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신해범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요란하게 때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제복을 입은 채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푹 자 버렸다. 시계를 확인한 신해범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 네 시 반이었다.
신해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으로 스르르 쓸려 내려가는 담요는 아마 진치우가 덮어 주고 나간 것일 터였다.
문제의 파일을 꺼냈을 때, 함영재와 한다희의 사진을 눈앞에 들이밀었을 때, 그는 류진의 표정을 보았다. 흔들리는 눈빛과 힘없이 벌어진 입술이 사랑스러워 그 자리에서 와락 끌어안을 뻔했다. 권세혁에게 그 역할을 양보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로미오와 줄리엣 놀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권세혁은 함풍 2도를 갈아엎고 나서 대중 앞에 내세울 최적의 방패막이였다.
직할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토착민 세력이 컸다. 권세혁에게는 과거 공화당의 지역 자치 단체 활성화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았다.
지역민들을 수탈하는 토착 귀족이 중앙 수도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권일혁 총통의 ‘철혈일성’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건재한 이유.
토착 귀족 집안의 인맥을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거물급 정치인이 등장했다. 세력이 큰 자일수록 거느린 가문의 수가 많았다. 속히 빤히 들여다보이는 공생 관계였다. 정치인에게는 자신을 돈으로 받쳐 주는 토착 귀족이 필요하고, 직할시 사정에 어두운 토착 귀족에게는 정보통이 필요했다.
함풍 2도의 경우는 특히나 경우가 고약했는데, 이곳을 지배하는 함씨 집안의 뒷배는 전 정무국장 최석준이었다.
그는 정무국장 재임 시절 신룡관의 비공개 스케줄을 함풍 2도에 공문으로 내려보내는 간 큰 짓을 저질렀다. 헌병대 감사나 적림부 관계자의 방문에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뜻이었다. 숙청 여제 유미현이 최석준을 단칼에 잘라 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무리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라 할지라도 신룡관의 비공개 스케줄을 외부로 유출한 일은 덮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미현의 힘도 거기까지였다. 신해범은 권주혁에게 보호받는 최석준과 그의 일가가 여전히 정무국장 시절과 같은 수준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다. 돈줄을 끊어 놓지 못해서 그렇다. 그게 직할시 바깥의 사정을 모르는, 진흙탕을 제대로 굴러 본 적 없는 유미현의 한계였다.
최석준은 여전히 잘나갔다. 여전히 권주혁 총통 보좌관의 측근으로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해범은 유미현이 이번에야말로 권주혁의 팔다리를 끊어 놓을 셈으로 자신과 풍기 교육대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인우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이곳에 들어왔다.
하지만 유미현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었다. <백사자>를 지원군으로 택한 것은 그의 정치 인생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내전에서 이기기 위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인다?
세상에, 그런 바보짓을 하다니.
신해범은 뜨거운 물에 찻잎을 떨어뜨리며 생각했다. 유미현은 아무래도 그의 생각보다 더 코너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권주혁이 화천 지구 개발 계획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시점이니 초조해질 만도 했다.
우러난 차를 잔에 따랐다. 신해범은 향긋한 차 냄새를 즐기며 킬킬 웃었다. 아무리 초조해도 그렇지, <백사자>는 너무했다. 하성록이 한때 유성식품의 데릴사위였다는 사실을 믿는 모양인데, 같은 사업가끼리 연대하던 시절은 공화당이 깨지던 그때 끝났다.
신해범은 유미현에게 똑똑히 전하고 싶었다. 하성록은 공화당 동지의 뒤통수를 때리고 튄 인간이다. 나처럼 되고 싶지 않거든 지금에라도 마음 바꿔라. 당신이 그렇게 회유하고 싶어 하는 기우희가 왜 나를 따르는지 생각해 봐.
신해범은 찻잔을 들고 전면 유리창 앞으로 갔다. 쏟아지는 장대비와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권세혁이 풍기 교육대의 힘으로 함풍 2도를 치면 최석준은 당황하여 권주혁에게 그 사실을 알릴 테고, 보고받은 권주혁은 길길이 날뛰겠지. 아끼던 조카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에 목뒤를 잡고 넘어갈 터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신해범은 뜨거운 찻물이 흘러넘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깨를 떨며 웃었다.
권주혁은 죽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놈에게 뒤통수 맞는 기분. 그 배신감. 상처.
권주혁과 권세혁의 강력한 커넥션이 흔들리는 순간.
그 짜릿한 순간을 상상하니 척추가 떨렸다.
권주혁은 풍기대에 분풀이도 못 한다. 늙은이 히스테리야 좀 부리겠지만, 신해범은 어디까지나 권세혁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군 계급 이전에 출신 성분이 있었다. 함풍 2도가 왕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반역이었다.
만약 상황이 풍기대에 나쁘게 돌아간다면, 신해범은 장승희를 써먹을 생각도 있었다.
그는 서 있던 자리에서 펄쩍 뛰어 힘차게 파이팅 포즈를 했다. 깨끗한 바닥에 찻물이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권세혁의 표정은 진짜였다. 이미 사랑에 빠져 눈에 뵈는 게 없는 무식한 로미오였다. 신해범은 류진이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위가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동자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덫에 걸려 바들바들 떠는 새끼 노루 같았다.
권세혁은 기절한 듯이 자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에어컨 때문에 감기 들면 안 되니까.
권세혁은 침대를 벗어나 창가로 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다섯 시, 새벽과 아침의 경계가 모호한 시간이었다.
그는 창문에 이마를 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함풍 2도로 달려가고 싶었다. 함영재라는 인간과 그 패거리를 줄줄이 포승줄로 엮어 직할시로 데려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하다가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할 방법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권세혁은 연신 후우, 후우 가쁜 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가 했다.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류진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잠을 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권세혁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놈들을 쓸어버리기 전까지, 류진에게 그만 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자신은 두 발 뻗고 잠들지 못할 거라고.
그는 책상에 놓인 보스턴백을 뒤졌다. 전자 담배를 찾는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가방에서 빠져나온 권세혁의 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지퍼백이 들려 있었다.
“아….”
권세혁은 침대에서 자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이걸 하면 편하게 잘 수 있는데.
타이레놀 같은 일반 진통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정 효과. 류진에게 필요한 약이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권세혁은 혀를 차며 지퍼백을 가방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원래 목적이었던 전자 담배를 꺼내고 지퍼를 닫았다. 그러는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강인우는 간부용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았다. 야외 주차장에서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만 골라 주차했다. 낡은 중고 컨버터블이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강인우에게는 더 높은 레벨에도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기별로 차를 갈아 치우며 그것이 성공한 엘리트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동료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당직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도로는 한산했다. 물론 강인우는 도로가 한산하든 막히든, 날씨가 쨍쨍하든 비가 오든, 언제나 규정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운전 중에 오는 전화도 웬만해서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휴대폰에 뜬 이름은 R.U였다. 리포터 엄승원의 약자다.
강인우는 빗길에 낡은 타이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갓길에 정차했다.
“예.”
- 대위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 유 수석께 보고드릴 건이 있습니다. 출근 전에 잠깐 뵙고 싶은데요. 마침 제가 풍기대 근처에 와 있습니다.
강인우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피곤함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엄승원은 휴대폰 메시지로 장소를 알려 왔다. 풍기 교육대 본관 근처에 있는 영광빌딩, 이십사 시간 영업하는 5층 카페였다.
엄승원은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습하고 꿉꿉한 공기도, 아무리 우산을 써도 젖어 버리는 가방과 바짓단도.
묵직한 노트북을 비롯,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발로 뛰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장마는 불친절한 계절이었다. 이 모든 고민이 자가용 한 대만 있으면 끝난다는 점이 더 싫었다.
엄승원은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풍기 교육대 12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층수로만 따지면 그렇게 초고층 빌딩도 아닐진대, 복층 구조에 면적이 커서 그런지 한없이 위풍당당했다. 저곳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기분은 어떨까.
엄승원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강인우는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도착했다. 그가 당직 근무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이었고, 차 안에서 사복으로 갈아입느라 늦었다는 사실에 엄승원은 미안해했다. 그래서 커피값은 자기가 계산했다.
엄승원이 입을 열었다. 아이스커피가 든 머그 컵으로 창밖을 가리키면서.
“저기 대원들 평균 연령이 서른 초반이라면서요.”
“예.”
“사회부 후배가 그러는데, 앞으로는 연령이 더 낮아질 거랍니다. 요새 젊은 애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공공 기관 중에 출신 성분 안 보는 데가 거기 말고는 없지요.”
“그런 것도 있고, 워낙에 이미지가 화려하잖습니까. 폼 나는 거 좋아하는 어린애들이 환장하고 달려들 만하죠. 제복 멋지지, 월급 짱짱하지, 복지 혜택은 또 얼마나 기똥찬지. 이건 뭐, 그냥 하는 소린데, 제가 열 살만 어렸어도 지원서 넣었을 겁니다.”
“…….”
“농담입니다, 대위님. 너무 정색하지 마시고요.”
“호칭은 생략해 주십시오.”
엄승원이 아,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엄승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후배가 어디 고등학교로 직업 설명회를 다녀와서 그러는데, 거기 새파랗게 젊은 애 하나가 제복 차려입고 왔더랍니다. 아무리 봐도 사관 학교 출신은 아닌데 말이에요. 알고 보니까 그놈이 풍기대 정식 대원이었다지 뭡니까. 난리가 났죠. 설명회를 학교 강당에서 했다는데 거기가 꽉 차 가지고, 질문 시간에 그놈한테만 질문이 쏟아져 가지고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답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애들한테 그런 이미지라는 거죠, 풍기 교육대가. 저기는 앞으로 더 커질 겁니다. 지금이야 최전방이라 힘들다, 지원자가 없어서 인력난이다, 해도 말입니다. 한 오 년? 아니 이 년만 지나도 판도가 바뀔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쯤이면 지금 하급 대원들 짬이 차서 중간 관리자 역할도 충분히 해낼 거고요.”
“정말 풍기대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엄승원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마냥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요.”
“이해합니다.”
엄승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어떻게… 적응은 좀, 하고 계십니까?”
“적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수질이 똑같아서.”
카페의 오래된 나무 의자는 엄승원의 육중한 몸을 떠받치기에는 한없이 부실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흡연실 바깥에는 푹신해 보이는 소파 자리가 있었지만, 강인우는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담배가 고팠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몰랐다.
강인우는 고개를 돌리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룸메이트가 있습니다. 정류진이라고, 스물하나짜리 어린앤데 MVP 뒤치다꺼리 해 주고 뭐 그런 일 하는 모양입니다.”
“귀족에게는 시종이 필요하죠.”
엄승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지만, 강인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새삼스레 피부로 와닿습니다. 신분 차이가.”
“아….”
강인우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요즘 계절에는 아침이 빨리 찾아온다. 새벽의 푸른빛을 밀어낸 태양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날이 맑을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빛을 갈망한다.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한다. 그러느라 정작 주변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지 못한다. 잊어버린다.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인우는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고지에는 부와 권력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빛이 환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평평한 대지에 높은 건물을 쌓아 올리지만, 본래 지대가 높은 지역은 집값이 싸 슬럼가가 조성되기 쉬웠다.
낮은 곳에 탑을 쌓아 올라가고자 하는 자들과 평평한 땅에 설 자리가 없어 산등성이와 비탈로 밀려난 자들. 그들 사이의 괴리감이 강인우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인혜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달동네에 있는 사수대 아지트에서 먹고 잔다는 걸 알았을 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강인우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힘껏 비볐다.
“조사에 진척은 있습니까?”
엄승원의 목소리는 멋쩍었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워낙 옛날 일이라서.”
“그래서 기자님께 부탁드린 것 아닙니까. 외부자의 눈에만 보이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금호 가족들을 만나 봤습니다. 국가 유공자 신청을 몇 번이나 했는데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더군요. 노모께서 제 손을 붙잡고 뉴스에 글 좀 써 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시는데 어이구, 낯 뜨거워서 원.”
“취재도 쉬운 일이 아니군요.”
“어르신께서 뭘 알고 말씀하시겠냐만, 아들이 살아만 있었어도 지금쯤 풍기대에서 굵직한 자리 하나 했을 거라더군요.”
“그렇습니까.”
“예전엔 살림이 그리 빠듯하지는 않았는데 최금호 그렇게 되고 나서 가세가 완전히 기운 모양입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엄승원이 혀를 찼다.
“한 사람이 생계를 책임지면 그렇게 되죠. 사정이 딱해서 수석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하고 물러나 왔는데 영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기자님께서는 참 좋은 분이십니다.”
“아이고, 제가 아니라 유 수석께서 하시는 일인데요. 저야 넌지시 얘기나 꺼내 보는 수준이지.”
“그래서 말씀인데, 제가 괜찮은 아이템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신해범 인터뷰 잡아 주시는 겁니까?”
엄승원의 얼굴이 기대로 물들었다. 강인우는 그가 얼마나 신해범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동경. 닿고 싶은 욕망.
강인우는 자기 휴대폰을 엄승원에게 내밀었다. <백사자>로부터 전송받은 정류진의 사진이 떠 있었다. 빨간 머리에 작고 갸름한 얼굴. 남달리 긴 모가지가 사슴 같은 남자아이. 가까이서 보면 아직도 두 뺨에 솜털이 보송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정류진은 강인우의 예상과 달랐다. 단순히 머리색이 바뀌거나 살이 빠져서는 아니었다. 영양실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볼품없이 마른 몸을 휘감은 멍 자국과 모든 걸 체념하고 흘러가는 상황에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맡겨 버린 것 같은 눈빛은 강인우가 더 이상 비참한 상황을 방관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계기’와 닮아 있었다.
