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감을 차곡차곡 개는 류진의 옆에서 권세혁이 투덜거렸다.
“형은 참 걱정도 팔자다.”
“…….”
“무서워할 필요 없어. 들키면 내가 커버 친다니까. 여기서 내 말 거역할 사람이 없는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
“내가 언제.”
“그럼 왜 구해 준다는 얘기 안 해?”
“알아볼게. 알아봐 줄 테니까 지금은… 나한테 시간 좀 줘. 그게 어디 슈퍼마켓 같은 데서 살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류진이 대꾸하지 않자 권세혁은 류진이 공처럼 둥글게 말아 놓은 양말을 집어 들었다.
“내려놔라.”
“형, 내가 재밌는 거 보여 줄게.”
“내려놓으라고 했다. 사람 일하는데 자꾸 귀찮게 할래?”
“보면 후회 안 할 텐데?”
“내려놔. 네 목구멍에 그 양말 콱 처넣기 전에.”
협박을 두려워할 권세혁이 아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말 공을 두 개 더 가져갔다.
“야, 장난치지 말라고….”
류진은 짜증을 냈지만, 권세혁이 하는 곡예를 본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어때?”
허공에 양말 공 세 개를 던져서 떨어뜨리지 않고 번갈아 받는 재주였다. 권세혁은 여러 번 해 본 듯 능숙했다. 손이 커서 그런가 전혀 버거워 보이지 않았다. 류진은 어쩔 수 없이 감탄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
“독학.”
권세혁은 말하면서도 양말 공을 놓치지 않았다.
“체육 창고에 탁구공 많았거든. 심심할 때 가지고 놀다 보니까.”
“재주도 좋네.”
“최대 다섯 개까지 해 봤어.”
류진은 서랍을 열었다. 개어 놓은 옷가지를 종류별로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권세혁이 양말을 돌려주며 말했다.
“형 그거 알아? 다음 주에, 간호 사관 학교에서 여기 견학 온대.”
류진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권세혁이 웃었다.
“몰랐구나? 하긴 나도 방금 들었어.”
“이런 델 뭐 하러?”
“장마 지나면 하반기 공채 시즌이잖아. 사관생도들 대상으로 설명회랑 홍보랑 이것저것 하는 거지. 한번 둘러보고 지원서 넣으세요, 이런 거.”
“아….”
“금요일이래.”
“그, 그래서 뭐. 내가 그 사람들 아는 것도 아닌데.”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반으로 접은 수건을 동그랗게 말기 시작했다. <백사자> 시절에 익힌 요령이었다. 이렇게 말아서 모서리를 안으로 구겨 넣으면 선반에 대충 쌓아 놔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고 꺼내 쓰기도 쉽다.
권세혁이 류진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어깨를 주물러 주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졸업생들이면 우리한텐 누나겠지?”
“그렇겠지.”
“한 스물넷, 다섯?”
“아마도.”
권세혁은 류진의 심드렁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별로 관심 없어 보인다?”
“관심 없어.”
“왜?”
“왜는 무슨 왜야. 거기 누나들이 견학 오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권세혁은 류진의 어깨에 턱을 얹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다행이다. 나 살짝 걱정했었어.”
“무슨 걱정?”
“아까 세탁실에서 들었거든. 여기 대원들 벌써 설레발치는 모양이더라. 뭐랬지? 여자애들 본다고 설치지 말고 근무처에 박혀 있으라고 했나?”
류진이 피식 웃었다.
“한심하긴.”
“그치? 그런 놈들 한심하지?”
“넌 안 그러냐?”
“나? 나한텐 형뿐이잖아.”
권세혁이 쿡쿡 웃었다.
“난 형만 있으면 된다니까.”
“…….”
“형, 나 물.”
류진은 앉은 채 손을 뻗었다. 권세혁이 언제나 곁에 두는 철제 텀블러를 찾아서 건네주었다.
“땡큐.”
꿀꺽꿀꺽 물 마시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권세혁의 갈급증은 수시로 찾아왔다.
류진은 조심스레 권세혁의 얼굴을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까칠해진 게 티가 났다. 살도 쑥 내렸다.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편안한 군 생활을 영위하는 권세혁에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운동도 그만뒀으니 살이 더 쪘으면 쪘지….
역시 본인만 모르는 것이다.
“형, 그거 두고 침대로 와.”
“너 피곤하면 자. 난 이거 마저 해야 해.”
“안 해도 돼. 그냥 두고 이리 와.”
“넌 상관없겠지만 나는….”
“좀! 사람이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라!”
별안간 터진 고성에 류진이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누운 권세혁이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자꾸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권세혁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류진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이리 와.”
류진은 손에 든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권세혁의 돌변한 태도가 낯설었다. 그래도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급격한 기분 변화 또한 오버도스의 한 증상이었다. 호르몬 이상은 인간의 충동 제어 능력을 약화시킨다.
류진은 눈을 내리깐 채 침대로 갔다.
“알았어.”
“소리 지르게 하지 마. 머리 아파.”
“알았어. 자.”
“내 옆에 누워.”
시키는 대로 누웠다. 권세혁이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류진은 순순히 권세혁의 품에 안겼다.
“이제 됐냐?”
“응.”
권세혁이 웃었다.
“춥지? 나랑 따뜻하게 코 자자.”
한여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어컨을 최대로 켜 둔 방 안은 밖과 달리 서늘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권세혁의 팔다리가 떨리는 건. 추워서… 그래, 추워서.
류진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잘됐다. 한두 시간쯤 눈을 붙이면, 신해범에게 혹사당한 몸도 조금쯤 편해질 것이다.
***
얼마나 지났을까.
류진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멀리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왔다. 류진은 황급히 옆자리를 더듬었다. 차가웠다. 아무도 없었다.
“권세혁.”
대답이 없었다.
“권세혁?”
류진의 목소리가 넓은 방에 울려 퍼졌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류진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바닥이 얼음장처럼 찼다.
“권세혁, 세혁아.”
어둠에 적응한 눈이 주위를 살폈다. 블라인드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류진은 벽을 더듬어 창문까지 갔다. 블라인드를 젖히자 가로등 불빛이 쏟아졌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마구 때렸다. 잠을 깨운 빗소리의 원인이었다.
“어?”
류진의 발에 뭔가가 닿았다.
“너 여기서 뭐 해?”
“…….”
류진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허리가 지끈했지만 꾹 참았다. 권세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왜 그래?”
“형, 나 머리 아파.”
“뭐?”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어나 봐.”
“…….”
“세혁아, 고개 좀 들어 봐.”
“형,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든 권세혁의 흰자위가 붉었다. 새하얀 가로등 불빛에 비친 두 눈이 선지처럼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흰자의 혈관이 팽창해서 그렇다.
“세혁아….”
류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권세혁은 산 채로 냉동고에 갇힌 소, 돼지처럼 온몸을 떨었다.
“온몸이 아파. 두들겨 맞는 것 같아….”
“세혁아 우선, 우선 바닥에 있지 말고 침대에 누워. 내가 따뜻한 거 갖다줄게.”
권세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 가방 좀 갖다줘.”
“가방 어디? 어떤 거?”
“책상 위에… 나 지금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류진은 책상 위에 있던 보스턴백을 가져다줬다. 권세혁은 손을 떨면서 지퍼를 열었다. 류진은 그가 찾아 든 물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조그만 지퍼 백에 든 백색 가루. 헤로인이었다.
권세혁은 지퍼 백을 열지도 못했다. 손가락이 그야말로 덜덜덜 떨렸다. 류진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떨림은 멎지 않았다. 권세혁이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줘. 아파. 형 나 너무 아파….”
류진의 손에는 구겨진 지퍼 백이 들려 있었다.
“나 좀 도와줘. 응? 류진이 형. 나 아파.”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상식적으로 말려야 할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는.
그러나 상대는 권세혁이었다. 그에게 공급책이 되겠다고 제안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인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늦었다.
“형… 빨리… 나 지금 맞아 죽을 것 같아….”
권세혁은 처음부터 엑스터시 중독자였다. 대마도 했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약물에도 손을 댔을지 몰랐다. 코카인이나 LSD 같은 것.
“…….”
류진은 주먹을 쥐었다. 이제 와 양심의 가책 따위 느낄 필요도, 그럴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진은 지퍼 백을 움켜쥔 채 꼼짝하지 못했다.
왜?
왜?
왜?
고개를 든 류진의 시야에, 벽에 나란히 세워 둔 기타 두 개가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에 매끈한 나뭇결이 반짝였다.
‘오디션 볼 거 아니고, 길거리에서 버스킹 할 거 아니야. 그냥 쉬운 노래 몇 곡 정도만 끝까지 칠 수 있으면 돼.’
목이 메어 왔다. 그 말이 발목을 잡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벽에 나란히 기댄 쌍둥이 기타를 외면했다.
“세혁아.”
류진은 지퍼 백을 열었다. 손바닥에 백색 가루를 쏟았다. 미처 손을 내밀기도 전에 권세혁이 달려들었다.
“악!”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맥없이 쓰러진 류진의 위로 권세혁이 올라탔다. 백구십 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 깔린 류진은 숨이 막혀 헐떡였다. 가슴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자, 잠깐… 아! 세혁, 아…!”
권세혁은 류진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바닥에 들러붙은 가루를 게걸스럽게 핥아 먹었다.
“으….”
뜨겁고 축축한 혀가 손금을 따라 미끄러지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가루는 권세혁의 혀 위에서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그는 전부 핥아 먹은 뒤에도 류진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희고 가는, 곧게 뻗은 손가락이 권세혁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류진은 필사적으로 그를 뿌리치려 했다. 발버둥을 치고, 허리를 비틀고, 붙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소용없었다. 권세혁은 일주일쯤 굶은 짐승 같았다. 그는 류진의 손이 잘 익은 훈제 고기라도 되는 양 게걸스럽게 빨고 씹고 물어뜯었다.
“아파, 세혁아, 하지 마! 아파! 놔줘!”
손가락에서 뚜두둑 소리가 났다. 류진은 더럭 겁에 질렸다. 손가락이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덮쳐 왔다. 손이 망가지면 총을 쏠 수 없다. 기타도 치지 못한다.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애원했다.
“잘못했어, 하지 마, 제발, 제발 놔줘. 세혁아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제발, 아, 아악!”
손목을 잡고 빼려고 하자 피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류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권세혁의 앞니에 떨어진 피부 조각이 붙어 있었다. 찢긴 손등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붉은 피가 권세혁의 입술과 턱을 흠뻑 적셨다. 그것마저 헐떡이며 핥아 먹는 모습은 류진이 알던 권세혁이 아니었다.
“놔줘, 제발… 제발….”
눈물로 뿌예진 류진의 시야에, 권세혁의 붉은 눈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레드 라이트 너머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신해범은 포트메리온 접시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앞으로 살펴보고, 뒤로 돌려 보고, 옆으로 치우쳐서 불빛에 비춰 보는 모습이 어지간한 보석 감별사 저리 가라였다. 식후 담배를 꼬나문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진치우가 이죽거렸다.
“저것도 병이다, 병. 아주 그냥 돋보기 쓰고 확대해 보지 그러냐.”
신해범은 진치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되받아쳤다.
“주식은 좀 수익이 나?”
“말하지 마라. 혈압 오른다.”
“넌 그런 데 소질 없다니까 그러네. 차라리 프랜차이즈 매장이라도 하나 내서 장사를 해 봐. 혹시 모르잖아? 네게 숨겨진 장사의 재능을 발견하게 될지?”
담배를 피우던 기우희가 픽 웃었다.
“공무원의 부업은 원칙적으로 금지입니다.”
티스푼과 포크 상자를 열던 신해범이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고발할 건가?”
“글쎄요.”
“너무하는군. 피차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진치우가 옳다구나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투자하란 말이야. 지금 우리한텐 주식이나 부동산이 차라리 떳떳해. 너 그 고물상 때문에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냐? 내부 고발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냐? 보안 팀에서 택배 다 스캔하는데.”
“고물상이라니 말이 심하네. 사업자 등록은 예나 이름으로 되어 있어.”
“와, 명의 도용!”
기우희도 덧붙였다.
“그건 진짜 불법인데요.”
“내가 지금 협공당하는 상황인가?”
신해범은 책상 위에 늘어놓은 식기들을 바라보았다. 출장 전 마지막으로 들여온 녀석들이었다. 보증서와 정품 상자는 물론 최초 구매자의 영수증 내역까지 고스란히 딸린 A급 풀 세트였다. 이걸 모셔 오느라 이번 달 지출이 크긴 했지만, 신해범은 만족했다. 가계부에는 구멍이 뚫렸어도 마음만은 풍족했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식기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행복했다.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라고 하나 보았다. 이 어여쁜 녀석들과 함께라면 밤샘 근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기우희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쳐 놓았다. 서지운의 작품이었다. 마을의 주요 시설물과 함영재의 저택 위치를 알아보기 쉽게 표시해 놓은 비공식 동네 지도였다. 기우희는 서지운에 대해서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가 상당히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마음에 들었다. 머릿수 늘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신해범이 작전에 포함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쓸 만하군요.”
서지운의 수제 지도에는 현지인만이 알 수 있는 지름길이나 지금은 쓰임새를 다했으나 전략적 요충지로 응용 가능한 시설물도 체크되어 있었다. 만일의 경우까지 고려하여 이중, 삼중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철저함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다.
기우희가 머릿속으로 합격 도장을 찍어 주려는 찰나였다. 신해범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신해범은 한 손에 접시를 든 채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최 대위.”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신해범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지금 가지.”
진치우가 벌떡 일어났다. 기우희는 재빨리 지도를 말아 소파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귀한 접시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신해범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두 사람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류진에게 운이 하나 따랐다고 한다면, 그건 권세혁이 헤로인 중독이라는 사실이었다. 억제제는 몸에 힘을 빠지게 하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만약 권세혁이 복용한 게 스피드볼, 혹은 메스 계열 각성제였다면 상황은 보다 심각했을 터였다.
신해범은 최유신의 딱딱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네 생각을 좀 알고 싶다.”
신해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장판이었다. 피를 잔뜩 머금은 솜과 붕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했을 도구가 담긴 사각 밧드는 최유신의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최유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쟤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뭐?”
“정류진이. 쟤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저런 꼴까지 당해야 하는 거냐고.”
최유신은 류진이 누운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는 환자가 진통제를 먹고 방금 잠들었다면서 얼굴도 보지 못하게 했다. 신해범은 헛헛하게 웃었다. 의사에게 혼나는 보호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기우희와 진치우를 내보냈다. 두 사람은 잠자코 명령에 따랐다. 진치우조차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여전히 손발이 잘 맞지 않는 두 사람이 권세혁을 어떻게 수습할지 기대가 되었다.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의 군홧발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데도, 최유신은 여전히 신해범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째려보지. 눈알 빠지겠다.”
“지금 장난칠 때냐?”
“지금 내가 장난치는 거로 보이나?”
최유신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무거운 한숨.
“무슨 개한테 물어뜯긴 줄 알았다.”
“보고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야, 최 대위. 개인적인 감상은 일기장에다 쓰고 정류진 상태나 얘기해 봐.”
“손등이 찢어졌는데 다행히 큰 혈관은 피했어. 그래도 피부가 완전히 뜯겨 나갔고, 피도 많이 흘렸어. 엄청 아팠을 거다.”
신해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언제쯤 낫는데?”
“뭐?”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건 아니겠지?”
최유신은 신해범을 빤히 응시했다.
“그게 다야? 그게 지금 네 반응이냐?”
“그럼 뭘 기대했어?”
“인마! 집에서 기르는 개가 다쳐도 이것보단 더 걱정하겠다!”
신해범이 웃는 소리에 최유신은 더할 나위 없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쟤 손가락 부러질 뻔했어!”
“울고불고 지랄 난리 부르스를 떨어야만 걱정하는 건가? 뭐 그런 반응을 원한다면 해 줄 순 있어. 그런데 지금 그딴 게 정류진에게 도움이 될까?”
신해범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침착해야 해. 난 이끄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최 대위, 정류진 안쓰럽게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동정하지 마. 그게 다친 것보다 더 화나는 일이야.”
“…….”
“의사가 환자에게 감정 이입하면 안 된다는 거,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신해범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최유신이 말릴 틈도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 커튼을 젖혔다. 류진이 후다닥 도로 누웠다.
신해범이 최유신을 비웃었다.
“누가 진통제 먹고 잔다고?”
최유신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신해범은 누워 있는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꼬. 많이 아파?”
“…….”
“좆나 아픈가 봐. 내가 말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네.”
“애 좀 내버려 둬라. 오늘은 여기서 자게 해. 할 말 있으면 날 밝은 다음에 해도 되잖아. 지금은 쉬어야 해. 상처도 상처지만, 애가 많이 놀라서….”
“꾸물거릴 시간 없어. 우리 새벽에 출발해.”
“뭐?”
“함풍 2도 공개 설명회 가거든.”
류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최유신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공채 설명회?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새벽바람에….”
“중요해. 그냥 평범한 설명회가 아니거든.”
신해범은 팔짱을 끼고 미소 지었다. 류진의 부재에 당황할 강인우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일 테다.
권세혁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헤로인의 약효는 길어 봤자 삼십 분 남짓이었다. 신해범은 정신 차린 권세혁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총통의 아들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발뺌할까? 돈으로 입 닥치게 할까?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모르는 체할까?
어느 쪽이든 기대가 되었다. 어느 쪽이든 류진은 상처받을 터였다.
신해범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찢어진 손등만큼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권세혁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울 류진을 상상했다. 지금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복수심.
“일어나, 꼬꼬야. 안 자는 거 알아.”
“…….”
“일어나서 네 발로 걸어갈래, 멱살 잡혀서 끌려갈래?”
마른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돌아앉은 류진의 두 눈은 그렁그렁했다.
“왜 울어?”
“다, 다, 당신은.”
“뭐?”
“내가 걱정도 안 돼?”
신해범은 피식 웃어 버렸다.
“웃어?!”
“으이그.”
신해범은 최유신의 책상에 있는 갑 티슈를 집어 들었다.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류진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코 풀어.”
“…….”
“흥 해! 꼴사납게 훌쩍거리지 말고!”
“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끼어들지 마, 최 대위.”
최유신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오른손에 붕대를 친친 감은 류진이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신해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맨발이야?”
최유신이 대답했다.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어.”
류진은 맨발로 뛰어왔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티셔츠로 감싼 채 울먹였다. 최유신의 귓가에 아직도 류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계속 누르고 있으면 지혈이 될 줄 알았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요.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아파요.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요. 도와주세요.
“이거라도 신을래?”
최유신이 욕실용 고무 슬리퍼를 꺼내 왔다. 신해범은 차갑게 거절했다.
“됐어. 내가 업고 가는 게 낫겠어.”
“나 슬리퍼 신을래.”
“시끄러워!”
류진이 움찔했다. 최유신이 끌끌 혀를 찼다.
“소리 좀 지르지 말라니까….”
“업혀.”
류진은 신해범의 등에 업히기 싫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순순히 업히지 않으면 무릎이 분질러질 것 같았다. 신해범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잠깐만!”
류진을 업은 신해범이 돌아봤다. 최유신은 명함 한 장을 신해범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야?”
“나중에 그쪽으로 연락해 봐.”
“이게 누군데?”
최유신의 시선이 류진의 뒤통수에 닿았다.
“송 닥터라고 학교 후밴데, 신경 정신과 전문이야. 도움 될 거다.”
“뭐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지금 당장 아니라도 좋아. 그냥 나중에라도, 시간이 되면….”
신해범이 류진을 고쳐 업었다. 목소리가 냉랭했다.
“최유신, 네가 학생 때 심리학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아. 그런데 지금 너 심리학자 아냐. 풍기대 군의관이지. 여긴 범죄자들 체포해서 심문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곳이지, 심리 상담이니 요양이니 하는 데 아니야.”
“…….”
“군에서 그런 일 하려면 전쟁 국가 파병 나가야 하는데, 너 그런 덴 가기 싫잖아. 솔직하게 말해 봐. 너 편하게 일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거잖아. 그러면 조용하게 지내야지, 사람 성가시게 하지 말고.”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만났던 치들도 그렇게 말했어.”
신해범이 웃었다. 최유신은 그의 눈에 서린 감정을 보았다. 의사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었다.
“네가 정신과 전문의들 싫어하는 거, 자강 1도 사건 때문이냐?”
“최 대위.”
“내가 그 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모르지만….”
신해범은 최유신이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최유신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긴 한숨이 샜다.
12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류진이 말했다.
“덱스드린 필요하대.”
다 꺼져 가는 목소리였다. 신해범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뭐라고 말 좀 해.”
“…….”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신해범은 뚜벅뚜벅 걸었다. 불이 꺼져 어두운 복도에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규칙적인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류진은 신해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말해! 지금 하고 싶은 말 있잖아!”
“가만있어. 창밖으로 던져 버리기 전에.”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그랬어?”
신해범이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뭐라고?”
“처음부터 날 죽여 버렸으면, 오늘 같은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신해범이 깍지 낀 손을 풀었다. 류진은 복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신해범의 군홧발이 쓰러져 있는 류진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컥!”
“누구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냐.”
그는 류진의 배를 두어 번 더 걷어찼다.
“흑! 아악!”
“지금, 누구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냐고.”
류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싼 손이 붕대를 감은 오른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신해범의 발길질이 멈췄다.
“이리 와.”
멱살을 붙잡혔다. 신해범은 12층의 화장실, 건물 규정상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 공용 화장실로 류진을 끌고 들어갔다.
“하지 마! 이거 놔…!”
류진은 신해범의 손등을 할퀴며 저항했다. 소용없었다. 류진의 힘없는 손은 신해범의 손등에 작은 생채기 하나 만들지 못했다.
차가운 벽에 밀쳐진 채 류진은 맥없이 흐느꼈다. 신해범이 으르렁거렸다.
“예전에 나한테 그랬지. 엄한 사람한테 화내지 말라고. 그 말 지금 돌려줄게. 나한테 화내 봤자 달라지는 거 없어.”
“놔! 놓고 말해!”
“네가 지금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그렇게 감이 안 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이거 놓으라고…!”
“난 애새끼 투정 받아 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 정도로 마음이 약했으면 진즉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총 맞아 죽었겠지. 그런데 봐. 지금 난 네 앞에 있잖아.”
신해범은 울먹이는 류진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정신 차려, 정류진. 예전의 기백은 다 어디 갔어? MVP랑 친구 놀이 하느라 잊어버렸어? 그럼 다시 기억해 내. 이번 일로 확실하게 머리통에 새겨 넣어. 걘 마음만 먹으면 널 때려죽일 수도 있는 놈이야. 그러고도 처벌 안 받아. 왕족이니까.”
신해범의 손에 힘이 풀렸다. 류진은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신해범이 류진의 코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류진.”
그는 손을 내밀어 류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 너 우는 얼굴 예쁜 거 아는데 지금은 아니야.”
“나쁜 새끼… 씨발 새끼….”
“넌 그놈이 나랑 다를 줄 알았겠지.”
신해범이 고개를 숙였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
“아니야. 그 집안 인간들은 세상에서 제일 질이 나빠. 태생부터가 글러 먹은 놈들이야. 뭐라고 해야 할까, 저주받은 핏줄?”
역사적으로 권씨 왕가에는 근친혼이 많았다. 왕족과 귀족들의 계보가 친인척으로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순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전통이 온갖 유전병을 야기했다. 성기능 장애자와 정신 이상자가 속출했다. 다섯 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 나갔다.
근친혼이 유전병의 원인으로 밝혀진 뒤, 왕가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개국 공신들의 후손을 찾아내 귀족 반열에 올려놓았다. 신흥 귀족의 탄생은 왕가의 무너진 유전자 체계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인물과 지능이 뛰어난 자손들이 하나둘 탄생하면서 그들은 힘을 얻고 세력을 확장했다.
권세혁의 모계 혈통인 평안 장씨도 신흥 귀족 세력에 속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 집안 인물이 빼어났다 한다. 장가의 아이들은 잔병치레가 적고 어른들은 노화가 늦어, 유전자나 게놈 지도 같은 과학적, 의학적 지식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들이 바다의 좋은 기운을 받아서 건강하고 외모가 출중하다는 설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평안 장씨 또한 몇 대에 걸쳐 왕가의 외척으로 군림하여, 그 축복받은 피도 많이 옅어졌다. 현대에 들어서도 유전병이 여전한 걸 보면.
