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8장. 컨소시엄 上 (10/39)

회색 하늘에 검은 구름이 묵직하게 흐른다.

습기를 흠뻑 머금은 공기가 부유하는 장마철. 엄승원은 발로 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맘때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산이 아니라 차라고 생각했다. 마시는 차가 아니라 타고 다니는 차.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서민이 혼자 힘으로는 마련하기 어렵게 된 사치품.

엄승원은 기껏 차려입은 정장 바지에 흙탕물을 튀기고 지나간 그랜저의 뒤에 대고 주먹을 흔들었다. 염병할 놈, 술 처먹고 불심 검문에나 콱 걸려 버려라.

투덜거리며 카페로 들어섰다. 에어컨 덕분에 시원했다. 엄승원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 늘 주문하던 블랙커피 대신 시즌 한정 과일 음료를 주문했다. 영수증을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푹신해 보이는 소파 자리로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불쑥 손을 들었다. 엄승원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찔렀다. 저요?

남자가 웃었다. 엄승원은 입을 헤벌렸다. 짧게 쳐올린 머리, 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 장신에 균형 잡힌 체구가 누가 봐도 군인이었다. 평범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있었다.

엄승원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민망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다부진 체격의 미남과 멧돼지 한 마리.

프로필 사진에서는 이렇게 강렬한 인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강인우는 엄승원을 2층 비즈니스 룸으로 안내했다. 여기 와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리 와서 자리를 둘러봤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무슨 자리? 대낮에 남자 둘이 마주 보고 앉아도 타인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을 만한 자리.

엄승원은 노트북 때문에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에는 유미현의 비서에게 건네받은 서류철도 들어 있었다. 그는 연신 강인우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사진 속 얼굴과 매치해 보려고 애썼다.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강인우는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옛날엔 꽤 마른 체격이었습니다. 말라깽이가 키만 불쑥 커서 별명이 전봇대였죠.”

“아….”

“사관 학교 재학 시절 내내 그 모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체질이 아니었던 거겠죠.”

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장교로 임관된 해부터였다. 원래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 아닌데 훈련을 거듭하며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다고, 강인우는 쑥스럽게 목뒤를 쓰다듬었다.

과일주스로 목을 축인 엄승원이 말했다.

“대위님께서 슬로우 스타터이신가 봅니다.”

“예?”

“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 말입니다. 운동선수 중에도 그런 스타일이 있지요.”

강인우가 아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엄승원은 속으로 그의 키를 가늠했다. 아까 일어설 때 봤는데 185는 확실히 넘는다. 나이는 서른다섯, 아니 여섯이었나? 하여튼 그즈음 되었다. 그러나 신해범과 비교해, 계급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엄승원은 새삼 신해범이 얼마나 빠르게 출세했는지 실감했다. 그 사실에 지금껏 의심을 품지 않은 게 이상하다.

강인우는 이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시켜 놓았다.

“풍기대 조사하신다고요. 제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엄승원은 머릿속으로 강인우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자제였다. 아버지는 은행장, 어머니는 교사, 여동생은 제1 종합 대학에 다니는 엘리트. 정치 사범을 아버지로 둔 신해범은, 본래대로라면 강인우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입장이었다.

“우리 대위님께서는, 그….”

엄승원은 기자였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쓰는 종류의 인간들은 불필요한 인사치레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제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궁금하십니까? 하극상.”

강인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중령이었습니다. 사관 학교 갓 졸업한 녀석을 건드렸고요.”

“예.”

“사실 군에서는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부끄럽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녀석….”

강인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별로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니고, 이제 와서 결과가 달라지지도 않으니까요.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은 말입니다, 자기가 건드려도 괜찮을 듯한 녀석들만 귀신같이 알아봅니다.”

강인우는 자기가 한 일을 정의로운 것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내심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사실이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강인우는 오히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군인으로서 부끄러워했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막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저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서야 행동을 했습니다.”

“…….”

“살면서 무수히 많은 개자식들을 만났고, 그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행동하지는 못했어요. 두려웠습니다. 단체 생활에서 불복종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위님은 행동하셨잖습니까.”

강인우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처음이었습니다.”

“후회하십니까?”

“후회는 없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재판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엄승원은 강인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대가로 지금껏 누리던 것들, 그리고 미래에 누릴지도 몰랐던 것들을 박탈당했다. 계급장은 유지했으나 문제는 보직이었다. 헌병대에서 풍기 교육대는 사실상 좌천이었다.

서글픔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엄승원은 강인우의 신념과 행동을 존중했다. 어리석다고, 무모했다고 비하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강인우가 행동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유미현의 원조, 그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족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유 수석과는 어떤 인연이신지.”

“저는 출소 후 군대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 생각을 바꾸게 도와주신 분이 유미현 수석이십니다. 제가 전입할 부대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그게 풍기대였습니까?”

엄승원은 의아했다. 말이 좋아 특수 부대지, 풍기대는 권주혁의 개인 사병 집단이나 다름없었다. 유미현이 거기에 무슨 힘을 쓸 수 있다고.

“하극상 문제로 전수 조사가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제가 전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요.”

“수석께서 한 방 먹이셨군요.”

강인우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파오훼이 최금호에 대해서는 들으셨습니까?”

“전달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물증을 찾기가 힘들어서요.”

“그래도 강력한 심증이 있지 않습니까.”

“심증은 법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강인우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엄승원이 볼펜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제가 최금호 사건을 기사화하고 대중에게 알린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신해범을 심판대에 올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미 옛날에 종결된 사건이라….”

한번 판결이 난 사건은 두 번 다루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이었다. 그게 정의든 아니든 상관없이.

강인우가 거칠게 내뱉었다.

“저는 법이 싫습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알거든요. 이 나라에서 법이란, 각종 사건 사고를 이용해서 욕심을 채우려 하는 기회주의자들의 약속 같아요. 재판은 정의 구현의 수단이 아니라 돼지들이 타협한 결과물입니다.”

엄승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강인우의 패기에 감탄했다. 유미현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현 정부에 이토록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낼 수 있다니 놀라웠다.

강인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복역하는 중에, 신해범이 저를 한 번 찾아왔었습니다.”

“신해범이 직접요?”

“직접, 혼자서.”

“무슨 이야길 했습니까?”

신해범의 첫마디는 ‘담배 피우느냐’였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교관에게 강인우의 수갑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상관 폭행죄를 저지른 중범죄자라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나오자, 신해범은 융통성이 없다고 나무라며 직접 강인우의 입술에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여 주었다.

“별다른 얘기는 없었습니다. 길게 말하지는 않았고요. 애초에 초면인 데다, 모든 대화가 기록되는지라 입조심하게 되거든요.”

“그래도 무슨, 거기까지 혼자서 찾아갈 정도면 무슨 목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강인우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불쑥 내뱉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신해범이 제게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엄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범이라면 그럴 만했다. 마음에 안 드는 상관을 쳤다는 점에서, 그는 강인우에게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신해범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불행은 힘 있는 사람들의 그릇된 신념 때문에 발생한다고.”

엄승원이 물었다.

“대위께서 보시기에, 신해범은 어떻습니까?”

“과묵한 스타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일즈맨에 가깝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언변이 화려해요. 대중에 비치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대위께서는 그게 신해범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인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가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엄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신해범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꽤 건방지게 굴었죠. 기자님도 아시다시피, 신해범은 저보다 연하입니다. 어린 나이에 진급이 무진장 빨랐죠.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웃긴 소문처럼 말입니다.”

“신해범과 그… 총통 보좌관께서.”

“그땐 권이 성불구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었으니까요.”

강인우는 담배를 든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애초에 신해범, 그놈은 포주 짓으로 라인 탔습니다.”

“예?”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소립니다.”

엄승원은 입을 벌렸다. 강인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다. 생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국의 낯선 언어를 듣고 있는 것처럼.

“포주 짓이라면… 권에게 말입니까?”

“그럼 본인이 덤볐을까요.”

강인우는 비웃듯이 말했다.

“신해범 같은 부류는 말입니다, 본인이 손해 보는 짓은 안 합니다. 남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천연덕스럽게 빠져나오죠.”

엄승원은 강인우의 손가락 사이에서 까맣게 타들어 가는 담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위가 고요했다. 태풍의 눈에 갇힌 듯했다.

“기자님.”

“아, 예.”

“저 오늘 풍기대 입소합니다.”

“아….”

“기자님께서 단독 인터뷰 원하신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관계자를 통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콘텐츠가 확실해야겠죠, 신해범의 관심을 끌려면.”

“…….”

“방금 제가 드린 이야기, 꽤 자극적인 콘텐츠 아닙니까?”

볼펜을 쥐고 있던 엄승원의 두툼한 손이 움찔했다.

“대위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심증 아닙니까? 물증이 없으면 신해범을 자극할 뿐입니다.”

“기자님.”

강인우가 불쑥 상체를 내밀었다. 강렬한 눈빛이 정면에서 찌르고 들어왔다.

“기자님, 신이 권의 포주 노릇을 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으로 성공했는지 아는 자들은 결코 그 방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놈 손아귀에서 착취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헌병대 특별 수사 본부에 있었습니다. 임관 첫해부터 강도 높은 흉악 범죄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교훈 하나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물증은 누군가의 심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엄승원이 좀처럼 대꾸하지 못하자 강인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플백을 들쳐 멨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십시오.”

“예. 그럼….”

엄승원은 그가 자리를 뜬 뒤에도 한동안 의자를 지키고 있었다. 재떨이에서 가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강인우는 심증이 물증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직감을 믿는다. 물론, 엄승원은 경험으로 단련된 인간의 ‘감’을 무시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직감은 진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킬 수 있기에 위험했다.

강인우가 들었다던 신해범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세상의 많은 불행은, 힘 있는 사람들의 그릇된 신념 때문에 발생한다고.

힘 있는 자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신념.

“형은 왜 워커 안 신어?”

“무겁고 불편해서.”

“그래도 멋지잖아. 소리도 좋고.”

권세혁이 화강암 계단에 군화 밑창을 탁탁 부딪쳤다. 류진은 그의 손에서 신발을 빼앗았다.

“하지 마. 먼지 날려.”

“구둣방 가져가면 된다니까 그러네. 아니면 다른 사람 시키든지.”

풍기 교육대 본관 뒤편, 후문 쪽 그늘진 자리였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덥고 습한 장마철이라 그렇다. 오늘의 하늘도 우중충했다.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 낼 듯 검은 구름이 유유히 떠가고 있었다.

한동안 소음 공해, 업무 방해의 원인이었던 권세혁의 팬클럽은 눈에 띄게 수가 줄었다. 풍기 교육대의 단속과 야외 활동이 불편한 날씨 때문이었다. 이따금 ‘왕자님 직찍’을 찍으러 카메라를 들고 월담을 시도하는 간 큰 몇몇을 제외하면, 권세혁의 군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게 흘러갔다.

권세혁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는 류진이 자기 군화를 닦는다는 사실이 싫었다.

“하지 말라니까, 형.”

“소령님이 네 착장 확실하게 챙기랬어.”

류진은 단호하게 말하고 부드러운 천을 손가락에 감았다. 구두 닦는 법은 성재경이 가르쳐 줬다. 물 한 번 찍고, 구두약 한 번 찍고. 힘을 빼고 원을 그리듯이 문지르다가 점점 빠르게.

“우희 누나가 나 챙기래?”

“소령님을 그렇게 불러도 되냐?”

권세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

“그럼 누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

“왜, 동복 남매 아니라서 이상해?”

플라스틱 대야에 손을 담근 권세혁이 류진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물보라를 맞은 류진이 발끈했다.

“야.”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누나도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고. 형제자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아버지도 그걸 원하실 거야.”

구두약 묻은 천으로 군화 코를 문지르던 류진의 손이 멈췄다.

“내 앞에서 그런 얘기 해도 되겠냐?”

권세혁은 눈을 깜박였다. 류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피부에 닿는 공기는 습한데, 류진에게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안 될 건 뭔데.”

권세혁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다 지난 일이잖아. 우리하고는 상관없어.”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옛날 일은 옛날 일. 어른들 사정은 어른들의 사정. 나하고는 상관없어.

권세혁의 인생에서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였다. 과거 따위는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불과했다. 과거에 집착하고, 매몰되어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일만큼 미련한 게 없었다.

권세혁은 재차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잖아. 난 형이 누구든 상관없어. 지금 나랑 같이 있으면 돼. 그러니까 형도, 내가 누군지 상관하지 않아 줬으면 해.”

류진은 말없이 군화를 닦았다. 권세혁은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몰랐다. 일반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걸 누리고 살면서, 총통의 아들로서 감수해야 할 비난은 외면한다. 류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훗날 권세혁은 자신의 안일함과 순수함에 자책할까? 아니면 타인을 원망하고 복수심에 이를 갈까.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권세혁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그랬다. 실제로 기우희의 명령을 받았기도 하지만, 류진은 권세혁의 뒤치다꺼리에 열심인 근본적인 이유를 알았다. 평소에 이런 거라도 많이 해 주면 권세혁이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그때, 나를 조금이라도 덜 미워하지 않을까….

류진은 거칠게 손을 놀렸다. 이 빌어먹을 놈의 죄책감도 신발에 묻은 먼지처럼 닦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류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권세혁은 태평하게 기지개를 켰다. 긴 팔다리를 쭉쭉 펴며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힐끗거리던 류진이 말했다.

“배 안 고파?”

“응.”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류진은 시원한 냉면을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웠지만, 권세혁의 점심은 카페테리아에서 구입한 샐러드 한 팩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닭 가슴살 몇 점만 집어먹고 거의 남겼다. 그가 남긴 과일이며 채소를 모조리 싹쓸이한 사람은 류진이었다.

그때는 허겁지겁 주워 먹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권세혁이 아침부터 먹은 거라고는 물과 닭 가슴살 몇 점뿐이었다.

“혹시 너 다이어트 하냐?”

“아니. 왜?”

“다른 사람들은 몇 그릇씩 먹고 그러는데….”

“여기 사람들은 일을 하잖아. 훈련도 받고. 당연히 에너지 소모가 크지. 나야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뭐.”

류진은 권세혁의 군화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신어.”

“광 끝내준다.”

권세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집어넣었다. 어째 평소보다 신나 보였다. 류진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밤에 잠은 잘 자?”

“응, 뭐.”

“약 얼마나 남았어?”

군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던 권세혁이 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나 형이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 오버도스?”

“……….”

“괜찮아. 난 컨트롤 잘하고 있으니까. 공급책 형밖에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래?”

권세혁은 류진이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헤로인 약간 남았어.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각성제 종류로 부탁해도 될까? 돈은 확실하게 낼게.”

“그건… 이따가. 방에서 얘기해.”

“아, 알았어.”

주위를 둘러보며 권세혁이 웃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고.”

“들어가자. 덥다.”

류진은 대야에 남은 물을 아스팔트 위에 뿌렸다. 빈 대야에 구두약과 솔, 수건을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권세혁이 불쑥 말했다.

“우리 잠깐 나갔다 오자.”

“왜? 어딜?”

“응, 기타 사러.”

“뭐?”

권세혁은 짓궂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예전에 기타 칠 줄 안다고 했잖아. 여기서 시간도 많고 심심한데, 나 좀 가르쳐 주라. 예전에 배우다가 포기했는데 다시 도전할래.”

류진은 플라스틱 대야를 옆구리에 낀 채 권세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진지하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류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잘 치는 건 아니라서.”

“빼지 말고. 내가 악기 좋은 걸로 살게. 응? 벌써 봐 둔 거 있단 말이야.”

권세혁은 류진의 대야를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안에 있는 물건들을 뒤적거리며 다음부턴 이런 거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난 형한테 허드렛일 시키려고 데려온 거 아니거든.”

류진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타 배워서 뭐 하게. 너 전역하고 가수 데뷔하냐?”

“가수는 무슨. 오디션 볼 거 아니고, 길거리에서 버스킹 할 거 아니야. 그냥 쉬운 노래 몇 곡 정도만 끝까지 칠 수 있으면 돼.”

“쉬운 노래 뭐.”

“동요 같은 거?”

“동요?”

“어. 동생 쳐 주게. 그리고 형이랑도… 좋잖아? 응? 가르쳐 주라.”

류진은 망설였다. 악기를 놓은 지 오래됐다. 옛날에도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아니었고. 누나에 비하면.

“안 돼?”