강인우는 제 휴대폰을 빤히 들여다보는 엄승원의 기름진 이마를 응시했다.
심증은 있었다.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차모은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정류진의 알몸을 본 자신을 경계하던 권세혁의 서늘한 눈빛도 마음에 걸렸다.
강인우는 유미현과 같은 방식을 택했다. 누구와도 관계가 없는 제삼자의 힘을 빌려서, 그의 눈으로 상황을 보는 것. 그거야말로 진정한 ‘객관적 판단’이었다.
강인우는 엄승원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만히 있어도 호기심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이자가 풍기대 내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리 없었다.
“누굽니까?”
강인우는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까 말한 제 룸메이트입니다. 옛날 사진이라 행색이 좀 그렇습니다.”
“연예인같이 생겼네요. 되게 어려 보이는데.”
“지금은 살이 많이 빠졌습니다. 머리색도 바뀌었고. 길이도 좀 더….”
강인우는 속으로 류진의 머리카락 길이를 가늠하며 자기 손가락을 귀 옆에 대고 가위질하듯 움직였다.
“좀 더 짧아졌습니다.”
“아… 예.”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건, 기억하십니까? 신해범의 출세 방법에 대해서요.”
엄승원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기억합니다.”
“알아보신 게 있으십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보안이 대단하더군요. 현역에 워낙 사이즈가 큰 인물이다 보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다. 변명하자면 최금호 건이 우선이기도 했고요.”
강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빈틈이 없지요.”
“예. 확실히 그렇더군요.”
강인우는 새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단숨에 내뿜었다. 그러곤 빠르게 말했다.
“정류진의 몸에서 구타로 인한 멍 자국을 봤습니다. 오래된 흉터와 자잘한 생채기도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자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엄승원은 금붕어처럼 눈을 껌벅였다. 방금 본 정류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아른했다. 희고 갸름한 얼굴, 긴 모가지, 곱게 쌍꺼풀진 눈매와 균형 잡힌 이목구비.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분위기였다. 카메라를 의식한 것도, 제대로 초점을 잡아서 피사체를 돋보이게 찍은 것도 아닌데 느껴지는 독보적인 분위기.
엄승원은 정류진의 이름을 입 안에서 되뇌었다. 정류진. 어째 어감이 익숙했다. 아는 사람 중에 비슷한 이름이 있나? 아니면 옛날에 본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에 그런 이름이 나왔나?
아니면….
엄승원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타자 치듯 두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 닮은 거 같은데.
“기자님.”
강인우의 뚜렷한 목소리에 엄승원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정류진에게 접근해 보십시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자님 눈으로 직접 확신하시는 게 좋을 테니까. 연예부 기자 행세가 좋을 겁니다. MVP를 보좌하는 미모의 이병을 취재하고 싶다든가,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엄승원은 픽 웃었다.
“그런 데 흥미가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 때문에요. 친구들과 얘기하려면 필요하다고 이것저것 사다 읽더군요.”
“아아.”
여동생이 있었더랬지. 엄승원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승원과 이야기를 나눈 영광빌딩 1층에는 서점이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지 못한다는 소리를 떠올리며, 강인우는 지체 없이 서점으로 들어섰다.
밤새 카운터를 지켰을 점원은 피곤해 보였다. 안경알 속 두 눈이 컴퓨터 모니터에 못 박혀 있다. 강인우는 외국 소설 코너로 직행했다. 전체주의, 제국주의 옹호로 범벅된 국내 소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인우는 인혜에게 전해 들은 ‘아마추어 작가 모임’을 떠올렸다. 공화당 집권 시절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모든 저서가 금서로 지정되고 본인은 ‘국가 3급 위험인물’로 지정되어 자택에 구금되었다는 작가가 해외 서버를 통해 운영한다는 모임이었다. 말이 모임이지 제법 규모가 크고 작품의 질도 높다고 했다. 비록 서버가 불안정한 탓에 업데이트 날짜를 잘 챙겨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업데이트 늦어지면 다들 불안해해. 잡혀갔을까 봐.’
‘작가가 체포되면 소식 전해 줄게.’
‘그게 무슨 망언이야! 죽을래?!’
강인우의 손끝이 진열된 책들을 훑었다. 인혜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감겼다.
작년 겨울이었다. 인혜의 합격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새 옷을 사 주려고 백화점에 데리고 갔다. 카드를 주고 마음껏 골라 보라고 했지만 인혜의 선택을 받은 옷은 중저가 브랜드의 핸드메이드 코트 한 점이었다. 소매가 펑퍼짐하고, 160센티미터 남짓한 인혜의 발목까지 오는 롱코트였다. 그 펭귄 같은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인혜는 이게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며 짜증을 냈다.
토라진 인혜를 달래 주려 들어간 디저트 카페에서 책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소설 읽기만 해?’
‘응.’
‘써 본 적은 없고?’
‘내가 무슨.’
‘찾아보니까 공모전 같은 거 많이 하던데. 공무원이면 심사 때 가산점도 주더라.’
‘그런 덴 원하는 내용이 있어. 나는 그런 글 안 써.’
‘하긴, 오빠는 아이스크림튀김이니까.’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빵가루를 묻혀 살짝 튀겨 내는 기발한 디저트 ‘아이스크림튀김’은 이 폐쇄적인 전체주의 국가에서 은어로 통했다. 국가의 녹을 받지만 반정부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뜨거운 기름에 튀겨 낸 아이스크림튀김은 한 입 깨물면 뜻밖의 차가움에 놀라게 된다.
인혜는 딸기주스를 빨대로 힘차게 빨아들이며, 대학 교수들 중에 ‘아이스크림튀김’이 많다고 씩 웃었다.
‘네 기대인 게 아니고?’
‘아니거든! 정말이야. 선배들이 신입생들 눈여겨보는 게 특별 지령을 받아서래. 교내 비밀 조직에 끌어들이려고. 나도 들고 싶은데.’
‘인혜야. 난 네 사상과 의견을 존중해. 그리고 널 지지해. 하지만 늘 조심해야 해. 특히 너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또, 또! 오빤 걱정도 많다.’
인혜의 중학교 담임 교사가 ‘아이스크림튀김’이었다. 역사와 국어를 가르쳤는데 학생들에게 반정부 사상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당시 인혜는 친구들과 함께 탄원서를 쓰려다가 아버지에게 들켰고, 그날 집안에서 테일러메이드 골프채 두 개가 유명을 달리했다.
‘오빠.’
‘왜?’
인혜는 빨대로 주스를 휘적휘적 저었다.
‘오빠는 나 믿지?’
‘믿지, 그럼. 너만큼 똑똑한 애가 어디 있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지해 줄 거지?’
‘당연하지.’
‘내가 어떤 부탁을 해도 들어줄 거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뭐야. 그런 소린 결혼할 때 새언니한테나 해.’
인혜의 말이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강인우는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난 결혼 안 해.’
‘왜? 노총각이라서? 괜찮아, 관록과 경제력으로 승부해.’
‘됐어.’
강인우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묻었다.
‘평생 너 뒷바라지만 하다가 죽으려고. 그러니까 노후 대비 부탁한다, 우리 지니어스.’
‘아, 짜증 나! 벌써 빈대 붙었어!’
투덜대는 인혜를 바라보며 강인우는 웃었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였다. 강인우는 이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강인우는 장르 소설 두 권을 골라 카운터로 갔다. 컴퓨터를 보던 직원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계산해 주었다. 갈색 봉투에 포장된 책을 품에 안자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
진치우는 신해범이 건네준 공문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불쑥 고개를 들고 물었다.
“너 죽을 날짜 받아 놨냐?”
“뭐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 해괴한 짓거리가 설명이 안 되는데.”
전면 유리창 앞에 서 있던 신해범이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해괴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부대 내 가혹 행위 근절? 구타 및 기합 집중 단속? 내 살다 살다 이런 희한한 단어는 처음 듣는다.”
“그러게 평소에 책 좀 읽지 그랬어. 백날 증시만 들여다보지 말고.”
“야!”
“상관한테 이따위로 구는데 안 잘리는 철 밥통은 너밖에 없을 거야.”
신해범이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 기 소령?”
소파에 앉은 기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자 진치우가 포효했다.
“맨날 니들이 편 먹고 나 멕이지!”
신해범이 킥킥 웃었다. 그는 찻잔을 기울이며 창밖을 보았다. 새벽 내내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쳤다. 세상은 여전히 젖어 있고, 장마철의 무겁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지만 태양이 뜬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날이 갰다.
“빨래하기 좋은 날씨네.”
진치우가 공문을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코웃음 치는 소리.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범아, 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안 때리고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해? 너 이거 쓰면서 뭐, 앞뒤가 안 맞는다거나 그런 생각이 안 들었냐?”
신해범은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그거 각 층 로비 게시판에 붙이고 기 소령, 각 팀 팀장이랑 군기 반장들 모아다가 주차장 구보 몇 바퀴 돌려. 시끄럽게 소리 악악 지르면서. MVP 방이 2층이라서 다행이군. 아주 잘 들리겠어.”
“예.”
“그리고 치우, 당분간 정류진한테 손 올리지 마.”
“뭐?”
“MVP가 알면 귀찮아지니까.”
“범아, 너 진짜….”
“갑자기 착한 척하는 거 아냐. 걔들 데리고 어디 좀 다녀오려고.”
신해범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전경을 응시했다. 아침이었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자, 끝나지 않은 투쟁의 새로운 페이지였다.
“기 소령, 조사 팀 스케줄에서 서지운 병장 제외시켜. 이유는 본인이 알 거야.”
“예.”
“자네도 당분간 몸 사리고. 현장에서 다치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진치우가 끼어들었다.
“뭐냐? 또 나만 쏙 빼놓고 니들끼리 작전하냐?”
“궁금하면 끼든지. 알려 줘?”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우희는 이 침묵의 결과를 알았다. 신해범은 언제고 친구와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고 물러서는 건 진치우였다.
“됐어. 엄마 아빠 둘 다 외출하면 집은 누가 지키냐.”
“오래 안 걸려. 길어 봤자 일주일? 아니 사나흘. 그동안 강인우 잘 감시해.”
신해범은 공문을 곱게 두 번 접어 봉투에 담았다. 귀찮아서 입구는 봉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게 보여 주기용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신만만한, 지금껏 자기가 원해서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없었던 어린애 한 명 비위 맞춰 주는 일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발짝 내딛으려는 순간, 권세혁의 요란한 목소리가 2층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하지 말라니까!”
신해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권세혁의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플라스틱 세탁 바구니를 안은 류진이 뛰쳐나왔다.
“그럼 이걸 누가 하냐?!”
방문 앞에 서 있던 신해범과 문을 열고 나온 류진이 정면충돌했다. 둘 다 놀랐고, 한쪽만 나가떨어졌다. 류진은 세탁 바구니에서 튀어나온 온갖 빨랫감들과 함께 복도에 나뒹굴었다.
“류진이 형!”
권세혁이 구르듯이 달려 나왔다. 그는 널브러진 빨랫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류진의 어깨를 안아 일으켰다.
“형 괜찮아? 괜찮아?”
“아파… 뭐야! 눈 똑바로 뜨고 다…!”
다녀, 라고 말하려던 것 같았다. 신해범의 얼굴을 확인한 류진이 입을 다물었다. 류진을 부축해 일으키던 권세혁의 얼굴도 대번에 시뻘게졌다.
“아이고, 이런.”
신해범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절도 있고 예의 바른 자세로 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지, 정 이병. 난 괜찮으니까 겁먹지 말고.”
류진은 신해범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이, 그것도 까마득하게 높은 상급자가 먼저 내민 손을 거절했다간 희대의 하극상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때 권세혁이 류진의 어깨와 허리를 안아서 일으켜 세웠다.
“미안해요, 해범이 형. 놀랐죠?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권세혁이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가 빨래 문제가 좀 있어서요.”
류진의 어깨를 잡은 권세혁의 손등에 녹색 핏줄이 도드라졌다. 신해범은 잠자코 눈을 깜박였다.
“무슨 문제인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게 좀 쪽팔린 얘기라서….”
어색하게 웃는 권세혁의 갈색 머리는 잔뜩 눌리고 흐트러진 상태였다. 잠옷으로 보이는 하얀 티셔츠는 꼬깃꼬깃하고, 생활복 바지는 기장이 짧아 복사뼈가 드러났다. 이제 막 일어난 모습이었다. 심지어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모습은 잡지의 대학생 모델로 등장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신해범은 권세혁의 품에 안긴 류진이 고개를 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왠지,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놔. 숨 막혀.”
“아, 미안.”
권세혁의 두 팔에서 힘이 빠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류진이 흩어진 빨랫감을 줍기 시작했다.
권세혁은 풍기대에서 지급받은 의류 외에도 옷이 많았고, 수시로 갈아입었다. 그에게 어제 입은 옷을 오늘도 입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입고 나가지 않았어도 그랬다. 권세혁의 몸에 한 번이라도 걸쳐졌던 옷은 곧장 빨래 바구니로 들어갔다. 당연히 빨랫감이 넘쳐 났다. 류진은 본인과 권세혁, 두 사람분의 옷을 비롯해 속옷, 수건, 양말 등 엄청난 양의 빨래를 소화하느라 매일같이 세탁실 출근 도장을 찍었다.
