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출혈이 심했다. 가볍게 스쳤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살점이 찢어져 귀가 너덜거렸다. 신해범은 당장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 경비의 말을 무시하고 수건으로 상처를 눌렀다. 바닥에는 이미 시뻘겋게 물든 수건 몇 장이 굴러다녔다.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몸속에서 마그마가 끓고 있었다. 신해범은 마음의 안정을 찾아 준다는 호흡법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스리려고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 빌어먹을 깡패 새끼. 반드시 찾아내서 사지를 회 쳐 버린다.
하신성은 도망갔다. 과연 치고 빠지기의 명수였다. 신해범은 하신성의 캐딜락을 향해 탄창이 빌 때까지 발포했으나 사이드 미러 하나를 날려 버리는 데 그쳤다. 그는 자신의 형편없는 사격 실력에 실소했다.
차를 타고 뒤쫓지 않은 건 하신성을 쫓아갈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정류진을 자기가 잡고 있는 이상, 하신성은 광성 땅을 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체포하는 것과는 별개로.
뒤늦게 달려온 보안업체 직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느려 터진 굼벵이들 입단속을 시키고, 미쳐 날뛰기 직전의 신해범을 달랜 사람은 자다가 뛰쳐나온 진치우였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뒤축이 닳은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꿰어 신은 진치우는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신해범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사태를 수습했다. 관계자들을 입막음하고, 최유신을 부르고, 마침 당직 중이던 기우희를 통해 긴급 수배 명령을 내렸다.
죽은 줄 알았던 경비원은 비상구 옆 청소 도구함에서 기절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입이 틀어 막히고 팔다리가 결박된 채. 보안 요원에게 구조된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이 오락가락했다.
하신성은 집행 유예 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실형을 피할 수 없었다. 권주혁의 총애를 받는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을 건드렸으니 최대 사형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었다.
신해범은 명치까지 치밀어 오르는 마그마 덩어리를 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걸 어떻게 조져 줄까. 사람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신성의 약점….
“아.”
진치우에게 부축을 받아 탑승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킬킬 웃었다.
“왜 그래?”
“한심해서.”
“…….”
“총 들고 칼을 맞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
“미친 새끼. 지금 웃음이 나오냐?”
“아니 진짜 웃기잖아.”
“최유신 오면 얌전히 치료나 받아.”
“좆나 한심하지? 나.”
진치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슬픈 동질감이 엘리베이터 안을 부유했다. 친구끼리 나란히 <백사자>에 테러당한 셈이었다.
신해범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자고 가, 치우.”
“엉.”
“냉장고에 술 있어.”
“얼음 넣지?”
“응.”
신해범은 귀를 누르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거울에 비춰 본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다. 약 바르고 붕대 감는다고 아물 수준이 아니었다.
“그 새끼는 끝까지 사람 엿 먹인다. 그치?”
“날 밝는 대로 수색할 거야. 인근 CCTV 뒤지고, 정비소 돌고… 금방 찾지 뭐.”
“하신성 그렇게 허술한 놈 아냐. 도주로 정도는 사전에 봐 뒀을 거고, 번호판도 가짜일 거야.”
“그래. 그렇다고 우리가 못 잡는 거 아니잖아. 그만 열 내고 이거 마셔.”
신해범은 술과 얼음이 든 차가운 컵을 건네받았다. 진치우는 숙성 기간이 짧아 기름 냄새가 나는 저렴한 위스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술 대신 탄산수를 마셨다.
신해범이 잔을 흔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술 더 따라 줘, 치우.”
“어리광 부리고 지랄이야. 징그럽게.”
진치우는 투덜대면서도 신해범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조금만 더.”
“그거만 마셔. 속 버린다.”
“…….”
“피 철철 흘리면서 술 마시는 게 건강에 좋겠냐?”
“자기는. 금연도 못 하는 주제에.”
“넌 시도라도 해 봤냐?!”
신해범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못 할 거 아니까.”
“어련하시겠어.”
“치우, 너 하신성 기억해?”
“아니.”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처럼 들린다. 신해범은 그간 친구가 <백사자>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애써 하신성에 대해 모르는 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치우는 그랬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난 다 잊었어. 나한테 그 새낀 그냥 남이야. 반란군 얼굴마담 새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래.”
“너는 안 그러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설마하니, 정류진을 사이에 두고 구질구질한 사이가 될 줄 몰랐다. 결국 이렇게 또 얽히는 것이다. 신해범은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너, 정류진한테 화풀이하지는 마라. 기껏 예나가 신경 써 주는데.”
“언제부터 독심술 배웠어?”
“야!”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진치우가 건네준 진통제를 술과 함께 삼켰다.
기존의 시나리오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정류진은 이 사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게 이 거지 같은 세상이 돌아가는 연좌제의 법칙이었다.
***
신예나의 회색 페라리는 으리으리한 황금색 빌딩 앞에서 멈췄다. 발레파킹 직원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신예나가 재촉했지만, 류진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망설였다.
“저 이런 데는 좀.”
“부담스럽다고 하지 마. 일부러 비싼 데로 예약했단 말이야. 비용은 오빠한테 청구하니까 고민하지 말고 즐겨.”
“그래도 좀… 마음이 안 편해서요.”
“류진아, 요즘 세상엔 착한 게 손해야.”
어영부영 끌려갔다. 입구부터 번쩍번쩍한 숍 내부는 한층 호화로웠다. 새하얀 대리석을 기조로 한 인테리어는 복층 구조였고, 중앙 홀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멍하니 고개를 젖히고 있던 류진의 등 뒤로 작은 체구의 여성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은하’라고 했다. 그는 신예나와 구면이었고,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신예나가 류진을 끌어당겼다.
“이 친구야. 잘생겼지?”
연예인을 준비하느냐는 질문이 날아왔다. 류진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했다.
“그래요? 의외네. 비율이 딱 연예인인데.”
“아니에요….”
류진은 벌게진 얼굴을 숙였다. 운동화 코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신예나가 애 얼굴 뚫어지겠다, 그만 쳐다봐, 하고 은하의 어깨를 쳤다.
“이쪽으로 모실게요.”
은하가 앞장섰다. 신예나는 자꾸만 머뭇거리는 류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복도 곳곳에 놓인 이름 모를 꽃들에 눈길이 갔다.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났다. 잔잔한 음악도 흘렀다. 구조와 인테리어는 다르지만 호월루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류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신예나는 평소에 이런 샵을 다니는 걸까. 신해범도 여기 온 적 있을까? 하긴, 외모가 그렇게 좋은데 관리를 받는 거겠지.
류진은 헤어 스파인지 뭔지를 해야 한다며 소파를 가리키는 은하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저 그냥 머리만 자르면 되는데.”
“아 저희는 샴푸 먼저 해 드리고, 진단기로 두피 상태를 본 다음에 커트나 케어 등 시술 내용을 정해요. 자주 오시는 분들은 제가 모발 상태를 아니까 바로 상담 들어가는데, 우리 고객님은 처음이셔서. 오래 안 걸리니까 잠깐만 누우시면 돼요.”
마지막 한마디만 알아들었다. 류진은 머뭇머뭇 소파에 누웠다.
“어디 가려운 데 있으세요?”
“아, 아뇨!”
“평소에 트리트먼트나 팩은 안 하시고요?”
“네… 네.”
“직모라서 잘 못 느끼셨을 텐데, 모발이 많이 상했어요. 평소에 염색이나 펌 자주 하세요?”
“염색을 좀….”
확실히 전문가의 손길은 달랐다. 샴푸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뒤, 은하는 서랍에서 마이크 같은 기계를 꺼냈다.
“그건 뭐예요?”
“두피 상태 진단기요. 이걸 고객님 두피에 이렇게 대면… 이렇게. 보이시죠? 이게 지금 고객님 두피 상태예요.”
입이 떡 벌어졌다. 류진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것까지 보게 되다니 당황스러웠다. 소파에서 잡지를 뒤적이던 신예나가 말했다.
“마사지랑 케어도 해 줘. 영양제든 앰플이든 아끼지 말고 팍팍 써.”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어차피 커트하잖아.”
“뜯어먹을 수 있을 때 뜯어내야지. 그치 류진아?”
류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가볍게 두피를 문질러 주던 은하가 말했다.
“스타일은 어떻게, 봐 둔 거 있으세요?”
“이거!”
신예나가 잡지를 들이밀었다. 짧고 단정한 스타일이었다.
“좀 더 요즘 애들처럼 해도 괜찮지 않아?”
“공무원 신분이라서 안 돼.”
신예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풍기대 규정 까다로운 거 알잖아.”
류진은 얼음을 듬뿍 넣은 토마토 주스를, 신예나는 샷을 추가한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운영하는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좌석 사이가 넓고, 파티션까지 있어서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류진은 휑하니 드러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염색으로 상한 머리카락을 본래의 색인 검정으로 덮고 신예나가 추천한 스타일로 잘랐다. 류진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시원하지?”
“네.”
“마음에 들어?”
“네.”
“근데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혹시 내가 뭐 실수했니? 아니면 은하가?”
“아니에요.”
“괜찮아. 말해도 돼. 내가 그런 걸로 화낼 사람 같니?”
“저,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어색해서….”
신예나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어색한데?”
“저는 공무원 같은 거… 꿈도 꿔 본 적 없어서요.”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다리를 꼰 신예나가 공무원이 별건가, 하고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 되지.”
“출신 성분에서 걸리잖아요.”
“그거참 너무하지 않니? 출신 성분으로 떨어뜨릴 거면, 애초에 서류도 받질 말든가. 왜 1차 2차 시험까지 남겼다가 면접에서 물 먹이는 건데.”
류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도 그런 경험 있으세요?”
“응.”
신예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간호사 하려고 했었거든. 간호 학교는 들어갔는데 졸업할 때 문제가 생겼어. 학부생들 중에서 나만 취업이 안 되더라고.”
“아….”
“학교에선 손써 줄 방법이 없다고 했어. 진짜, 취업이고 뭐고 다 불 질러 버리고 싶더라. 그럴 거면 애초에 뽑지나 말든가… 등록금은 다 받아 처먹어 놓고… 그때 오빠 마음을 좀 이해했어.”
신예나의 목소리는 자조적이었다.
“실패해도 나는 괜찮아. 뭐라도 다시 도전하면 되니까. 그런데 날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의 슬픈 얼굴을 보는 거, 그건 정말 못 견디겠더라.”
“그 사람은.”
류진이 물었다.
“신해범은, 무슨 실패를 겪었는데요?”
“여러 가지.”
신예나는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엔 피웠지만 지금은 내키지 않았다. 라이터 켜는 소리만 들려도 움찔했다.
“누나 담배 피우세요.”
“아니야. 비흡연자 앞에서 매너가 아니지.”
“저는 괜찮아요.”
“됐어. 몸에 좋지도 않은 거.”
신예나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빈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출신 성분, 그거 진짜 사람 미치게 하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개인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려. 넌 나보다 빨리 깨달았겠지만, 이 나라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해외로 뜨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신예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공항에서 잡히지 않았으면, 분명 오빠는 군인 안 했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설명해 달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류진에게는 타인의 삶을 살피거나 궁금해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일을 헤쳐 나가는 일만으로도 에너지가 부족했다.
신예나가 씩 웃었다.
“세이프 워드 하나 줄게. 그 인간이 또 너한테 손대려고 하면 신해준이라고 불러. 옛날 이름인데 본인은 엄청 싫어해.”
“그럼 더 맞을 거 같은데요….”
“지랄하긴 하겠지만, 손은 안 올릴 거야.”
