴다.

풍기 교육대원 한 명이 따라붙었지만 그도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권세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다닥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작고 납작한 알약이 몇 개 남지 않았다.

권세혁은 알파벳 W가 새겨진 하얀 알약 하나를 꺼내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씹지 않고 혀 위에서 녹였다. 걱정하는 눈빛이나 말은 필요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끊을 수 있었다.

권세혁은 한숨을 쉬고 좌변기에 앉았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직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기분이 좋아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했다. 어쩐지 약발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았다.

“…….”

권세혁은 남은 알약의 개수를 셌다. 그간 공급책이 되어 준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클럽에서 샀다는 얘기뿐이었다. 친구는 그 클럽의 상호와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관리가 엄청나게 철저한 곳은 아닌 듯했다. 애들 다니는 고등학교에까지 약이 돌 정도니.

그러니까 어디든, 파 보면 꼬리가 잡힐 것이다. 권세혁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올라가시겠습니까?”

“글쎄….”

권세혁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자신에게 따라붙은 대원이 아까부터 묘하게 초조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뭡니까?”

“아닙니다. 모시겠습니다.”

“뭔데요. 얘기해 봐요.”

“…….”

“괜찮아요.”

“…….”

“진짜 괜찮아요.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게.”

군인은 머뭇거리다가, 방금 권세혁이 나온 모퉁이 안쪽을 가리켰다. 화장실.

“다녀와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지간히 참은 모양이었다. 권세혁은 빠르게 걸어가는 대원의 뒷모습을 보고 웃었다. 하기야, 신해범도 중간에 자리를 비울 만큼 지루한 식사이긴 했다.

권세혁은 기지개를 켜며 복도를 걸었다. 두통이 차츰 사라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는 이 마법 같은 알약의 이름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다. 괜히 기분 찜찜해진다는 이유였다. 단지 약간의 일탈을 즐길 뿐인데 괜히 죄책감 느끼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X’라고 불렀다. 알파벳의 스물넷째 자, 미지수를 뜻하는 스펠링 X.

권세혁은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 이거 몇 알 삼킨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마약 중독자도 아니었고.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폭포? 아니, 분수였다. 정원 한가운데의 거대한 분수가 새하얀 조명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물줄기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하늘을 향해 오르내렸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석 같았다. 권세혁은 멍하니 감탄했다.

그는 하늘만 쳐다보느라 자기가 키 작은 꽃들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낯선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리기 전까지는.

“발 치워.”

“네?”

권세혁은 엉겁결에 뒤돌아보았다.

“발 치우라고. 잔디 망가지잖아.”

검은 볼 캡을 눌러쓴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들었어? 옆으로 나오라고.”

“아! 미안합니다.”

권세혁은 황급히 발을 물렸다. 잔디 밖으로 물러난 그는 자신의 두 발과 눈앞의 낯선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 괜찮지? 하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권세혁이 서 있는 곳은 조명이 비추는 정원 한복판, 남자가 선 자리는 나뭇가지가 만든 그늘 아래였다. 빛과 어둠의 경계였다.

권세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여기 직원입니까?”

“알바.”

“정원 경비?”

“…뭐 그런 거.”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모자 밑으로 희고 갸름한 턱이 보였다. 권세혁은 잔디와 꽃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며 그늘로 다가갔다. 왠지 가까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자는 선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권세혁은 그가 두려워하거나 겁먹고 달아나지 않기를 바랐다.

“제가 잘 몰랐습니다. 망가진 꽃들은 보상하겠습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잔디가 상한다고 걱정하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권세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저…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네가 누군데.”

권세혁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이제 겨우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한 주제에 상대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권세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저, 신계동 권세혁입니다.”

그렇게 소개하라고 배웠다. 아직 입에 붙지 않아 어색하지만, 일단은 숙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적합한 자기소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권세혁이 내민 오른손을 잡지 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러갔다. 권세혁은 의아했다. 이쪽에서 먼저 이름을 밝혔으니 상대도 자기를 소개해야 옳았다. 그게 예의였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권세혁이 입을 열려는 그때, 남자가 말했다.