권일혁 총통은 어려서 정서 장애를 앓았다. 권주혁 총통 보좌관은 성기능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한 왕족들의 뇌를 MRI 촬영한 결과 인간의 정서적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권씨 집안은 하나같이 정신 이상자였다. 남을 해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자들. 소수의 이득을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치들. 정신병자들이 한자리씩 꿰차고 앉아 있는 나라가 참 잘 돌아가겠다.
류진의 어깨를 잡은 신해범의 손이 떨렸다.
“우린 그런 놈들이랑 싸워야 해.”
“…….”
“제정신으로는 안 돼. 미친놈을 이해하려면 똑같이 미쳐야 돼. 함영재? 그 새낀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원래 큰일을 하려면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가야 하는 법이야.”
신해범은 미소 지었다. 류진은 알 수 있었다. 화장실도 복도처럼 불이 꺼져 있었지만,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신해범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주변이 환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인다면 류진은 더 비참할 것 같았다.
“어디까지 당했어?”
“뭐?”
“네가 최유신한테 솔직하게 말했을 것 같진 않거든. 그놈 성격에 눈치챘어도 모르쇠 했을 거고. 하지만 난 아니야. 난 네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싶어. 거짓 없이. 자세하게.”
신해범의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아!”
그는 류진의 발목을 쥐었다. 복사뼈가 도드라진 발목은 신해범의 한 손아귀에 다 들어왔다.
“놔.”
“어디까지 당했는지 말해.”
신해범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말라서 뼈가 불거진 발등을 더듬고 발가락을 건드렸다. 류진이 피하려 하자 발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악!”
“말해. 손모가지가 그 지경이 됐는데, 다른 데라고 멀쩡하진 않을 거 아냐.”
류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신해범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고분고분 털어놓지 않는다면, 힘으로 입 열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가 떠듬떠듬 흘러나왔다.
“안 했어.”
“응?”
“아무 일도 없었어.”
류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발목을 움켜쥔 신해범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아파! 왜 이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내 손으로 엉덩이 까야겠어? 솔직하게 말할 기회를 줬는데. 네가 이렇게 비협조적이면 나도 옛날식으로 할 수밖에 없어. 그걸 원해?”
류진의 주먹이 허공을 날았다. 신해범의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후려쳤다.
“미친 새끼!”
신해범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쳐들었다. 있는 힘껏 후려갈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해범은 움직이지 못했다. 어금니를 악문 채 세차게 몸을 떠는 류진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다, 다, 다, 당신은, 도대체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신해범은 주먹을 내렸다.
“내, 내, 내가 꼭 무, 무슨 일이라도 당했으면 하, 하는 것처럼….”
“맞은 데가 머리인가 보군. 언어 능력이 마비가 됐어. 겁대가리도 상실했고.”
신해범의 고개가 돌아갔다. 관자놀이 다음은 뺨이었다.
“어두운데 조준 잘한다. 너 나 때리는 거 연습했냐?”
“아무 일도 없었어! 당신은 내가 강간이라도 당하길 바랐겠지만, 그딴 일 없었어! 걘 혼자서 쓰러졌어. 헤로인은 원래 그런 약이야. 그, 그런 것도 모르고 무식하긴, 꼰대 같은 게, 앞으로 잘난 척하지 마!”
신해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래!”
“다행이네.”
그는 류진의 겨드랑 밑에 손을 끼워 넣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마른 몸을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신해범은 세면대로 다가가 물이 나오는지 확인해 보았다. 찬물이 시원하게 콸콸 쏟아졌다. 그는 손수 류진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이제 그만 울어. 아무리 예쁜 것도 계속 보면 질려.”
“다, 당신이 주, 죽었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
“궈, 궈, 권세혁이랑 같이.”
“그건 좀.”
류진이 코를 훌쩍였다.
“대체 왜,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왜….”
신해범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성격 같아선 진즉에 쥐어박았을 테지만, 이상하게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괜찮았다. 왜 그럴까. 대체 왜.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신해범은 퍼뜩 깨달았다. 지금 그는 안심하고 있었다. 정류진이 권세혁에게 강간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권세혁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해쓱하니 마른 얼굴에 두서없이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보면 알았다.
그는 담요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채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권세혁의 맞은편에 앉은 기우희는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진치우는 자기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불편한 침묵이 사무실에 가득했다.
문이 열렸다. 류진이 신해범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들어왔다.
권세혁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본 류진은 부르튼 입술을 달싹거렸다. 권세혁은 몇 시간 만에 십 년쯤 늙어 버린 것만 같았다.
“형….”
권세혁은 류진의 오른손을 보았다. 붕대 감은 손. 그는 자기가 류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슴이 아팠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권세혁이 류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차갑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찧은 그가 말했다. 크게 외쳤다.
“형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진치우가 손등으로 턱을 훔쳤다. 침까지 흘릴 만큼 놀랐나 보았다. 신해범은 속으로 비웃었으나 동요하는 건 진치우 혼자만이 아니었다. 어지간해서는 얼굴에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 기우희조차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기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신해범은 알았다. 이 한심한 물건이 차기 총통감이라고? 눈알을 빼서 씻고 다시 끼워 넣은 다음에 봐도 내가 나은데?
신해범은 무릎 꿇은 권세혁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정류진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권세혁은 문제의 도핑 사건으로 무리에서 퇴출당했다. 자신의 힘으로 쌓아 올린 대인 관계가 무너졌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무리의 중심에 있었을 인간에게 그건 분명 엄청난 충격이었으리라.
힘들었을 것이다. 외로웠을 터였다. 바로 그때 정류진이 나타났다. 권세혁이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 공급책이자 친구로서.
하지만 그건 신해범의 설계가 아니었다.
세이렌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정류진은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신해범은 화내지 않았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이 멍청하고 순해 빠진 꼬꼬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꽤 놀라운 부분이 있었다. 자기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마음 한복판에 직구를 던져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내게도 그랬다.
신해범이 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 이병. 왕자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류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받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권세혁이 자기 신분을 인지하고 저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응? 계속 이렇게 있을 건가?”
류진은 자꾸만 등을 떠미는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연기력은 언제 봐도 대단했다. 사람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 목소리나 표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인데, 신해범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말하면 모든 게 진심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류진은 꿇어앉은 권세혁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
침묵. 류진이 재차 말했다.
“이러지 마. 너 이러는 거… 나한테 사과하는 거 아냐.”
권세혁은 꿈쩍하지 않았다. 류진이 한숨을 쉬고 바닥에 앉았다. 무릎이 딱딱한 바닥에 닿았다. 류진은 왼손으로 권세혁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움찔했다.
“권세혁. 일어나라고.”
“…….”
“세혁아. 네가 이러면 내가 힘들어. 내가 더 곤란해진다고. 알면서 왜 그래, 진짜….”
“…….”
“난 괜찮으니까 일어나 봐.”
그 말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권세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류진은 그의 눈이 더 이상 붉지 않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금단 증상이 또다시 찾아올 테니까.
“류진이 형….”
권세혁의 다갈색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괜찮아? 미안해.”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내가 잘못했어. 많이 아팠지….”
류진은 다친 오른손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권세혁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가 울음을 터뜨리며 류진의 품에 안겨 들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불같은 체온에 놀랐다.
“내가 잘못했어!”
뺨과 목덜미에 갈색 머리카락이 마구 비벼졌다.
“자, 잠깐…!”
류진은 아연했다. 자기 몸피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법한 덩치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매달려 오는 상황이 낯설었다. 이상했다. 이상하게 밉거나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권세혁이 두렵지도 않았다. 그것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신해범이 류진의 바로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류진은 눈을 질끈 감고 권세혁의 등에 손을 얹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응.”
“나 진짜 무서웠으니까.”
“미안해, 미안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절대로 안 그럴게. 맹세해.”
지금 권세혁은 자기가 여전히 강아지라고 착각하는 성견 같았다.
신해범이 다가와 두루마리 휴지를 내밀었다.
“진정하십시오. 겨우 이런 일로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권세혁은 여전히 울었다. 류진이 휴지를 받으려 하자 신해범은 자기 손으로 직접 휴지를 뜯어 건네주었다.
상황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소파에 앉아서 류진을 끌어안은 권세혁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해범이 형. 나 부탁 하나만 할게요.”
그는 신해범에게 테이저건을 요구했다.
“그게 왜 필요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류진이 형한테 필요해요.”
권세혁은 류진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이성이 육체를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의 공포를 느꼈다. 인간의 본능도, 스스로의 의지도 아닌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순간.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말뿐인 맹세는 소용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류진의 관심과 지속적인 애정이지, 그를 물어뜯어 죽이는 게 아니었다.
“내가 또 형을 건드리면.”
류진을 바라보는 권세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 찔러 버려도 돼.”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권세혁은 신해범의 만류에도 불구,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한사코 류진이 호신용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힘으로 못 이기는데, 뭐라도 갖고 있어야죠.”
기우희는 권세혁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질질 짜는 일밖에 못 하는 애새끼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이란 걸 하는 모양이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해범이 형!”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신해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만에 하나 잘못되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고 쏘아붙였다.
“왕자께선 저희를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이십니까?”
권세혁의 눈동자에 일순 불꽃이 타올랐으나, 그는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알았어요.”
함풍 2도 지도를 들여다보던 기우희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는 신해범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류진은 신해범이 손목에 찬 명품 시계를 확인하고 진치우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봤다. 포옹, 그리고 악수.
신해범은 소파로 다가갔다. 류진과 권세혁이 몸을 기댄 등받이에 양손을 얹었다.
“슬슬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권세혁이 물었다.
“왜요?”
“지금 출발하니까요.”
“이 시간에 어딜… 아.”
권세혁의 흐리멍덩한 갈색 눈에 깨달음이 스쳤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권세혁에게 안겨 있던 류진도 덩달아 일어섰다.
“원래 새벽에 움직여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유리하죠.”
권세혁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신해범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2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류진이 말했다.
“새벽에 이동해야 사람들 눈에 안 띄어서 그래. 도로도 다 차지하고 달릴 수 있고.”
“어?”
“아까 네가 물어본 거. 원래 새벽에 움직이느냐고.”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권세혁은 자신의 커다란 캐리어에 두 사람분의 짐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신해범이 일러 준 것들 외에도 잡다한 생필품을 챙겨 류진은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필요 없다니까.”
넣고 빼고, 빼고 넣고를 반복한 끝에 간신히 캐리어를 닫았다. 권세혁은 류진이 메려던 군낭까지 빼앗아 어깨에 걸쳤다.
“내가 들게.”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 돼? 분명 뭐라고 할 텐데. 세혁아, 지금이라도 다시….”
“안 돼. 시간 없어. 그리고 이것들 다 필요해서 챙긴 거야.”
류진은 성큼성큼 앞서가는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풍기 교육대 제복을 차려입고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 캐리어를 든 권세혁은 작전에 나가는 군인이 아니라 젊은 기장 같았다.
“쟤는 전생에 보부상이었나….”
소규모 인원이었으나 구성이 남달랐다. 신해범과 기우희, 그리고 권세혁 왕자가 참여한다는 사실에 열 명 남짓한 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지마1)와 기대마가 한 대씩, 그리고 기우희가 아끼는 세 자매 중 막내 ‘영월’이 동원되었다.
류진은 코앞에서 보는 진압 차량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김새는 탱크 같은데 포가 여섯 개나 달렸다. 360도 회전이 가능한 이 포들은 통상 보병을 지원하는 자주포의 속도와 화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폭풍과 열, 방사선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여차하면 제공권 싸움도 가능했다.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불러일으키는 진압 차량 앞에서 류진은 좀처럼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곳저곳 만져 보며 감탄하는 권세혁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기우희는 내심 서운했다.
“무섭나?”
“예?”
“괜찮아. 만져 봐.”
“아….”
류진은 우물쭈물했다. 기대마를 확인하고 돌아온 성재경이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농담을 던졌다.
“혹시 좀비 영화 좋아해?”
류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별로… 그런데 뭔지는 알아.”
“혹시 좀비 사태 터지면 무조건 이 녀석 찾아라. 이놈만 잡아타면 백 퍼센트 생존 가능. 내가 장담한다.”
기우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자 성재경의 뒤통수에서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류진은 비틀거리는 성재경을 부축했다.
“형 괜찮아?!”
“으으….”
“넌 러닝 타임 삼십 분 안에 좀비 밥 된다. 내가 장담하지.”
기우희는 악담을 퍼붓고 진압 차량에 올라탔다. 성재경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류진을 보았다.
“소령님 화나셨지?”
“응.”
“나 망한 거지?”
류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차량에 대한 기우희의 애정이 남다르다는 사실은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차를 놓고 좀비 사태 생존용이라니, 기우희의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류진은 빗방울에 젖어 가로등 불빛에 빛나는 검은 차체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차량을 움직이는 권한이 기우희에게 있다고 들었다. 함풍 2도로 가는 길에 진압 차량이 동원된다는 건 기우희가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류진의 마음이 뭉근해졌다.
어떻게 만났든, 지금 어떤 사이든….
지금은 아군인 것이다.
성재경은 기대마로 돌아갔다. 서지운은 선두 차량 지마를 운전했다. 운전대를 잡은 기우희가 발판을 내리려고 했으나, 신해범이 저지했다. 그는 권세혁을 단숨에 끌어 올려 태운 뒤 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 이병.”
“아, 류진이 형은 제가.”
“비가 찹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신해범은 류진에게 손을 내민 채 꼼짝하지 않았다. 빗방울이 그의 머리, 어깨, 등을 적셨다. 류진은 붕대 감은 오른손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신해범의 악력에 남은 왼팔까지 결딴날까 봐 무서웠다.
그때 권세혁이 뛰어내렸다.
“내가 올려 줄게.”
“뭐?”
커다란 두 손이 류진의 허리를 잡았다.
“올려 줄게.”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류진의 두 발이 공중에 떴다.
군화 끈을 세게 조이지 않은 탓에 신발이 덜렁거렸다. 공중에서 맥없이 헛발질하는 마른 몸뚱이를 신해범의 단단한 두 손이 받아 들었다.
“어이쿠.”
신해범은 실수인 것처럼 굴었지만, 류진은 그가 일부러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재빨리 떨어지려 했으나 신해범의 두 팔이 상체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시선이 집요하다.
“형.”
차바퀴를 밟고 올라온 권세혁은 두 사람이 엉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류진이 형, 이리 와.”
성큼성큼 다가간 권세혁이 류진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팔 괜찮아?”
“응.”
류진은 권세혁에게 떠넘기듯 자신을 밀치고 차 안으로 들어가는 신해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괜찮아? 내가 너무 세게 잡은 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들어가자. 부슬비도 계속 맞으면 감기 걸려.”
류진은 권세혁의 옆구리를 툭 쳤다.
“너나 잘해.”
“알았다구우.”
권세혁이 말꼬리를 늘이며 매달려 왔다. 류진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그의 체온을 느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자.”
진압 차량 탑승자는 넷이었다. 운전자와 사수를 제외하고도 여덟은 탈 수 있는 차량에 단 넷뿐이었다. 그마저도 기우희는 운전석에 앉았다. 대기석에는 신해범과 권세혁, 그리고 류진뿐이었다.
“신기하다.”
권세혁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편하게 앉으십시오.”
“내부가 생각보다… 안락하네요.”
신해범이 미소 지었다.
“장시간 이동을 고려하여 안전하고 편안하게 설계했습니다.”
류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권세혁을 지켜보았다. 뭐 잘못 만져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었다.
“진압 차량이 신기하십니까?”
신해범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부적절한 행동이었으나 놀랍게도 내부는 쾌적했다. 그 사실에 의아해하는 권세혁에게, 신해범은 냄새와 세균을 없애고 안팎의 공기를 빠르게 걸러 주는 특수한 캐빈 필터가 설치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같이 골초들이라서 말입니다.”
“저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에요.”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권세혁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뇨. 지금은 괜찮습니다.”
“정 이병은?”
“저는….”
류진의 침묵을 상관이 권하는 담배를 거절할 수 없어서라고 해석한 권세혁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류진이 형 담배 안 피워요.”
신해범은 사람 좋게 웃었다.
“내가 실례했군. 강요할 생각은 없었어.”
“아, 아닙니다.”
권세혁과 함께 있을 때의 신해범은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이 정도 뻔뻔함을 가졌다면 뭔들 못 할 짓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진은 허리를 숙인 채 낑낑대는 권세혁을 내려다봤다.
“너 뭐 해?”
“형, 이거 해.”
반쯤 연 캐리어 속에서 권세혁이 꺼낸 건 목 베개였다. 한입 베어 먹은 도넛 모양에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장시간 앉아서 이동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필수품으로 통하는 바로 그 목 베개. 심지어 땡땡이 무늬였다. 연두색 바탕에 하얀색 땡땡이 무늬!
“이거 네 거야?”
“사실 무혁이 건데, 걔가 안 써서 그냥 내가 가졌어.”
“너 이런 건 언제….”
“좀 유치하긴 하지? 생긴 건 그래도 쓸 만해. 형 그거 베고 한숨 자라. 나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류진은 말랑말랑한 연두색 쿠션을 받아 들고 황당해했다. 붉어진 눈으로 가루를 핥아 먹던 권세혁과 목 베개를 건네주며 싱글거리는 권세혁이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수면 안대까지 끄집어냈다.
“이것도 해. 좋아.”
“이것도 동생 물건이야?”
“그건 내 거야. 학교 매점에서 샀어.”
권세혁이 싱긋 웃었다. 그는 이후로도 휴대용 담요와 방석 따위를 류진의 품에 안겨 주었다. 물건을 가득 끌어안은 류진을 본 신해범이 웃었다.
“왕자께서 보기 드문 살림꾼이십니다.”
권세혁은 순수한 의미의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류진이 형이 힘들 것 같아서요.”
류진의 오른손을 바라보는 눈에 아픔이 스몄다. 그런 권세혁을 바라보던 신해범은 속으로 비웃었다. 병 주고 약 주고는 나도 참 잘하는 짓인데.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굵어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멎지도 않는 부슬비가 세상을 적셨다.
선두의 지마와 가운데의 기대마, 그리고 기우희가 운전하는 진압 차량이 시가지를 벗어나는 데에는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거칠 게 없어서 그랬다.
시위 현장에서 바리케이드로 이용되는 기대마와 풍기 교육대의 진압 차량은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가히 도로 위의 무법자였다. 권세혁은 왜 신해범이 구형 레인지로버를 입때껏 몰고 다니는지 이해했다. 이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제아무리 고가의 명품 차라도 어린애 장난감처럼 느껴질 터였다.
권세혁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든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가 별로 안 흔들려요. 시끄럽지도 않고.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신해범이 대답했다.
“전부 총통 각하와 장군님의 은덕입니다.”
“내 앞에선 그런 말 안 해도 돼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신해범의 눈이 류진에게 향했다. 권세혁이 건네준 목 베개를 하고 담요를 어깨까지 덮은 채 자는 류진은 많이 지쳐 보였다.
류진의 얼굴에 머무르던 신해범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담요 밖으로 빼꼼 나온 오른손, 붕대를 친친 감아 동여맨 그 손을 응시했다. 신해범의 시선을 눈치챈 권세혁이 말했다.
“아직도 안 믿어져요.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에요.”
“정 이병은 이해할 겁니다.”
“해범이 형은요?”
권세혁은 불쑥 치고 들어왔다.
“이 일 숙부님이나 엄마한테 말할 거예요?”
선명한 갈색 눈동자가 정면에서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정말이죠?”
“왕자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권세혁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자꾸만 입이 마르는 건 드러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긴장과 초조함도 한몫했다.
“해범이 형도 알고 있었죠? 저 약하는 거.”
“왕자께서 입대하신 계기가 되지요.”
권세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신해범은 자기가 도핑과 관계없다는 바보 같은 뉴스는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어요. 나는 컨트롤을 잘하는 편이라서.”
“예.”
“최근에 계속 갈증이 나고, 체중이 준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런데 이 정도의 변화는, 뭐,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잖아요? 이런 걸로 병원 가면 꾀병으로 몰릴걸요.”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전 의사들을 별로 믿지 않아서요.”
“왜 그렇지요?”
권세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동생 때문에요.”
장가의 둘째 아들, 권세혁의 친동생인 권무혁에 대해서라면 신해범도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다. 권무혁은 장승희의 토로하는 여러 가지 고민의 단골손님이었다.
신해범은 처음부터, 아이가 단순히 몸이 약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권무혁에게는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아직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유전적 질환이 있을지도 몰랐다. 고작 아홉 살 먹은 아이에게 잔인한 생각이지만… 어쩌면 권주혁과 같은 운명일지도. 선천적 성불구자.
신해범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해범이 형 진짜 골초네요.”
“장수하기는 힘들겠지요.”
“아, 왜 그런 말을 해요.”
“누구에게나 정해진 에너지 총량이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는 인간은 전설이 되지만 일찍 사라지지요. 몸을 쓰는 직업이 그렇습니다.”
권세혁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운동을 해서 알아요.”
“배구를 하셨지요?”
“주전이었어요.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권세혁이 류진의 뺨을 만지자 신해범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포지션이 윙 스파이커였어요. 아시죠? 사이드 공격수.”
“실력이 출중하셨군요.”
“그런데 라이트는 못 했어요. 그건 공격수들 중에서도 톱클래스거든요. 진짜 잘하는 애들만 해요. 그래서 되게 주목받죠.”
팀의 최고. 에이스의 왕좌. 모든 걸 가진 권세혁도 실력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동정심은 느끼지 않았다. 자기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도 운이 따라야 가능했다. 그럴 기회조차 박탈당한 인간이 세상에는 많았다.
신해범은 담배 연기를 힘껏 빨아들였다가, 세게 내뿜었다.
고속 도로로 진입하자 속도가 빨라졌다. 기우희가 차창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칠 거라고 예상했던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권세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따라 주질 않네요. 좋은 날에는 해가 떠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우회할 거니까요.”
권세혁의 눈이 커졌다.
“어딜요?”
“자강 1도입니다.”
권세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지리에 문외한이어도, 함풍과 자강 중 어느 쪽이 광성과 가까운지는 알았다. 지금 신해범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왜요?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권세혁이 아는 자강도는 전국을 통틀어 지역색이 가장 뚜렷하고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예로부터 산에 둘러싸여 고립되었던 자강도는 땅이 척박하고 기후도 좋지 않았다. 주민 대부분이 농민임에도 불구하고 농번기 수확량이 형편없었다.
과거 천연의 요새로 이름을 날린 옛 고성들을 제외하면 관광지로써도 기능하지 못했다. 그나마 볼 게 있다면 과거 지역 경제 발전 기금으로 만든 온천 정도일까. 하지만 신해범이 고작 온천이나 하자고 풍기 교육대를 이끌고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누군가 그의 뒤통수에 총을 대고 ‘자강도에 방문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협박한다면 모를까.
“자강 1도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지역 축제요? 우리가요?”
신해범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다리를 꼬았다.
“왕자께선 광성과 장진 외에 다른 지역을 방문하신 적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강 1도에서는 2년에 한 번 지역 축제가 열리는데, 돌아가신 47대 총통을 기리는 날로서 천후제(天后祭)라고 합니다.”
권세혁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런 게 있는지 몰랐다.
“증조모님을 기리는 축제요? 자강도에서요?”
“과거 47대께서 자강 1도에 방문하여 고성의 현판을 새로 써 주셨다고 합니다.”
권세혁은 눈을 껌벅거렸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 건 누가 알려 주지도,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았다. 권세혁의 마음속에서 여태껏 존재조차 몰랐던 자강 1도 지역민들에 대한 애정이 솟았다. 그 사람들이….
“해범이 형.”
권세혁은 감격했다. 신해범은 자신에게 국민들의 애국심을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칠 줄이야.
“축제라면 류진이 형도 좋아하겠네요.”
권세혁의 안색이 밝아졌다. 큰일을 앞두고 류진이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오래 머물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경유니까요. 메인 행사만 관람하고 출발하는 일정인데, 시골이니만큼 볼거리가 다양하진 않지만 왕자님께는 색다른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장터 음식도 제법 먹을 만합니다.”
“장터요? 시장 말하는 거예요?”
“예. 가 본 적 있으십니까?”
권세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뭐냐, 지짐이 기막히게 하는 가게가 있어서… 옛날 친구들이랑 가끔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마요. 부끄러우니까.”
신해범이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다 사람 먹는 음식인데 뭐 어떻습니까.”
“그래도 좀… 웃을 것 같아서요.”
서민 친화적인 콘셉트로 대중에 어필하는 왕자에게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저걸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앞뒤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권세혁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으면 뭐가 잘 안 넘어가더라고요.”
신해범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간이 작아서 어디다 쓸까. 난 누가 쳐다보든 말든 좆도 신경 안 써.