류진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신예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기억해, 신해준. 분명 써먹을 기회가 있을 거야.”
신해범의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예나가 왜 그런 걸 알려 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자기가 신해범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모습이 가여워서일 터였다. 신예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류진은 잠자코 물방울 맺힌 유리컵을 만지작거렸다.
호월루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류진은 정원을 산책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신예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담장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허락했다.
“어차피 휴일인데 뭐. 놀고 싶은 만큼 놀아.”
“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산이라서 해가 금방 떨어져.”
“네!”
신예나는 정원으로 걸어가는 류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모 부부가 인질로 잡혀 있으니 감히 도망칠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류진은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에 앉았다. 어젯밤 여기서 권세혁과 만났다.
가까이서 본 권세혁은 멀리서 지켜봤을 때보다 훨씬 근사했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남이었고, 키와 체격은 자기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수준에, 몸에 걸친 모든 게 고급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착했다. 말솜씨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나는 잘 배운 사람이에요’ 하고 외치는 듯했다.
류진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인생 진짜 더럽게 불공평하다.
꽃 덤불을 내려다보던 류진은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주워 들고 보니 은색 담배 케이스였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케이스가 저물어 가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표면에 긁힘이 많았다. 딱 봐도 새것은 아니었다.
류진은 쓰레기통 앞에서 망설였다. 쓰레기냐, 분실물이냐.
생긴 걸 봐서는 쓰레기일 확률이 높았다. 손님 중 누군가가 버리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분실물일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화이트 스완>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다.
류진은 결정했다. 뒤늦게 전화 받고 쓰레기통 뒤지는 것보다 책상 서랍에 잡동사니 보관하고 있는 게 나았다. 주머니에 담배 케이스를 쑤셔 넣는데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
뭐, 담배 케이스라고 꼭 담배가 들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
혼자 있어서 문제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솟아나는 건.
류진은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 넣었던 담배 케이스를 도로 꺼냈다.
귀 옆에 대고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구슬인가? 아니면 동전?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소리가 좀 작지 않나?
잠깐 열어 본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게 쓰레기인지 분실물인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었다. 작고 납작한 알약들.
“이게 뭐야.”
류진은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엑스터시였다. 그것도 <화이트 스완>에서 판매하는 약이었다. 공급책들의 손에서 약이 섞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클럽에서는 유통하는 알약에 이니셜을 표기했다. 지극히 일차원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약에 불순물을 섞지 않는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장사하는 <화이트 스완>으로서는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류진은 약들을 케이스에 담았다.
아직 정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짐작 가는 데는 있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행운의 신이 자신의 손을 들어 줄 것 같았다.
***
기사가 떴다. 이제 막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왕자가 군 복무를 위해 풍기 교육대에 입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특혜였다. 지금껏 풍기 교육대는 사회 복무 요원을 받지 않았다. 올해 처음이었고, 최종 합격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물론 매스컴은 이러한 속사정을 자세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왕족 신분의 젊은이가 군 복무를 이수한다는 타이틀 하나만 맛깔나게 뽑아냈다.
장승희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귀족 젊은이 몇 명을 권세혁과 함께 풍기 교육대로 밀어 넣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권주혁은 특혜 의혹을 피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걱정을 내비치는 그에게, 권주혁은 눈과 입의 숫자가 적을수록 좋다는 흔해 빠진 정론을 늘어놓았다.
사전 약속은 없었다. 미리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범은 장승희를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다정하게 맞이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어.”
장승희는 살며시 웃었다. 신해범이 내온 커피는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원두커피였지만, 남달리 향긋하게 느껴졌다.
잔을 들던 장승희는 신해범의 왼쪽 귀를 감싼 두꺼운 습윤 밴드를 발견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아닙니다.”
신해범은 웃기만 했다.
“왕자님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장승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부인.”
“그렇게 깍듯하게 부를 필요 없어요. 이제 자주 볼 사이 아닌가?”
신해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개수작 말고 꺼지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다.
권세혁 진영의 실세는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었다. 신해범은 장승희가 치맛바람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장승희는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가급적 그가 풍기대에 드나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신해범의 속내도 알 리 없었다.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지?”
“물론입니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 풍기 교육대장님도 그랬으면 해.”
장승희는 신해범을 슬쩍 떠보았다. 지금 그는 눈앞의 신해범에게서 과거의 신해준을 보고 있었다. 설렜다. 부정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향해 꽃처럼 웃던 소년이 완전한 남자가 되었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남자였다. 장승희는 신해범이 입때껏 결혼하지 못한 이유가 개인의 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출신 성분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이십 대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야 했을 테니까.
신해범은 깍지 낀 손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부인께 말입니까.”
“그래.”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본래대로라면, 저는 감히 부인과 마주 앉지도 못할 입장입니다.”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그게. 이제부터 우리 세혁이 돌봐 주고 가르쳐 줄 사람이.”
장승희의 은근한 목소리에 숨은 뜻을 모를 만큼 신해범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목부터 정강이까지 훑는 하이힐을 피하지 않았다.
***
면허 시험에 필요한 신체검사는 풍기 교육대에서 진행한 것으로 대체되었다. 류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문제집을 뒤적였다. 신예나는 필기시험은 하나도 어렵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상식 수준이라고 했다.
훑어보니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답을 망설이게 됐다. 류진은 가채점 시험지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이었다. 신예나는 십 점 정도는 높게 받아야 실전에서 안전하다고 했다.
“…….”
류진은 머리가 짧아져 휑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담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권세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 케이스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행여 누구에게 들킬까 봐 별관에서 머무는 방의 화장실 선반 깊숙이 감춰 놓았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옥빛 전통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예나가 나타났다. 류진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셨어요!”
“류진이 일찍 나왔네? 공부하려고?”
“네, 뭐….”
류진은 후다닥 문제집을 덮었다.
“왜? 좀 보자. 누나가 채점해 줄게.”
“제가 했어요.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네….”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류진은 차마 신예나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는 고개 숙인 류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
“좀 더 편하게 지내도 돼. 뭐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봐.”
“저….”
“왜? 필요한 거 있어?”
류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요, 분실물 같은 거 발견하면 어떻게 해요? 고객이 두고 간 물건 같은 거요.”
“카운터에 맡기면 되지. 중요한 물건이면 하루 이틀 내로 연락이 와. 근데 그런 경우는 드물고, 보통은 버리는 물건이야. 쓰레기통 찾기도 귀찮다는 거지.”
“아….”
“여기 손님들은 대부분 비서나 경호를 대동해서. 중요한 물건을 잊어버리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근데 왜? 뭐 찾은 거 있니?”
“아뇨, 그냥 궁금해서.”
류진은 신예나에게 <화이트 스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입장료가 저렴한 로드 클럽이라 별의별 놈들이 다 드나들어서 그런지, 술과 약에 절어서 앞뒤 분간을 못 해 그런지, 신분증이나 지갑 등 귀중품을 잃어버리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감 청소 할 때까지는 찾아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거든요.”
“그렇겠다. 그 복잡한 데서.”
사정을 설명해서 알아들으면 다행인데,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취해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대?”
“보통 여자애들은 차비 줘서 보내고, 남자들은….”
류진은 멋쩍게 말했다.
“그냥 좀, 윽박지르면 돼요.”
신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해결이 돼?”
“알았다고 가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는데… 그럼 다른 방법을 써요.”
“어떤 방법인데?”
“이거요.”
류진은 주먹을 흔들었다. 신예나가 감탄했다.
“세상에,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저는 웬만하면 그렇게까지 안 해요. 근데 진짜 말이 안 통하는 상대도 있어서요.”
주먹으로 입 닥치게 만드는 건 테러조원의 18번이었다. 차모은이 그러라고 가르쳤다. 신예나에게 굳이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류진은 다시 문제집을 펼쳤다. 그때 신예나의 휴대폰이 삑삑거렸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세 대의 휴대폰 중 가장 오래된 기종이었다.
“응.”
여보세요, 가 아니었다. 누가 전화했는지 이미 안다는 뜻이었다. 뭐 그런 거야 발신자 표시가 있으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갑자기 왜?”
남의 전화 통화에 신경 쓰는 건 좋지 않다. 류진은 샤프 끝을 눌렀다. 틀린 문제를 다시 읽어 보았다.
“참 나… 핑계도 가지가지셔. 알았어. 올 거면 2부 전에 들어와. 그때가 좀 한산하니까.”
신예나는 그 후로도 몇 마디를 더 했지만, 류진은 문제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휴대폰 플립을 닫은 신예나가 류진을 돌아보았다.
“별관으로 온다네.”
“네?”
“무서운 군인 아저씨.”
대번에 알아들었다. 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잘하나 보려고요?”
“자기 말로는 술 먹고 싶다는데, 술만 마시자고 여기까지 올 사람은 아니지 싶어.”
“…….”
“2부 시작 전까지는 내가 같이 있어 줄게.”
“괜찮아요. 누나 바쁘시잖아요.”
류진은 샤프를 내려놓고 신예나를 향해서 웃었다.
“저 신해범 안 무서워요.”
“그렇게 웃지 마.”
“네?”
“얼굴 하얗게 질려서는… 어디서 센 척이야? 웃기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예나는 스커트 자락을 꽉 쥐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신예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공부에 열중하는 류진을 바라봤다. 아직 희미한 멍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기가 빠지고 상처가 아문 얼굴은 확실히 잘생겼다. 왜 은하가 연예인 운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류진아.”
“네?”
“미안해.”
류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누나가 그런 말을 하세요.”
“오빠 대신은 아니야. 나도 너한테 잘못하고 있는 거니까.”
류진은 말없이 신예나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제가 선택한 거예요.”
“그러니….”
신예나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혼자 남겨진 류진은 문제집을 덮고 책상에 엎드렸다.
신해범이 온다. 나를 보려고.
신해범의 정확한 목적은 모르지만, 곱게 얼굴만 보고 갈 인간은 아니었다.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주먹질을 할 것이다. 어쭙잖게 반항하다가는… 또.
“씨발.”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더러워지는 상대도 드물었다. 그 하신성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불현듯 담배 케이스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그 안의 내용물이었다. 엑스터시는 각성제였다. 뇌를 자극하고 아드레날린을 폭발시켜 평소 이상의 신체 능력을 끌어내는 마약이었다.
그게 신해범의 손에 들어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신해범이 공무원 신분이라서가 아니었다. 맨정신으로도 사람을 고문하고, 패고, 거리낌 없이 강간하는 그 반미치광이가 약까지 하면 살인이 나고도 남았다. 그 참극의 희생양은 당연히 내가 아닌가. 류진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신해범은 호월루의 별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뜻밖에도 류진이었다. 직원 유니폼을 입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편한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그리고 맨발이었다. 하얀 발등에 도드라진 핏줄로 시선이 갔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런 옷 사 준 기억은 없는데.”
“누나가 사 줬어.”
“누나? 너 예나를 그렇게 부르냐?”
앞서가던 류진이 툭 내뱉었다.
“그럼 누나를 누나라고 하지, 아줌마라고 하냐?”
신해범은 속으로 한탄했다. 진치우도 그렇고, 정류진도 그렇고 신예나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사근사근한 겉모습만 봐서 그렇다. 그러나 청순한 겉모습을 한 꺼풀 벗기면, 적림부의 숙청 여제에 버금가는 정치력을 자랑하는 밤의 여제가 있었다.
동백실 문이 열렸다. 신해범은 상차림을 보고 웃었다.
“네가 준비했어?”
“누나가.”