“나 사실 기타 안 잡은 지 오래됐어. 그리고 여기서는… 시끄럽잖아. 누가 뭐라고 하면 어떡하게.”

“누가 감히 나한테 뭐라고 해?”

권세혁과의 대화는 종종 이렇게 어긋났다.

“명색이 풍기 교육대가 방음 시설이 그렇게 부실하겠어?”

“그래도.”

류진은 신해범의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권세혁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방음 시설은 돼 있어. 그래도 완벽 차단 수준까지는 아니니까, 오밤중에 줄 깽깽 튕겨 대지는 마라. 밤에는 소리가 더 커.”

“알았어.”

“그런데 정류진, 너 기타 칠 줄 알면서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내가 왜?”

류진은 신해범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무겁고 발 아픈 군화 대신에 신고 다니는 하얀 컨버스화가 얼룩덜룩했다. 흰색이라서 금방 때가 탔다.

“기타 허락하는 거지? 그렇게 말한다?”

“잠깐만.”

“뭘 망설여? 권세혁 편의는 다 봐준다며.”

“그렇긴 한데. 그래도 꼬꼬야, 여긴 군대지 장기 자랑 연습장이 아니거든.”

“누가 하루 종일 친대? 어차피 걔는 금방 싫증 나서 그만둘걸.”

“그럴 거면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마. 무슨 시간 낭비냐.”

“언제부터 당신이 권세혁 걱정을….”

신해범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비볐다.

“우리 꼬꼬가 착각이 심하네. 누가 누굴 걱정해?”

자기 자리에서 마우스를 달깍거리던 진치우가 거들었다.

“저게 요즘 덜 맞아서 그래. 기 소령 말이 맞아. 자고로 신병은 하루에 한 번씩 먼지 나게 두들겨 패야 해. 그래야 사람 꼴 된다.”

“치우, 너는 언제까지 옛날 티 낼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신해범은 기타 연습을 허락해 주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따라붙었다.

“앞으로 착장 똑바로 하고 다녀. 근무 시간에는 운동화나 슬리퍼 금지다. 그리고 제복에 다림질 똑바로 해. 지금처럼 꾸깃꾸깃한 셔츠 입고 돌아다니면 가만 안 둔다.”

류진이 울컥했다.

“아침에 다림질했어. 권세혁 옷까지 내가 다 했다고.”

“한 게 그거냐?”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따위로 가르쳐 준 성 중사를 족쳐야겠군.”

신해범이 책상 위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류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불쌍한 성재경. 사모하는 님에게 두들겨 맞을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

“하, 하지 마.”

“뭐라고? 꼬꼬야,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려.”

“하지 말라고! 내가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말이 짧다.”

류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움켜쥔 주먹에는 땀이 괴었다. 신해범이 수화기를 든 채 손가락으로 줄을 꼬았다.

“성 중사 지금까지 잘했는데. 누구 때문에 점수 폭삭 깎이겠네.”

“자, 잘…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장님.”

함박웃음을 지은 신해범이 진치우에게 손짓했다.

“치우, 외출증 한 장 써 줘.”

진치우는 당연히 반발했다.

“나한테 쟤 심부름 시키지 말랬지. 그리고 눈 없냐? 형님 지금 바쁘다.”

“기 소령이 작전주 하나를 봐 둔 게 있는 모양이던데….”

진치우는 곧바로 태도를 바꿔 류진에게 손짓했다.

“야! 너 거기 복합기 앞에 봐.”

류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치우가 연신 저기, 저기, 손짓했지만 좀처럼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뭐 하냐! 등신이냐?!”

신해범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 댔다. 류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콧등이 시큰했다. 진치우가 너무 싫어서 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망신시키다니….

“으이구, 답답이.”

진치우가 다가와 류진의 팔을 낚아챘다. 그 순간 류진이 소리쳤다.

“놔! 어딜 잡아!”

신해범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진치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미친년. 몸뚱이에 금칠했냐? 좆나 예민해.”

“나한테 손대지 마.”

“이 새끼가!”

진치우의 주먹이 류진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류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맥없이 넘어졌다. 곧장 일어나 덤벼들었지만 알량한 주먹은 진치우의 얼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류진의 손목을 비틀어 쥔 진치우가 이죽댔다.

“네가 요즘 확실히 덜 맞았어.”

“놔, 놔… 이거 놔, 씨발, 놔!”

“이년은 언제쯤 주제 파악을 할까?”

진치우의 말이 칼처럼 꽂혔다.

“너 범 새끼가 이쁘다, 이쁘다 해 주니까 눈깔에 뵈는 게 없지? MVP랑 짝짜꿍 소꿉놀이하니까 여기가 호텔 같고 그렇지? 근데 너 조심해라.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 작살 나는 꼴 많이 봤다.”

“당신은 나한테 충고할 자격 없어. 내가 잊어버린 줄 아나 본데, 당신은…!”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시끄러워!”

외친 사람은 신해범이었다. 당장이라도 류진의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였던 진치우가 움찔했다.

“아니, 범아. 이년 말본새가 너무 좆같잖아.”

“네가 참아. 우리 꼬꼬 너무 말라서 뜯어 먹을 살도 없어.”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냐?”

“정류진, 받아.”

묵직한 만년필이 날아왔다.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류진이 얼굴을 감싸고 웅크렸다. 진치우가 손가락질하며 낄낄댔다.

“꼴좋다! 야, 범아! 더 해 봐.”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이마가 얼얼했다. 콧대까지 찌르르 떨렸다. 류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누르며 설움을 삼켰다. 신해범, 진치우, 둘이 아주 똑같다. 나란히 손잡고 시궁창에 풍덩 빠져 죽어 버려라.

***

권세혁은 자기가 아는 가게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귀한 라미레스 기타를 취급하는 매장이었다. 류진은 휴대폰 액정에 떠 있는 약도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내비게이션에만 의존하기에는 불안한 초보 운전자였다.

“그냥 내 차 타고 가자니까.”

“안 돼. 너무 눈에 띄어.”

“그럼 내가 운전할게.”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할 거야.”

“에이, 내가 할게.”

“너 초보 운전이잖아.”

“이젠 아냐.”

“예전에 차 긁고 울부짖었던 거 기억 안 나?”

권세혁이 발끈했다.

“내가 언제 울부짖었어? 애초에 그땐 밤이었고, 길도 좁았고, 상대 차량이 너무 빨라서… 아니, 형은 나보다 면허도 늦게 땄으면서 누구더러 초보 운전이래?”

류진은 운전석 문손잡이를 잡고 놓지 않았으나, 권세혁이 허리를 끌어안고 끌어내는 통에 버티지 못했다. 그는 운전석에 비집고 들어가 꿈쩍하지 않았다. 아무리 때리고 밀어도 소용없었다.

“돼지 같은 놈아! 비켜!”

“형은 나 못 이겨.”

“넌 어떻게 된 놈이 운전해 준대도 지랄이냐, 지랄이…!”

류진은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권세혁은 내비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예전에 자주 가던 데라서 길 알아. 국립 미술관 근처인데 큰 건물 있어서 찾기 쉬워. 형, 국립 미술관 가 본 적 있어?”

“아니.”

“나 거기 관장 취임식 갔었거든. 꼴랑 3층이라 볼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해 놨어. 악기 사고 오는 길에 들르자.”

“됐어. 나 그런 거 봐도 몰라.”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안 봐도 알아. 나 같은 게 미술관은 무슨.”

권세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

“별 참견을 다 하네.”

“말에는 힘이 있어. 말이 곧 인생이 된다고. 난 형이 그런… 음, 자기를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게 싫어. 좀 더 자신감을 가지는 게 어때? 형한텐 내가 있잖아.”

“네가 있으면, 뭐?”

“사는 데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이지.”

지프가 출발했다. 류진은 운전하는 권세혁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귓불이 불그스름했다.

“형은 나만 믿으면 돼. 나한테만 딱 붙어 있어. 일당백이 어떤 건지 보여 줄게. 인간관계는 단순한 게 좋아. 여러 사람 얽히면 귀찮아져.”

“…….”

“아버지 돌아가시면 나 바로 취임할 텐데, 그때 맨몸으로 덜렁 가진 않을 거야.”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권세혁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상처받은 사람은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조그만 가시에도 찔려 본 적 없는 사람은 창에 몸이 꿰뚫리는 순간 죽는다. 류진은 핸들을 잡은 권세혁의 손을 응시했다. 손바닥이 크고, 곧게 뻗은 손가락도 길었다. 배구 선수에 최적화된 손이었다. 하지만 룰을 지키고 상대 팀을 존중하는 ‘운동선수’는 밑바닥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악바리를 이기지 못한다.

피식자 그룹에도 종류가 있었다. 자기가 먹이 사슬 최하위라는 사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본인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길을 도모하는 자와 한평생 본인을 포식자로 착각하고 둥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앞 차량의 후미등을 응시했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두 발이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했다.

“…….”

류진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불안함과 죄책감에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권세혁이 핸들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신호 되게 기네.”

“…….”

“형 심심해? 뭐 들을까?”

그가 라디오를 틀었다. 원하는 채널이 잡히지 않는지 한참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가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서정적인 반주가 마음에 들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타국의 언어에 몸을 맡긴 채 류진은 눈을 감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권세혁은 류진이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사실을 눈치챘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권세혁은 류진이 불편하지 않도록 머리를 등받이에 바로 해 주었다. 류진은 조금 뒤척였을 뿐 눈을 뜨지 않았다. 권세혁은 미동도 없이 자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피곤했구나.

피곤한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만난 류진은 상상 이상으로 말라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 눈빛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내뱉는 자조적인 말들. 권세혁은 불안했다. 류진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신해범에게 그를 찾아 달라 했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타인의 힘으로 운명이 바뀐 사람은 불안해하기 마련이었다. 또 언제, 어떤 식으로 인생이 달라질지 모르니까.

권세혁은 류진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세상을 사는 즐거움도.

병원에서 바람맞은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제는 알았다. 성급하게 굴면 일을 망친다. 좋아하는 마음이 클수록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류진은 자기를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출신 성분 차이도 까마득하고, 아무래도 옛날 일도 신경 쓰이겠지.

권세혁은 손을 뻗었다. 잠자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남은 뺨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보고 있자니 신기했다. 어쩌면 이렇게 숨소리도 안 내고 잘까. 보는 사람 불안하게….

갈급증이 찾아왔다.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권세혁은 언제나 곁에 두는 텀블러를 찾아 들었다. 출발하기 전에 얼음을 가득 채워 놓았다. 차 안의 에어컨 공기가 더해져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워진 물이 목구멍을 적셨다.

두근대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신해범은 서른셋이지만 이십 대 중후반처럼 보였다. 귓바퀴를 살짝 덮는 길이로 자른 머리카락은 그의 날카로운 얼굴선과 길고 탄탄한 목을 돋보이게 하고, 주름 하나 없이 칼처럼 다린 제복에서는 샤넬 블루의 무겁고 쌀쌀맞은 향기가 났다. 희고 고른 치아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짓는 미소는 옆집 누나의 뒷모습을 쫓기 시작하는 열두어 살 때 마스터했을 것 같다. 웃을 때 드러나는 뾰족한 송곳니와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미남이었다.

면회실의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서 봤을 때는 지쳐 보였는데, 전면 유리를 통해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대낮에 12층 사무실에서 만난 신해범은 건강한 에너지로 빛나고 있었다. 강인우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경례 구호를 외쳤다.

신해범이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풍기 교육대 입소를 환영한다. 헌병대에서 왔으니 교양은 따로 필요 없겠지. 자네 팀은 진압 1팀. 진치우 중령이 관리하는 팀이고, 저녁에 들어오면 자세한 얘기를 해 줄 거야. 지금은 내가 숙소를 안내하지.”

“예.”

신해범에게 존대하는 일에 거리낌은 없었다. 이곳은 계급이 절대적인 세계였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강 대위 숙소는 2층이야.”

권세혁 왕자와 같은 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신해범의 뒤에 서 있던 강인우는 그의 양쪽 귀 모양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왼쪽 귓바퀴가 유난히 날카롭고 뾰족했다. 귓불 살점이 툭 떨어져 나간 모양새였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기른 거군.

강인우는 넓적다리의 지끈거림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족들에게는 훈련 중 목봉에 얻어맞았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지뢰 파편이 다리를 관통한 큰 부상이었다. 과거 사관 학교 시절에 겪은 일이었다. 부상자는 강인우를 포함하여 일곱. 사망자는 둘이었다. 그러나 학교와 국가는 일괄적으로 침묵했다.

신해범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권세혁이 생활하는 층이라서 그런지 조용했다. 신해범은 살며시 웃으며 MVP의 안락한 생활 환경을 위해 2층에 있던 주요 시설 몇몇을 다른 층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래서 자네가 지내기 편할 거야. 조용하니, 복도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신해범의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보폭이 일정하고 규칙적이었다. 강인우는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가까이 있으니 더 실감 났다. 두 사람은 비슷한 연배에 키도, 체격도 비슷했다. 하지만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단순히 계급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인우는 신해범에게서 산전수전을 겪고 살아남은 자 특유의 묵직한 오라를 느꼈다. 그는 이만한 포스를 풍기는 사람을 또 한 명 알고 있었다. 유미현 수석 전략가.

“여기야.”

신해범이 문 앞에 멈춰 섰다. 강인우의 시선이 플라스틱 이름표에 꽂혔다. 대위 강인우, 이병 정류진.

권세혁은 주머니에서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썼다. 류진에게는 같은 색의 볼 캡을 건넸다. 사복 차림이지만 혹시라도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했다. 권세혁은 룸 미러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다가 범죄자 같아, 하고 웃었다.

“쇠파이프 하나 들면 딱이겠다. 그치?”

류진은 그러고 다니던 사람을 하나 알았다. 차모은.

“아냐. 넌 연예인 같아.”

“그래? 난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응?”

“형은 아이돌 같고, 난 경호원 같아.”

마스크를 턱까지 끌어 내린 권세혁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자 잘 어울려.”

간판부터 클래식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가게였다. 전면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가게 내부에는 다양한 종류, 크기의 클래식 기타가 빼곡했다. 류진은 우드 브라운 색 간판에 검은 필기체로 적힌 숫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1882>. 그게 상호였다. 패스트 컬처가 성행하는 요즘, 드물게도 시간과 역사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권세혁의 갈색 머리가 햇빛에 반짝거렸다. 류진은 습한 공기가 달라붙은 팔을 쓰다듬으며 온 세상의 따사로운 햇살은 권세혁을 위한 특수 효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문을 열자 송진 냄새가 훅 밀려 나왔다. 가게 입구는 좁았지만 기타가 전시된 내부는 넓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권세혁이 인사했다. Hola!

카운터 안쪽에서 주인이 일어났다. 책을 읽고 있었던 듯, 콧잔등에 걸린 무테안경을 벗으며 빙그레 웃었다. Hola.

권세혁은 백발의 외국인 앞에서 얼어 버린 류진의 손을 끌어당겼다.

“괜찮아. 우리말 할 줄 아시는 분이야.”

“아… 안녕하세요.”

“환영해요. 잘생긴 친구가 왔네.”

류진의 낯이 확 달아올랐다. 할머니뻘 되는 사람 앞에서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권세혁과 맞잡은 손바닥에서 땀이 솟았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권세혁은 멋쩍게 웃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 따라서. 난 금방 포기했지만.”

“아.”

그래도 드나드는 재미가 있었다. 굳이 악기를 배우지 않아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진열장 앞에서 권세혁은 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1882년에 생긴 가게는 아니야. 그랬다면 저 할머니는 영생을 사는 뱀파이어나 뭐 그런 거겠지?”

류진이 웃자, 권세혁도 따라 웃었다.

“그래도 오래되긴 했어. 올해로 12년째인가 그렇대. 그래서 우리말이 저렇게 유창한 거야.”

“응….”

“대단한 사람이지. 우리나라 영주권 받기 엄청 힘든데.”

권세혁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악기를 골랐다.

“난 이게 좋아. 형은?”

“나도?”

“형도 하나 있어야지. 나 가르쳐 주려면.”

역사와 전통의 라미레즈 기타였다. 초보자가 연습용으로 덥석 구매할 가격대의 악기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류진도 알고 있었다.

“난 없어도 돼.”

권세혁은 대놓고 서운해했다.

“아니야. 필요해.”

“진짜 없어도 돼.”

“하나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 귀찮잖아.”

“그럼 싼 걸로 사자. 중고도 괜찮아.”

“뭐야 그게. 싫어.”