“무슨 운동 해?”

“네?”

“손이 운동하는 사람인데. 선수야?”

“아, 이건….”

권세혁은 오른손을 거뒀다. 어쩐지 쑥스러웠다.

“학교에서 배구부였어요. 지금은 졸업했지만.”

“주전?”

“그렇긴 한데 에이스는 아니고, 그냥저냥 선발로 뽑히는 정도.”

“잘했나 보네.”

허스키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권세혁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는 그늘 속으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

“배구 좋아해요? 경기도 보러 가요?”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왜요, 실제로 보면 더 재밌는데. 텔레비전으로 보는 거하고는 느낌이 아예 달라요.”

“바빠서.”

“아, 알바 하느라?”

남자가 픽 웃었다.

“정곡을 찔러 버리네.”

“많이 바빠요? 주말에도 시간 못 내요?”

“왜, 데려가 주게?”

권세혁은 주춤했다. 남자의 눈빛이 서늘했다. 권세혁은 예전에도 이런 눈빛을 받아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직할시는 권세혁이 나고 자란 항구 도시와는 많은 게 달랐다. 심지어 그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내로라하는 집안 자제들이 모이는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권세혁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조건만 보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 상대들을 모조리 쳐 냈다. 대신에 출신 성분이나 집안 배경에 상관없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입학한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바로 특기생 집단이었다.

검열국의 예체능인 육성 사업부는 기존의 혜택 범위를 넓혀 각종 예술, 체육 분야 유망주에게 생활비와 장학금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권세혁이 입학한 고등학교 또한 국가사업에 협조한다며 특기생을 선발했다.

권세혁은 그들이 학교로부터 정확히 어떤 혜택을 받는지는 몰랐다. 다만 그들은 소수였고,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고, 철저히 자기들끼리만 뭉쳐 다녔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학교에서 겉도는 소수 집단이었다.

권세혁은 특기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갖은 수모를 견뎠다. 그때 받았던 따갑고 차가운 눈총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남자의 눈빛과 꼭 같았다.

권세혁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말을 함부로 한 거라면 사과할게요.”

“…….”

“뭐든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정말입니다.”

“뭘 혼자서 사과하고 앉았어.”

남자가 말했다. 아니 질문했다.

“왜 그렇게 겁을 내? 내가 상처받았을까 봐 무서워?”

“네.”

권세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괴롭거든요.”

“…그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야?”

“그래요.”

“처음 만난 사이에도?”

“사람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역시 높으신 분이라 사고방식이 다르네.”

권세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네요.”

“놀라는 게 귀여워서 모르는 척했어. 미안.”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X 때문이리라.

권세혁은 남자의 갸름한 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든 게 이놈의 약 때문이었다. 약에 취해서 응당 화를 내야 할 상황에 미소가 터져 나오는 거였다.

“그럼 그쪽 이름 알려 주세요.”

“내 이름?”

“사과의 의미로요. 그러면 오늘 일은 넘어가 줄게요.”

“넘어가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는데? 내가 널 때리기라도 했냐?”

“왕실 모독죄라고 못 들어 봤어요?”

“겨우 이런 걸로 무슨 모독죄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고 있어.”

“당한 사람이 기분 나쁘면 장난이 아니죠. 그리고 난,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특별하고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권세혁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생각보다 앞서 튀어나오고, 관자놀이에서 땀이 솟고, 심장이 쿵쾅쿵쾅 세차게 뛰었다. 전부 X 때문이었다. 한 알만 씹어 삼켜도 기분이 좋아지는,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는 X.

“이름.”

권세혁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알려 줘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친구?”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친구는 서로 대등한 입장일 때 가능한 거지. 우린 그렇지 않아.”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저, 이미 한번 해냈거든요.”