직할시 외곽에 다다르자 거짓말처럼 고속 도로가 끊어졌다. 여기부터는 비포장 국도였다. 다행히 비가 그쳤고, 운전병들을 배려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대원들은 진압 차량 반경 오십 미터 내에서 제각기 휴식을 취했다.
성재경이 도시락을 네 개를 가져왔다. 신해범은 잠든 권세혁 몫의 도시락을 기우희에게 넘겼다. 운전하느라 피곤했으니 많이 먹어야 한다. 어차피 권세혁은 입맛도 없을 테니까.
기우희는 흔쾌히 도시락 두 개를 받았다. 신해범은 자기 몫의 도시락을 먹으며 하나 남은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저것까지 먹어 치우면 정류진을 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깡마른 게 식탐 하나는 알아주니까.
밥을 먹지 못해 울먹이는 얼굴을 상상하니 기분이 야릇해졌다. 신해범은 안심 돈가스 한 조각을 입에 던져 넣으며 웃었다. 보온 도시락이라 그런지 음식이 아직도 따뜻했다.
그는 은근슬쩍 진압 차량에 올라타려 하는 성재경을 불렀다.
“중사.”
“예!”
“정류진 차 안에 있다. 조용히 깨워서 내보내.”
“예.”
성재경이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갔다. 신해범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자기 몫의 도시락을 비웠다. 평소 식사 예절을 중시하며 품위를 잃지 않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상관없었다. 전쟁터에서는 매너 같은 거 없다.
“왜….”
류진은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나왔다. 얼굴이 조금 부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은 얼굴이 더 건강해 보였다. 워낙 마른 체격이라서 그렇다. 신해범은 류진의 모가지에 덜렁덜렁 매달린 목 베개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나와라. 밥 먹어.”
“뭐… 여기서?”
“그럼 길 한복판에서 테이블 펴고 우아하게 칼질할 수 있을 줄 알았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우리 지금 작전 중이다.”
신해범은 류진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여전히 따끈따끈했다.
“받아. 네 몫이다.”
일어나자마자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말을 들은 류진이 입을 비죽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권세혁 깨울게.”
“야.”
“왜?”
신해범이 도시락을 흔들었다.
“이거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사람 수 헷갈렸어?”
“그런가 봐. 딱 하나가 부족하네. 마침 한 놈이 자고 있으니까 그냥 우리끼리 조용히 해치우면 될 것 같은데.”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같이 먹어야지!”
“소리 지르지 마라. 다 들린다.”
류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런 실수 안 할 사람인 거 알아. 장난치지 말고 내놔.”
신해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몰라. 누가 두 개 먹었나 보지.”
운전석 창문을 열어 놓고 식사에 열중하던 기우희가 컥, 소리를 냈다. 성재경이 황급히 생수를 건네줬다. 신해범은 운전석에서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하고 도시락을 흔들었다.
“괜찮아, 먹어.”
“그래도….”
“괜찮다니까. 내가 먹으라고 하는 거니까 먹어도 돼. MVP한테는 비밀로 해 줄게. 야, 우리 다 공범이야.”
신해범은 류진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도시락을 턱, 쥐여 주었다. 지금까지 헛수고한 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꼬야, 먹어. 넌 좀 더 이기적으로 굴어야 해.
류진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해? 먹으라니까.”
신해범이 재촉했다. 류진은 여전히 망설였다. 도시락과 신해범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야. 됐다. 내놔. 내가 두 개 다 먹으련다.”
류진은 도시락을 등 뒤로 감췄다.
“싫어. 내 거야.”
“그럼 처먹어, 이 새끼야.”
“이따가 먹을래.”
기어이 권세혁과 나눠 먹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신해범은 근질거리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조막만 한 머리통의 오른쪽을 칠까, 왼쪽을 칠까 고민했다. 맞으면 말을 듣겠지.
하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류진을 보니 때릴 마음도 사라졌다. 신해범은 내던지듯이 말했다.
“식중독 걸려 뒈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
“식중독?”
“요즘 날씨엔 아무리 조심해도 장사 없어. 실컷 아껴 두고 있어 봐라, 음식 다 버리지.”
류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도 몇 시간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이 배때기 뒤집혀서 땅바닥 데굴데굴 구르고 난리 치더라.”
“…….”
“음식물에 유통 기한 표시를 왜 한다고 생각하냐? 어차피 좀 지나도 상관없는 거, 뭐 하러 귀찮게 돈 쓰고 시간 들여서?”
류진은 등 뒤로 감췄던 도시락을 꺼내 매만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음식 냄새 때문인가 격렬한 배고픔이 밀려왔다. 위가 배배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괴로웠다. 류진은 도시락 뚜껑을 살짝 열어 보았다.
“돈가스….”
“안심이다. 부드럽고 따뜻해. 그거 먹으면 점심때까지 든든할 거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류진은 진압 차량과 도시락을 번갈아 쳐다봤다. 권세혁은 용서해 줄 것 같았다. 평소에 식탐 없는 애니까. 애초에 식사 시간에 쿨쿨 잤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단체 생활은 그런 거였다.
“먹어.”
신해범이 말했다.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류진은 도시락을 품에 안았다. 따뜻했다. <백사자> 시절에 하신성이 사 주던 프랜차이즈 도시락 같았다. 동네 가게치고 비싼 가격에 직접 가지러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좋은 재료를 쓰고 양도 많아서 다들 좋아했다. 하신성은 가끔 선심 쓰듯 자기 몫의 도시락도 양보해 주었다. 자기가 입맛이 없어서 그랬던 거겠지만….
곽현우와 서로 좋아하던 반찬을 교환하던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콧등이 시큰해졌다. 류진은 도시락을 든 채 차량으로 뛰어 올라갔다. 등 뒤에서 신해범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신해범은 기우희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쟬 괜히 닭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사람 한 명 식충이 만드니 속이 시원하십니까?”
“용서해, 기 소령. 우리 꼬꼬가 박애 정신이 그렇게 넘칠 줄 몰랐어.”
“MVP는 고마워하지도 않을 텐데요.”
“그걸 모르니까 닭이지.”
기우희는 운전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자 성재경이 재빨리 다가와 불을 붙여 주었다. 기우희는 오랜만에 인심을 써서 성재경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무려 돛대였다.
“감사히 피우겠습니다!”
승은이라도 입은 표정의 성재경 옆에서 신해범도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았다.
“권한테 계속 시달리나?”
“견딜 만합니다.”
기우희는 습한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언제나 쇼트커트로 유지하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다 덮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제명에 죽지 못할 인간이라 말이 많은가 봅니다.”
“복귀하기 전까지는 연락 없을 거야. 아무리 노망이 났어도 물리적 거리는 이해하겠지.”
신해범이 웃었다.
“우리 꼬꼬 귀엽지?”
“…….”
“미안하군. 사과하지. 그냥 좀 웃겨 보고 싶었어.”
“정 이병이 질색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나한테 상처 주는 게 재미있나?”
기우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자강에 다시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 좋은 추억이 가득해서?”
“꼭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대장님께서도….”
기우희는 말끝을 흐렸다. 시선이 저 멀리 지평선을 더듬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환영받았지만 지금은 아닐 거라는 사실입니다.”
“쫓겨날까 봐 겁나?”
“출입을 막는다면 밀어붙이겠습니다.”
신해범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우리가 아는 얼굴도 있을까?”
“기대하지 않습니다.”
“…….”
“대장님.”
기우희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군홧발로 불을 끈 그가 신해범을 보았다.
“그곳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간절하게 바랄수록 실망이 커집니다.”
“좋은 말이야, 기 소령. 하지만 뭔가를 기대하고 가는 게 아니야. 나는 자강 1도에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어. 그냥…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신해범이 지평선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성재경이 힐끗힐끗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물론 신해범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알아 봤자 좋을 것도 없는 얘기였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갈증이 났다. 권세혁은 류진이 내미는 물통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미처 삼키지 못한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류진이 잠자코 그의 턱과 목덜미를 닦아 주었다.
“지금 몇 시야?”
권세혁은 차창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밝았다. 바깥이 부산한 걸 보아하니 다들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류진이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여기.”
“응.”
권세혁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류진의 손을 살폈다.
“형 손은 좀 괜찮아?”
“괜찮아.”
“그건 뭐야?”
“우리 아침밥.”
뚜껑을 열자 맛좋은 냄새가 풍겨 왔다. 류진은 일회용 젓가락을 권세혁에게 건네주었다.
“형은?”
“너 반 먹고 넘겨줘.”
“응?”
권세혁의 눈이 커졌다. 살면서 이런 말을 들어 본 역사가 없었다. 반 먹고… 뭘 어째?
류진이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은 게 그거 하나뿐이래.”
권세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에 없던 분노가 솟구쳤다. 류진이 아니라 신해범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이곳의 배급 담당에게.
류진이 도시락을 하나만 챙기는 실수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이인분의 식사를 가지러 갔을 테고, 고지식한 밥통은 머릿수대로 지급한다고 강짜를 부렸을 것이다.
권세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는 류진은 자기 이름을 못 파는 성격이었다.
도시락 하나를 받고 우물쭈물했을 류진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내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류진이 받는 푸대접은 권세혁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권세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형 이걸로 밥 돼?”
“괜찮아. 너 먼저 먹어.”
“형 한 끼에 밥 두 그릇씩 먹잖아.”
“매, 매일 그렇진 않아.”
“호월루에서 하루에 다섯 끼 먹었다면서. 그럼 밥 열 공기… 형, 우리 이거 가지고는 턱도 없어.”
“나도 알아. 그런데 사정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냐. 이것도 신해, 아니 대장님이 챙겨 주신 거야.”
권세혁은 도시락을 들고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 가? 너 뭐 하려고?”
그는 성서의 한 구절 같은 말을 읊조렸다.
“내 너를 배불리 먹게 하리라.”
권세혁은 힘차게 문을 열었다. 류진이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으나 이미 늦었다. 식후 담배를 즐기고 있던 신해범과 기우희, 성재경의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보았다.
신해범이 새벽에 급히 출발했다는 사실에 부관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역시 준장님은 뭐 한다고 법석 떨지 않는다는 감탄, 그래도 배웅하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서운함. 결은 다르지만 둘 다 존경심을 바탕으로 하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진치우는 부관들이 뭐라고 말하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신해범이 떠난 첫째 날부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신해범은 풍기 교육대의 액막이 장승이었던 모양이다. 자리를 비우자마자 전에 없던 사건이 생기는 걸 보면.
진치우는 일 층에서 내렸다. 사무실 소파에서 잔 탓에 뻐근한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로비로 걸어갔다.
“누군데?”
“저 애입니다.”
접수처 근처에 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직원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진치우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병과 실랑이를 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턱선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산뜻한 여름 교복과 체리색 학생 구두. 오십 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조그만 여자애가 백팔십 센티미터 넘는 건장한 군인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돌려줘요! 돌려달라고요!”
진치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야? 설명해.”
전화로 상황을 보고한 대원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세혁 왕자님 팬이랍니다. 그런데 다른 대원들 사진을 찍다가 걸려서요. 카메라를 확인했는데 저희 대원들은 물론이고 본관, 별관, 주차장의 근무용 차량까지 촬영한 게 발각돼서 장비를 압수했습니다.”
“잘했네. 근데 쟤는 왜 저래.”
“카메라가 비싼 거랍니다. SD 카드를 내놓을 테니 나머지는 돌려달라고….”
“지랄 똥 싸고 자빠졌네. 체포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근데 고작 저거 때문에 날 오라 가라 해?”
“그, 그게 말입니다.”
진치우는 대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너 뭐 하는 새끼야? 저 쪼끄만 여자애 하나 해결 못 해서 나를 불러? 우리가 민간인이랑 트러블 생기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이런 일도 혼자서 해결 못 해? 씨발, 니들 지금 나 먹이냐? 장난쳐?!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대장 없다고 아주 지들 맘대로야!”
“아닙니다!”
“그럼 뭔데 새꺄!”
진치우의 주먹이 연거푸 공중을 날았다. 소란을 알아챈 소녀가 돌아봤다. 대원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진치우를 알아본 소녀의 눈이 번뜩였다.
“저기요!”
소녀는 총알처럼 돌진해 왔다. 진치우는 겁 없이 자기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사람한테 제 카메라 좀 내놓으라고 말해 줘요! 진짜 말이 안 통해!”
“뭐야?”
“진치우 중령님 맞죠? 아저씨 우리 학교에서 엄청 유명해요. 아씨, 난 그냥 카메라 테스트한 것뿐인데 건물 찍었다고 뭐라 그래. 그딴 거 관심도 없는데 진짜. 근데 왕자님 없다는 거 진짜예요? 언제 오시는데요?”
우다다다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딱따구리 같았다. 듣고 있자니 머리가 띵했다. 진치우는 소녀의 손을 뿌리쳤다.
“야 이, 너 여기가 어디라고 겁대가리도 없이.”
“뭐 어때요, 텔레비전에서 만날 보는데. 우리 언니는 예전에 신해범 준장님하고 행사장에서 사진도 찍었어요.”
“그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해 준 거고, 야, 너 여기서 이러는 거 공무 집행 방해인 거 알아? 조용히 보내 줄 때 집이든 학교든 가라. 까불면 진짜 수갑 찬다.”
“원래 왕자님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카메라 뺏어 가서 지금 이러고 있잖아요!”
소녀는 연신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진치우는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참을 인을 그렸다. 참자, 참아. 여자애 쥐어박으면 좆 달린 새끼도 아니다.
“자꾸 귀찮게 할래?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아저씨 바쁜 사람이야.”
“저도 바빠요! 학교 다니면서 사진 찍으러 다니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세요? 제 카메라요, 작년에 알바한 돈 모아서 산 거예요. 핀이라도 나갔으면 보상금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뭐 이런 미친년이!”
“미친년?! 중령님 지금 저한테 욕했어요?!”
“그럼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 어후, 진짜 이걸 콱…! 야, 너 학교 어디야. 부모님 전화번호 불러!”
당황할 줄 알았던 소녀는, 뜻밖에 팔짱을 끼고 선 채 의기양양하게 턱을 쳐들었다. 당당한 태도에 진치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부관이 왜 자기 선에서 해결하지 못했는지.
“너 이러는 거 장군님이 아시냐?”
진치우가 물었다. 소녀는 딸기와 바나나와 얼음을 갈아 만든 주스를 쪼로록, 소리 내 마시고 대꾸했다.
“모르시죠. 할아버지가 알면 다리 몽둥이 부러지고 머리 박박 밀려서 수녀원에 처박힐걸요.”
“머리 미는 건 절이잖아.”
“그게 그거죠.”
“야, 달라. 어디 가서 똑같다고 얘기하지 마라. 무식하다는 소리 듣는다.”
“꼰대질 좀 그만해요. 중령님 잘생겨서 좋아했는데 환상 다 깨지네. 말하는 게 우리 아빠랑 왜 이렇게 똑같아.”
“야 이… 적당히 까불어라. 아저씨는 학생이라고 봐주고 뭐 그런 거 없다.”
“알아요. 대학생 언니 오빠들 때리는 거 뉴스에서 봤어요.”
“야 그거는!”
“우리 서로 비밀 지켜요. 중령님 만난 거 누구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 중령님도 제가 왕자님 팬인 거 말하면 안 돼요. 멀쩡한 사람 골로 보내고 싶지 않으면.”
“명문 여중 다니는 애가 말 참 이쁘게 한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던?”
소녀는 플라스틱 컵을 테이블 위에 턱,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말이 그거란 말이에요. 아가씨 학교. 사람들은 우리가 뭐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아나 본데 안 그래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요.”
“이게 진짜 말대꾸 따박따박….”
“할 말은 하고 살아야죠.”
헌병대장 황주열의 손녀였다. 진치우는 파오훼이 시절 그를 먼발치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나이가 많았는데 목소리만큼은 쩌렁쩌렁하니 기개가 넘쳤다. 그 노인네에게 이런 손녀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얼굴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
진치우는 이것만 먹고 꺼져 줄 테니 그만 좀 째려보라는 소녀의 통박에 헛기침을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너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냐?”
“시간 할애 요청서 냈어요.”
“왕자님 사진 찍으러 가는 것도 허락해 주냐?”
“오늘 실기 대회 날이에요. 근데 안 갈 거예요.”
“왜?”
소녀가 발끈했다.
“지금 진로 상담 하세요?”
“싫으면 말아라.”
“…대회 나가 봤자 소용없어요. 어차피 저는 상 못 타요. 괜히 잘하는 애들 많은 데 가서 자존심 상할 필요는 없죠.”
진치우는 입을 벌렸다. 아니 무슨 어린애가 이래? 패배 정신이 전두엽에 박혀 있는데?
“그래서 학교 제끼고 왕자님 사진 찍으러 다니냐?”
소녀는 픽 웃더니 한산한 카페테리아를 둘러보았다.
“여기 되게 좋네요.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학교에 이런 데 있음 여기서 살 것 같은데.”
“여기 호텔 아니고 직장이다.”
진치우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래서 애들이란.”
소녀의 무릎 위에는 묵직한 카메라 가방이 있었다. 약속대로 SD 카드는 순순히 내놓았다. 두 번 다시 풍기대 주변을 서성이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 냈다. 진치우는 제 얼굴보다 큰 카메라를 보물처럼 다루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어릴 적 슈퍼 카 모형을 모으며 애지중지하던 기억이 있었다.
“그거 사려고 알바 했냐?”
“네.”
“뭐 했는데?”
“부업이랑 전단지요. 중학생 써 주는 데가 별로 없거든요.”
“집에서 용돈 안 받아?”
“딱 숨 쉬고 살 정도로만 받아요. 그걸로는 취미 생활 못 하죠.”
“돈 없는 집구석도 아니잖아.”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 모르세요?”
어쩐지… 진치우는 소녀가 들고 있는 주스를 바라보았다. 명문 여중에 다니는 부잣집 여자애가 겨우 과일주스 한 잔에 좋아라 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하긴 황주열은 진치우가 파오훼이였던 시절부터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공화당 관계자들이 모조리 목이 잘리거나 총살당하던 ‘철혈의 시대’에 사령관 자리를 지켜 낸 처세술을 우습게 보면 안 되었다.
문제는 힘든 시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한 사람은, 그 시기가 지나간 뒤에도 자신의 방식을 지독하게 고집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부턴 오지 마라.”
“알아요. 안 온다고 했잖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다음부턴 진짜 오지 마. 오늘은 그래도 나니까 이 선에서 마무리하는 거야.”
“…….”
“오늘 니가 만난 놈들 있잖아, 다 성격 유하고 융통성 있는 애들이다. 아니었음 너 로비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나거나 수갑 차고 지하실로 끌려갔어. 그럼 나한테 보고도 안 올라와, 걔들 선에서 끝날 테니까.”
“…….”
“이거 겁주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진짜 개또라이 사이코들 많아. 걔들한텐 네가 누군지 말해 봤자 소용없어. 안 믿을 테니까.”
“중령님은 믿었잖아요.”
진치우는 한숨을 쉬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차피 네가 누구든 상관없었어.”
“네?”
진치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이제 가라.”
“무슨 뜻이에요? 제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게?”
“아, 좀 가라고. 너 때문에 지금까지 일 하나도 못 했다.”
“무슨 뜻인지 얘기를 해 줘야….”
“그만해라! 슬슬 짜증 난다.”
소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한 손에 주스를 든 채 책가방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걸쳤다. 진치우는 소녀를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었다.
“이제 로비에서 헤어지는 거다. 우리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누가 할 소릴.”
“…….”
“근데 중령님, 제가 뭐 하나 말해도 돼요?”
“아니 하지 마. 부탁인데 그냥 가.”
“쓸데없는 소리 아니고 제보인데.”
“응, 그건 방송사나 신문사에 전화해.”
“진짜 이상해서 얘기하는 건데….”
1층에 도착했다. 소녀는 타박타박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 나갔다. 조그만 어깨에 짊어진 짐이 많았다. 진치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놈의 학생 가방이 군장만 하냐.
앞서가던 소녀가 뒤돌아보았다.
“중령님.”
“아, 또 왜.”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려서요. 풍기대 근처에 이상한 사람 하나 있는데, 아세요?”
“뭐?”
“제가 이 바닥에선 좀 네임드라 왕자님 찍사들은 다 알거든요. 그런데 완전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남자고 키는 한 백팔십? 엄청 뚱뚱해서 멀리서 보면 공 같아요.”
“또 무슨 소릴….”
소녀의 말이 빨라졌다.
“애들이 그러는데, 딱히 왕자님 팬도 아닌 것 같대요. 신계동에서도 본 적 없구. 제 기억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보세요.”
“…….”
“카메라 좋은 거 쓰던데 업체에서 돈 받는 사람 아니에요? 괜히 엄한 팬클럽 회원들 말고 그런 사람이나 잡아요. 우리 왕자님 얼굴 이상한 데 팔리면 어떡해.”
진치우는 기가 막혀 웃었다.
“네가 그런 말 할 자격 있냐?”
“진짜 그 사람 이상하다니까요! 팬들끼리 현장에서 친목 없는 게 규칙인데, 아는 척 말 거는 것도 이상하고.”
“그 남자가 말을 걸어? 너희한테?”
진치우는 소녀를 로비 의자에 앉혔다.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여자애들 틈에 끼어서 카메라 들고 돌아다닌다? 확실히 이상했다. 왕자 얼굴 보겠다고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는 여자애들을 노리는 변태, 인신매매단일지도 몰랐다.
“자세하게 말해 봐. 그 남자 인상착의가 어떻다고?”
어린애 말만 듣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치우는 알았다. 세상에는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발생하는 범죄가 있었다.
권세혁은 신해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근사했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밥은 밥이었다.
“해범이 형!”
“일어나셨군요.”
고개를 돌린 신해범이 웃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잠은 괜찮아요. 그보다, 저희 아침 도시락이 하나뿐이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아까 정 이병에게 지급한 도시락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권세혁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려는 찰나 신해범이 덧붙였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오후에 간식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권세혁은 물론, 신해범과 함께 있던 기우희와 성재경의 눈까지 동그래졌다.
“간식이요?”
“보잘것없는 실력이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해범은 씩 웃었다. 그는 아까부터 류진이 엿듣는 걸 알았다. 깜찍한 놈….
“정 이병! 자네가 좀 도와주지.”
우당탕 소리가 났다. 진압 차량 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류진이 화들짝 놀라 굴러떨어지는 소리였다. 신해범은 웃음을 꾹 참았다.
“괜찮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성재경이 넘어진 류진을 일으켰다. 머리와 옷을 털어 주고 혹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데 권세혁의 갈색 눈에 불꽃이 일었다.
“류진이 형!”
권세혁은 성재경을 밀치고 류진을 부축했다. 얼결에 밀려난 성재경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해범은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권세혁에게 기대선 류진에게 다가갔다.
“이런. 다친 덴 없나?”
“괜찮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류진이 대답했다. 권세혁은 이쪽을 향한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채 류진을 꼭 끌어안았다. 신해범의 눈은 류진의 허리를 감싼 권세혁의 탄탄한 팔에 머물렀다.
“굴러떨어졌는데 정말 괜찮아? 불편한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 지금은 멀쩡해도 나중에 심각해지는 수가 있어. 뇌진탕이라든지.”
“아닙니다. 그냥 잠깐…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권세혁은 난리 법석이었다. 큰 병원 가서 정밀 검사를 해 보자는 둥,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한참을 떠들어 대다 제풀에 지쳐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류진이 권세혁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아파?”
“응.”
권세혁은 두통과 오한을 호소했다. 신해범은 속으로 한탄했다. 아침부터 환자가 둘이었다.
눈치 빠른 기우희가 상비약과 도톰한 군용 담요를 가져왔다. 신해범은 권세혁이 그를 ‘우희 누나’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에.
“환경이 바뀌어서 그럴 겁니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죠.”
기우희가 권세혁을 진압 차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권세혁은 들고 있던 도시락과 젓가락을 류진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아. 너 먹어.”
“아냐. 형 다 먹어. 나 어차피 입맛도 없어.”
성재경이 기대마로 돌아가자 류진은 신해범과 단둘이 남았다. 잠자코 권세혁이 건네준 도시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신해범이 툭 내뱉었다.
“밥 한번 먹기 힘들다.”
“…….”
“뭐 해? 처먹어.”
류진은 도시락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처음에는 밥알만 깨작거리더니 곧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신해범은 류진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응시했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안 그런 척 도도한 표정 짓고 있어도.
“야.”
신해범은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생수병을 따서 내밀었다. 출발하기 전에 얼려 두었는데, 아이스박스에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녹았다.