“걔가 널 좋아하긴 하나 보다. 나한텐 저렇게 안 해 줘.”
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신해범이 류진을 올려다봤다.
“뭐 해? 장승같이 서서.”
“난 배불러.”
“쇼하지 말고 앉아.”
신해범은 수저도 들기 전에 술부터 따랐다. 류진이 말했다.
“밥부터 먹어.”
“왜? 취해서 난장 칠까 봐 겁나냐?”
“그게 아니고, 기껏 누나가 신경 썼는데 무시하는 것 같잖아.”
“이거 예나 솜씨 아니야. 걔는 이런 요리 못 해.”
류진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쏘아붙이려다 그만뒀다. 신해범이야말로 신예나의 진짜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
“누나는 당신이랑 다르니까.”
“다른가?”
“하늘과 땅 차이지.”
신해범은 피식 웃고, 류진에게 턱짓했다.
“왜?”
“한잔 받아.”
“싫어.”
“좋은 술인데.”
류진은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잔 얻어 마셨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신해범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음주가 절반이었던 식사를 마친 신해범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류진은 창가에 기대앉아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담배 안 피워?”
“안 해.”
“원래부터?”
류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끊었어.”
“아, 그래.”
“담배는 왜?”
신해범이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를 달깍거렸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거 치워.”
“진짜 무서운가 보네.”
알면 입 닥쳐 줬으면 했다. 물론 신해범은 입을 다물지도, 라이터를 도로 집어넣지도 않았다. 대신 류진의 얼굴을 향해 회색 연기를 훅 뿜어냈다. 류진은 인상을 찌푸리고 물러나 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아무래도 예나는 너를 너무 믿는 것 같아.”
“날 여기 보낸 사람은 당신이잖아.”
“동등한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야.”
신해범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재떨이에 걸쳤다. 그의 시선은 류진을 향했다.
“예나가 날 살려 줬어. 알고 있어?”
류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신해범을 쳐다봤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따위라면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었다.
“자살 시도를 했어. 연탄을 피웠지. 넌 잘 모르겠지만, 나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연탄으로 난방 하는 집이….”
“알아.”
“그래?”
“우리 집도 연탄 썼어.”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나가 이상하게 그날따라 일찍 귀가했어. 심정지가 왔었는데, 응급 처치가 훌륭해서 살았다더군.”
“…….”
“처음에는 원망했어. 나한텐 미래가 없었거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폐를 끼치는 존재였어. 어떤 노력도 보답받지 못했어. 그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완전히 고꾸라졌던 거야.”
“나한테 왜 그런 얘기를 해?”
“우리가 닮았다는 얘기야.”
류진이 허, 코웃음을 쳤다.
“닮은 게 아니라, 비슷한 처지였던 거겠지.”
“그런가?”
“그래도 난 당신 같은 쓰레기 아냐. 당신처럼 남을 짓밟고 상처 주는 짓은 안 해.”
류진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난 당신처럼 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처럼 되느니 죽는 게 나아.”
“한번 죽었다 깨어나면 생각이 바뀔걸.”
“이미 한 번 죽었어. 누나가 죽은 날. 그때… 나도 같이 죽었다고.”
류연우의 인생은 거기서 끝장났다. 류진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 끝을 노려보았다.
“누나는 불륜녀 아냐.”
“그거야 세상이 판단할 일이지.”
“세상이 무슨 자격으로 누나를 판단한다는 거야!”
류진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니들이 뭔데 함부로 판단하고 말고 해! 내가 아니라는데! 누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제멋대로 기사 쓰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나 퍼뜨리고, 생트집 잡아서 확대 해석 하고…! 그렇게 작정하고 몰아갔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나.”
“닥쳐!”
신해범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뭐라고?”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류진은 눈을 부릅떴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저 재미로, 유흥거리로, 그렇게 생각하고 퍼뜨린 소문 때문에!”
“흥분하지 마, 정류진.”
“그 말 취소해. 굴뚝에 연기가 어쩌고 했던 말 취소해!”
신해범은 당장이라도 자기에게 달려들 기세인 류진을 바라보았다. 저 눈에 담긴 건 누나를 향한 애정일까, 믿음을 부정당한 분노일까.
“그럼 우리 내기할까. 류연비는 곽재헌과 사랑을 했다, 안 했다.”
“장난치지 마!”
“사실은 너도 모르잖아.”
“내가 왜 몰라! 가족인데!”
“가족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들도 있어.”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감추고 싶은 치부가 있었다.
신해범은 죽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어릴 땐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상대에게는 결코 나의 고통과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어두운 부분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상대방이 내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니야.”
류진은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누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사랑하지 않았다는 쪽에 거는 거지?”
“누나 가지고 내기 안 해!”
“그러지 마, 정류진. 꼭 네 누나를 못 믿는 것처럼 보이잖아.”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내가 믿으면 돼.”
신해범이 조소했다.
“그런 걸 정신 승리라고 하지.”
“…….”
“혼자서 난 누나를 믿어요, 해봤자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너도 알잖아, 세상이 얼마나 자기들 입맛대로인지. 나쁜 소식은 잊히지도 않아. 당장은 거품 꺼진 것 같아도, 비슷한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류연비는 또 머리채 잡혀서 끌려 나올 거다. 그때마다 네 삶도 흔들리겠지. 그래도 돼? 다른 사람들이 네 인생을 쥐락펴락하게 내버려 둬도?”
“그게 싫으니까… 당신의 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인 거잖아.”
“그러면 마음 단단히 먹고 썅년처럼 굴어. 그딴 불쌍해 보이는 표정 짓지 말고.”
신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왼쪽 귀가 지끈거렸다. 이 사달을 낸 하신성의 커트 나이프는 데저트 이글과 함께 신해범의 제복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신해범은 칼과 총을 꺼내서 상 위에 올려놓았다.
“알아보겠어?”
류진의 눈이 커졌다.
“어디서 났어?”
“하신성이 널 찾아.”
류진은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으로 본 하신성이 생각났다. 경멸 가득한 목소리, 상처받은 눈빛.
“왜?”
류진이 물었다.
“아직도 나한테 할 게 남았대?”
“조직 입장에서는 네가 살아 있으면 곤란하니까.”
“내가 죽었으면 좋겠대?”
신해범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백사자>는 그럴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연판장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임무에 실패한다면 자결한다는 내용이.
바닥을 짚은 류진의 손이 떨렸다.
진치우를 죽이려고 했을 때는 정말 죽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류진은 죽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신해범이 살아갈 목적을 제시해 줬다.
그가 자신의 왼쪽 귀를 가리켰다.
“잡으려고 했는데 놓쳤어. 이거 보여?”
신해범은 서슴없이 거즈를 뜯었다. 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살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귓불이 원래 형태로 돌아올지, 어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상처가 심했다.
“하신성한테 당한 거야.”
“…….”
“그 새끼 지금 제정신 아니야. 네가 그놈 타깃이었다고 생각해 봐. 귀 한쪽으로는 안 끝났을걸.”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너한테는 돌아갈 곳이 없어졌어. 하신성은 곧 체포될 거고, 나는 내 모든 커리어와 명예를 걸고 그 개자식을 사형시킬 거다. 그놈 숨통이 끊어지는 모습을 상석에 앉아서 구경하자고.”
돌아갈 곳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신성의 죽음을 구경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류진에게 신해범이 말했다.
“협력에 대한 선물이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따위 표정 짓지 말라고 했다!”
술잔이 날아와 쇄골을 때렸다. 신해범의 동작은 번개처럼 빨랐다.
류진은 앉은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손버릇이 개 같은 인간인데 술까지 들어갔으니 오죽하랴.
이만하면 오래 참은 셈이었다.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구르는 술잔을 응시했다.
“나는… 당신이 시키는 일은 할 거야. 그게 권주혁을 망하게 하는 길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안 될 거야. 절대로, 당신이랑 똑같은 인간쓰레기는 안 될 거라고.”
인간쓰레기. 신해범은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 네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 누군데.”
“당신도 나한테 바라는 게 있잖아. 이건 거래야.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감사해야 할 이유 없어.”
류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또 뭐가 날아올지 궁금했다. 주먹이나 발길질이면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 하신성의 커트 나이프가 날아올 수도 있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얼마나 폭력에 무감각한지 알았다. 아마 사람을 죽여도 아이고 실수, 하고 뒤돌아서서는 다음 날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신해범은 마음이, 아니 뇌가 고장 난 인간이었다.
“정류진. 눈 떠.”
신해범의 목소리는 지척에서 들렸다.
“눈 뜨라고.”
류진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신해범이 시키는 대로 하면 곧장 귀뺨을 얻어맞을 것 같았다.
머리 위에서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마음에 들어.”
신해범의 손이 다가왔다. 손바닥이 뜨겁다. 류진은 그를 피해서 얼굴을 돌렸다.
“방금 그런 게 좋은 대사야.”
무엇이?
류진은 혼란스러웠다.
살벌한 분위기를 조장했다가, 별안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신해범은 정말로 사이코였다.
강한 힘이 멱살을 끌어당겼다. 류진은 눈을 부릅떴다.
신해범의 축축한 혀가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우… 으…!”
류진은 신해범의 무게를 당해 낼 수 없었다. 바닥을 짚은 팔이 덜덜 떨리다가 팔꿈치가 꺾였다. 뒤로 홱 넘어가는 류진의 뒤통수를 신해범의 큰 손바닥이 받쳤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꺼져.”
류진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꺼지라고!”
큰소리에 움츠러들 상대가 아니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헐렁한 옷이 구겨져 올라갔다. 뜨거운 손바닥이 가슴팍과 배, 옆구리를 더듬었다. 신해범은 노골적으로 젖꼭지를 건드렸다. 류진은 신해범의 웃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개자식이… 꺼져!”
신해범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 하신성에게 귀를 찢긴 분풀이였다.
“비키라고!”
류진은 신해범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발버둥 쳤다.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이 신해범의 뺨을 갈겼다. 제대로 들어갔지만, 신해범은 아파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소를 거두지도 않았다.
류진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 신해범은 취해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신해범의 손길에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류진의 얼굴에 절망감이 번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으며 신해범이 말했다.
“너는 나처럼 될 거야.”
저주처럼 들렸다.
“내가 용의 목을 물어뜯으면, 너는 그 내장을 파헤치고….”
류진은 눈을 깜박였다. 신해범은 취한 게 아니었다. 미친 거였다.
“나눠 먹는 거야. 머리부터 꼬리까지, 비늘 하나까지 남김없이, 전부.”
수갑 소리가 들렸다. 신해범이 특수 공무원 신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양손이 묶여 머리맡에 고정되었다. 소리를 지르자 팬티가 입 안에 쑤셔 박혔다. 류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해범의 두 손이 류진의 발목을 붙잡아 벌렸다. 훤히 드러난 치부에 류진은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해범에게 붙잡힌 발목이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류진은 미친 듯 발길질했으나 오금이 신해범의 어깨에 걸쳐지고 하반신이 허공에 들렸다.
뜨거운 손이 볼깃살을 주무르다 좌우로 벌렸다. 신해범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응시했다. 구멍 입구에 엄지를 가져다 댄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눌렀다.
“우…!”
류진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신해범은 쯧, 혀를 차고 윤활제가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아무거나 주워 들고 보니 술병이었다.
신해범이 집어 든 물건을 본 류진의 동공이 확장됐다. 류진은 미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술은 안 된다.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신해범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성교를 위한 용도가 아닌 뻑뻑한 구멍에 좆을 들이밀어 걸레짝을 만들어 놓은 미친놈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류진은 울기 시작했다. 공포가 전신을 압박했다.
