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범은 마주 보고 앉아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둥근 테이블을 예약했다. 그러나 장승희는 흔히 커플석이라고 불리는, 전망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는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행히 테이블은 비어 있었고 매니저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신해범에게 눈짓하며 둥근 테이블의 예약석 깃발을 신속하게 거둬 갔다.
메뉴판을 펼치고 즉각 주문을 시작했다.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오른쪽에 표기된 가격을 보고 결정했다. 신해범은 얼굴에 날아와 꽂히는 장승희의 은근한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그의 눈은 메뉴판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장승희의 두 손에 못 박혀 있었다. 결혼반지가 없었다.
음식이 나오자 장승희는 선글라스를 벗었지만, 챙이 넓어 얼굴을 반쯤 가리는 모자는 여전히 쓰고 있었다. 얇은 니트 원피스가 몸매의 굴곡을 드러냈다. 액세서리는 귀에 딱 달라붙는 진주 귀걸이 하나뿐,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분위기에 화장도 옅었다.
말 그대로 무심한 듯 신경 쓴 스타일이었다. 사치스러운 느낌 없이,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장승희는 철혈일성이 ‘우리 사회의 올바른 여성상’이라고 내세우는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품이 넘쳐흘렀다.
장승희는 채끝 스테이크 가장자리를 작게 자르며 말했다.
“작은애가 걱정이야. 도통 또래 애들이랑 어울릴 줄을 몰라. 고향에서 지낼 땐 그래도 밝았는데, 도시 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지 어쩐지. 가뜩이나 그런데 제 형이 딱 달라붙어서 챙겨 주다 보니 그게 또 습관이 됐어.”
권무혁은 총통의 7남 4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장승희의 차남이자 권세혁의 친동생으로, 승계 서열 2위였다. 만에 하나 권세혁이 후계자 대열에서 탈락할 경우 정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을 입장이었다.
그러나 권무혁은 고작 아홉 살의 어린아이였고,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데다, 형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심약한 성품이었다. 자라면서 변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권세혁과는 성격이 달랐다. 신해범은 자기보다 훨씬 큰 형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매달리던 소년을 떠올렸다.
“저도 어릴 때 잔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그랬어?”
“앓으면서 자란 아이들이 커서 건강하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부인께서 지극정성으로 아껴 주시니, 작은 왕자님도 곧 건강해지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장승희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지그시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야?”
신해범의 눈 밑이 꿈틀했다.
“어떻게 불러 드리면 좋을까요.”
“몰라서 묻는 걸까,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막 삼킨 고기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신해범은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부인이 부담스럽습니다.”
장승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뚜렷하고 거침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제 출신 성분은 보잘것없습니다. 태생부터 글러 먹은 인간은 아무리 자신을 가꾸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다릅니다. 제게 부인은, 아니 당신은 경계선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호소하듯이.
“당신 앞에서는 제가 작아집니다.”
어미의 관심이 고파 매달리는 어린애처럼.
“제가 그동안 추구해 온 모든 가치가 무의미해집니다.”
과장이 아니었다. 장승희는 총통의 아내이자 장두현의 딸이고, MVP 권세혁의 친모였다. 숙청 여제 유미현도 한 수 접어주는 여자에게 신해범은 당해 낼 수 없었다. 때로는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줄곧 생각했다. 장승희가 권세혁을 빌미로 은근한 관심을 내비쳤을 때부터.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연상의, 자칫 실수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불러일으키는 상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구워삶아야 단물 쪽 빨아 먹고 내팽개칠까.
결론은 간단했다. 처음부터 거부권이 없는 입장이었다.
신해범은 비로소, 자신에게 권주혁이 감수한 것과 비슷한 시련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권주혁은 성불구자였다. 그는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까발려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면 그건 인간 지능 이하의 닭대가리다.
“저는….”
신해범은 장승희를 응시했다.
“저는 당신이 두렵습니다. 제가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당신에게 버려질까 봐.”
“해범 씨.”
“저는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를 압니다. 그 상실감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만 했고,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수도 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자신이 없어서… 지금도 겁이 납니다.”
신해범은 자신의 손등을 덮은 장승희의 가느다란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 이곳의 모든 게 완벽했다. 분위기, 타이밍, 목소리, 이 모든 말이 진심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상처받은 남자의 눈빛까지.
“저를 끝까지 데려가 주실 수 없다면.”
피날레다.
“처음부터 시작도 말아 주십시오.”
노력하는 놈 위에 즐기는 놈이 있다. 즐기는 놈 위에는 날아다니는 놈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서라도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전차가 있었다.
밤새 장승희를 상대했다. 감정과 육체노동의 환상적인 컬래버레이션에 입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의 브래지어 호크까지 채워 주고 나서야 신해범은 해방될 수 있었다. 귀부인은 만족했고, 기분 좋게 돌아갔다.
그가 자택에서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열락을 곱씹을 동안, 신해범은 당장 호수 공원으로 진압 팀을 보내라며 미쳐 날뛰는 권주혁을 상대로 제2 라운드를 치러야 했다.
권세혁의 이름으로 설립한 국립 도서관은 광성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건축물’ 대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이에 권주혁은 국립 도서관 맞은편 부지, 호수 공원을 끼고 있어 전망이 좋고 넓은 땅을 사들여 국립 어린이 과학관을 짓겠다고 나섰다.
도서관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둔 덕분에 유미현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다. 권주혁은 곧장 토지 매수에 나섰다. 그는 국업(國業)이라는 창대한 이름을 앞세워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개인적으로’ 눈여겨봤던 10만 평 부지를 손에 넣었다. 또한 교통편 확충과 편의 시설 조성을 위해서라며 일대의 자투리땅까지 모조리 매입했다. 그 과정에서 잡음이 불거졌다.
기존 건축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주민들과의 마찰이었다. 이에 상류층의 생활 환경 조성을 위해 변두리의 서민들을 몰아내는 불합리한 처사라는 목소리가 커졌고, 교육자들과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아동 인권 보호 연합>이 국립 어린이 과학관 설립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머리 좋고, 발 빠르고, 눈치는 더 빠른 유미현은 재빨리 연합을 지지하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권주혁의 발목을 잡았다.
이때부터 무력 충돌은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신룡관의 ‘빅 브라더’는 자신을 적림부에서 쫓아낸 ‘숙청 여제’가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대변하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던 와중에 들이닥친 속보는 기어코 권주혁의 인내심을 바닥냈다.
<아동 인권 단체가 반대하는 국립 어린이 과학관 - 유예 기간 없는 명도 집행, 경찰과 용역의 강제 철거 합동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