권세혁은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다.

“형이 안 고르면, 똑같은 거로 두 개 산다.”

“고집부리지 마. 이거 사 봤자 짐이야. 내 방 좁아.”

“내 방에 두면 되잖아.”

권세혁은 심지어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형이 아예 내 방으로 옮기든가.”

“그렇게는 못 해.”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가게 주인이 다가왔다. 권세혁은 주인과 능숙한 스페인어로 몇 마디 대화했다. 이윽고, 주인이 진열장을 열어 기타 하나를 꺼내 류진에게 내밀었다.

“저, 저요?”

주인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만져 보라고 했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만졌다가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권세혁에게 말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의 다갈색 동공은 이미 기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주인에게 돌려주려고도 했으나 이미 카운터로 돌아가 버렸다.

류진은 한 손으로 넥을, 다른 한 손으로는 보디를 받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야, 이거….”

“조금만 쳐 주라. 나 형이 연주하는 거 보고 싶어.”

두 손을 코앞에 모으고 몸을 배배 꼬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에게 저런 눈빛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기대하는 눈빛. 자기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시선.

넥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에 바위가 들어앉은 듯 묵직했다.

“악기 망가지면 네가 책임져라, 권세혁.”

“알았어,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형이 하고 싶은 거 해.”

류진은 동그란 나무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소리를 조율해 보았다. 악기를 손에 잡는 순간,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손끝의 굳은살이 많이 물러졌다. 그래서 줄을 잡는 순간순간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자세도 편하고, 그립감도 낯설지 않았다. 류진은 플라스틱 칩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치던 곡.

좋아하던 음악.

쉬운 거.

류진이 처음으로 손에 잡은 기타는 누나의 것이었다. 교회에서 빌려 온 어쿠스틱 기타로 오래되어 낡은 악기였고, 그만큼 음색과 음량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악기로도 누나는 충분히 호소력 있는 연주를 해냈다. 기타 반주와 목소리만으로 몇십, 몇백 명의 사람들까지 끌어모았다.

그런 누나가 자랑스러웠다.

부러웠고, 좋아했다.

처음부터 범접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 놓고, 열등감을 꾸역꾸역 삼킬 만큼. 그래도 사랑할 만큼.

데뷔 초, 류연비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가수 연습생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영화였다. 나라에서 주최하는 대회에서 우승하면 정식 데뷔 기회가 주어진다는 내용이었는데, 흔해 빠진 전개와 식상한 결말, 또 지나친 민족주의로 영화 자체는 흥행하지 못하고 묻혔다. 심지어 류연비는 주연도 아니었다. 주인공 남자의 과거 첫사랑으로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배역이었다.

하지만 등장 신에서 보여 준 기타 연주가 관객들에게 어필해서, 해당 음원을 정식 발매하지 않느냐는 문의가 기획사로 쇄도했었다. 그 음원은 훗날, 류연비가 톱스타가 되었을 때 화장품 광고에서 한 번 더 등장했다.

가사도 있지만…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노래는 하기 싫었다.

마지막 한 소절을 남겨 두었을 때, 류진의 머릿속에 스탠드 마이크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권주혁의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혈관을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너 노래 한번 해 봐라. 얼굴만큼 목소리도 예쁜지 보자.’

“아!”

플라스틱 피크가 날아갔다. 황홀한 얼굴로 연주를 듣고 있던 권세혁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다. 류진은 허둥지둥 기타를 내려놓았다.

“괘, 괜찮아?”

권세혁의 푹 숙인 얼굴을 살폈다.

“미안해. 실수했어. 너 괜찮아?”

“아… 진짜….”

싸늘해진 분위기에 더럭 겁이 났다. 류진은 권세혁의 눈치를 살폈다. 화난 것 같았다. 아니, 화났다.

“그, 그래서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고개를 번쩍 든 권세혁이 웃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뭐야! 놀라게 하지 마.”

“장난 안 먹힐 줄 알았으면 나도 안 했지. 아, 뭐 겨우 이런 거 가지고 놀래. 근데 형 재주도 좋다? 어떻게 이마에 딱! 정통으로 아주 그냥 딱!”

류진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알아.”

권세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류진이 치던 기타와 자기가 고른 모델을 가리켰다. 주인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둘 다 주세요. 일시불요.”

당황한 류진이 말리기도 전에, 왕자님은 수표 두 장으로 해결했다.

강인우의 생각 속 정류진은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했다. 발랑 까진 놈.

차모은이 말하길, 과거 <백사자>는 그 애 때문에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정보조장 하신성 말고도 피해를 본 조직원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그 이유는 차모은의 선배인 백사율이 설명해 줬다. 곽현우의 이름 석 자 정도는 강인우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전 비서실장 곽재헌의 아들이니까.

백사율은 차모은만큼 정류진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소환해야 한다는 생각은 차모은과 같았다. 우승환의 죽음을 보고하는 전화 통화에서, 그는 정류진이 반드시 <백사자>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한다고. 우리는 그 애한테 묻고 싶은 게 많으니.

강인우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뺐다. 인혜는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인혜는 타고난 성정이 올곧고 성실했다. 이 나라에서 대학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냐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자신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강인우는 몇 번이고 당부했다. 너의 신념과 미래를 위해 힘닿는 데까지 헌신할 테니, 네 실력으로 입학한 대학의 졸업장은 반드시 손에 쥐라고.

열린 창문으로 후텁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 정류진의 이름이 붙은 캐비닛이 보였다. 강인우는 캐비닛으로 다가가 이름표를 만졌다. 눈을 씻고 봐도 정류진이었다.

이건 우연의 일치인가, 뜻밖의 행운인가.

정류진은 스물한 살이었다. 인혜보다 고작 한 살 많았다. 충분히 또래로 묶을 수 있는 범주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강인우는 정류진이 우승환이나 이로한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둘은 집단의 존속을 위해 희생되는 개인이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류진은….

물론 그도 배신자였다. 정류진은 진치우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 제아무리 똑똑하고 야무져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보통의 스물한 살이라면 아직도 학생이었다.

백사율은 보스가 정류진의 생존을 바란다 했다. 그 결정에 차모은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강인우는 보스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류진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비록 조직을 배신했으나 풍기 교육대의 혹독한 고문은 스물한 살짜리가 의지로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헌병대에 몸담고 있던 사람으로서 잘 알았다.

강인우는 정류진을 ‘제거’하고 싶지 않았다. 저항하면 팔다리 하나쯤 못쓰게 만들어도 괜찮겠지만, 제대로 ‘환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정류진은 갱생 가능성이 있었다. 하신성을 팔아넘긴 이로한이나 조직의 돈을 가지고 달아난 우승환과는 달랐다.

백사율로부터 전송받은 사진 속 빨간 머리 소년을 생각하며, 강인우는 언제나 최소한으로 꾸리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권세혁은 곧장 복귀하지 않았다. 류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국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는 복귀가 늦어지면 곤란하다는 류진을 조수석에서 질질 끌어냈다. 류진은 문손잡이를 붙잡고 버텼지만,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끌어 내려졌다.

권세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 가자! 예술이 뭔지 보러 가자!”

“조용히 해, 사람들이 보잖아…!”

“보기는 뭘 봐.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권세혁은 로비에서 입장권을 두 장 샀다.

“나 못 알아보나 봐.”

“그래서 서운하냐?”

“아니, 좋아. 형이랑 있는 거 방해 안 받잖아.”

권세혁은 은근슬쩍 팔짱을 끼어 왔다.

미술관 내부는 넓었고, 사람들은 적었다. 몇 안 되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뿐 남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류진은 뜻밖에 편안함을 느꼈다. 오롯이 혼자 있는 공간이 아니면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이었다.

“여기.”

권세혁이 팸플릿을 펼쳐서 건넸다.

“관별로 각각 다른 작품을 전시해. 형이 보고 싶은 거부터 보자.”

“내가?”

뭐가 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근대 미술, 현대 미술, 예술과 기술의 조화, 기증 작품 특별전… 하나같이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단편적인 포스터 사진만으로는 당최 무슨 작품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류진은 팸플릿을 한참 뒤적이다 그나마 주제가 짐작되는 그림이 인쇄된 페이지를 권세혁에게 보여 줬다.

“이거.”

“보자… 3관이네. 저쪽이야.”

“너는 뭐 보고 싶은 거 없어?”

“나는 형이 고른 거 볼 거야.”

권세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류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권세혁은 팸플릿을 뒤적이며 걸었다. 한 손으로는 류진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동물 민화네. 형 전통 작품 좋아하는구나.”

전시장은 로비에 비해 조명이 어두웠다. 권세혁은 너무 강한 빛이 그림을 바래게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형은 무슨 동물 좋아해?”

“개. 강아지.”

“나는 용.”

“그게 실제로 있는 동물이냐?”

류진의 타박에 권세혁이 삐죽댔다.

“형은 로망이 없어.”

“로망 좋아하네. 솔직하게 말해 봐, 너 어릴 때, 용이 있다고 믿었지?”

“…….”

“맞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아, 어릴 때잖아!”

류진이 펄쩍 뛰며 권세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용히 해.”

“괜찮아. 여기 우리밖에 없어.”

“우리밖에 없으면. 막 떠들어도 되냐?”

“어휴, 그렇게 규칙을 잘 지키세요? 이거 완전히 법 없이도 살 분이시네?”

권세혁의 비아냥거림은 진치우와 결이 달랐다. 듣고 있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류진은 웃으면서 걷다가,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전시관 한가운데였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커다란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늘과 땅이었다. 용과 범이었다. 구름 속에서 커다란 뿔과 송곳니를 드러낸 용과 땅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이었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숙명의 적이었다.

류진의 옆에서 권세혁이 감탄했다.

“멋있다.”

류진은 그림 하단에 붙어 있는 작품명을 봤다. 한자로 쓰여 있었다. <龍虎相搏>

“무슨 뜻이야?”

“용호상박. 아, 형 공부 좀 해. 저걸 못 읽냐.”

“…나 갈래.”

돌아서려는 류진의 팔을 권세혁의 큰 손이 낚아챘다. 뜻밖에 강한 힘이었다. 휘청휘청 끌려간 류진이 권세혁의 가슴팍에 코를 박았다. 재빨리 떨어지려 했으나 권세혁의 두 팔이 어깨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안. 내가 실수했어. 가지 마, 형.”

“이거 놔라.”

“미안해. 다음부터 절대 안 그럴게.”

“…….”

“용서해 줘. 응? 류진이 형. 다음부터 진짜 조심할게.”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으니까 놔.”

“근데 형 너무 말랐다. 몸이 딱딱해.”

“놓으라고.”

“밥은 많이 먹는데… 이상하네. 형, 혹시 몸에 기생충 있는 거 아냐? 나랑 병원 가서 검사해 볼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권세혁의 비명이 전시실 안에 메아리쳤다.

류진은 씩씩대며 걸어 나왔다. 그의 뒤에서 절뚝거리는 권세혁이 필사적으로 쫓아왔다.

“형! 진짜 미안해. 아 진짜 이놈의 입. 형! 같이 가. 같이 가!”

류진은 멈추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내가 용호상박도 못 읽는 게 누구 때문인데. 누군 말라깽이가 좋은 줄 아나. 남의 속도 모르면서 뭐, 기생충? 누가 누구더러 기생충이래.

류진은 미술관 회전문을 박차고 나갔다. 주차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발걸음을 재게 놀렸으나 타고난 보폭의 차이가 컸다.

“형! 류진이 형!”

허겁지겁 쫓아온 권세혁이 류진의 팔을 붙잡아 그를 돌려세웠다.

“형… 내가 진짜 미안해.”

“…….”

“미안해. 진짜, 맹세코 형한테 상처 줄 생각 없었어. 장난으로 한 말인데 내가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어. 미안해. 진짜, 이렇게 빌게.”

권세혁이 코앞에 양손을 붙이고 싹싹 비볐다. 하지만 류진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됐어. 이제 복귀하자.”

“형….”

“이미 늦었어. 늦게 복귀하면 나만 깨져.”

권세혁의 목울대가 꿀꺽 오르내렸다. 목소리가 사뭇 달라졌다.

“형. 사람이 사과를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

“알았으니까 복귀하자고.”

류진은 192센티미터의 권세혁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모욕적이었지만, 눈을 내리깔고 땅만 보는 게 더 자존심 상했다.

우중충한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살갗에 달라붙는 공기가 끈적끈적했다. 또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 권세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는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 문을 어찌나 세게 닫았는지, 지프가 통째로 흔들거렸다.

“저게!”

류진은 조수석 차창을 쿵쿵 두드렸다.

“야! 권세혁!”

차창이 내려갔다.

“뭐.”

“너 내려.”

“복귀하자며. 생각 바뀌었어?”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먼저 나한테 기생충이라고 그래 놓고 왜 화를 내?”

“나 내리면 형, 자기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있어?”

류진은 움찔했다. 권세혁이 움직였다. 조수석에서 내린 권세혁은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키가 이 미터를 넘는 것 같았다.

“내렸어.”

권세혁이 팔짱을 턱, 끼고 섰다.

“할 말 있으면 해. 나도 할 테니까.”

“너…!”

“좋아해.”

“뭐?”

류진의 무릎에 힘이 탁, 풀렸다. 권세혁이 손을 내밀어 류진을 부축했다. 목소리와 눈빛이 아까와 달랐다. 아까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용 같더니, 지금은 귀를 축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드는 대형견 같았다.

권세혁은 류진을 운전석에 앉히고 자기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나 진짜 형 좋아하나 봐.”

“무슨 헛소리야.”

“아까는 화난 척한 거야. 화내면 형이 나를… 봐줄 줄 알았거든.”

“미친놈아!”

“알아. 방법 완전 틀렸다는 거. 그래도 쬐금은 성공했다?”

“성공하긴 뭘 성공해!”

“형 지금 웃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응.”

권세혁이 싱글싱글 웃으며 룸 미러를 가리켰다. 류진은 자기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했다. 어떻게.

내가 권세혁 때문에 웃는다.

신해범이 보면 뭐라고 할까.

“조심해, 형. 나 태우고 가다가 사고 나면 총살이야.”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류진은 호기롭게 출발했으나 권세혁의 살벌한 농담 때문인지, 초보 운전자의 불안함 때문인지 오래 가지 못하고 갓길에 정차해 버렸다.

류진은 피식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이미 모든 걸 빼앗겼는데, 내가 그런 걸 무서워할 것 같으냐.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핸들을 부서져라 쥐고 있는 류진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형 괜찮아?”

“말 걸지 마….”

권세혁은 후회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자극한 것 같았다.

“형, 미안해. 아까 총살 얘기는 거짓말이야. 아니 그런 법이 있기는 한데, 내가 설마 형이 총살당하게 내버려 두겠어?”

류진의 얼굴이 창백했다. 앙다문 턱, 긴장으로 꼿꼿해진 목. 권세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이라서 그래. 처음엔 다 그래. 그리고 이거 자차도 아니잖아. 옆에는 나까지 있고. 그러니까 류진이 형, 이건 절대 형이 멍청해서가 아니야. 알지?”

“말 시키지 마.”

“형….”

권세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핸들을 움켜쥔 류진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손등에는 핏줄까지 불거졌다.

“형…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래?”

“…….”

“류진이 형….”

이제는 애원조였다. 권세혁은 류진의 팔을 살짝 잡고 흔들어 보았다.

“혀엉.”

이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아홉 살배기 동생 말투까지 따라 해야 할 판이었다.

“야.”

“어?”

“지금 비 내리지?”

“아….”

권세혁은 창밖을 보았다. 아침부터 날씨는 좋지 않았다. 기타 매장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개나 싶었는데,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들고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응. 비 온다.”

“비 오면 운전하기 더 어렵지?”

“그렇지. 특히 우리 같은 초보 운전자한테는….”

권세혁은 일부러 ‘우리’라고 말했다. 류진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길 바라면서.

“그럼 우리… 조금 쉬었다 가자.”

“어?!”

“조금 쉬었다 가자고.”

“아니, 형… 아까는 빨리 복귀하자며.”

권세혁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물론 그에게 복귀 시간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류진의 말이었다. 조금 쉬었다 가자는 말.

이거 그거잖아. 순진한 어린애 꼬셔 먹는 선수의 개수작….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저기 가자고.”

류진의 손가락이 차창 한가운데를 콕, 찍었다. 권세혁은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기?”

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 뭐야!”