차라리 죽여. 내가 그렇게 싫으면 죽여 버려. 이렇게 괴롭히지 말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눈물이 나왔다.
신해범이 병을 거꾸로 들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던 술이 쏟아져 류진의 성기와 배, 가슴까지 적셨다. 엉덩이 사이도 젖었다.
지독한 술 냄새에, 신해범의 로션 향이 섞였다.
그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손에 바르던 로션 냄새였다.
류진은 턱을 바르르 떨었다.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구멍을 젖혀 벌리는 신해범의 손가락 감촉이 생생했다.
안으로 들어온다. 길고 굵은 손가락이. 손가락에 도드라진 마디마디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그 일련의 과정을 훌쩍 뛰어넘고 싶었다. 류진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이제 됐잖아, 그만하라고, 안 그래도 아프니까 그만 쑤셔 대고 네 좆 처박으란 말이야! 흔들고 쑤시고 싸고 끝내라고!
“힘 풀어.”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자기 어깨에 걸쳐진 류진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곧 허벅지로 옮겨 갔다.
“힘 빼라고… 나무토막 같잖아.”
허벅지를 주무르던 손이 성기로 향했다. 체모를 헤치고 들어와 살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강간마들은 왜 하나같이, 내가 발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만져 댈까. 자기가 만지면 다를 거라고 생각하나.
류진은 기둥을 훑고 귀두를 문지르며, 어떻게든 자극시키려는 신해범의 손을 응시했다. 그의 손안에서 자신의 모든 신체 부위는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류진이 젖은 눈으로 노려보자 신해범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고자 새끼.”
류진은 그의 턱주가리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힘 안 빼면 찢어진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류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너무 아프고, 아파서….
“힘 좀 빼라고….”
신해범은 류진의 엉덩이를 쥐고 흔들었다. 공중에 뜬 마른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고집은.”
신해범은 고개를 숙여 괴로워하는 류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와 이마에 맺힌 식은땀. 잔뜩 찌푸린 눈썹. 꼭 감은 두 눈. 두 뺨을 적시는 눈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윽윽거리는 정류진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오금을 잡고 다리를 더 높이 올렸다. 성기를 머금은 구멍이 세로로 벌어졌다. 신해범은 무게를 실어서 처박았다. 입이 막힌 류진이 고개를 마구 젓자 짧게 자른 머리가 바닥에 흐트러졌다.
신해범은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땀으로 축축한 류진의 이마를 만졌다. 젖은 앞머리를 젖히고, 관자놀이의 흉터를 찾았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마음에 들어….”
신해범이 중얼거렸다.
류진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제 무릎에 입 맞추는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궁금했다. 당신이 처박을 때마다 걸레짝이 되는 구멍? 아니면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네가 좋아, 정류진.”
좋겠지, 아주 좋아서 미치겠지. 자기 내키는 대로 휘두르고, 갖고 놀 수 있는 상대가 있으니 좋아 죽겠지.
류진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 반항적인 눈빛에 보답하듯 신해범은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도저히 지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박고 흔들고 싸질러 댔다.
류진은 직장으로 흘러드는 정액을 느끼고 주먹을 쥐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쉬지 못해서 그렇다. 류진의 눈이 아슬아슬하게 뒤집힐 때마다 신해범은 그 얼굴에 술이며 물을 마구잡이로 끼얹었다. 기절조차 못 하게 했다. 류진은 그 무자비한 행위에 오히려 감사했다. 자신의 두 뺨을 적신 액체가 눈물인지, 뭔지 구분하지 못할 테니까.
마침내 신해범이 사정을 마치고 빠져나갔을 때,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 조각이 빠져나갔을 때, 류진은 안심했다. 신해범이 허벅지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입맞춤에 가까운 행동을 했을 때는 수갑도 풀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찢어진 구멍에서 피와 정액이 섞여서 흘러나왔지만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신해범은 수갑을 잡아당겨, 다리를 벌린 채 쓰러져 있던 류진이 자기 앞으로 엎어지게 만들었다.
“아, 악!”
류진은 개처럼 엎드린 자세가 수치스러웠다. 그것도 신해범의 아랫도리가 코앞에 있다면. 어떻게든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신해범의 손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낮은 목소리가 종용했다.
“입 벌려.”
발기한 좆이 눈두덩과 뺨에 비벼졌다. 류진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머리카락이 붙잡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두툼한 귀두가 굳게 다문 입술을 꾹 눌렀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버텼다. 뒤통수에 가해지는 힘이 세졌다. 머리 가죽이 통째로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말 좀 들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신해범은 다른 쪽 손으로 류진의 목을 움켜잡았다.
“뼈 틀어져야 정신 차릴래?”
공포에 질린 입술이 벌어졌다. 뭉툭한 귀두가 곧장 진입해 왔다. 순식간에 목구멍까지 꽉 들어찼다. 뜨겁고 단단한 기둥이 입 안을 찌르고 휘저었다. 류진은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만 같았다.
숨을…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코와 뺨에 까칠한 체모가 비벼졌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신해범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류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또한 어떤 테크닉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손을 놀렸다.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고개를 뒤로 젖혀 목구멍 안으로 정액이 흘러 들어가게 만들었다. 류진의 입천장과 혓바닥에 신해범의 정액이 엉겨 붙었다.
신해범은 허리를 흔들었다. 류진은 울면서 두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손끝이 찢어져 피가 번졌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정액이 류진의 입술 밖으로 흘러넘쳤다. 두드러진 목빗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침내 신해범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성기를 류진의 눈꺼풀과 뺨에 비볐다.
신해범이 손바닥을 펼쳤다. 류진의 뽑힌 머리카락이 허공에 날렸다.
“아…!”
손만큼이나 큰 발이 어깨를 밟아 밀었다. 류진은 뒤로 쓰러졌다. 힘없이 늘어진 몸 위로 신해범이 올라탔다. 그는 류진의 다리를 벌리고 양손으로 골반을 붙잡았다. 허리를 허공으로 띄웠다. 찢어져 피를 흘리는 구멍 입구에 또다시 귀두를 가져다 댔다.
아까보다는 진입이 쉬웠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그러나 받는 쪽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연약한 부위의 상처가 다 틀어져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와중에 재차 쑤셔 박히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 흑! 아아… 악!”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입 안으로 파고드는 긴 손가락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류진은 피를 머금고 기절해 버렸을 터였다.
류진은 눈을 깜박였다. 거칠게 움직이는 신해범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덜덜 떨렸다.
“뭐야?”
류진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움직였다. 신해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픽 웃으며 류진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취해서 그렇다.
지금 신해범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잔인했지만, 그렇기에 내비치는 인간적인 빈틈도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였다.
뒤통수가 벽에 마구 부딪쳤지만 류진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신해범의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땀이, 류진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류진은 신해범의 뺨을 더듬었다. 짐짓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왼쪽 귀의 상처, 하신성이 찢어 놓은 그 상처를 힘껏 쥐고 잡아 뜯었다.
“흑!”
류진은 천장과 바닥이 뒤집혔다고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신해범의 팔꿈치가 턱을 후려친 뒤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류진은 피가 뚝뚝 흐르는 상처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신해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았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데 익숙한 사람 특유의 인내심이 부릅뜬 두 눈에서 타올랐다. 그건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지금까지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 이 새끼.”
신해범이 으르렁거렸다. 뜨거운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굴속의 맹수가 대가리를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류진은 주춤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지 않기 위해 자신의 멍든 허벅지를 마구 쥐어뜯었다.
“아, 아….”
놀라서 내뱉는 신음이 아니었다. 두려움도 아니었다. 드디어 저 개새끼에게 한 방 먹였다는 쾌감이 류진의 척추를 강타했다.
지금 도망쳐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꼼짝없이 죽는다. 신해범에게 살해당한다.
류진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복도에서 몇 번이나 고꾸라졌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일어날 힘도 없으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움직였다. 류진은 별관 뒷문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렸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신해범의 손이 뻗어 와 머리칼을 움켜잡을 것 같았다.
마침내 복도를 벗어났을 때 류진은 지금 자기가 맨발이고, 하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친 게 없으며, 엉덩이 사이에서는 덩어리진 피와 정액이 흘러내리는 상태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런 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류진은 댓돌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머리가 흙바닥에 처박히고, 입 안으로 모래 먼지가 날려 들어왔다. 어깨와 팔꿈치, 무릎이 흙바닥에 마구 쓸렸다. 상관없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신해범에게서 벗어났다.
류진은 호월루 별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목 무성한 수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키 큰 나무가 잔뜩 우거져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티셔츠 자락을 끌어당겨 얼굴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 내도 비릿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신해범의 냄새가 공중을 떠다녔다.
수없이 침을 뱉었다. 입 안으로 손가락으로 집어넣어 목구멍까지 휘저었다. 한번 토해 내고 나면 이 개 같은 느낌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류진은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연거푸 구역질했다. 약간의 토사물이 위액에 섞여 나왔다. 목구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뱉어 낸 객담에 피거품이 끓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류진은 엉금엉금 기어가 스프링클러를 열었다. 안개처럼 분사되는 물줄기에 얼굴을 닦고 입을 헹궜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물줄기에 섞여서 뚝뚝 흘러내렸다. 머리부터 어깨, 가슴팍까지 온통 젖었다.
류진은 오므린 손바닥에 물을 받아 혹사당한 엉덩이로 가져갔다. 안까지 깨끗하게 씻어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스스로의 뒤를 쑤시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차라리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세상을 쓸어 버릴 기세로 퍼붓는 폭우와 천둥 번개가 있다면, 그러면 마음 놓고 소리 내어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진은 바닥에 엎어져 목 놓아 우는 대신 나무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양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섰다. 한 걸음 내딛자 발이 비명을 질렀다. 별관에서 도망칠 때 문턱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발가락들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류진은 절뚝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신해범이라면 뒤쫓아 나오고도 남았다. 지금쯤 뇌까지 분노로 타오르고 있을 터, 잡히면 곱게 죽지도 못할 것이다. 류진은 계속 움직여야 했다. 더 멀리 도망가야만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숲속을 달빛에 의지해 걸었다.
포장된 길이 아니기에 발바닥에 온갖 것들이 밟히고 뭉개졌다. 흙과 모래, 낙엽과 나뭇가지, 죽은 벌레 사체, 짐승의 배설물까지… 류진은 가급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걸을 때마다 얻어맞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몇 번이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하지만 류진은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고, 또다시 일어났다. 이대로 쓰러져 의식을 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둠 속 어딘가에서 뻗어 올 신해범의 손을 상상하면 멈출 수 없었다.
류진은 산 아래라고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갔다. 어떻게든 내려가다 보면 길이 나올 테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면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누군가’가 기꺼이 온정의 손길을 내밀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좋았다. 설령 악마가 나타난다 해도, 저 뒤에서 미쳐 날뛰는 신해범보다는 나을 터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류진은 마침내 매끈한 아스팔트를 밟았다.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였다.
됐다. 여기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고개를 든 류진의 시야를 새하얀 두 개의 불빛이 덮쳤다. 요란한 경적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눈앞이 하얘지고 세상이 흔들리는 순간, 파르테논 신전의 형상을 한 거대한 프런트 그릴이 지척에 다가드는 최후의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류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핸들을 잡은 두 손이 떨렸다.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현실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들었다.
사람을 칠 뻔했다.
권세혁은 안전벨트를 풀고 뛰어내렸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지독했다.
“야!”
고성이 튀어나왔다.
“너 뭐야?!”