출신 성분의 펜스를 무너뜨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봤다.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신뢰를 얻었다. 권세혁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름,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정성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카를 위해 직접 절에 가 이름을 받아 왔다. 별안간 천애 고아가 되고 세간의 비난까지 한 몸에 받는 아이가 안쓰러워 사주를 보고 돈까지 들여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황금빛 불상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 아이에게 쏟아지는 불행을 거두어 주십사.

박진아는 남편이 받아 온 이름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기를 바랐다. 이름을 바꾸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미신을 그는 믿었다.

결국 아이의 이름은 부부가 원하는 글자를 하나씩 조합하여 지어졌다. 부부로서는 최선의 결과였다. 하지만 새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아이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인제 와서 소용없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류진은 가끔 생각했다. 만약 그때, 이모가 내 의견을 물어봤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중에.”

류진은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렸다.

“나중에 말해 줄게. 너한테 별로 중요한 거 아니잖아.”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죠. 애초에 사람 이름은 중요한 거고요.”

“…….”

“엄청난 비밀이라도 돼요? 왜 안 가르쳐 주는데요?”

권세혁은 집요하게 매달렸다. 류진은 얌전히 별관으로 돌아가 운전면허 시험이나 공부하라는 신해범의 충고를 무시한 걸 후회했다.

“난 높은 사람들 안 믿어.”

“왜요?”

“겉과 속이 다르니까.”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인간이 없었어.”

권세혁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류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기요!”

권세혁은 엉겁결에 손을 뻗어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곧바로 뿌리쳐졌다.

“갑자기 잡지 마.”

“미안해요. 난 그냥, 그쪽이랑 얘기 좀 더 하고 싶어서.”

“…평민 친구 사귀고 싶으면 클럽이나 가. 술 한 번 사면 바로 끼워 주니까. 아, 넌 바빠서 그럴 시간 없겠네.”

“그건 선입견이에요.”

“넌 다르다는 뜻이야?”

권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난 달라요.”

“지랄. 난 안 속아.”

권세혁은 말문이 막혔다. 사람 얼굴에 대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예의는 밥 말아 드셨나? 평민이 자랑이야?

권세혁은 입을 꾹 다물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안 봐도 빤해.”

“당신 정말 제멋대로네요. 예의도 없고. 그러니까 여기서….”

아르바이트 같은 일이나 하지, 말하려다 주춤했다.

권세혁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당황스러웠다. 자기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권세혁은 몸을 홱 돌렸다.

“알았어요, 그럼. 나도 싫다는 사람한테 매달릴 생각 없으니까.”

“잘됐네.”

권세혁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정원을 벗어났다. 등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세상에 불만이 참 많은가 보았다. 방어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권세혁은 가게로 돌아갔다. 복도 끝에서, 얼굴이 창백해진 대원이 권세혁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한참 찾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정원 구경했어.”

“그렇다면 미리 얘기라도….”

“내가 그래야 해?”

대원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알면 됐어요.”

대원은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는 권세혁의 등을 응시했다. 아까는 기분 괜찮아 보였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나. 원래 조증인가?

***

신해범은 준비했던 서류 봉투를 꺼냈다. 풍기 교육대 인장이 선명한 황색 봉투에 들어 있는 계획서는 <파에톤>이었다. 봉투를 받아 든 권주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신해범은 그의 뱀 같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권주혁은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신해범도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했다. 물론 각자 등 뒤에 구명정을 감추고 있는지, 작살을 쳐들고 있는지는 몰랐다.

장승희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 신해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권세혁이 태어나기 전, 신룡관에서 주최한 가든파티에서였다. 그때 신해범은 서경제약 대표의 아들 신분이었다. 이름은 신해준이었다.

어린애가 눈에 띄게 잘생겨서 눈길이 갔다. 물론 그때부터 특별한 감정을 품은 건 아니었다. 장승희는 어른이었고, 총통 부인 신분이었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복중에는 권세혁이 있었다.