권세혁은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곳에 가려나 했다. 고작 가리킨다는 곳이 길거리에 널린 커피 전문점이었다.

권세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서 호텔이 그렇게 멀지 않았다. 기왕 커피를 마실 거면 거리에 널린 카페보다는 좋은 데로 류진을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류진은 운전석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권세혁은 카페를 향해 돌진하는 류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머리둘레가 작아 사이즈를 최대한으로 줄인 탓에 길게 늘어진 볼 캡 꼬리가 팔랑거렸다.

“뭐야, 진짜.”

권세혁은 헛헛하게 웃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마음 안 바꾸는데.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권세혁은 마스크를 코까지 끌어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류진이 케이크 진열장 앞에 서 있었다.

“형.”

“왔어? 나 저거 초콜릿 케이크.”

“종류별로 하나씩 시켜. 알레르기 같은 건 없지?”

“없어. 그리고 많이 안 먹어도 돼.”

“아유, 배 속에 그놈 먹여 살리려면 많이 드셔야죠.”

류진의 주먹이 권세혁의 아랫배에 꽂혔다. 그는 복부를 얼싸안고 허어엉, 허어엉, 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커플이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류진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볼 캡을 깊이 눌러썼다. 주문은 권세혁이 했다.

“케이크랑 도넛 종류별로 하나씩 주시고, 카푸치노 두 잔요. 먹고 갈게요.”

그러고는 류진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 사람이 다 먹을 거예요.”

류진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도넛 하나를 통째로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먹으면서 권세혁이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온 쟁반을 훑었다. 뭐부터 먹을까 생각하는 눈이었다.

“안 뺏어 먹어. 이거 다 형 거야.”

권세혁은 쟁반 통째로 류진의 앞에 밀어 주었다.

“형 입술에 설탕 묻었다.”

“…….”

“천천히 먹어. 아무도 안 뺏어 먹어.”

“…….”

“커피도 좀 마시고. 목 막히겠다.”

“…….”

“형 진짜 나하고 말 안 할 거야?”

류진은 도넛을 커피와 함께 꿀꺽 삼키고, 권세혁의 갈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먹는데 말을 어떻게 하냐!”

“아, 미안. 미안.”

“그리고 나 기생충 있는 돼지니까 말 시키지 마.”

“혀엉.”

권세혁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주눅 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죽일 놈이다….”

“알면 방해하지 마.”

류진이 초콜릿 케이크로 손을 뻗었다. 권세혁이 포크를 건네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일부러 더럽게 먹었다. 권세혁보다는 신해범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식사 예절에 어긋나면 바로 손등을 후려치던 그, 신해범의 커다란 손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형. 나 좀 봐 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였다. 소파 사이사이 칸막이가 있어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었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은 권세혁이 몸을 숙이고 말했다.

“나 할 말 있어.”

류진은 시큰둥했다.

“돼지는 사람 말 못 알아듣는데.”

“형 돼지 아냐. 엄청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야.”

“아닌데. 돼진데.”

“아냐. 나 진짜 돼지에 성깔도 더러운 놈 실제로 만나 봤어. 그러지 말고 형, 나 좀 봐 주라.”

류진은 그제야 권세혁을 마주 보았다.

“무슨 얘긴데?”

권세혁의 표정이 비장했다. 그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비밀 하나 얘기해 줄게. 사과의 의미로.”

“됐거든. 보나 마나 하잘것없는 얘기겠지.”

“아닌데. 이거 특급 기밀이라 방송사에 팔아넘기면 꽤 짭짤할걸?”

류진은 먹던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크림이 묻어 미끄러웠다.

특급 기밀?

방송사에 팔아넘기면 짭짤한?

이거야말로 신해범이 원하는 거 아닌가?

류진은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했다. 커피를 마시며 컵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고 있었다.

“뭔데? 네 비밀이?”

“나, 어릴 때 기생충 감염된 적 있어.”

“컥!”

카푸치노 거품이 코로 넘어갔다. 류진은 어깨를 떨며 요란하게 기침했다. 허둥지둥 일어난 권세혁이 냅킨으로 류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형 괜찮아?”

“넌 진짜! 못돼 처먹었어, 넌! 그게 특급 기밀이냐!”

“아직 끝까지 말 안 했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네가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자꾸 나한테 기생충이라고….”

“왜 그래, 사람 얘기 다 들어 보지도 않고.”

류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더 들어 볼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난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나 어릴 때 유괴됐었어.”

“어?”

“지하 벙커에 갇혀 있었는데 아, 그 새끼들이 밥을 안 주는 거야. 그래서… 음… 형 식사 중이니까 자세한 얘기는 생략할게.”

심각한 이야기인데 진지하게 들을 수 없었다. 말하는 당사자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류진은 권세혁의 다갈색 동공을 노려보았다.

“장난치지 마라.”

“진짜야. 이거 말해 주는 이유는, 음, 내가 아무래도 계속 걱정이 돼서. 혹시 우리 엄마가 형 건들면, 이거 확 폭로해 버려. 그럼 괜찮을 거야. 이거 진짜로 아무나 모르는 사실이야.”

권세혁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은밀하게 속삭여 왔다.

“숙부님도, 해범이 형도 몰라. 무혁이도 모를걸? 그때 걘 엄마 배 속에 있었으니까.”

그 방은 천장에 문이 있었다. 가로 오십 센티미터, 세로 삼십 센티미터.

“무허가 지하 벙커였는데 수맥이 흐는 자리였대. 내가 갇혀 있었던 곳 말이야.”

습하고 축축했다. 벽에는 타일이 발라져 있었으나 천장과 바닥은 콘크리트 그대로였다. 바퀴벌레와 지네를 비롯한 온갖 벌레가 기어 다녔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빈말로도 안락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곳에서, 권세혁은 테이프를 얼굴에 둘둘 감고 지냈다. 말하고 먹을 수 있는 입만 뚫려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디데이 첫째 날에 깨달은 바 있었다.

“형한테 관심 끌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냐.”

권세혁은 개구쟁이 소년처럼 혀를 쑥 내밀었다. 혓바닥 한가운데가 눈에 띄게 파여 있었다.

“뭐야?”

“총신에 긁혔어.”

“…왜?”

“그놈이 내 입 닥치게 하려다가.”

류진이 멍하니 쳐다보자, 권세혁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첫날에 꽤 저항했거든.”

“…….”

“내가 있던 곳 말이야, 사령부 지도에도 없는 시설이었대. 무허가 비밀 기지였던 셈이지. 아마 전쟁 때 만들어졌을 거야. 그런 데가 은근히 많나 봐. 사이비 종교 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는데… 뭐 그런 얘기는 잘 모르겠고.”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안 아파?”

“그럼. 다 아문 지가 언젠데.”

권세혁이 시큰둥하게 콧등을 긁었다.

“범인들 중에 의사나 간호사가 있었던 것 같아.”

얼굴은 몰랐다.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상처를 소독하고 꿰매 주었다. 실밥은 입 안에서 저절로 녹아 사라졌다. 뒤늦게 상처를 발견한 주치의에게는 괜찮다고 말했다. 이제 안 아프니까. 어차피 다 아물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아. 가끔 신경 쓰이긴 하지만.”

항구 도시 장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장두현은 자신의 마당에서 손자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그는 정계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만큼 공권력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다. 장두현은 납치된 손자를 찾기 위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수사를 통솔했다.

장승희는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총통의 교육 방침 자체가 ‘살아남은 단 한 명’이었다. 승계 전쟁에는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권세혁을 납치한 세력도 그걸 노렸다. 나라를 입맛대로 주무르고 있는 총통은 제 자식들을 굽어살필 여유가 없었다.

알아서 살아남아라. 알아서 기어 올라와라. 지구상의 위대한 자연은 한낱 인간들의 아귀다툼에 개입하지 않으니.

그래서 승계 전쟁은 외가의 힘이 클수록 유리했다. 권세혁은 외조부와 장가의 사병들 덕분에 구조되어 살아남았다. 그러나 만약 유괴된 아이의 외가가 평범했다면.

권세혁은 류진이 먹다 남긴 케이크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유괴범은 면식범일 확률이 높다고 하잖아.”

장두현은 처음부터 원한에 의한 납치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집안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당시 임산부였던 장승희마저 태연하게 기존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장두현은 장가의 경쟁자들을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제거해 나갔다.

“경쟁자들?”

“차기 총통 후보들.”

대중에 알려진 총통의 자녀는 7남 4녀였다. 그중에 단 두 명만이 호적에 이름을 올린 적통이었다. 권세혁과 권무혁.

하지만 호적에 없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혈육이라고 밝혀진 자가 권세혁과 권무혁을 제외하고도 아홉이었다. 기우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아마 더 있을 거야. 조용히 살고 싶어서 나서지 않을 뿐이지. 아, 그리고 죽은 사람은 카운트 안 하니까.”

“죽은 사람?”

“예를 들면… 아, 우희 누나한테 동생 둘 있었다고 알아. 여자애 하나, 남자애 하나.”

류진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소령님한테….”

“오해하지 마. 우리 집에서 어떻게 한 거 아니니까. 뭐랬더라, 굶어 죽었다고 했나?”

“뭐?”

“아, 아니다. 남자애가 아파서 죽었고, 여자애는….”

류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권세혁이 멍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왜?”

“소령님 없는 데서 그런 얘기 하지 마.”

권세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앉아.”

류진은 주먹을 쥔 채 시선을 운동화 끝에 고정했다. 권세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왜 우희 누나한테 잘하는지 알아? 그 사람은 내 경쟁자가 아니어서야.”

“…….”

“중요한 건 핏줄이라는 증거. 호적. 거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나랑 무혁이뿐이야. 그런데 무혁이는… 솔직히 걘, 내 상대가 안 되잖아.”

류진은 놀란 눈으로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아끼는 친동생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 애는 너무 어려. 약하고.”

권세혁이 중얼거렸다.

“난 그 지하 벙커에서 살아남았어. 그때가 열 살이었나 열한 살이었나 그랬어. 믿어져? 열한 살짜리 꼬맹이가 유괴범들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어. 말 잘 듣고, 울지 않고, 편식하지 않고, 아파도 참고… 가장 힘들었던 건 말이야, 즐거운 척하는 거였어.”

“즐거운 척?”

“이건 놀이일 뿐이고, 금방 집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놈이 있었거든. 난 그 말을 믿는 척했어. 날 성가신 애라고 생각할까 봐. 유괴범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귀찮으면 죽이잖아.”

권세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무혁이는 나처럼 못 해. 걔는 그런 일 당하면 죽어.”

류진은 호월루에서 본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권세혁의 목을 감싸 안고 매달리던 아이. 도저히 아홉 살로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작고 말라서.

“하지만 난 아니거든.”

권세혁은 그 일에서 배운 게 있다고 말했다.

“살려면 남들 비위를 맞춰야 해. 착하게 굴어야 돼. 상대방이 내게 호감을 갖게 만들어야 돼. 약할 땐 그럴 수밖에 없어.”

“약할 땐…?”

“그렇게 살아남아서 지금 이렇게 됐잖아.”

권세혁이 제 가슴팍을 퍽, 때렸다.

“지금 나는 약하지 않아. 살아남아서 이렇게 강해졌어. 내 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지켜 줄 수 있지.”

권세혁이 대뜸 손을 잡아 와 류진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손을 빼려고 했으나 악력이 신해범 저리 가라였다.

“다른 사람도 지켜 줄 수 있어.”

“…….”

“구조됐을 때, 나 엄청 칭찬받았어. 외조부님은 내가 똑똑하고 굳세다고 했어. 과연 자기 핏줄이라고.”

“…….”

“나중에 들은 얘긴데, 엄마도 어릴 때 유괴될 뻔한 적 있었대. 아기 때부터 키워 준 입주 보모였는데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도로 집 앞에 데려다 놨다나.”

장두현에게 아이를 잃어버리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권세혁의 유괴 사건 때 침착할 수 있었다.

장두현의 삶은 도전과 경쟁, 위기와 극복의 연속이었다. 장승희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 투쟁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은 권세혁이었다.

“잘도 말하네.”

“응?”

“아무리 옛날 일이라도… 그런, 넌, 그런 얘길 어떻게 나 같은 사람한테 함부로…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냐?”

“믿으니까.”

권세혁은 웃고 있었다.

“나를?”

“형은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났어. 나한테 필요한 걸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있잖아, 난 가끔 형이 이전부터 날 알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 내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말이야.”

알고 있었지.

류진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신해범이 보여 준 권세혁의 사진이 생각났다. 명문 고교의 회색 제복을 입고,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태양처럼 환하게 웃던.

사진 속 권세혁은 행복해 보였다.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실존하는 권세혁은 그렇지 않았다.

기우희는 총을 장전했다. 약실에 든 탄환은 공포탄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향해 겨눠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기우희의 총구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선두에서 행진하는 사람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소령님.”

성재경이 기우희를 불렀다. 기우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기관총으로 우다다다 쏴 갈겨 버리면 안 될까. 저항하는 사람보다 시체 치우는 게 더 쉬운데.

“소령님.”

“뭐.”

“조심하십시오.”

기우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쪽 입술을 샐쭉 끌어 올렸을 뿐.

탕! 하늘을 가르는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비명이 솟구쳤다. 거리가 요동쳤다. 건물과 전봇대를 비롯한 시설물이 몸을 떨었다. 성재경은 무심하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무전기를 통해 응답이 빗발쳤다. 최루탄 발포, 지랄탄 발포, 진압하라. 체포하라. 국가의 안위와 존속을 위협하는 반란 분자들을 모조리 때려잡아라.

기우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재경이 재빨리 불을 붙여 주었다. 크고 새카맣고 커다란, 탱크를 닮은 대형 군용차는 살수차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한 풍기 교육대 진압 팀 전용 차량이었다. 풍기대에서도 단 세 대뿐인 이 차량은 각각 무조, 완아, 영월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기우희는 이 세 자매를 번갈아 몰았지만 1호기 ‘무조’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듬직했다. 큰딸이라서 그런가.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피던 성재경이 보고했다.

“전원 하이바와 쇠 파이프로 무장했습니다. 스크럼 안쪽에서 소화기도 보입니다. 바리케이드는 공장에서 가동하던 기계 같습니다.”

기우희는 무조에서 가뿐하게 뛰어내렸다. 총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공포탄을 쐈으니, 약실로 들어온 건 이제 진짜 탄환이었다. 기우희는 멀찍이서 파이프를 휘두르며 돌진하는 남자의 넓적다리를 겨냥했다.

“살려는 드릴게.”

권주혁의 화천 지구 개발 사업으로 강제 철거된 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치약 공장, 비누 공장, 다들 고만고만한 규모였으나 한데 모이니 제법 머릿수가 되었다.

기우희는 고글을 내려 쓰고 총을 겨눴다. 시위자를 쏠 때 넓적다리를 노리는 게 요령이었다. 몸통은 위험하고, 팔은 쉴 새 없이 움직여서 조준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허벅지는 면적이 넓고 총알이 관통해도 치료가 가능한 부위였다. 운이 나빠서 무릎을 관통할 수도 있겠지만 뭐, 그러기에 남자가 집에서 밥 짓고 빨래나 하지 그랬어.

기우희는 앞으로 나아가며 연사했다. 방패를 든 대원 둘이 따라붙었다. 발사, 장전, 발사, 장전, 발사. 순식간에 사수대를 무너뜨린 기우희는 씩 웃었다. 노동자 시위는 학생 시위에 비해 무장을 제대로 갖췄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스크럼이 느슨했다. 경험 부족이다. 다음부터는 대학생 애들 어떻게 하는지 보고 와.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령님!”

불붙은 타이어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데도 활활 잘 타는 걸 보아하니 약품 처리를 거친 모양이었다. 시위자 측 바리케이드에도 불이 붙었다. 기우희는 그들이 각오했음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았다.

기우희의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아갔다. 헌병대의 지원이었다. 시위대에서 고함과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이바를 뒤집어쓰고 나름대로 대비했지만 헬기가 공중에서 뿌려 대는 최루액에는 장사가 없었다.

“소령님, 소령님!”

기우희는 한 손에 방패, 다른 한 손에는 기관총을 들고 뛰어온 성재경의 옆구리를 쳤다.

“뭐야?”

성재경은 방패를 우산처럼 들고 있었다.

“약품 맞으시면 안 됩니다.”

“육갑 떠네. 방패 내려. 이따위로 쓰라고 있는 장비 아니다.”

“화학 약품 맞으시면 안 됩니다.”