권세혁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속도를 냈다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상대를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다면, 그래서 1초라도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눈앞이 아득했다.
지난 이틀간, 권세혁은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숙부의 노골적인 실망과 질타가 날아왔다.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권세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숙부, 저 호월루에서 마약이 든 담배 케이스를 잃어버렸어요.
잊어버리려고 했다. 잊으려 할수록 불안은 커져 갔다. 그리하여 권세혁은 결정했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라지 않겠다고. 내 일은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고.
권세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을 마치고 행동을 개시했다. 고향의 외조부로부터 선물 받은 롤스로이스 팬텀이 유일한 동료였다. 권세혁은 겁나지 않았다. 고대 신전을 연상시키는 크롬 프런트 그릴을 보고 있으면 용기가 났다.
그러니까 이건, 교통사고가 날 뻔했다는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권세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고 경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려질 거라고. 왜 그 시간에 호월루에 가셨습니까? 예약도 없이. 잃어버린 물건이라면 가게에 전화해도 됐을 텐데요? 그런데 뭘 잃어버리셨습니까?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자기가 누구 인생을 망칠 뻔했는지.
권세혁은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죽으려면 방구석에서 곱게 죽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거 놔.”
목소리가 낯익었다. 남자는 권세혁의 손을 뿌리치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가로등 불빛에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권세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멍든 뺨, 찢어져 피가 맺힌 입술은 둘째 문제였다. 남자는 전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헐렁한 티셔츠 한 장만 달랑 걸쳤다.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권세혁은 남자의 하반신으로 향하는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저기요….”
마른침이 넘어갔다.
“강도라도 만났어요?”
“나 기억 못 해?”
“네?”
“지난번에 만났잖아. 호월루 정원에서.”
“아!”
그때 남자는 그늘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희고 갸름한 턱과 허스키한 목소리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똑같았다. 권세혁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혼자야?”
“아, 네. 오늘은….”
무심코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권세혁은 허둥지둥 외투를 벗었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남자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남자는 움찔했지만 이쪽의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자존심보다 수치심과 추위가 먼저일 테니까.
코트를 둘러 주고 물러서는데, 남자의 맨발이 눈에 띄었다.
“아, 진짜….”
“왜?”
“왜 소리가 나와요, 지금?”
권세혁은 구두를 벗었다. 그는 자기 신발을 아스팔트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겨 놓고 한 발짝 물러나 섰다.
류진이 권세혁의 얼굴과 신발을 번갈아 보았다.
“뭐 하는 거야?”
“그거 신어요. 사이즈 달라도, 끈 묶으면 대충 벗겨지진 않을 거예요.”
“…….”
“양, 양말은 못 벗어 줘요!”
류진이 고개를 젓자 권세혁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킹콩 같았다.
“뭐 하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이런 데서 뭐 하는 건데요!”
“네가 아까 말했잖아.”
“네?”
“강도당했느냐고.”
“진짜예요?”
“가는 길이야, 오는 길이야?”
“네?”
“호월루 오는 길이었으면 태워 줘.”
“아, 네….”
권세혁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담배 케이스를 주웠느냐고 물어봐야 한다는 걸.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남자가 진짜로 강도를 당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많이 다치고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 호월루 가도 되겠어요?”
“응.”
“난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남자는 권세혁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기가 신세 지는 상황에서도 쌀쌀맞았다. 권세혁은 애써 남자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많이 다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 본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권세혁은 조수석 언더 트레이를 가리켰다.
“거기 먹을 것 좀 있어요.”
“필요 없어.”
“단거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비싼 차 더럽혔다가 무슨 덤터기를 쓰려고.”
권세혁은 갓길에 정차해 류진이 앉아 있는 조수석 밑으로 손을 뻗었다.
“뭐…!”
“자요.”
큼지막한 판 초콜릿이 류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이런 걸 가지고 다녀?”
“비상식량이에요. 부족하면 말해요, 다른 데도 많으니까. 차 뽑을 때 옵션 추가해서 수납공간 왕창 늘렸거든요.”
“이런 거 숨기려고?”
“제가 비밀이 많은 남자라서.”
“지랄하네.”
“생명의 은인에게 말이 심하시네요.”
류진은 권세혁이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남들 눈 되게 신경 쓰네.”
“신경 쓰이죠. 직업인데.”
“직업?”
“사람들 관심으로 먹고살잖아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숙부도, 어머니도 입을 모아 외쳤다. 중요한 건 대중의 인지도라고. 대중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사소한 실수가 평생 발목을 잡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수습하려고 용쓰고 있잖아.
권세혁은 초콜릿 끄트머리를 톡, 잘라 입에 넣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이름 알려 줄래요?”
“그렇게 알고 싶어?”
“이렇게 다시 만난 거 보면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상황에서 퍽이나.”
권세혁은 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좀 그렇긴 하네요.”
혀 위에서 녹는 초콜릿은 생각만큼 달지 않았다. 오히려 쌉쌀한 맛에 가까운 다크 초콜릿이었다. 어느새 류진은 양손으로 초콜릿을 잡고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애매한 표정을 지은 권세혁이 생수를 건네주었다.
“배고팠나 봐요.”
“오래 헤맸어.”
말이 뚝뚝 끊어졌다.
“춥고. 발도 아프고. 어두워서 앞도 잘 안 보이고….”
“정말 죽을 셈으로 뛰어든 건 아니죠?”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초콜릿만 먹었다. 권세혁은 그런 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도로 핸들을 잡았다.
“출발할게요.”
권세혁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자기 신분을 감추려 하는지, 정말 숲에서 강도를 당한 건지, 정원에서 뭔가 찾아낸 물건이 없는지…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초콜릿 껍질을 손에 든 채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이 처연해서, 많이 지쳐 보여서.
“과자 더 줄까요?”
“…….”
“저기요?”
권세혁은 조수석을 곁눈질했다. 남자는 어느새 카시트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
한번 의식하자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권세혁은 가로등 밑에 정차하고,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하얀 불빛을 반사하는 속눈썹 그림자가 길다.
“저기요….”
손을 뻗었지만 어깨를 잡아 흔들지는 못했다.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권세혁은 히터를 켰다. 동생을 위해 가져다 놓은 담요가 뒷좌석에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어린이용 담요였으나 지금은 이것뿐이었다.
권세혁은 담요로 남자의 몸을 덮어 주었다. 남자는 눈꺼풀을 떨며 신음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신해범은 화장실로 뛰어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거울에 비춰 보았다. 최유신이 꿰매 놓은 실밥이 죄 터져 버렸다. 피복재가 엉겨 붙은 살점이 너덜거렸다. 귀는 물론 얼굴과 목, 헐렁하게 풀어 놓은 셔츠 깃까지 온통 피 칠갑이었다.
선반을 뒤져 약품 상자를 찾았다. 거친 손길에, 물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개의치 않았다. 지혈제를 찾아 뿌리고 밴드를 덕지덕지 붙였다.
찬물을 틀어 더러워진 얼굴을 씻었다. 술기운이 달아나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신해범은 차 키를 움켜쥐고 달려 나가는 대신 거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호월루에서 정류진이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야 딱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 신예나는 자신의 끄나풀이었다.
신해범은 방을 둘러봤다. 난장판이었다. 그는 오래된 휴대폰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딱 두 번 갔다.
- 연지동입니다.
“정류진이 도망갔어.”
- 뭐?
“직원들한테 말하지 말고 조용히 찾아봐. 난 근처 돌아볼 테니까.”
- 알았어. 나중에 설명해.
신해범은 바닥에 뒹구는 커트 나이프와 데저트 이글을 챙겼다. 정류진이 이 좋은 물건들을 갖고 튀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 정도로 무서웠나? 그러면 애초에 이딴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신해범은 복도 불을 켰다. 정류진의 도주로가 드러났다.
신해범은 벽과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따라 걸었다. 후문으로 나간 것 정도는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 꼴로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일 없으니까.
호기심이 분노를 앞섰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피 뚝뚝 흘리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호월루 안이라면 신예나가 찾아낼 테고, 벗어났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밤에, 이 첩첩산중에 맨몸으로 뛰어 봤자 벼룩이었다.
신해범은 정류진이 산길 어딘가에 쓰러져 있다는 데 한 달 월급을 통째로 걸 자신이 있었다. 진치우와 함께 있었다면 분명 내기를 했을 것이다. 넌 삼십 분? 난 십오 분. 그 안에 정류진 찾아내서 조져 버린다.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밝혔다. 미세한 진동이 카시트를 타고 전해졌다. 신해범은 룸 미러에 매달린 하트 모양 키 링을 툭, 건드렸다. 옛날 일이 떠올랐다.
작전명 토끼 사냥.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일가족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용의자가 토착 조직폭력배로 일대를 주름잡는 세력가였던 탓에 지역 경찰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수사 기관의 비리에 분노한 주민들의 내부 고발로 세상에 알려졌다.
총통은 이 사건을 중앙 정부에 대한 지방 호족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격분한 ‘철혈일성’은 즉각 중앙 헌병대를 파병했다.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장기 임무였고, 일반 시위대가 아닌 무장 조폭이 진압 대상이라 헌병대는 술렁였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누구라도 기피할 만한 일이었다.
신해범은 한사코 작전에서 빠지려는 최금호를 대신해서 자원했다. 그가 움직이자 진치우와 기우희가 따라왔고, 결과적으로 파오훼이 소대 전원이 참여했다. 그렇다고 감사의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이제야 너희들 분수를 알았구나, 하는 분위기였다.
자존심 상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해범은 이것이 총통의 명령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건 기회였다.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작전에 참여하고 범죄자를 때려잡았지만, 이번만큼 피가 끓었던 적이 없었다.
총통 보좌관 권주혁이 직접 나와 군인들을 독려했다. 힘없는 주민들을 수탈하는 토착 조폭을 뿌리 뽑는다는 슬로건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의감에 불을 붙였다.
지역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했다. 노인과 아이들은 근사한 전투복과 신식 무기를 갖춘 군인들을 영웅으로 생각했고, 혈기왕성한 젊은 부하들은 마을 여자들과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신해범은 아버지가 조폭에게 맞아 죽었다는 여자아이로부터 하트 모양 키 링을 선물 받았다. 어린 숙녀의 호의를 무시하기 싫어서 받아 두었다. 돌아가는 날 과자 한 박스와 함께 돌려줄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키 링은 돌려주지 못했다. 놈들의 근거지를 파악하고 도주로를 차단하여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은 날, 토끼 사냥 작전의 마지막 날, 수세에 몰린 놈들은 민가를 습격했다.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아기마저 무차별 총질과 칼질을 피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군바리’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였다.
룸 미러에 비친 두 눈에 어둠이 들어찼다. 어느새 신해범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다.
권세혁은 잠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름과 나이, 다니는 학교나 가족 관계까지도. 지시만 내리면 최대 삼 일, 최소 반나절 안에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이 자기 눈앞에 도착할 터였다. 임 비서는 그러라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숙부였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숙부인데, 누군가의 뒷조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체할 리 없었다.
권세혁은 남자의 손에서 초콜릿 포장을 빼냈다. 구겨서 차량용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표정이 멍했다.
“아 저기, 그쪽이 너무 곤하게 자서.”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별안간 불쑥 말했다.
“너 떨 하냐?”
“네?”
남자의 시선이 재떨이에 꽂혀 있었다. 권세혁은 허둥지둥 뚜껑을 닫으려고 했으나 남자의 손에 가로막혔다. 벌컥 고성이 튀어 나갔다.
“왜 그래요!”
“놔 봐.”