“누가 쫓아와? 천천히 먹어.”
물을 한 모금 마신 류진이 물었다.
“무슨 간식?”
“뭐?”
“아까 얘기한 거. 오후에 간식 만들어 주겠다고.”
신해범이 픽 웃었다.
“하여튼 정류진, 먹을 거 얘기만 하면 귀가 번쩍 뜨이지.”
“당신이 먼저 얘기했거든?”
“내가 왕년에 취사반장이었거든.”
류진의 입술이 벌어졌다.
“표정이 왜 그러냐?”
“당신이 취사반장?”
“왜. 안 믿겨?”
류진은 생수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깡패잖아.”
“뭐라고?”
“…….”
“질투도 적당히 해야 귀엽지. 추하게 굴지 마라, 정류진.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요리로 날렸던 몸이야.”
“왕년 타령하기는. 꼰대같이.”
“꼰대는 나이만 내세워서 갑질하는 놈들한테나 쓰는 거지. 남의 성취를 깔아뭉개는 용도로 쓰는 말이 아니거든.”
신해범은 대답 없는 류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노려보는 눈빛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참에 알아 둬. 철천지원수한테도 배울 점은 있다. 덮어놓고 남을 깎아내리는 건 지금까지 이룬 게 없고, 앞으로도 발전이 없을 조무래기들이나 하는 짓이야.”
목소리에 쓴웃음이 묻어났다. 류진은 신해범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모양 좋은 이마와 콧대, 뚜렷한 입술과 매끈한 턱선이 태양빛에 반짝였다.
류진은 신해범의 말을 되뇌었다. 원수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그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또 무슨 수로 인정했을까.
권세혁은 아침을 걸렀지만 배고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기우희가 준 진통제 효과 덕분일까. 두통과 오한이 사라지고 갑자기 에너지가 펄펄 넘쳤다. 그는 류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우리의 목적지가 자강 1도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유는 47대 총통을 기리는 천후제.
권세혁의 목소리는 한없이 밝았다.
“분명 재밌을 거야. 그치? 우리 꼭 붙어 다니자. 맛있는 것도 먹고, 기념품도 사고.”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두서없이 내뱉는 권세혁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신해범은 설명을 요구하는 류진의 눈빛에 부응하는 대신 운전석과 사수석을 보호하는 차폐막을 내렸다. 기우희에게는 운전에 집중할 만한 환경이 필요했다.
진압 팀은 직할시를 완전히 벗어났다.
류진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도시의 전경을 보았다.
태어나 고향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시절, 직할시 광성은 책이나 텔레비전, 라디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미지의 세계였다. 아무나 들어가 살지 못하기 때문에 소문이 무성했다. 각종 고층 건물과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마천루, 흙먼지 하나 없이 매끄럽게 포장된 길, 최신형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각종 공공 기관과 다양한 편의 시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밤이 되면 화려하게 반짝이는 탑. 발달된 기술의 집합체.
왕족과 귀족, 여러 자본가가 모여 사는 번화한 대도시.
류진은 연습생 생활을 위해 직할시로 입성한 누나로부터 오는 전화를 기다렸다. 누나는 늘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게 회사 내부의 규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어린 류연우는 할머니와 누나가 안부 인사를 나눌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머니가 수화기를 넘겨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쏟아 냈다.
거기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어? 무슨 음식을 먹어? 백 층 넘는 건물이 있어? 누나 비행기 타 봤어? 신룡관 연못에는 진짜 용이 살아? 총통은 정말 하늘을 나는 사람이야?
얼마나 순진하고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 헛소리하지 말라고 비웃지 않아 준 누나가 고마웠다.
류진은 창밖을 보았다.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끊임없이 펼쳐진 논밭, 비닐하우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민가와 조립식 주택이 보였다. 저 멀리 학교도 있었다. 회색 시멘트를 발라 만든 낡은 건물이었다. 손바닥만 한 운동장에 하얀 셔츠를 입은 아이들이 축구를 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제대로 된 축구공은 아니었다.
진압 차량에서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밖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렇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멀리서부터 요란했다. 걸어가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길을 피하고, 개중에는 길이 좁아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기우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유지했다. 그 누구의 제재도, 항의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진압 차량이 지나간 길에 대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기까지 했다.
시가지로 접어들자 진압 팀은 스타가 되었다. 류진은 권세혁과 나란히 차창에 달라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자전거나 낡은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들은 기대마 차량에 바짝 붙어 환호했다. 개중에는 황룡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선두를 이끄는 지마는 개의치 않고 달렸다. 그래도 기대마 차량에서는 호응이 좋았다. 대원들은 창밖으로 과자와 사탕을 던지고, 자기 휴대 전화 번호를 목청껏 외치며 ‘오빠한테 전화해’ 따위의 소리를 질러 댔다.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해범이 형.”
권세혁의 얼굴이 밝았다. 류진은 속으로 설마, 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우리도 구경할래요?”
우리?
류진이 되묻기도 전이었다. 벌떡 일어난 권세혁이 루프를 열었다. 쇠붙이 갈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의자를 밟고 올라선 그가 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라와.”
“난 됐어. 너나 실컷 구경해.”
환호 소리가 더 커졌다는 생각은 착각일까. 아니었다. 권세혁의 등장은 가뜩이나 흥분한 사람들에게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격이었다. 예전보단 해쓱해진 얼굴이었으나 여전히 잘생겼고,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권세혁은 스타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미소는 확실히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권세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왔다.
“형, 나와. 지금 분위기 장난 아냐.”
“됐어. 너나 실컷 해.”
“진짜 재밌는데….”
신해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꾸만 류진의 팔을 잡아끄는 권세혁에게 말했다.
“저는 어떠십니까.”
권세혁이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신해범이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루프가 완전히 열렸다.
신해범은 권세혁만큼이나 크고 높은 환호성을 이끌어 냈다.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 있던 류진은 보았다. 가슴을 움켜쥐고 기절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었다.
권세혁의 말을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저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비교될까. 키도 체격도 한참 모자라는데….
그래도 얼굴은 나도….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 어차피 금방 사그라질 환호성이었다.
진압 팀은 곧 시가지를 벗어나 또다시 인적 드문 외길로 진입했다. 권세혁은 잠깐 쉴 겸, 다음 마을에서 물자를 보충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신해범은 그럴 필요 없다고 일축했다.
“사전 준비는 철저히 했습니다.”
그렇다면서 아침 도시락 개수는 헷갈렸나. 권세혁은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만을 참고 류진을 바라보았다.
“형 배고프지 않아?”
“난….”
류진은 신해범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은 아까부터 허기졌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렇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신해범은 옜다 처먹어라, 하고 자신의 얼굴을 진흙탕에 처박을 것만 같았다. 류진은 잠자코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괜찮아.”
“난 좀 출출한 것 같은데.”
신해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폐막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우희가 대답했다.
“차 세워. 간식 시간이야, 기 소령.”
소녀는 SD 카드에 남자의 사진이 있을 거라고 했다. 만일에 대비해서 찍어 뒀다고 했다. 진치우는 엉겁결에 칭찬을 해 주려다, 그래도 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진치우는 소녀에게 SD 카드값과 택시비를 쥐여 주었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강인우와 마주쳤다. 담배를 피웠는지 니코틴 냄새가 풍겨 왔다. 그는 진치우에게 경례를 한 뒤 꼼짝하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았다. 진치우는 한 발짝 뒤에 서서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강인우의 얼굴을 관찰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지금쯤이면 신해범과 정류진의 부재를 알고도 남았다. 진치우는 기다렸다. 강인우가 고개를 돌리고, 순진한 부관의 질문을 가장하여 뭔가를 캐내려고 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고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하지만 강인우는 침묵했다. 진치우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을 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강인우는 작전 회의실이 있는 7층에서 내렸다. 진압 팀이라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강인우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진치우가 입을 열었다.
“금방 내려가지.”
“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진치우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선 자리에서 양손과 발을 털고, 목을 좌우로 꺾는 스트레칭을 했다. 생각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12층에 도착했다. 여기부터 자기 세상이었다. 진치우는 복도를 내달렸다. 부대장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라고 잔소리하는 신해범도, 호시탐탐 넘버 투 자리를 넘보는 기우희도 없으니 살맛 났다. 하나도 안 외로웠다.
진압 팀은 인적이 드문 풀숲에 정차했다. 근처에 계곡이 있었다. 물살이 세지 않고 물도 깨끗했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멋진 장소였다.
권세혁이 류진을 잡아끌었다.
“형 이거 봐. 물 되게 깨끗해.”
“응.”
“애들은 여기서 물놀이도 하겠다.”
“하고 싶냐?”
“솔직히 보는 사람만 없으면.”
권세혁이 키득거렸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다 보일 만큼 깨끗한 계곡은 그도 오랜만이었다. 권세혁의 고향인 장진도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이었으나, 도시 개발로 옛날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너른 바위에 앉은 권세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창한 나무가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되게 좋다.”
류진은 말없이 권세혁의 옆에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머리가 시원해.”
“아직도 두통 있어?”
“약간.”
권세혁은 말 없는 류진의 옆구리를 툭 쳤다.
“괜찮아. 이따가 우희 누나한테 약 좀 더 달래지, 뭐.”
“…….”
“스트레스 받아서 그래. 금방 괜찮아질 거야. 형은 아무 걱정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
기대마에서 내린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젖은 땅 위에 방수 돗자리를 펴고, 버너를 켜고 냄비를 올렸다. 류진은 생수를 두 병째 들이켜는 권세혁의 옆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생소한 광경이었다. 목청을 높여 적극적으로 지휘하는 기우희도, 기대마에서 라면을 박스째 꺼내 오며 신난 대원들도.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건 신해범이었다.
그는 허리에 하얀 앞치마를 둘렀다. 성재경이 가져온 통조림 햄을 능숙하게 썰더니 소시지에도 칼집을 냈다. 끓는 물에 수프를 풀고 재료를 쏟아 넣었다. 순식간에 라면 냄새가 퍼졌다.
신해범은 우르르 몰려드는 대원들을 한 손으로 저지했다. 면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꼬들꼬들하게 만들었다. 대파를 써는 속도가 대단했다. 거의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줄들 서.”
시위대를 복날 개 잡듯이 두드려 패던 풍기 교육대원들이 별안간 순한 양으로 변했다. 적어도 류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신해범과 냄비 앞에 일렬로 정렬한 대원들은 라면을 받을 때마다 고개 숙여 힘차게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신해범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는 면과 햄, 소시지를 아끼지 않고 듬뿍듬뿍 퍼 주었다. 대파 고명도 잊지 않았다. 류진이 권세혁을 돌아보았다.
“내가 받아 올게.”
“난 괜찮아. 지금 밀가루 들어가면 체할 것 같아.”
“아….”
류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형은 먹고 와. 난 여기서 기다릴게.”
“혼자 있어도 돼?”
“괜찮아. 근데 빨리 와.”
류진은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란 딱 지금 권세혁에게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배가 고프고, 라면 냄새는 기가 막히게 좋았지만, 류진은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망설였다. 권세혁이 웃으면서 류진의 어깨를 떠밀었다.
“얼른 가. 다른 사람들이 다 먹겠다.”
“…….”
“올 때 물이나 좀 갖다줘.”
“알았어.”
권세혁은 후다닥 뛰어가는 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긴 목덜미, 마른 어깨. 연하늘색 제복 셔츠가 바람에 흔들렸다. 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이 가늘었다. 손등에 감긴 하얀 붕대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권세혁은 한쪽 무릎을 세웠다. 이마를 댔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한시라도 빨리 가라앉기를 바랐다.
작전 회의실 문고리를 잡는 찰나, 휴대폰이 진동했다. 강인우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몸을 돌려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전화를 받았다. 엄승원 특유의 성량 있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통화 가능하십니까?
“짧게 듣겠습니다.”
- 정류진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강인우는 한숨을 삼켰다. 현역 기자의 노련함과 기지를 우습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엄승원의 정보 습득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 그 애 류연비 가족입니다.
“…….”
-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엄승원이 침묵했다. 강인우는 지금 그가 어떤 기분일지 알았다. 배신감. 자괴감. 분노. 경악과 놀라움 이후에 엄승원의 안에서 솟아났을 감정들이었다.
다행히 흥분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강인우는 나직하게 물었다.
“그게 조사하는 데 문제가 됩니까?”
- 문제가 되지요. 대위님과 저 사이의 신뢰 말입니다.
엄승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겁니까?
“무슨 의도 말입니까?”
- 제가 정류진의 출신 성분을 밝히면 어떻게 될지 모르십니까?
“어떻게 됩니까?”
엄승원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예?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 당연히…!
거칠게 대답하던 엄승원이 입을 다물었다. 통화를 그만둬야 할 만한 상황이 생겨서는 아니었다. 할 말을 잊었던가, 처음부터 할 말이 없었던가, 아니면 내뱉으려던 차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던가.
강인우는 제복 셔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땀은 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정류진의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 그가 누구냐는 사실이지요. 정류진 이병은 풍기 교육대 소속으로 권세혁 왕자를 보좌합니다. 풍기대와 신룡관이 과연 정류진의 신분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
“목적이 있으니 곁에 두는 겁니다. 그걸 방해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휴대폰 너머 백색 소음이 들려왔다. 지금 엄승원은 공공장소에 있는 모양이었다. 비밀스러운 조사를 하는 입장에서 사람 많은 장소에 머무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 지금 제 안위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서로의 신뢰를 위해서입니다.”
강인우는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어렵게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봤자 스물한 살짜리 어린앱니다. 기자님께서도 원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세요.”
엄승원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는 모습도. 강인우는 휴대폰을 얼굴에서 떨어뜨린 뒤 마른침을 삼켰다.
- 저는 어디까지나 신해범이 목적입니다.
“압니다.”
- 정류진이 유 수석과도 관계된 인물입니까?
“아닙니다.”
- 그 대답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류진은 유미현이 아니라 <백사자>의 하성록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엄승원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엄승원은 어디까지나 제삼자였다.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눈의 역할만 해 주면 그만이었다. 공으로 부려 먹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강인우는 힘주어 말했다.
“신해범 단독 인터뷰, 분명 기자님 명예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엄승원은 순순히 대꾸했다.
- 금일 여덟 시. 장소는 지난번과 같습니다.
강인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최근 들어 느끼고 있는데, 사람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아주 단단히 들었다.
신해범은 마지막까지 국자를 내려놓지 않았다. 기우희와 성재경이 몇 번이나 넘겨받기를 청했으나 끝까지 버텼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줄의 끝에 서 있는 류진이었다. 그는 연신 앞을 힐끗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라면이 다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신해범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 봤자 라면이었다. 모자라면 더 끓이면 그만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앞에서 나눠 주는 양을 조절하면 되었다. 애초에 신해범은 일행의 식사량도 가늠하지 못하는 초보 요리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반대의 일도 가능했다.
류진의 바로 앞 차례에서 라면을 동낸 신해범은, 마치 우연이었다는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방금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신해범은 텅 빈 냄비에 국자를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류진의 얼굴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아….”
마지막 라면을 배급받은 대원이 후다닥 자리를 떴다. 준장님 표 라면을 나눠 먹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신해범이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빨리 왔어야지.”
“자, 잠깐 저기서 얘기하느라….”
“꾸물거리면 국물도 없어.”
“…….”
류진은 여전히 빈 냄비를 들여다보고, 신해범은 그런 류진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쩌라고. 정말 없어.”
“알았어….”
마른 몸이 돌아섰다. 순간 바람이 불어 류진의 머리카락과 헐렁한 제복 셔츠가 흔들렸다. 류진이 휘청거린다고 착각한 신해범은 손을 뻗었다.
“나 원.”
믿을 수가 없었다. 다 큰 남자애 팔뚝이 한 손아귀에 다 들어왔다.
류진이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다.
“왜?”
“너 우냐?”
“미쳤어?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울게?”
“눈이 빨갛다.”
“헛소리는…!”
신해범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있어 봐. 끝난 거 아니니까.”
신해범에게 팔을 붙들린 채, 류진은 그가 허리에 걸친 하얀 앞치마를 바라봤다.
“라면 하나 끓이면서 폼은….”
“뭐라고?”
프라이팬을 든 신해범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저걸로 얻어맞으면 최소 뇌진탕이었다. 류진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것도.”
“방금 뭐라고 했잖아.”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바,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나 보지.”
“바람 소리 하고 자빠졌네. 사람 귀머거리 취급하냐?”
“…….”
“기다려. 네가 나 도와줘야 돼.”
신해범은 프라이팬을 버너에 올렸다. 크기가 커서 손잡이를 놓으면 흔들렸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나 보았다.
류진은 잠자코 신해범의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았다. 척 봐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손잡이 고무가 당장이라도 분리될 것처럼 덜렁거렸다. 모서리는 닳았고, 바닥은 새카맣게 탔다. 가만 보니 모양도 특이했다. 편편하고 납작한 일반 프라이팬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국식 웍도 아닌 게… 가정용 프라이팬과 웍을 합쳐 놓은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이런 조리 도구를 어디서 구했대.
“멍청하게 잡고만 있지 말고 움직여. 구석구석 잘 달궈지게.”
“알았어.”
신해범은 손이 빨랐다. 마땅한 재료라곤 밀가루, 쪽파, 생수와 비닐에 담긴 휴대용 소금뿐인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반죽을 완성했다. 처음부터 재료의 양과 섞는 순서가 완벽했다. 닥치는 대로 넣는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았다. 가루가 뭉치지 않고, 농도가 적당히 걸쭉한 걸 보면 알았다. 신해범은 어쩌다가 한 번, 자기가 내킬 때만 선심 쓰듯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확실히.
나무젓가락에 반죽을 찍어 맛본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붓는다.”
류진이 끄덕였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밀가루 익는 냄새가 훅 올라왔다. 기름진 음식 냄새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신해범과 류진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이 형성되었다. 기우희가 남달리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십니다.”
“그동안 기회가 없었지.”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류진이 어깨를 움츠리자, 기다렸다는 듯 신해범이 면박을 줬다.
“정 이병, 똑바로 들어. 한쪽이 설익잖아.”
사람이 몰린 이상 자기 몫은 없다고 판단한 류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익어 가는 파전을 바라봤다. 냄새는 정말 좋았다.
신해범이 불쑥 말했다.
“줘 봐.”
“예?”
“손잡이 내놓으라고.”
손잡이를 건네받은 신해범이 주위를 물렸다. 류진은 잠자코 돗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가 프라이팬을 위로 쳐들자 파전이 하늘을 날았다. 아직 익지 않은 면이 안전하게 프라이팬에 안착했을 때, 주위에서 감탄과 박수가 터졌다. 신해범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류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도 저런 것쯤은 한다. 뭐 어렵겠어? 프라이팬 손잡이 잡고, 위로 쳐들면 저절로 반죽이 떨어지는 거 아냐.
“정 이병은 별로 놀랍지 않은 모양이야?”
“아닙니다.”
“그런데 반응이 시원찮군.”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속삭이는 말들.
“막내가 눈치 없네.”
“요즘 애들이 그렇지 뭐.”
류진은 신해범의 얼굴에 파전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뒤통수에 내리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말 유치했다.
류진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매만지는데, 인파를 헤치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등장했다.
“모여서 뭐 해요?”
권세혁이었다. 한바탕 세수라도 한 모양인지 얼굴이 젖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갈색 머리카락이 태양빛에 반짝였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권세혁의 뺨과 턱을 닦아 주었다. 그가 웃었다.
“고마워.”
“…….”
“오, 지짐이 맛있겠다. 해범이 형 이런 것도 해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신해범이 나무젓가락을 갈라 내밀었다. 권세혁은 냉큼 받았다. 제일 늦게 나타나서 가장 먼저 맛을 보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권세혁은 그래도 괜찮았다.
“형, 아 해 봐.”
류진은 삽시간에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꼈다.
권세혁의 뚜렷하고 화려한 이목구비를 담은 사진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이미지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진치우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자기가 팬클럽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자부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과연 사진 찍는 실력이 남달랐다. 피사체의 시선이 엉뚱한 데 있는 걸 보아하니 멀리서 당겨 찍은 건데, 흔들림도 없고 깨끗했다. 생김새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잘 찍혔다.
진치우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자는 자기 얼굴이 풍기 교육대 부대장의 컴퓨터에 떡하니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까.
신해범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진치우는 고민했다. 자기 선에서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제보자의 신원이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거도 있었다. 그러나 진치우는 남자를 용의선상에 올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직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풍기 교육대 주변을 맴돈다는 것만으로도 체포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찝찝했다.
자꾸만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진치우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신해범의 책상으로 다가가 검은 명패에 새겨진 글자를 바라보았다.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
진치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풍기대와 관련된 일을 신해범이 모르고 넘어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 왜 이렇게 시끄러워?
“간식 시간이야.”
- 팔자 좋다. 소풍 갔냐?
“왜 화를 내고 그래, 치우? 우리가 없으니까 많이 외로워?”
- 지랄 똥을 싸네! 외롭기는 개뿔이. 넓은 데 혼자서 쓰니까 살맛 난다. 니들 아주 영원히 안 왔으면 좋겠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 간식 맛있게 잘 처먹었냐?
“해다 바쳤지. 지금 내 밑으로 입이 몇 갠데.”
핀잔이 날아왔다. 이참에 대장직 내려놓고 식모로 재취업하라며 비웃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해범은 화내지 않았다. 옛날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친구였다.
진치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 풍기대 주변에 이상한 놈이 하나 있다. MVP 팬클럽 여자애들한테 치근덕대는 게 아무래도 나중에 사고 칠 것 같은데 어떻게, 내 선에서 해결해?
“어떻게 해결할 건데.”
- 알아듣게 해야지. 얼씬거리지 말라고.
“알아듣게, 어떻게?”
-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해범은 앞치마를 풀며 웃었다. 이제 곧 출발할 시간이었다. 라면 못 먹어 훌쩍이는 꼬꼬를 위해 시작한 일이 분위기를 타서, 재료가 동날 때까지 파전을 부쳤다. 오랜만에 잡은 조리 도구였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역시 나는 요리사 체질이다.
신해범은 돗자리를 껴안고 지나가는 대원에게 손짓했다. 눈치 빠른 대원이 다가와 앞치마를 받아 갔다.
“신원은 파악했어?”
- 아직 사진만 갖고 있다. 팬클럽 애한테 제보받았어.
신해범은 사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의 기우희가 힐끗 쳐다봤다.
“믿을 수 있는 거야? 어린애가 관심 끌고 싶어서 장난치는 게 아니고?”
-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보자 신원이 확실해.
진치우가 한 박자 쉬고 내뱉었다.
- 충격받지 마라. 황주열 손녀딸이 MVP 사생이다.
신해범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슈퍼스타 이름값 제대로 하네.”
- 애가 중학생인데 알바한다더라. 밖에서 떵떵거리는 노인네가 집구석에는 돈 안 쓴다더니 진짠가 봐.
“원래 그런 노인네였어. 명퇴가 코앞인데 말년에 험한 꼴 보고 싶지도 않을 테고.”
신해범은 무심하게 덧붙였다.
“최석준 그렇게 되고, 다들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몸들 사려. 계좌 정리하고 집안 단속하고. 부동산 명의가 하루건너 바뀌는데 꼴이 많이 우습지. 부루마블 게임도 그런 식으로는 안 할 거야.”
- …모르겠다, 씨발. 사진 보낼 테니까 확인해 봐.
신해범은 액정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운전 중인 기우희에게 내밀었다.
“기 소령.”
“예.”
“이놈 얼굴 낯익지 않아?”
휴대폰을 본 기우희가 대답했다.
“기자네요. MVP 입소식 기자 회견 때 봤습니다.”
“아, 난 우리 기억이 일치할 때마다 동지애를 느껴.”
“부대장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 기자에 대해서요.”
“치우는 기억 못 하는 눈치야. 하긴 나도 긴가민가했어. 이놈이 요즘 풍기대 주위를 맴돈다는데, 이유가 뭘 거 같아?”
기우희는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차폐막은 아까부터 닫혀 있었다. 신해범이 휴대폰을 집어넣으면서 빙긋 웃었다.
“우리는 개인 취재를 허락한 적이 없어. 검증된 언론사의 문의도 가급적 거절하지. 보안이니까. 기자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설쳐 봤자 험한 꼴 당한다는 사실도 알 텐데. 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기지 아니겠어?”
“유미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조사원 중 하나겠지.”
신해범이 담배에 불을 붙여 건넸다. 기우희는 거절하지 않았다.