“중사.”

기우희의 무릎이 성재경의 복부에 꽂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성재경은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침을 토해 냈다. 그의 머리 위로 기우희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네 자리를 지켜라, 성재경.”

장승희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퍼스널 쇼퍼에게 손짓했다. 옆구리에 태블릿을 낀 직원이 황급히 텔레비전을 껐다. 그는 뉴스에 집중하고 있던 신해범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신해범은 잔뜩 긴장한 직원에게 이해한다는 미소를 보냈다. 그가 틀어 놓은 뉴스에서는 풍기 교육대의 진압 현장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국가에서 충분한 보상을 지급했음에도 불구, 무장한 채 거리를 장악한 노동자 시위대를 막기 위해 풍기 교육대의 진압 팀이 출동했다는 내용이었다.

장승희로부터 전임자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퍼스널 쇼퍼는 어째 볼 때마다 마르는 듯했다. 까다로운 고객에 맞추느라 마음고생이 심한가 보았다. 신해범은 그 퍼스널 쇼퍼에게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그래서 불평을 속으로 삼켰다. 빌어먹을,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못 보게 해.

신해범은 테이블 밑으로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세 시간 가까이 긴장을 풀지 못했다. 정면 시선, 구십 도 허리를 유지하느라 온몸의 관절이 다 삐걱거렸다. 심지어 장승희는 만날 때 행사용 정복을 갖춰 입고 나오기를 요구했다. 한여름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 장마철에.

신해범은 하절기용 반팔 셔츠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다. 장승희에게서 풀려나는 즉시 갈아입을 계획이었다. 그 전까지는 계급장이 주렁주렁 달린 묵직한 재킷을 입고 있어야 했다. 백화점 VIP실의 최신식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가 힘을 냈으나, 모자도 재킷도 벗지 못하는 가엾은 군바리에게는 있으나 마나 했다.

신해범은 안경까지 쓰고 보석 상자를 들여다보는 장승희의 늘씬한 뒷모습을 응시했다. 삼십 분은 더 저럴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사람 살려.

오늘 장승희의 관심사는 보석이었다. 올마이티 그룹의 자회사 중 하나인 골드&아이언 사의 루비 반지. 독일에서 날아온 딜러 윤금강은 금발로 탈색한 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로,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장신이 인상적이었다.

윤금강은 특유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최근 독일 박물관에 새로 들어왔다는 거대한 다이아몬드 원석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장승희와 그의 퍼스널 쇼퍼는 홀린 듯 윤금강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 덕에 신해범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건 신해범 맞은편 소파에 구겨지다시피 앉아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신해범은 말없이 그를 관찰했다.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는 골드&아이언 비서실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리 봐도 비서로서 하는 일이 없었다. 신해범의 모자챙 아래 날카로운 시선이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생김새는 저기 있는 윤금강을 빼다 박았고 나이는 많이 쳐줘도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외모는 세련됐지만 어린 티가 났다. 턱과 목덜미에 솜털이 보송했다. 신해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권세혁 과다.

이쪽의 시선을 느낀 건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놓고 비꼬았다.

“제복이 멋지군요.”

이 날씨에 덥지도 않으냐는 뜻이었다. 신해범은 싱긋 미소 지었다.

“신입인가?”

“뭐 그냥 배우는 중입니다. 누님은 제가 곁에 없으면 불안해하시거든요.”

“저쪽은 여기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이는데.”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하는 분이셔서.”

“그런 사람치고는 곁다리가 많군, 그래.”

남자는 신해범이 경멸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타인의 능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기생충. 뒷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깡통. 본인도 그렇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꼿꼿하게 목에 힘주고 남을 깔아 보는 것이다. 밑천 드러날까 봐.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해범은 장승희의 쇼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 방 먹인 걸로 만족하고 물러섰다.

“경험을 쌓는 건 좋은 일이지.”

“경험은 선택의 폭을 넓어지게 해 주니까요. 많이 듣는 소립니다.”

신해범은 남자의 사원증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자네 이름이?”

증에 버젓이 나와 있는 이름을 구태여 물어본다는 건 상대방의 신분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불쾌한 기색 없이, 선뜻 악어가죽 카드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윤태금입니다.”

신해범은 윤태금의 이름 석 자만 확인한 뒤, 명함을 투명한 유리 테이블 위에 고이 내려놓았다. 남매 이름에 나란히 ‘금(金)’이 들어간다. 부모가 얼마나 재화에 한이 맺혔으면.

“좋은 이름이군.”

“그것도 많이 듣는 소립니다.”

“아니, 정말로 잘 어울려.”

“존함을 여쭤도 될까요?”

신해범의 입술이 꿈틀했다. 지나친 높임말은 때로 신경에 거슬린다.

“신해범.”

“좋은 이름이군요.”

“그래 보이나?”

“본명입니까?”

“왜?”

“좋은 이름이지만, 잘생긴 형님께는 좀 더 부드러운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까, 주제넘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제넘는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야.”

신해범과 윤태금은 서로를 응시했다. 앙다문 턱 근육이 경련하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신해범은 척추 끝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감각의 정체를 알았다. 동족 혐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많이 배우고 갔으면 좋겠군. 머무는 동안 좋은 시간 보내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부인께서 특별히 신뢰하고 계시니, 대접이 소홀하지는 않을 거야.”

“제게는 과분하죠.”

“과분하다?”

“애초에 이 자리가 제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윤태금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리에 앉은 채 상대방 쪽으로 몸을 내미는 제스처는 신해범에게도 있는 습관이었다. 초식 동물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빨과 턱에 자신 있는 맹수만이 가능한 제스처였다.

“누님께서는 골드&아이언을 세계적인 보석상으로 키울 계획이고, 또 저를 그 거함에 태워 줄 용의가 충분히 있으시지만, 사실 제가 관심 있는 분야는 그쪽이 아니거든요.”

“그래?”

“형님께서 몸담고 계시는 곳과 가깝습니다.”

신해범이 후후 웃었다.

“군부에 뜻이 있는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윤태금이 턱을 치켜들었다.

“저는 메카닉 전문가입니다.”

나이 어린 포식자의 자신만만함. 신해범이 질문했다.

“군대와 메카닉이라.”

답은 바로 나왔다.

“로봇 부대라도 키울 셈인가?”

“역시. 현역 군인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십니다.”

곱게 큰 도련님들은 다들 이런가? 신해범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착각을 하는 건 권세혁뿐이 아니었다. 그리고 윤태금은 권세혁보다 훨씬 질이 나쁜 종류의 도련님이었다.

무식한 게 용감하면 본인이 다친다. 하지만 똑똑한 게 작정하고 설치기 시작하면, 본인만 멀쩡하고 주변 사람들이 다친다. 설치는 놈의 사이즈에 따라 피해의 단위는 개인, 도시, 사회 전체로 번진다. 때로는 한 나라 전체를 뒤흔들기도 한다. 그건 내전이다. 더 나아가, 분쟁이 국경선 안에서 진화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전쟁이다.

“못 들은 얘기라고 해 줘야 자네가 안심하겠지?”

윤태금이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누님께서 걱정이 많으시겠어.”

“그러잖아도 구박받고 있습니다. 싹수가 노랗다나요.”

“모쪼록 우리 세대에 전쟁은 없기를 바라지.”

“하루하루 사는 게 전쟁이지요. 형님께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윤태금은 앉은자리에서 눈동자만 굴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장승희가 있었다.

신해범은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자리에서 리볼버로 윤태금의 대가리를 날려 버리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 여행자에게 재앙을 막은 영웅으로 칭송받게 될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장승희는 반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워낙 고가의 귀중품이라 골드&아이언 사의 보안 차량이 신계동의 자택까지 운반했다. 신해범은 금(金) 남매가 탑승한 보안 차량의 뒤를 따라 운전하려 했으나 장승희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목적지를 지정했다.

“쇼핑도 에너지 소모가 커. 잠깐 쉬었다 가고 싶어.”

신해범은 새삼 자신이 귀부인의 명품 백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뜻밖에 동족을 만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저 나이 어린 포식자가 훗날 어떤 괴물로 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는 나라의 존속을 위태롭게 한다면 신해범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쪼록 오늘의 만남을 후회하지 않게 되길.

신해범은 쏟아지는 찬물을 맞으며 눈꺼풀을 깜박였다.

장승희와 몸을 섞을 때마다 정류진을 생각했다. 그렇다는 사실에 죄책감은 없었다. 자기가 팔뚝만 세게 쥐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놈이지만, 아랫배가 지끈거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정류진은 그랬다.

욕실에서 나와 물기를 닦지 않았다. 신해범은 흠뻑 젖은 채 침대로 돌진했다. 매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그의 특기였다. 그것 하나만 잘해도 중간은 간다. 물론, 더 위로 올라가려면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죽어라 용쓰고 있지.

류진의 뒤통수는 신해범의 한 손아귀에 잡힐 정도로 작았다. 작은 얼굴을 떠받치는 긴 목이 아래에서 쳐올릴 때마다 부들부들 떨렸다. 그 매끄러운 목선을 핥고, 말라서 각 잡힌 어깨에 이를 박아 넣는 건 신해범이 아주 좋아하는 행위였다.

도드라진 견갑골, 마른 근육이 탄탄하게 붙어 늘씬한 허리. 고통을 참느라 움켜쥔 양 주먹은 두부도 으깨지 못할 정도로 약해 보였다. 그런 손으로는 어느 것 하나 지키지 못한다.

신해범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새하얀 시트 위에 놓인 장승희의 희고 가는 손을 붙잡았다. 뜻밖의 악력에 그가 신음했다. 신해범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통제하려 애썼다.

구슬땀이 신해범의 단단하고 유연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팽팽하게 뻗은 쇄골이 오르내렸다. 신해범의 단단한 어깨에 여자의 긴 손톱이 박혔다. 그는 입술을 끌어 올려 한껏 미소 지었다.

신해범에게 있어서 통증은 쾌감과 비슷했다. 주먹을 휘둘러선 안 되는 상대 앞에서는 스스로의 허벅지를 찔러서 피를 내야만 욕구를 제어할 수 있었다. 그건 방류를 코앞에 두고 억지로 걸어 잠가 버린 수문 같았다. 폭발하듯 터져 나오던 물보라가 별안간 장벽에 가로막혀 역류하는 꼴이었다. 억제당한 욕구, 목적지를 잃고 허공으로 치솟은 에너지. 신해범은 한계가 머지않았음을 깨달았다. 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는 장승희의 안에 자신을 힘껏 파묻으며 으르렁거렸다. 정류진이 보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이 막혔다. 라디오가 금일 벌어진 시위 때문에 도로가 정체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권세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케이크와 도넛이 포장된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류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길이 좀… 막히네.”

“비가 와서 그런가 봐.”

“제5 중앙 병원 생각난다. 그 중딩 다 나았으려나.”

류진이 상자에 묶인 보라색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야.”

“형도 맞았잖아. 그때 나 심장 멎는 줄 알았어. 아, 그놈 얼굴을 제대로 봐 두는 건데.”

“봐 두면 뭐 어쩔 건데.”

권세혁이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신호가 바뀌었다. 그는 타이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속도를 줄여서 운전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올해는 작년보다 장마가 길 거래.”

권세혁이 말했다.

“태풍도 온다는데, 항구 도시 쪽에 피해가 클 거야. 뭐 외조부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항구 도시는 어떤 데야?”

권세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류진이 자신의 고향에 관심을 갖는 게 기뻤다.

“좋아. 제2의 직할시라는 말이 딱 맞아. 여기 애들은 장진이 무조건 시골이라고 생각하던데 전혀 아냐. 오히려 유행은 그쪽이 더 빠를걸? 외국이랑 직통으로 교류하는 데니까. 번화가 나가면 되게 신기해. 꼭 외국에 나간 기분이야. 사투리 쓰는 사람, 표준말 쓰는 사람도 있고, 외국 말 하는 사람까지 다 섞여 있거든. 물론 외국인도 많고. 외조부님이 호텔이랑 리조트 새로 지었는데 시설이 꽤 괜찮아.”

호텔과 리조트. 팔자 좋은 부자들이 휴가를 보내는 장면을 상상하며 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도 가 봤어?”

“아니. 나 광성 올라온 다음에 완공돼서. 방학 때 내려갈 순 있었는데, 운동을 하다 보니까 여유가 없었어. 연습하고 출전하고, 연습하고 출전하고… 그 바닥이 좀 그래. 연습 빠지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어. 규칙도 엄하고. 주전 경쟁은 또 얼마나 치열한데. 뒷담화는 은근 심해. 형, 믿어져? 연습 중에 물 좀 마셨다고 욕을 막 하더라니까.”

“너한테?”

“걔들은 내가 들었는지 모를 거야.”

권세혁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좆나 한심하네. 내가 왜 그런 놈들한테 목을 맸지?”

“…….”

“지금은 괜찮아. 나한텐 형만 있으면 돼.”

어느새 목적지가 보였다. 풍기 교육대의 12층 본관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비바람에 휘날리는 황룡기가 보였다. 류진은 말없이 케이크 상자를 끌어안았다.

권세혁은 후문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머리털만 눈에 띄어도 사람 얼굴만 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생팬에 대한 공포심이 전에 없던 신중함을 만들었다. 문제가 있다면, 후문 주차장에는 기대마를 비롯해 작전에 동원되는 대형 차량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권세혁은 한참을 빙빙 돈 끝에 빈자리 하나를 찾아냈다. 건물 입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형, 잠깐만.”

“왜?”

무심코 고개를 돌린 류진은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권세혁을 보았다.

“너 뭐 해?”

“우산이 없어서. 형 이거 머리에 써.”

“됐어. 그냥 뛰어가면 돼.”

“그래도.”

뜯어말려도 소용없었다. 권세혁은 부득불 자기 셔츠를 류진의 머리에 덮어씌웠다.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운전석을 뛰쳐나갔다. 그가 셔츠 안에 입고 있었던 반팔 티셔츠가 빗물에 젖었다. 젖은 천이 권세혁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비쳐 보였다. 류진은 황급히 조수석에서 내렸다. 권세혁이 류진의 손을 붙잡고 외쳤다.

“형, 뛰어!”

엉겁결에 따라 뛰었다. 건물로 들어가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뛰기도 전에, 류진의 마른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빗길에 발이 미끄러졌다.

“아!”

세상이 기울어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순간 류진의 눈앞에 떠오른 건 밑창이 매끄러운 컨버스 운동화였다.

군인들이 왜 무겁고 딱딱한 워커를 신고 다니는지 알겠다. 빗길에 달려도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는 신발이니까.

“형!”

권세혁이 뒤돌아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류진은 팔꿈치로 땅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비 웅덩이에 처박은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케이크 상자는 저만치 날아가 박살 났다. 두고두고 아껴 먹으려고 했던 간식들이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 광경을 보자 울컥했다. 류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참았다.

“형 괜찮아? 어디 봐!”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권세혁이 류진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형 미안해. 내가 손을 놓쳤어.”

권세혁이 놓친 게 아니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하자마자 류진은 맞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팔다리가 따갑고 후끈후끈했다. 땅을 적시는 빗물에 붉은 피가 섞였다. 바닥을 내려다본 권세혁이 입을 벌렸다. 넘어지면서 류진의 무릎과 팔꿈치가 아스팔트에 갈렸다.

“형! 피 나!”

“괜찮아. 이 정도는….”

“병원, 아니 의무실 가자. 나한테 업혀!”

류진은 억지로 자신을 들쳐 업으려는 권세혁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권세혁은 무조건 업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옥신각신하던 중, 후문 입구에서 밝은 빛이 터졌다.

여섯 개의 푸른 헤드라이트가 빗물로 젖은 아스팔트 바닥을 쫙 갈랐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류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땅의 진동이 두 다리를 통해 올라와 척추를 때렸다.

웅크린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것만 같은 묵직한 배기음.

세찬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돌아가는 엔진.

뜨거운 연기를 내뿜으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기동대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류진은 저 커다랗고 새카만 군용 차량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탱크와 살수차와 지프를 섞어 놓은 모습은 <백사자> 시절 소리만 들어도 튀라고 교육받은 풍기대 진압 팀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곽현우를 빼앗긴 날이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짐짝처럼 육공트럭에 던져 넣은 신해범이 바로 저 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 기동대원보다 훨씬 여유롭게, 또 우아하게. 악마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다.

“정 이병, 괜찮아?”