신해범은 빨랫감의 먼지를 탁탁 털어 바구니에 집어넣는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배짝 마른 팔다리가 휘적휘적 움직이는 모습이 불안하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서 움직였다. 신해범은 그걸로 만족했다.
정류진이 움직인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 지금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신해범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빨랫감을 함께 주웠다.
“도와주지.”
“괜찮습니다.”
“도와줄게.”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수건을 잡았다. 신해범은 손에 힘을 주고 끌어당겼으나, 뜻밖에 류진이 수건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
거리가 가까웠다.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관자놀이 흉터를 엿보았다.
“그냥 두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의젓해서 신해범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는 류진이 자신과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리깐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면 알았다.
네 관자놀이 흉터와 내 귀.
신해범은 마른침을 삼켰다. 살점이 잘려 나가, 악마의 그것처럼 뾰족해진 귀가 가늘게 떨렸다.
신예나로부터 문자가 세 통 들어와 있었다.
「함풍 도착」
「약속 장소에서 대기 중」
「기름값 엄청 나왔고 타이어도 갈아야 되겠어. 이따 통화해」
신해범은 휴대폰 플립을 닫고 세탁실 문을 열어젖혔다. 한 발짝 내딛자마자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귀청을 때렸다.
“형이 내 속옷을 왜 빠냐고!”
권세혁이 세탁기 앞을 막고 있었다. 잔뜩 뿔이 난 채로.
하얗고, 밝고, 넓으면서 청결한 세탁실은 신해범이 식당 다음으로 아끼는 장소였다. 세탁기와 건조기는 물론, 최신형 스타일러를 구비했고 비품도 넉넉하게 갖추고 있었다. 관리실에 사용 신청만 하면 다리미와 받침대도 쓸 수 있었다. 신해범은 식당만큼이나 세탁실에 애정을 가졌고, 이곳에서 듣기 싫은 고성이 오간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는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린 채 팔짱을 끼고 섰다. 자기 팬티 내놓으라고 악을 쓰는 권세혁과 세탁 바구니를 안은 채 버티는 정류진이 볼만했다. 아주 가관이었다.
“이 새낀 해 준대도 지랄이야. 아, 귀찮게 하지 말고 비켜!”
“그러니까 형이 왜 그걸 하냐고! 내가 싫다고! 안 해 줘도 된다는데 왜 그래 진짜!”
“웃기는 자식. 여기서 네 뒤치다꺼리를 나 말고 누가 하냐?”
“다른 사람 시키면 되지!”
“다른 사람 누구?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신해범 준장이 팬티 빨래까지 해 준다냐?”
“아, 좀!”
류진은 다른 세탁기로 가려 했지만, 권세혁이 득달같이 달려와 가로막았다.
“너 진짜 이럴래?”
“형이야말로 이럴 거야?”
잠깐의 침묵. 권세혁을 올려다보던 류진이 물었다.
“왜 팬티를 못 빨게 해?”
“왜는 무슨 왜야? 당연히….”
“너 몽정했냐?”
“아아악! 조용히 해!”
권세혁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류진이 턱을 쳐들었다.
“왜, 찔려?”
신해범은 속으로 웃었다. 말라깽이 주제에 권세혁을 갖고 논다.
“찔리면 솔직하게 말하든가. 그럼 오늘만 봐준다.”
“뭘 얘기해! 나 그런 거 안 했어!”
“얼씨구?”
그는 류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기특하다. 이걸로 안심이다. 안심했다.
분명 안심해야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왕자님?”
인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돌아봤다. 둘 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신해범을 보고 있었다. 신해범은 미소를 띠고 다가가 권세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빨아 드리지요.”
“해범이 형!”
신해범은 속마음을 감추고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이래 봬도 손힘이 좋습니다.”
“둘이 짰어요?! 다들 왜 남의 속옷 가지고 난리야!”
류진은 시선을 피하고, 신해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뭘 짜고 작당하기는 했지. 그깟 팬티 몇 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을.
권세혁이 주춤하는 틈을 타 류진은 맞은편 세탁기로 돌진했다. 드럼 세탁기 문을 열어젖히고 세탁물을 마구 쑤셔 넣었다. 권세혁이 아악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세탁기 문은 닫혔고, 버튼은 눌렸다.
“혀엉!”
속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졌다. 유리에 손을 댄 권세혁이 신음했다.
“아… 진짜….”
세탁 바구니를 바닥에 텅, 내려놓은 류진이 두 손을 탁탁 털었다.
“별것도 아닌 거 갖고 난리야.”
“나한텐 별거야!”
“놀고 자빠졌네. 니 빤스는 뭐, 다른 사람이 빨면 안 되는 마법의 빤스냐? 남이 손대면 영험함이 떨어지고 그래?”
“아악!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권세혁은 세탁기에 머리를 박을 기세였다. 뒤에서 보니 귓불까지 붉었다. 신해범은 감탄한 표정으로 류진을 보았다. 권세혁을 완전히 쥐락펴락한다.
“…….”
그런데 왜 나하고는 눈도 안 마주치냐.
이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실수로라도 힐끔 쳐다볼 법한데.
신해범은 팔짱을 끼고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정류진, 저거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다. 신경 안 쓴다는 티 내느라 힘들지? 난 네 머리통을 붙잡아 돌리고 싶어서 죽겠어.
세탁기에 이마를 댄 권세혁이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에게 다가간 류진이 말했다.
“어차피 남들이 다 해 줬으면서. 뭐가 그렇게 부끄럽냐.”
“형이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
“다를 건 뭔데?”
“달라, 형은.”
류진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권세혁이 기대 오는 무게가 싫지 않았다. 신해범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기를 가려 주니까.
<백사자> 숙소에서 쓰던 낡은 통돌이 세탁기에서는 바닥에 금이 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세탁기가 있는 발코니 바로 옆방을 쓰는 조원들이 늦은 시간에 빨래 소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주의를 기울여도 그때뿐, 공동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풍기 교육대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권세혁은 생각에 잠긴 류진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혹시 세탁기가 신기해?”
“아냐.”
류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신해범이 끼어들었다.
“정 이병, 잠깐 나 좀 보지.”
권세혁이 뒤돌아보았다.
“왜요? 류진이 형한테 무슨 할 얘기 있어요?”
“예. 정 이병 가족과 관련해서 전할 말이 있습니다.”
텅 빈 세탁실을 둘러보며 권세혁이 말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신해범은 속으로 대꾸했다. 듣는 사람이 없기는. 가장 큰 쥐새끼가 여기 있는데.
“정 이병의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말입니다.”
“류진이 형 가족 얘기면 제가 알아야죠.”
신해범은 웃기만 했다. 그의 시선은 고개 숙인 류진의 정수리에 꽂혀 있었다. 저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갈지 알 만했다. 따라가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을 속여 먹기 위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하지만 저 말이 사실이고 이모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
이윽고 류진이 말했다.
“넌 여기 있어.”
“왜? 형, 같이 가. 형 가족들 얘기라면 나도….”
“네가 뭔데?”
“응?”
“네가 뭔데 남의 가족 얘기에 끼어들어.”
권세혁의 얼굴이 굳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무례함에 만족했다. 연애 사업에서 밀고 당기기는 중요하다. 어제는 끈을 당겼으니 오늘은 살짝 밀어내서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휘둘리는 인형이 아니야’ 하는 도도함을 어필해야지. 잘한다, 우리 꼬꼬.
신해범은 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류진이 그의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
신예나의 회색 페라리는 경주용이었다. 10년 전 모델이지만 전 세계에서 다섯 대 제작된 한정판이며, 희귀성과 뛰어난 퍼포먼스로 지금까지도 페라리 마니아들 사이에서 드림 카로 손꼽혔다.
신예나는 이 차량을 범죄 단체 조직 혐의로 풍기대에서 조사를 받은 완구 회사 <트라이어드> 대표 서일영으로부터 커피 한 잔 값에 인수했다. 정계에 연줄을 대기 위해서 팀을 꾸린 서일영은 짜고 치는 경매로 검은돈을 세탁하려 했다. 신예나는 그가 범죄 조직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를 차근차근 모아 풍기대에 넘겼다.
서일영은 평소 호월루를 기생집이라며 노골적으로 무시해 왔고, 신예나는 젊은 나이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성공한 콧대 높은 남자의 모든 걸 빼앗고 싶었다.
신해범은 이 일로 유공 훈장을 받았다. 왕실을 위협하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 조직을 뿌리 뽑는 데 일조했다는 명목이었다. 신룡관에서 열린 시상식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는데, 신해범은 이날 대중에 자신의 얼굴과 이름 석 자를 다시 한번 새겼다.
그때 신예나는 오프였던 기우희와 함께 있었다. 호월루 별관에서 양파 과자를 우물거리며 카메라에 잡히는 군인들의 외모 평가를 했다. 쟤는 10점, 쟤는 7점. 신예나는 기우희의 남자 취향이 자신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서일영의 몰락은 <붉은 호랑이>의 첫 합작품이었다. 친모를 살해했다는 사실에 색안경을 끼고 봤던 기우희를 동료로 인정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예나에게는 이 페라리가 소중했다. 진치우는 사형당한 서일영의 넋이 바퀴에 들러붙어 있을 것 같다고 질색했지만, 이 사랑스러운 페라리는 지금껏 잔고장 한번 없었다.
직할시를 벗어나자 울퉁불퉁한 비포장 국도가 시작됐다. 좌우로 논밭이 펼쳐졌다. 비닐하우스와 아름드리나무, 전봇대, 산등성이 보였다. 나름대로 근사한 경치였다. 그러나 신예나는 차창을 올렸다. 좋게 말하면 자연 냄새,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똥 냄새가 지독했다.
페라리는 장거리 주행에 적합한 차가 아니었다. 매끈한 포장도로를 최고 속력으로 질주하는 데 익숙한 페라리는 울퉁불퉁 모난 길을 낯설어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던 차체가 삽시간에 흙탕물, 모래 먼지 범벅이 됐다. 신예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복귀하면 타이어부터 갈아 치워야겠다고.
세 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도착했다.
함풍 2도.
은하는 아직도 정성현이 이곳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신예나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삶이 고달픈 것이다. 어쩌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을지도 모르고. 정성현에게는 지켜야 할 아내가 있었다.
퀵서비스 배달원으로 일하는 정성현은 역 앞이 대기 장소라고 했다. 역전이라고 해서 번화한 장소는 아니었다. 번화할 수 있었지만 도중에 ‘멈춰 버린’ 곳이라고 할까. 짓다 만 건축물과 완공되었으나 마땅한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버려진 건물들이 많아, 신예나는 혼자 돌아다니기 꺼려짐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지역경제 발전이 코앞에 있었는데.
정성현은 근무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다. 그건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등 최소한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닥치는 대로 일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일에 열의가 넘쳐서가 아니었다. 신예나가 느끼기에 정성현은 자기 주변을 돌아볼 겨를 없이,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조용히 침전하는 사람 같았다. 대부분의 저소득층 노동자가 그러하듯.
신해범은 그가 풍기대에 양복을 차려입고 왔다고 했다. 물론 그건 상당히 신경 쓴 옷차림이었다. 한여름에 바깥에서 일하다 온 정성현은 낡은 청바지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 차림이었고,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약속 장소인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문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한 명이 의자를 테이블 가까이 당겼다. 묻을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무엇이? 냄새와 먼지가. 숨길 수 없는 가난의 흔적이.
정성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좀처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 티가 났다. 신예나는 한숨을 쉬고 가뿐하게 한 손을 들었다.
“정성현 씨?”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처음 이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은근하게 달라붙던 것이었다.
신예나는 목에 힘을 줬다. 실컷 구경해라. 나는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강해지니까.
신예나는 악수하기 전, 정성현이 자기 손바닥을 낡은 청바지에 문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거칠고 딱딱한 손바닥에 굳은살이 많았다. 류진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인데 가까이서 보니 분위기가 꽤 비슷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신예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호월루에서 단련한 접객용 미소였다.
“제가 전화 드린 신예나입니다.”
정성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신예나에게 붙잡힌 손을 불편해하며 자꾸만 빼려고 했다.
“대장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앉으세요.”
엉거주춤 서 있던 정성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신예나는 검은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두껍고 부들부들한 재질에, 테두리에는 금테를 두른 고급 봉투는 제법 두툼했다.
정성현이 눈을 껌벅껌벅했다.
“이게 뭡니까?”
“류진이 미정산 급여입니다.”
“걔가 거기서도 일했습니까?”
“풍기 교육대 전에 잠깐 있었습니다. 본인에게 전해 주려 했는데 워낙 급하게 나가기도 했고, 또 당사자가 받으려 하지를 않아서요.”
“그 애가 안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호월루는 신룡관의 허가를 받아 영업하는 사업체입니다. 저는 노동법을 준수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오너고요. 류진이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실하게 일해 줬고, 이 급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본인에게 전해 주십시오.”
“류진이는 수령 대리인으로 박진아 씨를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박진아 씨는….”
신예나는 봉투 옆에 서류 한 장과 사파이어색 만년필을 올려놓았다.
“박진아 씨와는 연락이 불가피한 상황이니까요. 이건 대리 수령증입니다. 여기 사인해 주면 됩니다.”
“…….”
“무슨 문제라도?”
정성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류진이… 잘 지냅니까?”
신예나는 미리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군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정성현은 침묵을 지켰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았다. 기다리다 지친 신예나가 입을 열었다.
“전화로 말씀드린 건 말인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래 붙잡지 않을 테니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거기로 또 불려 가는 것보다야 낫습니다.”