반정부주의자의 아들놈이, 아무리 때 빼고 광냈다고 한들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외모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 미녀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제 어미를 닮았다.

벌써부터 무리의 중심이 된 걸 보면 신영산의 불도저 같은 리더십도 물려받은 듯하고. 장승희는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쯤은 훌쩍 큰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눈을 떼기 어려웠다.

별안간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정확하게 장승희를 쳐다봤다. 그는 엉겁결에 눈을 내리깔았다가, 새파랗게 어린 남자애 상대로 무슨 짓인가 싶어서 턱을 쳐들었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 여차하면 버릇없이 어른을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호통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신해준은 장승희를 향해서 웃었다.

환하게.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희고 고른 치열이 드러났다. 쌍꺼풀진 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장승희는 확신했다. 저 애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 안다고.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꺼림칙하다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미소가 꽃처럼 화사했던 소년은 가족과 재산을 잃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든 걸 잃고 거리에 나앉았다. 장승희는 출신 성분의 낙인으로 앞길까지 막힌 신해준을 숙청 대열에서 간신히 비켜난 신지희가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장승희는 관심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생각대로 움직인다면 세상에 불가항력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장승희는 신해준이 궁금했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과 소식을 듣고 싶다는 본능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했다.

그가 친정으로 떠난 표면적인 이유는 신룡관에 부는 숙청의 피바람이 복중 아기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사실 신해준 때문이기도 했다. 장승희는 자기가 광성에 있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그 아이의 불행을 지켜보고 있으면, 끝내 그 환한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외면해야 하는 아이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겨 버릴 것만 같았다.

2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꽃처럼 화사하게 웃던 소년이 건드리면 베일 것 같은 인상의 남자로 성장하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권주혁을 만나기 전 신해범의 삶은 비참했다. 고기 방패 총알받이. 출신 성분 때문에 서른이 다 되도록 계급이 중사였다. 그러던 밑바닥 시궁창 인생이 불과 삼 년 만에 자수성가의 표본이 되어 있었다.

장승희는 신해범이 궁금했다. 지금 신해범은 그의 손이 닿을 자리에 있었다. 신해범은 이제, 멀찍이서 미소만 교환할 수 있었던 꽃 같은 미소년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해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하는 권력의 화신이었다. 소년이 아니라 남자였다. 장승희는 마디가 불거진 신해범의 긴 손가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권세혁이 돌아왔다. 신해범은 그가 아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반주 몇 잔에 벌써 취했나?

신해범은 짐짓 걱정스러운 척 권세혁에게 말을 붙였다.

“식사가 맞지 않으십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권세혁은 말끝을 흐리다가, 별안간 신해범을 향해서 씩 웃었다.

“재밌는 친구를 만났거든요.”

신해범은 속으로 웃었다. 권세혁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은 호월루였다. 아직 2부 영업이 시작하려면 멀었지만, 신분 상승을 꿈꾸는 관계자 중 당돌한 누군가가 기회를 노리다가 접근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류진만 해도 그렇지 않았나. 음식 냄새를 맡은 배고픈 강아지처럼 줄레줄레….

“왕자께서 즐거우시다니 다행입니다.”

신해범은 권세혁을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지금은 세상이 네 손 안에 있는 것 같겠지.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라.

많은 사람의 떠들썩한 배웅을 받으며 돌아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권세혁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동생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자도록 했다. 그는 새근새근 자는 동생의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시선은 창밖에 두었다. 차가 달리는 길은 매끈하게 잘 닦인 포장도로였지만 좌우로 나무가 우거져 으스스했다.

권세혁이 남자에 대해서 아는 건 세 가지뿐이었다. 희고 갸름한 턱, 허스키한 목소리, 마른 체격. 키는 180 언저리쯤 되어 보였고 나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 같았다. 권세혁은 한숨을 쉬고 턱을 괴었다.