빗물에 젖은 눈꺼풀을 깜박이며, 류진은 자신의 팔을 잡아 부축하는 성재경을 응시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걸을 수 있겠어?”

권세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류진의 팔을 잡은 성재경을 노려보았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성재경 중사?”

성재경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물론 권세혁은 그가 침착함을 되찾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 손 놔요. 류진이 형은 누가 함부로 만지는 거 안 좋아하거든.”

성재경은 진압 차량으로 돌아갔다. 사수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기우희가 물었다.

“어때 보여?”

“저를 경계하십니다.”

“강인우가 불쌍하군.”

“예?”

“팔 한 번 잡은 걸로 잡아 죽일 기세인데, 쟤랑 한방 쓰는 강인우는 얼마나 경계하겠어.”

성재경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대장님이….”

“주의를 엉뚱한 데로 돌려서 진짜 중요한 사실을 못 보게 만드는 거지.”

치정 싸움은 그랬다. 내 일이면 미치는데, 남의 일이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둘이 실컷 치고받고 싸우게 내버려 둬. 어느 쪽이 나가떨어지든 우리한텐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소령님….”

“하지만 뭐?”

“그러면 류진이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습니다.”

“크흐흡!”

성재경이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믿기지 않았다.

“소령님?”

기우희가 웃었다. 웃다가 담배 연기를 잘못 들이마셨는지, 요란하게 기침했다. 그가 뿜어내는 회색 연기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섞였다.

“웃기는 놈.”

“…….”

“뭐 해? 주차 안 해?”

“예, 알겠습니다.”

성재경은 차창 너머 멀어지는 류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권세혁에게 업힌 뒷모습이 기억보다 훨씬 마르고 작아 보였다.

최유신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솟았다. 권세혁의 눈빛에 질식할 것 같았다. 권세혁 왕자가 장래의 롤 모델로 신해범을 꼽는다는 사실은 인터뷰를 봐서 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신해범의 좋은 점은 빼고, 상대방 기죽게 하는 고약한 버릇만 배운 모양이었다.

최유신은 이마에 달라붙는 권세혁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류진은 소독하는 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최유신은 소독한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며 말했다.

“이거 줄 테니까 수시로 발라. 딱지 앉으면 억지로 떼지 말고. 별거 아니라고 방치했다가 상처 덧나서 오는 놈들 많다.”

“네. 감사합니다….”

류진을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권세혁이 꿍얼거렸다.

“설교는….”

“조용히 해.”

“저런 건 나도 알아.”

류진이 팔꿈치로 권세혁의 옆구리를 쳤다. 소독약과 솜을 들고 돌아선 최유신이 무심하게 말했다.

“다 들립니다. 왕자님.”

“원래 환자들 몸 주물럭거리고 그럽니까? 그런 망나니들 때문에 멀쩡한 의료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충을 겪는지 알아요?”

류진의 얼굴이 하얘졌다.

“너 조용히 안 해?!”

“아니 그렇잖아. 내가 아까부터 계속 봤는데.”

“보긴 뭘 봐? 혼자서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최유신은 진지하게 자신의 눈빛이나 목소리, 사소한 행동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니 정말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무슨! 신해범이랑 하는 짓이 똑같았다. 왕자만 아니면 핀셋으로 혓바닥을 콱 찔러 버리는 건데.

최유신은 빙글 돌아섰다. 하얀 가운이 바람에 흔들렸다. 냉장고에서 아끼는 보리차 병을 꺼냈다. 두 잔을 따라서 가져갔다. 류진은 순순히 받아 마셨으나 권세혁은 종이컵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기만 했다.

“뭐 안 탔습니다.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의심 많은 왕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유신은 먼저 한 모금 마셨다. 권세혁은 그제야 보리차에 입을 댔다. 제법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단숨에 컵을 비워 버리는 걸 보니.

“한 잔 더 드릴까요?”

“됐습니다.”

최유신은 성숙한 어른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거절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권세혁에게 보리차 병을 통째로 내주었다.

“받으십시오.”

권세혁은 묵묵히 종이컵에 보리차를 따랐다.

“의사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권세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제스처마저 기가 막힐 정도로 신해범과 똑같았다.

“저도 돌려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닙니다. 사람이 편협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단도직입으로 묻죠. 류진이 형하고 어떤 사입니까? 최유신 대위.”

보리차를 마시던 류진이 물을 뿜으며 쓰러졌다. 최유신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되물었다.

“예?”

“류진이 형이랑 필요 이상으로 친해 보여서요. 꼭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류진은 움찔했지만, 최유신은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제 스타일이 이렇습니다.”

“스타일요?”

“정 이병만 특별히 친근하게 대하는 게 아닙니다. 풍기 교육대의 모든 대원들을 편하게 대합니다. 의무실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은 제 환자고, 환자가 병원이나 의사를 부담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지요. 물론 이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의료인도 있습니다만….”

최유신은 살짝 미소 지었다.

“저는 의사와 환자 간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황이 받쳐 주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최유신은 그렇게 말하고 보리차를 마셨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류진이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권세혁을 쳐다봤다. 권세혁은 멋쩍은 얼굴로 큼큼 헛기침을 했다.

사실, 권세혁은 의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릴 적 심리 치료를 이유로 만났던 정신과 의사는 어린 권세혁의 부주의함과 순진함을 문제 삼았다. 지금 신계동 자택에 드나드는 동생의 주치의도 엄하고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최유신이 말하는 의사와 환자 간의 소통은커녕, 피곤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무심하게 처방전만 휘갈겨 쓰곤 했다.

권세혁은 그 의사들이 참 싫었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들에게 시간 낭비 할 바에야 인터넷에 검색해서 약 사 먹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권세혁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사과드립니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성심껏 왕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부담 없이 찾아 주십시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보며, 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권세혁은 부득불 류진을 들쳐 업었다. 내려놓으라고 발악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류진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권세혁과 그에게 업힌 류진을 중심으로 둥그런 공백이 생겼다. 권세혁은 그게 왕자로서의 존재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덜 마른 몸에서 풍기는 꿉꿉한 냄새 때문이었다.

권세혁은 자기 등에 얼굴을 파묻은 류진이 귀여웠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까부터 슬쩍슬쩍 권세혁의 얼굴을 곁눈질하던 직원 하나가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의아해했으나,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권세혁의 머릿속에는 류진밖에 없었다. 그의 무게, 체온, 숨결.

엘리베이터가 2층에 도착하자, 권세혁은 거의 홀린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내려놔.”

마주 보는 두 개의 문 앞에서 류진이 말했다. 푹 잠긴 목소리였다.

“왜? 내 방에서 쉬지.”

“세혁아, 좀… 나 진짜 피곤해.”

“그러니까 내 방에서 쉬라고. 형 방은 욕실도 좁잖아.”

권세혁은 아랑곳 않고 자기 방문을 열었다. 류진은 그의 팔심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몸부림쳐 바닥에 내려섰다. 재빨리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 류진의 팔을 권세혁이 낚아챘다.

“왜 도망가?”

“도망가는 게 아니고….”

“그럼 뭔데?”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권세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피곤해서였다. 정말이지, 죽도록 피곤했다. 최유신이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며 준 약 때문에 더 졸음이 쏟아졌다. 어서 빨리 씻고, 자기에게 주어진 조그만 침대에 몸을 던지고만 싶었다. 류진은 자기 팔을 움켜쥔 권세혁의 손을 잡아 떼어 냈다.

“내일 보자. 응? 아침 일찍 갈게.”

더 있다간 선 채로 꾸벅꾸벅 졸 지경이었다. 그러나 권세혁은 막무가내로 류진을 잡아끌었다. 한참을 복도에서 승강이하는데, 류진의 방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 사이로 낯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

“응?”

남자는 건장한 체격에 키가 컸고 얼굴이 까무잡잡했으며, 짧게 자른 머리에 생활복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손잡이에 ‘풍기 교육대’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보급품이었다. 류진은 그의 가슴팍에 선명한 이름을 알아보았다. 강인우.

강인우의 눈이 권세혁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서 있는 류진에게 못 박혔다. 류진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순간 하신성이 나타난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왜 착각을 했는지 이상할 정도로 다른 생김새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착각한 모양이었다.

류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강인우를 바라보았다. 그때 권세혁이 말했다.

“강인우 대위?”

강인우의 시선이 옮겨 갔다. 권세혁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이는 모습이, 편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절도가 있었다. 장기간의 군 생활에서 묻어나는 내공이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은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 신해범은 강인우가 <백사자>의 프락치라고 했다. 그건 류진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를 거쳐서 과거의 동료들 귀에 들어갈 거라는 의미였다. 하성록, 백사율, 차모은을 비롯해 미우나 고우나 서로를 동지라고 여겼던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류진은 강인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목적이 궁금했다. 지금껏 뭘 하다 나타난 사람인지도 궁금했다. 조직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보스나 간부들에게 무슨 얘길 들었는지.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신없이 생각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류진의 어깨 너머, 권세혁이 전에 없던 살벌한 눈빛으로 강인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호감 가는 목소리를 가진 상대였다. 차분하면서도 강직한. 강인우는 붙임성도 좋았다. 초면인 상대에게 함께 목욕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권세혁은 왕자였다. 국가 서열 1, 2위를 다투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차기 총통으로 군림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강인우는 그런 권세혁에게도 친근하게 굴었다. 예의를 지키되 비굴하지 않았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 대화를 이끌면서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어른의 관록이 묻어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권세혁은 처음에 강인우를 경계했으나, 어느새 그를 강 대위라며 편하게 불렀다.

목욕용품을 챙겨 공용 샤워실로 가는 동안, 류진은 강인우가 사관 학교를 졸업한 재원이며 졸업하자마자 헌병대로 배치되어 차근차근 진급해 온 성실한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성재경이 그곳을 중퇴하고 <붉은 호랑이>에 합류했다. 류진은 강인우의 매끈한 턱선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졸업을 했구나.

권세혁은 강인우에게 사관 학교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 던졌다. 생도들의 생활 전반과 훈련 내용에 관한 것들이었다. 강인우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으로 권세혁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들어보면 죄다 형식적인 이야기였다. 강인우는 학교와 군대라는 집단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그곳에서 생활하던 자기 자신, 즉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권세혁이 좀 더 자세하게 캐물으려고 할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강인우가 먼저 들어가서 문을 잡아 줬다. 권세혁이 류진의 손을 잡아 이끌었지만, 류진은 입구에서 머뭇거리며 좀처럼 들어가지 못했다.

“형? 왜?”

공용 샤워실은 예전에 신해범과 왔던 곳이었다. 제 발로 걸어온 게 아니라 끌려왔다. 에탄올을 푼 뜨거운 물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그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지고, 젖은 수건으로 흠씬 얻어맞았다.

류진은 권세혁을 올려다봤다.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비틀어 뺐다.

“아무래도 나… 그냥 갈래.”

“왜? 피곤해서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감기 안 들려면 뜨거운 탕에 푹 담그는 게 나아.”

“나 상처 있잖아.”

“붕대 잘 감았잖아.”

“그래도 힘들 것 같아. 나 그냥 갈래. 너 씻고 와.”

“아, 형!”

뒤돌아 나가려는 류진의 팔을 권세혁이 붙잡았다.

“그럼 내가 씻겨 줄게.”

“뭐?”

“형은 그냥 누워만 있어.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서비스해 줄 테니까.”

권세혁이 자기 목욕 바구니를 흔들며 웃었다. 류진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됐어. 네가 무슨.”

“왜 이래. 이래 봬도 나 동생 있는 몸이야. 장진서 살 때, 내가 걜 옆구리에 끼고 씻겼다니까.”

“내가 애냐?”

“에이, 그러지 말고.”

권세혁은 재차 류진을 잡아끌었다. 처음부터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류진은 한숨을 쉬고, 버티던 무릎에 힘을 뺐다. 권세혁을 터덜터덜 따라 들어가는 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인우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목욕을 하러 가자고 한 건 찰나에 발휘한 기지였다. 강인우에게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정류진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 두 간부의 주장이 엇갈렸다.

백사율은 정류진이 제멋대로에 동료들과 마찰을 자주 빚기는 했어도 심성은 착한 아이였다고 평했다. 반면 정류진에 대한 차모은의 적의는 상당히 뿌리 깊었다. 단순한 성격 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죽은 곽현우는 차모은과 연인 사이였다. 곽현우를 조직에 영입한 사람이 정류진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곽현우가 죽었을 때, 차모은과 정류진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힘이 되어 줄 가능성이 충분한 사이였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강인우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물론 심증이었다. 그러나 물증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심증이었다. 정류진에 대한 차모은의 적의는 과거에 강인우 자신을 향했던 친아버지의 것과 비슷했다. 그의 이름은 분노였다. 연적을 향한 분노.

강인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털어 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만약 차모은의 주장이 맞다면, 정류진이 자기 몸뚱이로 원하는 바를 얻어 내는 종류의 인간이라면 분명 몸에는 정사의 흔적이 있을 터였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니 여기서도 조직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리라.

쫄딱 젖은 두 사람에게 목욕을 권한 건 그런 속셈이 있어서였다. 강인우는 캐비닛을 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의실은 붐볐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진압 팀 대원들로 북적북적했다. 강인우는 벽에 등을 붙이고 머뭇거리는 류진에게 다가갔다.

“정류진 이병? 왜 혼자 있어? 왕자께선?”

“그… 저기에.”

류진은 새하얗고 깨끗한 수건이 산처럼 쌓여 있는 더미를 가리켰다. 샤워를 마친 사람과 막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섞여 인산인해였다.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 권세혁이 끼어 있었다.

풍기 교육대 남성 대원들의 평균 키는 185센티미터였다. 체격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건장한 군인들 사이에서도 권세혁은 눈에 띄었다. 남달리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유연하고 탄탄한 근육이 어지간한 현역 군인 저리 가라였다. 류진은 더더욱 옷을 벗지 못하고 망설였다.

“왜, 부끄러운가?”

“조금 그렇습니다.”

류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강인우와 몸이 붙을까 봐 무서웠다. 그가 더럽거나 불쾌한 게 아니라, 순수한 의미 그대로 무서웠다. 몸이 닿으면 자신의 생각이 전해질 것 같았다.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다. 찔리는 게 많아서.

강인우의 정체를 알면서도 풍기대에 들여놓은 신해범의 기지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신해범은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만만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깨끗한 새 수건을 한 뭉텅이 가져온 권세혁은 개선장군 같았다. 그는 류진이 여전히 옷을 입은 채라는 사실에 의아한 눈치였다.

“형 이거 써. 근데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세혁아, 나 아무래도 그냥….”

“사람들 많아서 그래?”

권세혁이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내 방 갔으면 좋았잖아. 왜, 지금이라도 올라가? 나 옷 다시 입어?”

그는 당장이라도 캐비닛을 도로 열 기세였다. 기껏 붙잡은 기회를 놓치게 생긴 강인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류진을 재촉했다. 괜찮다고, 다들 자기 씻느라 바빠서 남의 몸 힐끗거리거나 하지 않는다고.

“그럼….”

류진은 벽을 보고 섰다. 권세혁이 다가와 류진의 옆에 서 있던 강인우를 은근슬쩍 밀어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수건을 펼쳐 탈의하기 시작하는 류진의 몸을 가려 주었다. 강인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차모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류진을 향한 권세혁의 태도가 심증에 확신을 더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권세혁의 호칭, 태도, 사소한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권세혁은 정류진을 자기 애인처럼 대하고 있었다.

강인우는 속으로 신음했다. 사실은 백사율의 주장이 맞기를 바랐다. 연인을 잃은 차모은이 상대적으로 어리고 힘없는 말단에게 화풀이하는 것이길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과분한 기대였던 모양이다.

강인우는 한숨을 삼켰다. 은근히 눈치를 주는 권세혁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보고 말았다. 상의를 탈의해 드러난 정류진의 맨몸은 엉망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러갔다.

류진은 의아했다. 권세혁과 강인우, 둘 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민망해서 고개를 돌린 순간 그 이유를 알았다. 거울에 비친 몸뚱이에 검붉은 멍이 선명했다.

어깨와 가슴팍에 길게 걸친 멍 자국은 아마존에 서식하는 거대 아나콘다에게 칭칭 감겼다가 풀려난 것처럼 보였다. 목덜미와 어깨, 옆구리에도 상처가 많았다. 오래된 흉터와 비교적 최근에 생긴 상흔이 피부 위로 자잘하게 흩어져 있었다.