손님을 극진히 대접했다고 자부하는 신해범이 들으면 서운해할 소리였다. 신예나는 쓴웃음을 짓고 하얀 테이블보 위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털어 냈다.
“지은 죄가 없어도 주눅 들게 만드는 곳이지요. 이해합니다.”
“그, 말씀하신 용건은….”
“질문에 앞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성현 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풍기 교육대 신해범 대장의 전언입니다. 정성현 씨의 대답을 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할 겁니다. 한마디로, 저는 신해범 대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거짓말하면 총살이다. 대답을 거부해도 총살이다. 의미를 눈치챈 정성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예나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유리컵에 든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정성현의 부르튼 입술 사이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에어컨 덕분에 실내는 북극 같은데, 정성현은 연신 손등으로 이마와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닦았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신예나는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정성현 씨께서는, 돌아가신 류연비 씨의 유품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그 애가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류연비 씨의 고향 집이 전소되었을 때 찾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성현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저희도 힘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경황이 없었고, 또 하루하루 살기 벅차서.”
뜻밖에 도전적인 목소리였다.
“상황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장님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장모님 그렇게 돌아가셨지, 아내는 반쯤 넋이 나갔지. 게다가 연우, 아니 류진이 그 애는….”
정성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맥없는 고라니 같았던 남자는 머리를 쳐들고 신예나를 향해, 이 세상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모릅니다. 우리네 삶이 어떤지. 사람들의 비난, 온몸에 들러붙은 가난, 숨 돌릴 틈도 없이 밀어닥치는 불행… 솔직히 말할까요? 저는 아내가 미쳐 버린 게 류진이, 그 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애가 조금만 조심성이 있었어도, 불량한 애들과 어울리지만 않았어도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
“우리가 범죄자 놈들 앞에 무릎을 꿇을 일도 없고, 코딱지만 한 집까지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게 되지도 않았을 테죠. 아내는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불안했습니다만, 완전히 무너진 건 류진이 사건 다음입니다.”
정성현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지 압니다. 제가 경멸스러우시겠죠. 조카 덕에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다 누려 놓고 이제 와 딴소리냐, 싶으시겠죠. 압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저희가 겪는 불행의 크기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
“류진이 돈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 애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애는 우리를 버렸습니다. 비겁하게 도망쳤다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성현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아내는 류진이를 기다렸습니다. 그 애가 돌아오길 바랐어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조카를 찾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젠… 지쳤습니다. 아내는 시설에서 나오지 못할 겁니다. 저는 하루살이 인생에 숨넘어가기 직전이고요.”
“류진이는 당신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고 싶어 합니다.”
“필요 없습니다. 좋다고 받아 썼다가 또 어디서 덤터기 쓸지 모릅니다.”
“박진아 씨의 입원비만이라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 안 합니다.”
정성현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가겠습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앉으세요.”
정성현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순순히 도로 앉았다.
신예나는 피식 웃었다. 다리를 꼬면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오늘따라 듀퐁 라이터 소리가 맑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정성현 씨.”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런 정성현을 바라보는 신예나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거렸다. 담배 맛이 썼다. 이건 장시간 운전에 따른 피로 때문만이 아니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물론 두 사람 다 찻잔에는 손대지 않았다. 담배 연기를 후, 뱉은 신예나가 정성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성현 씨, 류진이는 가출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건 저희가… 여러 가지 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류진이도, 이런 말씀까지 드려야 하나 싶지만… 문제가 전혀 없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문제였지요?”
“예전부터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성현은 기가 찬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보십니까?”
신예나는 태연하게 응수했다.
“류진이 학적부가 화려하더군요. 전학도 여러 번 했고.”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쳤습니다. 전학 첫날 같은 반 급우와 싸움질을 해서 전화가 온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 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건 압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 건든다더군요. 그런데, 그런 것도 참지 못해서야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정성현은 곽현우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와 류진을 비교했다. 똑같이 가족을 잃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누구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여 대학에 진학했고, 누구는 아웃사이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래서요.”
“예?”
“정성현 씨. 우리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죠.”
신예나는 능숙하게 담뱃재를 털었다.
“아이가 없어졌다. 정황상 유괴나 납치는 아니고 가출이 분명하다. 사실 보호자가 가출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는 자주 있습니다. 보통 이런 이유에서죠. 이미 가출했다가 돌아온 전적이 많아서 경찰 측에서 기다려 보자며 접수를 해 주지 않는 경우. 아니면 동네 시끄럽게 만들기 싫어서 경찰서 문턱에도 안 가고 집구석에 들어앉아 조용히 기다리는 경우.”
“…….”
“그런데 제가 보기에, 정성현 씨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을 찡긋하는 신예나의 얼굴은 신해범과 닮은 데가 있었다.
“가출 신고를 하지 않는 최악의 이유는, 보호자가 아이를 찾고 싶지 않은 경우죠.”
“…….”
“부정하지 않으시는군요.”
“그게 죄가 됩니까?”
신예나는 미소를 띠었다.
“죄는 아니죠. 법적으로는.”
이제는 청소년 보호법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만 20세 미만에게도 의무 부양자는 없었다. 부양은 개인의 선택이었고, 국가는 그 선택을 존중했다. 그건 언뜻 공동체의 자유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미성년의 무지와 순진함을 이용해 아무런 제약 없이 그들을 착취하겠다는 정신 나간 독재자의 깡패 짓에 불과했다.
신예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방임이나 회피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세상은 저 같은 사람에게만 냉정하군요. 그저 찾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저 찾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무책임한 인간을 봤나.
신예나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 자리에 신해범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보는 눈 많은 레스토랑에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도로 위에서 오토바이 배달 기사 한 사람쯤 밀어 버리는 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나는 아이를 버린 게 아니라고.”
“…….”
“그렇게 자위하면서 사셨군요.”
정성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신예나는 이미 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류진은 버려졌다. 욕을 먹고, 빚을 떠안고, 얻어맞고, 강간당하고,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완전히 홀로 남은 것이었다.
왜 류진이 하성록에게 매달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구원자였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혈연조차 원하지 않는 류진을 필요로 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류진은 갈 곳이 필요했다. 잠을 잘 수 있는 집과 배를 채울 수 있는 식사가 필요했다. 하성록은 한술 더 떠서, 류진 혼자 힘으로는 죽어서도 다 갚지 못할 엄청난 빚까지 탕감해 주었다.
신예나의 눈꺼풀이 깜박였다. 하성록이 정류진을 꾀어낸 수법은 과거에 신해범을 속여 먹은 방식과 똑같았다. 구원자인 척하는 도둑놈.
거기에는 정성현, 지금 신예나의 눈앞에 앉은 남자의 책임도 있었다. 물론 그런 속마음을 내비칠 수는 없기에 신예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성현 씨, 괜찮습니다. 탓하는 게 아니에요.”
“……”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이제 솔직해지셔도 됩니다. 사실은 류진이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죠? 그래서 박진아 씨도 시설로 보낸 거 아닙니까? 만약 그 애가 돌아와서 이모가 없는 걸 본다면,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나이니까 생판 남인 자신에게 빌붙지는 않을 거라고, 뭐 그런 계산을 하셨던 거겠지요?”
정성현은 침묵했다. 신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기 싫은 것에 대한 긍정을 침묵으로 대신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흐트러진 의자와 엎어진 찻잔, 흰 테이블보를 적시는 검은 커피. 신예나는 정성현이 박차고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심약한 남자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갔다. 얼마나 급했으면….
신예나는 그가 자신의 얼굴로 집어 던진 돈 봉투를 찾아 들었다. 류진이 알면 미안해서 죽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도 뭐, 돈으로 맞아서 썩 기분 나쁘진 않았다.
신예나는 수건을 가지고 다가온 웨이트리스를 향해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소란 피워서 미안합니다.”
신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웨이트리스에게 건넸다. 팁 문화가 생소한 어린 웨이트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라리 안에서, 신예나는 구형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꼴불견이었다.
- 응. 나야.
“정성현 씨 만났어.”
- 정산 문제 해결했어?
“한사코 거절해서 어쩔 수 없었어.”
신해범이 흥흥 웃었다.
-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은.
“경계가 심하던데. 누가 보면 내가 돈 주러 온 게 아니라 받으러 온 줄 알겠어. 왜 그러는지 알아?”
- 류연비 채무가 상당히 복잡했어. 권이 작정하고 묻으려고 한 티가 나는데 아직 자세한 건 모르겠고. 류연비 유품이 뭔지는 물어봤어?.
“전혀 몰라.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는데… 모르지. 류진이 외조모가 그 집에서 죽었다면서.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걸려.”
- 단순한 스토커가 아니야.
“아무래도 냄새가 나지?”
- 권이 한 짓이야. 유가족이 류연비 통장에 손대게 하려고. 현금 인출 기록이 남으면 단순 승인으로 간주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정류진은 법적으로 류연비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돼. 그의 전 재산을 훨씬 웃도는 빚까지 말이야.
“류진이한테 경제 사범 혐의를 씌우려고 했다는 거야?”
신예나는 손톱을 깨물었다. 휴대폰 너머 신해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정류진은 감옥에 갔겠지.
“전후 사정이 참작되더라도?”
- 곽을 불륜 스캔들로 뭉개 버린 인간이야. 힘없는 어린애 감옥에 처넣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냐.
신해범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지만, 신예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하성록이 그런 사정도 알았을까?”
- 그 늙은이도 머리 잘 썼지.
“방화범은?”
- 집행 유예로 풀려난 지 얼마 안 돼서 죽었어. 원래부터 알코올 중독이었다는데 길에서 변사체로 발견. 단순 객사라기에는 방어흔이 많아서 내부에서도 알음알음 얘기가 있었다고 해.
“권이 사주한 걸까?”
- 기 소령이 알아본 바로는 무연고자로 처리됐다는데. 영 구리지.
“류진이한테는 얘기했어?”
신해범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 봐서.
“뭐야. 중요한 일이잖아.”
- 굳이 상처 들쑤실 필요 있나? 지금 잘하고 있는데.
룸 미러 속 신예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런 걸 숨기겠다고?”
- 걔는 알고 싶지 않을걸.
“그건 오빠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 정류진에 관한 모든 건 내가 판단해.
“오빠가 무슨 자격으로?”
- 대장이자 포주 자격으로.
“난 오빠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신예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왜 그렇게 착잡해?
“정성현, 하성록이랑 닮았어.”
- 하성록이 자존심 상해 울겠군.
“아니 정말로.”
신예나는 진심이었다. 정성현은 하성록과 닮았다. 차이라면 하성록만큼의 힘이 없었다는 점 뿐이고, 책임감 없는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예나는 차창을 내렸다. 정성현과 만난 패밀리 레스토랑이 그나마 세련되고 쾌적한 시설이었다. 내려온 김에 지역 특산물이나 사 갈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썰렁했다. 언제나 떠들썩하고, 붐비며, 시간에 관계없이 화려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직할시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슬레이트 판자에 라카로 ‘빵집’ 두 글자를 휘갈겨 쓴, 조잡한 간판을 내건 가게로 여름 교복을 입은 학생 두 명이 들어갔다. 신예나는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쟤들은 이 시간에 학교 안 가고 뭐 하나?
학생들은 금방 나왔다. 기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튀김 빵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신예나는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빵을 우물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던 교복 소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 큰 쪽이 작은 쪽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들갑 떠는 소리가 요란했다. 주저하면서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신예나는 웃으며 클랙슨을 빵! 울렸다. 아기들아 어디 가니? 누나가 태워 줄까?
“아….”
실수했다. 도망간다. 신예나는 뛰어가는 학생들의 가방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 동네 애들인가 보았다. 하얀 반팔 셔츠와 남색 바지, 중저가 브랜드 가방과 운동화가 전형적인 서민 가정 아이들이었다.
별관 대청마루에 누워 있던 류진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사슴 같은 목덜미와 길고 마른 팔다리가 떠올랐다. 신예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류진은 학창 시절에 어떤 교복을 입었을까? 뭐든지 잘 어울렸을 것 같았다. 워낙에 옷걸이가 좋아서. 다만 교복을 입고 보낸 학창 시절이 행복하지는 않았을 듯했다.
출발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울었다. 신예나는 자연스럽게 업무용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호월루의 직원으로부터 전송된 사진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귀엽긴….”
어른 손만 한 강아지들이 꼬물꼬물했다. 류진이 귀여워하던 백구는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네 마리는 백구, 두 마리는 점박이, 가장 늦게 태어난 한 마리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흑구였다. 신예나의 검지가 휴대폰 액정을 쓸었다. 멍멍이들 아빠가 누군가 했더니.
통화를 마친 신해범이 돌아섰다. 이쪽을 바라보던 류진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열렬한 눈으로 쳐다보면 쑥스러운데.”
“방금 누구랑 통화했어?”
“알면서 뭘 모르는 척이야.”
“…….”
“당신 입에서 누나랑 보스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내가 왜 감옥에 가? 당신 나 몰래 이상한 거 꾸미고 있지. 그렇지? 뭐야. 사실대로 말해!”
샐쭉한 표정이 신해범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너 지금 예나 의심하냐?”
“뭐?”
“그렇잖아. 방금 내가 누구랑 전화했는지 빤히 알면서. 아까부터 귀 쫑긋거리고 있었던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거 서운하네, 정류진. 예나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이건 뭐 물에서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따귀를 후려치는 꼴이네. 기가 막혀서.”