모자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기 알바라면 호월루에 오래 있지도 않을 테니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니까… 잊어버리는 게 나았다. 그게 마음 편해지는 길이었다. 당장 오늘 밤만 해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할 서류가 한 묶음이었다. 시사 토론인지 토크인지 하는 프로그램 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잖아.

권세혁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남자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불쾌함을 느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높은 사람들 안 믿어. 겉과 속이 다르니까.’

그런 종류의 비난이라면 고교 삼 년 내내 들었다. 내성이 생기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권세혁은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

없었다. 그 어디에도.

“형아…?”

부스스 일어난 동생이 뭘 찾느냐고 물었다. 권세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분명 화장실에서 챙겨 넣었는데….

“아.”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흔한 실수였다. 평소 다니던 장소가 아닐수록 그런 일은 더 자주 발생한다.

실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잃어버린 물건의 내용물이었다.

“형아, 왜 그래? 표정이 이상해.”

권세혁은 힘겹게 웃었다.

“아니야. 잠깐… 형이 오늘 좀 피곤한가 봐.”

“왕자님, 병원으로 모실까요?”

“아뇨!”

엉겁결에 큰소리가 나왔다.

“그냥 가벼운 현기증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형아… 많이 아파?”

동생의 손이 다가왔다. 권세혁은 그 조그만 손을 잡아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했다. 몸이 약한 권무혁이 자기의 안 좋은 기운을 받아갈까 봐.

“형은 괜찮아.”

두 군데밖에 없었다. 화장실, 아니면 정원.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화장실은 좁고 밀폐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타일 위에 떨어뜨렸으면 소리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정원은 달랐다. 푹신한 잔디가 깔린 땅은 무진장 넓었다. 백 퍼센트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권세혁은 오한을 느끼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되찾을 가능성은 적었다. 차라리 발뺌하는 게 나았다. 그거 내 물건 아니라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편해졌다. 맞아, 케이스에 이름 석 자 박아 둔 것도 아닌데 알 게 뭐야. 난 괜찮을 거야.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권세혁은 잠을 잘 수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불안과 초조가 훌륭한 불면의 밤을 선물했다. 밤새워 뒤척이다 새벽 네 시가 되었을 무렵 권세혁은 수면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대본이라도 외우자는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장렬하게 실패했다. 도저히 머릿속에 글자가 들어오질 않았다. 권세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도 하고, 운동기구도 들어 보고, 심지어 야밤에 이어폰 끼고 미친놈처럼 머리도 흔들어 보았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온갖 쇼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아….”

권세혁은 책상에 엎어졌다.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다섯 시 반이었다. 이제 곧 숙부와 그를 따르는 악의 무리가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여유 있게 마치려면 두 시간은 필요하다는 사실에 권세혁은 환멸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때 빼고 광내서 하는 일이 뭔가. 고작 카메라 앞에서 전날 외운 대본이나 읊는 거잖아.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지도 모르는 채 웃고,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권세혁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이 와중에 그 남자 생각이 났다. 정원 관리 단기 알바. 담배 케이스를 정원에서 잃어버린 게 맞다면 그의 손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그 남자는 내용물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내 물건이라고 생각할까? 만약 그렇다면….

권세혁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남자의 목적이 돈이라면 자기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권세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이런 상황을 바란 건 아니었다.

***

차에서 내리기 전, 신해범은 홀스터에 든 리볼버를 확인했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물론 그는 신내림 받은 무당이나 앞날을 예지하는 예언가가 아니었지만, 산전수전을 겪고 살아남은 인간의 직감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새벽 두 시.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총구가 뒤통수에 와 닿았다.

“돌아보지 말고 타.”

시키는 대로 했다. 신해범이 사는 고급 빌라 엘리베이터 내부에는 거울이 없었지만, 언제나 벽면이 새것처럼 매끈매끈해서 습격자의 차림을 알아볼 수 있었다. 코까지 내려쓴 볼 캡과 군청색 셔츠. 최대한 보안업체 직원처럼 차려입었으나 자세히 보면 유니폼 디테일이 달랐다. 그래도 지나가며 언뜻 보는 거로는 의심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신해범은 속으로 한탄했다. 이 짜가 놈들, 각종 직업군 옷 베껴 팔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요?