“유미현이 그렇게 허술하게 행동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 황마 교도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기우희는 어렸다. 온 세상을 저주하고 부숴 버리고 싶었던 십대 소녀였다. 유미현은 삼십 대의 젊은 여자였다. 그래도 지금 신해범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유미현은 교도소에서 여자들에게 글과 숫자를 가르쳤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내뱉는 법, 돈을 관리하는 법,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
기우희는 유미현이 싫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재수 없는 년이었다. 그런 여자들에게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자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였다. 어차피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여 조기 석방될 거면서.
기우희는 유미현이 싫었다. 교도소를 제 강의실처럼 휘젓고 다니는 기만자가 징글징글했다. 그래서 죽이기로 결심했다.
벽에 갈아 날카롭게 만든 숟가락을 그의 목구멍에 쑤셔 넣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다. 죽어 가는 유미현에게 해 줄 말도 연습했다. 좆 까, 씨발 년아. 친엄마도 죽인 년을 네가 어떻게 바꿔.
하지만 지금 유미현은 살아 있었다. 출소 후 승승장구하여 정계 서열 넘버 쓰리로 군림했다. 기우희도 더 이상 세상을 저주하던 십대 소녀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하지만 분노는 시간에 무디어지지 않았다.
다시 만난 유미현은 황마 교도소에서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캠프에 합류하라고 제안했다.
유미현 캠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여자는 변하는 게 없었다.
기우희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방 안에서는 똑바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천장이 낮아서.”
“…….”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초록색 정사각형 천장. 누우면 허리가 아프고, 앉아도 다리를 쭉 펼 수가 없었습니다.”
신해범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경제 사범 중에 사역을 거부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자기는 경제 사범이 아니라고 떠들고 다녔죠. 교도관 붙잡고 자기는 정치범이니 노동을 할 이유가 없다고 따지다가 독방에 처박히기 일쑤였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범죄자끼리 무슨 급을 나누고 앉았는지.”
“자네는 이유가 있었잖아.”
“이유 없는 년들이 없었죠. 아시다시피 전 사형수였습니다. 그래서 어렸는데도 고참 대우를 받았습니다. 대장 노릇에 맛이 들어서, 또 어차피 죽을 날 받아 놨으니 눈에 뵈는 것도 없어서 사방 천지 다 들쑤시고 다녔죠.”
감옥에서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치약, 비누, 담요 한 장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 싸움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서열이 잡히고 나면 문밖으로 싸움이 번졌다. 방 대 방, 복도 대 복도, 동 대 동.
기우희는 단숨에 파벌을 형성했다. 사형수의 빨간 명찰이, 일대 다수의 싸움에서도 겁먹지 않는 배포가, 궁지에 몰려 흠씬 두들겨 맞더라도 다음 날 주먹을 쳐들고 달려들어 결과를 뒤엎어 버리는 악바리 근성이 거친 야생마 같은 여자들을 감동시켰다.
기우희는 누구와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뒤를 봐주겠다는 실세의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의 파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 빛을 발했고, 그 빛에 이끌린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기우희를 미련하다고 비난했다. 누군가는 괜한 패기에 힘든 길을 간다고 조언을 가장한 참견을 했다. 하지만 기우희는 자신 있었다. 승리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과거에 군인들과 싸워 이긴 스스로를 다시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게 요행이 아니라 실력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빨간 명찰 어린애가 빨간 명찰 미친년으로 불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우희는 옆방, 맞은편 방, 맞은편 방의 옆방의 왕초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며 세력을 확장했다. 황마 교도소 대통일의 꿈을 꾸었다.
신해범이 쿡쿡 웃었다.
“도장 깨기.”
“딱 한 명을 못 이겼습니다. 그 경제 사범, 아니 자칭 정치범.”
지금껏 죄수들끼리의 세력 다툼을 방관하던 공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어렸던 기우희는 나날이 격렬해지는 싸움을 염려한 간수들의 제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황마 교도소 간수들이 걱정한 건 싸움에서 다치고 죽는 수감자들이 아니었다. 리더를 앞세운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고 여긴 게 문제였다.
그걸 누가 짚어 줬을까? 교도소를 범죄자들 계도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던 그 여자밖에 더 있나? 경제 사범, 아니 정치범 아줌마? 죄수 번호 2045 유미현 씨?
“번호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군.”
신해범이 웃었다. 기우희는 옛날부터 기억력이 좋았다. 디테일한 것 하나까지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나약했던 시절이 있어서 그렇다. 약할수록 주변을 자세하게 살피기 마련이다.
기우희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 메마른 입술 사이에서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는 지금도 유미현이 싫습니다.”
“옛날 일 때문에?”
“유미현은 저를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눈빛에서도 그게 묻어납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 여자는 저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마주친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대장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알아.”
신해범이 대답했다.
“아니까 자네를 혼자서 보낸 거야.”
기우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 기자가 유미현의 간자라면 조만간 다시 접근해 올 겁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들통날 수준이라면 눈속임에 불과하겠죠. 저 기자는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한 수단이고, 정작 유미현이 노리는 건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켕기는 게 너무 많아서 그래.”
신해범은 킬킬 웃었다. 눈빛이 아득했다.
“기자 놈 처리하지. 이쪽에서도 경고할 때가 됐어.”
“부대장님 혼자서요?”
“혼자서는 외롭겠지?”
신해범은 웃으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기우희가 속력을 높였다. 이중 무한궤도, V8 6.6리터 디젤 엔진, 최고 출력 650마력. 선두의 지마를 제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신해범이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기우희는 핸들을 움켜쥐었다. 배트맨 가면을 연상시키는 스포츠 핸들 중앙에 그려진 은색 해골이 빛났다.
권세혁은 담배를 피웠다. 길쭉한 전자 담배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류진은 잠자코 그의 옆을 지켰다. 땅이 거칠어 흔들림이 심했다. 꼭 붙어 앉지 않으면 흐리멍덩한 눈빛을 한 권세혁이 당장이라도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를 것만 같았다.
“벨트 매.”
“됐어. 불편해.”
“그럼 안전 바 내려.”
“귀찮아.”
권세혁이 꾸물꾸물 드러누웠다. 류진의 허벅지에 갈색 머리카락이 비벼졌다. 류진은 권세혁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조금 있었다.
“화났냐?”
“내가 왜.”
“네가 준 파전 안 먹어서.”
“내가 분위기 파악을 못 했지. 됐어. 얘기하지 마.”
전자 담배를 든 손이 좌석 밑으로 떨어졌다. 류진은 그 팔을 잡아 권세혁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앞으로는 조심하자. 보는 눈이 많잖아. 여긴 군대니까.”
“그렇게 신경 쓰여?”
류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수면제 기운에 눈이 감길락 말락 하는 사람을 붙잡고 구구절절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권세혁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겼다. 눈을 감은 채 그가 말했다.
“형 손 시원하다.”
“그래서 좋냐?”
“응.”
“…….”
“무혁이가 이런 말 자주 했는데.”
“손이 시원하다고?”
권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걘 예방 주사를 맞아도 꼭 감기 걸리더라. 여름엔 에어컨 때문에, 겨울엔 겨울이라서. 체질은 타고나는 건가 봐.”
“동생 보고 싶어?”
“나를 필요로 하는 애니까.”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출발할 때 사수석에 올라탄 신해범은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둘만 있는 시간을 주려는 걸까? 친목을 더욱 굳건하게 하라고?
“…담배 그만 피워. 나 줘.”
류진은 권세혁의 전자 담배를 빼앗아 껐다.
“너무해.”
그가 눈을 감은 채 돌아누웠다. 커다란 덩치가 어깨를 움츠리고 누운 모습이 묘하게 가여웠다. 류진은 군용 담요를 넓게 펼쳐서 권세혁의 몸을 덮어 주었다.
“형.”
권세혁이 중얼거렸다.
“나 미워하지 마.”
류진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했다. 그러겠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마 짚어 줄게.”
류진은 권세혁이 이대로 잠들기를, 더 이상 말하지 않기를, 금단 증상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형….”
“왜 또.”
“음악 듣고 싶어.”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이어폰 어디다 뒀는데.”
“그런 거 말고. 형이 노래 불러 주면 안 돼?”
“싫어.”
권세혁이 헤실거렸다.
“고민도 안 하네.”
“백날 빌어 봐라. 내가 입 벙긋하나.”
“그럼 뭐라도 계속 말해 줘. 형 목소리 듣기 좋으니까….”
밥 챙겨 줘, 빨래 해 줘, 군화 닦아 줘, 말동무 해 줘, 온갖 일을 도맡아 한 끝에 인간 라디오였다. 류진은 권세혁의 이마를 탁 때렸다.
“아!”
“그냥 자.”
권세혁은 잠들지 못했다. 그나마 수면제 기운이 도는 건 아직 금단 증상 초기인 덕분이었다. 그는 류진의 아랫배에 코를 묻고 얼굴을 비벼 댔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간지러워…!”
“좋아.”
“뭐가 좋냐!”
“따뜻하고… 좋은 냄새 나고….”
차폐막이 거친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류진은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돌아보고 있는 신해범과 눈이 마주쳤다.
“목적지 진입한다.”
“예.”
“분위기가 많이 다를 거다. 아무쪼록 행동거지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아침에 지나온 마을에서는 환대받았다. 군인이나 외부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며 호응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를 거라고 했다. 류진은 신해범이 굳이 그 부분을 집어서 말해 주는 게 걸렸다.
축제라며….
류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강도는 고산 지대였다. 한여름에도 구름과 안개가 끼어 날씨가 흐렸다.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이십여 분 달렸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도로와 표지판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쯤, 경사가 가파른 절벽 길이 나타났다.
초입에 화강암 장승이 서 있었다. 높이가 삼 미터는 족히 됐다. 부리부리한 눈과 주먹코, 뾰족한 모자와 수북한 수염이 섬세했다. 바위 건축 문화가 발달한 지역다웠다. 류진은 차창에 달라붙었다. 장승 옆 바위에 새겨진 한자를 떠듬떠듬 읽었다. 자강 1도(自岡 一道).
바위 주변에 돌탑이 많았다. 주민들이 오며 가며 작고 넓적한 돌멩이로 쌓아 올렸을 자그마한 돌탑들이 시선을 끌었다.
신해범이 무전기를 들었다. 산악 지형이라 잡음이 심했다. 기대마를 운전하는 성재경은 긴장하고 있었다. 좁은 길에 취약한 대형 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휘청 흔들렸고, 그때마다 바퀴 헛도는 소리가 났다. 신해범은 기우희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명령했다.
쿵, 텅, 텅! 차체에 돌멩이가 부딪쳤다. 자갈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지간한 충격은 흡수하는 진압 차량 안에서도 흔들림이 느껴졌다.
“세혁아.”
류진은 권세혁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도착했어?”
“아직. 물 마셔.”
냉수를 마신 권세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멍하다.”
“똑바로 앉아. 안전 바 내리고.”
“응….”
쿵! 권세혁이 움찔했다. 높이 튄 자갈이 차창을 때리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서워?”
권세혁은 안전 바를 움켜쥔 류진의 손등을 자기 손바닥으로 덮었다.
“조금.”
“괜찮아. 사고 나면 내가 형 안고 뛸게.”
“넌 네 목숨 챙겨.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차라리 태양열에 달아오른 평지가 나았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와 타이어 고무 타는 냄새는 가혹한 산길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류진은 애써 창밖을 보지 않으려 했다. 우측의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류진은 운전석을 건너다봤다. 기우희는 끄떡하지 않았다. 마가목 가지가 차창을 두들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신해범조차 진지한 표정으로 전후좌우를 살피는 마당에. 이 정도면 즐긴다고 봐야 했다. 기우희는 타고난 드라이버였다. 그러나 베스트는 될 수 없었다. 벌써 뒤차와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다.
신해범이 나직한 목소리로 주의했다. 체감 속도가 줄었다.
류진은 안전 바에 의지해 눈을 감았다. 옆에 앉은 권세혁이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보지 마. 그럼 더 무서워.”
“알았어.”
류진은 자기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권세혁의 손가락을 모르는 척했다. 단단하게 깍지 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절벽 길이 끝나자 마을이 나타났다. 신해범은 곧장 진입하지 않았다. 앞서가던 지마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진압 차량에 이어 기대마까지 안도의 한숨 같은 바퀴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류진은 눈을 떴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형. 들려?”
“응.”
“이거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어….”
류진은 권세혁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위험한 일은 아닐 거야. 넌 괜찮아. 우리가….”
우리가 있잖아.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마른침과 함께 삼켰다. 사수석의 신해범이 무전기에 대고 명령했다.
“행진한다. 통신 완료.”
마을로 진입한다는 뜻이었다. 차체가 움직였다.
류진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모서리 땅에 올라앉은 주택의 대청마루에서, 한 소년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목 늘어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발로 댓돌을 더듬어 슬리퍼를 꿰어 신은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낮은 담장 밖으로 나왔다. 누가 봐도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류진은 당황했다.
“안 되는데….”
아이가 다치면 큰일이었다. 류진은 차창을 두드렸다. 소년이 이쪽을 보길 바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돼. 오지 마.
소년은 계속해서 걸어왔다. 시선이 허공에 떠 있었다. 류진은 비로소 아이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더더욱 큰일이었다.
“아…!”
운전석을 향해 외치려는 찰나였다. 집 안에서 노년 여성이 달려 나왔다. 자줏빛 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노파는 아이의 가는 팔을 낚아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순간 류진은 보았다. 노파의 주름진 눈꺼풀 사이에서 번뜩이는 시선을. 그건 풍기대를 향한 경외도,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도 아니었다.
권세혁은 어리둥절해했다.
“우리가 무서운가?”
“아니.”
류진은 그 시선의 이름을 알았다. 적의였다.
“우리를 안 좋아해.”
권세혁이 이유를 물었다. 그의 다갈색 눈을 들여다보며 류진은 한숨을 삼켰다. 어떤 현상의 원인이 단 하나뿐인 경우는 드물었다. 사람의 속은 생각보다 훨씬 난해하고 복잡했다. 그걸 권세혁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회관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노인과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십대로 보이는 학생들도 몇 있었다. 촌장은 마흔 초반의 남자였다. 평균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녹색 볼 캡을 쓰고 그보다 짙은 황갈색 마 셔츠를 차려입었다. 검은 운동화에 진흙이 점점이 튀었다.
류진은 신해범이 풍기 교육대 전원을 대표해서 방문 목적을 밝히고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래 머물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먼 길 오셨는데… 저녁은 하고 가십시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의례적인 말들이 오갔다. 무장을 해제한다면 마을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낸 신해범이 웃으면서 돌아왔다.
그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물론 풍기 대원들은 유도리 있게 행동했다. 겉보기에 눈에 띄지 않는 무기는 꺼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을 쪽에서 젊은 사람 몇몇이 나와 형식에 불과한 신체검사를 했다. 금속 탐지기나 레이저 판독기는 동원되지 않았다.
한 남자가 기우희의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에게 뒤통수를 맞고 물러났다. 그는 대원들의 손에 달걀을 하나씩 쥐여 줬다. 하얀 껍질에 물감으로 빨간 꽃이 그려진 달걀은 몹시 작았다. 권세혁이 류진에게 몸을 기울이고 키득거렸다. 축제 음식인가 봐. 귀엽다.
달걀을 나눠 주던 여성이 고개를 숙였다.
“달구들이 부실해 놔서….”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류진은 권세혁을 노려보았다.
“왜?”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너무해.”
촌장은 흔쾌히 회관 뒷마당을 내 주었다. 그래도 풍기 교육대 주차장에는 비할 수 없어서, 성재경은 좀처럼 주차하지 못하고 후진과 전진을 반복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기우희가 한숨을 쉬었다.
운전병 교대가 이루어졌다. 흙먼지를 날리며 42인승 대형 버스가 가로로 주차됐다.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기우희는 웃지 않았다. 그는 성재경을 데리고 기대마로 다시 올라갔다. 익숙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신해범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류진은 그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에 지폐가 걸려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갔다.
“여기선 카드 결제가 어렵습니다.”
신해범은 그렇게 말하며 권세혁에게 지폐를 건넸다. 류진은 자기도 모르게 신해범을 쳐다봤다.
나도.
나도 용돈….
신해범의 지갑은 그의 바지 주머니로 사라졌다. 류진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기대한 자신의 머리를 팡팡 때려 주고 싶었다. 이 닭대가리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촌장이 단상 앞에 섰다. 형식적인 환영 인사와 설명이 이어졌다.
과거에 천후제는 매년 개최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지역 인구수가 줄고 농번기 수확량이 떨어져 이 년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이따금 온천을 즐기는 관광객이 찾아들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원주민들끼리 소소하게 즐기는 문화였다. 돼지와 닭을 잡아 고기를 나누어 먹고, 작년 이맘때쯤 담가 둔 술을 마시며, 다가올 겨울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한다.
“오늘 선 장에서는 지역의 전통 음식과 기념품을 판매하니….”
음식과 기념품. 신해범에게 용돈을 받은 권세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을 마친 촌장이 군인들을 향해 경례했다. 그 모양새가 제법 절도 있었다. 당연했다. 그도 젊은 시절 군 생활을 했을 테니. 문득 류진은 자기가 군대와는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권세혁 같은 특별 케이스는 아니었다. 고아에게는 군 복무의 의무가 주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촌장의 뒤를 이어 신해범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웅성거리는 주민들을 향해 손뼉을 두 번 쳤다. 이목이 쏠렸다. 마이크가 촌장의 키에 맞춰져 있어, 신해범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하반신을 뒤로 뺀 다음에도 허리를 굽혀야 했다. 그 옹송그린 모양새가 우습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니 신기했다. 류진은 신해범의 뚜렷한 입술을 노려보았다.
“반갑습니다. 풍기 교육대의 신해범 준장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 주민 여러분께서 보여 주신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해범이라면 누구 하나 총으로 쏴 죽이고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룡관 각하께서는 47대 총통의 업적을 기념하고 되새기는 자강 1도 국민들에 각별한 애정을 느끼고 계십니다. 저희가 가져온 음식과 물자를 모든 분께 공평히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더불어, 이 자리에 계신 특별한 분을 소개합니다. 권세혁 왕자님이십니다.”
느닷없이 지목받은 권세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기우희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 말씀 하시지요.”
“제가요?”
“그럼 왕자께서 하셔야지요.”
권세혁은 떠밀리듯 앞으로 나갔다. 신해범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음….”
권세혁은 마이크를 잡았으나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당연했다. 천후제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이십 년을 살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사전 준비 없이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뭐라고 하기는 해야 하는데….
권세혁이 입술을 떼는 순간, 고막을 찢는 잡음이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익!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권세혁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얼굴이 벌게졌다. 신해범이 마이크를 낚아채 사과의 말을 전했다.
“실례했습니다. 모쪼록 여기 계신 주민들께서는 저희 버스 쪽으로 가셔서 보급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은 분들께는 저희가 직접….”
류진은 돌아온 권세혁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응.”
그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내가 좀 긴장했나 봐.”
류진은 분명히 보았다. 권세혁이 입을 떼려는 찰나, 신해범이 늘어진 마이크 줄을 짓밟아 뭉개는 모습을. 하지만 그게 잡음의 원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맞다 한들 증명할 방법도… 없고.
촌장과 몇 마디를 나눈 신해범이 몸을 돌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류진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혹시 속마음을 들킨 건 아닐까 두려웠다. 엄한 사람 의심하지 말라고 주먹 휘두르면 어쩌지?
하지만 신해범은 류진이 아니라 권세혁에게 말을 붙였다. 그의 손가락이 맞은편 계곡 너머, 높이 솟은 성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성이 바로 47대께서 현판을 써 주신 곳입니다. 천후제는 저곳에서 열립니다. 현장에서 돼지와 닭을 잡아 요리한다는데, 저 높은 곳까지 짐승을 데려간다니 대단하군요.”
권세혁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기까지요?”
“그 행위에도 의미가 있는 모양입니다.”
“왜 그런 고생을 사서….”
“기도를 드리고 나면 역술가가 점을 칩니다. 딱히 미래를 예지한다기보다는 고민을 들어 주고 앞으로의 무탈을 빌어 주는 행위입니다.”
권세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점쟁이가 메인이 되는 축제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그건 뭐 믿을 만합니까?”
“근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용한 역술가랍니다.”
권세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신해범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저는 보급품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중간에 빠져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왕자님께선….”
신해범은 손목의 바쉐론 콘스탄틴을 확인했다.
“이십 시에 출발해야 하니, 그전까지만 회관으로 오시면 됩니다.”
“걸어서 가야 해요?”
“피곤하십니까?”
권세혁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만졌다. 사주팔자 같은 건 그다지 관심 없었다. 높은 성까지 걸어서 올라갈 만큼 몸 상태가 좋지도 않았다.
하지만.
류진이 고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천후제는 47대 총통을 기리는 일이었다. 권세혁은 마음을 정했다.
“여덟 시까지죠?”
“예. 고성 가는 길에 장이 서는데, 아까 드린 돈이라면 충분히 주전부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해범이 형은 언제 와요?”
“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신해범의 손이 류진의 머리에 턱, 얹혔다.
“이 친구가 있으니까요.”
“…….”
“난 자네가 있어서 참 든든해, 정 이병.”
신해범은 몸을 돌려 뛰어갔다. 류진은 입을 벌린 채, 뒷마당으로 향하는 신해범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뭐야, 갑자기.
류진은 신해범의 손이 닿았던 머리를 털어 냈다.
“해범이 형 은근히 장난을 잘 쳐.”
“올라갈 거야? 피곤하면 그냥 저기서 쉬어.”
류진이 진압 차량을 가리켰다. 기우희에게 말하면 열어 줄 터였다. 수면제 먹고 잠을 자겠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는 게 자기도 편했다. 하지만 권세혁은 의욕을 보였다.
“아니. 갈래. 구경 가자, 형.”
“네가 기대하는 거랑은 많이 다를 거야.”
날씨가 흐려서만은 아니었다. 광성에서 열리는 축제와 자강의 축제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류진은 출발하기도 전에 걱정스러웠다. 온갖 화려한 것, 좋은 것은 다 보고 살았을 권세혁이 실망할까 봐.
광성에서 열리는 축제의 규모가 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축제의 주목적이 외국인 관광객 유치였다. 신룡관에서 주최하는 덕분에 예산이 넉넉했다. 갖가지 헬륨 풍선이 하늘을 날고, 축포가 터지며, 유명 연예인이 총출동해 무대를 꾸몄다.
밤에는 한층 더 화려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전체 조명이 설치되어 밤이 되면 스카이라인이 황금처럼 번쩍였다. 높이 솟은 마천루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전광판이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야간 불꽃놀이였다. 4인 가족이 10년간 지출하는 생활비를 하룻밤에 탕진한다던가.
그런 기획 행사에 익숙한 권세혁에게, 시골 마을에서의 소소한 축제가 성에 찰 리 만무했다.
“괜찮아. 다 추억이잖아.”
오늘 일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류진은 말없이 앞장섰다. 권세혁이 쫓아와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 벌써부터 음식 냄새 나는 것 같아.”
“뭐 먹고 싶은데?”
“별로 먹고 싶은 건 없는데, 형이 원하는 거 사 줄게.”
류진은 초입에서 만난 노파의 적의 어린 시선을 기억했다.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점점 더 짙어졌다. ‘좋아하지 않는다’와 ‘싫어한다’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쪼록 아무 일도 없었으면….
돌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성재경이 두 사람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인근 온천의 광고지를 내밀며 평범한 관광객 흉내를 내 보이겠다고 자신했다. 얼굴을 가리는 볼 캡, 회색 체크무늬 셔츠, 통 넓은 베이지색 반바지에 슬리퍼. 성재경을 위아래로 훑어본 신해범이 말했다.
“잘 어울린다.”
“감사합니다!”
신해범은 남은 대원들 두 팀으로 나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보급품을 나누어 주는 역할이었다. 인구수도 적은 작은 마을에 유난히 장애인이 많다는 사실을 의아해할 법도 하건만, 대원들은 군말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보급품은 풍기 교육대 자체 생산품이 아닌 사제 식료품과 의류였다.
기우희는 마지막 보급품 상자를 바라보았다. 신해범이 기대마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뭘?”
“대장님 사비로 마련하셨잖습니까.”
“굳이 동네방네 떠들어야 하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치우가 알면 서운해할걸. 지금껏 걔 은행이자 한번 내준 적이 없거든.”
“그런 차원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해범이 웃었다.
“착한 척하고 싶은 거 아냐. 감사하다는 말 듣고 싶지도 않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지. 여기 사람들이 초개처럼 죽어 준 덕분에 우리가 출세했잖아?”
기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신해범의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이 이름 기억하십니까?”