류진은 당황했다. 씻을 때나 옷을 갈아입을 때 거울을 보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몰랐다.

넘어졌다고 말하면 믿어 줄까? 계단에서 굴렀다는 건? 아니면 뭐, 밤에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다가 퍽치기라도 당했다고 하면?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턱도 없었다. 권세혁은 운동선수였고, 강인우는 현역 군인이었다. 어설픈 변명에 속아 넘어갈 얼간이가 아니었다.

한참 만에 권세혁이 말했다.

“여기선 못 씻겠네.”

그는 커다란 수건을 펼쳐서 류진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자기 캐비닛을 열어 벗었던 옷을 주섬주섬 꿰어 입었다. 덜 마른 축축한 옷가지를 걸치면서, 권세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욕 바구니를 챙겨 든 권세혁이 다른 한 손으로 류진의 손목을 쥐었다. 멀뚱히 서 있는 강인우에게는 딱 한마디 했다.

“먼저 갑니다.”

강인우는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권세혁의 표정이 너무나도 싸늘해서 잡을 수가 없었다.

강인우는 그 자리에 선 채, 샤워실을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방금 본 광경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넣었다.

깡마른 상반신을 고리처럼 휘감은 시커먼 멍 자국이 눈앞에 선명했다.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기 전 찰나의 순간, 강인우는 류진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마른 체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앙상할 줄은 몰랐다. 그 말라 빠진 몸에 상처는 왜 그리 많은지. 멍과 생채기가 어깨와 팔 상완, 옆구리 쪽에 번지듯이 퍼져 있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흉터, 오래되어 딱지가 앉은 상처, 비교적 최근에 생겨 아직 불그죽죽한 것들이 어지럽게 섞였다. 고문과 구타의 흔적이었다.

목욕 바구니를 든 강인우의 손이 떨렸다. 정류진은 이곳에서 고문당했다.

다만.

강인우는 목욕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샤워실로 걸어 들어가며 생각했다. 모든 일에는 예외의 경우가 있었다. 만약 정류진이 과격한 행위를 좋아하는 독특한 성벽의 소유자라면, 그리고 만약 정류진의 상대가 권세혁 왕자라면.

권세혁의 싸늘한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무슨 정신으로 방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류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욕 바구니를 대리석 바닥에 내팽개치고 씨근덕대는 권세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혁아.”

“누구야?”

“권세혁.”

“누가 형한테 그랬어?”

“…….”

“호월루 사람들이야? 형 아팠다는 게 맞아서 골병든 거였어? 왜? 나랑 알고 지내는 거 때문에 미운털 박혔어?”

“아니야, 오해하지 마. 그런 거 아냐.”

“거기 사장은 뭐 하는 사람이야? 자기 업장에서 그런 일 있어도 몰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 그래서 형 순순히 보내 준 거구나? 데리고 있으면 성가시니까?”

류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야! 거기 사장님 좋은 분이야. 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래, 난 몰라. 몰라서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나!”

권세혁이 걷어찬 샴푸 통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입구가 박살 나 내용물이 터져 나왔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권세혁의 넓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물건 함부로 던지지 마.”

“지금 그런 게 중요해?”

권세혁이 축축한 옷을 벗어 던졌다. 근육으로 꽉 잡힌 어깨에서 김이 솟는 듯했다.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이 살벌하다. 류진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 때문에 목욕 못 하게 돼서 미안하다.”

“형!”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가. 강 대위님 아직 있을….”

“장난쳐?!”

성큼성큼 다가온 권세혁이 류진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형은 대체 날 얼마나 병신, 호구로 보는 거야!”

거의 절규하는 목소리였다. 류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뭐?”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왜! 이런 좆같은 꼴 당하면서 왜 나한테 말 안 했냐고! 씨발,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류진은 권세혁이 화를 내는 이유를 몰랐다. 몰라서 잠자코 입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권세혁은 발을 쾅쾅 구르고, 벽을 치고, 손에 잡히는 집기를 집어 던지면서 소동을 부렸다. 류진은 넓고 깨끗하고 세련된 방이 전시에 폭격 맞은 곳처럼 변하는 광경을 황망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권세혁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체력이 좋은 놈이라 지치지도 않는가 보았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을 때는 방으로 돌아온 지 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류진은 방바닥에 널브러진 온갖 장애물을 피해서 권세혁에게 다가갔다.

“다 했냐?”

“…….”

“왜, 더 하지. 학생 때 운동했었다며. 겨우 이거밖에 안 되냐?”

권세혁의 손가락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난치지 마. 나 진심이면 형 벌써 맞아 죽었어.”

류진은 권세혁의 다리 사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손을 그의 무릎에 얹었다. 애써 이 상황을 웃어넘기려고 했다.

“이젠 살해 협박까지 하냐? 왕자가 그래도 돼?”

“형!”

“깜짝이야. 소리 그만 질러. 귀청 떨어질 것 같아.”

“진짜… 형은… 씨발, 진짜….”

“나 뭐.”

권세혁이 한숨을 토해 냈다.

“형은 몰라.”

“내가 뭘 모르는지 말해 줘. 그래야 고치지.”

“형은, 지금 형은 자기가 날 얼마나 좆같이 만들었는지 모르지?”

그래 모르겠다. 내가 너 같은 상류층 왕족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

류진은 마음의 소리를 내뱉는 대신, 잠자코 권세혁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화내지 마. 무섭다 야.”

“…….”

“맞은 건 난데, 왜 네가 화를 내냐.”

“그거!”

“응?”

권세혁의 두 손이 다가왔다. 그는 의식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류진의 얼굴을 감싸고 자기를 똑바로 보게 했다.

“형이 누구한테 맞았다는 거. 내가 그걸 몰랐다는 거. 그걸 샤워실에서 옷 갈아입다가 보게 됐다는 거. 강 대위가 목욕하러 가자고 안 했으면 앞으로도 몰랐을 거라는 거. 그게 문제라고!”

류진은 권세혁의 손목을 잡고 떼어 내려 했으나,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래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냐?”

“뭐?”

“다 끝난 일을 이제 와서, 네가 뭐 어쩔 건데.”

“누가 때렸는지 말해.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말해. 내일 당장 호월루 쳐들어가서 싹 다 끌어낼 테니까.”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권세혁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웃어?”

“그럼 웃기지, 안 웃기냐? 너 내가 한 얘기 귓등으로 들었어? 호월루 사람들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누군데.”

“…….”

“여기야? 풍기대에서 맞은 거야?”

류진의 입술이 꼭 다물렸다. 대답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에 권세혁은 더 속이 탔다. 꼭 어린 동생을 보고 있는 듯했다. 타고난 성품이 유약해서 짓궂은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 대상이 되어도 행여 누군가의 짐이 될까 입을 꾹 다물고 내색하지 않았던 그 작은 아이와 눈앞의 류진이 겹쳐 보였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한 동생을 집 안으로 숨겼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총통의 핏줄답지 않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했다. 번듯한 아들이라면 이미 하나 있으니, 둘째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르고.

권무혁은 홈 스쿨링을 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혼자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걸 더욱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외로우니 더더욱 가족에게 매달렸다.

권세혁은 어머니가 동생의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싫었다. 그는 일시적인 회피가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해결했다. 운동부원으로서 다들 한 체격 하던 친구들과 함께, 이 나라 총통의 아들다운 방식으로.

그러나 동생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차마 밝히지 못할 버릇도 생겨 버렸다. 밤에 자다가 오줌을 싸는 야뇨증, 집 안 곳곳을 뒤지고 다니며 다른 가족의 물건에 손대는 도벽이었다.

이미 늦은 것이다. 권세혁은 자기가 더 빨리 나섰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형.”

권세혁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붙잡혀 있던 류진도 덩달아 일어났다. 신장 차이 때문에 까치발이 들렸다.

“일단 씻어. 내 방에서 씻고, 옷 빌려줄 테니까 갈아입어.”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범은 코지 타벨리니 찻잔을 꺼내왔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설탕을 넣고 저었다. 우유만큼이나 희고 깨끗한 찻잔 두 개가 테이블에 놓였다.

“드십시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해범이 형.”

“아닙니다. 마침 왕자님께 연락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저한테요? 왜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금일 부인과 면담이 있었습니다.”

권세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자신의 티셔츠를 빌려 입은 류진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있었다. 자기 손등에 머무르는 신해범의 시선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권세혁은 신해범이 장승희를 만났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했다.

“혹시 엄마가….”

“정류진 이병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십니다.”

“아아.”

“하지만 부인께선 왕자님의 군 생활 전반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시겠지요.”

신해범은 자기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속으로는 오징어를 듬뿍 넣어 부친 파전과 발효주를 생각했다. 파오훼이 시절에 자주 해 먹던 간식이다. 대충 썬 쪽파와 밀가루에 소금만 살짝 둘러도 그렇게 맛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지짐이 해 달라는 놈들이 신해범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신 중사님, 배고픕니다. 중사님, 저희 간식 좀 해 주십쇼.

“엄마가 자꾸 해범이 형 귀찮게 해요?”

권세혁의 부루퉁한 목소리에, 신해범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부인께서 풍기대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건 응당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해범이 형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풍기대가 아니라?”

권세혁은 장난치듯 말했으나 신해범은 찻잔에 코를 박을 뻔했다. 양심에 찔려서.

“왕후께 못 하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젠 그런 호칭 안 썼으면 좋겠어요. 구식이야.”

신해범이 후후 웃었다.

“그렇습니까?”

“뭐, 그건 그렇고.”

권세혁은 본론을 꺼냈다.

“해범이 형, 혹시 류진이 형 이런 거 봤어요?”

류진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긴 권세혁이 그의 헐렁한 티셔츠 소매를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신해범은 류진의 어깨를 보았다. 멍 자국, 잇자국. 다름 아닌 신해범 자신이 류진의 몸에 남긴 흔적이었다.

물론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런….”

“이거, 풍기대에서 생긴 거 아니죠?”

신해범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권세혁이 말을 이었다.

“나, 첫날에 해범이 형이 류진이 형 때린 거 알고 있어요. 솔직히 주의 주려고 했는데 말았어요. 아무래도 내가 부탁한 것도 있고 하니까. 이 바닥 돌아가는 거 대충은 알고.”

“…….”

“그래요. 군기 잡으려면 어느 정도의 폭력은 필요하죠. 필요악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해범이 형, 류진이 형은 내가 부탁해서 들어온 사람이잖아요. 내 사람이라고요. 해범이 형도 아니까 우리 붙여 놓은 거 아니에요?”

“예.”

“그런데 이게 참, 내가 류진이 형 다친 거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알아요? 강인우 대위 있잖아요, 그 사람 오늘 처음 만났는데 참 붙임성도 좋더라. 아무튼 그 사람이 같이 목욕 가자고 해서 알았어요. 내가요, 류진이 형이 이렇게 된 걸 그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요. 믿어져요? 이 상황이? 내가 얼마나 황당하고, 화나고, 쪽팔리고 어이가 없었을지 짐작이 가냐고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럼 설명해 주세요.”

“정 이병의 상처는….”

권세혁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숨도 쉬지 못하던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굴려 신해범의 얼굴을 봤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허.

류진은 기가 막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저, 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거 봐라.

신해범은 깍지 낀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두었다.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숙이고, 고개를 떨어뜨린 뒤 힘없이 좌우로 흔들었다. 그 침통해 보이는 모습에 권세혁의 얼굴에는 안심이 번졌고, 류진은 신해범을 손가락질하며 펄쩍펄쩍 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저 새끼 순 거짓말쟁이예요!

“정말이에요? 해범이 형은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 이병이 풍기대 대원들, 혹은 직원들에게 구타당했다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문책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지금…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서.”

신해범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다 연기였다. 그러나 권세혁은 그것이 연기라는 사실을 간파할 정도로 노련하지 않았다.

권세혁이 아는 신해범은 프로였다. 지금껏 숙부의 곁에서 뚝심 있게, 프로답게 일해 온 군부의 사냥개였다. 그런 신해범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며 무너지는 모습에 권세혁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쪽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리려는 계략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권세혁이 한 손을 뻗어 신해범의 어깨를 잡았다.

“해범이 형.”

“거듭 죄송합니다. 왕자님께 이런 모습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장군께도 송구합니다. 풍기대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그분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류진은 잠자코 신해범의 열연을 지켜봤다. 국가 1급 배우 귀뺨을 후려갈길 명연기였다.

“해범이 형을 문책하려던 건 아니에요. 저는 단지, 제가 류진이 형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려던 겁니다.”

“내일 당장 대책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대원들에게 군대 내 가혹 행위에 대한 교육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헌병대에서 그 난리가 난 마당에, 저희까지 장군께 누를 끼칠 수는 없지요.”

류진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하루 세끼 밥 먹는 일보다 더 당연하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해 대는 인간이 신해범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침통한 목소리, 흔들리는 눈빛, 괴로워 보이는 표정까지.

신해범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권세혁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바로 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이병, 자네가 누구에게 그런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신 사과하지. 만에 하나 걱정은 하지 마. 자네의 신원은 충분히 보호하면서 가해자를 찾아 일벌백계할 테니.”

권세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류진의 마른 손을 붙잡고 잘 되었다고, 해범이 형이 해결해 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잘 됐다. 그치?”

“으응….”

류진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신해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스스로 12층 사무실에서 몸을 던져 죽을 게 아니라면, 대체 누구에게 폭행죄를 덮어씌워 일벌백계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때 신해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서랍에서 두툼한 파일 하나를 꺼내 가지고 돌아왔다. 파일은 권세혁의 눈앞에 놓였다.

“이게 뭡니까?”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정 이병. 내가 개인적으로 자네에 대해 조사를 좀 했어.”

권세혁이 버럭 소리쳤다.

“해범이 형!”

“죄송합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요?!”

“거듭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겐 왕자님의 신변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왕자님을 곁에서 보좌할 사람인만큼 정 이병, 아니 정류진의 신분 조사는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습니다.”

권세혁이 한숨을 토해 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는 한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넓은 사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 그리고 재깍재깍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마침내 권세혁이 입을 열었다.

“진짜… 앞으로는 용서 안 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는 정말 모르는 거죠? 류진이 형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숙부님은요?”

신해범의 입술이 꿈틀했다. 그는 사전에 준비된 답을 내놓았다. 정류진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군의 불문율인 ‘보안’은 내부 관계자가 아닌 타인에게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정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권세혁을 안심시켰다. 말하면서 신해범은 퍼뜩 깨달았다. 권세혁은 정류진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진흙탕에서 12층까지 기어 올라온 싸움꾼, 설계자, 아첨쟁이의 영민한 두뇌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신해범은 정류진을 향한 권세혁의 모든 요소를 관찰했다. 눈빛, 표정, 목소리, 행동.

오래 볼 필요도 없었다. 왜 이제야 알아봤는지 이상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권세혁은 정류진을 좋아했다. 평범한 친구로서가 아니었다. 내 측근에게 한자리 마련해 주고픈 마음은 차라리 순수했다. 권세혁은 정류진과의 관계를 더 오래, 더욱 가깝게 지속하고 싶어 했다. 이유는 명쾌했다. 쟤랑 자고 싶으니까.

신해범은 플라토닉 러브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어린애들 밝히면서 호색한 소리는 듣기 싫은 늙은이의 어쭙잖은 변명에 불과했다. 어지간한 하자가 있지 않고서야 성욕을 느끼는 상대, 잠자리를 함께하고픈 상대에게 구애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지금, 권세혁은 정류진에게 구애하는 중이었다. 자기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왕자로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보여 줌으로써.

신데렐라 스토리의 한 장면 같았다. 까마득한 신분 차이를 넘어선 세기의 사랑. 그러나 권세혁 왕자의 러브 스토리는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었다.

권세혁은 파일을 펼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류진의 손을 제 무릎 위로 끌어다 놓은 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신해범은 권세혁이 아니라 류진을 향해서 말했다.

“정 이병, 자네 고향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3년 전인가?”

세이렌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제 주제를 모르는 정류진이 권세혁에게 섣불리 접근한 탓이었다. 시작도 전에 설계가 흔들렸다. 하지만 신해범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외길만 고집하는 고지식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노선을 비틀고, 꼬고, 궤도를 회전시킬 유연함을 갖춘 훌륭한 설계자였다.

어쩌면 권세혁은 이미 정류진에게 마음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본인이 깨닫지 못할 뿐. 그렇다면 그가 정류진에게 완전히 푹 빠지도록 상황을 구성하고, 밑밥을 깔고, 옆에서 구슬릴 필요가 있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신해범은 곧장 세이렌 프로젝트의 둘째 장으로 넘어갔다.