뻔뻔한 태도가 하늘을 찔렀다. 류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
“기가 막힌 건 나야!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심문 실력이 형편없군. 그래서야 일곱 살짜리 애한테도 지겠어. 꼬꼬야, 너 솔직하게 말해 봐. 어릴 때부터 머리 나쁘다는 말 많이 들었지?”
“아니야! 난 누나 닮아서…!”
항변하던 류진의 입이 꾹 다물렸다. 신해범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발등을 찍어 버리네.”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으나, 신해범은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너 나한테 안 돼. 꼬꼬야.”
“지랄.”
“사람이 인정할 건 인정해야 그나마 덜 추해지는데.”
류진은 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여차하면 문짝을 박차고 달아나겠다는 결의가 전해져 왔다. 신해범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애지중지하는 장식장 앞으로 갔다. 하얀 바탕에 붉은색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에르메스 머그를 골랐다. 물을 끓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류진이 재촉했다.
“할 말이 뭔데. 이모네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응, 아니야.”
“정말이지?”
“정말이야. 사실 가족 얘기라는 건 핑계였어.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꼬꼬가 나 안 따라올 거 같았거든.”
“이 거짓말쟁이!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응, 맞아. 그래서 내 코가 이렇게 높은가 봐.”
신해범은 서랍에서 차 상자를 꺼냈다. 두꺼운 종이에 금박으로 품명이 적힌 고급 전통차 세트였다. 그는 상자 뚜껑을 열고 철제 원통을 꺼내 흔들었다. 붉은색 바탕에 매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선물로 들어온 건데, 되게 좋은 차거든. 그래서 우리 꼬꼬 먹이려고 아껴 뒀어. MVP한테 말하지 마라? 참고로 이건 치우도 몰라.”
“먹을 거 가지고 그러고 싶어? 돈도 많은 게….”
류진이 꿍얼거렸다.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짓했다.
“뭐 해? 앉아.”
“그냥 여기 있을래.”
“머리통 잡혀서 끌려오는 것보단 네 발로 걸어오는 게 낫지 않겠냐?”
마른 어깨가 축 늘어졌다. 편의를 위해 넉넉하게 만든 생활복이 너무 커 보였다. 기장은 맞는데, 역시 살집이 없어서 그런가. 신해범은 주춤주춤 다가오는 류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뭘… 뭘 그렇게 쳐다봐.”
“예뻐서. 앉아.”
“지랄….”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머그잔을 건네자 순순히 받아 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나 차를 한 모금 마신 순간, 류진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쓰잖아! 이게 뭐야!”
“몸에 좋은 차야. 쭉 들이켜.”
“어디에 좋은데?”
“정력.”
류진은 바로 컵을 내려놓았다. 신해범이 키득키득 웃었다.
“거짓말이야. 이건 그냥 꽃 차. 어떤 효능이라기보다는 특유의 향을 즐길 목적으로 마시는 차지. 딱 봐도 감이 안 오냐?”
“감 안 와. 그리고 나는 당신하고 마주 앉아서 차 마시기 싫어.”
“난 마시고 싶은데.”
“지랄.”
“너 한 번만 더 지랄이니 개랄이니 했다간 평생 웃고 다니게 해 준다.”
입을 귀밑까지 찢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신해범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작자였다. 류진은 말없이 컵을 도로 들었다. 신해범도 마시는 걸 보니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러나는 빛깔과 향취가 정말로 좋은 차였다.
신해범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머그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화보 같았다. 류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성격과 외모를 일대일로 맞바꾼 놈.
“기동복 입는 법 배웠어?”
“아직.”
“장비도 많고, 잘못 착장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확실하게 배워야 해. 지금 가르쳐 줄 테니까 벗어.”
“뭐?”
“못 들었어? 벗으라고.”
류진은 머그잔을 탕 내려놓았다. 신해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깜짝이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뭘 알아?”
“나한테 또 헛짓거리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더는 안 속아.”
더는 안 속아. 신해범은 속으로 류진의 말을 읊조리며 웃었다. 까마득한 선대의 영광을 기억하는 포메라니안이 털을 잔뜩 세우고 발을 구르며 위협하는 모양새였다.
신해범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거울 좀 보고 다녀라, 꼬꼬야.”
“뭐?”
“넌 네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내새끼들 좆을 벌떡벌떡 세우는 천하절색인 줄 아나 본데, 뭐 본판이 되는 건 인정한다만 그런 후줄근한 행색으로는 좀 곤란해. 너 아침에 세수는 했냐? 머리에 빗질은 했고? 허이구, 밖에 나가면 까치가 날아와서 둥지 틀겠다.”
“세수했어!”
“머리는 안 빗었지?”
“어, 어차피 당신이 다 쥐어뜯어 놓을 건데 뭐 하러.”
신해범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오는 대로 막 뱉는구만.”
“…….”
“몸가짐은 언제나 바로 해, 정류진. 내가 까다로운 게 아니라 기본적인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 양치, 손발 씻고 머리에 물 묻혀서 빗질만 쓱쓱 해 줘도 사람 꼴 된다고.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꼬꼬는 본판이 되니까….”
“신경 써서 뭐 할 건데?”
“음?”
“당신만 좋은 일 시켜 주는 짓은 안 해.”
신해범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동면에 들었던 육식 동물이 깨어나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였다.
“그놈한테 당당한 모습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그놈?”
“함영재.”
“그 이름 한 번만 더 꺼내면…!”
“함영재. 함풍 2도. 지금 예나가 거기에 가 있어.”
신해범은 하얗게 질린 류진의 얼굴을 즐겼다.
“누나가 왜? 그, 그 새끼 만났어? 왜?”
신해범은 류진에게 다가가 창백한 뺨을 어루만졌다. 얇은 피부 아래로 뼈의 형태가 느껴졌다.
“누굴 만나긴 했지.”
류진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그의 엉덩이를 벌리는 일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금 신해범이 바라는 건 다른 거였다.
“예나가 만난 건 정성현이야. 네 호월루 월급, 그쪽에 전해 달라며.”
“계좌 이체로 해도 되잖아. 누나 힘들게….”
“본인이 안 받겠다는데 별수 있나?”
신해범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너도 그렇고, 네 이모부도 그렇고. 돈 줘도 싫은 이유가 뭐냐?”
“…….”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다음부턴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 안 들어줘.”
“아까 통화할 때, 보스 이름은 왜 나왔어?”
“음? 내가 그랬나?”
“그랬어.”
“기억이 안 나는데.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냐?”
류진이 항변했다.
“아니야, 분명히 들었어. 분명 하성록이 자존심 어쩌고… 얼버무리지 마.”
신해범은 환하게 웃으며 류진의 턱을 움켜잡았다.
“우리 꼬꼬 귀엽네.”
“아, 아파…!”
“우리 함풍 2도 내려갈 거야. 표면적으로는 다음 분기 신입 대원 모집을 위한 홍보 겸 지역경 순찰. 긴장하지 마, 어려운 일 아니니까. 오히려 축제 같을걸? 그쪽에선 우리 온다고 이래저래 준비 많이 할 거고, 우린 우리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야지. 난 벌써 설명회에서 할 연설까지 준비해 놨어.”
“꼴값은…!”
“너나 그렇게 생각하지.”
신해범의 두 손이 류진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설명회에 함영재도 올 거야. 우릴 좋아하진 않겠지만,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집안 아들이 정부 기관에서 마련한 자리에 불참했다간 후환이 두려울 테니까. 넌 그때 기동복 입어야 해. 장비 다 갖추고, 총도 들고. 어때?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아지지? 풍기 교육대 진압 팀이 되어서 돌아온 널 보고 그 새끼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해 봐. 부러움? 두려움? 뭐든지 좋아. 확실한 건, 그놈은 더 이상 너를 화장실 취급하지 못한다.”
류진의 멱살을 쥔 신해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벗어. 네가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걸 가르쳐 줄게.”
신해범의 손이 다가와 목덜미를 만졌다. 그의 손가락은 피아노 치듯 척추를 더듬어 내려갔다. 벌거벗은 류진은 두 손으로 성기를 가린 채 두 눈을 꼭 감고 움찔거렸다. 신해범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당장이라도 단단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뭐 하는데….”
“가만있어.”
류진의 등에 뭔가가 닿았다. 신해범의 탄탄한 가슴팍이었다. 제복 셔츠 너머로 그의 온기와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기동복에는 각종 보호구가 많아. 그래서 옷 자체가 무거워. 옛날 장수들이 입었던 갑옷보다야 덜하지만, 아무래도 너 같은 말라깽이는….”
신해범이 류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입는 것만으로도 움직임이 둔해져.”
류진은 신해범의 팔을 잡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거기에 총 무게까지 더해지면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걸.”
“알았으니까 놓고 얘기해.”
“가만히 있어.”
신해범이 류진의 귓바퀴를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아파…!”
“너 눈물 많아졌어.”
“당신 때문이잖아!”
“그래? 좋네.”
“뭐가?”
“나 때문에 네가 변하는 게.”
류진의 양어깨가 경련했다. 신해범의 큰 손이 겨드랑 밑으로 들어와 가슴팍과 팔 안쪽, 옆구리까지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이 서늘한 공기에 자극받아 꼿꼿하게 서 있는 유두로 뻗어 갔다. 류진은 엉겁결에 성기를 가리고 있던 손을 올려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 마.”
“너 자위해 본 적 없지?”
“그딴 걸 내가 왜…!”
“한번 해 봐. 거울 보고. 네 가슴 만지는 거 되게 기분 좋거든. 이상하지? 깡말라서 먹잘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사실이야. 우리 꼬꼬 가슴은 부드럽고 쫄깃하고, 젖꼭지 모양도 예쁘고….”
“닥쳐! 그딴 헛소리는 꿈에서나 해!”
신해범은 몸부림치는 류진을 힘껏 끌어안았다. 숨통이 막혀 끅끅거리는 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꿈은 현실이 돼. 내가 널 볼 때마다 어떤 꿈을 꾸는지 알아?”
“그딴 거 몰라도 돼. 그만… 그만 좀 하라고. 옷 입는 거 가르쳐 준다며…!”
이제 류진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신해범의 한 손이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가 체모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류진이 허리를 굽히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마. 만지지 마!”
“아침에도 발기 안 돼?”
“하, 할 거면 그냥 박고 싸. 사람 가지고 놀지 말고, 이 개 변태 놈아….”
“아까 말했잖아. 네가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걸 가르쳐 주겠다고.”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체모를 헤치고 들어왔다. 힘없이 늘어진 성기를 잡고 흔들어 댔다. 류진은 이리저리 허리를 비틀며 신해범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성기를 쥔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신해범은 손끝으로 귀두를 둥글리듯 문질렀다. 넓은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기둥을 주무르고, 손목 스냅과 반동으로 흔들었다. 신해범의 집요한 손을 떼어 내려고 애쓰느라 류진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신해범의 관자놀이에도 땀이 맺혔다.
“한심하긴.”
신해범은 한탄했다. 너무나도 한심했다. 평범한 스물한 살 남자라면 서너 번은 싸지르고도 남았을 시간에, 류진은 목 졸려 죽어 가는 새끼 짐승처럼 낑낑거리며 몸부림만 치고 있었다.
신해범은 손에 힘을 풀었다. 흐느끼는 류진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러고는 자기 의자를 가리켰다.
“저기 앉아.”
등받이가 높고 팔걸이가 넓은,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검은색 가죽 의자. 눈물범벅이 된 류진이 신해범을 올려다봤다.
“싫어.”
“왜? 앉아 봐. 좋은 걸 누려 봐야 욕심이 생기지.”
“난 저런 거 필요 없어. 갈래….”
신해범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류진의 등허리를 걷어찼다.
“아악!”
“까불지 말고 가서 앉아!”
알몸으로 바닥을 나뒹군 류진이 신음했다. 신해범은 차갑게 조소했다.
“열 센다. 하나, 둘….”
희고 마른 나신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넘어지면서 어딜 잘못 부딪힌 모양인지 다리를 절뚝거리다 주저앉았다.
“셋, 넷. 다섯….”
소파에서 책상까지, 멀지는 않지만 아주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거리를 류진은 기어갔다. 팔꿈치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릎으로 어떻게든 나아갔다.
“여섯, 일곱.”
신해범은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류진이 자신의 업무용 의자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전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류진을 비췄다. 어떻게 된 몸뚱이가 볼 때마다 마르는 느낌이었다. 깡마른 팔다리에 툭툭 불거진 관절이 보기 싫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자꾸만 눈이 갔다.
눈부신 햇살이 팽팽하게 뻗은 쇄골을 타고 흘렀다. 흰 피부에 곤두선 솜털까지 보였다. 류진의 어깨에 맺힌 땀방울이 신해범의 목을 타게 했다.
“여덟. 아홉….”
의자에 앉은 류진이 다리를 가슴께로 끌어 올려 안았다. 무릎이 턱에 닿은 순간, 신해범이 마지막 카운트를 셌다.
“열.”
“해, 했어! 앉았어!”
신해범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뭐?”
“잘했다고, 정류진.”
칭찬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류진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류진에게 다가간 신해범이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자그만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네가 좋은 걸 경험했으면 해. 되도록 많이.”
“…….”
“사람이 말하는데 쳐다는 보자.”
류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해범은 웃고 있었다. 시원하게 끌어 올린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지금 너한테 결여된 건 욕심이거든.”
“난 욕심쟁이 되기 싫어.”
“아니, 넌 욕심내야 해. 그게 세상이 너한테 빼앗은 거거든.”
가난은 물욕을 거세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넓은 집, 맛있는 음식, 따뜻한 옷과 신발, 값지고 화려한 장신구를 욕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생부터 가난한 자는 욕망할 수 없었다. 모르니까. 알지도 못하는 걸 가지고 싶어 할 리 없으니까.