“뭘요, 왜요. 이거 그냥 쓰레기통이에요.”
“넌 담배랑 떨 냄새도 구분을 못 하냐?”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등신아, 이런 거 빨았으면 뒤처리를 확실하게 해야지. 냄새가 이렇게 나는데 아무도 말 안 해 줬냐?”
권세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뒤처리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챙겨 주던 버릇이 들어서.
눈에만 안 보이면 괜찮은 줄 알았다. 잠깐 재떨이 뚜껑을 연 것만으로도 냄새가 퍼질 줄 몰랐다.
권세혁은 관자놀이에 솟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다. 떨 냄새를 눈치채는 남자라면, 담배 케이스에 뭐가 들었는지도 알 터였다.
“당신, 내 물건 가지고 있죠.”
“무슨 물건.”
“떠보지 마요. 나 다 알고 온 거니까.”
“똑바로 말해. 무슨 물건?”
권세혁은 한숨을 쉬었다.
“담배 케이슨데, 스텐이고 겉에 긁힌 자국이 많아요.”
“오래됐어?”
“네?”
“오래된 물건이냐고.”
권세혁은 어물어물 대답했다.
“네, 뭐, 아버지가 쓰던 물건이라서.”
류진은 권세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게 권일혁 총통이 쓰던 물건이었다니.
“옛날에 고향 집 내려오셨을 때 두고 가셨어요. 저 어렸을 때.”
“안 물어봤어.”
“알려 줘도 불만이죠?”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찾아서 다행이네.”
“아, 역시.”
“왜 안심하냐?”
“그야 내가 그쪽 구해 줬잖아요. 일대일 쌤쌤인데, 우리 서로 좋게 해결하죠.”
“이 새끼 봐라. 내가 뭐 하는 놈인 줄 알고?”
“호월루의 정원관리 단기 알바생요. 그리고 나 그쪽이 나쁜 사람 아닌 거 알아요.”
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 나 모르잖아.”
“왜 몰라요? 이제 친군데.”
류진은 어이가 없었다.
“너 약 빨고 돌았냐?”
“안 돌았고요, 우연이 세 번 겹치면 인연이라잖아요. 그런데 우리 벌써 세 번 겹쳤어요. 호월루 정원에서, 여기 도로에서, 그리고 내 담배 케이스. 이거 진짜 뭐 있는 거 같거든요.”
“미친놈아, 너 이딴 식으로 여자 꼬시면….”
“아니 왜 그런 쪽으로 받아들여요? 설마 자기가 여자라고 생각해요?”
뻑 소리가 났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권세혁이 충격받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지금 날….”
“그래 쳤다. 한 번만 더 지랄하면 진짜 죽여 버린다.”
“진짜 잡혀가고 싶어요?!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잡아가, 잡아가. 난 너 약하는 거 폭로해야지.”
“아 진짜!”
“부탁인데 생각을 좀 하고 말해라. 너랑 나, 둘 중에 누가 더 잃을 게 많겠냐?”
권세혁이 입을 다문 건 남자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패기와 겁 없음이 가상해서였다. 물론 남자는 자기가 ‘쫄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 의기양양한 표정을 봐라.
“등신이 얻다 대고 까불어.”
“저기요, 내 말 좀 들어 봐요.”
“뭐.”
“우리 서로 윈윈 할 수 있어요. 그쪽 아직 어려 보이는데, 일하기 힘들죠? 알겠지만 난 충분히,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한데….”
“원조?”
“잠깐만요. 지금 다른 표현 생각하고 있어요.”
“등신이 뭐라는 거야. 원조가 원조지.”
“그럼 그냥 그렇게 해요! 원… 경제적 원조. 내가 그거 해 줄게요. 그러니까 내 물건 돌려주고 입에 지퍼 채워요.”
류진은 권세혁을 응시했다. 무슨 이런 호구, 등신이 다 있나 싶었다.
이게 정말 권일혁의 아들이라고? 겉으로 보이던 모습은 그냥 다 옷발, 머리발, 명품발이었어?
한심했다. 자조적인 우울함이 몰려왔다. 이런 호구 등신의 뒤통수를 치겠다고 칼을 가는 신해범이나, 그놈 장단에 좋다고 춤추는 자기나 똑같이 한심해 보였다.
아니, 아니다.
저건 분명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이다.
그 신해범을 일약 국민 스타로 만든 권주혁의 서포트를 받는 왕자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MVP였다. 지금 저렇게 고자세로 나오는 건, 자기 약점을 쥔 상대를 어떻게 설득하고 회유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자기 목적을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꿀 것이다.
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류진은 권세혁의 코트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재질에 박음질도 튼튼했다. 상표를 까 보면 분명 고가의 명품일 좋은 옷이었다. 그리고 류진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돈은 필요 없어.”
권세혁은 놀란 표정이었다. 저것도 다 연기라고 생각하니 가증스러웠다.
“빽도 필요 없고.”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너 약하는 이유가 뭐야?”
권세혁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나한테 관심이 생겨요? 생각만큼 완벽한 인생이 아니라서?”
“대답 안 해?”
“대답하면 내 물건 돌려줄 거예요?”
“약쟁이 주제에 한마디를 안 지네.”
“그러는 그쪽은요. 보통 사람들이 냄새만 맡고 떨인지, 담배인지 구분해요? 당신도 아니까 알아본 거잖아요.”
“난 떳떳해.”
허세가 아니었다. 류진은 지금 당장 풍기대로 끌려가 머리털을 뽑혀도 당당할 수 있었다. 절대로 <화이트 스완>에서 판매하는 상품에는 손대지 않았다.
하신성이 말했다. 약물을 둘러싼 공생 관계에서는 판매책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중독자들은 결코 조사에서 자신의 판매책을 불지 않았다. 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누구도 자신에게 약을 팔지 않을 테니까.
‘초범은 거의 집유나 벌금으로 끝나. 그런데 걔들, 나와서 가장 먼저 하는 게 공급책 찾아가서 약 사는 거야.’
하신성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잊을 수가 없거든. 끊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해. 그러니까 너 혹시 궁금하다고 물건에 손대지 마라. 진짜 훅 간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잊어버렸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던 것도 같다. 만약, 누군가가 약을 팔며 죄책감을 느꼈느냐고 묻는다면… 감히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겠다. 내가 빼앗긴 것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권세혁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 얼마나 남았어?”
“그런 걸 왜 물어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공급책은 수시로 갈아타는 게 좋아. 오래 거래해 봤자 의리 같은 거 없는 바닥이거든. 내가 팩에다가 다른 가루 퍼 담는 쓰레기들 많이 봤어. 그러면서 야금야금 가격이나 올리고. 깎아 달라고 하면 거지 취급하고. 뭐 너야 그런 적 없었겠지만….”
무거운 침묵 끝에 권세혁이 물었다.
“그쪽은 약 어디서 구하는데요?”
“그런 질문에 대답하긴 힘들지.”
권세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자기가 내 공급책이 되려고?
“어쩔래?”
“잠깐만요. 생각 좀.”
남자가 비웃었다.
“잔머리 굴려 봤자 결론은 안 바뀔 텐데.”
“좀 조용히 해 봐요!”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감추고 남의 치명적인 비밀을 파고들려는 상대는 분명 위험했다.
남자가 진짜 판매책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거래를 트자면서 속으로는 또 다른 꿍꿍이를 감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저 제안이, 저 빌어먹을 제안이 결코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권세혁은 신해범 풍기 교육대장을 생각했다. 그라면 어떻게 판단할지 궁금했다. 숙부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범국민적으로 인기가 많은 신해범은 이제 막 정계에 발을 내디딘 자신이 벤치마킹하기에 최적의 롤 모델이었다.
“뭘 그렇게 오래 고민해?”
남자가 말했다.
“그냥 너 끌리는 대로 해.”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거든요.”
“네가 복잡하게 생각해서 그래.”
남자의 손이 어깨를 짚었다. 손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우리 이제 친구잖아.”
“…….”
“아냐?”
권세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등쳐 먹을 생각이라면 관둬요. 이 바닥 시세 모르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권세혁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래요. 우리 이제… 친구니까.”
사실은 처음 봤을 때부터 끌렸다. 남자가 호월루 정원의 나무 그늘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아니, 깊이가 있는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았다.
어쩌면 담배 케이스를 떨어뜨린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숙부의 인맥이 아닌, 어머니의 바람대로가 아닌, 오직 자신의 뜻으로 맺은 인간관계. 이 남자가 있으면 매정하게 연락을 끊은 고교 동창들은 미련 없이 잊어버릴 수 있었다.
권세혁은 조수석을 향해서 활짝 웃었다.
“이제 말 놔도 되지? 친구니까.”
“반말은 괜찮은데, 친구는 싫어. 형이라고 해.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아.”
“으.”
“표정이 왜 그래? 야, 원래 친한 사이일수록 이런 거 확실히 해야 나중에 안 싸워.”
남자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이 재미있다는 게 신기했다. 권세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까짓거. 내가 형님 대접 해 준다.”
후문 차단기가 올라갔다. 검은 레인지로버가 튕기듯 달려 나갔다. 흙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신해범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제대로 지혈되지 않아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꾹 눌렀다.
수건 하나를 챙겨 나와서 다행이었다.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커트 나이프와 데저트 이글, 신해범 소유의 리볼버가 요란하게 부딪쳤다.
대형 차량에게 한없이 불친절한 길이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길 폭이 좁은 데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적이 드문 길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려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밟혀 부러진 잔가지와 발자국이 선명했다. 운이 좋았다. 만약 비라도 내렸으면 저 흔적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이 덩치는 빗길에 미끄러져 나무 기둥에 헤드를 들이받을 확률이 높았다.
신해범은 핸들을 잡은 채 피식피식 웃었다. 어두워서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이 길을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이곳은 철저히 호랑이의 필드였다. 이 엄청난 부지를 사들이는데 고작 지도와 위성사진 몇 장으로 냉큼 결정했을 줄 아느냐.
얼마 안 가서 큰길이 나왔다. 신해범은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을 넘었다. 호월루로 가는 차량은 거의 끊겼을 시점이었다. 이번에도 신해범은 승리를 예감했다. 정류진이라면 분명 이 길을 택했을 터였다. 몸이 아픈 데다 별다른 이동 수단이 없으니. 험하고 어두운 산길보다는 가로등이 밝고 평탄한 포장도로가 백번 나았다. 지나가는 차량이 있다면 요행을 기대할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 이 시간, 호월루의 2부 영업이 시작되어 대부분의 예약 손님이 착석을 마친 지금, 정류진을 구원한 요행이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레인지로버가 속도를 냈다. 좌우 갓길을 빠르게 훑으면서 내려왔다. 신해범은 여유 있게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정류진을 치어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놀라게 만들고 싶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랗게 질리는 얼굴을 상상하니 등줄기가 찌릿찌릿했다.
승리를 예감하며 액셀을 세게 밟은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신해범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중앙 차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레인지로버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량과 충돌할 뻔했다. 쇳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불꽃이 튀었으니 실제로 긁었음이 분명했다. 신해범은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가속이 붙은 탓에 한참을 더 가서야 가까스로 멈추었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신해범은 진치우처럼 차에 이름을 붙여 주고 애지중지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로로 길게 난 스크래치를 보고 허허 웃을 대인배도 아니었다. 그는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차량의 후미등을 노려보았다. 근본적인 의문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왜 안 세우는 거야, 저 새끼?
호랑이는 어둠 속에서 숨죽였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이대로 정류진을 쫓느냐, 느닷없이 튀어나온 불청객을 추격하느냐.