뒤통수를 겨누던 총구가 옆구리로 옮겨 갔다. 엘리베이터 안의 CCTV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3층 눌러.”

“내가 몇 층에 사는지도 아는군. 하신성.”

“시키는 대로 해.”

차가운 총구가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신해범은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이냐. 하루 종일 일하고, 고통스러운 식사까지 마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왔는데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귀의 객이 되게 생겼다.

“실형 나왔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마음 푹 놓고 있었어?”

“꼭 그런 건 아니고.”

옆구리를 찌르는 힘이 강해졌다. 경비를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죽였을지도.

신해범은 하신성이 지금을 위해 충분한 사전 조사를 거쳤음을, 이를 갈고 준비했음을 확신했다. 경비원은 덩치가 큰 레인지로버를 위해 언제나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비워 놓았고, 신해범은 특수 공무원을 지망하는 손자가 있다는 어르신의 성의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게 이런 식으로 악용될 줄이야.

층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신해범은 속으로 한탄했다. 너나 나나, 나쁜 것만 배워 가지고 이게 무슨 꼴이냐.

“네 덕분에 감방도 구경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하신성을 제지하려고 했던 보안계장이 허리를 다친 게 신의 한 수였다. 지령을 받은 최유신은 전치 3주분의 진단서를 토해 냈고, 보안계장은 병가라는 이름의 장기 휴가를 선물 받았다. 바빠서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신해범은 그에게 위로금을 듬뿍 얹어 주며 푹 쉬고 오라고 당부했다.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이던 보안계장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3년 아니었어?”

“집행 유예 4년.”

“좋은 변호사 썼나 보군.”

“그래. 류진이 재판도 그 사람이 맡는다.”

“무슨 재판? 정류진 구속 안 됐는데?”

“뭐?”

하신성은 숨을 삼켰다.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 겁대가리 없는 놈은 자기 옆구리를 누르는 총을 맨손으로 붙잡아 방향을 틀었다.

곧장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엉겁결에 총을 놓쳐 버렸다. 하신성은 손목뼈를 강타한 통증에 신음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지하 1층으로 되돌아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윽!”

신해범의 군화 앞코가 하신성의 명치에 작렬했다. 숨이 컥 막혔다. 하신성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데저트 이글은 바닥을 빙글빙글 돌며 저만치 날아갔다. 하신성은 재빨리 일어섰으나, 신해범이 한발 앞섰다.

신해범이 주워 든 데저트 이글의 총신이 반짝 빛났다.

“이거였구만.”

“…….”

하신성은 허리춤의 커트 나이프를 뽑았다. 신해범이 총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좋은 모델이네. 구경 좀 시켜 주지 그랬어?”

“무슨 헛소리야.”

“류진이 말이야. 총 좋아하던데 구경 좀 시켜 주지 그랬느냐고. 이렇게 좋은 거 갖고 있으면서.”

하신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함부로 부르지 마라.”

“우리 친하다고 말했잖아?”

신해범이 총을 흔들었다.

“이거 나 주면,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내가 걔랑 친해진 방법.”

“개수작 집어치워.”

“싫어? 그럼 머리에 바람구멍 나든가.”

신해범은 총으로 하신성의 머리를 겨냥했다.

“정류진 구속 안 해. 왜냐면 나랑 계약서 썼거든. 걔 이제 풍기 교육대 소속이야.”

“미쳤군.”

“미친 게 아니라 혁신적인 거지.”

“무슨 속셈이야?! 정류진 데리고 무슨…!”

신해범은 지금 상황이 재미있었다.