“성씨가 워낙 특이해서.”
신해범은 담배를 떨어뜨리고 군홧발로 짓이겼다. 스트레칭을 하며 앞서가는 그의 뒤에 상자를 챙겨 든 기우희가 따랐다.
신해범과 기우희는 마을 초입, 모서리 땅에 올라앉은 집으로 향했다. 회색 시멘트 벽과 녹슨 슬레이트 지붕이 을씨년스러웠다. 폐가 같았다.
“계십니까?”
대문은 잠겨 있었다. 하지만 세게 흔들면 뜯길 정도로 허술했다. 담장도 낮았다. 172센티미터의 기우희는 충분히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애?”
신해범이 되묻는 찰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찬물 한 바가지가 날아왔다. 날카로운 물벼락이 신해범의 얼굴을 강타했다.
“대장님!”
분개한 기우희가 소리쳤다.
“늙은이가 노망났나!”
신해범은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모습을 정류진이 못 봐서 다행이다.
쇠로 만든 대야를 든 노파는 키가 많이 작았다. 백오십 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였다. 허리가 굽은 탓도 있겠지만 타고난 체구가 자그마했다. 신해범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악담이 날아왔다.
“여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오냐, 우라질 놈!”
“정정하셔서 기쁩니다.”
“이눔이, 이눔이…!”
신해범이 몸을 숙였다. 노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두 팔을 뻗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노파의 몸을 지탱했다.
“이것 안 놓냐?! 산군님이 잡아가도 시원찮을, 이 육시랄 후레자식!”
“예, 맞습니다. 그 육시랄 후레자식 놈이 왔습니다. 빌어먹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찾아봬야지, 봬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제 왔습니다.”
“처 웃지 말어! 뭘 잘했다고 샐샐거리고 염병이여!”
신해범은 웃었다. 쇠로 만든 대야에 머리며, 어깨며 사정없이 얻어맞아도 꿋꿋하게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노파를 걷어찰 기세였던 기우희는 한 발짝 물러나 섰다. 상자를 든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웃지 말라고 하잖여! 니는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으냐?!”
“왜요, 반할 것 같습니까?”
쇠 대야가 하늘을 날았다. 쨍그랑 쨍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신해범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나는 안 속는다 이눔아! 내가 너를 테레비에서 봤는데 으이, 니눔이 우리한테 한 짓은 생각도 않고서 말여, 으이?! 나가 니눔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아주 고약혔는데 그것을 모르고, 더 말할 필요도 없어, 이제 더는 안 속으니께 썩 꺼지그라!”
신해범은 꺼지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노파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이눔이! 이눔이!”
“고만 하소.”
“이눔이…!”
“누가 보면 노망난 줄 알겄소, 할매.”
신해범은 노파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래 사셔야지. 정정하게….”
노파의 어깨 너머, 신해범의 시야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작고 마른 남자아이였다. 반쯤 열린 방문을 통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아이의 몸은 이쪽을 향했으나 시선은 허공을 떠돌았다. 아이 무릎의 시각 장애인용 케인이 눈에 띄었다. 장애 등급을 인정받아 동사무소에서 지급받았을 물건이었다.
노파의 거칠고 주름진 손이 신해범의 등을 토닥거렸다. 마디가 불거지다 못해 반지 하나를 낀 것처럼 두꺼워진 손가락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헤치고 귀를 만졌다. 살점이 뜯겨나가 모양이 변형된 왼쪽 귀였다.
“사방 천지 험한 줄 모르고 설쳐 싸더니만….”
“할매 시력도 좋소. 앞으로 백 년은 더 사시는 거 아닙니까?”
“흰소리 말어!”
신해범은 킬킬 웃었다. 그를 실컷 두드려 팬 노파의 시선이 신해범의 어깨 너머 보급품 상자를 들고 있던 기우희에게 향했다. 날 선 눈빛.
“저, 저…!”
미소 띤 신해범이 물었다.
“저 친구 기억하십니까? 기우희 이병. 지금은 소령까지 달았습니다.”
노파의 손가락이 기우희의 미간을 똑바로 겨냥했다.
“저 싹퉁바가지 없는 년!”
신해범이 박장대소했다. 기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했다.
기우희는 지금보다 젊었던 노파의 얼굴을 떠올렸다. 광성에서 온 젊은것들 정신 교육을 시켜 주겠다며 뱀술을 억지로 먹이려 하기에 항아리를 깨부쉈다. 그랬더니 물어내라며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써 댔다.
그래서 보상했느냐고?
천만에.
기우희는 총을 꺼내 장전했다.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파는 뜻밖의 반응으로 기우희를 감동시켰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사내들 불알을 죄 밟아 터뜨릴 년, 이라고 했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노파의 머리를 날려 버리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무슨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하느냐고 혀를 찼지만, 기우희는 그 표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기우희는 마루에 보급품 상자를 내려놓았다. 시멘트 벽에 금이 가 있었다. 방 안의 어린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예요?”
“…….”
“군인들이에요?”
“상대방이 누군지 궁금할 땐 네 소개를 먼저 해야지. 넌 이름이 뭐냐?”
“묘정훈이요.”
“난 기우희.”
“저 아저씨는요?”
“신해범 대장님이시다.”
“높은 사람이에요?”
“그래.”
“…….”
“넌 우리 기억 못 하나?”
“뭐를요?”
기우희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 물자 그 모습을 본 노파가 게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신해범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저년 폐 썩어 뒈지겠다!”
“할매보다 오래 살 거니까 신경 끄쇼.”
기우희가 노파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담배를 꼬나문 입술은 웃고 있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목마다 좌판이 있었다. 포장마차 형태의 간이음식점도 눈에 띄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불이 켜졌다. 류진은 자꾸만 팔짱을 끼어 오는 권세혁을 밀어냈다.
“왜 이래.”
“같이 가자.”
“같이 가고 있잖아. 왜 이렇게 달라붙어, 귀찮게.”
“무섭단 말이야.”
“지랄한다. 등치는 산만 한 게 뭐가 무섭냐?”
“길 잃어버리면 어떡해. 나 휴대폰 차에 두고 왔어.”
“잘한다. 자기가 오자고 해 놓고선.”
권세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히히, 인지 헤헤, 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참 어린애 같은 웃음소리였다. 류진은 입술을 삐죽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고소한 냄새, 단 냄새, 짜고 매운 냄새….
“형 왜 자꾸 킁킁거려? 강아지 같아.”
“조용히 해라.”
“뭔 말도 못 하게 해.”
“주둥이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지금 형이 날 가르치는 거야?”
“왜, 그럼 안 되냐?”
류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때 운명처럼 시야에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류진은 권세혁을 끌고 좌판으로 다가갔다.
주먹만 한 나무 인형이었다. 새, 토끼, 강아지, 코끼리 모양으로 깎아 알록달록한 물감을 칠하고 니스를 발랐다. 류진은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꼬리를 말고 엎드려 자는 강아지 인형이 눈에 띄었다.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허락을 구했다.
“만져 봐도 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 노란 티셔츠. 청바지 아래의 하얀 운동화가 깨끗했다. 오늘을 위해 깨끗하게 차려입었음이 분명했다.
“고마워.”
좌판에는 나무 인형 말고도 여러 수공예품이 있었다.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와 팔찌, 명주실로 짜 만든 천 가방, 가장자리에 꽃과 나비 자수가 놓인 손수건.
류진은 잠자코 강아지 인형을 들여다보았다. 호월루의 백구를 닮았다.
“마음에 들면 사.”
권세혁은 당장이라도 지폐를 꺼낼 기세였다. 류진이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좀 보고.”
“아, 알았어.”
권세혁이 류진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같이 구경하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었다. 권세혁은 어릴 때부터 장난감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었다. 방구석에 들어앉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로봇이나 미니카를 굴리는 것보다 동네 골목대장 노릇이 훨씬 재밌었다. 동생은 달랐다.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각종 장난감에 둘러싸여 지냈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모든 장난감을 가졌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장난감은 유행이 빠른 상품이었다. 그만큼 기술의 발전도 굉장해서, 권무혁은 벌써부터 원격 조정 드론에 관심이 있었다. 헐리웃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나오는 로봇들을 척척 조립해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래도 조잡하지. 권세혁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류진에게 말을 붙였다.
“사 줄게. 마음에 드는 거 다 골라.”
“네 돈이냐?”
“해범이 형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데. 따지고 보면 내 돈이나 다름없지.”
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신해범을 위하는 건 아니지만, 권세혁의 해괴한 논리가 더 이상했다. 그렇게 따지면 이 나라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부 왕족의 노예였다.
“…….”
“류진이 형? 왜 그래?”
아….
그런가.
류진은 강아지 인형을 내려놓았다.
“미안해. 다음에 살게.”
“갠찮해요.”
권세혁이 후다닥 쫓아왔다. 그는 습관처럼 류진의 팔을 낚아채려다, 붕대 감은 손을 보고는 어깨를 잡았다.
“왜 인형 안 사?”
“필요 없어. 어차피 다 짐이야.”
“그래도 마음에 들었잖아.”
“아냐. 그냥 뭔가 싶어서 본 거야.”
“아닌 것 같은데….”
앞서가던 류진이 버럭 소리쳤다.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왜 갑자기 소릴 질러?”
두 사람은 오십 센티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류진이었다.
“네가 한 말을 자꾸 반복하게 하니까.”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류진은 한숨을 내쉬고, 멀뚱히 서 있는 권세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직 더 올라가야 돼.”
“응.”
“머리 아프진 않아?”
“아직 괜찮아. 버틸 만해.”
버틸 만하다는 건 통증이 있다는 뜻이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노파는 굽은 허리로 커피를 내왔다. 신해범이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완제 인스턴트커피였다. 광성에서는 흔해 빠졌지만, 이런 시골에서는 귀한 물자였다. 신해범은 물을 많이 넣어서 밍밍한 커피를 천계의 생명수라도 되는 양 꿀꺽꿀꺽 마셨다. 낡아서 이가 빠진 도자기 컵을 바닥에 탁, 내려놓은 그가 웃었다.
“저 알고 왔습니다.”
“무어를.”
“대마밭이요.”
기우희는 보급품 상자에서 과자 봉지를 꺼냈다. 아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에서 과자 봉지 뜯는 소리, 오도독오도독 깨물어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파는 신해범의 눈을 피했다.
“먼 소린지 몰것다.”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그래가 왔나?”
“제 선에서 보고가 올라가는 걸 막았습니다.”
“…….”
“어르신.”
노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고쟁이 안에서 자그마한 담배 파이프를 꺼내 물었다. 신해범은 파이프에 욱여넣은 잎이 담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여 아들 그렇게 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겠나.”
노파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산업용 대마가 아니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한다 한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환각 성분이 없는 대마라면 진즉 재배 허가를 받아 유통, 판매가 이루어졌을 터였다. 합법적으로.
신해범은 닫힌 방문을 곁눈질했다.
“아이는 언제부터 저랬습니까?”
노파의 부르튼 입술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오훼이 소대가 떠난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아이의 어머니와 누나가 있었다. 아이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누군가의 시체 밑에 깔려서 살아남았다.
노파는 마가목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주름진 눈꺼풀을 깜박였다. 놈들이 처음 의도한 대로 시체 더미에 불을 질렀다면 저 아이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양민들이 떼거지로 죽어 나간 참사 현장이었다.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어른 중 절반은 이곳을 떠났고, 나머지는 고향을 재건하기 위해 힘썼다.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세상의 이목은 총통의 명령을 수행하고 직할시로 돌아온 귀환 용사들에 쏠려 있었다. 이미 끝난 작전지의 남은 사람들은 관심 밖이었다. 신해범은 재판소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만 어린 대원의 이야기를 쏟아 냈다. 부관의 치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이들은 상이군인이 아니었다.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정신적 후유증은 군에서 명시하는 금전적 보상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총통이 내린 포상금은 최금호를 비롯한 헌병대 간부들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신해범은 살고 싶었다. 권일혁이 국민 복지 제도를 철폐한 이후 의료 수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약물을 이용한 자가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소대원들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해도 잠들지 못했다. 보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그러나 의사를 만나는 데에는 돈이 들었다. 많이 필요했다.
불행을 팔면 돈이 됐다.
불행을 팔아서 살아남았다.
기자 회견에 나가 눈물로 호소했다. 신해범은 자기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만 불쌍하게 생각하고 계좌 이체나 빨리빨리 하라고 생각했다. 모금함이 도시 변두리의 초등학교까지 돌았다.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기부를 독려했다. 신해범은 그때 분명히 깨달았다. 대중이 무엇에 흔들리는지.
동정을 구걸하는 일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아무리 고개 숙여도 피할 수 없는 비난과 의심 앞에서 자존심은 무너지고 마음은 황폐화됐다. 한마디로 좆같았다.
그것도 여기 남은 사람들보다는 사정이 좋았던 것 같다. 신해범은 노파의 어두운 눈을 응시했다. 노파는 파이프로 방문을 가리키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오래 아팠어. 아주 열이 펄펄 끓었어.”
“…….”
“아가 헛것을 보는지, 자꾸 헛소리를 하고….”
노파는 아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하지만 아이는 살아남았다. 이듬해 봄이었다. 겨우내 쏟아진 눈이 녹고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기 시작했을 때, 아이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으나 이미 눈앞은 흐렸다.
부랴부랴 산 아래 보건소로 아이를 데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별다른 치료는 받지 못했다. 도시의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신해범은 노파가 든 파이프를 바라보았다. 지옥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다양했다. 불행을 팔아 증오를 삼키기도 하고, 눈을 완전히 감아 버리기도 하고.
환각에 의지하여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말 없는 신해범을 향해 노파가 물었다.
“어쩔 것이냐.”
“태워야 합니다.”
신해범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이백 평 부지에 대마잎이 빼곡합니다. 위성 사진으로 확인했으니 변명일랑 마십시오.”
“…….”
“너무 무모하지 않습니까? 대체 언제까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발각됐을 때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큰 책임을 물게 될지, 그 부분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
“풍기대가 온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 헌병대가 나섰으면 조사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그냥 밀고 들어와서 불태울 겁니다. 밭이든 민가든.”
“…….”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대마밭은 태울 겁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그거이 원칙이 다 뭐란 말이냐, 이눔아!”
노파가 내던진 파이프가 신해범의 가슴팍을 때리고 떨어졌다.
“니눔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신해범은 씩씩대는 노파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노파가 던진 파이프를 집어 먼지를 털어 내고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능한 변명은 하나뿐입니다. 산지에서 자생한 대마를 산업용으로 인지하여 재배한 겁니다. 단순 생계유지를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래도 재배 허가를 받지 않은 부분에 대한 책임은 피하기 어렵겠지만, 촌구석 무지렁이 취급받는 게 총살보단 나을 겁니다.”
“이눔이 그래도!”
“거래 기록을 만들 만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촌장과 따로 얘기하지요. 그래도 제법 말이 통하는 사람 같아서 다행입니다. 제 얼굴에 침이나 튀겨 대는 노인네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신해범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흥분한 노파가 목뒤를 잡고 넘어가기 전에. 목 안에서 끓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면서.
기우희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써 대는 노파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낡은 대문이 흔들렸다. 녹슨 이음매가 부딪히는 소리가 꼭 귀신의 울음소리 같았다.
권세혁은 부득불 먹을거리를 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류진은 도처에 널린 군것질거리를 전부 거절했다. 대신 말린 마가목 열매를 샀다. 차로 달여 마시면 기관지에 좋았다.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해 주는 효과도 있었다.
“정말 효과 있어?”
권세혁은 흔쾌히 값을 지불하고도 미심쩍어했다.
“글쎄. 먹어 보면 알겠지.”
“나 해 줄 거야?”
“돌았냐? 넘보지 마라.”
“나 해 줄 거면서. 나는 형 마음 다 알지요.”
“마음 접어라.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축제 분위기가 났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며 어렴풋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그래? 난 좀 쌀쌀한데.”
류진이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걸어. 그러면 땀나서 괜찮아져.”
하지만 권세혁은 자꾸 한눈을 팔았다. 입맛도 없으면서 자꾸만 뭔가를 사 먹으려고, 아니 류진에게 먹이려고 들었다. 세 발짝 걷고 일 분 쉬고, 다섯 걸음 걷고 삼 분 쉬어 가는 격이었다. 권세혁은 오르막길을 힘들어했고 숨차 했다. 류진은 내가 신해범만큼 체격이 되었다면 업고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권세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에 다다랐다. 신기하게도 정상에 다다르자 안개가 걷혔다.
둥, 둥,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아리가 되어서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하얀 고깔모자를 쓴 젊은 여자였다. 종이로 접어 만든 모자 밑으로 늘어진 검은 머리 타래가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흔들렸다.
양손을 모아 쥔 여자는 기도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엄숙하기보다는 우아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류진은 내리바람에 몸을 맡긴 채 기도를 올리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웠다.
자림산성(自林山城) 네 글자가 적힌 현판 아래 각종 먹거리를 올린 커다란 음식상이 있었다. 여자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 앞으로 나아갔다. 희디흰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을 모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모든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거리가 멀어서. 난타에 가까운 북소리도 점점 커져서 마지막에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입 모양을 관찰한 바, 다가올 겨울을 무사히 보내도록 천후께서 보살펴 달라는 내용 같았다.
“멋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권세혁이었다.
주위의 자연 경관이 한몫했다. 길고 곧게 뻗은 마가목 가지와 산등성이에 걸린 안개, 깎아지른 듯 아찔한 절벽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었다. 왜 이곳에서 행사를 진행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분위기가 되니까.
여자의 기도가 끝났다. 북소리도 멎었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즐거이 음식을 나눠 먹었다. 권세혁은 구태여 그 자리에 끼지 않았다. 돌담에 등을 기댄 채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쓰였을 낡은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들꽃을 엮어 만든 화관을 쓴 아이들이 류진의 시야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하나였다. 남매일까, 친구일까. 아이들이 많지 않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눈에 확 띄었다.
“형, 나… 천천히 구해 줘도 될 것 같아.”
“뭘?”
“덱시.”
류진은 권세혁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현판에 못 박혀 있었다.
“왜, 마음 바뀌었어? 딴 거로 알아봐 줘?”
“그건 아니고.”
권세혁은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은 아까부터 머리 아팠어. 목도 마르고, 춥고. 근데 형이랑 있으니까 이상하게 버틸 만하거든?”
“그건 소령님이 주신 약 때문이잖아.”
“아냐. 내 생각엔 플라시보 효과 같아.”
“뭐?”
“플라시보 효과. 형 이런 것도 몰라?”
“알아. 아는데, 뜬금없이 웬 플라시보 효과?”
“뜬금없지 않아. 난 왠지 형이랑 있으면 괜찮은 것 같아.”
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형 손 줘 봐.”
“왜?”
방어적인 류진을 바라보는 권세혁의 갈색 눈동자에 서글픔이 어렸다.
“나쁜 짓 안 해. 그냥 손 좀 줘 봐.”
“…….”
류진은 머뭇머뭇 오른손을 내밀었다. 붕대 감은 손등이 권세혁의 뺨에 닿았다. 그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이랬다는 게 안 믿겨.”
“발뺌하기냐?!”
“그런 거 아냐.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어. 그냥 나는… 내가….”
권세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형을 괴롭힌 사람들이랑 똑같은 것 같아서.”
함풍에서의 일을 말하는 듯싶었다. 함영재와 그 패거리들.
싫은 기억이 떠올라 머리를 흔들자, 권세혁이 류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
“미, 미안! 아파?!”
“…됐어. 놔.”
“조금만 더 잡고 있을게.”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너는 정말 모르느냐는 말이 턱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 인생을 망쳐 놓은 원흉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의 너를 만들고, 지탱하는 권력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집안에서 세뇌당하며 철저하게 총통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 무자비한 방식을 합리화하는 교육과 환경에 노출되지 않고서야.
세뇌?
류진은 권세혁을 올려다봤다. 붙잡힌 손이 뜨끈뜨끈했다.
“왜, 형?”
권세혁이 활짝 웃었다. 풍기대에서 출발한 뒤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자림산성의 낡은 현판이 보였다.
“뭐야. 왜 갑자기 사람을 놀란 눈으로 봐.”
“아냐.”
류진은 고개를 저었다. 권세혁이 어릴 적부터 왕가의 권폭을 합리화하는 환경에 노출되어서 그렇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권세혁의 잘못된 가치관에 합당한 이유를 부여할 뿐이었다.
하지만….
류진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권세혁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과 신해범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범이 형이 그러는데 저 현판, 옛날에 우리 증조모님이 써 주셨대. 자림산성. 난 여기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기억한다는 게, 고마워한다는 게 너무 신기해.”
류진은 눈을 내리깔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툭 찼다.
“그게 실감이 나? 너랑 난 태어나지도 않았을 땐데?”
“응. 느껴지는 게 있어.”
“대체 뭐가?”
“47대 집권 시절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상업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기거든.”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신해범이 없으니 권세혁이 역사 선생 노릇을 하려 들었다. 류진은 궁금했다. 왜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남을 가르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뿐일까?
“그래서 뭐 어쨌다고.”
“난 증조모님 같은 군주가 되고 싶어.”
“…….”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는 거 알아. 친족 살인이 죄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있잖아, 증조모님 대에서 악법들이 많이 사라졌어. 일부다처제나 호주제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거, 그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
언뜻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러나 전례 없는 대기근 시대의 막을 올린 권일혁 또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권숙빈을 꼽았다. 그가 살아생전 강력한 왕권을 누렸기 때문에. 국가의 권력이 오롯이 신룡관에 집중된 시기였기 때문에. 그리고… 한 나라의 왕자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겠지만,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했다는 사실도 권세혁에게는 매력적으로 비칠 터였다. 그런 사람의 피가 자신의 혈관에 흐른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리라.
“드라마 <신국 천후 전기>, 나는 끝까지 못 봤는데 되게 인기 있었잖아. 나중에 내 얘기도 드라마로 만들어질까?”
류진은 돌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때려치워.”
“뭐?”
“겨우 그런 마음가짐이면 때려치우라고. 드라마 실존 인물 되고 싶어서 총통 하냐?”
권세혁이 류진을 쳐다봤다.
“무슨 반응이 그래?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너랑 47대 공통점이 뭔데? 왕족이라는 것 말고.”
권세혁은 멍하니 눈을 굴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류진은 권세혁의 다갈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너 예전에 대장님도 닮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서 풍기대 오는 거 좋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뭐 배운 거 있어?”
“나랑 해범이 형 비교하지 마. 애초에 우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비교하지 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환경이 달라?”
“그렇잖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권세혁은 한숨을 쉬고 귓등을 긁었다.
“형은 별걸 가지고 다 트집 잡는다.”
참았던 화가 터져 나왔다. 아까부터, 아니 며칠 동안,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류진은 줄곧 참았다. 권세혁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가 천성이 글러 먹은 인간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권세혁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을 적재적소에 써먹기도 했다. 하지만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맞서야 하는 순간에는 몸을 낮추고 약자 행세를 하려 들었다. 난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주변에서 내가 스스로 뭔가를 하도록 내버려 두질 않으니까.
“너 말이야. 사실은 누구를 닮고 싶은 게 아니지? 부러워서 질투 나는데 그렇다고 말하면 쪽팔리니까 대충 듣기 좋게 말하는 거지?”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권세혁이 느끼는 열등감은, 단순히 누나와 비교될 미래가 두려워 감히 도전하지 않았던 류진의 것보다 훨씬 더 질이 나빴다.
권세혁은 상대를 기만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으면서. 권력이든 뭐든 휘둘러서 짓밟고 깔아뭉갤 수 있으면서 나는 그런 치사한 짓 하지 않는다고, 질투하는 게 아니라 존경할 뿐이라고 점잖은 체를 했다. 참으로 고결한 마음가짐이었다. 과연 일국의 왕자님다운 품위였다. 그래서 더 위장이 뒤틀렸다.
“형, 갑자기 왜 화내는 거야? 내가 무슨 말을 그렇게 잘못했는데?”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류진은 자신과 권세혁이 군복 차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됐다. 다 봤으면 내려가자.”
“아직 안 끝났어. 이따가 점도 봐 준다는데 그거 보고 가.”
“너 그런 것도 믿었냐?”
“믿는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기껏 올라왔는데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해 보는 게 좋잖아. 우리가 여기 내후년에 또 온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어?”
“점은 너 혼자 실컷 봐. 난 간다.”
권세혁이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형!”
“소리 지르지 마. 찌라시 주인공 되고 싶어?”
“그 정도로 신경 안 써도 돼.”