“난 너를 보고 있으면 비참해진다, 정류진.”
“뭐라고?”
“넌 안 쓰러지잖아. 돈이 없어도, 부모가 없어도, 강간당하고 얻어맞고 모욕당해도 넌 늘 버티잖아. 왜 안 무너져? 왜 세상을 원망 안 해?”
“…그게 나빠?”
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참고 견디는 게 잘못된 거야? 그리고 세상 원망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렇게 자존심 챙기면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뭐라고?”
“웃기지 마, 정류진. 참는다고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어. 넌 하나도 안 고고하고 그냥 불쌍해 보여. 좋은 거 없어도 괜찮다고 하지 마. 중요한 건 내실이 아니라 겉모습이야. 겉모습이 그럴싸해야 무시 안 당해.”
“당신이나 평생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난 아니야.”
신해범의 손이 류진의 턱을 움켜잡았다.
“착각하지 마, 정류진. 청렴은 권력자가 갖춰야 할 미덕이지 가난뱅이의 마음가짐이 아냐.”
류진의 두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신해범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차갑게 빛나는 수갑 두 개를 꺼내 흔들자, 조그만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양손과 양 발목에 각각 수갑이 채워졌다. 오른손은 오른 발목, 왼손은 왼쪽 발목과 연결됐다. 신해범은 무릎으로 의자를 눌러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한 채, 류진의 무릎을 두 손으로 잡아 벌렸다.
“기대된다.”
그는 바들바들 경련하는 류진의 두 발을 푹신한 쿠션이 덧대어진 팔걸이 위에 각각 올려놓았다.
“우우….”
류진은 열쇠고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구속한 수갑 열쇠 두 개가 꿰어진 둥근 고리를 물고 겁에 질린 눈으로 신해범을 올려다봤다.
신해범의 손가락이 류진의 뺨을 쿡쿡 찔렀다.
“지금부터 팔걸이에서 발 떼지 마. 입에서 열쇠 떨어뜨리지도 마. 이거 두 개만 지켜도 금방 끝내 줄 거야. 그런데 우리 꼬꼬가 날 귀찮게 하거나 성질 돋우면, 이 방에서 기어서 나가게 될 줄 알아. 기어 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 거라 믿어.”
신해범은 두 손으로 류진의 얼굴을 감쌌다. 이마, 관자놀이, 콧등, 뺨 순서대로 입술을 맞췄다. 열쇠고리를 문 채 떨고 있는 입술에도 낙인을 찍었다. 류진의 코앞에서 신해범이 웃었다.
“알아들었지?”
작은 얼굴이 위아래로 끄덕였다. 신해범은 류진의 눈에 들어찬 절망과 체념을 보았다.
신해범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류진의 다리 사이를 빤히 들여다보다, 마른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치부를 훤히 드러낸 채 떠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음….”
신해범은 류진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깡마른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흥분인지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신해범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류진의 체모를 입술로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으으…!”
까치발을 세운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열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필사적인 모습에 신해범은 만족했다.
“자세 불편하지? 알아.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 우리 꼬꼬가 얌전히 있으면 돼.”
실팍한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근육이 다 빠져 말라 버린 몸에 유두만 꼿꼿하게 서 있었다. 고자 좆이 된 대신 가슴이 배로 예민한 걸까, 아니면 그간의 경험으로 몸이 학습한 걸까? 신해범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예쁘다. 우리 꼬꼬는 좆도 예쁘게 생겼어.”
그는 류진의 성기에 얼굴을 비볐다. 혀를 내밀어 살짝살짝 핥기도 했다.
“으우우….”
이미 류진의 몸은 땀범벅이었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또 은밀한 곳을 낱낱이 관찰당하는 치욕 때문에. 류진의 다리 사이에서 신해범이 고개를 들었다.
“너 정말 예쁘다.”
“흐으….”
“늙은이가 죽자고 빨아 댄 이유가 있었어.”
신해범은 두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직 어린 수컷 냄새였다. 덜 여문 풋풋한 냄새. 신해범은 새삼스레 류진의 성기를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먹음직스러웠다. 혀 밑에 침이 고였다.
“솔직히 말하면….”
제구실을 못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었다. 모양도, 색도, 크기까지도. 과연 신께서는 공평했다. 이 얼굴에, 이 몸에, 좆까지 훌륭한 걸 달아 주고서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신해범은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훌륭한 물건이 고작해야 뒷구멍 조이는 손잡이 용도라는 사실이. 그는 류진이 여자와 관계하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바지 한번 벗어 보라며 놀리는 여자들 사이에서 새빨개진 얼굴로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입술로 귀두를 물었다. 류진이 허리를 비틀며 의미 없는 저항을 했다. 신해범은 정수리에 눈이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정류진의 성기를 빨면서, 그가 흐느끼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먹색 눈동자에 탐욕이 들어찼다. 그는 입을 벌리고 류진의 성기를 삼켰다. 단숨에, 끝까지. 턱에 불알이 부딪쳤다. 목구멍을 자극하는 귀두가 느껴졌다. 신해범은 스스로의 행동력에 감탄했다. 꼬꼬야, 나도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지 몰랐어.
류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고리를 문 입술이 덜덜덜 떨렸다.
“으으으…!”
믿기지 않았다. 신해범에게 성기를 빨리고 있었다. 충격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진 가운데, 열쇠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여기서 기어 나가게 된다는 건 나중 문제였다. 열쇠를 떨어뜨리면, 팔걸이에서 발이 떨어지면, 그때야말로 진짜 고자가 될지도 몰랐다. 신해범이라면 자신의 성기를 물어뜯고도 남았다.
류진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수갑 열쇠가 짤랑짤랑 부딪혔다.
“흐윽, 으, 흐으으… 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신해범은 류진이 울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이지만 자신 있었다. 펠라치오를 받아 본 경험이라면 많았다. 사랑도 받아 본 놈이 베풀 줄 안다고, 펠라도 많이 받아 본 놈이 잘할 수 있었다.
신해범은 경련하는 류진의 허벅지를 틀어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건 특별 수업이었다. 남자 좆을 빨기는커녕 입에 담기만 해도 구역질을 해 대는 학생에게 필요한 개인 지도. 실전 훈련.
신해범은 류진의 성기를 문 채 킥킥 웃었다. 왜 사람 입은 두 개가 아닐까? 입 하나로는 빨아 주고 다른 하나로는 음담패설을 속삭여서 두 배로 수치스럽게 만들고 싶은데. 그는 뼈의 윤곽이 느껴질 정도로 마른 허벅지를 쥐어뜯듯 주물렀다.
정류진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게 부족했다. 입은 두 개, 팔이 네 개, 눈은 한 여섯 개 달렸으면 좋겠다. 그런 괴물이 되어도 좋았다. 턱까지 길게 자란 송곳니로 목을 물어뜯어서, 상처에서 분수처럼 솟는 피를 남김없이 빨아 먹었으면.
그러면 정말로….
좋을 텐데.
신해범의 입 안에서 류진의 성기가 점차 반응을 보였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살덩이가 뜨거워지고, 단단해지는 감각이 혓바닥의 예민한 미뢰를 통해서 느껴졌다. 신해범은 수갑에 묶인 정류진의 손이 주먹을 그러쥔 채 덜덜덜 떨리는 모습을 곁눈질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수치스러울지, 얼마나 모욕적일지 알고도 남았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불감증은 정류진의 마지막 보루였다. 신체를 유린당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게 무너지는 순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바로 내가!
신해범은 펠라치오를 하면서 그 행위를 받는 감각을 느꼈다.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척추가 지끈거리는 느낌. 허리 아래가 뭉근해지고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는 느낌. 엑스터시가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느낌. 모세 혈관까지 전류가 타고 흐르는 것 같은… 아드레날린으로 가득 찬 욕조에 뇌를 푹 담갔다가 꺼낸 것 같은, 그런….
신해범은 눈을 감았다. 네가 나와 같았으면 좋겠다.
류진은 끝내 사정하지 못했다.
신해범이 타액으로 젖은 턱을 훔치며 일어나 섰다. 흐느끼는 류진의 다리 사이를 빤히 노려보았다.
입 안에서 해방된 성기는 귀두 껍질이 닳아서 벗겨졌고, 기둥에는 잇자국이 선명했다. 피가 잔뜩 몰려서 시뻘겋게 부었다. 신해범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걸 확 뜯어서 잘근잘근 씹어 먹을까.
“꼬꼬야.”
신해범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울고 있는 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았다고 말해 봐.”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안 좋았어? 진짜? 하나도?”
“흐윽. 으윽.”
“나 열심히 했는데.”
“흑, 끄나흐면, 이그 흐어….”
신해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 성의를 너무 무시하네.”
“이그 흐어…!”
신해범은 울고 싶어졌다.
“꼬꼬야. 널 어떡하면 좋냐. 응?”
신해범은 기대했다. 오늘에야말로 류진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약에 취해서가 아니라, 맨정신에 제대로 흥분해서 뽀얀 정액을 찰찰 싸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는 벌써 다음 단계까지 생각해 놓았다. 입에 머금었던 정액을 뱉어서 엉덩이 구멍에 덕지덕지 바르고, 네가 많이 쌀수록 덜 아프다며 쌀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을 참이었다.
“미치겠네.”
말짱 꽝이었다. 꽝.
입 안에서 발기를 하기에 기대했건만, 이 멍청한 꼬꼬는 씁쓸한 맛이 나는 쿠퍼액과 정액 몇 방울을 간신히 짜냈을 뿐이었다.
“꼬꼬야… 류진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입에 물린 열쇠를 빼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욕지거리가 날아왔다.
“씨발놈! 개새끼! 나쁜 새끼! 나한테 왜 그래.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해!”
“빨아 주고도 욕을 먹네.”
“해 달라고 한 적 없어! 누가 이딴 거 좋아할 줄 알고…!”
류진은 신해범을 향해 악을 쓰며 울었다. 슬프고 서러웠다. 뻘겋게 부은 성기가 따갑고 쓰라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류진은 도저히 신해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우지 못한다는 거 뻔히 알면서. 평소에 하던 대로 뒷구멍 찢고, 처박고, 흔들고 싸면 될 걸 왜 자꾸 사람을 못살게 하냐고. 왜!
“씨발 놈… 나쁜 새끼. 씨발… 내가 뭘 잘못했다고….”
팔짱을 끼고 선 신해범이 말했다.
“왜 안 싸.”
“뭐?”
“너 고자 아냐. 발기했어. 내가 분명히 느꼈어. 근데 왜 못 싸냐고.”
“미친놈이 개소리야! 나 안 그랬어!”
“내가 느꼈다니까?”
“그건…!”
울면서 항변하던 류진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전에 없던 감각이긴 했다. 하지만 장담컨대, 흥분해서가 아니었다. 무서워서였다. 신해범이 성기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반응한 거였다. 그걸 성적 흥분으로 착각하다니 참으로 신해범다웠다.
류진은 연신 히끅, 히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날 좀 내버려 둬. 제발 나한테 손대지 마! 당신이 안 그래도 충분히 아파. 힘들단 말이야!”
“아주 발악을 하는구만.”
“그럼 내가…!”
울음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신해범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나 원 참.”
신해범이 혀를 찼다.
“꼬꼬야, 넌 지금 네가 얼마나 굉장한 걸 받았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필요 없어, 이거 풀어!”
류진이 몸을 마구 흔들었다. 신해범의 눈앞에 알몸으로 있는 상황이 끔찍했다. 이제 기동복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이제 됐잖아! 풀어 줘. 풀어 달라고!”
“기어 나갈 준비는 됐냐?”
신해범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시원하게 싸면 한번 봐주려고 했는데. 우리 꼬꼬 고자 탈출 기념으로 말이야. 그런데 날 이렇게 실망시키고, 또 욕지거리에, 반항에… 너 이거 어떻게 수습할래?”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류진은 입을 벌린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손목이 묶여서 그럴 수도 없었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신해범의 시선을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꼬꼬야.”
“…….”
“야. 정꼬꼬. 사람이 부르면 듣는 척이라도 해.”
“그따위로 부르지 마.”
“솔직하게 말해 봐. 너 기분 좋았지?”
가까이 다가온 신해범이 울고 있는 류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조금 더 빨아 줬으면 쌌을 거 같지? 그치?”
그렇다고 말하면 풀어 줄 것 같았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말해.”
“…….”
“말해 줘. 좋았다고.”
신해범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얼른.”
“지금 그걸 마, 말이라고….”
“응. 말이라고.”
“…….”
“기분 좋았지?”
“지랄! 좋았겠냐!”
신해범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즐겁거나 행복해서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입술이 엉망으로 비틀리는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신해범이 의자를 걷어찼다. 커다란 가죽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류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아…!”
류진은 모로 웅크렸다. 신해범의 시야에서 최대한 작아지려고 노력했다. 소름이 전신을 내달렸다. 머릿속에는 사이렌이 울렸다. 다 끝났다. 난 이제 죽었어.
신해범은 애꿎은 의자를 또 한 번 걷어찼다. 전면 유리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류진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죽자. 혀 깨물고 죽어 버리자, 죽을 수 있다면.
머리 위로 신해범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지조 있다, 정류진.”
“…….”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해.”
군홧발이 어깨를 짓눌렀다. 류진은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으나, 끝내 신해범의 눈앞에 다리를 벌리고 눕게 되었다.
벨트 버클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로 육식 동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해범이 말했다.