단순한 호감이었던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계기는 역경이었다.

인간은 자기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함께 역경을 이겨 낸 자와는 단순한 동지애 이상의 결속력으로 맺어진다.

국가를 상징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공공 기관을 타깃으로 삼던 <백사자>의 인질극 진압 작전에 신해범은 여러 차례 참여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었다.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끼리 특별한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억류되어 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인질 중에 부상자나 사망자가 발생할수록 그 확률이 높았다.

이유라면 분명했다. 그게 드라마틱하니까.

아름다운 연인이 고난에 부딪히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함께하는 해피 엔딩을 맞는. 그 판에 박힌 이야기가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나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살면서 한 번쯤은. 젊은 시절에 한 번쯤은.

권세혁 같은 애송이라면, 분명 정류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불태우고도 남을 것이다. 신해범은 장담했다.

그는 류진의 눈앞에 한 남자의 사진을 내려놓았다.

“함영재. 이 사람 알아보겠나?”

사진 속 남자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류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벌어진 입술 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류진은 권세혁이 보는 앞에서 신해범에게 반말로 따져 묻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남의 과거를 들추지 말라고 그렇게….

류진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기본적으로 신해범은 누군가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 위보다 아래가 더 많은 군인이었다. 상대방을 압박하여 통제하고 상황의 흐름을 바꾸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자가 인정에 호소하는 약자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어리석었다.

“류진이 형?”

권세혁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류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움켜쥔 주먹에 경련이 일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앉아. 이병.”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모양 좋은 이마, 서양인의 피가 섞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뚝 선 콧대, 날카로운 눈매와 차가운 눈동자, 강단이 느껴지는 뚜렷한 입술을 관찰했다. 아무리 쳐다봐도 속을 알 수 없었다. 가면 뒤에 숨은 본심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단 하나는 확신했다. 지금 신해범은 즐기고 있었다. 이 상황을.

“형!”

권세혁이 소리쳤을 때에야, 류진은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신해범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이지러졌다. 권세혁이 비틀거리는 류진을 부축했다.

“형, 일단 앉아. 앉아 봐.”

신해범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권세혁은 흐느끼는 류진과, 동요하지 않는 신해범과, 문제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했다. 그가 신해범을 향해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3년 전, 함풍 2도 집단 폭행 사건의 가해 주동자입니다.”

항구 도시 장진과 직할시 광성에서만 살아 본 권세혁에게는 생소한 지명이었다.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이 났다.

“함풍 2도라면, 그….”

특별 지구 관할의 12도 중에서도 벽지 지역으로 분류되는 시골이었다. 이렇다 할 특산물도, 내세우는 관광 명소도 없었다. 그러나 한때는 ‘가능성의 땅’, ‘미인이 많은 지역’으로 불리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함풍 2도는 왕년의 아이돌 스타 류연비의 고향이었다.

신해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인의 이름을 왕자님 앞에서 입에 담을 수는 없지만, 짐작하시는 곳이 맞습니다.”

“전 상관없어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그보다 류진이 형….”

“3년 전 일이고, 당시 지역 사회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아 왕자님께선 모르실 겁니다. 평균 나이 18세의 불량 패거리가 음주와 본드, 시너를 한 뒤 또래 아이를 집단으로 폭행한 사건입니다.”

신해범은 한 박자 쉬고 빠르게 내뱉었다.

“지금 왕자님 옆에 있는 정류진 이병, 바로 그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권세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뭐라고요?”

신해범은 파일을 뒤적였다. 이번에는 한 여자의 사진이 권세혁과 류진의 눈앞에 놓였다.

슈트를 멋들어지게 빼입고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함영재의 증명사진과 대비되는 사진이었다.

가슴에 아기 띠를 메고 걸어가는 젊은 여성을 멀리서 촬영했다. 멀리서 찍었고,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여성의 이목구비를 식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사진 속 여성은 한 손에 지갑, 다른 한 손에는 비닐 가방, 어깨에는 아기용품이 든 것으로 보이는 기저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권세혁은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성의 마른 체구에 비해서 짐이 너무 많아 보였다.

“정 이병. 이 사람 알아보겠나?”

고개를 든 류진의 눈이 빨갰다. 눈물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해범은 한숨을 삼키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빌어먹을 정류진. 쟤 우는 얼굴만 보면 꼴려서 미치겠어.

신해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권세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사건 당시 유일하게 물증과 일치하는 증언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여성입니다. 한다희, 스물한 살.”

한다희를 찾아낸 건 신해범이었지만, 그의 입을 연 건 믿음직한 조사원 구은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들 눈치를 보면서 자란 구은하는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사람의 머리를 만지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건 분명 그 재주 때문이리라.

신해범은 고개를 돌려 류진을 보았다.

“결혼을 일찍 해서 그런가, 벌써 아이가 있더군.”

“잘… 잘 지내고….”

“건강해 보였어.”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뭐.

신해범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류진이 참 예뻤다.

한다희는 함영재의 애인이었다.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달리면서 담배와 음주, 신너와 본드 따위를 하고 밤거리를 배회하며 도둑질에 금품 갈취, 퍽치기를 돕는 걸 애인 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한다희의 가족은 조그만 식품 회사를 운영했다. 매년 아슬아슬하게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지만, 한다희는 외동딸이기에 부족함 없이 자랐다. 한다희는 무리의 여자아이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오토바이를 갖고 있었고, 함영재의 것과 똑같이 튜닝한 그 오토바이를 부릉부릉 부르릉 요란한 마후라 소리를 내며 끌고 다녔다.

류진은 한다희를 딱 한 번 만났다. 그것도 음주 상태에서,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대화했다. 하지만 한다희와 나눈 대화를 지금껏 기억했다.

한다희는 불량 패거리와 인연을 끊고 직업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함영재는 한다희가 패거리에서 빠진다면 약점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서를 쓰고 싶은 학교가 있지만 지금껏 해 온 짓이 있어 어떤 교사도 추천서를 써 주지 않을 듯하다고 말하며, 한다희는 자업자득이라고 자조했다.

그때 류진은 한다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고교 졸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변한 모습을 보여 주라고 덧붙였다. 성적을 올리고 싶다면 공부 잘하는 형에게 공부 방법을 물어봐 줄 수 있다고까지 했다.

물론 한다희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에 담배 냄새가 배지 않도록 라이터에 담배를 끼운 채 천장으로 회색 연기를 뿜어내면서 너나 잘하라고 키득거렸다.

그랬던 한다희가 자신을 변호하는 증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함영재 집안의 보복으로 회사가 망하고 쫓겨나듯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류진은 후회했다.

그때 한다희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폭주족 대가리의 ‘이거’ 주제에 신분 세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야박하게 쏘아붙였어야 했다. 한다희의 마음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함영재를 배신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릉부릉 부르릉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다가, 선생 한 명의 주머니에 촌지를 찔러주고, 그걸로 추천서를 받아 직업 학교에 입학하면 되었을 텐데.

류진은 한다희의 소식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은 잔인했다. 류진은 그가 이사를 간 지역에서도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함영재 패거리에게 구타당해 성형 수술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부풀려진 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류진은 한다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말해 줘서.

누나를 닮아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지역 경찰서 취조실의 차가운 화강석 바닥을 뒹굴 때,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군지도 헷갈릴 지경이 되었을 때, 혀를 콱 깨물어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문전 박대를 당하면서도 찾아오던 곽현우와 진실을 말해 준 한다희가 있어서였다.

류진은 한다희가 잘 살길 바랐다. 세상 어디에서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과거의 상처 따위는 잊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증거가 지금 류진의 눈앞에 있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다희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더듬는 류진을 보며 권세혁은 황망함에 휩싸였다. 미칠 것 같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왜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까? 류연비를 누나로 둔 만큼 평탄한 인생을 살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까지 겪었을 줄은 몰랐다. 고작 열여덟 살에.

권세혁의 머릿속에서 시계가 돌아갔다. 삼 년 전 자신은 행복했다. 명문 고교에 별다른 노력 없이 입학해서 다양한 수업을 듣고 운동부 활동에 참여했다. 쉬는 날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놀러 다녔다. 맛있는 걸 먹고, 재미있는 걸 보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청춘을 즐겼다.

류진은 아니었다.

권세혁은 손을 뻗어, 한다희의 사진을 든 채 떨고 있는 류진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미안해.”

그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내가 미안해. 그런 거 몰랐어. 짐작도 못 했어. 형… 내가 미안해.”

자기가 맞은 걸 숨긴 류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이유를 이제는 알았다. 류진은 군대 내 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싫었던 것이다. 세상은 약자에게 잔인하니까. 사람들은 약자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드니까. 피해자의 과거를 파헤치고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당할 만했으니까 그런 일을 당했겠지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위하니까.

권세혁은 신해범에게 물었다.

“이걸 보여 준 이유가 뭡니까?”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지요. 함영재가 폭력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구속이요?”

“지역경에서 단순 치정 싸움으로 무마하려던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인데,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피해자는 임신 중이었고 현재 위독한 상태입니다. 소생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군요.”

“그런 걸 해범이 형이 어떻게 알아요?”

“왕자께서도 아시다시피, 풍기대에서는 일부 지역 경찰에서도 지원자를 받습니다. 지금 저희 조사 팀에 함풍 2도 지역 경찰 출신의 대원이 있습니다.”

그자의 이름은 서지운이라고 했다. 서지운 병장.

신해범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함풍 2도 같은 벽지 지역은 토착 세력이 컸습니다. 공화당 집권 시절, 지역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자는 취지에서 지역 자치 단체를 활성화시킨 탓에 그 세력이 더욱 조직적으로 개편되었지요.”

신해범은 씁쓸한 목소리였다.

“말이 좋아 지역 자치 단체지, 사실상 토착 조폭이나 다름없는 자들입니다. 인구 이동을 막고 지역감정을 악화시키며, 사실상 자기들만의 요새를 쌓고 그 안에서 총통 행세를 하는 꼴입니다. 믿어지십니까? 근본도 없는 것들이 명문가 족보를 사서 귀족 행세를 하고, 지역민들을 수탈하고 위협하고, 감히 총통 각하의 권위에 도전하려 합니다. 왕자님, 저는 도저히 그 행태를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권세혁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서 병장이 조사 팀을 꾸려 함풍 2도에 다녀왔습니다.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함씨 집안과 그 장남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류진 이병이 겪은 피해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신해범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류진을 응시했다.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하다, 정 이병.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그놈들을 뿌리 뽑을 절호의 기회야.”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내가 자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류진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해범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도전에서 승리하게 만들어진 사람이 있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내는 사람. 벽에 부딪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상처 입어 너덜너덜해져도 진흙탕을 박차고 일어나 이빨을 드러내고 적을 물어뜯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 싸움꾼. 투쟁하는 자. 그런 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기회가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기회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남이 쥐고 있는 기회를 빼앗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신해범은 그래서 강했다.

풍기 교육대 근무 2년 차에 접어든 서지운 병장은 12층 사무실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껏 텔레비전 아니면 사진, 기껏해야 멀리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던 권세혁 왕자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해범은 권세혁 왕자가 자신이 조사했던 함풍 2도 지역 경찰서에 대해서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서지운은 권세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출신 성분은 보잘것없었다. 서지운은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유순하고 성실해서 학창 시절에는 우등생으로 손꼽혔다. 군사 학교는 사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출신 성분의 학생들을 군인으로 키워 내는 기관이었다. 당연히 입학 커트라인이 높았고, 성적이 좋다 해도 그 바닥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추천서가 없으면 합격하기 어려웠다. 신해범은 권주혁의 추천서를, 최유신은 아버지의 추천서를 받아서 입학했다. 신해범과 같은 시기에 여자 군사 학교에 입학한 기우희의 추천서 또한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명의였다.

서지운은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 책임자의 도움으로 추천서를 받아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고향인 함풍 2도 지역 경찰서에 군사 경찰 신분으로 배치되었다.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때 서지운은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애송이였고, 주어진 업무는 형식적인 동네 순찰이나 민원 접수 등 잡다한 것들뿐이었다.

애초에 굵직한 사건이 많지 않은 시골이었다. 사건이 벌어져도, 지역경보다는 마을의 어르신이 나서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지운은 점점 따분해져 갔다. 함풍 2도에서 나고 자랐으나 직할시에 있는 군사 학교를 다닌 그에게 한적한 시골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룡들이 그러하듯, 서지운은 함풍 2도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집안의 기둥으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배신할 자신이 없었다. 당시 서지운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일탈은 신입 주제에 장기 휴가를 내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는 배낭여행이었다.

류진의 ‘사건’은 서지운의 휴가 기간에 발생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함풍 2도 지역 경찰의 주먹구구식 수사와 피해자를 도마 위에 올려 두고 난도질하는 주민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서지운은 사수에게 조기 복귀를 요청했다. 그러나 사수는 벌컥 화를 내며, 괜히 끼어들지 말고 잠잠해지면 복귀하라고 했다. 서지운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곳에서는 지역 경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이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라고.

“준장님께서 제 고향과 전 근무지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제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서지운이 말했다.

“왕자님, 함풍 2도는 본래 포도 농사가 잘되어 직할시에 특산물 납품까지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유지들이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각종 시설물을 짓는다며 농업 종사자들을 무급으로 부려 먹고, 항의하는 자에게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덮어씌워 구속하고, 농사를 망쳐 생계에 허덕이는 주민들에 고리대금을 빌려줘 땅을 빼앗았습니다. 타 지역에 본사를 둔 공장에는 턱도 없는 세금을 매겨서 철수하게 만들고요. 제 아버지도 그렇게 직장을 잃으셨고, 제게는 풍기 교육대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고향을 저버린 배신자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자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긴 탓에 저희 가족은 동네에서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그마저도 조사 팀을 꾸려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사실이었다. 서지운은 금의환향을 기대했으나, 그는 본가의 대문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고 쫓겨났다. 함풍 2도에서의 냉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참다못한 대원 하나가 ‘신해범 준장의 사람들을 이렇게 푸대접하고도 뒷감당할 자신이 있느냐’고 따졌으나 비웃음만 사고 쫓겨났다.

서지운의 말이 이어질수록 권세혁의 표정은 굳어졌다. 류진은 자신의 어깨를 안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개를 들어 본 권세혁은, 지금껏 류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권세혁의 안에 신해범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형, 오늘 내 방에서 자.”

거절하면 어떤 실랑이가 벌어질지 알았다. 류진은 묵묵히 권세혁을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몸을 던진 권세혁이 말했다.

“이리 와.”

시키는 대로 했다. 강압적인 말에 거부감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류진은 지쳐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 부서진 몸뚱이에 아교를 발라 가며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었다. 류진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내 옆에 누워. 나 보고.”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흐느끼는 류진의 어깨를 권세혁의 큰 손바닥이 감쌌다.

“어떻게 죽여 주면 좋겠는지 말해.”

“…….”

“생각해 봐. 형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잔인한 방법.”

“해 줄 수 있어?”

억눌린 목소리로 류진이 말했다.

“날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냐고.”

“할 수 있어.”

권세혁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류진의 머리부터 목덜미,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닿기만 하면 모든 상처와 흉터를 지우는 마법의 손이라도 가진 것처럼. 자기가 류진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류진은 권세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흐느꼈다.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 밀려왔다. 신해범에게 감사하게 될까 봐, 권세혁을 미워하지 못하게 될까 봐. 원수와 은인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누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껏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류진이 기억하는 누나는 야무지고 똑똑했다. 현명하고 능력이 있었다. 애초에 최악의 상황에 놓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곽재헌만 아니었다면.

누나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죽은 곽현우와도 약속했었다. 약자끼리 서로의 상처를 물어뜯는 짓은 하지 말자고.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테니까.

곽현우가 그리웠다. 그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곽현우가 없었고, 증오해야 마땅한 신해범이 기막히게도 은인 행세를 했다. 류진의 귓가에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자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누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너나 잘해.’

류진은 웃었다. 권세혁의 품 안에서 울면서 웃었다. 한동안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가 관자놀이의 선명한 흉터를 발견했다.

“형, 이거….”

뭔가 말하려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담뱃불로 지진 화상 자국을 못 알아볼 만큼 순진무구한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다.

권세혁은 귀를 기울였다. 지금 이 순간 류진의 흐느낌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분노는 인간을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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