사냥꾼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목격자는 없지만, 그보다 더 명백한 증거인 블랙박스가 있었다. 충분히 나중으로 미뤄 둘 수 있는 문제였다. 신해범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또다시 갓길에 정차했다. 권세혁은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손과 무릎이 그야말로 달달달 떨렸다. 오늘 밤만 벌써 두 번째였다. 두 번이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초보 운전자의 신고식을 단단히 치르게 해 주려는 하늘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권세혁은 조수석을 바라봤다.
“방금 우리 주, 죽을 뻔했어.”
“응.”
“왜 세우지 말라고 했어?”
“…….”
“형 괜찮아?”
“응.”
남자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술을 파르르 떠는 모습이 기절 직전이었다.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어깨를 붙잡아 자기를 보도록 했다.
“숨 쉬어. 숨 쉬어, 형.”
“괜찮다니까.”
“오늘 진짜 왜 이러지? 무슨 저주라도 받았나.”
“…너 차는?”
“아!”
권세혁은 허둥지둥 뛰어내렸다. 존경하는 외조부의 소중한 선물이, 하얀 가로등 불빛에 끔찍한 자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권세혁은 흑, 소리를 내며 흐물흐물 쓰러졌다. 류진은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은 권세혁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아니….”
“어떡하냐. 이거 엄청 비싼 차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어깨를 쓰다듬는 손이 느껴졌다. 권세혁은 가만히 있었다. 위로하듯 가만가만 쓸어내리는 손길에 안심이 됐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뒤늦게 화가 치밀었다. 상대 차량의 번호라도 봐 뒀어야 했는데. 권세혁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쳤다.
“미친놈이, 무슨 운전을 그따위로 해!”
“그러게.”
“저런 새끼한테 면허를 왜 주냐고!”
“내 말이.”
“분명 그 새끼 취했어. 중앙선 치고 넘어오는 거 봤지? 난 진짜, 무슨 대포 날아오는 줄 알았어. 저거 딱 봐도 음주 운전이야.”
“맞아!”
권세혁은 이름 모를 운전자를 향해서 저주를 퍼부었다. 확 가드레일 박아 버려라, 불심 검문 걸려서 면허 취소 당해라.
“다 했으면 일어나. 찬 데 오래 앉아 있으면 안 좋아.”
권세혁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기가 침착해야 상대방도 안심할 것 같았다.
“형 어디 가?”
“너 야경 좋아해?”
“뭐?”
뜬금없는 질문에 뭔가 했다. 권세혁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가드레일 앞에 서서 산 아래를 보고 있었다.
“…멋지네.”
지평선 가까이 펼쳐진 야경이 보였다. 권세혁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
“형은 싫어해?”
“화려한 거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싶어서.”
“그래서 좋은 거잖아. 화려함.”
“전력 낭비야.”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거 아냐?”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차량으로 돌아갔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모습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워서, 권세혁은 자기가 남자의 운전기사처럼 느껴졌다.
오디오가 저절로 켜졌다. 권세혁은 황급히 음악을 끄려 했지만 남자는 그의 손을 막았다.
“그냥 둬.”
“이거 무슨 노래인지 알아?”
“영어 못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코트 앞섶을 여몄다.
“음악 듣는 건 좋아해?”
“아 거 질문 많네.”
“뭐라도 얘기하자. 나 아직 떨린단 말이야.”
권세혁은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사실 면허 딴 지 얼마 안 됐어.”
“차는 30년 무사고 레벨인데.”
외조부의 선물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보나 마나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할 게 빤했다. 권세혁은 과감하게 화제를 돌렸다.
“난 음악 좋아해.”
“안 물어봤어.”
“좀 받아 줘라.”
권세혁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지금 나오는 노래 말이야, 사실 금지곡이다?”
“뭐?”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가. 가사에 ‘자유’랑 ‘벽’이랑 ‘부활’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거든.”
“…….”
“옛날엔 이 정도까지 아니었는데. 류연비 사태 이후로 검열이 엄청 심해졌어. 이건 그나마 영어 노래라서 파일 구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부른 건 음원 자체가 폐기돼서 못 구해. 그 사람, 자기 홈페이지에 동영상 올리던 아마추어 싱어송라이터였거든? 조사받으러 간다고 공지 올리고 잠수 탔어.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야.”
“…….”
“징역까진 아니겠지? 그냥 노래 좀 번역해서 부른 건데. 아마 벌금 많이 나와서 몸 사리는 걸 거야.”
“…….”
“형, 자?”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적림부 들어가면 문화 예술계 규정 완화할 거야. 다 없애지는 못해도 음악만큼은 좀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외국에서는 콘서트장에서도 나오는 노랜데, 그깟 단어 몇 개 들어갔다고 금지하는 게 말이 돼? 그럼 가수들은 뭐 먹고 살아?”
“그래….”
“요새 천편일률적인 노래만 나온다고, 가수들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된다는 얘기 많이 나오잖아. 그거 다 규정 때문이야.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자꾸 그러니까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는 거잖아. 난 우리나라 음악 전성기가 류연비랑 강여준 시절이었다고 생각해. 특히 류연비는, 사생활 문제만 아니었음 정말로….”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해.”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류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울창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일 무렵, 류진이 말했다.
“차 세워.”
“그 몸으로 어떻게 걸어가. 숙소 어디야? 앞까지 데려다줄게.”
“내가 이런 차 타고 들어가면 퍽이나 좋은 소리 듣겠다.”
권세혁이 입을 비죽거렸다.
“형도 다른 사람들 눈치 보네.”
“너랑 나랑 같아?”
권세혁은 반박하지 않았다. 지금 남자는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었다. 행여 이상한 구설수에 휘말릴까 봐.
“생각을 좀 하고 살아.”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권세혁은 조수석에서 내리려는 남자의 손에 담요와 간식을 쥐여 주었다.
“먹으면서 가.”
“됐어. 다 왔는데 뭘.”
“줄 때 가지고 가.”
권세혁이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간식들을 쑤셔 넣자 남자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옷이랑 신발도 가져. 난 어디서 잃어버렸다고 하면 돼.”
“…고맙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중에 약 갖고 사기 치면 안 돼.”
남자가 픽 웃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담요를 흔들어 보이며.
“취향 한번 참.”
권세혁의 낯이 달아올랐다.
“그거 동생 거야!”
“누가 뭐랬냐? 왜 혼자 찔려서 난리야.”
“내가 언제!”
“내일 오전에 와. 점심 영업 시작하기 전에. 그때 네 물건 돌려줄게.”
권세혁이 뺨을 긁적였다.
“아, 나 내일은 좀. 스케줄 되게 빡빡해서. 사실 오늘도 잠 포기하고 나온 거거든.”
“안 돼. 내일 꼭 와야 해.”
“왜?”
류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권세혁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이유를 댔다.
“내 마음이 바뀔까 봐.”
진정 하고픈 말은 속으로 삼켰다. 권세혁, 네가 안 오면 나 신해범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조수석에 던져 놓은 휴대폰이 울었다. 전화를 받자 신예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류진이 왔어.
“어디 숨어 있었어?”
- 일단 별관으로 와. 나한테는 아무 말 안 하니까.
알겠다고 대답했다.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니 의외였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해 줄 마음은 없었다. 야밤에 좆뺑이 친 값에다 차량 수리비까지 고 알량한 몸뚱이로 받아 내야겠다. 신해범은 속도를 높였다.
신예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그는 신해범을 보자 말없이 등을 돌렸다. 신해범은 잠자코 따라갔다. 방 앞에서 신예나가 말했다.
“말로 해.”
“쟤 하는 거 봐서.”
“큰소리 나면 나 들어간다.”
“장사에나 신경 쓰지?”
“이 사달을 내 놓고 그런 말이 나와?”
신해범은 문을 열었다. 방구석에 웅크린 정류진이 보였다. 방금 씻은 듯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향긋한 비누 냄새도 났다. 반팔,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숨바꼭질 재밌었다.”
“할 얘기 있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신해범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맞은편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과 웅크리고 앉아 있는 정류진을 번갈아 봤다. 향긋한 비누 냄새를 풍기는 정류진에 비하면 자기는 엉망이었다. 머리는 잔뜩 흐트러졌고, 온몸에서 땀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했다. 핏덩이가 엉겨 붙은 귀의 상처는 어떻고.
신해범은 귓바퀴에서 너덜거리는 밴드 하나를 떼어 냈다.
“너 내가 왜 화났는지 알지.”
“돌아온 거 후회하게 만들지 마.”
“네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는데?”
신해범은 한껏 비꼬았다.
“너 튀면 애먼 사람이 다쳐. 어릴 때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워 주신 이모님 생각도 해야지.”
“나도 알아.”
“할 얘기가 뭐야?”
신해범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별거 아니면 본때를 보여 줄 셈이었다. 벌써부터 주먹이 근질거리고 아랫도리가 달아올랐다.
회색 연기가 류진의 말간 얼굴을 가렸다가 천천히 흩어졌다.
“나 권세혁 만났어.”
“그래?”
신해범은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하마터면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걔가 여기까지 태워다 줬어.”
“왜?”
“당연한 거 아냐? 길에서 헤매는 사람을 보면 당연히….”
“내가 지금 그딴 거 묻는 거야?”
신해범은 거칠게 내뱉었다.
“왜 MVP가 이 시간에 여기 있냐고. 이건 뭐, 거짓말도 현실적이어야 믿지.”
“거짓말 아냐!”
“증거 있어?”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범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표면에 긁힌 자국이 많은, 은색 담배 케이스가 그의 눈앞에 놓였다.
“이게 뭐야.”
“이거 권세혁, 아니 MVP 물건이야. 당신들이 저녁 먹으러 온 날에 정원에서 주웠어.”
“너 내가 나대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봤다.
“사람 말 좀 믿어!”
“네가 믿게끔 처신했어야지. 이제나저제나 뒤통수칠 궁리만 하고 있는 주제에.”
신해범은 자신의 왼쪽 귀를 가리켰다. 류진이 발끈했다.
“그건 당신이 먼저!”
“밖에 신예나 있다.”
“…….”
신해범은 담배를 문 채, 류진이 내놓은 케이스를 열었다. 작고 납작한 알약이 후드득 쏟아졌다. 신해범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이게 MVP 물건이라는 증거는?”
“그건….”
“없지? 이 깜찍한 새끼가 감히 누굴 속여 먹으려고 들어?”
“있어! 지금 보여 줄 수 없어서 그래.”
“말뿐인 증거는 물증이 아니라 심증이야.”
“증거 있다니까!”
신해범이 일어나려고 하자 류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걔 내일 여기 오기로 했어. 저거 돌려준다고 했거든. 그리고 이제부터 나랑 거래할 거야.”
“뭐?”
“저 약 봤을 때부터 알았어. 저거 <화이트 스완>에서 팔던 거거든. 당신도 알지? <백사자>에서 운영하는 클럽.”
신해범은 일어나려던 몸을 도로 앉혔다.
“자세하게 설명해.”
“말하자면 길어.”
“이 밤도 끝나려면 멀었지.”
자초지종을 들었다. 생각만큼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예상 밖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불쾌했다.
신해범은 자신의 계획에 쩌억쩌억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균열은 예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헛웃음이 비식비식 새어 나왔다. 신해범은 두 개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서 MVP랑 친구가 되셨다?”
“걔 좀 이상해.”
“머릿속이 꽃밭이라서 그래. 너랑 나랑은 사는 세상이 다르지.”
“보이는 거랑은 많이 달랐어.”