“좋아한다고.”
류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으면서, 괜히 시간 끈 거다. 사람 가지고 노는 게 취미인 인간이니까.
커다란 손바닥이 엉덩이를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하반신이 완전히 공중에 떴다. 허리가 꺾이는 통증에 류진이 신음했다.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더 견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면 금방 끝나.
꼭 감은 눈꺼풀 밖으로 눈물이 흘러넘쳤다.
볼깃살을 움켜쥐고 벌리는 손길이 생생했다. 신해범의 엄지가 꼭 닫혀 있는 입구를 쓸었다. 이윽고 두툼한 귀두가 다가왔다. 입구에 문질러졌다. 쿠퍼액이 구멍을 적시는 감촉이 선연했다.
류진은 가만히 있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참으며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을 기다렸다.
신해범은 곧바로 삽입하지 않았다. 쿠퍼액 맺힌 귀두가 한동안 구멍 주위를 둥글리듯 문질렀다.
류진이 참았던 숨을 토해 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위를 맴돌던 움직임을 멈추고 젖은 입구를 단숨에 파고들었다.
“아아아… 악! 아악!”
힘으로 쑤셔 박았다. 단숨에, 한 번에.
류진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손목, 발목 피부가 수갑에 쓸렸지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류진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허억, 하윽. 아, 아파, 아파….”
“알아.”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아!”
“알았어. 이대로 있을게.”
친절한 목소리가 이토록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류진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갈기갈기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을 아랫도리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아파, 제발… 빼 줘. 아파….”
“응. 예쁘다.”
신해범이 무게를 실어 누르자 류진의 몸이 완전히 접혔다. 신해범의 동공에 비명을 내지르며 우는 류진의 얼굴이 담겼다.
“꼬꼬야.”
접합부를 보던 신해범이 말했다.
“너 안 찢어졌다.”
“흐윽, 흐으, 흐으으… 아파… 제발….”
신해범은 류진의 발목을 잡았다. 말라서 한 손아귀에 다 들어왔다. 사실 끝까지 넣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귀두를 걸쳐 놓기만 해도 생살이 터지던 예전과는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느껴져?”
신해범이 중얼거렸다. 그는 류진의 발목을 덜렁덜렁 흔들며 웃었다.
“꼬꼬야, 내가 느껴지냐고.”
눈물로 흐릿해진 류진의 시야에 거친 숨을 뱉으며 싱글거리는 신해범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맛 좋은 음식을 코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였다.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고였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마호가니 책상에 엎어진 류진의 뺨이 나뭇결에 쓸렸다.
“으아, 아, 아! 흡! 큭!”
신해범이 움직일 때마다 몸이 앞으로 밀렸다. 골반이 책상 가장자리에 부딪혀 아팠다.
류진은 간신히 고개를 모로 돌렸다. 가슴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 힘들고,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책상 앞에 버티고 선 다리가 덜덜덜 떨렸다. 발에 쥐가 난 것 같았다. 류진은 가슴팍을 쥐어뜯는 신해범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만. 잠깐만. 아, 아… 잠깐만…!”
“뭐.”
“나 다리, 다리가. 아, 으, 아으! 아!”
“네 다리가 뭐?”
신해범은 엄살 부리지 말라며 웃었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팽창한 구멍에 어린아이 팔뚝만 한 성기가 드나들었다. 무자비한 삽입, 자비 없는 출입. 류진의 마른 손이 책상을 긁었다.
“그만, 제발, 그만… 잠깐만….”
“똑바로 안 서?”
“하으… 으으….”
“이젠 말도 못 해?”
신해범이 키득거렸다. 그는 류진의 오금을 붙잡아 한쪽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성기를 물고 있던 접합부가 옆으로 벌어지면서 삽입이 한층 깊어졌다. 류진이 고개를 젖혔다.
“하악! 아!”
“좋다고 말해.”
신해범이 시선을 내린 곳에 눈물과 땀, 타액으로 젖은 류진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류진의 턱을 손바닥으로 받쳐서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했다.
마른 몸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그는 퉁퉁 붓다 못해 짓물러 버린 류진의 눈두덩을 보았다. 꼭 감은 눈꺼풀 사이에서 흘러나온 눈물을 핥고 싶었다.
“그만….”
“좋다고 말하라니까.”
흐느낌이 높아졌다. 신해범은 류진의 얼굴을 놔주었다. 마른 상체가 풀썩, 책상 위로 엎어졌다. 신해범은 책상 올려놓은 류진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꾸만 가장자리에 부딪치는 골반을 감쌌다.
“기분 좋아.”
철퍽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젖은 피부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넓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신해범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삼키며 눈앞에 엎어진 류진을 내려다보았다. 쭉 뻗은 목덜미, 말라서 각진 어깨, 도드라진 견갑골과 가는 허리선 밑으로 잔뜩 긴장해서 수축한 엉덩이가 보였다. 그 사이의 조그만 구멍이 한껏 벌어진 채 성기를 먹고 있었다. 싫다면서 남자 좆을 잘도 먹어 치우는, 발칙한 아래 입.
신해범은 류진의 깡마른 몸에서 유일하게 주무를 맛이 나는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이거 맛있어.”
식은땀으로 젖은 류진의 등에 신해범의 뜨겁고 탄탄한 가슴이 달라붙었다.
“너 아주 맛있다고.”
류진은 입을 벌린 채 헐떡였다. 내장이 턱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조금만 더 박히면 신해범의 책상에 피와 장기들을 토하고 죽을 것 같았다.
“아, 아….”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상을 긁었다. 이제는 주먹을 쥘 힘도 없었다.
“왜? 뭐 필요해?”
신해범의 목소리가 짐짓 걱정스러웠다.
“다 줄게. 우리 꼬꼬를 위해서라면.”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까만색 무선 키보드를 류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망가뜨려도 돼.”
꺽꺽거리는 울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차피 네 월급에서 깔 거니까.”
류진은 무선 키보드를 껴안았다. 뭐라도 좋으니 매달릴 것이 필요했다. 신해범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만… 제발.”
류진이 신음했다.
“아파. 너, 너무 아파….”
신해범은 멈추지 않았다. 핏줄이 돋은 성기가 거칠게 출입하는 구멍 입구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쿡쿡 웃을 뿐이었다.
“아프기는.”
속삭임이 은근했다. 그는 자기 손가락을 류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피 안 났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류진이 눈을 깜박였다. 뿌연 시야에 신해범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움직였다.
“너 피 안 난다고, 지금.”
“아….”
“네 구멍 착실히 발전하는 중이야. 이렇게… 계속,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박히면서 질질 싸게 될걸?”
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맞아. 내가 너 그렇게 만들 거야.”
류진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니야, 아냐… 나 아냐. 아니라고.”
신해범의 손바닥이 류진의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맞아. 지금 이게 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럼 아픈 게 좋아?”
류진은 흐느끼며 도리질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무서웠다.
“그래. 느끼는 게 좋은 거야.”
신해범은 류진의 눈을 가린 채 거칠게 움직였다.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사무실 천장과 전면 유리창을 마구 때렸다.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이 류진의 하얀 등을 비췄다. 생채기와 멍 자국만 아니라면 매끈하게 잘 닦인 석고상 같았다.
신해범의 목에서 끓는 소리가 났다. 낮은 그르렁거림과 함께, 그는 류진의 안에 사정했다.
세탁기가 멈췄다. 권세혁은 류진이 두고 간 세탁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빨랫감을 꺼내는데 어릴 적 외조부가 해 준 이야기가 기억났다. 주인이 외출한 사이에 집 안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밥상까지 차려 놓는다는 우렁 각시 설화. 어린 시절 권세혁은 집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우렁 각시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권세혁은 우렁 각시가 없으면 자기 빨래도 못 하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세탁기 다음 순서는 건조기였다.
그는 손놀림을 빨리했다. 류진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옷 빨래는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시켰으면 시켰지, 류진의 손에 자기 팬티를 쥐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건조기에 세탁물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버튼마다 기능이 적혀 있어서 작동시키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권세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건조기를 들여다보았다.
세탁실 문이 열렸다. 생활복 차림의 풍기대원 두 사람이 각각 옆구리에 세탁 바구니를 끼고 들어왔다.
“아.”
“엇.”
“총통 각하와 조국을 위해! 왕자님을 뵙습니다!”
키 작은 쪽의 눈치가 좀 더 빨랐다. 권세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보세요.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은 권세혁과 최대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의 빨랫감이 섞여서 허둥지둥하는 걸 보니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인가 보았다.
“이거 니 꺼다.”
“이 새끼는 만날 남의 꺼 훔쳐 입어. 야 이 새끼야, 빤스 살 돈 없냐?”
“뭐라는 거야, 지가 내 바구니에 처넣어 놓고. 이 새끼는 좆나 눈깔이 병신이야. 아, 이런 게 여기 어떻게 들어왔지?”
권세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 동네나, 저 동네나 그놈의 빤스 때문에 난리다.
실랑이를 끝낸 대원들은 세제를 한 주걱씩 퍼 넣었다.
“이번에 간사에서 견학 오는 거 알지? 괜히 여자애들 구경한다고 설치지 말고 근무지에 짱박혀 있어라. 오늘 공문 내려온 거 보니까 당분간 분위기 싸하겠더라.”
“알아. 아침에 팀장급 다 불려 갔잖아.”
“좆뺑이 치고 들어왔는데도 조용한 게 더 무섭지 않냐?”
“원 스타 명령인데 지가 뭐 어쩔 거야.”
다 들렸다. 물론 권세혁은 남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들어도 괜찮으니까 말하는 거겠지. 설마 나를 귀머거리 취급하는 건 아닐 테고.
힐끗거리는 시선을 느꼈음인지, 대원 하나가 권세혁에게 말을 붙였다.
“왕자님 덕분에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본 모양입니다. 간호 사관 학교에서 저희 풍기대에 견학을 오는 건 최초입니다.”
“그래요?”
권세혁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심 기분 좋았다. 자기로 인해 풍기대의 이미지가 좋아진다면 기쁜 일이었다.
그는 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빼고 물었다.
“견학 날짜가 언젭니까?”
키 큰 쪽이 대답했다.
“다음 주 금요일 예정입니다.”
권세혁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금(金) 자가 들어가는 날.
신해범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냉수와 온수가 적절히 섞이도록 손으로 휘휘 저었다. 내친김에 퍼런 공 같은 입욕제도 하나 던져 넣었다. 사무실로 들어온 선물인데 책상 밑에 천년만년 묻어 두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써서 다행이다.
그는 슬리퍼를 찍찍 끌며 나왔다.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류진의 얼굴에 손을 대고 물방울을 탁탁 튀겼다.
“으….”
“일어나. 목욕해.”
“됐어. 그냥 갈래… 권세혁 기다려.”
“열 셀 동안 들어간다. 실시.”
마른 어깨가 움찔했다. 류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저게 뭐야?”
욕실 문틈 사이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씻으라니까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아까는 아프다고 징징거리더니 뭐야, 또 하고 싶어? 우리 꼬꼬 은근히 밝힌다?”
“물에다 뭐 탔지.”
“어? 어떻게 알았어?”
류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탄올을 푼 뜨거운 물에 머리부터 처박힌 기억이 생생했다.
“내가 또 당할…!”
“냄새 좋지?”
“뭐?”
신해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입욕제 냄새 좋지 않으냐고.”
“…….”
“표정이 왜 그래? 좀 웃어 봐, 꼬꼬야.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반응이 뭐 이렇게 시큰둥해.”
류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해범의 뻔뻔함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사람을 강간해 놓고 뭐? 입욕제 냄새가 어째?
“내가 당신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무슨 천하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류진은 소파를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날 그냥 내버려 둬. 제발 날 내버려 두란 말이야!”
신해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양 손바닥을 펼쳤다. 쫙 펼친 손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류진은 소파를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제발, 제발 나 좀 건드리지 마….”
신해범이 미간을 긁적이며 웃었다.
“못살겠다, 진짜.”
그는 소파에서 엉엉 우는 류진을 끌어안아 일으켜 세웠다. 버둥거리는 류진을 옆구리에 끼고 욕실까지 걸었다.
“안 가…!”
“이것도 진짜 물건이야.”
신해범은 문을 잡고 버티는 류진을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닦는 사이, 류진은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통곡했다. 신해범은 기가 막혀 웃었다.
“누구 죽었냐?”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신해범이 류진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눈물로 흥건해진 뜨거운 뺨을 만지자 류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건들지 마!”
“어쭈.”
“싫다고 하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왜…!”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야 사람 취급을 하지.”
“그, 그, 그렇게 따지면 다, 다, 당신이야말로 개나 소 대접 받아야 해!”
“응.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어.”
마른 몸의 떨림이 심해졌다. 신해범은 사시나무처럼 떠는 류진을 안아 들었다. 샤워 커튼을 젖히자 드러난 욕조에는 퍼런 물이 가득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류진은 거의 발작을 하며 신해범에게 매달렸다.
“싫어! 싫어. 안 들어가. 안 돼, 안 돼, 싫어!”
신해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류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괜찮아. 무서운 거 아냐. 아픈 것도 아냐. 네가 나 못 믿는 거 알겠는데 진짜야. 진짜라니까? 야, 봐 봐. 냄새 좋잖아.”
“싫어. 싫다고! 하지 마, 하지 마아! 물 튀기지 마!”
“거참 웃기는 놈이네. 이게 뭐가 무서워?”
“뜨겁잖아!”
“안 뜨거워. 지금 내 손 담그고 있잖아.”