“넌 괜찮겠지. 널 지켜 줄 사람들은 널렸으니까. 그런데 난 안 괜찮아.”
권세혁이 입술이 꾹 다물렸다. 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류진은 지금 그가 화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라면 사과했을 터였다. 진심이든 아니든. 하지만 지금은 그러기 싫었다. 같은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네가 나라면.
내가 너라면.
적어도 난,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기만하지는 않을 거라고.
적어도 나라면….
류진의 등 뒤에서 권세혁이 소리쳤다.
“형은 날 무안 주는 게 재밌어?!”
“…….”
“아까도 그랬지, 파전 먹을 때 대원들 앞에서. 내가 주는 거 무시하고 불러도 모르는 척하고. 날 위해서였다고는 하지 마. 내가 누굴 편애하든 말든 그건 남들이 상관할 게 아니야. 내가 내 사람 챙기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해? 원래 다들 그렇게 해. 그래서 기를 쓰고 잘될 것 같은 사람이랑 가까워지려고, 그 사람 눈에 띄려고 애쓰는 거야.”
“…….”
“그거 부끄러운 일 아냐. 나도 처음엔 민망했는데 겪어 보니까 알겠더라. 나도 사람인데,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한테 떡 하나라도 더 주고 싶지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한테 뭐 해 주고 싶겠어?!”
류진의 입술 사이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말을 당당하게 잘한다, 너.”
“뭐라고?”
“아주 밑바닥을 보여 주네.”
류진은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마가목 열매를 담은 반투명한 비닐봉지가 흔들렸다.
권세혁은 류진의 뒤를 쫓아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왔던 돌계단을 처참한 기분으로 서너 개씩 뛰어 내려갔다. 행사 막바지라 그런지 더는 올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모퉁이를 돌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권세혁이 소리쳤다.
“형이 이쪽 바닥을 몰라서 그래!”
나아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류진은 몸을 돌리고 냅다 쏘아붙였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냐?!”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류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너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야?”
“뭐라고?”
“총통이 되고 싶어?”
몸속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권세혁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형은 내가 멍청이 호구로 보이나 봐.”
“말해 봐. 총통이 되고 싶으냐고.”
“그럼! 그럼 내가 총통 할 생각도 없으면서 숙부님 광대 노릇 하겠어?!”
권세혁이 발을 구르자 성벽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놀라 날아갔다.
“넌 네가 총통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 거 묻는 저의가 뭐야?”
“궁금해서 그래. 내 눈엔 너, 도저히 신해범 대장이나 47대 총통이랑은 비슷한 구석이 없거든.”
권세혁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평소에는 살짝 처져서 웃으면 더할 나위 없이 순해 보이던 눈매가 돌연 살벌해졌다. 류진은 그가 양 주먹을 움켜쥐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다고 무서워하지 않는다. 류진은 턱을 쳐들었다.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해낸 거 있어? 누가 시켜서 말고, 도와준 거 말고, 일부러 양보해 준 거 말고. 네가 정말 간절하게 원해서, 이거 아니면 진짜 죽겠다 싶어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매달려 본 적이 있어?”
권세혁은 이로 씹어서 붉어진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도 날 몰라서 그런 소릴 해?”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태어났어도!”
류진이 소리쳤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다 널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일고여덟 살짜리 애새끼도 아니고 스물이나 처먹었으면, 남들 못 받는 좋은 교육 받으면서 그만큼 대가리 컸으면, 어지간히 둔한 새끼라도 뭐 하나는 해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함부로 말하지 마!”
권세혁이 다가왔다. 당장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류진이 밉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은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지… 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알기나 해? 뭘 하려고 할 때마다 가로막히는 기분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가로막히는 기분….
류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권세혁이 험악한 얼굴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웃어?”
“그래서 꼭두각시로 사냐? 겨우 그런 게 무서워서?”
“기준은 전부 다른 거야. 형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도 나한테는….”
“그럼 나는! 네 눈에 나는 어떻게 사는 것 같은데?!”
류진은 비닐봉지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너 내 얘기 들었잖아. 그래서 화냈잖아! 복수해 주겠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지금 가고 있잖아!”
“그런데 넌 왜 하나도 변한 게 없냐고!”
“뭐?”
“넌 왜 그대로냐고.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는 것만 그럴듯하지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꿈속에서 살 거냐?”
류진은 자기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벽에 대고 말하는 막막함은 둘째 치고, 권세혁에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류진은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권세혁을 끝까지 어리고, 철없고, 아둔한 멍청이로 만드는 게 신해범의 목표이자 신해범에게 협력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입이 멈추지 않았다.
“내 고향 일 알고서도 느낀 거 없지?”
“형.”
“사실은 총통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지? 정치 같은 거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 그냥 시켜 준다니까 얼씨구나 해 보겠습니다, 하는 거지?”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어.”
“겨우 이 정도로 화가 나면 어떡하냐? 앞으로 네가 만날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권세혁은 고개를 숙였다.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가득했다.
“형 지금 스트레스 받아서 이러는 거 알아. 무섭다는 거 이해해. 그러니까 나한테 화풀이해도 괜찮아. 그래도 한 가지만 지켜 줘. 나한테 목표가 없다느니,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나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처받아.”
류진이 울먹였다.
“네가 왜 화가 나는지 알려 줄까? 찔려서 그래.”
“형… 제발 좀.”
눈을 질끈 감은 권세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 화나게 만들지 마.”
“인정할 건 인정해, 권세혁.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은 맞는 말을 들었을 때 화를 내. 왜냐면 인정하기 싫으니까. 부정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니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류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딱 한 시간이라도 괜찮았다. 권세혁이 꿈결 같은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할 때, 늘 그랬듯이 대충 장단이나 맞춰 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축제 분위기를 망칠 이유도, 딱딱한 맨바닥에 쭈그리고 앉을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기분이 비참하지도 않을 터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권세혁이 비닐봉지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흩어진 마가목 열매를 주워 담았다.
“…하지 마.”
“…….”
“야! 하지 말라고!”
“형이 지금까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겠어.”
권세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매를 주웠다. 비닐봉지를 어찌나 세게 팽개쳤는지, 말린 열매가 뭉개진 것도 있었다.
“형.”
그는 류진의 머리 위를 맴도는 날벌레를 손으로 쫓아냈다.
“형이 내 옆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겠어.”
날벌레를 쫓던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마.”
“내가 얼마나 미웠어?”
“…….”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
무릎 사이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샜다.
“그렇게 말하지 마. 하나도 안 불쌍해.”
“응.”
“…….”
“일어나자. 이런 데 앉아 있으면 안 좋아. 이제 사람들도 내려올 거고, 해범이 형이 여덟 시까지 오라고 했으니까… 좀 일찍 가도 되겠지. 차에서 기다리면 되니까.”
류진은 치미는 설움을 몸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바닥을 털고 일어나 섰다. 권세혁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손등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걸었다. 류진의 등 뒤에서 권세혁이 말했다.
“형, 내가 함영재 죽여 주면 얼마나 용서해 줄 수 있어? 지금 미워하는 마음의 절반 정도는 없앨 수 있어?”
“…….”
“반의반?”
“…….”
“반의, 반의반?”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질문이 터무니없거나 권세혁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류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권세혁.”
“형?”
“저기 봐.”
자림산성 맞은편 산등성, 동쪽의 높은 봉우리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청회색 하늘을 덮은 먹색 연기는 습기를 흠뻑 머금은 장마철의 비구름 같았다.
산불이었다.
“뭐야?!”
권세혁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위쪽에 있던 사람들도 저마다 몸을 내밀고 손을 뻗어 연기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사람들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권세혁은 류진의 손을 꽉 잡았다.
“빨리 가자.”
“저길 가겠다고?!”
“아니, 설마.”
권세혁이 뛰기 시작했다. 류진은 엉겁결에 따라 달렸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마을 회관으로 갈 거야. 우리 차 주차한 데.”
“가서 어떡할 건데?”
“풍기대에 알려야지. 연기가 저 정도면 규모가 꽤 큰 거야. 우리 올 때 길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소방차 못 들어오고, 헬기 뜨려면 오래 걸려. 여기 주민들끼리는 수습 못 해.”
우리가 도와줘야 해. 권세혁이 말했다.
촌장을 설득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전에 한차례 현지 조사가 있었다. 촌장은 자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주민들을 물린 뒤 신해범과 기우희를 마을 회관 안으로 들였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온 것 같았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역경에 수수료를 떼어 주기로 했습니다.”
“비율은?”
“사십 퍼센트.”
부패 관리의 정석이었다. 그마저도 신해범이 알게 되었으니 결국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셈이었다. 이유라면 짐작이 갔다. 지역경 내부에서 마찰이 있었을 것이다. 사십 퍼센트를 몇 대 몇으로 나누느냐, 의견이 분분한 와중에 자기 몫에 불만을 가진 자가 있었으리라.
신해범은 촌장에게 담배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를 겁내지 않는군.”
말이 짧아졌다. 더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으니까. 촌장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죽이거나 체포할 생각이셨다면 보급품은 뭣 하러 주셨겠습니까.”
“생색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준장님에 대해서라면 저도 압니다. 비록 그 사건 당시에는 제가 고향에 없었지만….”
“어디에 있었나?”
“장진에 가 있었습니다. 조선소 취직이 되어서요.”
촌장의 목소리에 묻어나던 항구 도시 억양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분명 표준어로 이야기하지만, 자강과 장진 두 지역의 특색이 묻어나는 독특한 억양을 가졌다.
항구 도시 장진은 광성에서 지정한 첫 번째 경제특구였다. 급격한 개발 과정을 거치며 인구가 많이 유입되었다. 오늘날 장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네 가지 언어를 습득한다는 농담도 있었다. 표준어, 원주민의 항구 도시 방언, 일거리를 찾아 내려왔다가 정착한 타 지역민들의 방언, 그리고 해외 노동자들의 외국어.
뚜렷하고 정확한 표준어 발음을 구사하는 권세혁이 특별한 경우였다. 연필 물고 열심히 연습했겠지.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노모께서 생존하셨고, 또….”
촌장은 말끝을 흐렸지만 신해범은 눈치챘다. 외지에서 자리를 잡았고,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의 성인이 구태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책임져야 할 가족.
“제 처도 살았습니다.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지만요.”
“운이 좋았군.”
“하늘이 도왔지요. 적어도 저는 말입니다.”
신해범은 촌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확실히 이 남자는 운이 좋았다. 조폭들이 사제 기관총을 으다다다 갈겨 대던 아비규환의 지옥도에서 노모와 처가 둘 다 살아남았으니, 행운의 사나이라고 할 만했다.
다만 촌장은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자식 한둘은 충분히 있을 법한 나이임에도.
“자초지종은 생략하지. 우린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일행 중에 천방지축 날뛰는 망아지 새끼도 하나 있고.”
“…….”
“대마밭에 불을 질러. 모조리 태워서 없애 버려.”
“그건…!”
“지역경은 자네 편이 아니야. 판매 금액을 떼어 주는 걸로 회유했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지금 내가 여기 있잖아. 내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아. 풍기 교육대 위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중앙 헌병대. 신룡관. 권일혁 총통. 촌장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때.”
신해범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았다.
“이렇게 친절한 공무원이 어디 있어.”
“준장님, 그건 저희…!”
“마을의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래도 말이야, 저기 모서리 판잣집에 사는 눈먼 꼬맹이까지 싸그리 마약 사범으로 몰려 총살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래도 저희는!”
“겪지는 못했지만 몸소 마을을 재건했으니 알겠지. 민간인 학살이 어떤 건지. 그런 건 한번 겪었으니 다음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처음부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참사지. 하물며 두 번씩은, 아냐. 그건 정말로 아니야.”
“저희 거래처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신해범이 코웃음 쳤다.
“거래처? 동네 양아치 갱단이 무슨 거래처. 지역경이 왔을 때 그놈들이 나서던가? 어떤 조치를 취해 준 게 있어? 그들이 여길 소중한 공급책이라고 생각했다면 진즉에 나섰어야 해. 하다못해 사과 박스라도 가지고 윗선에 비비러 갔겠지.”
“…….”
“자네 편은 갱단도, 지역경도 아니야. 그렇다고 풍기대도 아니야. 원래 관리라는 놈들은 믿을 게 못 돼.”
신해범은 노파에게 해 준 말을 되풀이했다. 태워도 땅에는 대마 성분이 남는다. 증거를 채취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니 만약에 대비해 사전에 말을 맞춰 두는 게 중요하다. 산업용 대마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거래 기록도 필요하다.
신해범은 그 일을 호월루에 부탁할 참이었다. 신예나 정도의 인맥이라면 경제특구에 위치한 유령회사 하나쯤은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원래 돈세탁은 그렇게 하는 거니까.
“태워.”
신해범은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우리 망아지가 알기 전에.”
촌장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도 이게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신해범은 자기 목을 걸고 자강 1도의 죄를 덮어 주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우리가 도와주지.”
“…예.”
“그래서 어때, 내 설계 실력이?”
“예?”
뜬금없는 질문에 촌장의 눈이 커졌다. 신해범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건이 접수되는 순간 인터넷에 뜨는 게 상식인 세상에서, 그렇지 않다는 건 정보 통제가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방증이지. 어떤가. 내 정보 통제 실력이. 적림부도 멋지게 속여 넘길 것 같지 않나?”
기우희가 나서서 신해범을 막았다.
“대장님.”
“알아.”
신해범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였다. 그는 담뱃갑을 통째로 촌장에게 넘겨주며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태양이 산등성에 걸렸다. 낙조가 청회색 하늘을 밀어내고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타오르는 여름 노을과 산불로 인한 연기가 전시 상황 같았다. 당장이라도 서쪽 하늘에서 두다다다, 소리를 내며 전투기가 날아올 것만 같았다. 공습과 폭격.
권세혁은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목구멍에서 피거품이 끓었다. 기침을 토해 내자 정말로 타액에 피가 섞여 나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가 구멍 난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거듭된 듀스에도 끄떡없었던 몸이 파도 맞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흙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권세혁을 류진의 마른 몸이 지탱했다.
“앉지 마. 못 일어나니까… 이제 다 왔어.”
류진은 권세혁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다 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산기슭 너머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다. 풍기 교육대 차량이 주차된 마을 회관이 불과 삼백 미터 앞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두 사람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도착했을 때, 풍기 교육대는 철수 준비에 한창이었다. 류진과 권세혁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서지운이었다. 지마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그는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권세혁을 발견하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게 무슨….”
멀리서 신해범이 다가왔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는 권세혁을 부축했다. 권세혁은 오한이 심해 치아를 딱딱 부딪치면서도 산불이 났다고 말했다. 신해범이 하얀 수건으로 권세혁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산불이 아니라 화전입니다. 원주민들이 경작지를 만드는 거고, 곧 불을 끌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화전이요? 하지만 저렇게 연기가 많이 나는데.”
“낙엽이라도 태우는 모양이지요. 이곳 사람들 일이니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 그보다 왕자님, 몸이….”
한여름에 화전이라니. 낙엽을 태운다니. 물론 권세혁에게는 일일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버도스 증상이었다. 그는 신해범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진압 차량으로 들어갔다. 기우희가 두통약과 수면제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생수 뚜껑을 따는 류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신해범은 류진의 손에서 생수병을 빼앗아 들었다.
“자네는 앉아. 출발할 테니까.”
“하지만….”
“앉아, 정 이병.”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안전 바를 내렸다. 손목에 뭔가가 매달려 있어서 쳐다보니 마가목 열매가 담긴 비닐봉지였다.
류진은 피부에 선명한 봉지 자국을 만지며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을 반쯤 뜬 그도 류진을 보고 있었다.
“……”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신해범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온 건 담배가 아니었다. 신문지로 둘둘 말아 언뜻 담배처럼 보이게 만든 대마였다.
권세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신해범이 그의 부르튼 입술 사이에 대마를 물리고 라이터를 꺼냈다. 류진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그거…!”
신해범이 툭 내뱉었다.
“왕자님의 편의를 위해서야.”
“그걸 어디서….”
“어디서 구했느냐고?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나.”
신해범은 권세혁이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권세혁의 얼굴 근육이 풀리기 시작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꿈길을 헤매는 사람 같았다. 류진은 비닐봉지를 움켜잡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건 뭐지? 먹을 거?”
“차로 끓여 먹으려고… 샀습니다.”
“대마 차?”
“마가목 열맵니다!”
신해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건강에 좋은 겁니다.”
찌푸린 얼굴이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정 이병, 아직 어린 나이에 건강 관리가 철저하군. 좋은 자세야. 현장에서 총 맞지 않으면 폐암으로 관뚜껑 닫을 놈들하고는 수준이 달라.”
“…….”
“어떤 맛일지 궁금하군. 기대하고 있겠네.”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고.”
“그걸 당신, 대장님이 어떻게 압니까?!”
“기 소령한테는 줄 거잖아.”
류진이 움찔했다.
“제가 왜….”
“왜는. 자네 기 소령 좋아하잖아.”
“예?!”
“기 소령 앞에서는 표정 풀리고, 목소리도 바뀌고. 나한테 하는 거랑은 천지 차이더군.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지.”
“아닙니다, 그런 거…!”
류진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기우희에게 폐를 끼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성재경에게도 미안하고.
성재경?
류진은 신해범을 쏘아보았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지 알겠다. 이곳에서 만든 얼마 안 되는 인간관계마저 박살 내려는 속셈이었다.
휘둘리면 끝장이다.
그렇다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간, 감히 내 말을 무시하느냐며 권세혁이 보지 않는 곳에서 두들겨 맞을 게 빤했다. 주먹으로 맞는 건 그래도 참겠는데, 그….
“뭘 봐?”
류진은 고개를 돌리고 내뱉었다.
“그 떨, 산불하고 관련 있습니까?”
“산불 아니라니까.”
“그… 아무튼 말입니다.”
“궁금해?”
신해범이 묻는 순간 무전이 들어왔다. 성재경이 복귀했다는 소식이었다.
“궁금하면 말해 줄 수 있는데.”
무전기로 돌렸던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류진은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신해범이 옆자리에 와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귀신도 아니고.”
권세혁은 대마와 수면제에 취해 잠들었다. 신해범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미는 류진의 어깨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노트북 모니터 상단의 숫자가 일곱 시 오십칠 분으로 바뀌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사복 차림의 강인우가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오래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엄승원을 찾아내고 사람들을 가로질러 곧장 다가왔다. 엄승원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만요.”
강인우는 고개만 까딱했다. 모니터 불빛에 하얗게 반사되는 엄승원의 안경알을 바라보며, 강인우는 기자들은 다들 저런지 궁금해했다. 아니면 저게 특이한 물건인가.
유미현이 천거했으니 프로 의식 없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엄승원에게는 한번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저돌적인 면이 있었다. 정보 스펙트럼도 넓고.
그러나 장점만큼 흠도 있는 남자였다. 목소리와 표정에 감정이 묻어났다. 그렇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정의감이 있는 건 좋은데 진실이 반드시 통한다고 믿으면 곤란했다. 어릴 때는 이해하지만, 저 나이 먹어서도 정의니 진실이니 하면 현실 감각이 없는 거였다.
마침내 엄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한 모금 삼킨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맛없네.”
“제게 서운하십니까?”
어떤 일을 진행할 경우, 직진해야 할 때가 있고 우회해야 할 때가 있었다. 오늘은 전자였다. 엄승원이 컵을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이제는 감정이 정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정류진, 정말 유 수석과는 관계없는 사람이겠지요.”
“각서라도 써 드립니까?”
엄승원이 눈을 내리깔고 턱을 만졌다.
“처음 사진 봤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기시감이라고 할까, 꼭 어디서 본 것 같더군요. 그런데 이상하잖습니까. 그 정도 외모를 실제로 봤으면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강인우는 속으로 웃었다.
엄승원이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 밑으로 노트북 모니터가 보였다. 화면에 데뷔 초 류연비의 사진이 떠 있었다.
엄승원은 자신의 눈썰미가 유난히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기자로서 예민한 감은 있었지만 죽은 지 오래된 연예인과 지금껏 존재도 모르던 생판 남의 얼굴을 그 자리에서 오버랩할 수 있을 정도의 명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매는 누가 봐도 붕어빵처럼 닮았다. 이목구비나 체형뿐만이 아니었다. 뭐랄까,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게….
“정류진 목소리가 어떻습니까?”
“예?”
“목소리 말입니다. 남자치고 높은 편입니까, 낮은 편입니까?”
강인우는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낮은 편입니다. 허스키 톤이라고 하나.”
좋게 말하면 허스키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쉰 목소리였다. 류연비의 트레이드마크도 청초한 외모와는 상반되는 성숙한 목소리였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대위님은 도시 전설 같은 거 관심 없으시죠?”
강인우가 픽 웃었다.
“예.”
“저도 믿지는 않지만, 흥미는 있습니다.”
엄승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상이 아무리 그의 흔적을 지우고 은폐하려고 해도, 아직도 남아 있는 곽의 지지자들은 살아생전 류연비가 가졌던 화제성을 여전히 써먹었다. 연관 검색어, 링크, 초성, 출처가 불분명한 온갖 루머들. 사실 죽은 건 류연비가 아니라 그의 남동생이고 류연비가 남장을 해서 동생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는 도시 전설까지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류연비의 행적을 더듬으며 알아낸 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류연우의 인생이 아주 개같았다는 사실이었다. 류연비의 사후 그의 죄를 거론하고 정부의 극단적인 조치를 찬양하는 기사들, 칼럼들, 각종 사설과 자아 성찰에 가까운 선언문들.
류연우의 신상과 사생활은 여지없이 노출되었고, 수많은 네티즌에게 능욕당했다. 성희롱과 강간살해 협박이 주를 이룬 가운데 지역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타이틀이 자극적이었다. 18세 고교생 A군, 또래 남학생들에 집단 폭행… 연예인 스캔들로 인한 보복성 행위로 확인.
엄승원은 홀린 듯 클릭했다. 연관 기사들이 계속 떴다. 호칭과 정황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엄승원은 이 사건의 피해자가 류연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역, 나이, 연예인 스캔들로 인한 보복성 행위라는 것까지 모든 요소가 그와 일치했다.
강인우가 그를 왜 신해범의 ‘출세 도구’로 지목했는지 알 것 같았다.
“후우….”
엄승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자 두툼한 볼살이 밀려나왔다. 강인우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표정 관리가 잘 안되었던 모양이다. 강인우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엄승원이 한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힙니다. 이게 한 사람이 감당 가능한 일들입니까?”
“주관적인 질문도 하시는군요.”
기자답지 않은 질문이라는 말을 돌려서 했다. 주관적 의견의 다른 이름은 감정이었다.
“마음 굳게 잡으셔야 합니다. 수석께서는 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엄승원이 대꾸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신해범에게 접근하길 원했을 뿐입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취재를 하면서 누군가를 고의로 속인 적이 없습니다.”
“기록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엄승원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강인우가 말을 이었다.
“이것도 다,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
“출신 성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성격이 좋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출신 성분이 좋을수록 씀씀이가 넉넉하고 성품이 너그럽답니다. 타인의 사소한 실수를 부드럽게 넘어갈 줄도 알고요. 선와 악의 경계도 뚜렷하죠. 왜겠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짓은 남에게 떠넘기니까 그럴 수 있는 거죠.”
“…….”
“지킬 수 있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강인우의 한숨에는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저라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남의 치부를 일부러 들춰내는 짓은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의무가 대체 뭡니까?”
“진실을 밝히는 일. 기자님의 직업 그 자체가 아닙니까.”
엄승원은 노트북을 덮었다. 항상 메고 다니는 백팩에 챙겨 넣었다. 무선 마우스는 가방 앞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엄승원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을 때, 그의 손가락에는 성인 남자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이동식 디스크가 들려 있었다.
엄승원은 그걸 강인우에게 건넸다.
“뭡니까?”
“제가 최금호에 대해서 알아낸 건 그게 답니다.”
“직접 찾아뵙지 않으시고요?”
“대위님 말씀이 맞습니다. 높은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저분한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요. 그리고 자기 손에는 더러운 걸 묻히지 않고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치들은, 그 누군가가 요구를 들어주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돌려 버립니다.”
허.
강인우의 목 안에서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손을 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떼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알아주시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하는 수 없지요.”
엄승원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안경을 벗어 콧잔등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그는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강인우는 엄승원의 살찐 턱이 바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내 엄승원이 안경을 썼다.
“더 조사하길 원하신다면 시늉이야 내겠지만, 수확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전달 드리겠습니다.”
“정류진 건에 대해서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결정하신 것 아닙니까?”
“조금만.”
엄승원이 말했다.
“조금만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기자님.”