“그래서 마음 약해져?”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신해범의 손이 다가왔다.
“…….”
신해범은 류진의 따귀를 후려치는 대신,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심하긴.”
류진은 감았던 눈을 떴다.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코앞에 신해범의 얼굴이 있었다. 마주친 눈이 웃었다.
“그거 다 연기야.”
이죽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상냥했다.
“다 계산해서 행동하고, 말하는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에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걔 겨우 스무 살이고….”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를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럴 힘도 없을 만큼 피곤해서 그만두었다. 다만 젖은 머리카락을 젖혀 관자놀이의 흉터를 지그시 누를 뿐이었다.
“네가 왜 그런 기분 느끼는지 알아.”
신해범이 말했다.
“권주혁은 타고난 이미지 메이커야. 그 인간 전직이 기자였어. 날조, 선동 이런 일에는 도가 큰 인간이야. 알잖아? 류연비랑 곽재헌이….”
“누나 얘기 하지 마.”
“싸가지 없는 새끼. 내가 말하는데 끊어?”
“하던 얘기나 마저 해. 권주혁이 뭐?”
신해범은 류진을 노려보다가 연기를 훅 뿜었다.
“아!”
“매를 벌어.”
“…….”
“MVP는 외조부를 닮았어. 장두현이라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거물인데 첫 손자라고 애지중지했던 모양이야. 평안 장씨는 대대로 왕가의 외척이었던 명문가야. 그런 데서 좋은 것, 예쁜 것만 보고 자랐으니 직할시에서 태어난 다른 형제들과는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승계 서열 1순위가 치열한 권력 암투에서 비켜나 자랐다는 게.
신해범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승희가 머리 잘 썼지.”
권주혁은 총통 보좌관이었다. 신룡관의 지존을 욕심내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 자리였다.
“권주혁은 MVP를 자기 입맛에 맞는 후계자로 키울 작정이야. 아직 어리고 순진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언제가 됐든 그놈이 즉위하면, 총통의 숙부로서 지금 이상의 권력을 손에 넣겠지.”
“수렴청정?”
“네가 그런 말도 아냐?”
“사람 무시하지 마.”
신해범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걔도 알아? 권주혁이 자기 이용한다는 거.”
“알겠냐?”
류진은 입을 닫았다. 더 말해 봐야 핀잔만 들을 게 빤했다.
“권주혁이 MVP에게 갖다 붙이려는 롤 모델이 곽재헌이야.”
“뭐라고?”
“곽재헌은 철혈일성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지만, 사회 기업 출신이라 따지고 보면 공화당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었어. 양쪽 다 깔짝거리면서 줄타기하는 박쥐였지. 정계에서는 욕을 바가지로 처먹어도, 대중에게는 그런 콘셉트가 잘 먹혀. 뭘 해도 중간은 가니까.”
류진은 냅다 소리 질렀다.
“곽재헌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단 거야?! 권일혁의 아들이라도?”
피를 보지 않고 지속되는 독재. 선대의 악행을 무시한 권력의 이양. 신해범이 비웃었다.
“사람들은 핏줄에 관심 없어. 중요한 건 정치 이념이지. 차기 총통이 누구든, 철혈일성의 공포정치만 아니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거다.”
“하지만!”
“이제 좀 감이 오냐? 우린 서둘러야 해. MVP가 등극해서 국민들 지지를 얻으면 선대의 악행은 옛날 일이 되어 버려. 그럼 너랑 나? 완전 나가리 되는 거야.”
신해범은 쐐기를 박았다.
“그게 왕조의 신분 세탁이야.”
권세혁이 아무리 친서민적인 정책을 펼치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한들, 과거의 잘못은 바로잡지 않고 덮으려고 할 터였다. 예전에 종결된 사건을 들춘다는 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셈이니까.
“MVP는 자기 아버지 얼굴에 똥칠 못 해.”
신해범은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당부했다.
“너 곽현우 되게 좋아하잖아.”
류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신해범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권세혁의 담배 케이스를 흔들며 말을 돌렸다.
“이건 얻다 숨기고 있었냐?”
“여기 화장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류진은 욕실로 들어가는 신해범의 등에 대고 외쳤다.
“여기서 잘 거야?”
“그럼 이 시간에 운전해서 가라고?”
한마디 더 하면 주먹이 날아올 분위기였다. 류진은 주섬주섬 베개를 챙겨 일어났다. 한 채뿐인 이부자리는 건드릴 수 없기에 권세혁이 빌려준 캐릭터 담요를 집어 들었다. 귀여운 프린팅을 바라보는데 신해범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하냐?”
류진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당신 여기서 잔다며. 난 밖으로 갈게.”
“밖에 어디.”
“복도든 어디든….”
류진은 말끝을 흐렸다. 당신만 없으면 길바닥에서라도 잘 수 있어, 하는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가지가지 한다.”
“뭐! 그럼 당신이 나가든가!”
신해범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류진이 들고 있던 베개와 담요를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왜 또 시빈데… 악!”
주우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명치를 강하게 찍혔다. 신해범의 무릎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류진의 머리 위에서 신해범이 말했다.
“여기 있어.”
“말로 해! 씨발 새끼야!”
“넌 좋은 말로 하면 알아 처먹지를 못하잖아.”
신해범은 더러워진 제복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며 류진에게 이부자리를 깔아 놓으라는 명령까지 했다. 나가 뒈지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류진은 고개를 숙이고 대꾸했다.
“알았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류진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언젠가는 저 오만한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지게 해 주겠다. 자신감으로 빛나는 두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내고야 말겠다. 저 괴물딱지 같은 인간도, 처음부터 무적은 아니었을 테니까.
어둠 속에서는 소리가 잘 들린다. 재깍재깍 시계 초침 소리부터, 새근새근 내쉬는 숨소리까지.
류진은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뒤돌아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에 신해범이 있었다. 그의 숨결이 자꾸만 목덜미에 닿아 류진은 진저리를 치며 돌아누웠다.
“…….”
역효과였다. 신해범의 얼굴이 코앞에 놓였다. 두툼한 목화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자는 얼굴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랬다. 류진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애쓰면서 이불을 벗어났다. 권세혁이 준 담요 하나만 갖고 구석으로 갔다. 여기서 유일하게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나머지는 다 신해범의 것이었다.
류진은 블라인드를 올렸다.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벽에 기대앉았다. 양을 세기 시작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빌어먹게 효과가 없었다.
류진은 무릎을 끌어당겨 안았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신해범이 몸을 일으켰다.
“뭐 하냐.”
푹 잠긴 목소리였다.
“…자려고.”
“가지가지 한다.”
“나한테 신경 꺼.”
갈고리 같은 손이 발목을 움켜잡았다. 놀랄 틈도 없이 끌어당겨졌다. 엉겁결에 으아악 비명을 내지르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놔!”
“싫은데.”
류진은 발버둥 쳤지만, 신해범은 놔주지 않았다. 이부자리가 마구 흐트러졌다. 흡사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모양새였다.
다리가 벌려지고, 신해범의 몸이 자리했다. 류진은 신해범의 어깨를 떠밀었다.
“비켜.”
“자자, 좀.”
신해범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버둥거리던 류진은 이내 포기하고 두 팔을 이불 위에 늘어뜨렸다.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아!”
헐렁한 티셔츠 속으로 뜨거운 손이 파고들었다.
“하지 마.”
신해범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이 옆구리를 간질이고, 배를 쓰다듬다가, 가슴께로 올라왔다.
“아파, 좀…!”
“네가 살집이 없어서 그래.”
티셔츠는 류진의 목까지 올라갔다. 자극 때문에 꼿꼿해진 유두를 만지며 신해범이 웃었다.
“여기 만져질 때 기분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개좆같지.”
“…….”
“그만 집적대고 꺼져! 이러고 잠이 오겠냐!”
류진은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때 신해범의 다른 쪽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헉, 숨을 들이켜는 류진의 귀에 대고 신해범이 속삭였다.
“권세혁이 마음에 들어?”
“그런… 그런 거 아냐.”
“약은 어떻게 구할래.”
“클럽 일하면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말할 때 외출증이나 끊어 주면….”
“그건 곤란해. 네가 밖에서 뭔 짓거리를 할 줄 알고?”
골반을 더듬던 손가락이 속옷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익히 아는 손가락이었다.
“하지 말라고…!”
신해범의 목소리가 은근했다.
“니들이 팔던 약들, 우리한테 많이 있어.”
단속에서 압수한 물건들이라고 했다. 값어치로 환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라, 종종 빼돌리는 내부자가 있어서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성기를 주무르던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주지.”
류진이 헐떡였다.
“그럴… 필요 없어. 클럽에서 하던 일이라서, 익숙해.”
“내 도움이 필요할 텐데.”
“당신이 어, 떻게…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이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 아무것도… 아!”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신해범의 목소리가 돌연 차가워졌다.
“네 단독 행동은 용납 못 해. 그리고 아직 모르나 본데, <화이트 스완>은 폐업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므린 발가락이 이불을 쥐었다. 신해범은 땀으로 촉촉해진 류진의 목을 콱 깨물었다.
“악!”
“상처받았어?”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가쁜 숨이 터졌다. 신해범은 슬슬 반응을 보이는 성기를 더욱 빠르게 흔들었다. 손끝으로 귀두를 톡톡 두드려 가며 사정을 유도했다. 귀두 끝에 맺힌 프리컴이 신해범의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아, 그만, 아…!”
“그 바닥 생리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흐으, 읏, 아!”
“뒷골목 우정이 뭐 대단한 줄 알아? 형님, 동생, 의리? 그딴 거 없어. 중요한 순간에 선택받는 사람은 결국 피 섞인 가족이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 몰라?”
신해범이 키득댔다.
“솔직히 말해 봐. 너 하성록한테 억지로 대 준 거 아니지? 너도 좋아서 했지? 어? 말해 봐, 정류진. 너 나이 많은 남자랑 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 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살짝 만졌는데 젖꼭지 발딱 세우고. 야, 너 하성록한데 가슴 만져 달라고 했지. 하성록 그거도 빨아 줬지? 책상에 올라가서 엉덩이 흔들고? 너 고자인 거 보고 뭐라던?”
“아니야, 아니라고…! 이 개, 씨발 놈아!”
“딱 봐도 알아. 너 나이 많은 남자 좋아해. 왜냐, 스무 살 풋내기 같은 놈으로는 만족이 안 되거든.”
“다, 닥쳐. 입 닥쳐, 이 미친… 아으, 아!”
신해범은 손바닥을 펼쳤다. 안타깝게도 정류진은 사정을 하지는 못했다. 적은 양의 쿠퍼액이 신해범의 손바닥을 애처롭게 적시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돌아누워 이불로 하반신을 가리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마른 등에 도드라진 등뼈와 견갑골.
“개새끼가 진짜….”
거의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신해범은 피식 웃고, 류진의 벗은 등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자라.”
“자다가 죽어 버려.”
“원한다면 네 손으로 직접 해.”
“…….”
“바라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 안 돼.”
어딘지 울적한 목소리였다.
아침 새가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신해범이 누웠던 자리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방 안에 신해범의 흔적은 없었다.
머리맡에 주전자가 있었다. 유리컵에는 차가운 물이 조금 남았다. 물을 따라 마시는데 주전자 옆에 놓인 물건이 눈에 띄었다. 권세혁의 담배 케이스였다.
무심코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던 류진은 멈칫했다. 케이스와 바닥 사이에 종이쪽지 한 장이 보였다.
“뭐야?”
류진은 반으로 접힌 쪽지를 펼쳤다.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신해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