하신성의 흐트러진 표정이, 필사적인 목소리가, 흔들리는 두 눈이 재미있었다. 하신성은 언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숙지해야 하는 제1원칙을 잊어버렸다. 상대방의 말에 흥분하지 말 것. 그건 내 밑천이 이만큼이요, 하고 까발리는 짓이니까.

신해범은 데저트 이글을 힘주어 잡았다.

“내가 데리고 살아 보게.”

“뭐?”

“예쁘잖아. 솔직히 류연비만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보니까 정들더라고. 그게 참 무서운 것 같아. 정.”

하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왜 그렇게 비딱하게만 생각하냐? 꿍꿍이라니. 내가 정류진이랑 친한 게 그렇게 질투 나?”

“죽였냐?”

“어쩜 그렇게 심한 말을!”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 신해범은 자신의 두 팔을 쓰다듬었다. 하신성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개소리 작작 하고, 정류진 어디 있는지 말해.”

신해범은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넌 네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모르지? 하신성. 있잖아, 넌 정말 분수에 넘치게 좋은 거 많이 가졌어. 이 총도 그렇고….”

신해범의 총구가 하신성의 이마 한가운데를 겨냥했다.

“정류진도 그렇고.”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하신성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신해범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부러운 새끼.”

“…….”

“넌 정말 행운아야. 치우도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만, 솔직히 언제 부고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거든.”

“케케묵은 옛날 일을 아직도 물고 늘어지는군.”

“다들 그렇게 말해. 지나간 옛날 일은 잊어버리라고. 기억할수록 나만 괴로워진다고. 그런데 그게, 마음먹은 것처럼 안 돼.”

방아쇠에 얹은 손가락이 움직였다. 신해범은 하신성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난 네가 부럽다.”

“…….”

“아버지랑 연적이 된 것마저도 부러워 뒈지겠어.”

“정류진한테 손댔으면 죽여 버린다.”

신해범은 폭소할 뻔했다. 진작 따먹었다, 이 빡대가리 새끼야.

그는 하신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류진 면회 와서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하신성은 기억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했다. 그렇게 멍청하니까 아버지한테 애인 뺏기고 감옥까지 쫓아와서 질척대지.

나는 안 그래.

신해범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 나한테 그랬잖아. 왜 출국하지 않았냐고. 왜 멍청하게 여기 눌러앉아 살았냐고.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하신성, 너 왜 아직도 여기 있냐?”

“…….”

“집행 유예 핑계는 대지 말자. 니들, 마음만 먹으면 앉은자리에서 위조 여권 땅땅 찍어 낼 수 있는 거 알아.”

“…….”

“혹시 치정 싸움이냐? 아버지가 이번엔 너 안 데려가 주던?”

“입 닥쳐.”

신해범은 활짝 웃었다. 하신성의 분노와 절망감이 느껴졌다.

“정류진 어디 있어.”

“우리 집, 내 방. 내 침대 위에.”

“장난치지 마 씨발 새끼야! 정류진 얻다 숨겼어!”

“방금 말했잖아, 내가 데리고 산다고.”

“개소리 집어 쳐!”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열심히 현실 부정 하시라고. 그렇다고 걔가 내 침대에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 개새…!”

“정류진 고자더라.”

하신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도 걔 거기 만져 봤으면 알겠네. 역시 옛날에 그 일 때문….”

신해범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하신성이 집어던진 커트 나이프가 그의 왼쪽 귀를 찢고 날아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혔다.

“…….”

찢어진 귀에서 흘러내린 피가 신해범의 목과 셔츠 깃을 적셨다.

“아야.”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하신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뒈지기 싫으면.”

적장과 대면하는데 총칼 하나씩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몸싸움도 상관없었다. 하신성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진흙탕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해범은 이기적이었다. 세상에서 자기만 불행하고, 자기만 힘들었다. 저놈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아버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우리라고 마음 편했을 줄 아냐.”

하신성이 소리쳤다.

“나는 뭐, 중국에서 황태자 대접받으면서 산 줄 알아?!”

그가 한 발짝 내디딘 순간,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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