강인우는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엄승원이 숨을 들이켰다.
“수석께서는 교양과 인내심이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현장 사람입니다. 목숨을 최전방에 놓아두고 일하는 사람은 망설이는 걸 싫어합니다. 망설이는 사이에 끝장나는 경우를 많이 봤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정류진 일은, 수석님이 아니라 저와 기자님 사이의 비즈니스입니다.”
이제 엄승원은 땀을 뻘뻘 흘려 댔다. 평소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도 꺼내지 못했다. 강인우는 엄승원과 시선을 맞췄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차분하지만 무자비하고, 신중하지만 자신감을 잃지 않는 모습이 중요했다.
헌병대 특수사 신참 시절, 강인우는 주어진 업무 외에도 여러 과제를 수행했다. 사수가 시킨 일 가운데 하나는 범죄자를 심문하는 자기 모습을 촬영하라는 것이었다. 심문이 끝나면 동영상을 함께 확인했고, 심문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를 잡아냈다. 괜찮지만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완벽을 강조하는 탓에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강인우는 사수가 출신 성분의 벽에 부딪쳐 옷을 벗기 전까지 그의 옆을 지켰다.
“비즈니스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제안을 하고 기다리는 겁니다.”
강인우는 손바닥으로 자신과 엄승원을 번갈아 한 번씩 가리켰다.
“저는 제안을 했고, 기자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끝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침묵은 거절이고, 거절하면 다음 거래는 없습니다.”
엄승원이라면 흔들릴 터였다. 숙원 사업이나 다름없는 신해범 단독 인터뷰가 코앞에 있었다.
“내일.”
엄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내일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시일을 명시해 주는 건 호조였다.
“알겠습니다.”
강인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동식 디스크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엄승원이 커다란 백팩을 둘러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씨근덕거리는 모습이 성난 불곰 같았다.
엄승원은 곧장 귀가하지 않았다. 역전의 일식집에서 매운 볶음우동을 한 그릇 시켜 먹었다. 평소 매운 음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속이 답답할 때 맵고 짜고 뜨거운 뭔가를 먹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
가게에는 사람이 없었다. 철혈일성이 집권한 이후 줄곧 불경기였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서민들의 가계 수입은 제자리였다. 공무원을 선발하는 신룡문 공개 채용의 경쟁률은 올해로 백 명 대를 돌파했다. 백 명. 엄승원은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 생각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경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몇 대째 이어 왔다는 자영업이 줄줄이 망해 나가고, 땅과 건물, 집과 차의 가격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직할시와 경제특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갔다. 폭행, 절도, 마약, 인신매매가 판을 치고 깡패들이 설쳐 댔다.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는데, 가진 자들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더 높은 성을 쌓고 그들만의 리그에 몰두했다.
엄승원은 맥주를 계속 주문했다. 간단하게 목만 축이려던 것이 어느새 만취 상태가 되었다. 그는 달아오른 얼굴로 값을 치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빈익빈 부익부가 극에 달한 세상, 차라리 전쟁이나 터져 버려라!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엄승원은 가방을 고쳐 멨다. 취한 와중에도 밥줄은 챙기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는 비교적 술이 센 편이었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술자리에 주야장천 불려 다닌 덕이었다.
엄승원의 집은 4층짜리 맨션이었다. 지은 지 20년은 족히 넘은 건물이었다. 치안도 나쁘고, 근린 시설도 없고, 전철역도 버스 정류장도 먼 이 빌어먹을 맨션이 엄승원의 월급 절반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며 터덜터덜 움직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을 간판 불빛에 의지해 걸었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엄승원은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컸던지라 좁은 길에서는 먼저 피하는 습관이 들었다.
“아!”
“아,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엄승원은 황급히 사과했다. 여자와 어깨를 부딪치다니, 자기답지 않은 짓을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
그는 행인이 지나간 뒤에도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마침내 사과를 멈추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여자가 불쑥 엄승원을 불렀다.
“아저씨! 이거 떨어뜨렸는데.”
“예?”
여자가 다가왔다. 미용실 특유의 약품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이거 떨어뜨렸다고.”
“아… 아!”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던 엄승원이 아차, 했다. 그는 습관처럼 가방을 고쳐 메며 행인에게 뛰어갔다. 그의 손에는 엄승원의 얇디얇은 가죽 지갑이 들려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엄승원이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바로 지갑을 돌려주지 않았다. 제멋대로 지갑을 연 여자가 떠보듯이 말했다.
“아저씨 기자야?”
“예?”
“여기 써 있는데.”
지갑에 항상 끼워 두고 다니는 명함이었다. 지금 쓰는 것은 아니었다. 모서리가 닳고 노랗게 바래 버린 명함은 오래전 엄승원이 처음으로 기자 직함을 달았을 때 가진 생애 첫 명함이었다. 그걸 왜 여태 가지고 다니느냐면, 글쎄.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
엄승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감사….”
감사하니 이제 돌려 달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엄승원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상대방의 어깨가 움직인다고 느낀 순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숨이 컥 막히고,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몸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기분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엄승원의 입매가 힘없이 풀어졌다. 그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여자가 몸을 굽혀 앉았다.
“감사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손이 다가왔다.
“어… 으….”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엄승원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피려 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지 마. 그냥 푹 자요.”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엄승원의 뒤통수가 땅바닥에 닿았다.
시야가 암전됐다.
***
눈앞에서 붉은 사이렌이 깜박거렸다.
권세혁은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그러쥐었다.
열에 들떠서 꿈을 꾸었다. 길고 그리운 꿈이었다. 장진에서 보낸 어린 시절. 아버지와는 떨어져 살았지만, 아버지보다 더 든든한 외조부가 있어서 괜찮았다.
당시 권세혁의 일과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씻은 뒤 실내 무도장으로 갔다. 외조부가 붙여 준 사범은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두 시간에 걸친 훈련과 명상을 마치고 무도장을 나서면 외조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두현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는 말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양이 떠오르는 이른 아침 어린 장손을 자신의 군용 트럭 조수석에 태우고 해안가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탁 트인 해안 도로는 권세혁의 등굣길이기도 했지만, 장두현이 이 일과를 반드시 지키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장손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이 땅은 너의 것이다. 저 바다가 너의 무대다.
권세혁은 일찍 일어나는 일을 힘들어하지 않았다. 워낙에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밴 덕이었다. 무엇보다 권세혁은 장두현의 검고 큰 군용 트럭, 바퀴와 마후라를 개조하고 문짝에는 적토마를 그려 넣은 악트로스 아머드를 좋아했다. 장두현은 권세혁이 높은 좌석에 어른의 도움 없이 올라탈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장두현은 쿠바산 시가를 피웠다. 콧등에 보잉 선글라스를 얹고, 열린 차창에 팔꿈치를 걸쳤다. 권세혁은 바람에 흩날리는 외조부의 백발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 너머 태양이 떠올랐다.
지평선에 걸린 태양, 물결치는 옥빛 바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권세혁은 외조부를 좋아했다. 세상에서 무서운 게 없는 사내였다. 원한다면 뭐든지 손에 넣었다. 여자와 아이에게는 상냥하고, 부하들에게는 엄격했다. 권세혁은 혈기 왕성한 탕아와 점잖은 노신사가 공존하는 외조부의 얼굴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장면이 바뀌었다.
곰팡이 핀 직사각형 천장이 보였다. 권세혁은 눈을 끔벅끔벅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로 오십, 세로 삼십. 수맥이 흐르는 무허가 지하 벙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천장 문이 열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빛이 파고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날렸다. 지퍼 백 뭉치가 날아들었다. 입구를 단단하게 밀봉한 지퍼 백은 계단에 부딪쳤고, 때론 곧장 바닥으로 떨어져도 터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유통 기한이 아슬아슬했으며 심지어 먹다 남은 음식이었다.
잇자국이 남아있는 크림빵, 찢어진 김이 덕지덕지 붙은 삼각김밥. 이따금 형광색 머리 고무줄로 입구를 봉한 스낵 봉지도 있었다. 남은 양은 어린아이 주먹만큼. 편의점 폐기 음식 중에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들이 권세혁의 몫이었다.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자기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 살인지 헷갈릴 무렵이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소름 끼치는 고요함, 구조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 욕구가 중첩된 결과였다.
권세혁은 이용할 대상을 물색했다. 한 조각의 호의라도 괜찮았다. 자신이 순종적이고 예절 바른 아이라는 사실을 어필했다. 동시에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도 보여 주어야 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외로움을 달랠 아주 약간의 소통과 신선한 공기뿐이라고.
하루에 한 번, 천장의 문이 열리는 때를 노렸다. 지퍼 백과 요강이 한꺼번에 내려오던 그때. 권세혁은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비웃음이 날아왔다. 맹장이라도 터졌느냐고 비웃던 그 목소리.
권세혁은 소화제가 필요하다고 애원했다. 외조부가 곁에 두고 먹는 약들 중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항구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답게 집안에는 외제 생필품이 많았다. 고용인들에게 지급하는 물품도 죄다 외제일 만큼.
한 남자가 내려왔다. 양배추 환약을 건네주는 손에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권세혁은 본능적으로 그가 혓바닥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느꼈던 냄새와 꼭 같았다. 알싸한 에탄올 냄새. 역한 요오드 냄새.
권세혁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함께 있어 달라고 빌었다. 몸을 덜덜 떠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벙커 안은 추웠다. 곰팡이 핀 밀폐된 공간에서 아프지 않은 게 이상했다. 권세혁은 재차 애원했다.
위로 데려다 달라고. 잠깐이면 된다고.
세 차례의 애원 끝에 찰나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권세혁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느꼈다.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고, 출입구가 어딘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는지는 소독약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까만 천으로 눈을 가렸을 때 깨달았다. 권세혁은 자기도 모르게 저항했다. 귓가에서 쯧,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명치에 킥이 꽂혔다. 권세혁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생각했다.
착한 아이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이었고, 지금 자신이 그 기회를 날려 버렸다는 것을.
악취가 풍기는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혔다. 일어나려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발이 뒤통수를 짓눌러 왔다.
‘핥아.’
놈이 말했다. 숨이 막혔다. 시키는 대로 했다. 착한 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의식이 물웅덩이 너머로 사라졌다.
장면이 바뀌었다.
흔들리는 진압 차량 안이었다. 권세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서 벗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흐릿한 시야에 천장이 보였다. 흐릿했다. 신해범이 건네준 대마가 떠올랐다. 약 기운이 기관지와 혈관 속에 자욱했다. 시야와 의식이 또렷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권세혁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실핏줄이 도드라진 흰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혼자는 싫다.
권세혁의 손바닥이 진압 차량 내벽을 더듬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다른 걸 만지고 싶었다. 보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것.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는 것. 류진이 형.
그러나 권세혁의 손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신음했다. 대마 성분으로 극대화된 감각이 미친 듯이 갈구했다. 단것, 마실 것, 바람, 음악. 하지만 그 무엇보다 필요한 건 류진이었다. 그만 있으면 나머지는 없어도 괜찮았다.
권세혁은 뻣뻣한 목을 힘겹게 움직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창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권세혁의 부릅뜬 시야에, 류진의 목에 얼굴을 묻은 신해범이 들어왔다.
“…….”
입술을 벙긋거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권세혁은 자기가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해범의 귀 옆으로 류진의 얼굴이 보였다. 열에 들뜬 낯이었다. 흐트러진 앞머리와 꼭 감은 두 눈, 분홍색으로 물든 뺨. 타액으로 젖은 입술.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몸이 굳었다.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뻣뻣해졌다. 권세혁은 이것이 악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위에 눌렸다. 어지간해서는 떨쳐 낼 수 없는 지독한 악마가 찾아왔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류진의 제복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의 긴 목덜미가 드러났다. 말할 때마다 울대뼈 좌우로 조그만 우물이 파이던 가늘고 우아한 목덜미에 신해범이 입술을 묻었다.
류진이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신해범의 손이 류진의 하얀 티셔츠를 쥐었다. 옷자락을 벨트 밖으로 끄집어냈다. 류진의 두 손이 신해범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신해범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류진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류진이 목을 움츠리고 신해범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류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신해범의 크고 단단한 몸이 들썩였다. 그가 웃고 있었다.
“흐으… 아, 아아….”
류진이 몸을 비틀었다. 신해범의 손이 차가운 모양이었다. 그는 버르적대는 류진의 다리를 잡아 제 허리에 감았다.
권세혁은 숨을 들이켰다. 부릅뜬 눈에 실핏줄이 두드러졌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깨워 줘. 찬물을 끼얹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든 뭐든지 좋아. 이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줘.
흰 티셔츠가 말려 올라갔다. 류진의 가슴팍을 짚은 신해범의 손이 보였다.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은 푸른색이었다. 신해범이 류진의 입에 티셔츠 자락을 물렸다. 류진의 등이 벽에 닿았다. 신해범의 두 손이 류진의 뺨을 감싸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옷자락을 입에 문 류진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다.
신해범이 몸을 숙였다. 그는 입술로 류진의 몸을 훑어 내렸다. 목, 쇄골,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가슴. 단단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몇 번이나 핥고 빨고 깨물었다. 권세혁은 이를 악물었다. 신해범 앞에 다리를 벌린 채 가슴을 빨리며 느끼는 류진의 얼굴이 보였다. 달빛이 류진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두 뺨의 홍조가 더해졌다.
젖꼭지 빠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해범이 고개를 들자 류진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희고 마른 몸에 타액이 흥건했다. 달빛에 반사된 피부가 먹음직스럽게 번들거렸다.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류진의 손이 신해범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가는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으….”
신해범의 제복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일순 주먹을 그러쥐었다. 신해범이 류진의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흐… 읏, 흐윽. 흡!”
권세혁은 알았다. 지금 신해범이 무엇을 만지고, 주무르는지.
류진은 신해범의 손에 성기를 내맡긴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느낌이 샜다. 신해범은 멈추지 않았다. 류진의 성기를 흔들며 사정을 유도하던 그가 별안간 류진의 귀를 물었다.
“아!”
마른 몸이 펄떡거렸다. 흐느낌이 높아졌다. 살덩이 씹는 소리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권세혁은 신해범이 거칠게 류진의 바지를 끌어 내리고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 모습을 보았다. 엉덩이를 받친 채 볼깃살을 주무르는 커다란 손. 류진은 신해범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아, 아으, 읏… 아!”
류진이 고개를 젖히자 쿵 소리가 났다. 벽에 뒤통수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신해범은 개의치 않고 손을 놀렸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권세혁은 알았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사이의 은밀한 구멍.
신해범의 허리를 감싼 류진의 다리에 마른 근육이 도드라졌다. 류진은 처음부터 군화를 신고 있지 않았다. 검은 양말로 감싸인 발가락이 한껏 움츠러든 모습이 보였다.
권세혁의 충혈된 눈이 젖었다.
마른 다리가 신해범의 허리를 휘감았다. 의지할 데는 그뿐이라는 듯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손가락이 신해범의 등을 긁었다. 류진의 손바닥 안에서 신해범의 옷이 구겨졌다.
신해범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류진의 엉덩이를 한참 주무르던 손이 팬티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제복 셔츠 단추를 잡아 뜯었다. 구겨진 옷가지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신해범은 제복 안에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렸다. 꽉 짜인 근육으로 다져진 두 팔이었다. 붉어진 얼굴의 류진이 검은 티셔츠를 걷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신해범의 맨등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같았다.
떡 벌어진 어깨가 위아래로 거칠게 오르내렸다. 그를 올려다보던 류진이 몸을 숙였다. 류진은 신해범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엿보였다. 신해범의 큰 손이 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권세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악마 중에서도 극악인 몽마(夢魔)였다. 권세혁은 왜 이 꿈의 주인공이 신해범과 류진인지 알았다. 한쪽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다른 쪽은 내가 가지고 싶은 사람.
차가 방향을 바꾸었다. 권세혁의 눈앞으로 텅 빈 바셀린 통이 굴러왔다. 두 사람의 자세도 바뀌었다.
신해범이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벌린 류진이 그의 위에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신해범의 두 손에서 뭉개지는 엉덩이가 애처로웠다. 두 발을 감싼 양말만 제외하면, 류진은 완전히 알몸이었다. 하얗고 길고 마른 몸뚱이가 신해범의 위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발갛게 달아올랐다.
굵은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위협적으로 끄떡거렸다. 류진의 목을 쓰다듬으며 신해범이 재촉했다. 류진이 고개를 주억였다. 땀에 젖은 조그만 얼굴. 성관계를 버거워하지만 열락에 젖어 있는 얼굴이었다.
“으아, 아!”
신해범이 손을 움직였다. 녹은 기름 덩어리를 잔뜩 발라 미끄러워진 손가락이 류진의 그곳을 파고들었다. 넣었다 뺐다 할 때마다 찌걱대는 소리가 났다.
류진이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꼭 감은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더니 붉게 달아오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으… 아아…!”
신해범은 손을 빠르게 놀렸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입구를 헤치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신해범의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구멍은 음식을 먹어 치우는 입처럼 보였다. 빠끔거리며 손가락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신해범이 웃자, 그의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아악! 앗!”
류진이 어쩔 줄 모르고 퍼덕거렸다. 신해범은 조각 같은 팔로 류진의 마른 등을 휘감았다. 권세혁은 눈을 치떴다. 한껏 발기해 위협적인,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부피감을 자랑하는 남근이 류진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물감에 빠끔거리는 구멍을 크기로 젖혀 벌렸다. 힘으로 밀어 넣었다.
“우… 우아… 아파, 대장님, 아파…!”
“응. 응. 괜찮아… 괜찮아.”
마른 등에 불거진 견갑골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엉엉 우는 류진의 목덜미를 받치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신해범은 아직 다 들어가지 않은 성기를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그만, 그만. 안 돼. 안 들어… 아, 안 들어가…!”
류진의 손이 신해범의 허벅지를 밀었다. 그의 위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신해범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입을 벌렸다. 뾰족한 송곳니로 류진의 목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이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송곳니라도 짐승의 것만큼 예리하지는 않을진대, 한 번에 피부가 찢어졌다. 권세혁의 눈꺼풀 밖으로 눈물이 흘러넘쳤다. 하지 마, 그만해, 그만해. 류진이 형을 아프게 하지 마.
그를 죽이지 마!
류진의 저항이 멈췄다. 그는 가냘프게 흐느끼며 신해범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악마가 곁에서 속삭였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지?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지? 잘 봐. 이게 너의 바람이야. 너의 꿈이야.
권세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에 눈물이 번졌다. 그러나 눈을 감지는 못했다. 눈물로 흔들리는 시야를 류진의 알몸이 가득 채웠다. 달빛에 빛나는 등. 크거나 작거나, 오래됐거나 비교적 최근에 생긴 상처로 빼곡한 몸.
신해범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흐느껴 우는 류진은 분명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신해범의 박자에 맞추려고 애썼다. 연신 잠깐만, 천천히, 그만, 아파, 하며 울음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류진은 네 가지 말밖에는 하지 못하게 프로그래밍된 로봇 같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유괴 사건 이후 외조부가 비밀리에 기술자들을 모아 진행했던 경호 로봇 같은 거였다면. 아무리 사람처럼 생기고,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교감할 수 있어도….
위협적일 정도로 발기한 성기가 좁은 구멍으로 파고들었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연이어 퍼억 소리를 내며 처박히는 모습이 생경했다. 신해범이 움직일 때마다 류진의 비명이 차체를 흔들었다.
핏줄이 돋아난 성기 끝에 쿠퍼액이 맺혔다. 방울져 떨어지는 액체가 체온으로 녹은 바셀린과 섞여 꿀처럼 떨어졌다. 움직이기가 한층 수월해졌지만 류진은 이미 지쳤다. 두 팔이 늘어지고, 두 다리가 힘없이 죽 벌어졌다.
신해범의 품 안에서 류진은 인형처럼 흔들렸다. 난폭한 추삽질이 이어졌다. 권세혁의 시선은 성난 남근이 들락거리는 구멍에 꽂혔다. 저항 의지를 잃고 완전히 열려 버린 구멍이 보였다. 신해범의 성기가 꽂힐 때마다 녹은 바셀린이 피슉 소리를 내며 튀었다.
“아아… 아….”
권세혁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성기가 빠져나가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수축하고 이내 주욱 벌어지며 성난 살덩이를 삼키는 구멍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해범의 두 손이 류진의 골반을 움켜잡았다. 성기를 삼키고 있는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강하게 내리꽂았다.
“흐읍! 아악!”
단숨에 뿌리까지 삼켜졌다. 류진은 테이저건에 맞은 새끼 노루처럼 파르르 떨었다. 푹, 푸욱. 퍼억. 무자비하게 벌어진 구멍은 두 번 다시 원래 형태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류진이 엉엉 울었다.
“아, 파… 싫어, 망가져. 망가져!”
울음소리에 발음이 문드러졌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쉬이… 괜찮아.”
신해범이 허리를 흔들며 류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더 이상 벌어지지 못할 정도로 팽창한 구멍에 집게손가락을 갖다 댔다. 류진이 기겁을 하고 울부짖었다. 싫어, 안 돼요. 안 돼요 대장님. 안 돼.
신해범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류진의 귓불을 핥으면서 속삭였다. 두려움에 떠는 몸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손가락은 여전히 성기를 머금은 입구를 맴돌았다. 붉은 속살을 톡톡 건드리고, 쓸고. 정말 안 되느냐는 듯 손끝으로 지분거려 보기도 하고.
“정말 안 돼? 응… 안 되겠어?”
“안 돼… 싫어요. 아파요. 안 돼요….”
“아쉽다.”
신해범은 자꾸만 졸랐다. 류진의 턱을 잡아 정면에 고정시키고 시선을 맞췄다. 권세혁은 지금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요. 대장님, 하지 마….”
류진의 가는 팔이 신해범의 목을 감았다. 그의 뺨에 입술을 맞추며 애교를 부렸다. 성기를 품은 채 허리를 흔들어 보였다. 신해범의 거친 움직임에 비하면 서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웠다. 구멍을 지분대던 손가락이 물러나고,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 올린 뒤 관자놀이의 흉터를 쓰다듬을 만큼. 신해범이 한탄했다.
“날 미치게 만들 셈이지?”
성기의 출입이 격해졌다. 류진은 이제 자의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른 몸을 구속한 신해범이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아흐윽! 아아! 아아아… 악!”
류진의 몸이 뻣뻣해졌다. 엉덩이 근육이 한껏 수축했다. 신해범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며 류진의 목을 물어뜯었다. 새로운 상처에서 피가 솟았다. 그는 상처에서 솟는 피를 전부 핥아 먹었다.
푹, 푸욱. 딱딱한 남근이 마찰로 혹사당한 내벽을 거칠게 휘저었다.
“아… 흐….”
신해범은 류진의 사지가 전부 풀려 몸이 완전히 늘어진 뒤에야 그의 안에 사정했다. 마른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신해범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네 안에 쏟아붓겠다는 기세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만. 그만.”
류진이 울었다. 꺾인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신해범의 목에 얼굴을 묻고 다 꺼져 가는 숨을 내쉬었다.
류진은 정말 죽을 것처럼 보였다. 몸 안에 신해범의 정액을 가득 담은 채.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권세혁의 목구멍에서 피거품이 끓었다.
신해범은 오래 걸렸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주 조금씩 구멍에서 좆을 빼며 사정했다. 울고 있는 류진이 조금이라도 허리를 움직여 빨리 빼내려고 하면 골반을 움켜쥐고 도로 앉혔다.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몸속, 내벽의 세포까지 범하려는 사람 같았다.
신해범이 류진의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붉은 혀가 꼿꼿하게 솟은 유두를 굴렸다. 사탕을 빨아 먹는 것처럼 보였다. 류진의 유두를 한참 입 안에서 굴리고 놀던 신해범이 입을 벌려 유륜 전체를 입술로 머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퉁퉁 부은 젖꼭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흐읏….”
류진이 신음했다. 신해범의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성기가 반쯤 빠져나온 구멍 주위를 더듬어 훑었다. 그가 류진의 안에 싸지른 정액은 볼깃살을 푹 적시고, 경련하는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으로 자기 정액을 훔친 신해범은 그것을 류진의 가슴에 펴 발랐다. 가혹하게 혹사당한 유두를 바라보며 그가 웃었다.
“예쁘군.”
“으응.”
“좋다고 말해 봐.”
“으응….”
“어서.”
“조… 좋아.”
“다시.”
“좋아요….”
“똑바로. 끝까지.”
“좋아요… 대장님.”
권세혁은 눈을 감았다. 그의 귀 옆에서 악마가 키들거렸다.
<5권에 계속>