“이상한 거 탔잖아…!”
“그래. 입욕제 넣었지. 냄새 좋지 않냐? 색깔도 이뻐. 하늘 같은 파란색이야. 응? 봐라. 얼마나 좋나.”
신해범은 제 목에 코알라처럼 매달린 류진의 몸에 물을 묻혔다.
“…….”
따뜻한 물이었다. 좋은 냄새도 났다. 류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봐. 괜찮지?”
“…….”
“지옥 열탕이라도 되는 줄 알았냐?”
“난, 당신이 또… 괴롭히는 줄 알고.”
신해범이 웃었다. 입 닥치고 미소만 지으니 잘생겨 보였다. 류진은 황급히 신해범에게서 떨어져 욕조로 들어갔다. 따스하고 향기로운 물이 어깨, 목, 턱까지 차올랐다.
신해범은 바깥에 주저앉아 욕조에 팔꿈치를 얹고 있었다.
“어때?”
“조금… 좋은 것 같아.”
“좋은 거면 좋은 거지, 좋은 것 같아는 뭐야.”
“하도 많이 속아서.”
“하긴, 우리 꼬꼬 인생이 박복하긴 했지.”
류진이 중얼거렸다.
“당신 때문이잖아.”
“암요. 그렇습죠. 이게 다 이놈 때문입죠. 제가 죽일 놈이지요.”
신해범이 물을 튀기며 웃었다. 류진은 욕조 가장자리에 몸을 붙이고, 최대한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안 나가?”
“응. 여기가 좋아. 우리 꼬꼬랑 여기 있을래.”
“…….”
“표정이 왜 그러냐?”
“일 안 해?”
“일? 음… 일. 그래. 해야지. 일을 해야 월급도 받고 우리 꼬꼬가 먹을 햄버거도 사고, 피자도 사고, 샌드위치랑 주스도 사고, 케이크랑 과자도 사지. 그래. 내가 뼈 빠지게 일하다가 뒈져야지.”
류진은 고개를 돌렸다. 신해범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목구멍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왜 그렇게 말을 해?”
“왜, 듣기 거북해?”
“노인네 같잖아.”
“앞날이 창창한 우리 꼬꼬에 비하면, 나는 죽을 날 받아 놓은 노인네나 다름없지요.”
“그러니까,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류진은 입을 다물었다. 다음 순간 자신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 튀어 나갔다.
“당신은 나한테 안 미안해?”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와 무거운 침묵. 류진은 신해범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물에 젖어 축축한 손바닥이 뺨을 어루만졌다.
“왜 그런 걸 물어봐, 꼬꼬야?”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 봐.”
“그러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신해범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걸.”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류진의 뺨을 잡아 늘였다. 하지만 볼살이 없어서, 찹쌀떡처럼 늘어나기는커녕 빨간 손자국만 남았다. 류진이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장난치지 마. 난 지금 진지하게….”
“남을 해치는 일이 직업인 사람은 유머 감각을 키워야 해. 안 그러면 돌아 버리거든.”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동안 한 번도… 없어? 나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신해범은 침묵했다. 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단 한 번도?”
“그래.”
신해범은 뉘우치지 않았다. 그러니 용서도,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건 나한테 필요 없는 감정이야.”
한평생 복수를 위해서 살았다. 부모를 죽인 원수의 밑에서 뒹굴며 그들의 비밀을 파헤치고 약점을 찾아냈다. 권력의 개가 되어 원수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 입혔다. 과거의 자신조차 짓밟고 뭉개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만들지 말자고. 지켜야 할 게 있는 사람은 약해지니까.
신해범은 류진의 붉어진 뺨을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그런 질문 하지 마. 난 우리 꼬꼬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으면 좋겠어. 네 눈앞에서 사흘 굶은 어린애가 배고파요, 빵 한 조각만 사 주세요, 애원해도 내가 알 게 뭐야,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할 수 있는 인간 말이야. 지금 시대에는 그런 게 필요해. 정의로운 선인보다 놀라운 악인이 성공하는 세상이라.”
커다란 손바닥이 수면을 내려쳤다.
“바로 나처럼.”
물보라가 튀어 류진의 얼굴을 적셨다. 신해범은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연신 재밌지? 재밌지? 하고 물었다.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신해준.”
신해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 알아. 당신 원래 이름이지?”
굳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해범은 재빨리 가면을 뒤집어썼다.
“맞아.”
그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쥐었다. 기도하는 자세였다. 감격한 목소리.
“기쁘다. 우리 꼬꼬가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다니.”
“관심이 아니라….”
“이거 참, 황제 폐하의 승은을 입은 궁인이 된 느낌이군. 나 기대해도 되는 건가? 나 같은 놈도 우리 꼬꼬처럼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애랑 연애할 수 있는 거야?”
류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신해범의 18번이었다. 능청으로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는 법.
“웃기지 마. 난 당신 생각보다 당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 당신만 나에 대해서 아는 거 아니야.”
“어이구, 그러십니까. 이거 못 알아봐서 황송합니다.”
“자꾸 그렇게 장난칠 거야?”
류진은 은근슬쩍 가슴으로 다가오는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아유, 알았어. 내가 닭이라고 해서 화났어? 근데 정말 잘 어울리는걸. 우리 꼬꼬는 꼬꼬가 딱이야. 그 이상으로 좋은 별명은 생각 안 나. 내가 이래 봬도 작명 센스가 있는 편인데….”
“말 돌리지 마. 왜 개명했어? 당신도 입양됐어?”
“…….”
“아니면 기자들이 막 따라다녔어? 학교에서 안 받아 줬어? 동네에 소문 다 나고, 얼굴 팔려서 길 걷고 있으면 뒤에서 욕하고 그랬어?”
“그만하자. 재미없다.”
“나는 그랬어.”
“…….”
“그래도 현우 형은 이름 안 바꿨어. 바꾸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만, 신청했어도 어차피 안 됐을 거야. 호적이 그대로라서.”
“…….”
“진치우도 본명이잖아. 그런데 왜 당신은….”
신해범이 몸을 일으켰다. 류진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뭐 해?”
그는 제복 셔츠와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를 벗었다. 벨트를 풀고 바지까지 벗어 던졌다. 참방참방 물을 튀기며 욕조 안으로 들어오는 신해범에, 류진은 기겁하고 물러났다.
“뭐, 뭐…!”
신해범이 웃었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류진은 황급히 몸을 돌려 욕조를 벗어나려 했으나 팔을 붙잡혀 도로 앉혀졌다.
“아!”
물보라가 튀었다.
“어딜 가.”
등 뒤에서 류진을 끌어안은 신해범이 속삭였다.
“틈만 보이면 도망가지.”
“두, 둘이 있기엔 좁아.”
“내 대답 들어.”
강한 팔이 앞으로 뻗어 왔다. 뜨거운 손바닥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유륜과 젖꼭지를 만지는 손길이 은근했다. 류진은 허리를 비틀며 신해범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옭아매는 힘이 강해졌다. 욕조 밖으로 흘러넘치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류진의 등에 신해범의 가슴팍이 밀착됐다.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헐떡거렸다. 하아, 하아, 가쁜 숨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만지지 마…!”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우고 돌리는 손길에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목덜미를 핥아 올리는 혀는 또 어떻고. 류진은 하반신을 최대한 앞으로 당긴 채, 가능한 신해범의 아랫도리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도 입양아야. 고모님이 거둬 주셨지.”
“…….”
“신해범은 고모가 지어 온 이름이야. 그런데 정작 고모도, 예나도 집에서는 나를 원래 이름으로 불렀어. 기껏 개명시켜 놓고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어. 난 신해준, 그 순진한 새끼를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어.”
지독한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난 ATM 기계가 싫어. 특히 길거리에 설치된 낡은 ATM 기계는 싹 다 부수고 철거해 버리고 싶어. 왜 그런지 알아?”
“…….”
“아버지의 차명 계좌가 깡통이라는 사실을 알았거든. 그 차가운 쇳덩이 앞에서. 아무리 발로 차고 두들겨도 소용이 없었어. 빌어먹을 멍청한 기계가 잔액이 없다는 개소리만 해 댔어. 믿어져? 서경제약은 내 조부님께서 일궈 낸 사업이야. 그걸 아버지가 물려받아서 키웠고. 동네 약국에서 번듯한 사업체로 성장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고. 그런데 모든 게 날아가는 데에는 보름도 채 안 걸리더군.”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류진은 흠칫했다. 신해범이 백지장 같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사자는 호랑이 새끼를 보호해 주지 않아. 약육강식의 세계에 의리 같은 건 없었다. 몰락한 사자는 호랑이 새끼를 무리에서 떨어뜨려 하이에나 떼의 먹이로 만들었어. 그래야 자기네가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눈이 아플 만큼 새파란 수면에 신해범의 얼굴이 비쳤다. 얼음 같은 눈과 강철 같은 손을 가진 남자였다. 온몸으로 세상을 들이받아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류진은 신해범을 증오했다. 그러나 신해범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줄 자신이 없었다.
보송해진 세탁물을 바구니에 옮겨 담는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권세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류진이 형.”
“아직 있었네.”
“방금 끝났어. 이거 갖다 놓고 마중 가려고 했는데.”
“마중은 무슨. 같은 건물 안에서….”
권세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 류진을 유심히 바라봤다.
“왜?”
“그 옷은 뭐야? 한여름에 웬 긴 팔?”
류진은 검은색 니트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품이 커서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헐렁했다. 소매는 손가락까지 덮었다. 가슴께에 황룡 심벌이 새겨진 걸 보아하니 사복은 아니었다.
권세혁은 지급받은 제복 중 동절기용 카디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는 류진에게 카디건을 빌려준 적이 없었다.
“내 옷장에서 꺼내 입었어?”
“네 옷 아냐.”
“그럼?”
류진은 카디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신해범.”
“응?”
“…대장님.”
권세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류진은 황급히 변명했다.
“나 감기 기운 좀 있는 거 같아서. 에어컨 때문에.”
“냉방병?”
“응, 그거.”
“아아.”
권세혁이 납득했다고 생각해서 안심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뭐…!”
“거짓말 아니네. 이거 해범이 형 향수 냄새다.”
“…….”
“샤넬이지? 뭐 클래식은 영원하지. 근데 좀 올드하지 않아? 희소성도 별로 없고. 솔직히 백화점 가면 흔하잖아.”
권세혁의 손에서 풀려난 류진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 거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요즘 트렌드는 니치 향수거든. 펜할리곤스나 바이레도, 조말론이나 딥디크 같은 거.”
“안 물어봤어.”
“형한테는 샤넬 안 어울려.”
류진은 권세혁을 노려보았다.
“나도 알아. 그래도 그렇지, 사람 면전에 대고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왜 갑자기 화를 내? 내가 뭘 어쨌다고.”
“나한테 그 샤넬인지 뭔지 안 어울린다며.”
“아니 형,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형한테는 좀 더 프레쉬하고 산뜻한 향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됐어. 넌 명품에 잘 어울리는 인간이라서 좋겠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류진의 손목을 권세혁이 낚아챘다. 하필이면 수갑에 쓸린 부위였다. 류진은 하마터면 아악, 비명을 지를 뻔했다.
류진을 끌어안은 권세혁이 말했다.
“왜 화났는지 말을 해.”
“잘난 척은 그런 말 알아듣는 사람한테 가서 해. 난 어차피 들어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샤넬인지 펜트하우슨지, 너나 실컷 사서 써라.”
“펜할리곤스.”
“씨발, 뭐든!”
류진은 권세혁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생각하니 억울했다. 지금 권세혁이 누리는 건 타인의 희생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그가 가진 것들은 어쩌면 류진의 몫일 수도 있었다. 좋은 옷, 비싼 차,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친절, 그리고 가족….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류진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할 수 있는 권세혁이 부러웠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과 신해범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착하고 순진할 수 있는 것도 힘이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어깨를 밀쳤다. 당연히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신체 조건은 모든 면에서 류진보다 우수했다. 명백한 사실에 부아가 치밀어, 류진은 권세혁의 발을 힘껏 밟았다.
“아악!”
권세혁의 비명이 세탁실에 울려 퍼졌다. 류진은 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는 제대로 뛰는 게 불가능했다.
“형!”
문 근처에도 가기 전에 붙잡혔다. 류진은 또다시 권세혁의 품에 끌어 안겼다. 어깨 너머에서 권세혁이 말했다.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 수 있는 것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힘이었다. 권력이었다. 지금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내가 너의 아래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권세혁의 모든 것이 가식처럼 느껴졌다. 다정한 목소리, 상냥한 손길, 따스한 시선…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 화낸 거 아니야. 그냥 좀 아쉬워서 그랬어. 옷은 내가 빌려줘도 되잖아.”
“옷이 무슨 상관인데?”
“형이 다른 사람 향수 냄새 풍기고 다니는 거 싫어.”
“뭐?”
“아무리 해범이 형이라도 싫어. 내 거랑 똑같은 향수 사 줄 테니까, 앞으론 그거 뿌리고 다녀.”
“됐어. 나 향수 필요 없어.”
류진은 딱 잘라 거절했다. 권세혁이 들이붓는 향수 냄새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냄새가 지독하다는 걸 본인만 몰랐다. 누가 말해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약 냄새를 감춰야 하니까.
“권세혁. 너 요즘 약….”
“아, 맞다.”
권세혁이 목소리를 낮췄다.
“덱시. 나 그거 해 보고 싶어.”
류진은 암페타민 계열 각성제의 이름을 떠올렸다. 덱스드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